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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로마서 강해

♣(성경강해)65강. 택하심으로 얻은 구원 (롬 11:6-15)

by coroa 2021. 10. 6.

 

 

딤후 3장 12-15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65강. 택하심으로 얻은 구원 (롬 11:6-15)

-.정낙원 목사

 

롬 11:6-15=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7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 8 기록 된 바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9 또 다윗이 가로되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10 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함이니라 12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13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14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15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인간들에겐 자아(自我) 숭배사상이 있습니다.

이를 자기 사랑 즉 자기애(自己愛) 라고 합니다.

이건 후천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타고난 본성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가 행한 것에 의미를 두게 되는 것입니다.

 

물건도 내 돈을 주고 산 것은 가치 있게 여기지만 공짜로 얻은 것은 가치를 덜하게 여깁니다.

왜? 그런가요?

돈을 주고 산 것엔 자기 흔적이 있지만 공짜로 얻은 것엔 자기 흔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이러한 인간들의 본성을 너무도 잘 압니다.

그래서 신앙생활도 하나님의 은혜보다 자기 행함에 의미를 두게 만듭니다.

은혜는 왠지 가치가 덜한 것 같고 자기 행함이 더 중요하다고 여겨서 의지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러한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 전반에 나타나고 있어요.

 

자기 행함이 부정당해 보세요.

본능적으로 화가 나고 반발이 생기잖아요.

그런데 어쩝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행함은 기각하고 하나님의 은혜만 남게 하시니까요.

 

오늘 본문 6절을 보면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와 상관없고!

반대로 행위로 된 것이라면 은혜와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은혜와 행위는 상대적인 말입니다.

은혜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행위는 인간에게 속한 것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방법이고, 행위는 인간들이 일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십니까?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자기 백성을 어떻게 구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십니다.

하나님의 방식이 은혜에요.

우리의 행위로 하지 않고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하십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하시는 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결국 구원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으로 되느냐!

아니면 인간들의 방식으로 되는 것이냐! 라는 것으로 나누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뭐라고 하는가요?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다고 합니다.

즉 인간의 방법인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인 은혜로 주어진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일하시는 방법이 어떤 것인가 하면 “택하심” 입니다.

 

택하심이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선택하는 것을 말합니다.

쉬운 말로 하나님이 너는 이리로 가고! 너는 저리로 가! 라는 식으로 지명하여 부르는 것입니다.

이를 하나님께서 구원 할 자는 구원하고, 저주 할 자는 저주 하신다고 합니다.

구원은 한마디로 하나님 마음대로란 말입니다.

 

영생을 바라고 구원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것만큼 기쁘고 마음을 설레게 하는 말씀도 없습니다.

물론 이 사실이 믿어지는 사람에 한해서입니다.

 

오늘 본문과 같은 말씀을 바울은 앞선 로마서 9장에서도 증거 했습니다.

 

로마서 9장을 봅시다.

 

롬 9:10-16=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 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구원을 말할 때 야곱을 가지고 이야기 합니다.

이는 야곱 속에 하나님의 일하심을 담아 놓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다고 합니까?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으로 된 것” 이라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구원을 야곱처럼 택하심으로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선택하심으로 구원을 하였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야곱은 사랑했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합니다.

 

언제 그랬다고 합니까?

태어나기 전에 그렇게 정하셨다고 합니다.

야곱은 자기 행위와 상관없이 구원을 받기로 작정을 하고 이 세상에 보내심을 입은 것입니다.

반대로 에서도 자기 행위와 상관없이 미움 받는 그릇으로 작정이 되어서 이 세상에 보내어진 것입니다.

 

야곱이 사랑 받을 짓을 해서 사랑 받은 것이 아니고!

또한 에서가 미움 받을 짓을 해서 미움 받은 것이 아니에요.

이들이 어떤 행동을 하기 이전에 즉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야곱은 사랑하기로 했고 에서는 미워하기로 작정을 한 것입니다.

이걸 택하심이라고 합니다.

 

그 선택하심의 작정대로 야곱과 에서는 태어났어요.

하나님은 그 작정대로 야곱과 에서를 간섭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한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이 뭐냐?

하나님에게 선택당하는 것입니다.

