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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계시록 강해

♣(요한계시록 강해) 4강. 다시 오시리라 (계 1:7-8)

by coroa 2022. 9. 11.

4강. 다시 오시리라 (계 1:7-8) 7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4강. 다시 오시리라 (계 1:7-8)

계 1:7-8=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정낙원 목사

 

오늘은 흥분 되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의 재림 소식을 전하여야 하기 때문에 흥분 할 수밖에 없어요.

제 마음이 너무 흥분이 되어요. 

신랑이 오신다는데 어찌 흥분하지 아니할 수가 있겠어요.

이 시간 우리 마음껏 흥분해 봅시다.

 

이거 아무나 흥분하는 것이 아니에요.

여러분은 천국의 로또에 당첨 되셨어요.

그러니 마음껏 흥분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이 재림 하시면 우리의 모든 수고와 슬픔이 다 끝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는 이 말씀이 우리를 얼마나 기쁘고 황홀하게 하고 흥분케 하는 말씀인지를 몰라요.

 

사도 요한이 하늘에 소식을 전해 왔습니다.

어떤 소식이냐 하면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소식입니다.

누구에게 전합니까?

환란 당하는 자기 백성들에게 전합니다.

성도에게 있어 이만큼 설레는 말씀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오실까요?

자기 신부들을 데리러 오세요.

이 세상을 심판하고 자기 백성들을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함입니다.

 

“볼지어다” 이 말은 강조형이에요.

 

하나님이 요한에게 “요한아 똑똑히 봐라!”

창세전 언약이 완성하는 때가 되었으니 정신 바짝 차리고 보고 들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고 심판주가 되셔서 죄악으로 얼룩진 세상이라는 역사를 끝장내고 죄와 상관이 없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우리를 인도하시기 위하여 오시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을 보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서 내려온다고 하지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새 하늘과 새 땅인 하나님 나라를 말해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내려오는 것과 같아요.

 

예수님께서 초림으로 오셨을 때는 세례요한이 보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하였지요.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천국을 몰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 때 천국은 영적인 천국이에요.

각 사람의 마음속에서 영적으로 맛보고 느끼게 되는 천국이었어요.

 

그러나 재림으로 오실 때는 실제 천국을 몰고 오세요.

실제적으로는 우리가 천국으로 가지만 표현적으로 말을 할 때는 우리가 천국에 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허락하신 것이므로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늘로서 내려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천국이 우리에게 침노해 온다고 해요.

영적 천국이든 실제 천국이든 우리에게 침노해 와요.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천국이 우리에게 침입해 들어와요.

오늘 설교를 들으면 이걸 이해하게 될 거에요.

 

구름을 타고 온다는 것은 초림 때와는 다르게 위엄과 영광스럽게 온다는 말입니다.

개선장군처럼 말이에요.

초림 때는 연한 순처럼 비천한 모습으로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오셨어요.

그러나 재림은 달라요.

보무도 당당하게 심판하는 왕으로 오세요.

 

역사는 시작과 끝이 있어요.

역사는 시작과 동시에 끝으로 달려가고 있어요.

그 역사 속에 우리가 살고 있어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역사 속에서 일을 하세요.

 

그러니까 시간이 흐를수록 종말은 점점 더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역사 속의 시간 개념으로는 예수님의 재림이 하루 하루 가까워 오는 것입니다.

“오시리라” 라는 것이 “엘코마이” 인데 “현재 진행형”으로서 이는 “지금도 오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재림을 지금도 오고 계신다는 의미로 현재 진행형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오고 계신다는 것이 믿어지는 사람은 어떻게 기다릴까요?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겠지요.

거울 앞에 서서 자기 옷매무새를 살펴보고 기린처럼 목을 길게 내 밀고 동구 밖을 쳐다보면서 말이에요.

이걸 자다가 깰 때가 벌써 지났다고 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으며, 오셨고, 오실 것이에요.

 

예수님을 일컬어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고 하지요.

이는 전에도 오셨으며, 지금도 와 계시고, 장차도 오실 것이란 말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세 번 오심이 되지요.

잘 이해하고 들으세요.

 

예수님은 세 번 오세요.

세 번 오신다고 하니 뜨악하지요.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삼직(三職)을 이해하면 쉬워요.

 

예수님은 선지자이고, 제사장이고, 왕이세요.

이 삼직(三職)은 예수님께서 역사 속에서 다 이루실 것들이에요.

이걸 예수님께서 탄생 하실 때 동방 박사들이 예물로 증거해 주셨어요.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에게 몰약과 향품과 황금을 드리지요.

 

첫째, 몰약은 방부제로서 시체에 바르는 것이에요.

 

이는 예수님께서 선지자로서 백성들의 죄를 책망 하시다가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죽임 당할 것을 상징으로 드리는 예물이에요.

선지자들은 모두가 하나님 입장에서 백성들의 죄를 고발하다가 백성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죽임을 당해요.

 

예수님은 초림으로 오셔서 이 역할을 하시다가 죽임 당하셨어요.

이는 예수님의 어제의 사역이에요.

역사적으로 보면 과거의 사역이란 말입니다.

 

둘째, 향품은 제사장들이 성소 안에서 향을 피워서 성막 안을 향기롭게 하는 것이에요.

 

이것은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의 제사장이 되셔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피우는 일을 하시고 계심을 말해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라고 하지요.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도록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향품은 제사장에게 드리는 예물로서 이는 곧 예수님의 제사장 역할을 말해요.

 

이는 예수님의 현재의 사역이에요.

지금 우리 안에서 제사장으로서 일을 하시고 계세요.

그러므로 이제도 계심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 황금은 왕을 상징해요.

 

이는 장차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으로 재림을 하실 것을 말해요.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은 초림과 달리 천사들의 나팔 소리로 개선장군처럼 오세요.

아주 위엄 있고 당당하게 오신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황금은 예수님의 왕 되심을 증거하는 예물인 것입니다.

이는 미래에 일어날 일이므로 장차의 사역이 됩니다.

 

그래서 제가 예수님이 세 번 오신다고 하는 겁니다.

 

첫째로는, 육신을 입고 오신 초림이고.

두 번째는, 성령으로 우리 안에 오신 것이고.

세 번째는, 영광의 왕으로서 재림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 번 오신다고 하는 것은 영적인 의미에서 하는 말이니 오해하지 말고 잘 이해하세요.

 

초림과 재림은 다 아는데 두 번째 오심을 잘 몰라요.

이게 굉장히 중요한 사건인데 말이죠.

두 번째 오신 예수님이 없으면 재림은 저주에요.

현재의 예수가 없으면 장차의 예수는 저승사자에요.

장차의 예수는 현재의 예수를 모시고 사는 자들에게 영광의 주이고 만왕의 왕인 겁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것은 두 번째 오신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자들을 데리러 오시는 것입니다.

재림은 누가 기다리느냐 하면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와 계신 예수님과 사는 자들이에요.

이 부분을 이해를 돕기 위해서 보충 설명합니다.

 

요한복음 14장을 봅시다.

 

요 14:16-21=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예수님께서 내가 가면 다른 보혜사를 보낸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오리라” 라고 하십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본다고 하고!”

“그 날에는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하지요.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세요.

그러므로 성령의 오심은 곧 예수님의 오심과 동등한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항상 함께 계세요.

 

그러므로 성령이 오시는 그 날에는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있고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도 우리 안에 있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가 오면 우리 속에 계신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성령의 오심은 곧 예수님께서 오신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시지요.

잘 이해하세요.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모두가 다 보았어요.

그러나 성령으로 오시는 예수님은 오직 자기 백성들만 알아요.

그러니까 새 언약 안에 있는 자들에게만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오신 예수님은 가현(假現)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에요.

이건 마치 바람이 불면 그 바람 자체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처럼 나타난 사건으로 인하여 바람이 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과 같아요.

 

성령을 받은 성도들도 마찬가지에요.

어떤 사건 속으로 이끌림 당해요.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예수님의 삶으로 우리를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 성령으로 오신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성도들은 이 땅에서 예수님이 당하셨던 일들이 삶 속에서 가현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으로 성도들 안에 오신 예수님을 제사장으로 오셨다고 해요.

