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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로마서 강해

♣(성경강해)71강. 몸에 새겨지는 그리스도의 흔적 (롬 12:1-13)

by coroa 2021. 11. 16.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71강. 몸에 새겨지는 그리스도의 흔적 (롬 12:1-13)

-.정낙원 목사

 

롬 12:1-13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9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성도는 묵시를 역사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창세전에 언약하신 것을 역사 속에서 살아내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주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한 무리”를 선택하셨습니다.

그 무리를 일컬어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를 다른 말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합니다.

 

교회란?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성도들의 모임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2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장차 재림을 하실 때 천사들의 나팔 소리로 천하각국에 흩어져 있는 자기백성들을 불러 모은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마치 7대 절기 중에서 나팔절의 모임과 같습니다.

 

나팔절이 되면 제사장이 나팔을 불면 모든 백성들이 성전으로 모이게 됩니다.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성도 간에 교제를 나누게 됩니다.

이 모습이 신약에서는 주일날 교회의 모임으로 나타납니다.

 

주일이란? 어느 특정한 날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주 안에서 모이는 모임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역사(율법)를 깨트렸습니다.

이제 묵시 안으로 자기 백성들을 불러 모으셨습니다.

이렇게 묵시 안으로 불러 모아진 자들은 이 땅에서 역사적 개념으로 살지 않고 묵시적 개념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묵시적 개념은 하루 이틀 사흘이라는 날의 개념이 없습니다.

항상 오늘날입니다.

이걸 영생으로서의 삶입니다.

예수 안에서는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는 형식은 사라졌습니다.

 

월요일도 오늘날이고!

화요일도 오늘날이고!

토요일도 오늘날이고!

주일도 오늘날입니다.

 

주 안에 있으면 항상 오늘날이고 항상 주일입니다.

 

하지만 우리 몸은 역사라는 굴레에 매여 있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비록 몸은 역사라는 굴레에 매여서 살지만 영은 항상 묵시로 살아갑니다.

우리가 주일날 주의 이름으로 교회로 모이는 것은 내가 비록 역사 속에서 살지만 주 안에서는 묵시로 살고 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고 난 후 율법 아래서 역사적 싸이클인 일곱째 날 안식일에 모이던 것은 깨어지고 날마다 묵시에 속한 오늘날로 모였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점차 세월이 흘러가면서 주께서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면서 오늘날의 주일 개념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날 교회로 모이는 것은 율법 아래서의 모임과 다릅니다.

우린 율법 아래서의 일곱째 날로 모이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를 완상하시고 부활 하신 날인 여덟째 날로 모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 후 첫날에 부활 하셨습니다.

안식일은 역사에 속한 일곱째 날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일곱째 날을 넘어서 부활을 하셨습니다.

이를 여덟째 날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일이라고 하는 일요일 날에 교회로 모이는 것인 일곱째 날로 모이는 것이 아니고 묵시 안에서 여덟째 날로 모이는 “하늘나라의 모임”이 되는 것입니다.

이 천국의 모임이 초대교회에서는 날마다 모이는 것으로 나타났다가 세월이 흘러가면서 일요일을 예수님께서 부활 하신 날을 기념하면서 주의 날이라고 하여서 모이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일요일로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주 안에서 오늘날로 모이는 것입니다.

비록 일곱에 속한 날 중에서 일요일이라는 하루를 정하여서 모이는 모임이지만 그 의미는 역사 바깥의 묵시 안에서의 모입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일주일이라는 싸이클로 순환하도록 주셨습니다.

이는 일주일이 곧 역사 전체를 함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일에 교회로 모이는 것은 역사를 벗어나 묵시 공동체로 모이는 것입니다.

이는 성령이 성도들 안에서 묵시적 모임을 갖도록 역사를 하십니다.

 

묵시적인 교회의 모임을 로마서 12장 이후부터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1장에서 11장까지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역사에서 빠져 나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를 교리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12장부터 16장까지는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구원을 받은 자들이 이 역사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1장에서 11장까지의 교리만 알아도 안 되고, 12장에서 16장까지 다 알아야 합니다.

반대로 1장에서 11장까지의 교리는 없고, 12장에서 16장까지 삶만 있어도 안 됩니다.

1장에서 16장까지 모두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교리와 삶이 다 있어야 한단 말입니다.

 

1장에서 11장까지만 아는 지식이 있고,

12장에서 16장까지의 삶이 없는 자들을 영지주의라고 합니다.

반면에 1장에서 11장까지 교리를 아는 지식은 없고,

12장에서 16장까지의 삶만 주장하는 자들은 율법주의가 됩니다.

 

다시 말해서 교리만 알고 삶이 없는 자는 영지주의고!

교리는 없고 삶만 있으면 율법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세요.

 

지난 시간 몸으로 드려지는 영적 예배의 정의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영적 예배란? 영으로 드리는 예배라고 했습니다.