이 말이 택하심을 입는 야곱에게는 듣기 좋은 말일 수는 있지만, 택하심을 입지 못한 에서에게는 엄청 기분 나쁜 일이고 받아들일 수 없어요.

하나님의 폭력이에요.

 

구원이란? 인간들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횡포로 보여요.

왜냐하면! 인간의 입장은 전혀 고려치 않고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하시기 때문입니다.

야곱처럼 구원 받은 자 입장에서는 택하심이 은혜일 수 있지만, 에서처럼 유기 된 자들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부당 할 수 밖에 없어요.

 

성도는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에 아멘으로 화답하고 감사가 되지만, 구원 받지 못한 자들에게는 인정 할 수 없는 불공평한 일입니다.

그래서 구원 받지 못한 인간들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반기를 드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이 그럽니다.

야! 임마!

나는 토기장이고 너희는 토기야!

 

어떤 그릇을 만드느냐?

그건 순전히 내 맘이야!

내가 어떤 그릇은 귀한 그릇으로 만들었고, 어떤 그릇은 천한 그릇으로 만들었어!

뭐! 불만 있어!

 

이게 어따 대고 이러쿵 저러쿵 지랄이야!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지은 자에게 항의한단 말이냐~!

이 놈이 아주 웃기는 놈이네!

너 같은 놈은 지옥으로 가야 해!

 

그래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몽땅 지옥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그릇 입장에서는 화 낼만 하지요.

그래서 지옥에 간 자들이 억울하다고 이빨을 뿌드득 뿌드득 가는 것입니다.

 

죄가 뭐냐?

피조물이 창조주가 하는 일에 이러쿵 저러쿵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고 우리는 피조물이이에요.

그러므로 창조주이신 하나님 생각은 옳고, 피조물인 우리 생각은 틀린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다 틀렸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모두가 옳은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일하시는데 불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입 닫으라는 겁니다.

 

어째~ 입이 닫아 집니까?

사람들이 예정론을 말하면 화를 내는 이유가 인간의 행위를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창세전 언약을 전하면 어떤 분들은 화를 내요.

 

지난번에 미국에서 어떤 분이 전화를 해서 신경질을 내는 겁니다.

창세전에 구원이 이미 예정이 되었으면 인간들은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으니 그럼 교인들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겠느냐고 따지는 것입니다.

 

이 분은 믿음이 뭔지를 몰라요.

믿음이 우리에게 오면 그 믿음이 주체(主體)가 되어서 일을 하게 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에 사람들은 모두가 믿음이 주체가 되어서 그 사람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녔어요.

일하게 하였어요.

 

그러니까 예정론을 말하면 교인들이 아무 것도 안하지 않느냐고 따지는 사람들은 믿음을 안 받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믿음 속에는 예수님의 생명이 들어 있어요.

생명은 한시도 가만있지 않고 살아서 움직여요.

이게 생명의 특징이에요.

 

그래서 예수의 생명을 받은 성도는 가만있지 않고 뭔가 일을 하게 되어 있어요.

은혜에 속한 일들을 하게 되어 있어요.

이는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살아서 꿈틀 거리기 때문입니다.

이걸 베드로는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이라고 했어요.

 

야곱을 보세요.

태어나기 전에 이미 구원 받기로 작정을 하고 태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가만히 있고 싶은데 하나님이 계속해서 간섭을 해 대는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 맘대로 인생을 살지 못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야곱 속에 언약을 심어 놓고 그 언약을 이루기 위하여 이리 저리 끌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이게 택함을 입은 자들의 운명이에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선택하였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끌고 다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끌려 다니면서 죄가 발산이 되어요.

우리 안에 죄가 토설이 되어져요.

 

죄가 토설 되어질 때마다 우리는 죄인으로 드러나고, 이런 죄인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져서 용서가 주어진다는 것을 깨닫고 감사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날마다 죄가 발가벗겨짐을 당하는 삶을 살게 되어 있어요.

 

그리하여 신앙의 종국에는 스스로 욥처럼 “주여 할 말이 없습니다” 라고 하면서 주둥이를 닫게 되어 있어요.

신앙생활은 잘난 자로 세움을 입는 것이 아니고 못난 자로 까발림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몸에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남게 만들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구원은 우리 행위로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에게 은혜로 거저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엇을 얻었다는 말인가요?

