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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계시록 강해

♣(성경강해)53강. 재림하는 예수님과 네 가지 이름 (계 19:11-21)

by coroa 2021. 10. 12.

 

 

딤후 3장 12-15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53강. 재림하는 예수님과 네 가지 이름 (계 19:11-21)

-.정낙원 목사

 

 

 

하늘이 열립니다.

하늘이 열린다는 것은 하나님이 강림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강림 하실 때마다 하늘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이 재림을 하십니다.

그런데 그 이름이 다양합니다.

네 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한 분이신데 이름은 네 가지 일까요?

무슨 뜻이 있겠지요.



이름을 아무 의미 없이 짓는 부모는 없습니다.

부모가 자식의 이름을 지어 줄 때에는 부모의 소망이 담겨져 있습니다.

“너는 장차 이런 사람이 되어라” 라는 뜻으로 이름을 지어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름 속에는 부모의 의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알다시피 예수님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그 아들의 이름을 지어줄 때는 그 이름이 담고 있는 내용을 반드시 이루겠다는 의지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재림하는 예수님이 네 가지 이름으로 오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 속에는 아버지의 네 가지 뜻이 담겨져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네 가지 이름 속에 담겨져 있는 영적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원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계실 때는 이름이 없었습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는 이름이 없는 나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말씀으로 계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을 봅시다.



요 1: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태초란? 하나님 나라를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태초는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와는 다릅니다.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는 시간의 시작을 알리는 태초를 말합니다.

역사를 시작하는 처음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이 말하는 태초는 시간적 태초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공간적 태초를 말합니다.

역사 바깥에 있는 하나님 나라를 말합니다.

역사가 생기기 전에 본래부터 존재하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이를 태초부터 있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 라고 합니다.

이 세상 바깥에 있는 창조주가 사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세상은 그 창조주가 사는 세상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보이는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세상으로부터 나왔다고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창조주가 사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인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도 하나님이십니다.

이러면 하나님이신 하나님과 말씀이신 하나님이 함께 계심이 됩니다.

이 사실을 증거하는 분이 성령입니다.

그러니까 영원한 나라인 태초에 하나님이신 하나님과, 말씀이신 하나님과, 성령이신 하나님이 함께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하나님은 성부(聖父) 하나님이시고,

말씀이신 하나님은 성자(聖子) 하나님이시고,

성신이신 하나님은 성령(聖靈) 하나님이십니다.

이를 우리는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장 14-15절을 보십시다.



요 1:14-15=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가 누구인가 하면 예수님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말씀으로 계시던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예수라는 이름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기를 예수님은 자기보다 먼저 계신 분이라고 합니다.



이건 세상 논리로는 말이 안 됩니다.

세상의 질서로는 먼저 나온 자가 형이고 나중에 나온 자가 동생입니다.

동생은 형보다 앞설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동생이 형보다 먼저 있었다고 합니다.



알다시피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앞서 태어난 형입니다.

세례 요한은 잉태한지 6개월 만에 엄마 뱃속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정상적인 사람도 아닌 임신 6개월짜리가 성령의 감동으로 마리아 뱃속에 갓 잉태한 예수님을 알아보고 기뻐하였습니다.



이건 말이 안 됩니다.

그런데 창세전 언약으로 보면 말이 되어요.

창세전 언약으로 보면 예수님은 우리보다 먼저 계신 분입니다.

그래서 만물보다 먼저 계신 예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을 창조하였어요.

세례 요한은 성령의 감동으로 이 사실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나 보다 늦게 오신 이 예수님은 내가 있기 전부터 계신 분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일컬어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이 땅에 오셨는데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 가득하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독생자의 영광이란?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비록 인간의 몸을 입고 있지만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빌립보서 2장을 봅시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골로새서 1장을 봅시다.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그란? 예수님을 말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라고 합니다.

또한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피조물보다 먼저 계신 분이라고 합니다.

피조물보다 먼저 계신 분은 창조주 하나님뿐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예수님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피조물을 만드신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예수라는 이름으로 오시면서 종의 형체인 인간의 육신을 입으신 것입니다.

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을 종의 형체라고 합니까?



종의 형체로 오셨다는 것은 종의 신분으로 오셨다는 뜻입니다.

종의 신분으로 오신 것은 아버지의 일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버지의 일은 예수라는 이름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이름은 아버지가 지어주는 것입니다.

아버지로부터 이름을 받으면 그 때부터 아버지가 하라고 하신 일을 하여야 하는 위치에 놓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비록 종의 일을 하시지만 여전히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영광이 가득하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는 말은 예수님이 바로 은혜와 진리 그 자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고 진리의 하나님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하나님이 은혜의 하나님이고 진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인 것입니다.