즉 영으로 오신 예수님에 의해서 드려지는 예배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 영적 예배가 성도의 몸으로 드려진다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드려지는가 하면 성령에 의하여 드려집니다.

오늘은 영적 예배가 성도들에게서는 역사 속에서 교회라는 모임을 통하여서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합시다.

 

예배란? 사귐을 말합니다.

위로는 하나님과의 사귐이고!

아래로는 이웃과의 사귐입니다.

 

어떻게 사귀느냐?

예수님의 피를 두고 사귀는 겁니다.

서로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이건 자기 백성을 인(印)을 친 것입니다.

너는 내 것이라고 표시를 해 둔 것과 같습니다.

 

성령을 우리 안에 오신 것은 예수님이 오신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우리 안에서 예수의 마음으로 살도록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란? 아버지의 뜻을 위하여 자신을 비우는 마음을 말합니다.

 

빌립보서 2장을 봅시다.

 

빌 2:5-8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의 마음은 아버지 뜻을 위하여 자기를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종의 형체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이걸 십자가 정신이라고 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이 예수의 마음을 심어 주십니다.

우리 안에 예수의 마음을 심어 준 것은 우리 몸으로 예수의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즉 우리 몸을 가지고 예수를 드러내는 일을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몸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피로 우리의 몸을 값을 주고 산 것입니다.

왜? 우리 몸을 값주고 샀는가요?

이는 우리 몸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을 드러내고자 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을 우리 몸으로 그려내고자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아버지와 죄인 간에 가로 막힌 담을 허는 일을 하셨습니다.

또한 이웃 간에 가로 막힌 담을 헐었습니다.

 

가로 막힌 담을 헐었다는 말은 이제 서로 간에 소통이 가능해지도록 하셨다는 말입니다.

만남과 사귐이 가능하도록 해 주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십자가로 열어주신 길을 통해서 만나고 사귐을 갖는 것을 예배라고 합니다.

예수 안에서 만나고 사귐을 갖기 때문에 영적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하나님께만 드리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에요.

본질적으로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맞아요.

그런데 그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아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어떻게 사귐을 갖는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앞에 보이는 하나님을 두셨어요.

이들이 누구인가 하면 바로 예수로 구속을 받아 아들에 영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곧 우리 형제들이에요.

 

요한일서 4장을 봅시다.

 

요일 4:20-21절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거짓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형제 사랑으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형제를 통해서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그 아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내신 그 아들이 십자가에서 자기의 목숨을 버림으로서 형제와 형제간에 막힌 담을 허셨어요.

 

이제 둘이 아니고 하나가 된 것입니다.

남이 아니고 한 몸이에요.

왜? 한 몸을 만드셨나요?

이는 서로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마태복음 22장을 봅시다.

 

마 22:36-40절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님에게 어느 계명이 크냐고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아래로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곧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곧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였어요.

 

그런데 우린 죄 아래서 태어나서 형제를 사랑 할 수가 없어요.

죄가 내 몸뚱이 중심으로 살게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러한 내 몸뚱이 중심으로 살고자 하는 우리 몸을 십자가에서 죽였어요.

아담 안에서 태어난 나를 죽였습니다.

 

그리곤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셨어요.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증거로 성령이 우리 몸에 오신 것입니다.

이제 성령이 우리 몸을 가지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게 하세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구현시키면서 살게 하신단 말입니다.

이게 신앙생활이에요.

 

신앙생활이란? 믿는 것을 삶으로 풀어내는 것을 말해요.

 

신앙은 믿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믿고 바라보는 것은 무엇인가요?

이는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고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로 구원을 따 내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을 얻었어요.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에 관하여서는 우리의 자랑거리가 없고 예수님을 자랑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생활이란? 예수그리스도께 받은 그 은혜에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그리스도의 몸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 은혜를 간증하는 것입니다.

이걸 예수의 마음으로 섬긴다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을 봅니다.

 

고후 5:14-15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성도들 안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한다고 하지요.

그리스도의 사랑이 어떤 사랑인가요?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사랑입니다.

 

어떻게 강권합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죽었듯이 우리도 예수님을 위하여 죽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어떻게 나타나는가요?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일을 재현하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서 죽으셨습니다.

우린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예수님의 대신 죽음으로 살아난 성도들을 이제는 역설적으로 예수님을 위하여 대신 죽음에 넘기우는 삶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고 합니다.

결국 성도가 사는 것은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을 보여주는 것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어디서 살게 하는가 하면 교회에서 살게 해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통해서 예수님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쉬운 말로 하나님은 예수 한 분을 죽이시고!

그 예수를 통해서 수많은 예수들을 낳아서 예수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라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을 대신하여 존재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우린 원래 하나님과 원수 된 자들입니다.

이웃과도 원수로 사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과도 담이 막혀 있었고, 이웃과도 담이 막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 담을 헐어 버렸어요.