의(義)입니다.

 

많은 분들이 의(義)에 대하여 오해를 하고 있어요.

어떤 오해인가 하면 우리 쪽에서 의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착하게 살면 그것이 의가 된다고 생각을 해요.

 

그러나 성경은 단호하게 이런 사상을 거부합니다.

인간에게서는 의가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인간의 행위를 의롭다고 하는 사고를 악이고 죄라고 합니다.

 

의(義)란?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옳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옳음이에요.

우리가 보기에 좋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난 후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이는 아담과 하와가 자기들 입장에서 좋다고 여겨서 만들어 입은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기들이 만들어 입는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땀 흘려 만든 옷을 확~ 찢어버립니다.

이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기에 좋으려면 하나님이 만들어 준 것을 입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이 만든 치마는 찢어버리고 하나님이 손수 짐승의 가죽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힌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왜? 치마를 만들어 입었나요?

죄로 인한 수치 때문입니다.

아담은 수치를 자신의 행위로 가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치마를 해 입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죄인은 스스로 수치를 가릴 수 없다고 합니다.

수치는 하나님이 가려주어야 하는 것이라고 알려 줍니다.

그래서 흠 없는 제물을 죽여서 죄인의 수치를 가려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죄의 수치는 하나님이 가려 주어야지만 가려지게 되어요.

이럴 때 하나님 앞에 의롭다 여기심을 입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의(義)는 율법 지킴이라는 인간의 행위에 의지하는 자들은 얻지 못하고 하나님이 은혜로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공짜로 주어진다고 하신 것입니다.

 

의(義)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에요.

의(義) 이야기를 그대로 구원 이야기로 적용해 보세요.

그럼 구원도 인간들이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공짜로 해 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이 뭔가요?

쉬운 예로 말하면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주는 것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스스로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빠져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물에서 나올 수 있다고 한다면 빠져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물에 빠졌다는 것은 스스로 나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물에 빠진 사람은 반드시 물 바깥에 있는 사람에 의해서만 건져냄을 당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구원(救援)이라는 말 자체가 우리 쪽에 가능성을 부정하고 배제하는 말이에요.

그러니 인간들이 구원에 관하여는 이러쿵 저러쿵 말할 것이 없어요.

그저 하나님의 처분만 기다리는 것 밖에 없어요.

 

하나님이 건져 주면 구원을 받는 것이고, 안 건져 주면 그대로 죄 아래 있다가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어요.

이게 죄인의 실상이고 운명이에요.

 

사람을 일컬어 죄인이라고 합니다.

죄인이라 함은 죄가 그 사람을 장악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찬송가 가사 중에 “죄 짐에 눌린 사람은 다 주께 오시요!” 라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죄 아래서 태어납니다.

죄 짐에 눌려 있어요.

이건 마치 큰 바위가 짓누르고 있는 것과 같아요.

스스로 죄 짐이라는 큰 바위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만약에 우리 스스로 죄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다고 한다면 구원이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어요.

구원이라는 말을 할 때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 가능하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인간은 죄와 사망 아래 가두어진 상태에서 태어났어요.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에요.

 

이건 마치 큰 항아리 속에서 살아가는 쥐가 그 항아리 안에서 새끼를 낳은 것과 같아요.

큰 항아리를 죄와 사망이라고 합시다.

그럼 그 죄와 사망이라는 큰 항아리 속에서 태어난 쥐새끼는 나면서부터 죄와 사망에 가두어져 있는 것입니다.

 

항아리 밖에 있는 사람이 그 항아리로부터 꺼내 주지 않으면 스스로 그 죄와 사망이라는 항아리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어요.

이렇게 되면 꺼내 주는 자는 항아리 바깥에 있는 자라야 합니다.

항아리 안에서는 구원 할 자가 없어요.

 

우리 인간들이 그래요.

우리가 바로 항아리 속에서 태어난 쥐새끼들처럼 죄와 사망이라는 항아리 속에서 태어났어요.

그래서 죄와 사망이라는 항아리 바깥에 있는 분에 의하여 건져짐을 당하는 구원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구원 하시는 분은 죄와 사망과 상관이 없는 분이라야 하겠지요.

죄와 사망의 세상 바깥에서 오신 분이라고 하겠지요.

