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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로마서 강해

♣(성경강해)69강. 측량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 (롬 11:29-36)

by coroa 2021. 11. 4.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69강. 측량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 (롬 11:29-36)

-.정낙원 목사

 

롬 11:29-36=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30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31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같은 것을 두고도 서로 다른 생각을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유대인은 율법을 해석하는 데에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릅니다.

 

하나님은 죄를 깨달으라고 율법을 주셨는데 유대인들은 의(義)를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가지고 너희는 저주 받아야 할 죄인이라고 하는데,

유대인들은 아닙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키고 살기 때문에 의인이라고 합니다.

결국 동일한 말씀을 가지고 전혀 다른 해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두셨습니다.

불순종 가운데 가두었다는 말은 죄인은 하나님 뜻에 순종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왜? 하나님 말씀에 순종 할 수가 없습니까?

이는 죄 때문입니다.

 

죄 때문에 순종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린 죄 아래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이기지 못하는 겁니다.

죄가 시키는 대로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걸 죄의 종이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을 봅시다.

 

갈 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습니다.

죄 아래 가두었다 함은 하나님께 순종이 되지 않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죄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치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래적으로 하나님을 거역 할 수 밖에 없는 구조 속에서 태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왜? 죄 아래 가두었다고 합니까?

로마서 식으로 말하면 불순종 가운데 가두었다고 합니다.

왜? 죄 아래 가두고 불순종 가운데 가두셨습니까?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주시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로마서 식으로 말하면 긍휼을 베풀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이란?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예수를 믿음으로 주시는 구원을 일컬어 은혜라고 합니다.

이걸 오늘 본문에서는 긍휼을 베풀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은혜나 긍휼이나 다 같은 말입니다.

 

이러한 구원은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통해서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습니다.

선택하셨다 함은 은혜로 구원 하셨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공로 없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부르심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걸 성경에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해 주신 것을 믿었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일컬어 믿음에 조상이라고 합니다.

그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이스라엘도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들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셨을 때 유대인들은 은혜로 얻은 구원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자칭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일컫는 자들이 아브라함과 다른 구원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 지킴을 구원의 근거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건 아브라함과 다릅니다.

 

마태복음 3장을 봅시다.

 

마 3:7-9=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세례요한은 바리새인을 향하여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합니다.

속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 그런가요?

 

이는 바리새인들의 신앙이 아브라함 신앙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은혜로 나오는데 바리새인들은 자기 행함을 근거로 나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부르심으로 나오는데 바리새인들은 율법 지킴으로 나옵니다.

이건 반칙입니다.

 

자기 행위로 나온다는 것은 스스로를 나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닙니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지킴으로 나오는 자들을 향하여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했습니다.

혈통적으로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맞아도 영적으로는 아닌 것입니다.

믿음에 법으로 보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가지고 자기백성들을 어떻게 구원하시는지 샘플로 보여주셨습니다.

이를 구약 마당에서는 이스라엘에게 적용해서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약 이스라엘을 가지고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구원하는지를 보여주는 시청각교제로 사용 하신 것입니다.

 

이를 “기능적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속에는 아브라함처럼 은혜로 구원 받았음을 아는 자들과 모르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걸 로마서에서는 인자에 거하는 자와 엄위에 거하는 자들이 있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엄위에 거하던 자들은 뽑아내고 은혜에 거하던 자들은 남겨두었다고 합니다.

 

왜? 그런가요?

이는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보이시고자 하심입니다.

구원 속에 하나님의 공로만 남기고자 하심입니다.

 

외형적으로 보면 이스라엘 전체가 선택을 받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뚜껑을 열고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두 부류가 있습니다.

이게 두 족속으로 나타납니다.

육으로 난 자와, 약속으로 난 자가 있습니다.

 

“이스마엘과 이삭”

“야곱과 에서”

“요셉과 그 형제들”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

 

이 모두가 약속으로 난 자와, 육으로 난 자들을 보여주고자 하는 그림입니다.

영과 육을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인자와 엄위를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해서 다 이스라엘이 아니라고 합니다.

유대인 속에서도 표면적 유대인과 이면적 유대인이 있다고 했습니다.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고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라고 했습니다.