피조물은 은혜의 하나님과 진리의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모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이고 하나님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은혜의 하나님과 진리의 하나님으로부터 피조물로 지음을 받았지만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를 알려주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그 아들을 아버지의 영광과 은혜와 진리로 충만케 하여서 피조물의 모습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비로소 감추어졌던 태초에 계신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진리를 피조물들이 알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 어떤 것인지,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것인지, 하나님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비밀이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동안 피조물에게 감추어져 있던 하나님 나라의 비밀들을 예수님을 통해서 오픈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입니다.

예수님 속에 아버지의 비밀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이 예수님에게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니까,

예수님이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갈 수가 없고, 또한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도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아버지에게 데리고 가기 위함입니다.



이 땅에 수많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일컬어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영생 주시기로 작정이 된 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독생자(獨生子)로 오신 것입니다.



“독생자” 라는 말은 “모노~게노스”라고 합니다.



이는 “모노”와 “게노스”의 합성어입니다.

“모노”는 “유일하다”는 뜻이고,

“게노스”는 “종류, 혈족”이라는 뜻입니다.



“유일하다” 라는 모노는 단수적인 의미이고,

“종류와 혈족”이라는 게노스는 복수적인 의미입니다.

모노게노스를 직역을 하면 “유일하신 분이 수없이 많다” 라는 뜻입니다.

이게 비밀입니다.



“아버지의 독생자”라는 말은 “아버지로부터 나온 유일한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유일하신 분 속에 아버지께로 난 자들이 수 없이 많이 들어있다는 뜻입니다.

“유일하다” 라는 단수(單數) 속에 “여럿”이라는 복수(複數)가 담겨져 있는 것은, 예수님 안에 수많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담겨져 있다는 뜻입니다.

이게 또 신비입니다.



콩 심는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납니다.

그럼 예수님 안에서 수많은 예수가 나온다는 뜻입니다.

이건 마치 한 알의 밀알이 죽어서 많은 밀알을 낳는 것과 같습니다.



한 알의 밀알은 단수입니다.

그러나 그 한 알 속에는 수많은 복수의 밀알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농부가 한 알의 밀을 심는 것은 그 속에서 수많은 밀을 끄집어내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농부가 되어서 이 세상에 예수라는 농사를 지으십니다.



예수 하나를 죽여서 수많은 예수를 낳고자 하십니다.

아브라함 속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나왔듯이, 예수님 속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하늘에 별처럼 많이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한 알의 밀알로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한 알의 밀알처럼 땅에 떨어져서 죽으면 그 속에서 수많은 밀알을 낳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예수님이 낳는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독생자가 담고 있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독생자로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이 세상에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갈 하나님의 백성들을 낳고자 하심입니다.

밀알이 낳아지는 것은 한 알의 밀알의 죽음을 통해서 낳아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한 알의 밀알처럼 죽어서 수많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을 낳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바로 한 알의 밀알입니다.

예수 라는 이름 속에 무엇이 담겨 있나요?



마태복음 1장을 봅시다.



마 1:18-23=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예수님께서 어떻게 태어났나요?

성령으로 잉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 이 세상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낳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낳는가 하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는 방식으로 낳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어떤 방법으로 오셨나요?

성령으로 잉태되는 방식으로 오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이 땅에서 태어나는 방식이에요.



하나님은 예수님을 태어나게 하신 방식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을 태어나게 하십니다.

그것이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을 하늘로 났다고 합니다.

이는 하늘의 방식으로 낳아졌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낳아지셨듯이 하나님의 백성들도 성령으로 낳아지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뭔가요?“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자”이시지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가지고 자기 백성들의 죄를 사해주는 일을 하신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죄를 사하는가요?

피 흘리심이 없은 즉 사함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대신하여서 피를 흘려주는 방식으로 죄를 사해주신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죄사함의 방식은 창세전 언약 속에 이미 정한 방식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보면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 백성들의 죄를 사해 주실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려 주셨어요.

그럼 창세전에 어떻게 구원하시기로 작정을 하셨는지 창세전 언약을 봅시다.



에베소서 1장입니다.



엡 1:3-7=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하지요.

어떤 자로 택하셨는가 하면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로 택하셨습니다.

이 말은 자기 백성들이 이 땅에서 죄 아래 가두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가두어졌다는 것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죄의 권세로부터 벗어 날 수가 없는 구조 속에 놓여 있다는 뜻입니다.

누군가가 외부에서 건져주어야지만 합니다.

이렇게 되면 건져 주실 분은 죄 아래서 난 사람으로서는 안 되겠지요.

죄와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야만 합니다.



이 세상 바깥에서 오신 분이라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늘나라에 계시던 죄와 상관이 없는 분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죄와 상관이 없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을 구원하는 구원자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자기백성들을 죄로부터 건져내는 일을 하고자 하심입니다.



어떻게 건져내는가 하면 예수님의 피로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건져내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죄로부터 벗어난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가 죽어서 수많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낳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하나를 죽여서 그 속에서 수많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끄집어내신 것입니다.