다른 말로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분이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분이 누구인가요?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은 이 세상 바깥에서 오신 분이에요.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죄인을 구원 할 수 있는 구원주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면 인간 쪽에서 구원의 길이 있다고 하는 것은 전부 사기(詐欺)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구원을 주고 영생을 주겠다고 하는 종교는 거대한 사기 집단이에요.

성경적인 입장에서 보면 그래요.

성경을 덮으면 진리라고 말할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성경을 펴면 인간들이 만든 종교는 거대한 사기 집단으로 드러나요.

 

그냥 인간들의 심신을 수양하고 인간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 도리를 가르치면 종교로서 가치가 있지만, 여기서 벗어나 구원을 준다거나 영생을 준다거나 죄 사함을 준다고 하면 그건 사기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7-18장을 보면 큰 음녀(淫女)가 나옵니다.

이 음녀가 누군가 하면 타락한 교회를 상징합니다.

큰 의미에서 보면 세상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신앙적인 의미로 보면 모든 종교를 상징해요.

 

이들이 무슨 짓을 하는가 하면 사람의 영혼을 사고 파는 일을 해요.

즉 사람의 구원을 가지고 장사를 한단 말입니다.

종교 사기꾼들은 자기들이 만든 종교라는 배에다 사람을 태우고 장사를 하고 있어요.

 

이게 엄청 수지맞는 장사에요.

왜냐하면! 모든 인간들은 구원받고자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꾼들은 인간들이 영생하고자 하는 본능을 교묘히 이용하여서 자기 배를 불리는 장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8장에서 음녀를 장사꾼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맷돌을 바다에 던지듯이 이들의 배를 깨트립니다.

배가 파선 당하자 사람의 영혼을 사고 파는 그 배의 선장들이 자기들의 이익이 사라진 것을 보고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이게 예수님의 초림 때 나타났어요.

예수님의 초림 때 유대교가 큰 음녀처럼 사람들의 영혼을 사고 파는 일을 했어요.

율법으로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고 구원을 주겠다고 미혹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영생은 율법을 지켜서 얻어 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주어지는 것이라고 하면서 유대교라는 배를 깨트려 버립니다.

그러자 종교 지도자들이 자기들의 이익이 사라진 것을 보고 예수를 죽여 버립니다.

이게 종교에요.

 

그런데 이 시대 교회가 다시 유대교처럼 종교가 되었어요.

목사들이 종교꾼이 되어서 교회 안에서 사람들의 영혼을 사고 팔고 있어요.

자신들이 마치 구원을 주는 것처럼 사기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 증인들을 거짓 교회로 보내서 이들이 벌리는 사기 행각을 폭로하게 하십니다.

이에 종교꾼들은 자기들의 이익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두 증인들을 이단이라고 하여 죽여요.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의미를 담고 있는 사건들이 인류 역사 어느 시대이고 수레바퀴처럼 늘 반복하여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림 때 모습은 재림 때의 표상이에요.

 

예수님 초림 때 유대교회가 타락의 본산이었듯이 지금도 교회가 타락의 본산이 되었어요.

교회가 마치 절간처럼 되고 말았어요.

이는 교회들이 절간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인본주의 구원관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낸 것은 구원주로 보냈어요.

구원주로 보냈다는 것은 인간들의 힘으로 독자적으로 구원 받을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우리 쪽에서 구원의 길을 찾았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인간 쪽에서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이 없다고 하십니다.

 

인간들의 꿈을 산산히 깨트려 버립니다.

그러자 인간들이 반발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를 무시하느냐?

왜? 우리의 정성을 무가치한 것으로 돌리느냐고 항의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건 2천 년 전에만 나타난 것이 아니고 어느 시대고 나타났어요.

지금도 나타나고 있어요.

 

마귀는 어느 시대고 항상 인간의 가능성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라고 미혹해요.

 

과거에도 미혹했고!

지금도 미혹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미혹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자 에덴동산에서 쫓아냅니다.

좇아내면서 약속을 하나 주십니다.

그 약속은 여자의 후손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즉 구원주가 여자의 후손으로 와서 너희를 구원해 준다는 것입니다.

 

아담에게 있어 신앙이란? 하나님이 보내 주신다고 하신 여자의 후손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소망으로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에요.

