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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로마서 강해

♣로마서강해 )42강. 인간의 실존 (롬 7:14-25)

by coroa 2023. 3. 7.

롬 7:14-25= “우리가 율법은 신령(神靈)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1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창세기 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42강. 인간의 실존 (롬 7:14-25)

롬 7:14-25= “우리가 율법은 신령(神靈)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1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정낙원 목사

 

오늘 본문을 보면 율법은 신령한 것이라고 합니다.

신령하다는 말은 영적인 것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란 말이에요.

 

하나님께 속한 것을 죄인에게 주었어요.

이건 죄인이 담아내지를 못해요.

왜냐하면! 인간은 육신에 속하였기 때문입니다.

육신이란? 신령의 반대를 말해요.

 

그러니 애당초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초부터 율법을 주실 때 지킴에 목적이 있지 않았어요.

다름을 알려주시려고 주신 거에요.

 

무슨 다름인가요?

넌 인간이고 난 하나님이라는 거에요.

넌 땅에 속한 자이고 난 하늘에 속한 자라는 겁니다.

넌 죄 아래 있고 난 의에 속하였다고 합니다.

넌 피조물이고 난 창조주라고 해요.

 

그러니 네 꼬라지를 알라는 겁니다.

피조물 주제에 창조주 행세를 하고 있다고 고발하고 있는 거에요.

죄인 주제에 의인인 척 한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인간들의 자기 주제를 알게 하시려고 율법을 주셨어요.

 

우리는 율법을 통해서 자기 주제를 알아야 해요.

 

아! 나는 의인이 아니고 죄인이구나!

아! 나는 의로운 자가 아니고 의를 입어야 하는 자이구나!

아! 나는 하나님이 아니고 피조물이구나!

아! 나는 내 힘으로 율법을 지키는 자가 아니고 율법을 지킬 분이 따로 계시는구나! 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율법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하고!

또한 율법은 약속하신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있는 것이라고 하였던 겁니다.

그러니 율법은 약속하신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것을 알려주시려고 주신 것이에요.

그런데 인간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지켜야 하는 것인 줄 착각을 한 것입니다.

 

율법은 영에 속한 것이므로 영에 속한 분만 지킬 수가 있어요.

 

알다시피 인간은 육신에 속하였어요.

그러니 인간은 율법을 주어도 그림에 떡인 겁니다.

율법을 지킬 분이 따로 있어요.

율법을 지킬 분이 누구인가 하면 예수그리스도에요.

 

성경은 온통 그 예수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께 속한 율법을 주어서 너희가 하지 못하는 그것을 하실 분이 하늘에서 오신다고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 분이 어디서 오느냐?

하늘에서 오신다는 거에요.

어떻게 오느냐 하면 영적으로 오신다는 겁니다.

영적으로 오신다 함은 하늘에 창조의 방법으로 오신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일하심에 방법으로 오신다는 거에요.

 

그것이 바로 성령으로 잉태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의 잉태하심으로 오시게 된 것입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심이 곧 하나님께 속한 창조의 방법이에요.

그러므로 하나님께 속한 율법은 오직 창조의 방법인 성령으로 잉태되어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만이 지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율법은 하나님께 속한 영적인 것인데 인간은 육신에 속하고 죄 아래 팔렸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우리의 실존을 잘 알려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스스로를 나는 죄 아래 팔렸다고 합니다.

 

율법을 받고 보니 내가 육신에 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왜? 내가 율법을 지킬 수가 없는가 하니 율법은 하늘에 하나님께 속한 것인데 비해서 자신은 땅의 육신에 속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율법을 통해서 나는 땅에 속한 자임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땅이란? 죄 아래를 말해요.

그래서 나는 육신에 속한 자로서 죄 아래 팔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죄 아래 팔렸다는 말은 죄의 종(노예)이란 말입니다.

 

죄의 종이라는 말은 곧 죄에게 종속(從屬)이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면 죄의 소욕을 벗어나지를 못해요.

인간은 죄의 요구를 거부 할 수 없는 처지란 말입니다.

 

죄인은 싫어! 나 죄 안 지을 거야! 가 되지 않는단 말입니다.

죄를 필연적으로 지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죄인인 거에요.

그러므로 인간들에게 있어 죄를 안 지을 거야! 는 마음뿐이고 실제 몸은 죄를 짓게 되어 있어요.

이게 우리 인간의 실존이에요.

 

죄가 뭔가요?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싶어도 순종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싶은데 실제로는 그 반대로 불순종하게 되더란 말입니다.

 

이건 우리의 자존심을 엄청 상하게 하는 말씀이에요.

인간의 가능성과 가치를 완전히 무시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스스로를 가치 있다고 여겨요.

그래서 만물의 영장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을 일컬어 만물의 영장은 커녕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고 합니다.

 

이사야 1장을 보세요.

 

사 1:1-4=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라 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4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이상을 보았어요.

지금 식으로 말하면 교회와 성도들의 모습을 보았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들이 어떠합니까?

짐승만도 못하다고 합니다.

 

소는 자기 주인을 알고!

나귀도 자기에게 먹이를 주는 주인을 알아보지만!

성도라고 하는 자들이 자기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은 몰라본다고 합니다.

 

그래서 뭐라고 하는가요?

허물지고 행악하고 부패한 자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도 몰라보는 패은망덕한 자란 말입니다.

 

옛말에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것이 아니라고 했어요.

왜 인줄 아세요?

인간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매스컴으로 나오는 뉴스를 보세요

범죄자들이 대부분 면식범들이에요.

아는 자들이 죄를 저질러요.

 

얼마 전에 뉴스를 보니까 오고 갈 데가 없는 노숙자를 교회가 잠시 돌봐 주었는데 자기 맘에 안들 게 했다고 교회에 불을 지르고 교인들을 칼로 찌르는 사건이 발생했지요.

이게 인간이에요.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이 인간이에요.

 

이제는 사람을 함부로 도울 수도 없는 시대가 되었어요.

쉽게 남을 도울 수가 없어요.

도움을 입다가도 자기 성에 차지 않으면 적개심으로 돕는 자를 물고 가해(加害)로 되 돌려주기 때문이에요.



이처럼 인간이란? 은혜를 원수로 갚는 자들이에요. 

이건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어요.

우리에 자식들이 부모에게 그러고 있잖아요.

낳아주고 키워준 은공(恩功)은 없고 섭섭하다고 행패를 부리잖아요.

 

예수님이 인간을 독사의 새끼라고 하지요.

독사란 말은 원래 살모사를 말해요.

살모사(殺母蛇)란? 자기를 낳아준 어미를 잡아먹은 놈이란 말입니다.

 

죄인이 이래요.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배도한 자들이에요.

그러니 인간들은 살모사 새끼들인 거에요.

 

지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이라고 하는 자들에게 그러고 있어요.

에라이! 이 살모사 새끼들아!

그러고 있어요.

예수님도 유대인들에게 독사 새끼라고 했어요.

 

얼마나 배은망덕 했으면 그럴까요?

이걸 남에 이야기로 듣지 마세요.

나에게 하는 말씀으로 들어야 해요.