예수님이 친히 제사장이 되셔서 우리를 제물로 삼아서 하나님께 드리는 일을 행하세요.

이건 성령이 그 안에 거하는 성도들은 알아요.

이게 두 번째 오심이에요.

 

그리고 세 번째 오심은 재림이에요.

이 때는 왕으로서 심판주로 오세요.

모든 족속들이 다 보이게 오십니다.

 

이걸 성막의 세 구분으로 이해 할 수가 있어요.

 

첫 번째, 육체로 오심은 뜰과 같고,

두 번째, 성령으로 오심은 성소와 같고,

세 번째, 왕으로 오심은 지성소와 같아요.

 

뜰은, 제물이 죽어서 번제단에 태워지는 곳으로서 예수님이 선지자 직을 감당 하시다가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과 같아요.

 

성소는, 성령으로 성도들 안에 오셔서 제사장들이 성소에서 떡상을 진설하고 등대 불을 밝히고 향을 피우는 것과 같이 예수님이 성도 안에서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시고 기도하게 하시고 봉사하게 하시는 것과 같아요.

 

지성소는, 대 제사장이 들어가서 하나님과 만남을 가지는 곳입니다.

이는 장차 예수님이 왕으로 재림을 하셔서 하나님 앞에 대 제사장이 되셔서 자기 백성들을 데리고 하나님 앞에 바치는 일들을 하는 것과 같아요.

 

성막은 세분화 하면 뜰과 성소와 지성소 세 부분으로 구분을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로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찢어짐으로서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큰 틀에서는 성막은 두 구분으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이걸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으로 이해하여서 세분화 하면 초림과 성령 강림과 재림으로 세 번이지만 큰 의미에서는 초림과 재림 두 번인 것과 같아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시는가요.

 

이걸 다시 절기로 말하면 봄 절기 여름절기 가을절기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봄 절기로는,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이 있고!

여름 절기로는, 오순절부터 가을 절기가 되기까지 넉 달 농사 기간이 있어요.

가을 절기로서는, 나팔절과 속죄일과 초막절이 있습니다.

 

봄 절기는, 예수님의 초림을 상징하고!

여름 절기는,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 안에 오심과 같고!

가을 절기는, 예수님의 재림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초림을 상징하는 봄 절기는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이 있다고 했습니다.

 

유월절은,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하고!

무교절은, 무덤 속에 계심을 상징하고!

초실절은,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해요.

 

그리고 초실절을 기점으로 50일 후가 되면 칠칠절이 있어요.

 

칠칠절을 다른 말로 오순절이라고 합니다.

이는 성령 강림절로서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살아가게 하는 일을 하십니다.

 

쉬운 말로 봄 절기는 씨를 뿌리는 것과 같아요.

하나님께서 예수라는 씨를 이 세상에 뿌린 겁니다.

그리고 오순절에 이르러서 죽었던 씨가 발아하여서 싹을 내고 열매를 맺어가는 수순으로 접어든 것입니다.

 

넉 달 농사가 지나면 가을 절기로서 나팔절이 시작이 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천사장의 나팔 소리로 재림하시는 것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재림을 하셔서 대 제사장이 되셔서 자기 피로 속죄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장막인 천국으로 데리고 가서 영원토록 잔치하게 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는 것은 의미적으로는 세 번이 되어요.

처음과 마지막인 초림과 재림은 가현적으로 모든 인간들이 보는 가운데 오셨지만 두 번째는 오직 자기 백성들 속에 오셨기 때문에 영적인 것입니다.

 

영적으로는 세 번이지만 역사 속에서 실제 하는 모습으로 오시는 것은 두 번 오세요.

그래서 큰 틀에서 초림과 재림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해되시지요.

 

그럼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을 이스라엘의 결혼 풍습으로 살펴봅시다.

 

이스라엘의 결혼 풍습을 보면 정혼(定婚)과 결혼(結婚)이 있습니다.

정혼이란? 한국식으로 말하면 약혼(約婚)과 같습니다.

이것은 신부 집에서 합니다.

 

신랑이 신부 집으로 찾아가서 정혼을 합니다.

이 때 신랑은 신부의 아버지에게 “모하르” 라는 값을 지불해요.

일종의 신부의 값인 겁니다.

 

이건 예수님께서 성도를 값을 주고 사 온 것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결혼 풍습 속에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구속사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신랑은 자기 신부가 될 여자에게 당신은 내 것이라는 의미로 자신의 것으로 빙폐물을 주어요.

거기엔 의복서부터 귀걸이 목걸이 코걸이 손목고리 등 신부를 치장하는 장신구들이 있어요.

신부는 신랑이 준 장신구와 옷을 입음으로서 나는 이제 당신의 여자입니다 라는 것을 고백하게 되는 겁니다.

 

귀걸이를 함으로서 “나는 당신의 말만 듣겠습니다!” 라는 의미가 있고!

목걸이는 “나는 당신을 생명처럼 받들겠습니다!” 라는 의미가 있고!

코걸이는 “나는 당신이 이끄는 대로 끌려가겠습니다!” 라는 의미가 있고!

손 목걸이는 “나는 당신의 일만 하겠습니다!” 라는 의미가 있어요.

그리고 옷은 “내 몸과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하여서 당신을 사랑하고 살겠습니다!” 라는 의미가 있어요.

 

이스라엘의 결혼은 일종의 매매(賣買)와 같아요.

신랑이 신부를 갚을 주고 사오기 때문입니다.

이건 신부를 신랑의 은혜 안으로 가두기 위함이에요.

그러므로 신부는 신랑을 주(主)로 받들고 종속된 관계로 감사함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신랑은 신부에게 자신의 것을 줌으로서 계약이 성사가 되었음을 알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요.

 

이스라엘은 정혼과 동시에 법적(法的)인 신부가 됩니다.

비록 함께 살진 않지만 법적으로는 신랑의 신부로 살게 되어요.

신부는 약혼과 동시에 절대로 외간 남자에게 눈길을 주어서는 안 되어요.

 

신랑은 떠나면서 대충 언제쯤 올 것이라고 알려 줍니다.

그 때까지 몸 간수 잘하고 기다리라고 합니다.

그럼 신부는 정혼과 동시에 신랑이 주고 간 빙페물로 단장을 하고서 떠나간 신랑을 기다리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첫날밤은 신랑의 집에서 치르게 되어요.

이건 이삭이 리브가를 밧단 아람에서 가나안으로 데리고 와서 사라의 장막에서 초야(初夜)를 치른 것으로 이해하시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약혼을 하고 결혼을 하기까지 보통 1년에서 3년 정도 걸렸어요.

더 길게 걸린 경우도 있지만 보편적으로 1년에서 3년 사이에 해요.

그럼 신부는 1년에서 3년 동안 기다리면서 외간 남자들의 유혹을 물리쳐야 해요.

만약에 유혹에 넘어가 몸을 범하게 된 것이 들키면 돌로 쳐 죽임을 당해요.

 

신랑은 첫 날밤을 보내고 신부가 처녀임을 입증하기 위하여 잠자리를 한 흰 천에 묻은 처녀성을 증거하는 피를 가지고 이 사람은 순결한 처녀입니다 라고 동네 사람들에게 증거를 해야 해요.

그런데 만약에 여자가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바람을 피웠어요.

 

그럼 처녀성을 상실하여서 신랑과 첫 날밤을 보낼 때 혈흔이 없게 됩니다.

처녀성을 상실해서 혈흔이 없으면 신랑이 동네 사람들에게 이 여자는 처녀가 아닙니다 라고 하면 돌이 맞아 죽어야 해요.

 

그런데 만약에 신랑이 그 신부를 너무도 사랑한다고 하면 자기 옆구리에 칼로 상처를 내서 피를 내서 흰 천에 뿌려서 신부를 죽음에서 면하게 해 줍니다.

자기 피로 혈흔을 만들어서 이는 정절을 지킨 자라고 하면서 신부의 죄를 자기가 대신 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예수님과 우리에게 적용을 하면 예수님은 초림으로 오셔서 우리와 약혼하고 가셨어요.

