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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계시록 강해

♣(요한계시록 강해) 8강. 서머나 교회에 보내는 편지 (계 2:8-11)

by coroa 2023. 1. 30.

 

 

8강. 서머나 교회에 보내는 편지 (계 2:8-11)

요한계시록 2: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창세기 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8강. 서머나 교회에 보내는 편지 (계 2:8-11)

성경

 

 

-.정낙원 목사

 

8강. 서머나 교회에 보내는 편지 (계 2:8-11)

 

계 2:8-11=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일컬어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곳이라고 합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이 뜻을 나타내셨지만,

신약에서는 교회를 통해서 나타내십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신약의 전 역사를 시대별로 나타내 주는 계시사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만드실 때 종말을 두고서 만드셨어요.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주님은 애초에 멸망할 것들을 만드셨다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히 1:10-12=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11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12 의복처럼 갈아 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 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

 

하나님은 태초에 땅에 기초를 두시고 하늘을 손으로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멸망할 것입니다.

이는 영존 하시는 주님을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영원한 것의 대척점에 멸망할 것을 만드신 것입니다.

이는 멸망 할 것을 가지고 영존하는 세계가 있음을 알리고자 하심입니다.

즉 영원이라는 무한(無限)의 세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시작과 끝이 있는 유한(有限)이라는 이 세상을 만든 것입니다.

 

역사를 왜? 만드셨는가?

영원을 설명하기 위함이에요.

설명이 다 되고 나면 폐기되어요.

 

역사에 속한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영원한 천상의 교회가 있어요.

이름하여 천국이에요.

 

이를 알려 주고자 유한(有限)에 속한 지상에 교회를 만드신 것입니다.

역사가 시작과 끝이 있듯이 역사 속에 나타나는 교회도 시작과 끝이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교회의 역사도 초대 교회로부터 시작하여서 종말 교회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사람이 태어남과 죽음의 과정을 겪어 가듯이 역사 속에 나타나는 교회도 세워지는 과정과 타락하는 과정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약의 역사는 에베소 교회로부터 출발하여서 라오디게아 교회로 끝이 날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초대교회를 상징한다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이 재림 하실 때의 종말 교회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시간 우리는 에베소 교회는 초대교회라는 것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에베소 교회가 갓 태어난 아이라고 한다면 그 다음에 나타나는 서머나 교회는 한 세대를 지나고 난 후의 교회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들의 모임입니다.

이는 교회도 생명의 자람과 같은 모습으로 이 땅에 나타나게 된다는 뜻입니다.

모든 생명은 태어나고 자라고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과정을 겪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 역시 태어남과 자람과 병들고 죽어가는 모습으로 이 땅에 나타나게 됩니다.

초대 교회가 태어나는 시기라고 한다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시기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시아의 일곱 교회도 처음엔 활기차게 시작을 하였다가 점차 타락을 하면서 나중에는 세상과 하나 되어서 이것이 교회인지 세상인지 구분 할 수가 없을 정도의 혼합주의로 발전하여 입에서 토해 낼 것 같이 역겨운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우리 신앙에 적용을 하면 우린 처음에는 자신감과 의기가 충천해서 세상 끝까지 품을 것 같은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이 때는 자기가 신앙이 엄청 좋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나이 들어 늙어가면서 신앙의 경륜이 깊어지고 쌓여가면서 자신의 믿음 없음을 절감을 하게 되어요.

 

야! 나는 진짜 믿음이 없구나!

나야 말로 죄인 중에 괴수라는 고백이 터져 나오게 되어요.

자기 실존을 알고 상한 심령으로 신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의 긍휼을 구하게 됩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 주세요! 라는 고백을 하게 되어요.

그러니 우리의 신앙도 에베소 교회로부터 시작을 하여서 라오디게아 교회로 끝이 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재림의 때를 노아의 때와 같다고 했습니다.

이는 영적 상태가 노아의 때처럼 죄악이 관영해 진다는 뜻입니다.

노아의 때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혼인을 한 것처럼 종말의 교회도 누가 신자이고 누가 불신자인지 모를 정도로 세속화가 되고 혼합주의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쉬운 말로 할게요.

예수님의 초림은 재림의 모형이에요.

즉 예수님의 재림 때에 교회의 모습이 예수님의 초림 때 영적 상태와 같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초림 때 자기 백성들이 영적 상태가 어떠했나요?

외식으로 흘렀어요.

껍데기는 신자인데 그 내용은 세상 것으로 가득채워져 있었어요.

 

지금 식으로 말하면 겉 모양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 그 내용을 들어가 보면 완전히 세상 사람이에요.

세상 가치관으로 가득해요.

이를 예수님께서는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마음은 멀도다” 라고 하였어요.

이걸 외식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언제 오시느냐 하면 교회가 완전히 타락을 할 때 오십니다.

이 말은 겉으로 나타난 교회들의 타락상을 말해요.

쉬운 말로 교회들이 하는 짓이 세상에 취하여서 노아의 때처럼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이 시대 교회는 세상과 경계가 무너졌어요.

어디가 세상이고 어디가 교회인지 몰라요.

교회가 세상의 가치관으로 세워지고 있어요.

이걸 영적으로 음행이라고 하고 다른 말로 혼합주의라고 해요.

이러한 상태를 노아의 때처럼 죄악이 관영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복음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의인들은 고난을 받아요.

노아와 그 식구들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은 방주를 짓는 삶을 살아가게 되어요.

즉 세상에 나타나는 교회의 모습은 타락의 모습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 노아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은 그들과 동화되지 않고 다른 가치관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당연히 고난을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이 남은 자들이고 십일조 성도들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항상 구원 얻는 무리는 작다고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작은 무리들이 세상의 논리에 치여서 고난을 당할 때 주님이 재림을 하시는 것입니다.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을 때,

더 이상 자기 백성들을 세상에 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할 때에 예수님이 오셔서 천국으로 빼내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교회는 더욱 더 타락의 길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인본주의 신앙이 신본주의 신앙을 이단으로 밀어내는 때가 올 것이에요.

이미 그 일이 교회 안에서 행하여지고 있어요.

 

지금은 목사가 절간에서 설교를 하고 중들이 교회 안에서 설법을 하는 때에요.

이는 교회 세상으로부터 박수를 받고자 함이에요.

야! 우리도 그렇게 편협하지 않고 마음이 넓다!

그러니 우릴 너무 욕하지 말라고 하는 제스처에요.

 

그러다 보니까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이단으로 몰리는 때에요.

교회가 음녀가 되었어요.

교회 안에 귀신의 가르침이 난무해요.

그러므로 지금은 종말 중에서도 종말의 끝인 말세지말 인 겁니다.

주님이 곧 오실 때가 되었어요.

사회 현상론적으로 볼 때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일보 직전의 모습이에요.

 

시대의 표징을 보아야 합니다.

교회의 타락같이 좋은 표징은 없어요.

종말의 표징 중에 최고의 표징이 교회가 세상 가치관으로 가득차서 성도들이 세속화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에베소 교회 강론 때 말씀 드린 것인 조금 미흡하여서 보충으로 설명을 드리는 것이니 양해하고 들으세요.

에베소 교회는 연대기(年代記)적으로 상고해 본다면 초대 교회 시대를 상징 한다고 하였습니다.