그런데 뱀이 아담에게 미혹합니다.

인간들 힘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벨탑 사건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바벨탑은 인간이 어떤 자인지를 잘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신(神)의 영역을 침노하고자 하는 사건입니다.

 

인간들은 항상 자기 힘으로 구원을 이루겠다고 합니다.

이게 인간들 세상에 각양의 종교들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만든 모든 종교의 근본 교리는 인간 쪽에서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으로 가르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한다는 사상이에요.

그런데 성경을 열면 인간들이 이러한 구원의 열망을 교만이고 불경이고 악이라고 합니다.

이를 두고 자기 분수를 모르고 까분다고 합니다.

죄인을 일컬어 목이 곧다고 하는 것은 항상 자기 가능성으로 하나님께 덤비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가능성을 모두 기각시키고 도리어 모든 인간을 불 가능 가운데 가두어 두었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11장을 봅시다.

 

롬 11:32절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불 순종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고 하지요.

불 순종 가운데 가두어 두었다는 말은 죄 아래 가두었다는 말입니다.

죄가 불 순종이잖아요.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이 안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몸을 하나님 말씀에 순종 할 수 없도록 가두어 두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죄 아래서 태어난 몸뚱이를 가진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 할 수가 없어요.

 

순종하고 싶어도 안 되어요.

마음은 원이로되 이 몸뚱이가 말은 안 들어 쳐 먹어요.

왜냐하면! 죄가 우리 몸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이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요?

긍휼을 베풀기 위함입니다.

긍휼이란?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주는 것입니다.

이걸 은혜라고 합니다.

 

지금부터 굉장히 중요한 말을 하니까 잘 들으세요.

 

긍휼이라는 말은 “라훔” 이라고 해요.

그런데 이 “라훔” 이라는 말이 여자가 아이를 해산 할 때 자궁(子宮)이 찢어지면서 당하는 고통인 “레헴” 으로부터 유래된 말이에요.

 

그러니까 긍휼이라는 “라훔”이나 고통이라는 “레헴”이나 같은 뜻이라고 보시면 되어요.

즉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로 구원하시는 것은 마치 어머니가 자기 자궁(子宮)을 찢는 고통을 당하면서 아이를 낳아 주신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럼 긍휼 속에 하나님의 아픔이 담겨져 있겠지요.

맞아요.

긍휼이란? 하나님이 죽임 당하는 아픔이에요.

 

자궁(子宮)이 찢어진다는 것은 곧 자기 몸이 찢어지는 것을 말해요.

자신의 죽음을 상징해요.

이는 곧 하나님의 죽음을 통해서 한 생명이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이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나타났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어미가 아이를 낳는 것과 같아요.

하나님께서 예수님 속에 있는 아이를 꺼내려고 예수님의 몸을 확~ 찢어 버린 것입니다.

 

이를 물과 피를 쏟는 것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어미가 아이를 낳는 것과 같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으시고 자기 백성들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해 주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 순종 가운데 가두어 두시고 긍휼로 구원을 베푸신 것은 우리의 구원이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죽음을 통해서 주어진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일을 하시나요?

이는 창세전 언약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보면 예수님의 피로 자기 백성들이 거룩하고 흠이 없어지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에베소서 1장을 봅시다.

 

엡 1:3-7=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창세전에 하나님이 이렇게 언약을 하셨어요.

어떤 언약인가 하면 자기 백성들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는 언약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을 하는가 하면 그의 피로 구속 곧 죄사함 받는 것으로 하셨어요.

 

예수님의 죽음으로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어머니가 자신의 죽음으로 아이를 낳는 것과 같아요.

지금이야 의술(醫術)이 발달하여서 아이 낳다가 죽는 일들이 거의 없지만 과거에는 어미가 아이를 낳다가 많이 죽었어요.

 

죽음을 담보로 하고 아이를 낳았어요.

그래서 옛날 어머니들 말씀을 들어 보면 아이를 낳고자 방으로 들어 갈 때 댓돌 위에 있는 신발을 보고 아이를 낳으러 들어간다고 해요.

 

이는 내가 아이를 낳고 저 신발을 다시 신을 수 있을까 라는 마음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자신의 죽음과 맞바꾸는 것과 같이 아프고 고통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아이를 낳으면서 자궁이 찢어지는 그 아픔을 긍휼이라는 말과 같은 뜻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입장에서 긍휼은 그저 감사하고 기쁜 일이지만 하나님 입장에서는 아픔이에요.