이게 예수라는 이름 속에 담겨진 영적 의미입니다.



자기 백성들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죄의 권세로부터 나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종말이라고 합니다.



종말이라는 말 속에는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는 끝이란 뜻입니다.

둘째는 새로운 시작을 뜻합니다.



성경에서 인류 역사의 종말을 구약에서 예표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의 때에 사람 지음을 한탄 하시고 세상을 홍수로 쓸어버리셨습니다.

온 세상이 홍수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온 세상을 심판하는 속에서 하나님은 노아의 가족을 구원 하셨습니다.

어떻게 구원을 했는가 하면 방주를 통해서 했습니다.

이렇게 방주를 통해서 구원을 받은 노아를 일컬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자라고 합니다.



노아가 살아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노아를 일컬어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다고 합니다.

그 은혜의 산물이 바로 방주입니다.



노아의 가족은 방주를 타고 홍수의 심판 속에서 살아났습니다.

방주가 심판 속에서 노아의 가족들을 지켜주신 것입니다.

방주가 물 위를 떠다니다가 아라랏 산에 정착을 하게 됩니다.

방주가 노아의 가족을 아라랏 산으로 옮겨준 것입니다.



온 세상이 홍수로 잠겼습니다.

그럼 방주가 도착한 아라랏 산은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을 상징합니다.

아라랏 산은 물 위에 있는 땅입니다.

물에 잠기지 않는 땅이란 뜻입니다.



“아라랏” 이라는 말은 “창조” 또는 “거룩한 땅” 이라는 뜻입니다.

직역하면 창조의 세계이고 거룩한 땅이란 뜻입니다.

창조의 세계이고 거룩한 땅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이는 하늘나라를 상징합니다.



방주가 인도한 아라랏 산은 이 세상 바깥에 있는 하늘나라입니다.

영적인 의미로는 천국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방주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자들을 천국으로 인도한 것입니다.



이걸 신약적으로 이해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자들을 천국으로 인도한 방주는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성도들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건져내어서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럼 노아의 홍수 사건은 장차 예수님이 재림하여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세상의 심판 속에서 구원을 하여서 천국으로 데려가실 것을 미리 보여주신 예표적인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장차 임할 세상의 종말을 노아의 때와 같다고 말씀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 끝 날을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하신 말씀은 세상 종말의 징후가 노아 시대와 같아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아라랏 산은 해발 5000미터에 있습니다.

성경에서 5 라는 숫자의 의미는 성령의 수로서 새롭게 거듭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또한 1000은 만수로서 묵시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방주가 안착한 해발 5000미터의 아라랏 산은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이 살아가는 묵시의 세계를 뜻합니다.



그래서 비둘기가 새 감람나무 잎사귀를 물고 노아에게 가져다주었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홍수로 다 잠겨 버린 세상에서 비둘기가 새 감람나무 잎사귀를 물고 왔다는 것은 새로운 세상에 것을 물고 왔다는 뜻입니다.



왜 비둘기가 새 감람나무 잎사귀를 물고 왔을까요?

새 감람나무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비둘기와 새 감람나무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마태복음 3장을 봅시다.



마 3:16-17=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올라오자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였습니다.

성령을 왜 비둘기 같다고 할까요?

이는 성령이 이 분이 바로 아라랏 산처럼 높은 세상인 하늘 나라로 인도하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알려준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감람나무는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감람나무 새 잎사귀란? 감람나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 새 감람나무가 자라는 아라랏 산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곳이란 뜻입니다.

비둘기가 아라랏 산의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물고 온 것은 부활의 세계를 알려준 것입니다.



방주가 인도한 땅은 죽음에서 부활한 자들이 살아가는 땅인 것입니다.

죄와 사망이 없는 평화의 땅이라는 뜻입니다.

비둘기는 노아에게 이 땅은 평화의 땅이라는 것을 알려 준 것입니다.

방주는 예수님을 예표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살아가는 곳은 천국입니다.

천국은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 받은 자들이 살아가는 곳입니다.

천국은 흠 없는 제물의 희생으로 정죄함이 없는 곳입니다.

이게 노아 언약 속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창 8:18-22= “노아가 그 아들들과 그 아내와 그 자부들과 함께 나왔고 19 땅위의 동물 곧 모든 짐승과 모든 기는 것과 모든 새도 그 종류대로 방주에서 나왔더라 20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22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방주에서 나온 노아는 정결함 짐승을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 제물의 향기를 흠향하시고 약속을 하십니다.



어떤 약속인가요?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악함에도 심판 하지 않는 것은 인간의 악함을 정결한 제물의 희생으로 용서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이건 마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신 것과 같습니다.

예수 안은 정죄함이 없는 세계입니다.