 

“에베소” 라는 이름은 좋은 의미에서는 “인내”이고, 나쁜 의미에서는 “미끄러진다”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 의미대로 에베소 교회는 처음엔 좋게 시작을 하였다가 나중엔 미끄러졌어요.

 

이제 하나님은 미끄러진 교회를 고난 속에 집어넣고서는 정련 시키는 일을 하세요.

고난이라는 풀무불 속에 집어넣고 불순물들을 빼내는 것입니다.

이게 서머나 교회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초대교회의 모습으로서 갖가지 문제점들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신약성경에 나와 있는 교회들을 보면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 나와 있는 여러 교회들에게 보내는 서신서들을 보면 그 당시 교회상을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서신서에 나타나는 교회마다 여러 가지 아픔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초대 교회는 이단들이 극심했어요.

제일 골치를 아프게 한 이단이 유대교 율법주의자들과 영지주의자들이었어요.

 

유대교는 인간의 행위에 가치를 두었고,

영지주의는 그 반대로 인간의 행위는 무가치 하다고 하면서 방탕과 방종과 방임을 부추겼어요.

이러한 양극단의 이단은 지금도 그 모습을 달리해서 교회 안에서 가르쳐지고 있어요.

 

그래서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도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과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는 자들이 니골라당의 교훈이라든가 발람의 교훈이든가 이세벨의 교훈을 가지고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으니 그들과 싸우라고 하는 것입니다.

 

니골라 당의 교훈은 철학(이성)적 사변으로 성경을 이해하는 인본주의를 말하고!

발람의 교훈은 이 세상에서의 부귀영화를 좇는 기복주의를 말하고!

이세벨의 교훈은 음행 즉 몸에 사욕을 쫓아가는 쾌락주의를 말해요.

 

성경은 이러한 것을 추구하는 자들을 일컬어 자칭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자칭을 주의 하세요.

자칭이란? 진짜가 아니면서도 진짜처럼 그럴듯하게 보인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곡식과 가리지로 비유하셨어요.

 

마태복음 13장을 봅시다.

 

마 13:24-30=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26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27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28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29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 하노라 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천국은 마치 농부가 밭에 곡식을 심었는데 원수가 밤에 가라지를 덧 뿌려 놓은 것처럼 같다고 합니다.

천국을 교회로 의역(意譯)할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교회 안에 가라지가 있다는 말입니다.

 

원수는 자기 밭에 가라지를 뿌리지 않아요.

남에 밭에 뿌려요.

 

원수가 누구인가요?

마귀에요.

그럼 마귀가 어디에 가리지를 뿌릴까요?

예수님의 밭인 교회이지요.

 

이게 초대 교회 모습이에요.

교회 안에 이단을 가라지라고 하셨어요.

주인이 가라지를 알지만 뽑지 않는 것은 혹여라도 곡식이 다칠까봐에요.

 

에베소 교회가 가리지를 뽑다가 그 보다 더 중요한 사랑을 잃어버렸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가라지는 가라지대로 두고 너희들끼리 내게 받은 사랑으로 사귐을 가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이단을 좇아내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 말을 잘 이해하세요.

이단을 용납하거나 두어도 된다는 말이 아니고 먼저와 나중이 있다는 말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진리 문제로 싸우다가 사랑을 잃어버렸어요.

이건 교각살우(矯角殺牛)와 같아요.

소의 뿔을 고치려고 하다가 소를 잡은 형국이 되고만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너희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느냐?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돌아보고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바로 잡으라고 합니다.

 

그럼 미끄러진 초대교회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간섭을 하여서 처음 사랑을 회복하게 하시는지를 서머나 교회를 통해서 살펴봅시다.

 

먼저 예수님의 모습을 봅시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모습이 에베소 교회와 다릅니다.

에베소 교회는 예수님께서 인자하게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로 다니시는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는 이제 막 시작한 교회를 주님께서 붙잡고 세워 가는 것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서머나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은 무겁고 장엄합니다.

처음이고 나중이라고 하시면서 나는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합니다.

이건 뭔가 큰 전쟁을 치르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8절을 봅시다.

 

계 2:8절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서머나 교회 사자에게 편지합니다.

예수님이 스스로를 계시하시기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라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창조주이시고 심판주라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모든 일을 시작을 하고 끝을 맺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서머나 교회에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가 예수님의 허락 하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곧 너희에게 닥치는 그 어떤 것도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다 하나님께서 필요해서 일어나는 일이니까 마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단단히 붙잡으라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고 합니다.

이건 의미심장한 말씀이에요.

극심한 환난이 일어날 것을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은 곧 너희도 죽음에 넘기워진다는 말입니다.

죽음에 넘기워지더라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내가 너희들을 나 처럼 죽었다가 다시 살려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머나 교회는 연대기(年代記)적으로 말하면 로마의 핍박이 가장 심했던 시기를 말하는데 이는 곧 “순교 시대” 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AD 63년에 로마의 대 화제가 일어난 후부터 네로가 화재의 원인을 기독교인들 짓이라고 뒤집어씌우면서부터 로마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적개심을 갖고 서서히 핍박이 일어나기 시작을 하였어요.

 

네로는 이 때에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서 그 몸에 역청(기름)을 바르고 정원에 매 달아서 불에 태워서 죽이면서 그 불빛에 서커스를 보면서 음주가무를 즐겼어요.

이런 박해로 인하여 성도들이 산지사방으로 흩어지고 지하로 숨게 된 것입니다.

이걸 서머나 교회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이해를 돕기 위해서 참고적으로 말합니다.

당시 도시마다 화폐를 가지고 있었어요.

에베소 지역의 화폐는 “열매” 그림이었어요.

 

이는 영적으로 에베소 교회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생겨난 첫 열매로서의 교회란 의미가 있어요.

그러니까 에베소 지역의 화폐에 그려진 도안(圖案)이 교회의 연대기적 의미로 보면 에베소 교회는 초대교회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머나 지역의 화폐는 “면류관” 그림이었어요.

면류관이란? 성도가 순교를 통해서 받는 것이에요.

오늘 본문에서도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준다고 하지요.

그럼 서머나 교회는 화폐에 그려진 면류관이라는 그림을 교회의 연대기적 의미로 이해를 하면 순교시대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행하여지는 모든 것을 가지고서 계시를 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지역에 사용하는 화폐 하나까지도 다 간섭을 하여서 교회들에게 주는 영적인 메시지를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 이후에 나타나는 교회들도 다 화폐 속에 그 시대의 교회상을 보여주는 의미의 그림들이 그려져 있어요.

 

서머나라는 이름은 “몰약” 또는 “쓰다” 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몰약이란? 시체에 바르는 향품입니다.

이는 곧 서머나 교회는 극심한 핍박으로 인하여 순교자들이 많이 일어날 것을 상징하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핍박으로 인하여 순교 당하는 성도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죽었다가 살아나신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실제로 서머나 교회 성도들은 엄청난 박해를 받았어요.

서머나 지역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죽음을 내어 놓아야 했어요.

가산을 빼앗기는 것은 보통이고 발각당하면 죽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먹고 사는 일이 막막했어요.

 

9절을 봅시다.

 

계 2:9절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당시 소 아시아 지역에는 에베소를 비롯해서 서머나와 버가모가 아주 유명한 도시였어요.