하나님의 죽임이에요.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못난 자식이 있어요.

그 못난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아파요.

찢어져요.

 

부모는 못난 자식을 찢어지는 마음으로 자식을 대해요.

탕자를 대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나요.

아버지는 본능적으로 강한 자를 세상에 남기고 싶어 해요.

이건 강한 유전자(遺傳子)를 남기고자 하는 모든 숫 컷들의 본성이에요.

 

그런데 자식이 탕자에요.

칠푼이고 바보란 말입니다.

그냥 두면 강한 놈들 틈에서 죽을 수밖에 없어요.

당장 집 안에 강한 맏아들이 있어요.

 

그냥 두면 탕자는 맏아들에게 맞아 죽어요.

그래서 아버지는 자기의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못난 자식을 보듬어 안는 것입니다.

그 놈을 보듬어 안고 보호해 주지 않으면 죽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탕자를 받아 준 것은 자기를 비우고 죽이는 것과 같아요.

 

우리는 탕자 비유를 너무도 감상적으로 생각하는데,,,

아니에요.

탕자 비유 속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담겨져 있어요.

아버지가 탕자를 용서하고 받아 준 것은 예수님의 자기 비움과 같아요.

 

그러니까 탕자를 용서하고 보듬고 끌어안는 그 속에는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낳고자 자궁(子宮)이 찢어지는 아픔과 고통을 당하듯이 아버지가 자기를 버리는 죽음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게 긍휼이에요.

 

이 마음을 아시겠어요.

이 마음을 알아야 해요.

우리의 구원이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죽음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셔서 열심히 제사를 지내는 자들에게 제발 제사를 지내려고 하지 말고 긍휼을 배우라고 한 것입니다.

죄인을 용서하기 위하여 죽임 당하는 제사에 제물이 바로 하나님의 죽음이라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긍휼을 배우는 것이에요.

 

탕자에게 있어 악이란?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비록 탕자가 죽도록 충성했다고 하더라도 그걸 의로 내밀 입장이 못 되어요.

탕자는 늘 아버지의 긍휼로 용서 받고 산다는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해요.

아버지의 긍휼의 마음을 잊는 순간 자기 의가 나와요.

 

탕자가 아무리 큰 일을 했다고 하여도 아버지가 용서해 주어서 얻어진 결과물이에요.

그건 아버지의 용서로 인하여 얻어진 잉여품이지 자기 것이 아니에요.

아버지의 은혜를 모르면 그건 한낱 자기 자랑거리 밖에 되지 않아요.

 

그럼 맏 아들처럼 자기가 한 일을 근거로 아버지 앞에 목을 세운단 말입니다.

이게 악이에요.

이걸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이 없으면 천사의 말을 하고 크고 비밀한 것을 말하고 산을 옮길 만한 큰 일을 하고 자기 몸을 불 사르는데 내어 줄지라도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천사의 말을 하고 크고 비밀한 것을 말하고 자기 몸을 불 사르는데 내어주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고 또한 이러한 일들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일들이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이느냐 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감사로 나타나야 하는 것은 그 은혜를 아는 바탕이 신앙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긍휼을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 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바로 이 긍휼의 언약이에요.

 

하나님께서 이 긍휼을 주시려고 우리를 불 순종가운데 가두어 두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긍휼은 어머니의 자궁(子宮)이라고 하고!

구원이란? 그 자궁(子宮)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걸 아가서에서는 “어미의 태(胎)” 라고 합니다.

 

아가서 3장을 봅시다.

 

아 3:1-5=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찾았구나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구나 2 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중으로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구나 3 성중의 행순하는 자들을 만나서 묻기를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보았느냐 하고 4 그들을 떠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내 어미 집으로, 나를 잉태한 자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 5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 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찌니라”

 

술람미가 솔로몬을 사랑하는 데에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이겨 낼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육적인 조건으로 보면 도무지 솔로몬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구석이 없기 때문입니다.

술람미가 자기 자신을 보아도 그래요.

 

예쁘고 허여멀건 예루살렘 여자들과 비교하면 검둥이인 자신은 여자도 아니에요.