가시면서 선물들을 주고 가셨어요.

그럼 우리는 예수님이 주신 것들로 단장을 하고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린 믿음에 정절을 지키지 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 옆구리에 피를 쏟아서 우리를 지켜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하고 잘나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자기 피로 우리의 죄를 감싸 주시기 때문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너희가 비록 믿음에 정절을 지키지 못하고 살더라도 신랑이 흘린 그 피로서 정죄함으로부터 이겨 내라고 하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으세요.

 

이스라엘은 언약의 민족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풍습 속에 언약 백성이 이 땅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담아 놓았습니다.

그래서 결혼 풍습 속에도 복음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이 세상을 창조했습니다.

창세전 언약을 보면 세상 속에서 자기 백성들이 구원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하면 예수님을 통해서 받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죄 아래서 건져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온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을 입은 민족입니다.

이는 곧 창세전 언약 속에 자기 백성들이 죄에서 건짐 받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신약으로 오면 예수님에 의해서 성도들이 구원을 받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냈습니다.

왜? 보냈느냐 하면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려고 보냈습니다.

자기 백성들을 일컬어 신부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이스라엘의 결혼 풍습으로 보면 신랑이 신부 집으로 찾아가서 정혼을 하기 위함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림은 자기 신부들과 정혼을 하고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신부와 정혼을 하고서 자기 집인 하늘나라로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면서 신부에게 당부합니다.

내가 다시 와서 그대를 내 집으로 데리고 가겠다는 약속을 하고서 떠나 가셨습니다.

가시면서 신부인 성도들에게 빙폐물들을 주고 가셨습니다.

이름하여 성령의 은사들입니다.

 

예수님의 신부로 선택을 입고 정혼을 한 성도들은 이제부터 신랑이 오실 때를 기다리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를 신앙생활이라고 하고 흔한 말로 신부 단장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 사람들이 하늘을 보고 천기(天氣)를 분별하듯이 너희는 시대의 징조를 보고서 종말의 때를 분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곧 신랑이 신부와 정혼을 하고서 떠나면서 내가 어느 때 쯤 오겠다고 일러 주신 것과 같습니다.

그럼 신부는 때를 보고서 신랑이 오실 때를 가늠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결혼은 밤에 합니다.

신랑이 밤에 옵니다.

신부는 신랑이 준 빙폐물로 단장을 하고서 밤마다 등불을 밝혀 놓고 기다리게 됩니다.

 

이 때 신부의 여자 친구들이 들러리로 서 있어요.

그럼 신랑은 들러리 속에 숨어 있는 자기 신부를 찾아내야 합니다.

어떻게 찾아내는가 하면 신부는 자기가 준 빙폐물로 단장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랑은 자기가 준 빙페물로 단장을 하고 있는 신부만 데리고 와요.

 

이걸 마태복음 25에서 열 처녀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마 25:1-13=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6 밤 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 새 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달라 하거늘 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이스라엘의 결혼식에는 여자 친구들이 들러리를 서요.

이들을 열 처녀 중에서 미련한 다섯 처녀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등은 가지고 있는데 기름이 없어요.

그러니 모양은 있는데 내용이 없는 겁니다.

 

하지만 신부는 등에 기름이 있어서 불을 밝히는 것입니다.

불은 기름이 밝히는 거에요.

기름이 없으면 불을 밝힐 수가 없어요.

기름은 성령과 같아요.

 

예수님은 자기 신부에게는 성령을 주셨어요.

그러므로 신부가 될 성도는 성령의 은사로 신랑이 기뻐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친구들은 성령이 없어요.

그러니 그들은 신랑이 기뻐하는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예수님의 신부들인 성도는 성령으로 성령의 소욕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신부의 친구들은 성령이 없으니까 육체의 소욕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육체의 소욕으로 살아가는 것을 일컬어 등불이 꺼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도를 일컬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지요.

이는 성도만이 참 빛이신 예수의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므로 성도는 이 세상 속에서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생명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생명으로서 살아가는 삶이 바로 빛 된 삶인 겁니다.

 

산상수훈에서 너희 빛을 말 아래 두지 말고 등경 위에 두라고 하지요.

이는 주께로부터 받은 은사를 땅에 묻어두지 말고 교회를 위하여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가 되어서 신랑으로부터 받은 빙폐물로 신랑의 여자로 살아야 해요.

이러한 신랑의 여자로 사는 것을 야고보서에서는 행함이라고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하지요.

귀신의 믿음이라고 하지요.

이는 신랑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은 신부는 반드시 삶으로 신랑의 삶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가짜에요.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고 귀신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행함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의 생명이 그 안에 있으면 자연 발생적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이를 두고 열매로 나무를 안다고 하는 것입니다.

 

행하라고 소리 칠 필요가 없어요.

나무가 맞다고 한다면 열매는 필연적으로 맺히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나무가 맞다고 하여도 열매를 맺기까지는 조금의 시간은 필요하니 지금 당장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너 가짜지 라고 정죄하면 안 되어요.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어요.

어떤 포도원에 나무를 심어 놓고 나중에 열매를 구하러 주인이 가서 그 나무를 보니까 아직까지 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한 겁니다.

그래서 주인이 과원지기에게 그 나무를 찍어내라고 하니까 과원지기가 주인에게 삼년만 기다려 달라고 합니다.

자기가 그 동안 거름을 주고 잘 보살펴서 열매를 맺게 하겠다고 합니다.

삼년 후에 와서 그 때도 열매를 맺지 않으면 찍어버리라고 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과원지기가 되어서 열매를 맺지 않는 우리들을 보살피고 있어요.

그러므로 누군가가 열매가 없다고 하여서 저 놈 가짜지 그러지 말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열심히 그 사람도 열매를 맺도록 간섭을 하고 계실 거니까요.

그러니 기다리자구요.

 

그럼 지금부터 예수님의 다시 오심이 어떻게 주어지는 것인가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예수님께서 초림도 창세전 언약에 의한 것이고 재림도 창세전 언약에 의한 것이에요.

하나님께서 정한 때에 맞추어져 일어나는 사건이란 말입니다.

이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의 사건 속에 우리의 구원도 들어가 있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도 창세전에 계획된 사건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게 깨달아져야 우리의 구원이 엄청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도행전 1장을 봅시다.

 

행 1:1-11=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3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6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하니 7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9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 올라 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11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40일 동안 세상에 계셨습니다.

부활하시고 바로 승천 하시지 않고 40일 동안 세상에 계시면서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에 대하여 말씀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늘로 올라 가셨습니다.

이를 승천(昇天)이라고 합니다.

승천이라는 말은 하늘에서 끌어 올렸다는 말이에요.

 

9절을 보면 “올리워 가시니” 라고 되어 있지요.

그리고 11절을 보면 “하늘로 올리우신” 이라고 하지요.

 

“올리워 가시니” 와 “올리우신” 이라는 말은 능동태가 아니고 수동태에요.

수동태란? 스스로 올라간 것이 아니고 누군가에 의해서 강제로 끌려올라 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스스로 능동적으로 올라 간 것이 아니고 아버지에 의해서 수동적으로 이끌려 올라간 것입니다.

쉬운 말로 견인당하여 간 거에요.

 

이게 왜? 중요한가 하면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이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세밀하게 계획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계획된 일이란 것은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되어지게 되어 있단 말입니다.

이건 취소되거나 실패 할 수 없는 일이에요.

 

우리의 구원이 그러해요.

실패 할 수가 없다는 말이에요.

반드시 구원 받을 수 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창세전에 이미 예정되고 계획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끌려 올라가셨으면 우리도 끌려 올라가게 되어 있어요.

 

데살로니가전서 4장을 봅시다.

 

살전 4:13-17=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8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예수님께서 재림을 하실 때 호령과 천사장의 나팔소리로 강림을 하신다고 하지요.

이 때 이 땅에 살아 있는 성도들을 하늘에서 구름 속으로 끌어 올린다고 하지요.