이들을 일컬어 아시아의 별이니 아시아의 지배자니 하는 수식어를 썼어요.

이는 로마가 식민 국가들은 다스리기 위하여 로마에 대한 충성심을 이끌어 내기 위하여 서로 경쟁하는 의미로 붙인 이름들이에요.

 

서머나 지역은 처음으로 황제 숭배가 일어났던 곳입니다.

 

AD 26년에 티베리우스 황제의 신전을 건립하기 위하여 여러 도시를 심사했어요.

어느 도시가 가장 충성스러운 도시인가 심사를 해서 가장 충성스러운 도시에 황제를 숭배하기 이한 신전을 건립하고자 하였어요.

선택이 되면 엄청난 재정 지원과 함께 수많은 특혜들이 주어졌어요.

 

그래서 각 도시마다 유치 신청을 받았어요.

11개 도시가 여기에 뛰어든 겁니다.

그 중에 서머나가 당당하게 유치 경쟁에서 이겼어요.

 

그리하여 황제 숭배를 위한 신전이 최초로 서머나에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당시 서머나는 인구가 10만 명 정도였어요.

그런데 황제의 신전이 자기들 도시에 최초로 세워지게 되자 서머나인들은 마치 올림픽을 유치한 것처럼 축제 분위에 휩싸였어요.

 

이로 인하여 서머나는 로마의 중앙정부로부터 엄청난 혜택을 입게 되었어요.

황제에 대한 충성심으로 인하여 물질적인 지원은 물론이거니와 너희들은 “아시아의 지배자” 라는 칭호도 듣게 되었어요.

쉬운 말로 로마의 1등 시민이 된 것입니다.

 

당시에는 서머나에 사는 것을 엄청난 자랑으로 여겼어요.

서머나 사람들은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어요.

자연히 친 로마 세력들이 기득권층으로 자리를 잡고 서머나를 운영하였던 것입니다.

 

그 당시 “길드”라는 상인 조합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시장의 상권을 모두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 “길드” 라는 상인 조합은 아무나 가입이 되는 것이 아니고 로마의 황제를 주(主)라고 고백하는 충성심이 강한 자들만 가입이 되었어요.

 

길드 조합원들은 모두가 황제를 숭배하던 자들로서 엄청난 혜택을 입었어요.

이들은 황제에게 충성심을 나타내려고 황제의 신전(神殿)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였어요.

당시에는 도시의 재정에 절반은 신전 운영을 위하여 사용이 되었다고 하니까 황제 숭배 사상이 얼마나 심하였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면 강할수록 중앙 정부로부터의 지원을 많이 받으니 장사꾼들이 이걸 놓칠 리가 없지요.

그래서 길드 조합에서는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기 위하여 수시로 황제를 위한 제사를 드리고 광란의 축제를 벌렸어요.

 

이 때 로마의 총독이 참석을 하여서 그 조직의 편을 들어 주었어요.

그러니까 서머나 도시가 이 길드라는 조직에 의해서 운영이 된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권세가 막강했어요.

 

어느 조직이고 그 조직을 움직이는 것은 돈이에요.

축제를 하자만 자연히 돈이 들어가야 하니까 이 돈을 시민들로부터 각출을 하였어요.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황제 숭배를 하는 신전에 돈 내는 것이나 또한 정기적으로 행하는 축제 때 돈을 기부하는 것도 거부했어요.

그러니 미움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길드에 가입하려면 “가이사는 주(主)이십니다” 라는 고백을 해야 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은 그럴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 자연적으로 모든 혜택에서 제외가 되는 것입니다.

 

길드 회원들에게는 회원증을 교부해 주었어요.

이 회원증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상권을 허용했어요.

요즘 식으로 말하면 장사 할 수 있는 권한을 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황제 숭배 사상을 반대 하였던 그리스도인들은 길드 조합원이 될 수가 없으니까 장사도 할 수가 없어진 겁니다.

자연히 궁핍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당시 서머나에서는 “가이사는 주(主)입니다” 라는 것이 인사였어요.

마치 우리가 사람을 만날 때 “안녕 하세요” 라고 하는 것과 같았어요.

그러니까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도 가이사는 주라는 고백을 하여야 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우리는 가이사의 덕으로 살고 있습니다! 라는 가이사를 찬양하는 것이에요.

이것이 인사 속에 심어져 있는 것입니다.

 

가이사가 주라는 말은 서머나 시민들에게는 일종의 신앙고백이에요.

이는 우리나라가 과거 일제 강점기 때에 일본의 천황폐하 만세 라고 하면 일본 놈들이 당신은 황국시민이라고 칭함을 해 주던 것과 같아요.

 

물건을 매매하면서 가이사가 주이십니다 라고 인사하는 것 속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어요.

이는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기독교인들을 찾아내고 핍박하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만 주라고 고백하는 자들이잖아요.

그러니 가이사는 주이시다 라는 고백을 할 수가 없지요.

 

그런데 도시 전체가 물건을 사고팔면서 자연스럽게 가이사는 주이십니다 라는 인사를 나누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인사를 하지 않으니 자연히 매매를 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가이사는 주이시다 라는 고백은 일종의 물건을 사고 파는 매매의 증표가 되고 만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계시록 13장에서는 666 짐승표라고 해요.

 

요한계시록에서는 적 그리스도와 그 세력들을 짐승이라고 했어요.

이 적그리스도가 바로 로마 황제였어요.

그래서 그 이름의 수(數)를 잘 헤아려 보라고 하면서 그 666표를 짐승의 표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자기 백성들에게만 알려주는 암호와 같은 것이에요.

그리스도인들은 매매하면서 “가이사는 주이시다” 라고 하는 인사가 666이라는 사실을 다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가이사가 주(主)가 아니고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주(主)이시다 라는 고백으로 그리스도인들은 666 짐승표를 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자연히 궁핍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알다시피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그리스도만 주(主)라고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황제를 주(主)라고 고백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 당연히 매매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길드 조합원에게 주어지는 혜택을 하나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장사도 하지 못하고 물건을 매매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니 얼마나 살기가 힘들었겠어요.

자연히 엄청난 환난과 궁핍을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당하는 그 환난과 궁핍을 내가 잘 알고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9절을 봅시다.

 

계 2:9절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궁핍을 면하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궁핍을 잘 알고 계신다고 합니다.

우리의 바램은 그래 그동안 고생 했으니 이제부터 궁핍을 면하게 해 줄게! 라는 말을 듣고 싶은데 주님께서는 그냥 알고 계시다고 합니다.

 

왜? 이 땅에서 궁핍을 면하게 해 주신다는 말씀은 하시지 않을까요?

이는 복음이 이 세상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주시고자 십자가에 죽으시지 않았어요.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저주 받은 세상의 것으로 행복과 불행을 가늠하는 죄가 주는 그 거짓된 가치관으로부터 빼내시기 위함이에요.

 

죄는 세상에 것으로 행복과 불행으로 가늠해요.

하지만 복음은 하나님과 화목된 관계로 행복과 불행으로 가늠해요.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는 행복과 불행의 기준이 달라요.

 

누가복음 15장을 봅시다.

 

눅 12:15-21=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6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18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어떤 부자가 있습니다.

그는 하는 일마다 잘 되어서 통장에 잔고가 쌓여만 갔습니다.