 

지금 하나님이 우리에게 짐승만도 못한 새끼들이라고 하고 있는 겁니다.

솔직히 우리 스스로를 달아 보세요.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삼고 있는지 알 수 있잖아요.

내가 바로 은혜를 원수로 갚는 배은망덕(背恩忘德)한 놈이에요.

 

인간은 은혜를 몰라요.

왜인줄 아세요.

인간 속에 죄가 자리 잡고 있어서 그래요.

 

죄는 법으로 일을 해요.

법은 힘의 원리로 다스려요.

이런 원리를 우리 가정에서 우리 지식들에게서 볼 수가 있어요.

 

쉽게 설명 할게요.

아이들이 자기 엄마를 가장 우습게보지요.

남에게 그렇게 합니까?

못해요.

그런데 엄마는 만만하게 보아요.

 

왜? 엄마는 만만하게 봅니까?

엄마는 늘 사랑으로 대하고 은혜로 보살펴주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남은 나를 법으로 대해요.

힘으로 대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새끼들이 자신을 법으로 대하는 남은 두려워하고 어려워해도 사랑과 은혜로 대하는 엄마는 우습게 여기는 겁니다.

남이 뭐라고 하면 찍소리도 못하면서 엄마가 뭐라고 하면 지랄을 떨잖아요.

이 모두가 그 아이 안에서 죄가 법으로 작동하기 때문이에요.

 

죄인에겐 사랑과 은혜는 만만하게 보이고 법은 커 보여요.

법 안 지키면 죽는 줄 알지만 은혜는 거부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은혜로 대하는 부모 알기를 이웃집 강아지보다 못하게 생각하는 겁니다.

오죽하면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을 다 하겠어요.

 

이처럼 죄인들은 은혜를 우습게 여기고 힘이라는 법에 굴복당해요.

이 모두가 인간들 속에는 죄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에요.

죄라는 놈은 여건만 되면 튀어 나와서 물어요.

본색을 드러낸단 말입니다.

 

우리 안에는 각양의 죄들이 숨어 있어요.

마치 쭈쭈바 속에 얼음이 가득차 있듯이 우리 안에 죄가 가득차 있어요.

우리 안에 어떤 것이 숨어 있는지 볼까요?

 

로마서 1장입니다.

 

롬 1:28-32=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 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우리 안에는 원래 하나님이 계셔야 해요.

즉 하나님을 담아 두어야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죄가 하나님을 밀어내고 악을 품고 있어요.

어떤 죄악들을 품고 있는가요?

한마디로 남을 해치는 것들이지요.

 

왜? 남을 해칩니까?

내가 살기 위해서예요.

인간은 내가 살고자 남을 죽이는 자들인 겁니다.

 

내가 살고자 남을 죽이고!

내가 소욕을 채우고자 남에 것을 빼앗고!

내가 영광 받기 위해서 남을 폄훼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는 거에요

 

내가 살고자 하나님을 밀어 냈는데 결국 죽음으로 치닫더라고 증거하고 있어요.

이게 죄인의 어리석음이고 한계에요.

자신이 살고자 죄를 지었는데 결국은 죽음으로 끝나더라는 겁니다.

이게 죄인이에요.

 

그런데 인간들이 자기 안에 들어 있는 죄를 감추고 살아요.

가면을 쓰고 산단 말입니다.

속은 악마인데 겉으론 천사처럼 하고 있어요.

 

미소 뒤에 흉악한 칼을 품고 있어요.

입으로는 평화를 외치지만 속으로는 전쟁을 준비하고 있고!

겉으로는 사랑을 외치지만 속으로는 시기와 질투와 미움을 품고 있어요.

자기에게 손해가 된다고 하면 그 속에 숨어 있는 것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와요.

 

이걸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고 합니다.

가인이 그랬어요.

죄가 가인 안에 숨어 있다가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 받고 자기 제사를 거부하자 아벨에 대한 미움과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이 튀어 나와서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아벨을 죽인 것입니다.

이걸 죄가 기회를 타서 나를 사로잡아 온다고 해요.

 

인간에게 있어 나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모두가 징벌 대상이에요.

그것이 부모이든 형제이든 이웃이든 상관없이 모두가 응징 대상이에요.

나는 나를 위하여 사는 자이지 남을 위하여 사는 자가 아니에요.

내가 신이고 내가 왕이에요.

나 이외 다른 신은 없어요.

 

인간들에겐 영원한 동지도 없고 영원한 적도 없어요.

이걸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정치판이에요.

정치하는 자들이 바로 짐승이에요.

자기 밥그릇을 위하여 언제든지 동지가 되기도 하고 적이 되기도 해요.

 

그래서 성경은 품 안에 있는 아내도 믿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이건 인간은 믿을 것이 못 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죄가 그를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언제 죄가 튀어 나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죄는 조건만 맞으면 언제든지 튀어 나와요.

사사기에 보면 이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는 대목이 있어요.

 

사사기 3장을 봅시다.

 

삿 3:1-7= “여호와께서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2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하사 남겨 두신 열국은 3 블레셋 다섯 방백과 가나안 모든 사람과 시돈 사람과 바알헤르몬 산에서부터 하맛 어구까지 레바논 산에 거하는 히위 사람이라 4 남겨두신 이 열국으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여호와께서 모세로 그들의 열조에게 명하신 명령들을 청종하나 알고자 하셨더라 5 이스라엘 자손은 “마침내”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 사이에 거하여 6 그들의 딸들을 취하여 아내를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며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 7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

 

5절을 보면 “마침내” 라는 말씀이 나오지요.

무슨 말인고 하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살다가 “마침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더라는 겁니다.

기어이 자기 본색을 드러내고 말았다고 말해주고 있는 말씀이에요.

 

“마침내” 라는 “드디어” 라는 말과 같아요.

“드디어” 숨어 있던 것을 드러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고 말았다!” 라는 말이에요.

 

우리가 흔히 누가 잘못을 저지르면 본능적으로 하는 말이 있어요.

 

니가 그러면 그렇지!

내 그럴 줄 알았어!

이게 “마침내”와 “드디어” 라는 말이에요.

 

이러한 말들은 모두가 미리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다 알고 있었는데 지금 드러냈다는 말입니다.

이는 곧 너는 원래부터 이런 인간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누가 무슨 잘못된 일을 저지르면 인간이 그러면 그렇지! 라고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 재미있는 것이 우리는 누가 악한 일을 저지르면 남들 앞에서는 비분강개 하면서도 금새 잊어버려요.

왜? 그런줄 아세요.

우리 안에 그러한 것들이 들어 있기 때문이에요.

그것이 곧 잊어버리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우리는 누가 잘못을 하면 저러면 안 되는데! 라고 하면서도 우리도 그와 동일한 짓을 하고 살아가고 있는 인간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롬 1:32절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우린 누구를 손가락질 할 자격이 없어요.

남에게 손가락질 하는 그 짓을 나도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그 여건이 안 되어서 나오지 않았을 뿐이에요.

환경만 조성 되면 언제든지 나타나요.

 

죄는 씨앗과 같아요.

씨앗을 가만히 두면 싹이 나오지 않아요.