여자로서의 매력은 하나도 없어요.

자기가 솔로몬이라고 해도 자신은 사랑하지 않을 겁니다.

그만큼 술람미는 솔로몬으로부터 사랑 받을 조건이 없어요.

 

그런데 기적처럼 솔로몬으로부터 사랑을 받았어요.

솔로몬이 긍휼히 여겨서 사랑을 준 것입니다.

술람미가 받은 사랑은 오로지 솔로몬의 긍휼이에요.

불쌍히 여겨서 사랑을 받은 겁니다.

 

그러므로 술람미는 자기의 조건으로 솔로몬의 사랑을 지켜내고자 하면 안 되어요.

자신이 붙잡고 있어야 할 것은 오로지 솔로몬의 일방적인 사랑이고 긍휼히 여기는 약속이에요.

솔로몬이 날 사랑한다고 했어! 라는 약속뿐이에요.

이 약속이 자기 안에서 믿어질 때만이 안심 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예루살렘 여자들이 술람미의 외모를 가지고 참소합니다.

검둥이 주제에 어딜 왕을 넘보느냐고 힐난 합니다.

자기 주제도 모르고 어디 왕을 사랑한다고 덤비느냐고 핍박을 해 댑니다.

이건 마치 바리새인들이 세리와 창기가 예수님과 어울리는 모습을 보고 힐난하는 것과 같아요.

 

지금 예루살렘 여자들이 술람미에게 그러고 있는 겁니다.

어디 검둥이 노예 주제에 왕에게 사랑받기를 바라느냐고 핍박을 하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술람미도 마음에 먹구름이 끼입니다.

 

그러다가 잠이 들었어요.

두려운 마음으로 잠이 들어서 그런지 그 두려움이 꿈으로 연장하여서 술람미를 괴롭히는 겁니다.

생시(生時)에 불안함이 급기야는 꿈 속에서 신랑을 잃어버리는 사태로 발전을 한 겁니다.

생시에 염려하던 것이 꿈 속에서 현실로 나타나 신랑을 잃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몽유병 환자처럼 신랑을 찾으러 돌아다닙니다.

님이시여~ 어디 있나요!

찾아도 없으니 이젠 길거리로 나섰어요.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우리 님을 보지 못하였느냐고 묻고 또 묻습니다.

 

비록 꿈이지만 이런 꿈을 꾸긴 싫어요.

황홀하고 멋진 꿈을 꾸고 싶지!

어디 이런 악몽을 꾸고 싶겠어요.

 

이걸 성도의 신앙으로 적용해 봅시다.

성도는 믿음이 있어야 해요.

그래야 세상을 이길 수 가 있어요.

 

세상을 살면서 믿음이 흔들릴 때가 많이 생겨요.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삼킬 자를 찾는다고 하잖아요.

밀 까불듯이 한다고 하잖아요.

그만큼 믿음엔 시련이 많다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같은 시험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어요.

바울도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한다고 했어요.

예수님도 세상에서 미움을 받는다고 하셨어요.

 

이로보건데 성도가 예수를 믿는 데에는 수많은 어려움들이 닥친다는 말입니다.

마치 술람미가 신랑을 잃어버린 것과 같은 상황을 맞이한다는 말입니다.

방해 요소들이 많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편안한 신앙생활은 없어요.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는 데에도 바다에 풍랑이 일고 배에 물이 들어오듯이 어렵고 힘든 일들은 닥쳐요.

제자들은 배에 물이 들어오는 것만 보였지 예수님이 함께 한다는 것을 못 보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물 퍼낸다고 아우성을 치지요.

 

지금 우리가 그래요.

세상만 보여요.

그러니 세상 것이 물밀 듯이 우리 마음을 엄습하는 겁니다.

세상 물을 퍼 낸다고 난리에요.

 

무엇을 먹을까 난리이고!

무엇을 마실까 난리이고!

무엇을 입을까 난리에요.

 

술람미는 엄습하는 두려움을 없애려고 잃어버린 신랑을 찾아 나섰어요.

그러다가 파숫꾼의 도움으로 신랑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곤 얼른 신랑의 손을 잡아채고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들어갑니다.

술람미는 솔로몬을 만나고 난 후 어머니의 집으로 자기가 태어난 방으로 들어갔어요.