부동산을 매입하고 큰 집으로 옮기고 암튼 엄청나게 잘 살았습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엄청 복을 받은 자입니다.

부자 역시 자기는 복을 받은 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먹고 마시고 즐기자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님이 심방을 하셔서 말씀 하십니다.

주께서 대뜸 하시는 말씀이

야! 이 어리석은 놈아!

 

돈이 너 명줄을 지켜 주더냐!

돈이 세월을 막아 주더냐!

돈이 늙어가는 것을 막아 주더냐!

 

세월을 막아주지 못하고!

늙음을 막아주지 못하고!

죽음을 막아주지 못하는 것을 의지하고 희희낙락을 하느냐?

한마디로 생명을 지켜주지 못하는 것을 붙잡고 복이라고 붙잡고 있느냐 라고 책망하는 말입니다.

 

진짜 복이 뭔 줄 아느냐!

너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이다!

진짜 부자가 누군 줄 아느냐?

우리의 생명을 쥐락 펴락하는 하나님과 화목한 자라고 합니다.

 

누가 화목한 자이냐?

예수 믿는 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도 모르는 놈이 돈 몇푼 있다고 해서 기고만장 하는 꼬락서니 하고는,,

야! 이놈아 차마 눈뜨고 못 보겠다고 하십니다.

 

믿음 좋으면 세상에서 잘 산다는 말은 사기(詐欺)에요.

그건 종교 사기꾼들이 지어낸 말이에요.

이 시대 예수 믿으면 복을 받는다는 기복주의 신앙은 비 성경적이에요.

 

성경은 예수 믿으면 복 받고 잘 산다고 한 적이 없어요.

도리어 고난을 당한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예수 믿고 신앙생활 잘하면 복 받고 잘 산다고 하는 말은 뱀의 말인 것입니다.

기복주의 신앙을 가르치는 자는 거짓 선지자들이고 뱀 새끼들이에요.

 

어리석은 자가 누구인가요?

재물을 의지하고 사는 자들이에요.

땅에 것을 복이라고 붙잡고 살아가는 자들이에요.

먹고 마시는 것을 일생의 낙이라고 하는 자들입니다.

 

그럼 누가 복을 받은 자인가?

이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을 이룬 사람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서머나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가 비록 세상적으로는 궁핍한 자들이지만 실상은 너희가 부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 때문에 하루 하루 초근목피 하는데도 부자라고 합니다.

 

겉으론 궁핍을 당하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부자라고 합니다.

육적으로는 아무것도 없지만 영적으로는 부요하다는 말입니다.

마치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처럼 성도들은 세상에서는 비록 거지 나사로 였지만 천국에선 하나님의 아들로 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걸 라오디게아 교회와 비교해 보세요.

 

계 3:17절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서머나 교회와 정반대였어요.

서머나 교회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이 궁핍하였어요.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는 모든 것을 가졌어요.

그래서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너스레를 떨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다고 합니다.

실상은 가난한 자라고 합니다.

겉으로는 모든 것을 가져서 부자이지만 그 영혼은 피폐하기 이를 데가 없다고 합니다.

눈뜨고 차마 볼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건 마치 어리석은 부자와 같아요.

가진 재물은 차고 넘친데 막상 그 영혼은 곤고하고 가련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리석은 부자 비유를 통해서 진정한 부자는 하나님과 화목한 자이고 가난한 자는 하나님과 화목치 못한 자라고 하셨어요.

 

어째서 그런가요?

이는 장차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믿음이 필요하지 물질은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화목이 이루어지지 않은 자는 다 지옥으로 보내세요.

 

그러니까 서머나 지역의 길드 회원들은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부자로 살았고 그리스도인들은 궁핍하게 살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궁핍을 당한 그리스도인들을 부자라고 하고 황제 숭배로 돈을 긁어모으고 산 부자들을 어리석은 부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서머나 교회를 통해서 진짜 부자가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진짜 부자가 있으면 가짜 부자도 있겠지요.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여주는 그림자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영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부자는 영적 부자를 설명하기 위한 그림자적 부자인 것입니다.

 

실상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럼 누가 진짜 부자인가 하면 하늘에 것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하늘에 것을 소유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성도들입니다.

 

야고보서 2장을 봅시다.

 

약 2:5절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찌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였느냐”

 

야고보 사도가 우리에게 들으라고 합니다.

야! 울산 목양교회 성도들아!

LA 모퉁이 돌 교회 성도들아!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가난 한 자들을 택하여서 믿음에 부요를 주셨다고 합니다.

이 믿음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진짜 부자는 믿음이 부요한 자들인 것입니다.

 

이 믿음을 누구에게 주셨다고 합니까?

세상에 대하여 가난 한 자들에게 주셨다고 합니다.

이 말은 세상에서 가난하게 사는 자들은 다 믿음에 부요함을 받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는 믿음을 받은 자들은 세상 가치로 살지 않게 된다는 말입니다.

세상 가치로 살지 않으니까 세상의 부와 상관없이 세상에 대하여 가난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도를 일컬어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들이라고 하는 이유도 믿음이 성도들 안에서 세상 가치로 살지 말고 하늘에 가치로 살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힘을 믿지 않고 살기 때문에 세상에 대하여 가난한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돈이 있어도 돈에 힘으로 살지 않고 믿음의 법으로 살기 때문에 돈으로부터 가난한 것입니다.

세상 방식대로 라면 돈 가지고 뭐든지 해결을 할 터인데!

성도들은 세상에서 믿음의 법으로 살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지 돈에 힘으로 해결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돈을 가지고서도 세상을 돈에 힘으로 살아가지 않으니까 세상에 대하여 가난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가난하다는 말은 세상에 가치로 살지 않는 자들이란 말입니다.

성경적인 부(富)에 의미와 가난에 의미도 알아야 해요.

가난하라고 하니까 교회에다 돈을 다 바치고 가난하게 살라는 말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돈을 원하지 않아요.

우리의 믿음을 원하세요.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면 돈은 모아두지 말고 교회에다 바치라고 하는 말에 속아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대충 대충 살아서 가난해지라는 말이 아니에요.

열심히 사세요.

그리고 돈도 많이 버세요.

하지만 돈에 가치로 살지 마십시오.

믿음으로 사세요.

그게 세상에 대하여 가난하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인 것입니다.

 

이번에는 환난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계 2:10절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환난이란? “들립시스” 라는 말인데,

이는 큰 바위에 짓눌려서 뼈가 으깨어지고 살이 짓물러지는 것을 말해요.

그러니까 외부적인 충격을 당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외부적인 핍박으로 예수를 믿는 것을 방해 헸어요.

그래서 초대교회 당시의 환난은 대부분 외부적인 핍박이었어요.

사람의 본성은 자기 몸을 위하여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우리는 몸에 물리적인 압박을 받으면 본능적으로 그것을 벗어나고자 반응을 해요.

죄인을 고문 할 때 물리적으로 압박하는 것도 다 인간의 본성은 자기 몸뚱이를 챙기고자 반응을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몸에다가 모진 고문을 가하는 것입니다.

대 부분의 사람들은 고문을 당하면 죄를 자백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초대교회 당시 로마에서는 예수 믿는 자들을 찾아내기 위해서 갖가지 고문으로 핍박을 가했어요.