싹이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죽은 것이 아니에요.

다만 죽은 것처럼 있다가 씩을 틔우는 조건만 성숙되면 살아서 움직여요.

흙에 떨어지면 자연적으로 싹을 틔워요.

그 본색을 드러낸단 말입니다.

 

우리 안에 죄가 그래요.

평상시에 없는 것 같지만 환경만 되면 자동적으로 나타나요.

자기 일신상에 어떤 위험이 닥치거나 손해가 되면 본능적으로 스프링처럼 튕겨 나와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방어기재가 발동해요.

 

그러므로 우리는 “마침내” “드디어” 라는 시한폭탄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언제든지 터져서 남을 해칠 수가 있어요.

우리는 걸어 다니는 살인자들이고 도적놈들이고 간음하는 자들이에요.

이게 바로 우리이고 나에요.

 

사사기 강해를 하면서 이 “마침내” 라는 말씀에 제일 은혜를 많이 받았어요.

 

내가 바로 여기에 걸려든 사람이라는 것을 고백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에요.

이건 나를 무장 해제 시키는 말씀이에요.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너를 위장하거나 감추지 않아도 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참 재미있잖아요.

하나님이 일부러 이스라엘을 시험하려고 죄 지을 요소들을 남겨 두셨다고 하잖아요.

여기서 시험이란 말은 정체를 폭로시키기 위한 말이에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스라엘의 정체를 폭로시키기 위해서 가나안 전쟁을 모르는 자들을 시험하고자 가나안 족속들을 다 쫓아 내지 않고 조금 남겨 두었다고 합니다.

조금 남겨 두었는데도 이런데 다 남겨 두었으면 어찌 될까요?

그건 말 안 해도 뻔 하겠지요.

가르쳐 알게 하신다는 말은 너희가 바로 이런 자들이라는 것을 알려주고자 한다는 말입니다.

 

어렸을 때 무슨 잘못을 하면 그것이 엄마에게 들킬까봐 전전긍긍한 적이 있지요.

숨기는 것만큼 힘든 게 없어요.

오죽하면 자수하여 광명 찾자고 하겠어요.

죄는 감추면 불안하고 들켜야 속이 시원해져요.

감추고 살면 그것이 들킬까봐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어요.

 

하나님께서 이걸 아시고 우리를 속 시원하게 까발려 주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야! 너 더 이상 위장하지 마!

널 속이지 마!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마!

그게 바로 너야!

 

요즘 “싸이”가 부른 “강남스타일” 이라는 노래가 온 세계의 각종 노래 차트에서 1위를 휩쓸고 있지요.

전 세계적으로 인기가 있다는 말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감이 가기 때문이에요. 

이 노래에서 강남은 대한민국의 최고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말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 모습이 낮과 밤이 다르다는 것을 풍자해서 노래하고 있어요.

낮에는 정숙하지만 밤이면 머리 풀고 타락한 모습으로 드러내는 곳이라고 말해주고 있어요.

밤이면 그 속에 숨어 있던 타락의 본능이 튀어 나온다는 말입니다.

 

노래 속에서 “그게 바로 너야!” 라고 하잖아요.

너가 바로 낮에는 정숙하지만 밤이면 머리 푸는 타락한 여자라는 거에요.

바로 우리들을 말하고 있어요.

 

우리가 바로 겉으론 거룩한 척, 점잖은 척 하면서도 속으로는 각양의 타락한 것을 숨기고 살아가는 자들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바로 “강남스타일” 이에요.

 

이 노래의 내용이 허세 작렬이에요.

결국 인간은 자기를 감추고 살아가는 자들이란 말입니다.

속엔 각종 음흉한 것들을 숨겨 놓고서는 겉으로는 요조숙녀처럼 행세하는 자들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을 일컬어 평토장한 무덤이라고 했어요.

무덤 속엔 더러운 시체가 썩어서 악취를 풍기는데도 겉으로는 잔디로 덮어서 감추고 있다는 말입니다.

 

누가 그랬나요.

바리새인들이 그랬어요.

우리가 바로 바리새인들이에요.

우리 안에는 시체 썩는 냄새가 가득해요.

입만 열면 나와요.

 

그런데 겉으로는 안 그런 척 한단 말이에요.

왜? 안 그런 척 할까요?

남을 속이기 위함이에요.

왜? 속이는가요?

자기 이익을 위해서예요.

 

우리 집 주변에 수변 공원이 있어요.

그런데 공원 주변에 있는 집에 큰 개가 있어요.

문에다가 “개 조심” 이라고 큰 글씨를 써 놓았어요.

 

무슨 말인가요?

이 집에는 사람을 무는 도사견이 있으니 조심하라는 말입니다.

과거 “친절한 금자씨” 라는 영화에서 사람들이 불편해 하는 것들을 손수 해결해 주던 “금자씨” 처럼 개 주인이 위험하니까 조심하라고 미리 알려주는 겁니다.

감사할 일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바로 개에요.

언제 누구를 물지 모르는 개들이에요.

하나님께서 너희는 개라고 알려주고 있는 겁니다.

너희는 언제든지 자기 유익을 위해서라면 하나님도 버리고 남도 죽이는 악당이라고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는 개가 아니무니이다 라고 숨기고 살아요.

나는 개이니 조심 하세요! 라고 하여야 함에도 도리어 나는 천사입니다! 라고 하고 있어요.

위장의 천재들이에요.

이게 바로 우리에요.

 

그래서 바울이 “인간의 실존이 이렇다!” 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어요.

 

다시 본문을 봅시다.

 

롬 7:14-25= “우리가 율법은 신령(神靈)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1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16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로마서 7장은 사도 바울 자신의 고백이에요.

그래서 “나” 라고 합니다.

바울은 지금 우리를 대신하고 있으며 또한 모든 인간을 대표로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바울의 고백 속에 우리의 고백도 함께 담아서 보아야 합니다.

 

바울이 뭐라고 하는가요?

“나는 육신에 속하였고 죄에 팔렸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한다” 고 합니다.

 

이건 나도 내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말입니다.

 

“율법이 아무리 그것이 죄라고 알려 주면 무엇하느냐!”

“나는 그걸 지킬 수가 없는데” 라는 말입니다.

자기 항복을 말하는 겁니다.

 

죄인이란? 정답을 알려 주어도 그 정답대로 살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죄인의 모습을 소경이나 앉은뱅이나 중풍병자와 같이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사람들로 상징하여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죄인은 베데스다 못가에 누워 있는 38년 된 병자와 같아요.

아무리 물이 동하면 누구든지 뛰어 들면 낫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 무얼 합니까.

물이 동해도 스스로 뛰어 들 수가 없는 몸뚱인데 말이에요.

 

이들은 모두가 마음과 몸이 따로 움직이는 자들이에요.

마음먹은 대로 몸이 따라 주지 못해요.

죄인이 이러하다는 거에요.

마음 먹은 대로 살 수가 없는 자라는 겁니다.

 

바울이 지금 이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자기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데 자기 안에 또 다른 법이 자기를 죄 아래로 사로잡아 온다고 탄식하고 있는 겁니다.