 

위로는 아버지 하나님과 막힌 담을 허셨고!

아래로는 이웃과 막힌 담을 허셨어요.

둘을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2장을 봅시다.

 

엡 2:1-10=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긍휼이 덮쳐 왔습니다.

어떤 긍휼인가 하면 그 아들을 보내서 우리 죄를 담당하게 하는 긍휼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사건을 낳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구원하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선물로 주신 것은 선물을 주신 분을 자랑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선물을 받은 사람에겐 자랑 거리가 없어요.

자랑은 오직 선물을 주신 하나님만 자랑되어져야 합니다.

구원 받은 것을 자랑하면 안 되고 감사하여야 해요.

 

그래서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하라는 겁니다.

우리가 과거에는 어떤 존재였는데!

이제는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를 생각하라고 합니다.

과거에는 저주의 백성이었는데, 이제는 복에 백성이 되었어요.

 

엡 2:11-22=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과거 이방인에서 이제는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습니다.

이방인은 저주의 백성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 몸으로 그 저주를 대신 담당해 주셨습니다.

하늘나라에 계셔야 할 예수님이 이방 나라에 오셔서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왜? 죽었느냐?

하나님과 우리의 사이에 막혀 있는 담을 허물려고 죽었습니다.

형제와 형제간에 막힌 담을 허시려고 죽었어요.

 

가로 막힌 담이 예수로 인하여 허물어지자 이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형제와 형제가 하나가 된 것입니다.

비로서 사귐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렇게 예수의 피로 아버지와 형제간에 갖는 사귐을 영적 예배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영이신 예수님을 근거로 사귐을 갖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귐이 하나님과 국한 된 것이 아니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도 일어나게 되었어요.

 

율법 아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은 하나 될 수가 없는 원수였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율법의 요구에 의하여 자신의 두 팔을 십자가에 벌리고 죽으셨습니다.

쉬운 말로 한쪽 팔에 끝에는 유대인이 있고!

다른 한 쪽 팔 끝에는 이방인이 있습니다.

 

그 둘을 이제 하나로 만드신 것입니다.

자기 몸으로,,,

자신의 죽음으로 말이에요.

 

에스겔 37장을 봅시다.

 

겔 37:15-28절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16 인자야 너는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 쓰고 또 다른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쓰고 17 그 막대기들을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 18 네 민족이 네게 말하여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뜻인지 우리에게 고하지 아니하겠느냐 하거든 19 너는 곧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에브라임의 손에 있는바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지파들의 막대기를 취하여 유다의 막대기에 붙여서 한 막대기가 되게 한즉 내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 20 너는 그 글 쓴 막대기들을 무리의 목전에서 손에 잡고 21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그 간 바 열국에서 취하며 그 사면에서 모아서 그 고토로 돌아가게 하고 22 그 땅 이스라엘 모든 산에서 그들로 한 나라를 이루어서 한 임금이 모두 다스리게 하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아니하며 두 나라로 나누이지 아니할지라 23 그들이 그 우상들과 가증한 물건과 그 모든 죄악으로 스스로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 범죄한 모든 처소에서 구원하여 정결케 한즉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24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에게 다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 그들이 내 규례를 준행하고 내 율례를 지켜 행하며 25 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 열조가 거하던 땅에 그들이 거하되 그들과 그 자자손손이 영원히 거기 거할 것이요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 왕이 되리라 26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케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 27 내 처소가 그들의 가운데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28 내 성소가 영원토록 그들의 가운데 있으리니 열국이 나를 이스라엘을 거룩케 하는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에스겔 37장은 마른 뼈들이 성령에 의해서 살아나는 이야기입니다.

즉 죽었던 자들이 예수님의 죽음으로 살아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가 에스겔에게 막대기 둘을 취하여 하나가 되게 한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는 두 민족이 하나가 된다는 듯입니다.

즉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가 되는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가 된 자들에게 영원한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어서 영원히 다스린다고 합니다.

 

이 일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셨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을 자기 몸으로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수님의 피로 영원한 언약을 세우시고 왕이 되어 다스리십니다.

그래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으로 살아나서 하나가 된 자들을 가지고 “하나님이 처소”를 만든다고 합니다.

 

이게 신약에서는 성령이 임함으로서 성취가 되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어 하나님이 거할 처소가 된 것입니다.

이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예수 안에서 연합하여 한 몸이 되어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걸 교회라고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살아난 자들의 모임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고 그 몸과 몸이 모인 자들을 교회라고 합니다.

 

이러한 교회를 일컬어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 처소를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자신의 죽음으로 말이에요.

 

요한복음 14장을 봅시다.

 

요 14:1-3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다고 하자 제자들이 근심을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근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내가 죽는 것은 너희와 함께 할 처소를 예비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걸 구약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출애굽기 15장입니다.