고문을 가하면 대 부분 예수를 부인했어요.

 

역설적으로 환난은 진짜 신자와 가짜 신자를 구별해 내는 시험 방법이 된 것입니다.

 

서머나 시민들은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가장 강한 사람들이었어요.

그러니까 그 당시 서머나를 아시아의 지배자 들이 사는 도시라는 칭호를 받았던 것입니다.

이는 그만큼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칭호를 먹칠 하는 자들이 있었어요.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이사는 주가 아니고 예수그리스도가 주라고 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골수 서머나 인들에겐 그리스도인들이 눈에 가시와 같은 것입니다.

특히 서머나를 관리하기 위하여 파견을 받은 로마의 총독 입장에서는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앞날을 방해하는 세력인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인들을 밀고하면 포상을 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누가 적극적으로 동참을 하였는가 하면 유대인들이었어요.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일 때 우리의 왕은 가이사 라고 하던 자들이에요.

그러니 그들은 서머나에서 길드 회원에 가입을 하여서 온갖 혜택을 누리고 살았어요.

 

유대인들은 어떻게 하면 로마의 치세 속에서도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어요.

정치적으로 계산이 빠른 자들이었어요.

돈 버는 법을 아는 자들이었어요.

 

이들은 가이사를 주라고 고백하지 않는 자들은 온전하게 매매를 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아요.

그리고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이라는 것도 알아요.

그래서 이 놈들이 시장에서 거래 되는 정상적인 값보다 수십 배 높은 값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밀거래를 하면서 떼 돈을 벌었어요.

 

그리스도인들은 온전하게 물건을 사고 팔 수가 없으니까 자연히 고가의 값을 치르고서라도 유대인들로부터 물건을 구입하였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러다가 그리스도인들이 돈이 없으면 로마의 집권자들에게 밀고를 해 버리는 것입니다.

밀고를 하면 포상금을 받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돈이 있을 땐 찰거머리처럼 착 달라붙어서 입에 혀처럼 온갖 감언이설로 장사를 해 먹고서는 이제 돈이 다 떨어 졌다 싶으면 밀고를 해서 돈벌이를 한 것입니다.

이건 마치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밀고하고 돈을 받은 것과 같아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들은 유대인이 아니고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신 겁니다..

 

계 2:9-10절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자칭 유대인이란? 유대 정신이 없는 자들이란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형제들을 돈 벌이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았어요.

초대교회 당시에 모든 유대인들이 다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지 않았어요.

일반 백성들은 도리어 그리스도인들을 숨겨 주곤 했어요.

진짜 유대 정신이 바로 박힌 유대인들은 형제애가 투철했어요.

 

그러나 로마에 빌붙어서 기득권층으로 사는 자들이 있었어요.

이들이 대 부분 자기 민족을 돈 버는 수단으로 활용을 하였어요.

이러한 자들이 교회 안에서는 광명의 천사로 위장하여 거짓 선지자 노릇을 했어요.

 

예수님은 이들을 "사단의 회"라고 합니다.

사단의 회(會)란? 마귀 집단이란 말이에요.

이는 곧 로마에 빌붙어서 형제들을 등쳐먹으면서 사는 자들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서머나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밀고 하면서 돈 벌이 수단으로 이용하는 자들은 유대인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허울만 유대인이지 실상은 사단의 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마귀의 종이 되어서 성도들을 밀고해서 옥에 가두고 죽임 당하게 하는 일들을 행하였어요.

 

오늘 본문에 마귀가 장차 너희 중에 몇 사람을 옥에 가두고 핍박을 한다고 하지요.

 

교회사에 보면 서머나 교회의 폴리캅이라는 빛나는 순교자가 있어요.

 

폴리캅은 사도 요한의 제자로서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어요.

그런데 교회 안에 거짓 형제가 로마 총독에게 신고를 했어요.

로마 군인들이 그를 잡고자 하였으니 집을 떠나고 시골에 있는 친구의 농장으로 피한 뒤였어요.

이에 로마 병사들이 하인을 고문하여서 폴리캅이 있는 곳을 알아낸 후에 그리로 가게 됩니다.

 

이때 폴리캅은 도망 갈 수가 있었으나 도망치지 않고 그들을 반갑게 맞이하고서 수고한다고 하면서 극진한 대접을 하였어요.

잡으러 온 병사들 중에서 이렇게 고결한 분을 왜? 잡아들이는지 모르겠다고 하였다고 하니까 인품이 대단 했던 모양이에요.

 

폴리캅이 그들에게 한 시간만 기도할 시간을 달라고 하고서는 두 시간 동안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했어요.

그리곤 병사들에게 가자고 합니다.

 

화형장에 들어서자 군중들이 죽이라고 아우성을 칩니다.

이 때 총독이 누구인가 하면 폴리캅과 어릴적 친구인 스타티우스 라는 사람이었어요.

스타티우스는 폴리캅을 살리고자 제안을 합니다.

 

야! 폴리캅!

“가이사는 주이시다” 라고 하는 말이 무엇이 그렇게 어렵냐!

그냥 가짜라도 좋으니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한번만 부르면 놓아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폴리캅은 그윽한 눈으로 그를 응시 하면서!

야! 이 사람아! 우리 주님은 86년 동안 나를 한 번도 모른다고 부인하지 않았는데 내가 어찌 그 주님을 부인한단 말인가!

가이사는 주가 아니고 나의 주는 오직 예수그리스도 한 분 뿐이라네! 라고 대답을 하였어요.

 

그러자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던 군중들이 죽이라고 아우성을 칩니다.

이에 총독 스타티우스는 마지막으로 간청을 하다시피 하면서 불에 타서 죽는 것이 두렵지 않은가! 라고 하자 폴리캅은 총독에게 너는 나를 잠시 타다가 꺼지는 불에 태우지만 자네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 불을 어떻게 견디겠는가! 라고 하면서 측은히 여겼다고 합니다.

 

총독이 군중들을 달래고자 폴리캅을 화형을 시키고자 기둥에 매어달았습니다.

그리곤 그 주변에 나무들을 펼쳐 놓고서는 불을 지폈습니다.

그런데 불이 원형모양으로 폴리캅을 감싸고 있는 겁니다.

불꽃이 폴리캅을 태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로마 병사가 창으로 찔러서 죽였어요.

로마 병사가 창으로 찌르자 피가 나오면서 불꽃을 살랐다고 해요..

마치 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불 속에 들어갔는데 타지 않은 것처럼 불꽃이 폴리캅을 태우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 폴리캅은 사도 요한의 제자에요.

사도 요한이 누구입니까?

지금 서머나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주님으로부터 받아서 전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아마도 사도 요한은 주님으로부터 서머나에 보내는 이 편지를 받을 때 이 광경을 미리 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본문 10절을 다시 보세요.

 

계 2:10-11=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당한다고 하지요.

이 말은 성도들이 이 땅에서 당하는 환난은 정한 때가 있다는 뜻입니다.

잠시 후에 끝이 난다는 것입니다.

 

설사 그 환난이 죽음이라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영생하는 것이란 말이에요.

 

성도에게 있어 죽음이란? 영생 하는 길이에요.

죽음은 옷을 갈아입는 것과 같아요.

 

고린도후서 5장을 봅시다.

 

고후 5:1-9=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2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3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6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땅에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으로 간다고 하지요.