 

아! 미치겠다!

와! 돌겠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 라고 토설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그러지 말라고 해도 그 말씀에 순종 할 수가 없는 것이 인간이에요.

그러므로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역설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불순종을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명령 자체가 우리 죄를 드러내고 있는 말씀이에요.

 

우상숭배 하지마! 라는 말씀은 우리가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 자라는 말이고!

살인 하지마! 라는 말씀은 우리는 살인자라는 말이고!

도적질 하지마! 라는 말씀은 우리가 본질적으로 도적놈이란 말이고!

간음 하지마! 라는 말씀은 우린 늘 간음하고 사는 자라는 말씀이에요.

 

한마디로 우리는 이럴 수 밖에 없는 자라는 말입니다.

 

우린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우상숭배자이고!

자기 유익을 위해서 남을 해치는 살인자이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치 못하는 도적놈이고!

하나님을 떠나 세상을 사랑하는 간음하는 자들이에요.

 

죄짓지 마! 라고 하는 말씀은 우리는 늘 죄를 짓기 때문에 하는 말이에요.

죄를 안 짓게 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고!

“너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자이고”

“너는 죄 아래 팔린 몸이야!” 라는 것을 알려주고자 하는 말이에요.

 

그러니 성경을 문자적으로 받으면 안 되어요.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다가 망한 자들이 유대교에요.

율법주의자들이에요.

바리새인들이었어요.

 

율법주의자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자들이에요.

그러다 보니 율법주의자들의 신앙은 행함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가능성으로 출발하는 겁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주체로 서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 성화주의자들이 이러해요.

이들은 하나님 말씀은 당연히 지켜야 하는 것이라고 접근을 해요.

그래서 신앙의 근본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두고 있어요.

이들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거룩해져야 한다고 하고 있어요.

 

이건 자기 기능성을 두고 있는 거에요.

성경은 자기 가능성을 죄라고 하고 있는데 이들은 이걸 신앙으로 가르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성화주의는 이단이라고 하는 겁니다.

성도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원함은 있지만 그 원함대로 살지 못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들이에요.

 

만약에 성화주의자들이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기 한계를 깨닫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 나무라지 않겠어요.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 말씀 앞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놓치고 자기 가능성을 부추기고 있어요.

말씀 앞에서 자기 의 없음을 알아야 하는데 이들은 도리어 반대로 자기 의를 쌓고 있어요.

 

이건 하나님 말씀이 담고 있는 의미와 달라요.

오늘 설교를 시작하면서 말씀드렸잖아요.

율법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서 죄인은 지킬 수가 없는 것이라고 하였잖아요.

하나님 말씀은 모두가 율법적 기능을 가지고 있어요.

 

율법은 우리의 죄를 고발하고 우리의 한계를 알려주고자 주어진 것이에요.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신의 무기력함과 죄인 됨을 알고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여야합니다.

그리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게 율법 지킴이에요.

역설적이게도 말씀대로 살면 말씀을 안 지킴이 되고 말씀대로 살아갈 수 없음을 알고 항복하는 것이 말씀 지킴이 되어요.

지금 엄청 중요한 이야기를 했어요.

귀담아 놓으세요.

 

그런데 상화주의자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거룩해 져야 한다고 하고 있어요.

이건 성경의 진의(眞意)를 반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에요.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에요.

죄인이 하나님 말씀을 지키겠다고 하는 것은 이름 하여 악이고 죄에요.

 

사도바울이 지금 이 말을 하고 있는 거에요.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자라고 하잖아요.

자신은 아무리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싶다고 하여도 자기 몸뚱이가 그것을 담아 내지 못한다고 탄식하고 있잖아요.

 

마음은 원하는데 몸이 말은 안 듣더라고 합니다.

왜? 그런가 보니 우리 몸이 죄 아래 팔렸더라는 거에요.

죄가 우리 몸을 가지고 주장을 하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아니고 자기 안에 있는 죄라고 하는 겁니다.

자신은 자기 혼자인줄 알았는데 가만히 보니 자기 안에 죄라는 놈이 살고 있더란 겁니다.

그런데 이 놈이 자기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이 죄라는 놈이 자기 몸이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게 하더란 거에요.

도리어 자기가 원하는 것에 반대로 행하게 하더란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 육신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는 육신 속에는 선이 거할 수가 없다는 말이에요.

죄 아래서 난 육신은 선을 행할 수가 없다는 말이에요.

죄 아래서 난 육신은 하나님의 선을 담아 낼 수가 없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렇게 하는 것이 선이라는 것을 알지만 몸은 도리어 그 반대로 악을 행하고 있더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인의 몸으로는 선이란 그림에 떡이에요.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그 짓을 하는 것이 인간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인간의 행위를 가지고 죄라고 하지 않아요.

 

이게 또 어려운 말인데!

하나님은 인간 자체를 죄인으로 보아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행위는 죄이고, 어떤 행위는 죄가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것을 죄라고 해요.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이 발생한 선이든 악이든 죄에요.

왜냐하면! 인간 자체가 죄인이기 때문이에요.

 

그렇다고 이래도 죄고 저래도 죄인데 막 살아도 되겠네! 라고 오해하지 마세요.

이건 그건 말이 아니잖아요.

하나님이 바라보는 인간이 이런 자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인간의 행위를 가지고 죄다 아니다 를 논하는 것 자체가 틀린 겁니다.

 

로마서 3장을 봅시다.

 

롬 3:23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라고 하지요.

이 말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말이에요.

이건 인간의 어느 특정한 행동을 가지고 죄라고 정의하지 않고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만약에 인간의 어떤 특정한 행위를 가지고 죄라고 한다면 모든 사람이 다 같은 행위의 죄를 지어야 해요.

그래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라는 말이 성립이 되어요.

 

쉬운 말로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말을 가지고 생각해 봅시다.

이러한 것이 죄라고 합시다.

 

그럼 모든 사람들이 살인을 하고, 도적질을 하고, 간음을 하는 행위를 하여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라는 말이 성립이 되어요.

죄를 어떤 현상으로 국한하여 말을 한다고 하면 말이에요. 

예를 들어서 살인을 죄라고 규정을 한다면 모든 사람이 살인을 하여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라는 말이 성립이 되지요.

그렇잖아요.

 

세상은 이런 죄관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살인을 하여야 죄인으로 간주하여 옥에 가두어요.

세상은 살인을 안 한 사람은 죄인이라고 하지 않아요.

 

그러나 성경은 살인을 한 자나 안 한 자나 다 죄인이라고 합니다.

살인이라는 죄목으로 따지면 세상 사람들은 다 살인하지 않았어요.

그럼에도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라고 하고 있어요.

이는 하나님은 인간의 어떤 특정한 행위를 가지고 죄다 아니다 를 논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증거는 하나님은 인간 자체를 죄인으로 규정하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죄를 범하였으매 라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살인자도 죄인이고 살인 하지 않는 자도 죄인이에요.

 

그러니 죄를 인간의 행위 차원으로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안 되어요.

 

그럼 죄가 어떤 것인지 본문 속에 나왔어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하지요. 

죄가 뭐냐?

하나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거에요.