여기서 “끌어 올린다” 는 말이 “할파조” 라고 하는데 이는 “낚아챈다” “강제로 빼앗아 간다” “확 움켜잡는다” 라는 의미에요.

 

마치 독수리가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자기 새끼를 낚아채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낚아챈다는 말입니다.

마귀의 손에서 빼앗아 간다는 말입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을 승천 하실 때 끌어 올린 그 말이에요.

 

두 사람이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한다고 하지요.

두 사람이 밭을 매고 있는데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한다고 하지요.

여기서 데려감을 당한다는 말이 곧 끌어 올려진다는 말이에요.

낚아채 간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가기 싫어도 가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바울이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고 하는 겁니다.

지금은 당장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우리의 구원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그 소망으로 세상에서의 고난을 이겨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일하러 오셨어요.

일을 다 마치자 하나님이 퇴근 시킨 겁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귀국하신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도 아버지의 정한 때에 맞추어서 오셨어요..

 

갈라디아서 4장을 봅시다.

 

갈 4:1-5=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4절을 보면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냈다고 하지요.

“때가 차매” 라는 말은 창세전에 쓴 시나리오에 의한 그 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어떤 때인가요?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때에요.

 

1절을 보세요.

유업을 이을 아들이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같이 있다고 하지요.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 있다고 하지요.

 

초등학문이란? 율법을 말해요.

그래서 5절에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여서 아들에 명분을 얻게 해 주신다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우린 모두가 율법 아래서 종노릇 했어요.

 

율법이 뭔가요?

우리를 죄 아래 가두고 하나님의 심판 앞에 두는 거잖아요.

죄의 삯은 사망이에요.

그러므로 우리는 사망 가운데 가두어져 있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은혜 아래로 빼내 주셨어요.

사망 가운데서 생명으로 옮겨 주셨어요.

그런데 이 일을 무작정 마음 내키는 대로 한 것이 아니고 창세전에 언약 하신 그 때에 맞추어서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포도원 품꾼 이야기를 하셨지요.

포도원 주인이 장터에 놀고 있던 자들을 포도원으로 불러들인다고 하셨어요.

 

어떤 사람은 새벽에 부르고!

어떤 사람은 아침 9시에 부르고!

어떤 사람은 낮 12시에 부르고!

어떤 사람은 오후 3시에 부르고!

어떤 사람은 끝나기 한 시간 전인 5시에 불렀어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스로 포도원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고 주인이 불러서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일꾼들을 부르는 때가 각각 다 달라요.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에요.

큰 의미에서는 창세전에 이미 이루어진 것이지만 역사 속에서는 때가 있어요.

 

어떤 사람은 모태로부터 믿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청년 때 믿는 사람이 있고!어떤 사람은 장년 때 믿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늙어서 믿는 사람이 있어요.

 

복음을 깨닫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어떤 사람은 일찍 깨닫고!

어떤 사람은 늦게 깨달을 수가 있어요.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제 이야기로 하니까 양해하고 들으세요.

 

저 같은 경우에는 율법 아래서 수십 년을 헤맸어요.

제가 복음을 깨닫고 창세전 언약을 증거하기 시작한 지가 그렇게 오랜 세월이 아니에요.

그 동안에는 율법 아래서 종 노릇 했어요.

 

한 때는 성화해야 한다고 목소리 높이기도 했고!

어느 때는 신비주의에 빠져서 환상을 보고 꿈을 꾸기도 했고!

또 귀신을 좇아내고 병을 고친다고 은사주의도 해보았어요.

그 때는 열심은 특심했는데 복음을 몰랐어요.

 

하루에 12 시간씩 기도하고 산 기도에 철야에 좌우지간 미쳤어요.

제 아내가 미쳤다고 했다니까요.

열심과 충성은 대단했지만 마음은 늘 곤고했어요.

 

그러다가 이거 아닌데! 라는 마음이 드는 겁니다.

교회 안에서 남들은 믿음이 좋다고 칭송이 자자 하지만 정작 내 마음은 곤고하고 천근만근인 겁니다.

오죽 했으면 자살하려고 했겠어요.

믿고는 싶은데 믿어지지는 않으니 못 살겠는 겁니다.

 

그래서 에라이~ 이럴 바에는 콱 죽어 버리자!

하나님 앞에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시던지 아니면 날 데려 가라고 양자택일 하라고 했어요.

그런데 막상 죽으려고 하니까 죽음이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요.

 

전 죽음이라는 공포가 그렇게 무서운 줄 몰랐어요.

못 죽겠는 겁니다.

그래서 못 죽고 이렇게 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때부터 조금씩 조금씩 말씀이 깨달아지는 겁니다.

말씀이 달음질을 하는 거에요.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이 퍼즐 맞추어지듯이 아구가 착착 맞아 들어가는 겁니다.

서서히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잠을 재우지 않아요.

꿈에서도 혼자 설교를 하는 거에요.

평상시에도 혼자서 설교를 얼마나 했는지 몰라요.

 

전 그 때 말씀이 살아서 움직인다는 것을 처음 알았어요.

와! 이게 문자가 아니고 살아서 움직이는 생명이구나!

비로서 성경이 꿀 송이 같다는 말의 뜻이 뭔지를 알겠더라구요.

 

그러면서 때로는 책을 통해서 때로는 다른 목사님들의 설교를 통해서 서서히 복음에 대하여 윤곽을 잡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언약에 대하여 눈이 떠지면서 창세전 언약이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글로는 한 줄로 쓰지만 이러기까지 대충 십여 년이 걸렸어요.

많은 우여곡절도 있었구요.

 

창세전 언약이 깨달아지니까 성경 전체가 창세전 언약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주구장창 창세전 언약을 전하고 있는 겁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정한 때에 맞추어서 일하신 것이에요.

제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간섭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누가 복음을 모른다고 해서 고민하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일 것 같으면 다 때가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 당사자니까요.

 

그래서 누가 복음 안다고 하면서 복음 모르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업신여기고 정죄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러지 말라고 해요.

다 때가 있으니까 기다리라고 해요.

당신도 깨닫게 해 주어서 깨달은 것이니까 그 사람도 깨닫게 해 주실 때까지 기다리라고 해요.

홍해를 당신이 가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어떻게 갈라 주시는지 구경 좀 하자고 해요.

 

왜? 이런 말을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일을 하신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시나리오에 따라서 움직여요.

그래서 역사 속으로 오신 예수님도 하나님의 때에 맞추어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천도 마찬가지에요.

창세전에 계획 된 그 때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데려 가신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의 승천을 예수님 스스로 올라갔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데리고 가셨다는 뜻으로 “올리워 가셨다” 라고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낚아채 가셨다” 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재림도 하나님이 정한 때에 오세요.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이 오셔서 이스라엘을 회복 하는 때가 언제입니까 라고 물으니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 달려 있으니 너희는 그 때를 알려고 하지 말고 내가 맞긴 사명이나 잘 감당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군대생활 하다가 정한 때가 되어서 국가에서 전역을 시키는 것과 같아요.

전역은 내 맘대로 하는 것이 아니에요.

국가에서 정하고 시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올리워 가셨다”는 말은 예수님의 삶이 예수님 맘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에 의하여 살게 되었다는 뜻이에요.

다른 말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획표대로 사시다가 가셨어요.

 

빌립보서 2장을 봅시다.

 

빌 2:5-11=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님을 일컬어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라고 하지요.

하나님의 본체 라는 말은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알다시피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아요.

시간 바깥에 계신 분이에요.

시간 바깥에 계시다는 말은 피조물인 우리 몸과 다르다는 말입니다.

 

창조주의 몸은 피조물의 몸과 달라요.

어떤 이들은 하나님은 몸이 없다고 합니다.

아니에요.

하나님도 몸을 가지고 계세요.

다만 우리 몸과 다른 몸이에요.

 

출애굽기 33장을 봅시다.

 

출 33:19-2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20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2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섰으라 22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23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모세가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자 하나님께서 알았다 내가 너 앞을 지나갈 테니 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죄인이 나를 보고서는 살 수가 없으니까 그 대신 내 등만 보여 주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손으로 모세의 눈을 가리시고 얼굴은 보지 못하게 하고 등만 보여 주셨어요.