그러니까 방주가 안내한 땅은 흠 없는 제물의 희생으로 정죄함이 없는 땅인 것입니다.

이는 천국을 상징합니다.

천국은 흠 없는 제물의 희생으로 용서 받은 자들이 살아가는 긍휼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방주와 같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통하여서 홍수로부터 살아났듯이 성도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죄와 사망으로부터 살아남았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살아가는 곳은 정죄함이 없는 세상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세상을 천국이라고 합니다.



이 땅에 임한 천국은 예수그리스도 안이 됩니다.

만약에 성경이 노아 홍수로 끝이 났다고 한다면 방주가 안착한 아라랏 산이 바로 정결한 제물의 희생으로 죄인이 살아가는 영원한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노아의 가족이 구원 받은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이야기를 노아 가족을 가지고 단막극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노아 이후 사람들의 이야기는 인류사의 2막 이야기가 됩니다.

노아로 일단락을 하고 이제 2부가 전개가 됩니다.

그것이 포도주에 취하여 수치를 드러내는 것으로 새로운 죄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포도주의 취하여 수치를 드러낸 노아 이후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아담이 범죄 한 후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죄인의 인생을 살아가듯이 노아 이후의 인간들도 죄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장차 임할 심판에서 살아나는 방주를 짓는 삶을 살아가고 있고,

어떤 이는 장차 임할 심판은 모르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하는 세상살이에 몰두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각자 살아가는 방식은 다르지만 곧 종말이 이를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악이 관영한 노아 시대의 사람들을 홍수로 쓸어 버렸듯이 또 다시 종말을 잊고 살아가는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장차 임할 세상의 종말을 노아의 홍수와 비교 하였던 것입니다.

노아 홍수는 장차 임할 세상 종말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을 봅시다.




벧후 3:1-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둘로 너희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하게 향하여 2 곧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3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4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5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잊으려 함이로다 6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구약에서는 홍수로 심판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불로 심판 한다고 하십니다.

그럼 노아 홍수는 종말에 임할 세상의 심판을 예표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노아의 방주가 창조의 세계를 뜻하는 높은 산에 안착 하였듯이,

장차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노아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성도들은 공중으로 이끌려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성도들이 이끌려 올라간 공중이 노아의 방주가 도착한 아라랏 산과 같은 곳입니다.

아라랏 산에 당도한 노아의 가족이 흠 없는 짐승의 제사로 심판당하지 않고 살 수 있었듯이,

예수님의 재림 때 공중으로 이끌려 올라간 성도들도 새로운 세상인 천국에서 예수님의 피로 정죄당하지 않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 속에는 심판과 구원이 담겨져 있습니다.

세상에 속한 자들에게는 저주이고 끝이지만,

노아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성도에게는 새로운 세상으로 옮겨가는 축복인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재림하는 모습을 봅시다.



하늘이 열리고 예수님이 백마를 타고 오십니다.

예수님의 뒤를 하늘의 군대들이 따르는데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있습니다.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은 자들은 앞서간 성도들을 말합니다.

이들의 모습은 어린 양의 신부의 모습입니다.



계시록 6장을 보면 천상에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인하여 일찍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하나님에게 자기들의 원수들을 갚아 달라고 탄원을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들에게 흰 옷을 입혀 주고서는 잠시 동안 기다리라고 합니다.

저 아래 너희들처럼 죽임을 당하여야 하는 너희 동무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 수가 차면 원수들을 갚아 주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계시록 6장의 응답이 이루어지는 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원수들을 응징하려고 백마를 타고 오시는 것입니다.

혼자 오시는 것이 아니라 앞서간 천상에 있는 성도들도 함께 데리고 오십니다.

예수님이 그의 신부들을 데리고 오시는 것입니다.



하늘에서는 흰 옷 입은 신부들이 내려오고,

땅에서는 흰 옷 입은 신부들이 단장을 하고 기다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이 땅에 있는 어린 양의 신부들에게 빛나고 흰 세마포 옷을 입혀서 단장을 시키신 것입니다.



이 세상은 예수님에 의하여 시작이 되었고,

예수님에 의하여 유지 되다가,

예수님에 의하여 끝을 맺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시작하면서 예수님을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고 증거해 주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에게서 나와서, 예수로 살다가, 예수에게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 그 끝이 다다른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축복의 시간이고,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던 음녀의 세력들에게는 저주의 시간입니다.



예수로 인하여 환란 당한 자에게는 안식으로 갚으시고,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한 음녀의 세력들에게는 환란으로 갚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모습이 전투하는 장군의 모습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보세요.



피 뿌린 옷을 입고,

그 눈은 불꽃과 같고,

그 입에서는 이한 검이 나오고,

손에는 철 지팡이를 들고 있으며,

머리에는 많은 면류관을 쓰고 있고,

그 발로는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는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은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통해서 이미 계시하셨던 모습들입니다.