하나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모두가 죄에요.

 

이렇게 되면 죄 아닌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것이 됩니다.

그럼 물어야지요.

하나님 영광에 이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라고 말이에요.

 

성경이 뭐라고 하던가요.

하나님의 영광이 어디에 있다고 합니까?

예수그리스도에요.

 

예수님을 일컬어 아버지의 영광이 충만 하신 분이라고 했어요.

아버지의 은혜와 영광이 충만하다고 했어요.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것이 있어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예수만이 하나님 영광인 겁니다.

 

예수 이외는 그 어디에도 하나님 영광이 없어요.

그러므로 성경은 예수 안 믿는 것을 모두가 다 죄라고 하는 겁니다.

인간의 행실로 따지지 않고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느냐로 판단해요.

 

하나님은 예수를 믿는 사람은 인간의 행실로 죄다 아니다 판단하지 않아요.

예수 믿으면 의이고, 예수 안 믿으면 죄에요.

그러니 예수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이를 알아요.

그래서 우리 몸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리는 일을 합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리는 일을 해요.

 

자기 가치 챙기기를 하게 한단 말입니다.

자기 의 쌓기를 하게 한단 말입니다.

어떻게 자기 의를 쌓게 하는가 하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쌓게 해요.

자기 가능성을 부추긴단 말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율법으로 자기 실존을 고발하는 일을 하십니다.

어떻게 고발합니까?

이는 우리의 원대로 행하지 않고 우리가 원치 않는 것을 행함으로 고발을 합니다.

 

오늘 본문 17절을 보세요.

 

17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이것을 행한다는 말은 내가 원치 아니하는 것을 행한다 는 말이에요.

 

내가 원치 않은 것이 뭔가요?

율법이 하라고 하는 것은 안하고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누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가요?

바로 죄라는 겁니다.

이 죄가 우리 속에 거한다고 합니다.

 

죄가 어디에 있는가 하면 우리 안에 있어요.

이 놈이 숨어 있어요.

기회만 되면 불쑥 튀어 나와요.

 

내 안에 분노가 있고 미움이 있어요.

이 놈이 언제 튀어 나오는가 하면 내게 위험이 닥치거나 내 유익에 반하는 일들이 일어날 때 본능적으로 튀어나와요.

나를 방어해요.

우리 몸은 본능적으로 방어기재가 발동을 해요.

 

우리가 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갑자기 누가 끼어들기를 하거나 위험을 당하면 본능적으로 방어하고 욕이 튀어나오지요.

여러분은 안 그런가요?

전 그래요.

 

순간적으로 욕이 튀어 나와요.

분노가 내 밖으로 표출이 된단 말입니다.

이런 상태를 죄가 숨어 있다가 기회를 타서 나온다고 하는 겁니다.

 

8절 “죄가 기회를 타서 우리 안에 각양 탐심을 이룬다”

 

우리 안에 각양의 죄들이 숨어 있다가 기회만 되면 튀어 나와요.

우리 안에는 죄가 숨어 있어요.

하나님은 이 숨어 있는 죄를 끄집어내는 일을 하세요.

 

그래서 봐라!

넌 죄인이잖아! 라고 알려주는 겁니다.

이걸 최초로 가인을 통해서 보여 주셨어요.

 

창세기 4장을 봅시다.

 

창 4:7절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성경은 가인을 일컬어 악에 속한 자라고 합니다.

가인 속에 악이 가득해요.

하나님은 이 악을 꺼내는 일을 하십니다.

 

어떻게 꺼내는가 하면 가인의 뜻대로 하나님이 반응하지 않는 것으로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음으로서 가인 속에 하나님의 결정에 동의하지 못하는 그 죄를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가인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나님도 좋아하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자기 정성껏 하나님께 제사를 지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좋아하는 것이 따로 있어요.

그걸 아벨이 드린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는 거부하고 아벨의 제사만 받은 겁니다.

그러자 가인 속에 있는 죄가 튀어나오는 겁니다.

왜? 날 무시하느냐!

하나님이면 다냐! 라는 죄가 폭발해 버린 겁니다.

 

그래서 가인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이 기뻐하는 아벨을 죽여 버린 것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하나님을 죽인 것과 같아요.

가인은 아벨에게 하나님에 대한 분노를 쏟아 부은 겁니다.

이는 결국 가인 속에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죄가 들어 있다는 것을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을 보면 모든 인간이 죄를 범해서 그 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고 했어요.

 

가인 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죄가 숨어 있었어요.

이 놈이 쥐 죽은 듯이 숨어 있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가인 속에 숨어 있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그 죄를 끄집어내는 일을 하신 겁니다.

 

어떻게 하는가 하면 가인의 제사를 안 받는 식으로 하셨어요.

가인의 생각을 비켜가는 식으로 일을 하신 겁니다.

그러자 가인이 안색이 변하고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이 튀어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를 죽이는 것으로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죄는 우리 속에 거하고 있어요.

“거한다” 는 말은 살고 있다는 말이에요.

 

죄가 우리 안에 살고 있으니 우리가 바로 죄 자체인 겁니다.

우린 죄라는 폭탄이에요.

언제 터질지 몰라요.

 

조금이라도 자기에게 해(害)가 된다고 하면 폭발해요.

그럼 하나님도 죽이고, 사람도 죽여요.

누구든지 자기에게 해(害)를 준다고 하면 가차 없이 응징해요.

그래서 나타난 사건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에요.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단회적인 사건이 아니고 늘 반복하여 일어나는 사건이에요.

예수님은 우리의 정과 욕심을 죽이려고 하는데 우리는 도리어 정과 욕심을 위해서 예수를 죽이고 있어요.

이건 우리가 억제 한다고 해서 억제 되는 것이 아니에요.

본능적으로 일어나요.

 

15절을 보세요.

 

15절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이건 표준 새번역 성경으로 읽으면 더 실감이 납니다.

 

15절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나는 내가 왜? 이러는 줄을 모르겠다고 하지요.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고 하지요.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다고 하지요.

이건 내 맘을 나도 제어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인을 중풍병자라고 하는 거에요.

중풍병자는 마음 먹은 대로 몸이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에요.

죄인이 이와 같아요.

자기가 마음 먹은 대로 살아지지가 않는다는 겁니다.

 

예수 잘 믿고 싶지요.

진짜 신앙생활 잘하고 싶지요.

그런데 그게 마음과 같이 되던가요?

안 되어요.

 

그 누구도 자기 마음 먹은 대로 살아지는 인간이 없어요.

왜? 그런가 하면 죄가 우리 속에 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 라는 놈이 우리가 원하는 것으로 움직여주지 않고 원치 않는 쪽으로 움직이게 해요.

그래서 우리는 일평생 죄를 쏟아내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죄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것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는 것이에요.

한마디로 “하나님 도와주세요” 라고 하라는 겁니다.

소경 거지 바디메오 처럼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라고 해야 해요.

 

하나님은 우리의 제사를 원치 않고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원하시는 거에요.

제사란? 우리 가능성으로 나아오는 것을 말해요.