 

출 15:17절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십니다.

어디에서 어디로 인도 하십니까?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인도 하셨습니다.

 

이를 “주의 기업의 산”이라고 합니다.

알다시피 하나님의 기업은 천국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애굽이라는 세상에서 천국으로 인도한 것은 하나님의 처소를 삼기 위함입니다.

즉 하나님이 살 집을 만들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들을 어떻게 출애굽을 시킵니까?

어린 양의 피로 시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죽음은 신약에서 예수님의 죽음으로 나타납니다.

 

구약의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것은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성도들이 구원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영적 의미는 동일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성도를 구원한 것을 구약식으로 말하면 주의 기업의 산에 심기 위함입니다.

주의 기업의 산은 천국을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낳아진 성도들은 하늘의 보석들이 되어서 하늘 예루살렘 성을 쌓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성 안으로 하나님이 들어오십니다.

이렇게 되면 그 성이 곧 하나님의 처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은 곧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처소를 예비하는 것이므로 근심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을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어요.

하지만 예수님이 죽으시고 승천하시고 난 후 성령이 임하고 나자 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처소란? 함께 살 집을 말해요.

 

어떤 집인가요?

아버지와 아들이 살고 아들과 성도가 사는 집이에요.

예수님께서 성령이 오시면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있게 된다고 합니다.

또한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게 된다고 합니다.

결국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도가 함께 우거하는 것이 됩니다.

한 지붕 세 가족이 사는 셈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아버지와 예수님과 우리가 한 집에서 살게 되어요.

예수님과 우리만 한 집에서 사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와도 한 집에 살고 형제들과도 한 집에서 살아요.

성령이 아버지와 하나 되게 해 주시고!

형제와도 하나 되게 해 주세요.

 

이렇게 성령 안에서 하나 된 것을 교회라고 하고!

이러한 교회를 일컬어 하나님이 처소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린 모두가 한 성령을 마셨어요.

 

요한복음 20장을 봅시다.

 

요 20:19-23절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나타나서 하늘에 평강을 주십니다.

그리곤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숨이 되어서 제자들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제자들은 모두가 예수님의 숨을 마셨습니다.

한 숨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이 넣어준 하나의 호흡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그 호흡이 누구의 호흡인가 하면 예수님의 호흡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숫자와 상관없이 모두가 한 호흡을 마시고 있는 자들입니다.

이걸 한 성령을 마셨다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을 봅시다.

 

고전 12:12-13절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몸은 하나인데 여러 지체가 있다고 합니다.

그 지체들이 다양한 민족이고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한 성령을 마셨습니다.

 

한 성령을 마셨기 때문에 한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을 마셨기 때문에 한 몸이고 한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성령 안에서는 인간적 조건이 사라졌습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차별이 없습니다.

예수 안에서 한 몸입니다.

이제는 예수 안에서 너와 내가 아닌 우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을 이미 창세전에 계획된 일입니다.

 

에베소서 1장입니다.

 

엡 1:4-6=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하나님은 창세전에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라는 한 무리를 선택했습니다.

나 라는 개인을 택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라는 지체로 선택을 하셨습니다.

이 “우리”를 교회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왜? 그리스도의 몸으로 구원을 하는가요?

이는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를 만들기 위함입니다.

 

나를 택해서 우리 안에 부속물로 넣으신 것입니다.

이걸 성전의 벽돌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된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내가 우리가 되는가요?

그리스도 안에서 입니다.

 

이걸 우리 힘으로 할 수가 없으니까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나를 죽이고 우리로 살게 하시는 겁니다.

이렇게 내가 죽고 우리로 사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 몸을 산 제사로 드린다고 합니다.

또한 이렇게 산 제사로 드려지는 것을 영적 예배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영적 예배의 삶을 살게 하세요.

영적 예배가 되려면 내가 예수 안에서 제물로 죽어야 해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도는 나를 죽이고 예수로 살게 하는 도가 되는 것입니다.

“나” 라는 자아 숭배사상을 죽이고 예수라는 몸에 지체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 도란? 하늘과 땅을 화목케 하는 도에요.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화목케 하고!

땅에서는 이웃과 화목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율법의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먼데 있는 자들을 은혜와 사랑으로 하나를 만드신 것입니다.

 

율법 아래서는 지킨 자와 안 지킨 자를 차별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는 차별이 없습니다.

모두가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 안에서 차별 없이 하나가 된 무리들을 창세전 언약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합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자들의 모임을 일컬어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란? 예수님의 죽음으로 하나님과 사귐을 갖고 이웃과도 사귐을 갖는 곳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거할 처소에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성령의 감동으로 교회론을 말하는 에베소서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우리 모두가 한 성령으로 함께 지어져 간다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처소를 짖습니까?

하나님이 짖습니다.

하나님이 거할 처소는 하나님이 짖지 우리가 짖지 않아요.