이는 곧 재림하시는 예수님은 곧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통해서 말씀하신 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림하시는 예수님이 네 가지 이름으로 오십니다.



네 가지 이름 속에는 예수님의 사역적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건 계시사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초림으로 오실 때 예수님의 이름과 재림 하실 때 예수님의 이름은 다릅니다.

초림으로 오시는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려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초림으로 오시는 예수님은 하나의 이름으로 오셨습니다.

하나의 일만 하시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재림하시는 예수님은 다양한 일을 하십니다.



첫째로는, 자기 백성들을 이 세상으로부터 빼내는 구원을 하십니다.

둘째로는, 세상을 심판하는 심판주로 오십니다.

셋째로는, 만왕의 왕이 되어서 다스리기 위하여 오십니다.



그래서 재림하시는 예수님은 다양한 이름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첫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고,

둘째 이름은, 자기만 알고 있는 비밀이고,

셋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넷째 이름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십니다.



이름 속에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했습니다.

그럼 재림하시는 예수님 속에는 다양한 의미가 담겨져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주는 영적 의미가 다양하다는 뜻입니다.

그럼 첫째 이름인 충신과 진실이라는 이름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살펴봅시다.

예수님이 충신과 진실로 나타나신 적이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나타나실 때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계 3: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라오디게아 교회는 종말 교회로서 타락한 음녀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충성되고 참 된 증인으로 나타나십니다.

충성되고 참 된 증인이라는 말은 충성과 진실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충성이란? 충신과 같은 말이고,

참된이란? 진실과 같은 뜻입니다.

충성과 진실이란? 진리로 무장하여서 싸우는 군사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누구랑 싸우기 위하여 충신과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오실까요?

이것은 진리를 훼손하는 무리들을 응징하기 위하여 오신다는 뜻입니다.

즉 종말에 교회를 타락케 한 음녀의 세력들을 심판하는 분으로 오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심판주이면서 구원주이십니다.



그럼 예수님이 충성과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오시는 것은,

첫째로는 비진리에 속한 음녀의 세력과 싸우기 위함이고,

둘째로는 이 땅에 충성과 진실로 살아가는 성도들을 구원코자 하심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한 알의 밀알로 사셨습니다.

밀알이 죽어서 많은 밀알을 낳았듯이 예수가 죽어서 수많은 예수를 낳았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충성과 진실로 사셨습니다.



그럼 예수로 낳아진 수많은 하나님의 아들들도 충성과 진실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충성과 진실로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증거로 살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백마를 타고 흰옷을 입고 오는 자들도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살았던 자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하늘의 군대라고 하는 것입니다.



군대란? 전쟁하는 자입니다.

하늘의 군대는 예수님처럼 진리를 지키기 위하여 싸우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앞서간 성도들이 군대 장관 되시는 예수님을 따라서 하늘의 군대로 따라 오는 것입니다.

하늘의 군대들은 일찍 죽임을 당한 자들입니다.



이 땅에 남아 있는 성도들도 일찍 죽임을 당한 동무들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지키다가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앞서간 성도들에게 입혀주셨던 흰 옷을 이 땅에 남아 있는 어린 양의 신부들에게도 빛나고 흰 세마포 옷을 입혀주신 것입니다.



세마포 옷은 죽은 자들에게 입혀주는 옷입니다.

장례식장에 가면 죽은 자에게 베옷을 입힙니다.

그리고 그 가족들도 베옷을 입고 곡을 합니다.

이는 죽은 자와 산 자는 한 가족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일찍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인하여 죽임 당한 천상에 있는 자들에게 흰 옷을 입혀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남아 있는 죽은 자들의 형제들인 성도들에게도 흰 옷을 입혀 주십니다.

이는 천상에 먼저 가 있는 자들과 이 땅에 남아 있는 자들은 한 가족이라는 뜻입니다.



그 가족의 우두머리가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죽음의 옷을 상징하는 피 뿌린 옷을 입고 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입고 오시는 피 뿌린 옷은 예수님의 시체를 쌓던 옷입니다.



피 뿌린 옷의 “뿌린” 이라는 말은 “밥토” 라고 하는데,

이는 “옷이 피에 푹 잠긴”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상처가 나서 옷에 피가 조금 묻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온 몸에 피를 쏟아낸 것을 말합니다.



알다시피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실 때 옷을 발가벗김 당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죽자 십자가에서 내려서 아리마대 요셉이 정한 세마포로 싸서 무덤에 보관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시체를 싼 세마포 옷이 바로 피에 푹 적셔진 피 뿌린 옷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아멘이시오 충성과 참된 증인이라고 하시지요.

참된 증인이라는 말은 진리를 지키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는 예수님 자신이 진리 자체이고 이를 지키는 분도 예수님 자신이라는 뜻입니다.