 

표면적 유대인이란? 혈통으로 난 자를 말합니다.

이는 율법주의자들을 말합니다.

반면에 이면적 유대인이란? 약속으로 난 자를 말합니다.

이는 성령으로 거듭 난 자를 말합니다.

 

이게 구약에서는 정실부인으로부터 난 자와 종(첩)에게서 난 자로 구분되어서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의 집안으로 보자면 정실부인인 사라에게서 난 이삭은 약속의 자손이고, 종인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은 육으로 난 자입니다.

 

그런데 이삭의 후손 속에서도 육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로 갈라집니다.

에서는 육에 속한 자이고, 야곱은 영에 속한 자로 나타납니다.

야곱은 자기 공로와 상관없이 사랑을 입었습니다.

이걸 은혜라고 합니다.

 

야곱에게도 마찬가지로 나타납니다.

라헬에게서 난 자와, 그 외 다른 부인으로부터 난 자들로 나타납니다.

야곱에게 있어 라헬은 정실부인이고, 그 외 다른 여자들은 종(첩)입니다.

 

정실부인인 라헬에게서 난 자는 약속으로 난 자를 상징하고, 종(첩)들에게서 난 자들은 육으로 난 자를 상징합니다.

야곱의 정실부인인 라헬에게서 난 요셉은 영에 속한 자이고, 그 외 다른 부인에게서 난 자들은 육에 속한 자입니다.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요셉은 이면적 유대인이고, 그 외 다른 형제들은 표면적 유대인이 되는 셈입니다.

 

이게 민족적 이스라엘로 나타날 때는 남쪽 유대와 북쪽 이스라엘로 또 갈라집니다.

남쪽 유대는 약속으로 난 자를 상징하고, 북쪽 이스라엘은 육으로 난 자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남쪽 유대인들이 포로에서 돌아와서 성전을 짓게 됩니다.

이들을 남은 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남은 자들도 예수님이 오셨을 때는 또 다시 육에 속한 자들로 드러나게 됩니다.

율법주의자들로 나타나게 됩니다.

엄위에 거하는 자들로 나타납니다.

결국 모든 이스라엘은 육으로 난 자가 되고 맙니다.

 

최종적으로 예수님만이 남은 자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건 마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한 사람만이 따듯이 결국 하나님께서 인간들 속에서 골라내고 또 골라내고 하면서 맨 마지막으로 예수님 이외는 모든 인간은 다 육에 속한 자들로 드러나게 만드신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아들로 드러난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영에 속하였고 모든 인간들은 육에 속하였음이 폭로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안에서 12제자들이 나옵니다.

12제자들은 은혜로 낳아진 자들입니다.

이들을 인자에 거하였다고 합니다.

 

아브라함 속에서 표면적 이스라엘이 나왔듯이 예수님으로부터 이면적 유대인들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예수로 낳아진 자들은 이면적 유대인으로서 모두가 은혜로 낳아진 자들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는 예수를 믿는 자들을 일컬어 예수라는 참 감람나무에 접붙어 있는 자라고 하면서 인자에 거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은혜로 구원하는 원리를 이방인에게도 적용하십니다.

즉 구약 이스라엘 속에서 은혜로 남겨둔 자들과 같이 이방인도 그렇게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가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자랑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법칙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 누가 이를 알겠느냐고 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인간들에겐 비밀이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속에 은혜로 남겨진 자들이 있습니다.

물론 이방인들에게도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가 엄위에 거하다가 뽑혀져 나간 그 자리에 앉히게 됩니다.

 

결국 이방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것은 이스라엘 속에서 택한 백성만 구원하셨듯이 이방인 속에서도 택한 백성만 구원하십니다.

은혜로 긍휼로 하십니다.

 

이렇게 은혜로 긍휼로 구원 하신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고자 택함 받은 백성이 구약의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로 택한 백성만 구원하신다는 원칙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똑 같습니다.

이게 언약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바울은 로마서를 통하여 일관되게 말해 온 것입니다.

 

간단하게 로마서를 총괄적으로 탐사해 봅시다.

로마서는 실질적으로 11장이 마지막 장입니다.