 

다윗이 하나님 성전을 짖는다고 하다가 혼이 났잖아요.

 

야! 이놈아 내가 이 세상을 만들었는데!

어떻게 지음을 받은 물건들이 지으신 분이 거할 집을 지을 수 있단 말이야!

그럴 순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내가 거할 집은 내가 짖는다고 하셨어요.

하나님이 도리어 다윗의 집을 지어준다고 했어요.

그렇게 지어준 집이 바로 성전입니다.

 

이 성전을 예수님이 우리 안에 지어주셨어요.

성령으로,,,

우리 몸이 성전이라구요.

그래서 성도를 일컬어 “성령이 거하는 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전은 예수의 피로 화목이 이루어지는 곳이에요.

이걸 예배라고 해요.

그러니까 성령이 거하는 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바로 영적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한 성령을 마시게 하시고 예수 안에서 한 몸으로 모여서 영적 예배를 드리라고 성령의 은사들을 주셨어요.

이렇게 교회 안에서 성령의 은사로 서로 섬기는 것을 바로 영적 예배라고 합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는 1장에서 11장까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죽음으로 화목케 해 주셨다는 교리를 말하고 난 직후 12장부터는 그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맺은 교리를 교회를 통해서 삶으로 풀어내시기 위하여 오늘 본문에서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2장 이후로는 계속해서 성도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이건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그렇게 해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와 같은 마음으로 살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봅시다.

 

5절에서 우리가 모두가 한 몸에 지체라고 하지요.

 

5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한 몸이란? 그리스도를 말해요.

그리고 그 그리스도의 몸에 붙은 지체들이 우리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체들에게 각각의 은사를 주셨어요.

 

은사를 주어서 몸을 돌보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그 은사가 각각 달라요.

6절을 보세요.

 

6절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

 

우리에게 주신 은사가 각각 다르다고 하지요.

각각 다르다는 말은 예수님의 생명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획일적이지 않단 말입니다.

 

다양함 속에서 일치가 있고 일치함 속에 다양함이 있어요.

하나님의 은혜가 교회 안에서 나타날 때는 다양함으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 다양함도 하나의 일치를 낳아요.

 

무슨 일치인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요.

인간의 자랑거리나 공로가 전혀 없고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공로와 자랑만이 되어지는 일치에요.

 

은사를 4절에서는 직분이라고 합니다.

 

4절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직분이란? 일을 분담한다는 말입니다.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하지 않고 각각 할 일이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섬기는 일을 하고!

어떤 사람은 가르치는 일을 하고!

어떤 사람은 봉사하고!

어떤 사람은 돌보고!

 

모두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는 일로 인하여 다툴 필요가 없는 겁니다.

교회는 사랑의 사귐을 갖는 곳이지 일하는 곳이 아니에요.

능률을 추구하지 않아요.

그러므로 일로 인하여 다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은 능률을 따지지만 교회는 사랑으로 교제하는 곳이에요.

 

각자 받은 직분으로 뭘 합니까?

교회를 섬기는 겁니다.

누구의 마음으로,,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섬겨요.

 

누가?

하나님이!

성령이 그렇게 하신단 말입니다.

 

성령이 예수님의 마음이에요.

그러니까 성령을 받은 성도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교회를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천국의 삶이에요.

 

이사야 선지자는 천국을 말하기를 어린 양과 사자가 함께 놀고 어린아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어도 해함이 없다고 했어요.

어린양과 사자는 이 세상에선 하나 될 수가 없어요.

양은 사자의 먹잇감이에요.

 

그런데 천국에서는 사자가 양을 먹지 않아요.

이는 한 성령 안에서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사자와 어린 양은 은유적 표현이에요.  

그러니까 천국에는 원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는 천국은 힘에 법칙인 약육강식으로 다스려지는 곳이 아니고 사랑의 법칙으로 다스려지기 때문입니다.

 

이걸 지금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이 일어난 후 제일 먼저 나타난 현상이 뭔가요?

날마다 모이고 유무상통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유무상통한다는 것은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이에요.

그러니까 한 가족이란 말입니다.

 

가진 자들이 없는 자들을 위하여 자기 것을 내어 놓았어요.

이건 누가 시키지 않았어요.

성령이 임하고 나니까 부자나 가난한 자나 한 몸이라는 것을 안 것입니다.

 

성령을 받기 전에는 너와 나로 살았어요.

부자와 가난한 자로 살았어요.

그런데 성령을 받고 보니 너와 나가 아니라 우리인 것입니다.

 

모두가 한 형제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네 것 내 것으로 나누지 않고 유무상통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한 성령 안에서 한 몸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10절부터 보세요.

 

10-13절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형제를 사랑하고 우애하고 존경하라고 하지요.

이는 각자 받은 은사가 있으니까 그 받은 분량대로 하면 되어요.