반대로 긍휼이란? 우리의 불가능성으로 나오는 것을 말해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희 가능성으로 나오지 말고 불 가능성으로 나오라고 합니다.

네 의로 나오지 말고 도리어 의 없음으로 나오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뭘 하는 것을 윈치 않고 상한 심령으로 나오길 원해요.

 

시편 51편을 봅시다.

 

시 51:17절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보세요.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하지요.

통회하는 마음이라고 하잖아요.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언제 생깁니까?

자기 맘대로 안 될 때 생기지요.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은 자기가 죄인임을 알 때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가지고 오지 말고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나와서 하나님 도와주세요! 라고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가 없습니다!

불쌍히 여겨 주세요!

거지처럼 하나님께 의(義)를 동냥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의(義)를 입혀 주세요! 라고 하라는 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최고의 신앙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이에요.

자기 가능성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긍휼을 구하는 것이에요.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자신을 개의 자리에 앉히고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얻어 먹고자하는 긍휼함을 구하는 것이에요.

 

예수님은 수로보니게 여인의 이러한 모습을 보시고 “네 믿음이 크다” 고 했어요.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긍휼을 구하는 것이 바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에요.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주의 도움을 구하고 사는 것을 말해요.

자기 행위를 의지하지 않고 예수님의 도움을 바라고 사는 것이에요.

 

로마서 7장은 바울의 탄식 장이에요.

 

탄식은 절망 속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이에요.

하나님은 우리를 절망 속으로 밀어 넣어요.

우리 뜻대로 살아지도록 하시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우리 뜻이 꺾이는 식으로 간섭을 해 가세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성도는 자기 가능성으로 나오지 않고 불 가능성으로 나와요.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나온단 말입니다.

그리하여야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게 되어요.

 

긍휼을 구한다는 말은 살려 주세요!

용서해 주세요! 라는 말입니다.

이건 내가 잘못하였다는 것을 알아야 나오는 고백입니다.

자기 한계를 분명하게 알 때 마음속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고백이에요.

 

지금 사도 바울은 그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 앞에서 자기 주제를 분명히 자각하고 있는 겁니다.

야! 내가 이런 존재이구나! 를 알고 하는 고백인 겁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서서 보니까 자신은 죄를 이길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알았어요.

하나님 말씀이 없었을 때는 자신은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하나님 말씀 앞에 서고 보니 자신은 본질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는 고백이 내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 할 수가 없는 것은 내가 아니고 내 속에 거하는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선을 행하고 싶은데!

실제로는 그 반대인 악을 행하더라는 겁니다.

왜? 그런가 보니까 자기 안에 죄가 그렇게 하더라는 겁니다.

악을 행한 것은 자기가 아니고 자기 안에 죄라고 토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이 죄의 몸에서 건져 줄 수 없느냐고 탄식을 하는 겁니다.

 

인간에게서 죄는 분리 할 수가 없어요.

인간 자체가 죄에요.

그러니 죄는 우리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이 죄라는 말입니다.

 

우리 안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겁니다.

언제 튀어 나갈까 엿보고 있는 거에요.

마치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에요.

문만 열리면 쏜살같이 뛰어 나가겠다는 겁니다.

 

이걸 본능적이라고 합니다.

본능은 지체하지 않아요.

그냥 터져 나와요.

 

미운 놈 만나면 죽이고 싶고!

좋은 것 보면 탐나고!

잘난 놈 보면 시기하고 질투가 생겨요.

 

나타난 것은 빙산의 일각처럼 한 부분이에요.

지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해요.

그러니 성도는 누가 어떤 잘못을 저지르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욕을 하면 안 되어요.

도리어 그 모습을 통해서 자기를 볼 수 있어야 해요.

 

남들처럼 겉으로 나타난 범죄 행위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자신은 그 사람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면 안 되어요.

그 사람은 겉으로 드러낸 것이고 나는 속에 감추고 있을 뿐이에요.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둘 다 똑 같아요.

 

예수님이 그러셨잖아요.

망대가 무너져서 사람들이 깔려서 죽은 것을 가지고 그들이 나쁜 짓을 해서 죽었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너희도 회개치 않으면 그들과 동일하다고 했어요.

 

이걸 죄를 지은 자와 안 지은 자로 적용해 보세요.

겉으로 드러나게 죄를 지은 자나 짓지 않은 자나 동일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누가 누구를 탓할 자격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차라리 겉으로 드러난 죄인이 더 솔직하고 속에 감추고 사는 자들이 더 악당일 수가 있어요.

왜? 그런 줄 아세요.

겉으로 드러난 사람은 자기가 죄인임을 알기 때문에 할 말이 없고 겸손해요.

그러나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속으로 감추고 있는 사람은 교만해요.

이러쿵 저러쿵 하면서 남을 판단한단 말입니다.

 

남과 차별성을 두고자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죄가 그를 장악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안에 법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남과 차별성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넌 했고!

난 안했다!

그러니까 나는 너 보다 더 선하다!

그러므로 나는 너를 정죄하고 판단하고 심판 할 수가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탕자 비유에서 맏아들처럼 말이에요.

 

이게 복음 안다고 하는 자들이 잘 빠지는 함정이에요.

제가 복음 안다고 하면서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분들을 회되게 질책하는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이에요. 

복음으로 남을 판단하고 자기 우월성을 중명하고자 하면 안 되어요.

복음은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감사하는 것이에요.

세상에!~

어떻게 나 같은 죄인이 용서를 받았느냐!

이렇게 놀라운 일이 있나! 라고 감사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그 감사함이 타인에게는 용서하고 이해하고 참아주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절대로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지 않아요.

 

복음은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자들을 위해서 도리어 용서를 빌어요.

 

복음에 실체인 예수님을 보세요.

저들이 알지 못하여 그런다고 용서 해 달라고 하잖아요.

스데반을 보세요.

초대교회 성도들을 보세요.

그 누구도 남을 정죄하고 심판하지 않았어요.

 

바울을 보세요.

자기를 핍박하는 유대인들에게 차라리 자기가 지옥에 가더라도 자기 동족들은 복음을 깨닫고 천국에 가기를 바랐어요.

이건 바울이 객기 부린 것이 아니에요.

 

자신이 용서 받은 자임을 알기 때문에 그러한 마음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바울은 예수 믿는 자들을 죽이는 일에 앞장을 선 사람이에요.

스데반을 죽일 때도 저런 놈은 죽여야 한다고 하면서 죽이라고 선동을 한 자였어요.

 

그런데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자기가 얼마나 큰 죄인이라는 것을 알았던 겁니다.

마땅히 저주 받아야 할 자가 사도 노릇을 하고 있어요.

얼마나 놀랄 일입니까?

 

그러니 누가 잘못을 하거나 복음을 모른다고 해서 악담을 할 처지가 아니란 거에요.

도리어 그들의 심정을 이해하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를 미워하고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용서는 하나님이 주신 용서를 가진 자만이 할 수가 있어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 받은 자만이 남을 용서 할 수가 있어요.

자신이 잘못 된 자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절대로 잘못한 사람을 나무랄 수가 없어요.

도리어 그를 이해하게 되고 보듬어 안게 되고 용서 하게 되어요.