무슨 말인고 하면 우리가 죽는 것은 이 땅에 몸을 벗고 하늘에 몸을 입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를 옷 입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거에요.

 

이 땅에서 살려면 이 땅에 필요한 몸을 가져야 해요.

우주인들이 우주에 가면서 우주복을 입고 가듯이 이 땅에서도 이 땅에 옷을 입어야 해요.

이 땅에 필요한 몸이 겁니다.

 

이 땅은 시작과 끝이 있는 곳이에요.

그러므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몸은 태어나면 곧 죽게 되는 몸인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세상으로 오실 때 이 몸을 입고 오셨어요.

 

땅에서 난 몸은 땅에다가 반납을 해 주어야 해요.

이건 마치 군인이 제대를 할 때는 그 동안 입고 있던 옷들을 다 반납하는 것과 같아요.

제대를 하면 군에서 입던 옷은 필요가 없어요.

사회에서는 사회에서 입을 옷이 있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의 소원은 빨리 이 육신의 장막을 벗고서 주님께 가고 싶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산다고 해서 손해 볼 것이 없는 것은 우리는 이미 하늘에 몸을 입기 위하여 예약이 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죽음은 존귀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슬퍼할 일이 아니고 기뻐해야 하는 일입니다.

 

지금 서머나 교회 성도들은 극심한 환난을 받고 있어요.

죽음에 넘겨지는 고난을 당하고 있어요.

그러나 주님께서 위로하십니다.

 

너희가 죽는 것은 둘째 사망을 피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이는 영원한 지옥 불에 들어가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심판이 있어요.

 

예수를 믿는 자들은 생명으로 부활로 나아오고!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은 심판의 부활로 나아와요.

생명의 부활이란? 천국에서 살아가는 것이고!

심판의 부활이란? 영원한 지옥 불에 들어가는 것이에요.

폴리캅이 자기를 죽이는 세상 권세를 잡은 로마의 총독에게 말한 영원히 꺼지지 않는 그 불 구덩이에요.

 

성도에게 시험이란? 너는 하나님 아들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확인하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환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당하더라도 놀라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을 봅시다.

 

벧전 4:12-14절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라고 하지요.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입은 자들아 그런 뜻이에요.

다른 말로 내 아들들아 이 말이에요.

 

하나님은 자기 아들들을 불 시험으로 제련하는 일을 하세요,.

시험 하세요.

남에 새끼는 시험할 일이 없어요.

 

이건 우수갯 소리인데 언중 유골이에요.

에베소교회가 이단들과 싸운다고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잖아요.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반목하였잖아요.

 

그런데 이러한 사분오열을 하나로 묶는 것이 외부로부터 공격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같은 집에서 싸움을 하다가도 외부로부터 공격을 받아서 공동의 이익이 무너지게 생기면 싸움을 중단하고 하나로 뭉쳐요.

이게 전쟁이 주는 유익이에요.

참 아이러니 하지요.

 

하나님은 교회가 이단들 좇아낸다고 분열을 하니까 전쟁에 붙여버린 것입니다.

그게 서머나 교회가 당하는 고난인 것입니다.

죽느냐 사느냐 라는 기로에 서자 하나로 뭉치게 된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에베소 교회의 미끄러짐을 서머나 교회에서 회복을 하는데 어떻게 하는가 하면 외부로부터 공격을 당하게 함으로서 회복을 시킨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으로서 하나로 묶는 일을 하셨어요.

유대인과 이방인 간에 막힌 담을 허물었어요.

십자가 안에서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화목제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위로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아래로는 형제간에 화목을 이루셨어요.

그럼 교회가 십자가 때문에 환난을 당하게 되는 것은 곧 그 환난이 허물어졌던 형제간에 의를 돈독하게 해 주는 단초를 제공해 준 것입니다.

 

환난은 교회 안에서는 형제를 묶어주는 일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하나님과 가까이 하게 되는 것으로 나타나요.

그래서 성경은 예수 때문에 당하는 환난을 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닥치는 시험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이에요.

이는 곧 너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을 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서 당하셨던 그대로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을 대신하여서 시험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험을 당하거든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당연한 것이라 여기고 기뻐하라고 하는 겁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먹으면 복이 있다고 해요.

이는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복을 이미 받았기 때문에 세상이 이를 알고 시험을 하는 겁니다.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야! 저기 정낙원이가 우리 편이 아니다 라고 하면서 핍박을 하는 것입니다.

 

죽음에 던져 보면 그 속에 부활의 영이 없는 사람은 다 손들고 도망가요.

신앙의 시험은 죽음보다 더 확실한 시험 방법이 없어요.

부활 하신 예수님과 연합이 된 성도는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가요.

이는 언약이 그 사람을 이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6장을 봅시다.

 

삼상 6:7-15= “그러므로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소에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8 여호와의 궤를 가져다가 수레에 싣고 속건제 드릴 금 보물은 상자에 담아 궤 곁에 두고 그것을 보내어 가게하고 9 보아서 궤가 그 본 지경 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 손이 아니요 우연히 만난 것인 줄 알리라 10 그 사람들이 그같이 하여 젖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 11 여호와의 궤와 및 금쥐와 그들의 독종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수레 위에 실으니 12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까지 따라 가니라 13 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눈을 들어 궤를 보고 그것의 보임을 기뻐하더니 14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소를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15 레위인은 여호와의 궤와 그 궤와 함께 있는 금 보물 담긴 상자를 내려다가 큰 돌 위에 두매 그 날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께 번제와 다른 제를 드리니라”

 

벧세메스로 가는 소를 보세요.

이방 땅에 있던 소가 법궤를 싣고 하나님의 땅인 벧세메스로 가지요.

벧세메스는 태양의 집이란 뜻이에요.

거긴 제사장들이 사는 곳이에요.

이름하여 천국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암소 두 마리가 법궤를 실은 수레를 끌고 갑니다.

그런데 수레를 끄는 사람이 없어요.

이는 법궤가 소를 이끌고 있다는 뜻입니다.

쉬운 말로 소 등짝에 법궤가 실려 있는 것입니다.

법궤가 소를 이러 저리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법궤를 실은 소가 웃으면서 가지 않아요.

울면서 가요.

이는 세상의 모든 정(情)을 끊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세상의 정(情)을 하나 둘씩 끊어 나가는 것이에요.

 

부모의 정도 끊고!

형제간의 정도 끊고!

자식간의 정도 끊고!

친구간의 정도 끊어요.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려야 한다고 했어요.

이는 예수님에게 연합 되어 끌려가는 삶이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눈에는 세상에 것들이 아른 거려요.

그래서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도 가야 해요.

울면서라도 가야 하는 길이에요.

 

주께서 우리 등짝에 올라 타서 이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걸 눈물로 씨를 뿌린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은 눈물로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 바깥에 있는 것으로 단을 거두는 일이에요.

 

세상 것으로 단을 거두지 않아요.

도리어 세상 것을 빼앗겨요.

그러므로 울면서 가는 길입니다.

 

혹자들의 말처럼 기독교는 열심히 충성하면 복을 받는다는 그런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이 세상 것으로 보상해 주시는 분이 아니에요.

성도들의 분깃은 하늘에 있는 것이지 땅에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 누가 교회에 열심히 충성하면 복을 받는다고 하거든 그 놈은 사기꾼이에요.