12장 이후부터는 마치 부록과 같습니다.

 

그런데 11장에서 하나님은 모든 세상을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서 긍휼을 베푸는 것으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긍휼로 일을 하신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글의 결론은 앞에서 말한 모든 것의 핵심을 말합니다.

결론이 답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로마서를 쓰면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로마서를 통해서 무엇을 붙잡아야 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아야 합니다.

모든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아야 합니다.

그러할 때 성경의 진의를 제대로 파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는 두 부분으로 구분 할 수가 있습니다.

 

1장에서 11장까지는 교리적인 부분을 말하고,

12장부터는 교리가 어떻게 삶으로 피어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교리가 집이라고 한다면 삶은 세간살이 내용입니다.

 

이건 마치 창세기 1장의 창조와 같습니다.

먼저 천지(天地)라는 공간을 만드시고 그 후 그 공간 속에 만물(萬物)이라는 내용물들을 채우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창조를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장에서 11장까지의 교리가 공간을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면 12장부터는 교리라는 공간 속에 삶이라는 내용물로 채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어떤 도(道)를 깨우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깨달은 도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도가 담고 있는 내용을 삶으로 풀어내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삶이 곧 신앙생활입니다.

집만 짓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내용을 채워야 하는 것입니다.

은혜로 채우고 긍휼로 채워야 합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어쩌면 오늘 본문이 로마서의 끝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3년 동안 데리고 다니면서 천국복음에 대하여 가르쳐 주신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12장부터는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고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난 후 제자들이 온 세상으로 흩어져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생명으로 직접 몸으로 살아낸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에서 11장까지는 믿음으로 난 의(義)란 이런 것이다! 라고 말씀을 해 주시고서는 12장부터는 각자 받은 성령의 은사로 교회 안에서 섬기는 것으로 이야기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교리가 삶으로 구체화되어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각 장을 간단하게 살펴봅시다.

 

1장에서는, 모든 인간은 죄 아래서 낳기 때문에 다 한 통속으로 썩은 자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인간들은 자기를 낳아준 하나님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악당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똑같이 악당들입니다.

율법을 지킨 놈이나 안 지킨 놈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2장에서는, 그런데 이러한 사실도 모른 채 율법을 조금 지켰다는 것으로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던 유대인들에게 일갈합니다.

야 이놈들아! 너희들도 동일하게 썩은 놈들인데 누가 누구를 정죄 할 수 있느냐! 라고 그럴 순 없다고 말합니다.

 

3장에서는, 그럼에도 유대인들이 우리는 율법 지킴이 있잖아! 라고 항변 합니다.

이에 바울은 이 사람들아 율법은 너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려고 준 것인데 너희는 등신처럼 오해 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다른 의(義)가 나타났는데 그게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난 의(義)로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다고 합니다.

 

4장에서는, 이 사실을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으로 이야기 해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언제 율법 지켜서 의롭다 함을 받았느냐?

아니지 않느냐!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5장에서는, 아담 한 사람이 불순종하여서 죄가 온 세상에 들어와서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의로운 예수그리스도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담과 예수님을 대표 원리를 이야기 해주고 있습니다.

 

6장에서는, 순종하신 그 한 사람에게 연합이 된 사람들은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순종하신 그 사람 안에서 정죄당하지 않으니 더 이상 죄에 종노릇하지 말고 자유하고 살라고 합니다.

자기 행위에 근거하지 말고 예수를 믿음으로 살라고 합니다.

율법에 다스림을 받지 말고 은혜의 다스림으로 살라고 합니다.

율법의 다스림을 받으면 죄의 종으로 사는 것이고, 은혜의 다스림으로 사는 것은 의에 종으로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7장에서는, 율법과 은혜를 두 남편으로 비유하여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율법이라는 남편하고 살았는데 예수가 그 율법이라는 남편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해 주었다고 합니다.

신랑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과거 남편은 잊고 새 남편 안에서 자유롭게 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몸뚱이가 은혜라는 새로운 남편에게 적응이 잘되지 않고 율법이라는 남편에게 시달리던 것이 몸에 배여 있어서 법이 자꾸만 작동을 하더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라고 탄식을 합니다.