아멘이란? 시작과 끝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온 역사 속에서 진리에 속한 자들을 시작부터 끝까지 지켜내신다는 뜻입니다.

세초부터 세말까지 지키십니다.

예수님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도 계시는 분입니다.

이는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충성과 참된 증인이신 예수님을 아멘이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예수가 있고,

현재의 예수가 있고,

미래의 예수가 있습니다.



이를 삼직을 통해서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이라는 삼직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역사 속에서 행하는 일생을 담고 있습니다.



선지자직은, 육체로 오셔서 자기 백성들이 죄를 고발하다가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행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전에도 계신 과거적 사역입니다.



제사장직은, 부활 후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셔서 보혜사로 도우시는 일을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이 이제도 계시는 현재적 사역입니다.



왕직은, 장차 재림하셔서 만왕의 왕으로 다스리게 됩니다.

이는 예수님의 장차 오실 미래적 사역입니다.



예수님의 삼직으로 보면 재림하는 예수님은 왕으로 오십니다.

우리들의 상식으로는 예수님이 왕으로 오신다고 한다면 화려한 복장으로 치장하고서 올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화려한 왕복이 아니라 전쟁에서 싸우는 장수처럼 피 뿌린 옷을 입고 오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포도 추수를 할 때는 포도를 포도주 틀에 넣어서 짓밟게 됩니다.

그러면 입고 있던 옷에 포도즙이 튀어서 붉게 물들게 됩니다.

종말의 심판이 이러한 모습으로 일어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포도주를 틀을 밟아 뭉개듯이 음녀를 밟아 뭉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피 뿌린 옷을 입고 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이 세상은 종말을 고하게 되고 사단의 세력들은 일망타진하게 됩니다.

19-21절을 보면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 군대들이 연합을 해서 백마를 타고 오는 예수님과 전쟁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19-21= “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20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 21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 고기로 배불리우더라”



백성들을 미혹하던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이 예수님에게 붙잡힙니다.

그리고 유황불 못에 던져지게 됩니다.

이를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는 큰 잔치라고 합니다.



그래서 재림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포도주 틀을 밟으면 그 즙이 옷에 묻은 것처럼 피 뿌린 옷을 입고 전쟁하는 장수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이름인 충성과 진실이라는 이름이 가지고 있는 뜻입니다.



그럼 두 번째 이름을 살펴봅시다.



12절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첫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고”,

둘째 이름은,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다”고 합니다.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라는 것은 비밀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이름이라는 뜻입니다.

왜 공개하지 않을까요?

이는 알아야 하는 사람에게만 알려주고자 함입니다.

적그리스도 세력에게는 감추어진 이름입니다.



먼저 예수님의 모습을 봅시다.



그 눈이 불 꽃 같다고 합니다.

눈이 불꽃같다는 말은 모든 것을 꿰뚫어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속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 마음에 뜻과 생각까지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 앞에 서면 다 드러납니다.

적그리스도 음녀와 거짓 선지자들이 광명의 천사로 위장을 하여도 예수님 앞에서는 다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재림하시는 예수님은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을 쓰고 계십니다.

“많은” 이라는 말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쓴 면류관은 “디아테마타” 라고 하는데 이는 오직 왕만이 쓰는 왕관을 말합니다.

왕만 쓰는 왕관을 하나도 아니고 수없이 많이 썼다는 것은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이 분이 바로 진정한 왕이라는 뜻입니다.

이러면 이 땅에서 왕 노릇하던 자들은 다 거짓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가짜들이 왕 노릇했다는 것이 폭로가 됩니다.

계시록 13장을 보면 바다에서 일곱 머리 열 뿔 가진 짐승이 올라옵니다.



계 13:1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한 이름 들이 있더라”



각각의 뿔마다 면류관을 쓰고 있습니다.

그 머리들에는 참람한 이름들이 써져 있습니다.

면류관을 썼는데 참람한 이름들이 써져 있다는 것은 이놈들은 사기꾼이라는 말입니다.



“참람한” 이라는 말은 “블라스페미아스” 라고 하는데, “훼방하는” “모독하는” 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예수그리스도를 훼방하고 모독하는 일을 행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적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적그리스도는 예수그리스도의 흉내를 내는 자입니다.

예수그리스도 흉내를 내면서 영광을 받고 세상의 면류관을 쓰고서 왕 노릇하였습니다.

마귀를 일컬어 세상 임금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마귀의 종인 큰 음녀와 땅의 음녀들의 머리에는 세상 왕들의 이름이 써져 있는 것입니다.



적그리스도가 쓴 면류관은 “스테파노스” 라고 합니다.

이는 이 세상에서 경기를 하고 이긴 자에게 씌워주는 월계수 관을 말합니다.

“스테파노스”는 세상 영광을 말합니다.