교인들이 주머니에 있는 돈을 울궈먹고자 사기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우리의 열심 경쟁도 아니고!

충성 경쟁도 아니고!

누가 누가 오래 참는가 경쟁하는 것도 아니에요.

 

우리 힘으로는 도무지 갈 수 없는 그 길을 차가 견인당하여 가듯이 주님께 이끌려 가는 것입니다. 

이 길은 아무나 갈 수가 없어요.

우리의 의지나 각오로 갈 수가 없어요.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만이 갈 수가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를 따르겠다고 하자!

아서라!

말아라!

이 길은 너희가 원해서 가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어야 가는 길이라고 하시면서 돌아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는 내가 믿고 싶다고 해서 믿는 것이 아니에요.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만이 믿을 수가 있어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을 한 자들에게만 예수가 믿어지는 믿음을 선물로 주셨어요.

 

그러니까 예수가 믿어지는 선물을 받은 성도들은 그 길이 눈물 골짜기임에도 벧세메스로 가는 두 마리 암소처럼 울면서 가게 되는 것입니다.

모성애가 가장 강한 것이 소인데 그런 암소가 젖을 먹어야 하는 자기 새끼를 떨어뜨려 놓고서 가는 그 길이 어찌 가슴이 찢어지지 않고 아픔이 있지 않겠어요.

 

그런데 말이죠.

더 잔인한 것은 울면서 갔는데 제물로 바쳐집니다.

이게 성도의 운명이에요.

 

우리가 예수를 잘 믿으면 하나님이 오냐 고맙다고 하면서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고난과 핍박의 자리로 끌고 가요.

복음을 주시고서는 욕을 먹을 자리로 밀어넣으세요.

 

하나님은 우리 안에 예수라는 씨를 심어 놓았어요.

이 씨는 우리가 죽어야 싹을 내요.

우리가 죽은 그 자리에 예수그리스도가 드러나게 되어요.

그러므로 성도는 이 땅에서 날마다 죽음에 넘기워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주께서 그렇게 간섭을 하세요.

 

죽도록 충성 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준다는 말은 충성하면 면류관을 준다는 말이 아니에요.

이건 교인들의 충성 경쟁을 이끌어내기 위하여 쓰는 말이 아니에요.

충성이란 말은 믿음이란 말과 같아요.

 

그러니까 믿음이 우리를 이긴 자의 자리로 끌고 간다는 말이에요.

이 시대 거짓 목사들이 교인들의 충성을 이끌어내고자 하는 말이 아니에요.

성경은 우리의 열심을 이끌어 나고자 하신 말씀은 그 어디에도 없어요.

 

설령 그러한 뉘앙스의 말씀이 있다 할지라도 그건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일들을 일으킨다는 말이지 우리더러 없는 열심을 끄집어내라는 말이 아니에요.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시작도 주께서 하셨고 진행도 주께서 하시고 결과도 주께서 도출을 해 낸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우리의 열심과 우리의 충성심으로 일을 이루라고 하지 않아요.

 

창조주이시고 언약의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주님께서 우리 안에 심어 놓은 그 언약을 주님의 열심으로 이루어 내세요.

우린 그 하나님의 열심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천국에서 할 일은 오직 주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에요.

그 은헤의 영광을 찬미하는 일이에요.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하여 지음을 받은 자들이에요.

 

그러므로 두 마리 암소가 됩시다 라고 말하면 안 되어요.

성경은 두 마리 암소를 닮으라고 하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두 마리 암소를 어떻게 간섭하셔서 그 언약을 이루어내시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두 마리 암소들이에요.

우리의 등짝에 언약이 짊어져 있어요.

우리 어께에 언약을 짊어지게 하신 그 주님이 우리를 언약을 이루는데 도구로 사용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죽도록 충성하는 그 자리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두 마리 암소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갔다고 하지요.

어떻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가요?

그 등짝에 예수님이 올라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소를 보지 마세요.

그 소를 누가 끌고 가고 있는지를 보세요.

나를 보지 마세요.

내 등짝에 누가 타고 있나를 보세요.

내 등짝에 올라타고 계신 그 분이 나를 그 분의 집으로 무사히 데리고 가실 것입니다.

 

성도의 몸에는 창세전 언약이 심겨져 있어요.

그 언약이 우리 인생을 끌고 가고 있어요.

이걸 견인이라고 합니다.

요셉을 보세요.

 

시편 105편입니다.

 

시 105:8-19= “그는 그 언약 곧 천대에 명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 9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이며 이삭에게 하신 맹세며 10 야곱에게 세우신 율례 곧 이스라엘에게 하신 영영한 언약이라 11 이르시기를 내가 가나안 땅을 네게 주어 너희 기업의 지경이 되게 하리라 하셨도다 12 때에 저희 인수가 적어 매우 영성하며 그 땅에 객이 되어 13 이 족속에게서 저 족속에게로, 이 나라에서 다른 민족에게로 유리하였도다 14 사람이 그들을 해하기를 용납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연고로 열왕을 꾸짖어 15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 하셨도다 16 그가 또 기근을 불러 그 땅에 임하게 하여 그 의뢰하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17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18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19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하나님께서는 천대에 명하신 언약을 기억하신다고 하지요.

아브라함에게 그 언약을 세우시고!

이삭에게 그 아들을 통해서 이루신다고 맹세 하셨고!

야곱을 가지고 언약을 이루어 가셨다고 합니다.

 

야곱의 언약을 누가 이루었는가 하면 그 아들 요셉이었어요.

말씀이 응하기까지 요셉을 단련을 하였다고 하지요.

이는 하나님께서 요셉 안에 심어 놓은 언약을 다 이루기까지 끌고 갔다는 말입니다.

 

요셉의 언약이 뭔가요?

형제들의 주(主)가 되는 것이에요.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을 때 형제들의 주(主)가 되는 복을 받았어요.

 

창세기 27장을 봅시다.

 

창 27:28-29=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29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이삭이 야곱에게 장자를 축복하는 내용을 보면 형제들의 주(主)가 되고 어미의 아들들이 굴복을 한다고 합니다.

알다시피 야곱에게 형제는 에서 한 명 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 어미인 리브가의 아들도 에서와 자기 둘 뿐이에요.

 

형제들이 되고 어미의 아들들이 되려면 최소한도 형제가 여럿이 있어야 해요.

그런데 야곱에겐 형제라곤 달랑 에서 한 명 뿐이에요.

그러니까 야곱이 받은 장자의 복의 내용은 야곱이 이루는 것이 아니고 그 후손이 이루게 된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야곱의 받은 장자의 복은 그 아들 요셉이 성취합니다.

 

창세기 37장을 봅시다.

 

창 37:2-11=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 칠세의 소년으로서 그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에 그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로 더불어 함께 하였더니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 3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4 그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 5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6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컨대 나의 꾼 꿈을 들으시오 7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 하더이다 8 그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 꿈과 그 말을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9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10 그가 그 꿈으로 부형에게 고하매 아비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너의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모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11 그 형들은 시기하되 그 아비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더라”

 

야곱의 약전에 요셉이 들어가지요.

약전(略傳)이란? 이력서에요.

그러니까 요셉이 야곱의 삶을 대신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요셉은 독자적인 인생이 없어요.