 

8장에서는, 그러자 성령께서 야 이놈아! 신랑이 바뀌었잖아!

그러니까 비록 너희 몸뚱이가 죄로부터 자유롭지 않다고 하여도 너희 신랑이 바뀌었으니 이제는 그 신랑의 다스림으로 살라고 합니다.

새 신랑이 너희를 지켜 주고 있으니까 결코 정죄함이 없고 그 어떤 것으로도 너희의 구원은 끊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안심하며 살라고 합니다.

 

9장에서는, 이러한 사랑을 야곱의 선택으로 이야기 해 줍니다.

모세와 바로를 가지고 이야기 합니다.

내가 너희를 야곱처럼 사랑하기로 선택하였다고 합니다.

선택이란? 마치 토기장이가 귀한 그릇과 천한 그릇을 만든 것과 같습니다.

은혜로 택함을 입은 자들이 귀한 그릇입니다.

이 모든 것은 주인이 정한 것이므로 절대로 우리의 조건으로 변하여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0장에서는, 하지만 이런 사실들을 우리가 믿지 못하니까 믿어지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그 법을 우리 마음에 새겨 넣었다고 합니다.

그 법이 마음 판에 새겨진 자들은 자기 꼬라지를 안 보고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11장에서는, 이렇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바로 참 감람나무에게 접붙임 당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일을 하시는가 하면 단 하나 우리의 구원을 하나님의 긍휼로 남기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롬 11장 32절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그래서 교리부분의 대미(大尾)를 긍휼을 베풀기 위한다는 것으로 말씀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하나님은 이 땅에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남기시기 위하여 일을 하신다는 뜻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측량 할 수 없는 지혜라고 합니다.

 

1장에서 11장까지의 결론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불순종 가운데 가두신 것은 하나님의 긍휼로 구원키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곧 세상에 하나님의 은혜만 남기겠다는 뜻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 어느 누구의 자랑거리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오직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공로만 오롯이 남기기 위함입니다.

이걸 만물이 주께로 나오고 주께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결국 만물 가운데 주(主)만 우뚝 서고,

주(主)만 찬송을 받으시고,

주(主)만 영화롭게 되는 것이 역사가 하여야 하는 일들입니다.

 

이게 창조의 이유이고!

만물을 존재케 하는 이유이고!

우리를 구원한 목적입니다.

 

결국 이 역사는 예수님으로 시작이 되어서 예수님을 위하여 존재하다가 예수님에게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이 세상의 창조 목적이고 존재의 이유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유입니다.

 

이에 바울이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누가 이런 하나님의 지혜를 알 수 있겠느냐!

우린 그저 그 지혜 앞에 유구무언(有口無言) 일 수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로마서를 통하여서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은 단 하나!

오직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은혜가 빠지고 긍휼이 사라지면 앙꼬 없는 찐빵과 같습니다.

 

인정머리가 없으면 사람이 아니듯이!

주의 은혜를 모르면 성도가 아닙니다.

긍휼이 빠진 제사는 남을 찌르는 흉기가 됩니다.

 

하나님이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두신 것은 긍휼을 베풀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린 긍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을 받은 성도들 속에는 하나님의 긍휼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건 마치 불고기 속에 양념이 배어 있듯이 구원 받은 성도들 속에 배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면 우리의 언행심사(言行心思) 모든 것에 하나님의 은혜가 스미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내가 얼마나 잘나고 대단한가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내 삶 속에서 주의 은혜가 뿜어져 나와야 합니다.

향수가 뿌려진 옷을 풀럭거릴 때마다 향기가 뿜어져 나오듯이 우리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맛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유대인은 오해 했습니다.

자기들은 율법을 지켰기 때문에 구원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잘난 척 했습니다.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을 깔 봤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지 않고 엄위에 거한 것입니다.

 

예전에 바울도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다메섹 이후 성령의 감동을 입고 보니 율법 지킴은 아무 쓰잘데기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은혜를 입고 보니까 유대인들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동족들에게 알려줍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 없다고 합니다.

율법을 지킨 자나 안 지킨 자나 하나님 앞에서는 다 똑 같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한 아담 안에서 태어난 죄인이라고 합니다.