각자 받은 분량이 있다는 말은 다 같을 순 없다는 말입니다.

 

받은 것으로 하기 때문에 어렵거나 힘이 들지 않아요.

내 것으로 억지로 하면 힘이 든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하면 힘들지 않고 기뻐요.

 

그래서 제가 그러는 겁니다.

교회 일은 억지로 하지 말라고 합니다.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하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괜히 마음에도 없는 것을 하면, 하고 나서 시험에 들어요.

교회는 일하러 모이는 곳이 아니에요.

각자 받은 사랑을 나누러 모이는 곳입니다.

그것이 섬김으로 봉사로 연보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모습은 이 시대 교회와 우리를 고발하고 있어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일컬어 강도의 굴혈이라고 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교회가 바로 인간의 조건으로 우열과 서열이 나누어지는 강도의 굴혈이에요.

 

그러나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세워진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너와 나 모두가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낳아진 한 형제들로 모였어요.

그러므로 유무상통하면서 천국을 누린 것입니다.

 

이 시대 우리는 초대교회 모습 앞에 우리가 고발당하여야 합니다.

초대교회를 닮으라는 말이 아니에요.

또한 초대 교회를 만들라는 것도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교회란 이런 곳이다” 라는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세상에 없는 집단을 보여 주심으로 세상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인간들이 만들 수 있는 교회가 아니에요.

오직 성령만이 만들 수가 있어요.

 

그러므로 누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하여도 속지 마세요.

교회는 슬로건으로 되지 않아요.

교회는 인간들이 으싸! 으싸! 해서 세워지는 것이 아니에요.

오직 성령께서 세우세요.

 

성령을 받은 여러분이 교회로 사세요.

그럼 됩니다.

남을 탓하지 말고!

내가 받은 은혜로 섬기세요.

 

남이 봉사 하든지 안하든지 상관치 말고!

누가 연보 하든지 안하든지 상관치 말고!

누가 섬기든지 안 섬기든지 상관치 말고!

내가 받은 것으로 봉사하고 섬기고 연보하고 섬기세요.

 

남이 안한다고 에이! 나도 안 할래 라고 하지 말고!

또 남이 한다고 해서 나도 해야지 라고도 하지 말고!

마음에 감동 되는대로 하세요.

인색함으로 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하세요.

 

신앙생활은 타인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요.

 

우리의 신앙은 남들이 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자들이에요.  

그러니까 범사에 “하나님 앞에서” 라는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코람데오”

하나님 앞에서란 뜻입니다.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고 사는 것을 말해요.

 

사람 눈치 보지 말고!

달란트 비유처럼 주인이 있든지 없든지 주인께 받은 것으로 살면 되어요.

게으른 종처럼 주인이 없다고 해서 농땡이 치면 그건 코람데오가 아니에요.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이 종들에게 각각의 달란트를 주고 집을 떠난 것은 예수님이 우리 각 사람에게 성령의 은사들을 주기고 떠난 것과 같아요.

은사를 받은 자들은 주인이 있든지 없든지 주인에게 받은 은사로 주인의 집인 교회를 돌봄으로 섬기면 되어요.

 

그 안에 성령이 있는 성도는 주인이 있든 없든 상관치 않아요.

항상 주인과 함께 한다는 마음으로 살아요.

하지만 주인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고 놀아요.

악한 종은 주인이 있든 없든 악하게 살고~!선한 종은 주인이 있든 없든 선하게 살아요.

 

주인이 있으면 하는 척 하고 주인이 없으면 안하는 자들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에요.

법으로 살기 때문에 주인의 눈치를 살피는 것입니다.

이건 종들이 하는 짓이에요.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가 있든 없는 해요.

 

그러니까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 말고 각자 받은 은사로 섬기세요.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목사 눈치도 보지 마세요.

목사가 여러분을 심판하는 자가 아니에요.

 

여러분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세요.

각자 받은 것으로 섬기세요.

 

사랑을 입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고!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은혜로 섬기는 것입니다.

교회가 할 일이란? 각자 받은 것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화평을 이루는 것입니다.

 

영적 예배란? 예수 안에서의 만남이에요.

 

하나님과의 만남이고 이웃과의 만남입니다.

이건 인간의 방법으로는 만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하나님이 정해준 방법으로만 만날 수가 있어요.

 

하나님이 정해준 방법이 뭔가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에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영적 예배에요.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만나 주세요.

우리의 것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우린 육이고 예수님만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님의 것으로만 만날 수가 있어요.

 

하나님도 예수님의 것으로 만나고!

형제도 예수님의 것으로 만나요.

이렇게 예수님의 것으로 만나는 것이 영적 예배인 것입니다.

 

영적 예배 속에는 우리의 자랑 거리가 없어요.

오직 예수님만 자랑 되어져요.

왜냐하면! 우리의 행위로 만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행위로 만나기 때문입니다.