등이 있다는 것은 몸을 가지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몸이란? 우리의 몸과 다른 창조주로서의 몸이에요.

하나님은 형체가 없는 분이 아니고 형체를 가지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면 얼굴과 얼굴을 대하듯이 하나님을 보게 되어요.

 

예수님도 하나님과 함께 계셨을 때는 우리가 볼 수 없는 몸을 가지고 계셨어요.

그런데 역사 속으로 들어오시면서 그 몸을 벗고 역사에 속한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승천을 하실 때는 역사의 몸을 벗고 하늘에 몸을 입고 가셨어요.

 

이건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역사에 사는 몸이 있고 하늘에서 사는 몸이 있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면 하늘로부터 오는 장막을 덧입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 하나 살펴보고 갑시다.

 

고린도후서 5장을 봅시다.

 

고후 5:1-9=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2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3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6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땅에 장막이 무너지면 하나님이 지으신 집이 있다고 하지요.

무슨 말인가요?

육신의 몸이 죽으면 하늘에서 사는 몸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죽는다고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죽음은 새로운 몸을 받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 죽음을 슬퍼하지 말고 기뻐하라고 하는 겁니다.

이걸 증명하고자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다고 하잖아요.

 

성령은 부활의 영이에요.

그러니 죽어도 살려 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하신 몸처럼 말이에요.

예수님의 부활 하신 몸이 바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역사 바깥에 있는 묵시 속에서 살아가는 몸인 겁니다.

 

우리도 그 몸을 받아요.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사나 죽으나 다 죽의 것이니까 죽더라고 슬퍼하지 말고 또한 살더라도 이미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사는 몸이 따로 준비되어 있으니까 기 죽지 말고 당당하게 기쁨으로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기 죽지 않고 사는 이유가 다 여기에 있어요.

이러한 말씀들이 믿어지니까 큰 소리치면서 당당하게 사는 거에요.

이건 객기가 아니에요.

믿음이에요.

 

다시 예수님의 몸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예수님은 만물을 만드신 분이에요.

만물을 만들었다는 말은 만물에 속하지 아니하다는 말입니다.

만물 바깥에 계신 분이란 말입니다.

 

만물 바깥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몸으로 계셨어요.

그런데 아버지의 뜻에 의하여 만물 속으로 들어오신 겁니다.

만물 속에서 일을 하려니까 만물의 몸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 바깥에 몸을 가지고 계시던 분이 시간 속의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이걸 바울은 성령의 감동으로 설명을 하기를 예수님은 아버지와 같은 몸을 버리시고 피조물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걸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고 합니다.

 

7절을 보세요.

 

7절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자기를 비워서 하나님의 몸을 버리고 종의 형체 즉 우리 인간들의 몸을 가지셨다는 말입니다.

왜? 인간들의 몸을 가시셨나요?

이는 인간의 몸으로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역사 속에서 하실 일이 있어서 아들에 몸을 역사에 살 수 있는 몸으로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몸을 가지고 계시지만 우리와 다른 분인 거예요.

이걸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몸을 가지고 계시지만 죄는 없으시다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는 철저하게 하나님 뜻에 복종하는 삶을 사셨어요.

 

8절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나님의 뜻에 복종한 삶이 뭔가요?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왜? 십자가에 죽으셨나요?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신 것입니다.

이걸 대속물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죄 값을 예수님에게 대신 뒤집어 씌우신 겁니다.

 

이사야 53장을 봅시다.

 

사 53:5-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6절부터 먼저 봅시다.

 

우리는 양 같아서 그릇 행하였다고 하지요.

여기서 그릇 행하였다는 말은 창조의 목적에서 이탈하였다는 뜻이에요.

우리는 죄로 인하여 창조의 목적에서 이탈했어요.

 

원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여호와의 찬송을 부르라고 창조를 했는데 죄가 자기 영광을 위하여 살게 하고 자기를 찬송하게 만든 겁니다.

쉬운 말로 토기장이가 토기를 빗었는데 자기가 원하는 대로 빗어지지 않는 겁니다.

그럼 사정없이 깨트려요.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 했는데 지금 인간들이 죄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는 인간이 아닌 겁니다.

그럼 깨트려야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깨트리지 않고 우리의 죄를 예수에게 대신 짊어지게 하고 예수님을 깨트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 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왜? 이런 일을 해야만 했나요?

이는 창세전 언약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1장을 봅시다.

 

엡 1:3-7=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사도 바울이 성령의 감동으로 창세전 언약을 깨닫고 탄복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찬송하리로다” 라고 시작을 하는 겁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이건 놀랍고 놀라운 일이라는 거에요.

 

무엇이 놀라운 일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여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삼는다는 내용인 것입니다.

쉬운 말로 피조물을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어 준다는 말이에요.

죄인을 의인 만들어 준다는 말이에요.

 

어떻게 죄인인 피조물을 의인인 하나님의 아들로 만드느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을 피조물의 형체를 입게 하여서 세상으로 보내서 그 피조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 담당해 주어서 의인이 되게 하여서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아요.

 

제가 왜? 창세전 언약을 시간 시간마다 외치는 줄 아세요.

 

이 비밀을 알았기 때문이에요.

내 꼬라지가 비록 이 모양 이 꼴이지만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나를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해 주신다고 약속을 하셨단 말이에요.

그 약속이 때가 되어서 내게 미쳐서 내가 이렇게 예수가 믿어지게 되었어요.

그래서 저는 그 사실을 이렇게 증거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제 안에서 야~! 정낙원이 너는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이 녹명이 되었어!

그래서 지금 예수가 믿어지고 복음이 깨달아지는 것이야!

넌 대박을 맞은 놈이야!

그걸 알기나 하고 예수를 믿느냐! 라고 해요.

그래서 제가 아멘~! 믿어집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창세전 언약을 말한다고 짜증내는 사람이 있어요.

창세전 언약은 사랑한다는 말과 같아요.

여러분! 사랑한다는 말이 듣기 싫은가요.

아니지요.

들어도 또 듣고 싶은 말이 사랑한다는 말이에요.

 

과거 통기타 가수인 김세환씨가 노래 불렀잖아요.

 

♪~♬ 사랑하는 마음보다 더 좋은 건 없을 걸 ♪~♬

♪~♬ 천만번 더 들어도 기분 좋은 말 사랑해 ♪~♬

 

창세전 언약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에요.

그러니 얼마나 좋아요.

내가 창세전에 너를 택했다!

이 말은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는 말씀이에요.

 

야! 네가 태어나기 전에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고!

내가 너를 구원하기로 작정을 했어!

그 작정이 지금 너에게 미친 거야!

그러니 감사하고 살어!

그러는 겁니다.

 

전 그래서 감사하고 살아요.

뭐 기분 나쁘세요.

 

제가 왜? 시간 시간마다 창세전 언약을 이야기 하는지 그 마음을 좀 헤아리세요.

좋은 건 자랑하잖아요.

저도 창세전 언약이 좋기 때문에 시간마다 자랑하는 거예요.

 

우리 인생은 우리 맘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살아지는 것들이에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언약 하신 그 시나리오대로 살다가 가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안심하세요.

 

영화 배우들이 자기가 하는 역할을 자기 맘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시나리오대로 하듯이 우리의 인생도 우리 맘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대로 살게 되어 있어요.

성경은 이 사실을 말해주고 있어요.

 

이것이 믿어지는 사람은 대박인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어디서 와서 무엇을 하다가 어디로 가는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자기 인생이 하나님의 손 안에서 살아지는 것임을 알기 때문에 인생살이가 가벼워지는 것입니다.

 

제가 글을 쓸 때마다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이 뭔 줄 아세요.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나와 같은 흥분들이 일어나기를 바래요.

창세전 언약이 믿어지고 말씀이 마음속에서 달음질을 하여서 천상의 세계를 누비면서 이 세상을 세피 하게 보고 이겨 낼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어요.

 

내가 어떤 존재인지나 알고 예수를 믿으세요.

우리는 천사도 부러워하는 자들이에요.