 

사실이 이러한데 유대인들은 고집을 피웁니다.

율법을 지키면 의로워진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게 틀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으로는 의(義)를 만들 수가 없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율법으로 죄를 깨닫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너는 죽어야 할 놈이라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을 봅시다.

 

롬 3:19-20=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은 의(義)를 만들고자 주신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도리어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하여서 모든 입을 막고 하나님의 심판 아래 가두기 위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율법을 온전하게 지켰다 할지라도 그 속에서는 의(義)가 나오지 않아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의(義)를 다른데 두었기 때문입니다.

 

쉬운 말로 하나님의 의(義)는 율법이라는 그릇에 담아놓지 않고 다른 그릇에 담아 놓았어요.

그 다른 그릇이 바로 예수그리스도라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 외에 다른 한 의(義)가 나타났는데 그게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義)라고 합니다.

 

로마서의 중심 주제가 바로 이 의(義)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에 의(義)가 아니고 율법 외에 다른 한 의(義)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한 의(義)가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난 의(義)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예수그리스도의 의(義)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 의(義)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그 시나리오대로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그 아들의 의(義)만 남기기를 바라십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창조 목적이 그 아들을 위해서 창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아들의 의(義)를 다른 말로 은혜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가득히 하나님의 은혜가 강물같이 흐르고 덮은바 되어서 충만해지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남기고 싶은 것이 딱 하나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남기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우리 안에 남기고 싶어 합니다.

우리 마음 판에 새겨 놓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기를 바라십니다.

왜? 불순종 가운데 가두었다고 했습니까?

긍휼을 베풀기 위함입니다.

불순종의 더러운 죄를 하나님의 은혜로 덮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충만케 채우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그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 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들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이는 그 은혜를 받은 자들로 하여금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케 하기 위함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창세전 언약이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1장을 봅시다.

 

엡 1:3-7=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아버지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택한 자들을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해 주십니다.

어떻게? 거룩하고 흠이 없어집니까?

예수님의 피로 주어집니다.

 

이렇게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성도들은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됩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이 언약을 모티브로 세상을 창조 하였고 그 언약을 토대로 다스리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역사 속에서 예수의 피로 죄사함 받는 일을 당하고!

이렇게 예수의 피로 죄사함 받은 자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어서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신 것입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느냐 모르느냐 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는 신자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자는 불신자입니다.

 

은혜를 아는 자는 사람이고!

은혜를 모르는 자는 짐승입니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자는 짐승이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탄식을 보면 이러한 마음이 잘 나와 있습니다.

 

이사야 1장을 봅시다.

 

사 1:2-14=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4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 ~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이사야의 입을 빌려서 탄식합니다.

하늘과 땅에게 소리칩니다.

하나님의 애끓은 탄식입니다.

 

여호와께서 자식을 키웠는데 이 놈들이 짐승만도 못하다고 합니다.

짐승은 최소한도 자기에게 먹이를 주는 주인은 알아보는데 자기백성이라고 하는 놈들은 자기를 낳아주고 키워준 어미 애비의 마음은 몰라준다고 합니다.

 

이게 어디 하늘과 땅에게 하는 말인가요?

지금 저와 여러분에게 하고 있는 말입니다.

이 애끓은 하나님의 탄식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디 떡을 달라고 합디까?

재물을 달라고 합디까?

달라는 것이 아니라 왜? 내 은혜로 살고 있음을 모르느냐고 합니다.

 

은혜를 모르고 행하는 그 어떤 짓거리도 다 하나님 앞에서는 쓰레기입니다.

시절을 따라서 모이면 뭣하고!

갖다 바치면 뭣합니까?

 

하나님은 싫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모이는 모임이 싫고!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바치는 제물이 싫다고 합니다.

역겹다고 합니다.

 

다시는 나를 찾지 말라고 합니다.

다시는 가지고 오지도 말라고 합니다.

꼴도 보기 싫다고 합니다.

 

왜? 그런가요?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제사 지내기에 바빴습니다.

갖다 바치기에 바빴습니다.