 

우리 행위가 아닌 예수님의 행위에요.

그래서 예배가 은사에 속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각자 받은 은사로 섬기는 것이 예배에요.

 

은사가 뭔가요?

하나님이 주신 거잖아요.

왜? 주셨습니까?

그리스도의 몸을 섬기라고 주셨어요.

 

주셨다는 말은 우리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은사가 우리를 어떻게 합니까?

자기를 비우고 남을 섬기라고 해요.

 

이건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 싶어 하지 남을 대접하고자 하지 않아요.

높은 자리에 앉아서 대접받고 싶어 하지 낮은 자리에서 남을 섬기고 싶어 하지 않아요.

그래서 은사를 주신 겁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주신 거에요.

 

예수님은 자기 몸을 대속물로 주셨어요.

그리고 섬겼어요.

이건 죄인은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에게 성령의 은사를 주어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섬기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의 은사로 섬기고 사는 것을 산 제사 라고 합니다.

영적 예배라고 해요.

우리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것으로 하기 때문에 영적 예배인 겁니다.

 

우리의 것으로 하면 육적 예배가 되어요.

영적이다!

육적이다! 라는 것은 예수의 것이냐! 우리의 것이냐! 로 판단을 해요.

 

내 것으로 섬기면 육적 예배이고!

예수님의 것으로 섬기면 영적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내 것으로 섬기면 내 자랑을 하게 되고!

예수님의 것으로 섬기면 예수님을 자랑해요.

 

하나님께서 우리 몸에 성령의 은사를 주신 것은 우리 몸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그려내시기 위함이에요.

하나님이 우리 몸을 가지고 하나님이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 만물 속에 그리고 싶은 그림은 뭘까요?

 

예수님이에요.

하나님이 우리 안에 그리고 싶은 것이 그 아들의 형상이에요.

우리 안에 천지가 있고 만물이 있어요.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예수의 형상을 그리고 예수의 것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을 봅시다.

 

빌 2:1-4절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교회 안에서 교제를 하거들랑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하라고 하지요.

그 그리스도의 마음이 뭔가요?

자기를 비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비우는 성령의 은사들을 성도들에게 주셨어요.

그 성령의 은사가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수님의 마음을 주셨어요.

 

어떤 마음인가요?

언약을 위하여 자기를 죽이는 마음입니다.

 

빌 2:5-11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마음을 품으란 말은 마음이 이미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라” 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암탉이 알을 품어서 병아리로 부화를 시키듯이 은사로 주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서 삶으로 나타내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누가?

성령이 그렇게 하시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기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기쁨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세요.

하나님의 형상이에요.

그런데 자기를 비워서 종의 형체를 입으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어요.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셨나요?

십자가에 죽었어요.

왜? 죽었습니까?

 

자기 백성들을 살리기 위함입니다.

자기 백성들을 하나님과 사귐을 갖게 하고 형제와 형제간에 사귐을 갖게 하고자 죽었어요.

예수님은 자기 몸을 십자가에 죽이심으로 하나님께 영적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이제 예수의 피로 하나가 된 자들은 그 예수의 피로 사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도 사귀고!

형제와도 사귐을 가집니다.

이게 바로 영적 예배인 것입니다.

 

빌 2:12-18절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그래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하는 겁니다.

무슨 구원을 이루라는 건가요?

이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이걸 현재 구원이라고 합니다.

구원을 누가 이룹니까?

하나님이 이루세요.  

그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하는 겁니다.

 

빌 2:13절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보세요.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행하시지요.

하나님이 무얼 행하시나요?

자기 뜻을 두고 행하세요.

 

하나님이 우리 안에 하나님의 소원을 심어 놓았어요.

 

우리 안에 심겨진 하나님의 자기 뜻과 소원이 무엇입니까?

그건 우리 몸을 가지고 그 아들에 형상을 그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그 아들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내시는 것입니다.

 

이걸 현재 구원을 이룬다고 합니다.

이 구원은 자기가 부인 되어지는 삶이에요.

성령이 우리 안에서 우리 뜻을 기각시키고 아버지 뜻에 순종케 하는 소욕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몸뚱이는 호락 호락 순종하지 않아요.

그래서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는 탄식이 나오는 것입니다.

상한 심령이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말은 잘못하면 잘려 나간다는 말이 아니에요.

이건 예수로 산다는 것은 그만큼 아프다는 말이에요.

우리의 본성과 반하는 일들을 하니까 아프지요.

 

이걸 십자가의 흔적이라고 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자기 몸에 새긴다고 했어요.

 

골로새서 1장을 봅시다.

 

골 1:24-25절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25 내가 교회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자기를 일꾼 삼으신 것은 하나님 말씀을 이루고자 함이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바울 속에 예수님의 형상을 세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한 알의 밀알로 심었어요.