적그리스도가 쓰는 면류관은 이 땅에 것으로서 장차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다 사라지고 불에 타버릴 것들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임금을 심판하러 오십니다.

재림하시는 예수님은 세상 왕들과 다른 면류관을 쓰고 오시는 것입니다.

불타지 않는 하늘에 영원한 면류관입니다.

그래서 면류관을 쓰신 예수님만 아는 이름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면류관을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쓰고 온다는 것은 바로 이 예수님은 우주적인 왕이시라는 뜻입니다.

온 세상의 왕이라는 말입니다.

온 세상이란? 하늘 위나 땅 위를 말합니다.



빌립보서 2장을 봅시다.



빌 2:9-1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예수님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어서 지극히 높이셨다고 하지요.

그리고는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하여금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여서 모든 입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하게 하여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였습니다.

잘 보세요.



예수님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지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란? “이름 중에 이름”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모든 “왕 중에서 왕”이신 만왕의 왕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가진 자들이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주라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이름 위에 이름은 주만 아는 이름입니다.

그래서 땅에서 사치하며 연락하면서 왕 노릇하던 자들을 심판하러 오시는 예수님의 이름은 적들은 알 수가 없고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는 심판 하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창조의 세계를 말하기를 하늘 위나 하늘 아래나, 땅 위나 땅 아래나 라고 합니다.

이걸 천지창조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천지(天地)란? 하늘과 땅입니다.

천(天)은 하늘 위이고, 지(地)는 땅 위입니다.

땅은 보이는 곳이고, 하늘은 보이지 않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땅도 주관하시고 하늘 위도 주관하십니다.



예수님은 땅의 왕이고 하늘의 왕이십니다.

그래서 하늘 위의 면류관을 쓰고 오시는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은 알 수가 없고 자기만 아는 이름으로 오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셋째 이름을 살펴봅시다.



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셋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태초에 계실 때의 이름입니다.



요한복음 1장을 봅시다.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이신 하나님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시면서 예수라는 이름으로 오신 것입니다.



말씀이셨던 하나님이 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까?

이는 예수라는 이름이 담고 있는 일을 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 라는 이름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자”라는 뜻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말씀이신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인간의 형상을 입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의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시는가요?

이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이신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 죄로 인하여 사망에 가두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태초에 말씀으로 계신 하나님을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서 죄와 사망에 가두어진 하나님의 아들들을 구원케 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구원을 하는지는 창세전 언약에 담겨져 있습니다.

창세전 언약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 죽어서 죄와 사망 가운데 가두어진 하나님의 아들들을 구원해 내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쉬운 말로 아버지 하나님이 말씀이신 하나님을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 보내서 자기 백성들의 죄값으로 대신 죽게 하고서 그 피값으로 죄와 사망 가운데 가두어져 있는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하나님의 아들들을 구원해 내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라는 이름 속에 담겨져 있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으로 오셔서 예수라는 이름이 담고 있는 일을 하시고자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 하신 후에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이제 값주고 사 놓은 자기 신부들을 데리러 오십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것은 창세전 언약의 완성자로 오시는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으로 계시던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하나님의 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 뿌린 옷을 입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름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이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죽임당한 그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바로 창세전 언약을 완성하신 태초에 말씀으로 계시던 하나님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재림하시는 예수님의 뒤를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구원을 받은 앞서 간 성도들이 하늘의 군대로 함께 따라 오는 것입니다.



이들은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옵니다.

이것은 이들이 바로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하늘에 있는 천사들을 보내서 세상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자기 백성들을 불러 모은다고 하였지요.



앞서 간 성도들이 하늘의 군대가 되어서 이 땅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 분이 바로 너희를 구원하신 말씀이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걸 예수님이 재림 하실 때 천사들의 나팔 소리로 자기 백성들을 불러 모은다고 합니다.

구약의 절기를 보면 나팔절에 제사장들이 성전 꼭대기에서 나팔을 붑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해발 800M 고지에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시내산과 같아요.

산 아래 있는 백성들은 시내산 위에서 불려지는 나팔소리를 다 들었습니다.



나팔절은 예수님이 재림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면 산 아래 있는 백성들은 모든 일을 멈추고 성전으로 올라옵니다.

이 모습을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 4장에서 예수님이 공중에서 우리를 이끌어 올리는 것으로 설명을 하였습니다.



살전 4:16-18=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8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나팔 소리로 강림하십니다.

그러면 나팔 소리에 자는 자들이 깨어납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우리도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됩니다.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는 것은 마치 하나님이 모세를 구름 위에 있는 시내산 꼭대기로 불러 올린 것과 같습니다.



시내산 위는 우리가 가야 할 집인 것입니다.

이제 하늘 위에 있는 신랑의 집으로 갈 때가 임박하였습니다.

그러니 낙심하지 말고 그 날을 소망하면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이름을 살펴봅시다.



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네 번째 이름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 라고 합니다.