 

이들은 하나님 앞에 모이고 하나님에게 바치면 하나님이 좋아하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모이고 바친 것을 나무란 것이 아니에요.

왜? 모이고!

왜? 바치는지를 알라는 것입니다.

 

이걸 예수님께서 아버지는 제사보다 긍휼을 원한다고 하셨어요.

하나님은 제물을 원한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기를 바랐습니다.

너희들이 내 긍휼을 입어야 할 자들이라는 것을 알기를 바라셨어요.

 

산다는 것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감사하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드리기에 바빴고 모이기에 바빴습니다.

정작 드리고 모이는 것 속에 담겨 있어야 할 은혜와 긍휼이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의와 인과 신이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껍데기만 드린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약의 문을 닫으면서 너희가 내가 바친 그 절기 지킴이라는 껍데기 같은 똥을 너희 얼굴에 처바른다고 하셨습니다.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열심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충성을 원하는 것도 아닙니다.

재물을 원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 은혜로 살고 있음에 감사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그 은혜에 대한 감사가 격발한 열심과 충성과 헌신을 바라십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그 은혜가 풍겨나기를 바라십니다.

세세한 것 속에 주님의 긍휼이 배어나기를 바라십니다.

열심보다 여호와를 아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러므로 힘써 여호와를 알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를 통해서 율법 외에 다른 의(義)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의 의(義) 말고!

하나님이 주신 그 의(義)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의(義)를 들고 오라고 합니다.

 

내가 언제 너희들이 모이고 바친 것으로 만든 의(義)를 달라고 했느냐!

그런 인간들이 만든 의(義) 말고!

내가 준 의(義)를 보이라고 하십니다.

 

나는 너희들의 열심과 충성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준 그 열심과 충성을 보이라고 하십니다.

내가 너희들을 위하여 얼마나 열심을 내고 내 헌신을 주었는지 알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라고!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보낸 분이 있다는 겁니다.

 

왜? 보냈습니까?

우리의 허물과 죄를 위하여서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를 살리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우리의 열심을 보이는 것이 아니고 먼저 하나님의 열심을 아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서 십자가에 죽이신 그 열심과 충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은혜가 우리 안에서 달음질하게 하여야 합니다.

 

모든 성경은 이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여러 부분과 여러 가지로 이야기 하지만 결국은 하나입니다.

그 아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히브리서 1장을 봅시다.

 

히 1:1-2=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옛적에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이야기 하였습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그 아들에 관한 이야기들입니다.

그러다가 이제는 에둘러서 이야기하지 않고 그 아들을 보내서 직접적으로 말씀하신다고 합니다.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이 아들 안에서 통일이 되었습니다.

완성이 되었습니다.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은 모두가 아들에 관한 사진들입니다.

 

그 사진들을 아들이 와서 완성하신 것입니다.

이제는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을 붙잡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증거 한 실체인 그 아들이 왔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말합니다.

아버지의 뜻은 이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의 뜻이 뭔고 하니 그 아들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아들을 믿으라는 것은 다른 것은 일체 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일체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겠다고 하십니다.

인간의 조건을 묻지도 따지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너희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종이든 자유자이든,

율법을 지킨 자이든 안 지킨 자이든,

그건 구원을 얻는데 아무런 조건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종이든 자유자이든,

율법을 지킨 자이든 안 지킨 자이든,

이 모든 것을 통틀어서 율법에 의(義)라고 합니다.

 

율법의 의(義)란? 인간의 조건에서 나온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조건 말고 다른 조건을 주셨습니다.

그 조건이 무엇인가 하면 그 아들을 믿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보내신 자를 믿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보내신 그 아들을 믿는 자는 옳다 인정하고!

그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그른 자라고 정죄하십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이 보낸 그 아들에게 입 맞추면 살고 입 맞추지 않으면 죽습니다.

이게 하나님이 이 세상에 제시한 정답입니다.

 

아들이 정답입니다.

아들이 온 후로 심판이 일어납니다.

어떤 이들은 아들에 의하여 살아나고!

어떤 이들은 아들에 의하여 저주의 자리로 나아가게 됩니다.

 

축복과 저주가 그 아들로 인하여 결정이 됩니다.