그러니 세상 것 없다고 징징거리지 말고 당당해 지세요.

 

예수님이 곧 데리러 오세요.

지금 오고 계시다니까요.

사실이라니까요.

믿어지면 대박이고 안 믿어지면 어쩔 수 없지요.

 

승천 하실 때 다시 오신다고 약속을 하셨잖아요.

약속을 하셨다는 것은 반드시 오신다는 말입니다.

신앙이란? 이 약속을 믿고 기다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약속을 기다리면서 사는 것을 종말론적 삶이라고 합니다.

 

그럼 초림과 재림의 차이를 살펴보고 종말론적 삶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초림은 구원하러 왔습니다.

구원 하려고 오셨기 때문에 인자와 긍휼로 대하셨어요.

죄인들과 친구 하셨어요.

 

그러나 재림은 달라요.

심판 하러 오세요.

그래서 구름타고 영광중에 오신다고 하는 겁니다.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말은 영광스럽게 오신다는 말이에요.

 

이걸 신00의 이00는 그의 요한계시록 강해서를 보면 영으로 오신다고 해요.

예수님이 부활해서 영이 되었으니까 이제 그 영으로 와서 사도 요한과 같은 어떤 목자에게 들어가서 일을 한다고 해요.

그 목자가 누구냐 자기래요.

자기가 보혜사라고 해요.

 

그러면서 찌른 자들이 통곡을 한다고 하니까 자기를 찌른 자들은 재림 예수를 찌른 것이니까 통곡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목자를 알아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면서 자기가 보혜사 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144.000명에 들어가는 자라는 겁니다.

가관이지요.

 

그런데 이런 자를 따르는 자들이 수만 명이니 더 가관인거에요.

좌우지간 하나님께서 미혹의 영을 역사하니 미친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걸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후서 2장에서 하나님께서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는 자들을 추수하시려고 미혹의 영으로 이들을 사단의 종들을 따르게 한다고 하셨어요.

 

살후 2:9-12=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11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12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구름을 타고 온다는 말은 원래 원문에는 구름과 함께 온다는 말이에요.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요.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영광을 구름이 나타나는 것으로 말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재림을 하실 때 구름이 함께 동행하는 것은 예수님이 곧 영광 중에 오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의 재림은 초림 때와 다른 모습이에요.

 

초림 때는 짐승의 구유에 오셨지만!

재림은 영광 중에 엄위하신 모습으로 오세요.

만 왕의 왕으로서 당당하게 오신단 말입니다.

 

초림은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지만 재림은 의인을 데리러 오세요.

재림은 죄와 상관없는 자들을 데리러 오세요.

재림 때는 죄인은 죽어요.

 

히브리서 9장을 보세요.

 

히 9:28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초림 때는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자기 몸을 드려서 구원해 주셨지만!

두 번째 오실 때에는 죄와 상관없는 자들에게 오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누가 죄와 상관없는 자들인가요?

이는 초림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재림은 예수를 믿는 자기 신부들을 데리러 오시는 것입니다.

 

초림 때는 그물을 던지러 오셨어요.

그러나 재림은 그물 속에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를 갈라내기 위하여 오십니다.

좋은 고기는 곡간으로 들이고 나쁜 고기를 심판하러 오세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나타난 예수님은 감히 죄인이 가까이 할 수가 없는 영광 된 분으로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그럼 이 사실이 믿어지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할까요?

 

그럼 성경 속에는 수많은 종말의 사건들을 맞이한 사람들의 종말론적 삶을 살펴봅시다.

 

먼저 롯을 봅시다.

 

롯은 전쟁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아브라함에 의하여 구출이 되었어요.

아브라함은 신약의 예수님을 상징하니까 그럼 아브라함에 의하여 구출이 된 롯은 신약에서는 예수님에 의하여 구원을 받은 성도를 상장하겠지요.

 

구출 받은 롯이 어디서 어떻게 살았나요?

롯은 구출을 받고도 여전히 소돔과 고모라에서 살았어요.

이건 구원 받은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것과 같아요.

 

하나님은 롯을 산 속에 살게 하지 않았어요.

구출을 해 놓고서도 여전히 그 타락의 도시에 살게 하셨어요.

하지만 롯은 그들과 다른 모습으로 살았어요.

 

소돔 고모라의 가치관으로 살지 않고 그 성에 우거하는 자로 살았어요.

우거한다는 말은 나그네로 살았단 말입니다.

과거엔 주류로 살았지만 구출 당하고 난 뒤에는 비 주류로 살았어요.

그러면서 그들의 모습을 보고서 상한 마음으로 살았다고 합니다.

 

베드로후서 2장을 봅시다.

 

벧후 2:6-10=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7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8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9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10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형벌하실 줄을 아시느니라”

 

롯을 일컬어 경건하다고 하지요.

이는 그들과 다르게 살았다는 말이에요.

다른 가치관으로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음란한 행실을 보고 심령을 상했다고 합니다.

 

음란한 행실이 뭔가요?

육체를 따라 산 것을 말해요.

즉 땅 강아지 마냥 흙만 파 먹으면서 육신의 쾌락을 위하여 살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살았다는 말입니다.

 

롯이 어떻게 살았습니까?

그 성 사람들과 동화되지 않고 살았어요.

성문 어귀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살았어요.

비록 그들과 함께 살았지만 그들과 다른 모습으로 산 겁니다.

이게 종말론적 삶이에요.

 

라합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정탐꾼이 준 붉은 줄을 창문에 내려놓고 살았어요.

창문이란? 나는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멸망 받을 여리고성에서 건져 주실 자를 기다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라합은 여전히 기생으로 살았어요.

기생으로 살되 구원자를 기다리면서 살았어요.

예전에는 호구지책(糊口之策)으로 기생 노릇을 하면서 살았지만 정탐꾼이 다녀간 후로는 먹고 살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여리고 성에서 구원 해 주실 자를 기다리고 살았어요.

삶에 자세가 달란 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예수 믿기 전과 예수 믿고 난 후의 삶에 자세가 달라야 합니다.

예수를 모를 땐 땅 강아지 마냥 땅에 가치로만 살았는데, 예수를 알고 난 후로는 비록 땅에 것을 먹고 살지만 살아가는 의미는 달라야 해요.

믿음으로 주님 다시 오실 것을 알고 소망하면서 살아야 해요.

 

예전에 움켜잡기 위하여 댕댕 거리고 살았어요.

내 입에 떡을 넣기 위하여 남의 입에 들어가는 떡을 빼앗고자 살았어요.

그러나 이제는 떡에 가치로 살지 않으니 떡을 위하여 악착같이 살아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아무렇게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떠나야 할 것을 알기에 땅에 것을 집착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자족하는 마음으로 있는바 족한 줄 알고 살게 되는 겁니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성령이 우리 안에서 과외 선생처럼 매사에 간섭을 하니까 요 만큼이라도 좇기지 않고 마음에 여유가 생겨서 땅에 것으로 인하여 댕댕 거릴 이유가 사라진 것입니다.

있으면 있는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매사에 쫓기고 살았는데 이제는 여유가 있어졌어요.

옛 날엔 세상 풍조에 밀려 다녔는데 이젠 세상 풍조를 초월하고 살아가는 여유가 생긴 겁니다.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라 마음이 물질에 가치를 두지 않으니 세상 풍조에 시달리지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고상한 것이 아니에요.

위를 바라보고 살기 때문에 아래 것에 미련을 두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떡을 먹으면서도 떡에 가치로 살지 않는 것이 신앙생활이에요.,

 

누가복음 21장을 봅시다.

 

눅 21:34-36=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35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3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조심하라고 합니다.

왜? 조심하라고 하나요?

세상이 선악과처럼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 스럽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둔하여 지지 않도록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것에 빼앗기지 않도록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세상 것에 빼앗기지 않도록 기도해야 해요.

 

성령이 오시고 난 후 종말 모드가 돌입 되었습니다.

 

성령이 땅 보지 말고 하늘 쳐다보고 살라고 간섭을 하십니다.