 

과부 심정은 과부만이 알아요.

내가 도적질을 한 사람은 남이 도적질 한 것을 나무랄 수가 없어요.

나무라는 것은 자신은 도적질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 자들이 나무라요.

나는 그러지 않았어! 라고 정죄하고 판단합니다.

이게 바로 죄에요.

 

나는 너희와 다르다고 하는 것이 바로 죄가 기회를 타서 나를 법 아래로 사로잡아 가는 것입니다.

남에 잘못을 가지고 정죄한다는 것 자체가 법에 사로 잡혀 있다는 증거에요.

자기 안에 법이 활동을 하니까 누군가의 잘못을 가지고 법으로 정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라고 법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법 아래 있는 자는 범죄한 자나 안 한 자나 동일해요.

왜냐하면! 법 아래 있다는 그 자체가 저주이기 때문입니다.

법은 범법한 자를 위하여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남에게 법을 적용한다는 것 자체가 스스로가 나는 법 아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행동을 가지고 죄다 아니다 라고 논하는 것 자체가 법 아래 있기 때문에 죄를 범한 자나 안한 자나 동일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라고 하는 자들이에요.

 

목사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장로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집사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예수 믿는다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라고 하는 자들이에요.

 

분명히 말합니다.

목사이든 장로이든 집사이든!

예수를 믿는 사람이든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든!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어요.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죄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어요.

모두가 육신은 죄 아래 팔렸어요.

예수 믿는 자도 죄 아래 팔렸고!

예수 안 믿는 자들도 죄 아래 팔렸어요.

그러니 누가 누구를 탓할 수 없단 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본능적으로 법을 발동해서 남을 판단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 말씀이라는 율법을 주어서 입을 닫게 하신 겁니다.

율법으로 우리의 실존을 알려 주신 거에요.

 

그래서 율법으로 우리의 죄를 들추어내는 일을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죄를 끄집어낸다고 하는 겁니다.

율법이 거울처럼 우리 안을 비추는 거에요.

그래서 꽁꽁 숨어 있던 죄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이 일을 하면 나는 산 자가 아니라 죽은 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어요.

 

법이 없을 땐 자기 꼬라지를 모르니 큰 소리를 쳤는데!

막상 율법을 받고 보니 자기가 죄인이라는 꼬라지가 보이니까 큰 소리 치지 못하게 생긴 겁니다.

어이쿠~!

네 코가 석자이네!

내가 저 사람보다 더 악질이네!

세상에~!

 

그래서 주둥이를 닫게 되는 것입니다.

주둥이를 나불거린다는 것은 아직까지 빛을 받지 못하였다는 증거에요.

자기 안에 빛이 비추어지면 남 볼 겨를이 없어요.

남을 판단할 처지가 아니란 것을 알게 되어요.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입을 닫게 되고 말 수가 적어지게 되는 겁니다.

입을 닫고 말 수가 적어진다는 것은 남을 판단하는 일이 적어진단 말이에요.

하나님은 율법으로 우리 입을 닫게 하셨어요.

 

죄인을 만들어 버렸단 말입니다.

그리하여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세요.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이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게 하세요.

우리 행위에 의지하지 않고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하신단 말입니다.

 

22절을 보면 “내 속에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라고 하지요.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셨어요.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성향이 있어요.

 

그런데 23절에 “내 속에 또 다른 죄의 법이 나를 사로잡아 오는도다” 라고 하지요.

또 다른 법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과 싸워서 나를 죄인으로 만들어 버린다고 하지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법을 이기지 못한다고 하지요.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법을 이긴다고 믿어요.

성화주의자들은 성령 충만을 받으면 우리가 죄를 안 짓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있다고 해요.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 반대로 말하고 있어요.

사도바울은 지금 성령 충만으로 로마서를 쓰고 있어요.

 

사도 바울은 성령의 충만을 입고 증거 하기를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법이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법을 이기더라고 하고 있어요.

자기 신앙 고백을 하고 있어요.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법이 우리를 죄인으로 드러나게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엄청 중요해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을 하시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에요.

하나님은 우리를 잘난 자로 세우지 않아요.

못난 자로 세워요.

의인을 만들지 않고 죄인을 만든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우리가 스스로 의인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에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의인이 되는 것을 원해요.

예수 안에서 의인이 되게 하시려고 역설적으로 우리는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죄인이로 만들어서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으로 용서 받은 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의로 우리가 의인이 되게 하세요.

이게 창세전 언약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안에 두 법을 주신 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법과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법을 주신 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약하게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법을 강하게 하셨어요.

불순종의 법이 순종의 법 보다 강하게 하셨어요.

이는 우리를 죄인 되게 하시고자 함입니다.

 

죄인 되게 하신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용서하고자 하심이에요.

예수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로 세우기 위함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그리스도의 의만 오롯이 남기고자 하심이에요.

 

예수가 왕 노릇 하게 하고자 함이에요.

예수의 의(義)로 사는 자들이 되게 하고자 함이에요.

이렇게 예수의 의(義)로 사는 자들이라야 천국에서 세세토록 어린 양에게 찬양을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죄를 안 짓는 것이 아니에요.

죄는 예수를 믿고 난 후에도 여전히 우리 안에서 죄가 기회를 틈타고 있어요.

틈만 나면 발호해요.

 

성도는 죄를 안 짓는 자가 아니라 반대로 자신은 죄를 안 지을 수가 없는 자라는 것을 아는 자들이에요.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자에요.

그리하여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주어진 용서가 아니면 살 수가 없는 자라는 것을 아는 자에요.

 

우리는 율법 앞에서 절망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를 율법으로 절망케 하십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의를 붙잡게 하세요.

예수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하세요.

 

우린 율법이 없으면 기고만장해요.

자기가 무슨 의인이라도 되는 줄 알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교만을 떨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으로 우리의 교만을 꺾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에 반하는 것들을 주어서 우리가 죄인임을 드러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싫어하는 것은 하라고 하고 좋아하는 것은 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하라는 것은 하지 않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고자 하는 자들이에요.

성경을 보세요.

어디 하나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신 적이 있나요.

없어요.

모두가 우리의 본성과 반하는 것들을 주셨어요.

 

우리는 넓고 큰 길을 가고자 하는데 하나님은 좁고 협착한 곳으로 가라고 합니다.

우리는 자기 영광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데 하나님은 하나님 영광을 위하여 살라고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구하는데 하나님은 그런 것을 구하지 말고 그에 나라와 그에 의를 구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원수를 죽이고 싶은데 하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고자 하는데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을 좇아가고자 하는데 하나님은 그런 것은 망하는 것이니 쫓아가지 말라고 합니다.

 

어디 하나 우리 마음에 드는 말씀이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 두기 보다는 멀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치 않아요.

차라리 모르는게 나아요.

 

그래서 신앙생활이 제사 드리기에 바빴지 긍휼을 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긍휼을 구하려면 자기가 죄인임을 알아야 하잖아요.

자기가 죄인임을 알려면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뜻을 찾고 구하기 보다는 우리 맘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요.