그래서 요셉이 총리로 있으면서 낳은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도 야곱이 자기 아들이라고 하면서 빼앗아 버린 것입니다.

 

요셉은 야곱이 받은 장자의 복을 이루어가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야곱이 아비 이삭으로부터 받은 장자의 축복에 내용인 형제들의 주(主)가 되는 꿈을 꾸고 그 인생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요셉의 꿈을 보면 자기 곡식단은 중앙에 일어서고 나머지 형제들이 곡식단들은 둘러서서 그에게 절을 한다고 하지요.

또한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자기에게 절을 한다고 하지요.

 

이는 자신이 부모 형제들의 주(主)가 된다는 말이에요.

실제로 요셉은 그 꿈대로 주(主)가 되었어요.

그러므로 요셉은 다른 형제들의 출생과 다른 모습으로서의 출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30장을 봅시다.

 

창 30:1-24=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 형을 투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2 야곱이 라헬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그대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 14 맥추 때에 르우벤이 나가서 들에서 합환채를 얻어 어미 레아에게 드렸더니 라헬이 레아에게 이르되 형의 아들의 합환채를 청구하노라 15 레아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네가 내 아들의 합환채도 빼앗고자 하느냐? 라헬이 가로되 그러면 형의 아들의 합환채 대신에 오늘밤에 내 남편이 형과 동침하리라 하리라 16 저물 때에 야곱이 들에서 돌아오매 레아가 나와서 그를 영접하며 이르되 내게로 들어오라 내가 내 아들의 합환채로 당신을 샀노라 그 밤에 야곱이 그와 동침하였더라 ~ 22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를 들으시고 그 태를 여신고로 23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24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함이었더라

 

라헬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야곱에게 투정합니다.

그러자 야곱이 내가 하나님이냐 하면서 짜증을 냅니다.

그러다가 맥추 때가 되었어요.

 

르우벤이 맥추 때에 들에 나가서 합환채를 가지고 옵니다.

이걸 라헬이 보았어요.

합환채란? 임신 촉진제에요.

이는 영적으로 성령을 말해요.

 

르우벤은 그것을 자기 어미인 레아에게 주고자 가지고 온 것이에요.

그런데 라헬이 그것을 달라고 합니다.

이에 르우벤이 이건 우리 엄마 줄 것이니까 자기 엄마에게 물어보라고 합니다.

 

라헬이 언니 레아에게 제안을 합니다.

오늘은 내가 남편과 잠자리를 하게 되는 순번인데 언니가 나에게 합환채를 주면 오늘 밤에 내 남편을 언니에게 주겠다고 합니다.

이에 레아가 그러자고 하면서 라헬에게 합환채를 주었어요.

그러니까 라헬은 남편하고 합환채를 바꿔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어요.

그동안 수없이 남편하고 잠자리를 했지만 아들을 낳지 못하였는데!

합한채를 먹고서는 그 날 밤에 덜커덩 아들을 가진 것입니다.

 

그가 요셉이에요.

그러니까 요셉은 야곱이 낳은 것이 아니고 합환채로 낳아진 자에요.

요셉을 낳아준 라헬의 신랑이 야곱이 아니라 합환채에요.

영적으로 말하는 것이니 잘 이해하세요.

 

맥추 때는 신약으로 하면 오순절이에요.

오순절에 성령이 오셨어요.

그 성령으로 낳아진 자들이 누구인가 하면 성도들이에요.

 

잘 보세요.

야곱은 옛 남편을 말해요.

이는 육체로 오신 예수님을 말해요.

육체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를 낳지 못해요.

 

그 분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러 오셨어요.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자 오셨어요.

그러므로 육체로 오신 예수하고는 아무리 많이 부대껴도 아들로 거듭나지 않아요.

거듭나는 것은 그 분이 가시고 오순절에 성령으로 오셔야 해요.

 

부활하신 예수님이 오순절에 성령으로 다시 오셨어요.

이 오순절이 맥추 때에요.

그 맥추 때에 얻어진 합환채가 바로 성령으로 오신 새 신랑인 것입니다.

이 새 신랑하고 자야 아들이 생겨요.

 

아니나 다를까!

오순절 날에 새 신랑인 성령이 오시자 아들이 쑥 쑥 낳아지는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언약으로 낳아진 요셉과 같이 이긴 자들인 것입니다.

영적인 이야기이니까 잘 이해하세요.

 

야곱은 합환채를 먹고 낳아진 요셉에게 채색옷을 입혀 주었어요.

이는 너는 형제들과 다른 아이란 뜻입니다.

형제들은 육으로 낳아진 아이들이라고 한다면 요셉은 성령으로 낳아진 아들이에요.

 

성령으로 낳아진 자에게 채색옷을 입혀 주어요.

채색옷이란? 무지개 옷인데 이는 노아 때의 무지개 언약을 품은 자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셉에게만 꿈을 주신 겁니다.

 

무지개 언약이란? 흠 없는 자가 죽어서 부정한 자들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무지개 언약 속에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숨겨져 있어요.

그러니까 성령을 상징하는 합환채를 먹고 난 요셉에게 채색옷을 입혀 주었다는 것은 너는 무지개 언약을 품고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채색옷을 입은 요셉에게 꿈을 줍니다.

무슨 꿈인가 하면 형제들의 주가 되는 꿈이에요.

요셉이 자기 형들과 아비에게 이 사실을 알려 줍니다.

 

그러자 형제들이 미워하여서 죽이고자 모의를 합니다.

그리곤 애굽으로 팔려가는 일을 당하게 됩니다.

이건 죽음을 상징해요.

마치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죽임 당한 것과 같아요.

 

다시 설명합니다.

맥추 때는 신약의 오순절을 상징해요.

그러니 요셉은 성령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성령으로 태어난 자가 하늘나라 장자에요.

하늘나라 장자에게 꿈을 주세요.

 

하나님으로부터 꿈을 받은 자는 형제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어 있어요.

이게 주가 되는 코스에요.

예수님께서 이 길을 가셨어요.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를 모신 자들은 한결같이 이 길을 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연대기적 의미로 순교 시대라고 했습니다.

이 시대 성도들은 모두가 예수그리스도가 가신 길을 갔어요.

죽음의 길이에요.

 

그런데 그들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고 하셨어요.

이는 죽음에서 살아나는 것이에요.

우린 모두가 서머나 교회에게 주신 그 약속을 받았어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 자들이에요.

왜냐하면! 사망을 이긴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허상이에요.

실상은 하늘에 있어요.

그러니까 허상에서 일어나는 일 때문에 낙심하지 마세요.

 

허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가 우리의 육을 죽이는 일이에요.

우리의 육이 죽는 것은 영으로 살아내기 위함이에요.

성도에게 있어 육체의 죽음은 씨가 죽어서 새로운 싹을 내는 것과 같아요.

 

그러므로 순교 당하는 서머나 교회에게 너희는 진 자가 아니라 이긴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고달프다고 하여도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담대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곧 오십니다.

 

 

기도 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가는 이 길이 비록 아프고 힘들다 할지라도 그 길이 주님과 연합하여 가는 길임을 알고 감사하게 하옵소서! 또한 우린 이미 이긴 자라는 사실을 알고 세상을 이기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하늘빛사랑 BLOG https://coroa.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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