우리 스스로 못하니까 예수님이 성령을 과외 교사로 붙여준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보혜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보혜사란? 곁에서 돕는 자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것이 나옵니다.

성령은 우리를 대신해서 신앙생활을 해 주시지 않아요.

다만 우리가 신앙생활 하도록 곁에서 도우세요.

 

과외 선생은 학생이 시험을 잘 치르도록 옆에서 가르치는 자에요.

대신 시험 쳐 주는 자가 아니에요.

시험은 학생이 쳐야 되요.

 

우리의 신앙생활은 누가 대신 해 줄 수 없어요.

성령이 우리 곁에서 너 그러면 시험 빵점 맞는다.

시험 날짜가 곧 다가오니까 깨어 있으라고 합니다.

 

나 대신 다른 사람이 예수님의 신부가 되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신부란 말입니다.

내가 신부이니까 내가 신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부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면 신랑이 있는 것처럼 단장하고 사는 거에요.

 

이걸 마테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로 이해해 봅시다.

 

마 25:14-30=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진 자에게 주어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달란트 비유의 초점은 장사해서 이윤은 남기는 것에 있지 않고 종들의 삶에 자세에 있어요.

종들이 어떤 자세로 사는지를 말해주고자 하신 겁니다.

종이 주인의 일을 자기 일처럼 하는지 아니면 남의 일처럼 하는지 가늠하기 위하여 주인이 잠시 집을 비우게 되는 것입니다.

 

주인이 집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달란트를 주고 떠납니다.

달란트를 주신 것은 그것으로 장사를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장사란? 달란트를 돈으로 생각하면 돈을 남기는 것이지만 교회를 돌보고 성도를 섬기는 것이라고 한다면 주님의 마음으로 교회를 섬기는 것이 되겠지요.

 

주인은 돈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종들의 삶에 자세를 보고자 한 것입니다.

주인이 있으나 없으나 각자 맡겨진 일을 충실히 하는지를 알아보고자 하심입니다.

주인과 하나 된 종은 주인이 있으나 없으나 할 것이지만, 주인과 타자로 있는 종은 주인이 없으면 게으름을 피우게 될 것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들은 주인이 있으나 없으나 개의치 않고 열심히 자기가 맡은 일들을 하였어요.

그러나 악하고 게으른 종은 주인이 없다는 것을 알고 주인이 준 것을 땅에 묻어두고 빈둥거리고 논 것입니다.

 

결과를 보세요.

완전히 달라지지요.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종들은 차등 없이 동일하게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케 하였어요.

 

왜?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케 합니까?

이는 주인이 그들을 종으로 취급하지 않고 가족으로 취급한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주인의 희노애락에 함께 동참케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악하고 게으른 종은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아내지요.

이는 가족에서 제외한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집에서 쫓아내는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는 한국교회 주일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누가 누가 많이 남겼다 경쟁하는 것이 아니에요.

교회는 경쟁하는 곳이 아니에요.

각자 받은 은사로 섬기는 곳이에요.

 

예수님께서는 자기 신부가 될 성도들에게 각각의 은사들을 주셨어요.

이 은사는 안 받은 성도가 없어요.

다 받았어요.

 

이건 예수님의 신부들은 알아요.

은사를 받은 성도들은 착하고 충성된 종들처럼 자발적으로 하게 되어 있어요.

누가 보든 안 보든,

누가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행하게 되어 있어요.

이러한 성도들이 교회의 주인인 겁니다.

 

이건 우리의 신앙에서 얼마든지 엿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 교회에 손님으로 오지 말라는 것은 이 교회와 여러분이 하나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교회가 될 때 내 일처럼 하게 되어요.

그 안에 신랑이 주신 빙폐물인 성령의 은사들을 받은 성도는 반드시 행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제가 교회 일을 강요치 않는 것입니다.

교회 일은 강요해서 하게 되면 반드시 한 것에 대한 댓가를 찾게 되어 있어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발언권이 쎄져요.

목소리가 높아진단 말입니다.

나는 했는데 당신들은 왜? 안 해! 라는 식으로 자기 공로를 챙기는 식으로 나타나요.

이런 사람들이 바로 아나니아 삽비라에요.

 

아나니아 삽비라가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교회 안에 있어요.

열 처녀 비유에서처럼 등만 가지고 있단 말이에요.

신랑으로부터 받은 성령의 은사들이 없으니까 자기 힘으로 하고서는 자기 공로를 챙기고자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사람들로 인하여 시끄러워져요.

그래서 제가 마음이 동하지 않으면 충성도 연보도 하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연보를 어떻게 하라고 하던가요.

 

고린도후서 9장을 봅시다.

 

고후 9:5-8=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6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7절을 보세요.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라고 하지요.

왜? 억지로 하지 말라고 하는가요.

연보는 감사함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왜? 감사가 없나요?

이는 그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없기 때문이에요.

 

8절을 보세요.

 

하나님이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주어서 이 모든 일들을 넉넉하게 넘치게 하게 하신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그 안에 신랑이 준 빙폐물인 성령의 은사들이 있는 신부들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인색함이 없이 넉넉하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비단 연보뿐만 아니에요.

교회 안에서 봉사와 충성과 섬김도 받은 은헤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여야 해요.

 

제가 놀라는 것은 이 시대 자칭 복음을 안다고 하는 자들 중에서 악하고 게으른 종처럼 행하는 자들이 너무도 많다는 것이에요.

복음을 알면 율법 아래서 행하던 것보다 더 열심히 더 감사함으로 행하여야 하는데 이상하게 복음 안다고 하면서 아무 것도 안 해요.

괴이한 일이에요.

 

그래서 저는 이런 사람들을 기름 없는 미련한 처녀라고 정의하고 싶어요.

주둥이로는 청산유수인데 손과 발은 손 마른 자이고 앉은뱅이에요.

이는 예수를 못 만났다는 증거에요.

그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는 증거에요.

 

예수를 만난 사람은 손이 펴지고 일어나서 하게 되어 있어요.

반드시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은혜는 반드시 삶으로 토해져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너희 안에 믿음이 있는가? 확인해 보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없으면 버리운 자라고 합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처럼 바깥 어두운 곳으로 내침을 당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가 그 안에 없으니 복음 안다는 것으로 자기 게으름을 합리화 하고 교회나 사람들에게 거치는 자로 있는 것입니다.

 

충성된 종이 되라는 말이 아니에요.

성도는 충성 된 종으로 살게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없으면 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안 해도 교회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세워져 가요.

 

이처럼 주인이 없음에도 여일하게 주인 앞에서 하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을 일컬어 종말론적 삶이라고 합니다.

종말론적 삶이란?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 가치로 살지 않고 하늘에 가치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자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치 신부가 신랑이 준 빙폐물로 매일 매일 단장을 하고 기다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술람미가 솔로몬을 사모하면서 기다리는 것과 같이 기다리는 것이에요.

속절없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신랑이 준 것을 가지고 신랑의 체취를 맡고 느끼면서 기다리는 것이에요.

 

이걸 산 소망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 소망 사랑을 주셨어요.

믿음이 소망을 낳고 소망이 사랑을 낳아요.

 

세상에서 제일 복 받은 사람이 누군가 하면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누군가 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우수갯 소리로 누구라도 짝 사랑이라도 하라고 합니다.

 

이건 마음에 사랑을 품고 살으란 말이에요.

마음을 삭막하게 하지 말고 촉촉하게 하라는 거예요.

사랑이 윤활유처럼 흘러서 촉촉함이 있을 때 내가 행복하고 남도 행복하게 해 줄 수가 있어요.

 

사랑은 관대함을 낳아요.

이해하고 용서하고 관용을 낳아요.

사랑해 보세요.

여유가 생겨요.

마음이 기쁘니까 생동감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람을 살아가게 생명이에요.

사랑은 기쁨이고 행복이에요.

사랑은 사람을 어둠에서 빛으로 불러내요.

그래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에는 빛이 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는 나라는 은혜의 나라이고 사랑의 나라에요.

은혜의 나라에서는 은혜를 아는 자들만이 살 수가 있어요.

법에 속한 자들은 살 수가 없어요.