아버지가 그 아들에게 심판권을 넘겨주었습니다.

그 아들의 의(義)가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이 구원을 받고!

그 아들의 의(義)가 없는 자는 정죄함으로 저주를 받습니다.

 

이걸 오늘 본문에서는 은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사에는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조건을 보면 후회할 일이 생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조건을 보지 않고 그 아들에 조건을 보시기 때문에 후회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 탄복을 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누가 이를 알겠는가?

 

인간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지혜입니다.

불 순종가운데 가두어 놓고 긍휼을 베푸시는 이러한 것은 선악의 법 아래 있는 인간들에게서는 도무지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놀라는 것입니다.

 

유구무언입니다.

그냥 입이 쩍 벌어지고 다물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요?

어떻게 나의 죄를 그 아들에게 담당시킬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뭐라고?

우리가 그만한 가치가 있습니까?아무리 봐도 나는 그 가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가치가 있을지 몰라도 저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죄 없는 아들을 죽이고 나를 구원해야만 하는 가치를 발견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놀라는 것입니다.

놀라고 또 놀라는 것입니다.

 

유구무언의 자리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입을 점점 닫게 되어 있어요.

처음엔 다 아는 척 촐싹거렸는데!

이젠 정말 모르겠습니다.

 

처음엔 은혜가 가벼웠는데 가면 갈수록 무거워짐을 느낍니다.

이제는 내가 하나님 말씀을 너무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말씀을 증거한다는 것이 두렵고 떨려요.

그 은혜가 너무도 커서 내가 담아내지를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가 너무도 커서 놀라고!

그 은혜가 너무도 무거워서 놀라고!

그 은혜가 너무도 깊어서 놀랍니다.

이 아둔한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 불가하기 때문에 놀라는 것입니다.

 

주여! 이런 악당이 구원을 받아도 되는 것입니까?

그래서 은혜입니다.

은혜이기 때문에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 수로보니게 여인의 자리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이기 때문에 마리아처럼 옥합을 깨트리고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바르고 머리털로 그 발을 씻길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 가치의 전부를 주님께 몽땅 드려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내 영광이라야 고작해서 예수님의 발을 닦는 걸레 같은 것입니다.

 

이걸 아니 은혜이고!

그 은혜가 사무쳐서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가슴이 쿵쾅거리고 전율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그 은혜가 너무도 커서 담아 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다 아는 척 나불거린다는 것이 불경입니다.

 

어찌 그 큰 은혜를 말로 다 하겠습니까?

없습니다.

감격하여 울 수 밖에 없고!

감사할 수 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지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너무도 크고 높아서 인간의 지혜로는 도무지 헤아릴 수가 없어서 놀라는 것입니다.

야~!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누가 주의 마음을 알고 드리겠습니까?

없습니다.

아무도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드릴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린 받기만 하였습니다.

드린 것이 없습니다.

설령 우리가 드렸다고 하는 그것도 주께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주께 얻어먹고 살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것을 얼마나 깨닫느냐에 따라 주를 사랑하는 마음이 달라집니다.

 

많이 탕감 받은 자는 많이 사랑할 것이고 적게 탕감 받은 자는 적게 사랑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언제 사람을 차별해서 탕감 하셨나요?

아니에요.

하나님은 모두에게 동일한 중수로 탕감해 주셨습니다.

 

다만 깨닫는 차이입니다.

많이 깨닫는 사람은 마리아처럼 사랑할 것입니다.

욥처럼 입을 닫을 것입니다.

 

사랑을 알면 할 말이 줄어들어요.

그래서 좋은 신앙은 입은 닫고 손발이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부디 이 말씀 앞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는 눈들이 열리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여 내 잔이 넘치나이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그 은혜와 영광을 찬미합니다. 이 무지랭이 같은 자를 위하여 예수님이 죽었다는 이 사실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그 은혜를 더 많이 알게 하시고 더 깊이 보게 하시고 더 높이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눈을 여시고 귀를 여시고 마음을 열어서 모든 것이 주께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인생이 우리 것이 아니라 주의 것임을 알게 하소서. 그리하여 범사 속에서 하나님을 뵙고 감사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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