그 이름은 다리에 써져 있습니다.

왜 다리에 이름을 써 놓았을까요?



15절입니다.



15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만왕의 왕이고 만주의 주이신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한다고 합니까?

이한 검으로 만국을 치고 철장으로 다스리고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는다고 합니다.

이 모습은 포도주 틀을 밟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원수들을 인정사정없이 심판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 라는 이름으로 오십니까?

이는 내가 바로 왕이라는 것입니다.

왜 내가 왕이라고 합니까?

이는 이 땅에 예수 이름을 팔고서 왕 노릇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누구인가요?

바로 음녀들입니다.



거짓 종들이 예수 이름을 이용해서 부와 사치로 연락하면서 왕처럼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왕인데 너희가 왜 왕 노릇을 했느냐고 그 책임을 묻는 것입니다.

예수를 흉내 내면서 백성들 위에서 군림하면서 호가호위하며 왕 노릇하던 자들을 포도를 밟아서 형체도 없이 뭉개버리듯이 철저하게 응징하신다는 것입니다.



17-18절을 보세요.



17-18= “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해에 서서 공중에 나는 모든 새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18 왕들의 고기와 장군들의 고기와 장사들의 고기와 말들과 그 탄 자들의 고기와 자유한 자들이나 종들이나 무론대소하고 모든 자의 고기를 먹으라 하더라”



하나님의 큰 잔치가 벌려집니다.

어떤 잔치인가 하면 땅의 왕들을 죽이는 잔치입니다.

땅의 왕들이란? 앞서 18장에서 살펴보았던 큰 음녀와 그를 따르던 땅의 음녀들입니다.



이름하여 적그리스도 세력입니다.

이들을 일컬어 땅의 왕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만왕의 왕으로 오셔서 왕으로 참칭하던 자들인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를 잡습니다.

적그리스도와 거짓선지자들은 이 땅에서 왕 노릇하던 자들입니다.



예수가 만왕의 왕이라고 가르치라고 하였더니 자기들이 왕 노릇을 한 것입니다.

이걸 세상 말로 사기이고 직권 남용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진짜 왕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이 놈들은 나를 빙자하여서 사기를 친 놈들이므로 극형에 처하라고 하면서 산채로 잡아서 유황불 못에 던져버립니다.

마치 이 시대 대통령을 빙자하여서 호가호위하던 자들이 줄줄이 구속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 때문에 고난당한 자들에게는 왕 노릇을 하게 하시고,

예수로 인하여 왕 노릇하던 자들은 유황불 못에 던져 넣으십니다.

환란 당한 자들에게는 안식으로 갚으시고,

왕 노릇하던 자들은 환란으로 갚으시는 하나님의 공의가 빛을 발하는 순간입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가 그냥 비유가 아니라 현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인하여 고난당한 성도에게는 거지 나사로처럼 아버지 품에서 안식하게 되지만, 예수로 인하여 부와 사치로 연락하면서 왕 노릇하던 자들에게는 부자처럼 지옥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재림을 “파루시아” 라고 합니다.

이 말은 현재 임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오고 있다는 뜻입니다.



과연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하고 있는지,

우리 눈에 지금 오고 계시는 예수님이 보이는지,

예수님의 재림 소식에 설렘이 있는지,



누구를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남의 눈을 의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곳은 내가 지금 예수를 믿고 있느냐 입니다.

스스로를 속이지 마세요.



신앙생활은 누가 대신 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해야 하는 것입니다.

관념이 아니고 실제로 말입니다.

머리속에 아는 예수는 소용이 없습니다.

가슴 속에서 예수가 요동치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던가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머리로만 사랑하지 말고 온 몸으로 사랑하라고 합니다.

마음도 뜨겁고 몸도 뜨거워야 합니다.



예수 믿는 것이 신이 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설레야 합니다.

이 설렘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하셔야 합니다.



교회 생활이 기쁘고,

봉사하는 것이 기쁘고,

성도를 섬기는 것이 즐거워야 합니다.



나는 무엇으로 기뻐하는가요?

세상의 부와 사치와 연락입니까?

창세전 언약이라는 그리스도의 복음입니까?




내가 가는 길이 예수님이 가신 길인지, 거짓 선지자들이 가는 길인지 돌아보세요.

나는 누구의 길을 가고 있는지 하나님 말씀 앞에 서서 스스로를 확증해 보세요.

주님이 곧 오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고난 중에 위로를 주시고 아픔 속에서 소망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노아에게 은혜를 입혀주어서 장차 다가올 심판을 이길 방주를 짓게 하였듯이, 우리에게도 은혜를 주어서 장차 오시는 예수그리스도를 기다리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한 것이라는 것을 우리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여서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소망하며 살게 하옵소서. 우리의 원대로 마옵시고 주님의 원대로 간섭하여서 그 자리에 서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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