열심히 충성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지 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우리는 마리아처럼 예수님 발 앞에서 말씀을 듣기 보다는 마르다처럼 예수님을 섬기겠다고 분주해요.

예수님의 섬김을 받아야 하는데 예수님을 섬기겠다고 설치고 있어요.

 

신앙생활이란? 예수님으로부터 섬김을 받는 것이에요.

 

예수님이 주시는 것을 넙죽 넙죽 받아 먹는 것이에요.

예수님의 살을 먹고 예수님의 피를 마시는 거에요.

예수님의 새 언약을 믿는 것이에요.

 

이렇게 믿는 것을 성경은 순종이라고 해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순종을 원하지 제사를 원치 않아요.

 

예수님으로부터 섬김을 받는 것이 예수님을 섬기는 거에요.

어떻게 예수님의 섬김을 받는가요?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로 의로워졌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의로워져서 예수님을 섬기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섬김을 받고 감사합니다! 라고 하여야 하는데!

도리어 자신이 예수님을 섬기겠다고 하면서 나 잘했지요! 라고 하고 있어요.

왜? 그런가 하면 예수를 섬겨야 발언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교회마다 맏아들 만들기에 바빠요.

자신이 탕자라는 것을 알게 하여야 하는데 도리어 탕자는 나쁜 놈이고 맏아들이 좋은 놈이라고 가르쳐지고 있어요.

 

그래서 교인들이 자기 행위를 의지하여 큰소리치는 겁니다.

 

나 말씀대로 살았어요!

나 이만큼 했잖아요!

내가 이 교회를 위해서 한 일이 얼마인데!

왜? 날 무시하는 겁니까!

내가 뭘 잘못 했습니까! 라고 따지는 것입니다.

 

나 봉사했잖아요!

나 충성했잖아요!

나 전도했잖아요!

나 헌금했잖아요!

나 복음 전했잖아요!

 

전부 했잖아요! 만 있어요.

여기서도 했잖아요!

저기서도 했잖아요!

 

그러니 못한 사람들은 설 자리가 없는 겁니다.

전부 잘난 자들만 있는 거에요.

의인들만 있다구요!

 

그러니 예수님은 교회 안에 머리 둘 곳이 없는 거에요.

죄인이 있어야 예수님이 머리 둘 곳이 있는데!

다 잘난 의인들만 있으니까 머리 둘 곳이 없어요.

예수님은 죄인을 구하려고 오셨는데 다 의인이니 구원할 자들이 없는 겁니다.

 

지금은 예수님의 피가 필요 없는 시대가 되고 말았어요.

열심히 봉사하고 충성한 것이 잘못이 아니고 그것을 힘으로 삼는 것을 나무라는 것입니다.

이러면 꼭 어떤 자들은 그래서 아무 것도 안한다고 하는 자들이 있어요.

 

한 것을 의미 두는 것도 행위이고!

안 한 것을 의미 두는 것도 행위에요.

그래서 나는 안 해! 라고 하는 것이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하여야지 어떻게 안한다고 합니까!

이 말을 잘 이해하세요.

그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면 그 은혜를 찬미하여야지요.

 

여기서 찬미란? 모든 신앙생활을 말해요.

용서 받은 자로서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삶을 말해요.

이 삶은 정형화 되어 있지 않아요.

어떻게!

얼마큼 해야 하는 것이 없어요.

 

마음에 깨달아지는 대로 하면 되어요.

많이 깨달아지면 많이 하시고 적게 깨달아지면 적게 하시면 되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즐겨하는 자를 기뻐하세요.

즐겨 한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깨닫기를 바란다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에 풍성함 들을 더 많이 더 깊이 더 길게 더 높게 깨닫기를 기도했어요.

 

하나님은 이리한 은혜를 깨닫게 하시려고 말씀으로 우리 안에 있는 죄들을 끄집어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많이 끄집어냄을 당하는 자들일수록 감사의 깊이가 깊어지게 되어요.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서 날마다 우리들을 죽이십니다.

율법에 의해서 죄인으로 발각당한 자만이 자신의 행위를 의지하지 않고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만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 말씀 앞에 세워서 절망하게 하십니다.

절망케 하여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세요.

마치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게 만들어서 불 뱀에 물리게 하시고 놋 뱀을 쳐다보고 살게 하신 것과 같이 하십니다.

 

광야에 높이 달린 놋 뱀은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불 뱀에 물린 자들을 살리기 위함이에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원망하는 길로 인도하셨어요.

거친 길로 인도하여 그들 속에 있는 죄를 끄집어내는 일을 하신 겁니다.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시려고 물 없고 건조한 광야 길로 인도하신 거에요.

 

죄인을 만들어서 불 뱀에 물리게 하신 후에 놋 뱀을 쳐다보고 살게 하신 겁니다.

놋 뱀을 누가 쳐다봅니까?

불 뱀에 물린 자들만 쳐다보아요.

불 뱀에 물리지 않는 자들은 쳐다보지 않아요.

 

그럼 누가 불 뱀에 물렸나요?

하나님을 원망하던 자들이에요.

즉 자기가 하나님은 원망한 죄인이라는 시실을 아는 자들이 놋 뱀을 쳐다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에 달린 놋 뱀을 자신의 십자가 사건으로 말씀하셨어요.

그럼 묻습니다.

누가 예수를 믿나요?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자들이 믿어요.

그럼 누가 죄인임을 아는가요?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자각(自覺)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도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죄인되게 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세워서 기어코 너는 죄인이고 마땅히 저주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사실을 각인 시켜 주시는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깨닫고 은혜를 많이 깨닫는 성도일수록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임을 깊이 알아가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시편 기자는 복 받은 성도는 주야(晝夜)로 여호와의 말씀(율법)을 묵상하는 자라고 한 것입니다.

왜? 여호와의 말씀(율법)을 묵상합니까?

그 말씀(율법)을 통해서 자기가 죄인임을 자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영적 나르시즘이 빠지면 안 되어요.

많은 사람들이 영적 나르시즘이 빠져 있어요.

복음 앞에서 자기가 죄인임을 깊이 알고 할 말이 줄어들어야 하는데 도리어 많은 분들이 복음 앞에서 잘난 척 하고 있어요.

 

복음 아는 자신을 자랑하고 있어요.

복음 아는 자신을 자랑하지 말고 복음으로 감사하며 사세요.

복음은 나로 하여금 힘을 주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힘을 빼앗아 가요.

나를 높은 자로 세우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낮은 자로 만드세요.

 

자신에 대하여 실망하고 절망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지 않아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내가 예수를 죽인 자라는 것을 아는 자들이 복음으로 믿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하는 자들에게 늘 실망하고 절망하는 일들을 벌리시는 겁니다.

그러나 그 절망과 실망은 우리로 하여금 기쁨으로 되돌아 와요.

주의 은혜 속에 강한 자로 만들어 내십니다.

 

성도는 낙심하는 자가 아니라 낙심 속에서 주의 은혜로 강함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날마다 주의 은혜 속에서 강한 자로 사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누구인지 알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내 안에 선이 없고 도리어 악이 가득함을 알게 하셨사오니 이제는 나를 믿지 않고 주 예수만 바라보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기쁨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고정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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