예수님은 죽어서 많은 밀알들을 생산해 내셨습니다.

예수님에 의하여 생산이 된 밀알들 속에는 예수님의 형상들이 다 담겨져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 속에 담겨진 아들에 형상들을 끄집어내는 일을 하십니다.

 

어떻게 끄집어내느냐?

밀알을 깨트려서 끄집어내세요.

밀알이 깨트려지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한 제물로 나타나요.

그래서 바울은 교회를 위하고 교회를 위한 일꾼으로 선택을 입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교회를 위하여 제물 되게 하시려고 선택한 것입니다.

 

이 일들은 예수님이 자기 몸으로 다 하셨던 일이에요.

이제 이 일을 자기 백성들에게 시키시는 것입니다.

아들에 영을 주어서 아들에 삶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일을 우리 힘으로 할 수가 없으니까 성령을 은사로 주셔서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교회를 위하여 자기 몸이 제물로 드려지는 삶들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이 그렇게 이끌려가게 되어 있어요.

이게 예수와 함께 띠 띠고 원치 않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삶을 살았어요.

그가 원해서 산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그 속에서 행하셨어요.

예수님이 바울의 몸에다가 자기 흔적을 새겨 넣으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을 봅시다.

 

갈 6:17절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바울은 날 우습게 보지 말라!

자기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합니다.

이는 육적으로 보면 내가 비록 실패한 자처럼 보이지만 실패한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7장을 보면 하나님의 종들에게 인(印)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인(印)이 바로 예수님의 흔적이에요.

예수님의 인은 예수님의 소유된 자들에게만 새겨 넣어요.

우린 가만히 있어도 예수님이 알아서 자기 것이면 인을 새겨 넣으세요.

 

그 인침이 곧 우리에겐 고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달리 환란이 아니고~!

내가 부인되고 그리스도의 것으로 살기 때문에 고난인 것입니다.

 

이 흔적은 성도에게 다 있어요.

하나님이 새겨 넣으세요.

이 흔적이 곧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연합된 증거인 것입니다.

이건 우리 힘으로 안 되니까 성령의 은사를 주어서 행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말씀을 육신으로 풀어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완벽하게 말씀대로 산다는 말이 아니에요.

우리 안에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지향성이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것을 말씀이 우리 안에서 달음질 한다고 합니다.

 

빌 2:16절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지금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겁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전한 것들이 헛되지 않고 자랑거리가 되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나로 하여금 장차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 할 것이 있게 해 달라고 합니다.

 

바울은 지금 예수님을 대신해서 말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자랑거리가 아니고 예수님의 자랑거리가 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야! 정낙원이, 너는 장차 아버지 앞에 설 때 내 자랑거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나를 예수님의 자랑거리로 세우기 위해서 내 안에서 예수님의 흔적들을 새겨 넣는 일들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성도들의 몸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그려 놓고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서서 자랑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내가 이 놈들을 만들었습니다.

 

내가 이 놈들 속에 내 형상을 그려 놓았다고 자랑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형상이 그려질 때마다 우리는 부정당하고 부인당하게 되는 아픔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관제라고 합니다.

 

빌 2:17절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관제란?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사를 말해요.

이걸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어주심으로 하나님께 드렸어요.

성령이 바울의 몸을 예수님의 운명에 동참 시켜서 관제로 드렸어요.

비로서 바울에게도 예수와 연합 된 모습으로 영적 예배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관제로 바쳐져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 복 되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를 오늘 본문식으로 말하면 거룩한 산 제사 라고 합니다.

성령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기 때문에 산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 되어 사는 삶을 일컬어 영적 예배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봉사하는 것은 마치 제물이 죽는 것과 같고 이렇게 제물로 죽어지는 것이 산 제사에요.

예수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봉사하는 것이 영적 예배에요.

 

이 일을 누가 한다고요?

예수님이 하세요.

로마서 1장에서 11장까지는 예수님이 하시고 12장부터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에요.

 

1장부터 16장까지 다 예수님이 하세요.

1장에서 11장까지는 예수님이 자기 몸으로 하셨고!

12장부터 16장까지는 예수님이 우리 몸을 가지고 하세요.

 

예수님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 몸을 가지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살았던 그 삶을 살아내시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과 같이 우리 몸을 죽이는 식으로 일을 하신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즉 세상 가치로 살지 못하게 하신단 말이에요.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못 박게 하세요.

 

엡 5장 2절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영적 예배란?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 몸에서 제물이 죽는 것처럼 내가 죽어지고 부인당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걸 향기로운 생축으로 드려지는 제물로 받으시는 것입니다.

 

사흘 밤낮으로 무덤에 있어야 하리니!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정답을 알지만 그 정답대로 살아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상한 심령으로 통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애통하는 마음을 주시고 긍휼을 구하는 마음을 주옵소서. 약하고 힘들 때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옵소서. 주여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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