 

법은 옳음은 될 수가 있지만 사람을 살려 낼 수가 없어요.

사람을 살리는 것은 은혜이고 사랑이에요.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것은 사랑이에요.

 

그런데 자식들은 부모에게 법으로 다가와요.

옳고 그름으로 다가온단 말이에요.

그래서 자기에게 잘못한 것이 없으면 모가지 세우고 덤벼요.

내가 뭘 잘못 했느냐고 하면서 악다구니를 써요.

 

교회 안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어요.

그 사람이 하는 말이 다 옳을 수가 있어요.

그런데 그 옳음으로 사람을 잘라내고 배척하고 살려내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 옳음은 곧 죽이는 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옳아서 대하시는 것이 아니에요.

사랑으로 대하세요.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하지요.

맞아요.

 

사랑은 옳음으로 그른 자를 덮는 거에요.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덮어주고 용서하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성경은 항상 옳은 자들이 손해를 보고 고난을 당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흠 없는 제물의 희생으로 흠 있는 자들을 살려내는 방식으로 역사를 운영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운영 방식으로 세워진 곳이 교회에요.

교회는 믿음이 좋고 옳은 자들이 강하면 안 되어요.

유하고 부드러워야 해요.

교회 안에서 옳음이 큰 소리가 쳐지면 그른 자들은 발 붙일 곳이 없어져요.

 

교회란? 그른 자들이 옳은 자들의 희생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배워가는 곳이에요.

그래서 교회를 일컬어 예수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세원진 곳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에 정신이 강물처럼 흘려나야 해요.

못난 자들이 잘난 자들의 덕으로 살아야 한단 말입니다.

 

그리하여 요한계시록 22장의 말씀처럼 생명수 강이 흘러서 만국을 치료하고 소성 시키는 일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교회의 정체성이고 본질이어야 해요.

교회는 은혜와 사랑이 없으면 그건 인간 군상들이 모인 종교집단 밖에 되지 않아요.

 

성도는 세상 속에서 천국의 원리로 사는 자들이에요.

땅에 가치로 살지 않고 하늘에 가치로 사는 자들이에요.

땅에 가치는 움켜쥐는 가치이지만 하늘에 가치는 손을 펴서 나누고 베푸는 가치에요.

이렇게 세상 가치로 살지 않고 천국의 원리로 사는 것을 종말론적 삶이라고해요.

 

우린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이에요.

그러므로 소망 없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가치관으로 살아야 하는것입니다.

마치 롯이나 라합처럼 자기를 구원해 주실 분을 기다리면서 소돔 고모라의 가치로 살지 않고 여리고성의 가치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기다리면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삶에 자세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면서 얘들아! 내가 너희가 본 그대로 다시 올게!

구름타고 올라 가셨으니 구름타고 오실 겁니다.

영광 중에 올라 가셨기 때문에 영광중에 오시는 거예요.

 

그냥 오시면 우리가 못 알아보실 까봐 가신 그대로 구름 타고 오시는 거에요.

그렇게 약속을 하시고 가셨어요.

이제 오실 날만 남았어요.

 

마태복음 24장을 보세요.

 

마 24:3-12=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6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7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8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9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10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제자들이 묻습니다.

세상이 끝 날 때가 되면 어떤 징조들이 있습니까?

그러자 예수님이 한 마디로 지구가 몸살을 앓게 된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고 죽이는 일들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사람이 짐승이 된다는 거에요.

 

지금 이 시대를 보세요.

이처럼 인간들이 인간성을 상실 할 때가 없었어요.

인간이 아니고 짐승이에요.

 

돈이라고 하면 부모 자식도 죽이는 세상이에요.

이건 인두껍을 쓴 짐승들이나 하는 짓이에요.

그런데 이러한 일들이 온 세계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어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실상을 그대로 폭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들 스스로도 이건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니라고 하게 만들어요.

그리하여 인간들 스스로 세상의 가치를 놓아 버리게 만들어요.

이걸 성경은 스스로 심판을 자취한다고 해요.

 

주님이 오실 때가 되면 이러한 징조들이 일어난다고 하셨어요.

그럼 우린 어찌 해야 하나요?

이사 갈 준비를 해야지요.

이삿짐을 한꺼번에 꾸릴려고 하지 말고 틈틈이 버릴 것은 버리고 챙길 것은 챙기세요.

 

어디에 정신을 팔리고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과거 살기 어렵고 힘들 때 먼 하늘에 작은 구름만 떠도 행여나 우리 주님 오시지나 않나 하면서 마음이 쿵쾅거렸어요.

그 땐 오로지 삶에 소망이 주님 오시는 거였어요.

 

그런데 먹고 배부르니까 이젠 온 지구가 몸살을 앓으면서 신음을 토해내는데도 무감각해요.

지구가 스스로 자신의 수명이 다해 간다고 갖가지로 싸인을 보내는데도 우린 모르고 있어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종말의 징조에 대하여 많은 것으로 이야기 해 주셨어요.

처처에 지진이 생기고, 민족이 민족끼리 싸우고, 난리와 난리에 소문에 소문을 더할 것이고, 거짓 그리스도들이 많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들을 미혹할 것이다!

 

그럼 그 때가 내가 온다는 싸인이니까 너희의 구속이 가까웠으니 일어나 머리를 들라고 했어요.

세상에 코 박고 살지 말고 하늘을 쳐다보라고 했단 말입니다.

그냥 먼 하늘을 쳐다보라는 것이 아니고 마음을 주님 다시 오실 것을 생각하고 살란 말입니다.

 

어떤 이들은 기근이고 지진이고 난리고 전쟁은 늘 있어 왔다고 치부해요.

그딴 거는 옛날부터 있어 온 일인데 뭘 새삼스럽게 호들갑을 떠느냐고 말합니다.

조롱해요.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더욱 더 사모하며 기다리라고 하는 겁니다.

집이 흔들리고 물이 새고 벽에 금이 가면 야 이 집에서는 오래 살지 못하겠구나 하고 떠날 준비를 해야지 그냥 눌러 앉아 있고자 하면 안 된단 말이에요.

집이 흔들리고 물이 새고 벽에 금이 가는 것이야 말로 집이 무너진다는 징조에요.

그건 시간문제에요.

 

이건 오래전부터 있었느냐 지금 있느냐는 의미가 없어요.

분명한 것은 반드시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무너진다는 것은 사실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옛날부터 있어 왔다고 조롱하는 자들의 말은 무시하고 너희는 이사 갈 준비를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조롱하는 자들은 내가 가서 불구덩이에 집어넣을 테니!

너희들은 그러한 징조들이 일어나거든 내가 곧 간다는 싸인으로 알고 다른데 마음 빼앗기지 말고 먹고 사는 일에 정신 팔리지 말고 내 약속을 믿고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와 같이 마음에 불을 켜 놓고 기다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제 곧 오십니다.

예수님이 가신 것이 사실이듯이 예수님이 오시는 것도 사실이에요.

이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에요.

예수님의 재림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려 주시려고 승천 하실 때 만인이 보는 앞에서 구름타고 올리워 가신 것입니다.

 

얘들아! 내가 하늘로 가는 것이 사실이다!

이거 컴퓨터 시뮬레이션이 아니고 실제다!

내가 이대로 다시 올게!

그러니 기다리고 있어!

그러면서 손 흔들고 가셨어요.

 

이제 오실 일만 남았어요.

이제 오시면 예수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긴 자들은 작살이 날 겁니다.

이걸 찌른 자도 볼 것이요 애곡한다고 하는 겁니다.

 

분명히 말합니다.

주님은 오십니다.

그것도 곧 오십니다.

분명히!!!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오신다는 이 기쁜 소식을 저희들에게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러한 말씀들이 들려지고 또 들려지고 또, 또, 또 들려지게 해 주옵소서. 농담이 아니라 실제로 말이에요. 마음 속에 콱~! 믿어지게 해 주셔서 우리의 눈 길이 하늘을 바라보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열병이 나게 하시고 우리의 시선이 다시 오시는 우리 신랑에게 고정이 되어지게 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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