 

어미 집이란? 자기를 낳아준 곳을 말합니다.

자기가 잉태한 자의 방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솔로몬이 자신을 사랑한 근원을 말합니다.

내가 왜? 사랑 받을 수 있었던지 그 사랑의 근거(根據)를 찾아가는 겁니다.

솔로몬이 자신을 사랑한 그 원인 안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술람미가 내가 무슨 근거로 솔로몬의 사랑을 받았는지 그 의미를 붙잡는 겁니다.

왕이신 솔로몬이 왜? 나같이 천한 여자를 사랑했지!

왜? 솔로몬이 자신을 사랑했는지 그 원인을 알아보겠다는 겁니다.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이야기는 예수님과 성도 간의 사랑이야기에요.

그렇다면 솔로몬은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술람미는 성도를 예표(豫表)합니다.

 

예수님은 솔로몬과 같은 왕이시고 우리는 술람미와 같은 죄인이에요.

죄인이 왕으로부터 사랑 받는 것은 왕의 성은(聖恩) 뿐이에요.

왕이 긍휼히 여겨서 사랑을 해 주어야만이 사랑을 받을 수가 있어요.

 

우린 하나님께 긍휼을 입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사랑을 받은 자들이에요.

그러니 우린 하나님의 성은(聖恩)을 입은 겁니다.

 

하늘에 임금이신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죄인인 우리에게 성은(聖恩)을 주셨습니까?

이는 모두가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 간에 세운 언약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성은(聖恩)을 입게 되는 어미의 태(胎)인 셈입니다.

어미의 태(胎)란? 근거란 말입니다.

 

왕이신 솔로몬이 무엇 때문에 천하디 천한 술람미를 사랑하였을까요?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왜? 우리 같은 죄인을 사랑하셨을까요?

이는 창세전 언약 때문이에요.

그러므로 창세전 언약은 어미의 태(胎)와 같아요.

 

하나님은 언약(言約)을 위하여 우리를 창조했어요.

창조(創造)란 말이 어떤 근거로 비롯되었다는 말이에요.

그 근거가 언약이에요.

언약은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보여주기 위하여 창조가 되었어요.

솔로몬이 지금 예수님이 행하실 것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사랑 받을 자격이 아무도 없는 술람미를 사랑한 겁니다.

술람미는 그냥 버려두면 들풀처럼 잠시 보이다가 사라질 이름 없는 여인이에요.

실제로 술람미는 오빠들의 억압과 횡포로 뙤약볕 아래서 포도원에서 노예처럼 일을 하던 여자였어요.

 

노예란? 죄인을 말해요.

솔로몬이 찾아 주지 않았으면 그냥 일하다가 죽어갈 그런 여자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천하디 천한 자에게 왕의 시혜(施惠)가 베풀어진 겁니다.

이 어찌 황감(惶感)하지 않겠어요.

 

우린 모두가 술람미처럼 별 볼일 없는 자들이에요.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이에요.

그냥 저주 속에서 살다가 저주의 나락으로 떨어질 죄인이라구요.

그런 죄인에게 주님의 사랑에 손길이 미친 겁니다.

그래서 천국 백성이 되었어요.

 

우린 사랑 받을만한 자격이 아무도 없어요.

근본적으로 말해서 태어날 이유도 없던 자들이었어요.

그런데 아버지와 아들 간에 언약으로 인하여 창조가 되었어요.

 

그 언약이 바로 성도가 존재하게 된 근본(根本)인 겁니다.

창세전 언약이 나로 있게 한 어미의 태(胎)와 같아요.

즉 우리를 존재케 하는 어머니의 자궁(子宮)과 같아요.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우리를 낳게 한 창세전 언약이라는 그 긍휼의 자리로 돌아가는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모퉁이 돌” 이라는 블로그에 “clay(흙)” 라는 분이 쓰신 좋은 글이 있어서 인용을 합니다.

 

굿모닝입니다.

 

제 나라를 떠나 사는 사람들 끼리에는 어떤 동질성이 있습니다.

마음 안 켠 늘 상실감을 품고 사는 것 말입니다.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떠나왔음”을 인정하면서도,

“떠나온 곳”에 대한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자의든 타의든 돌아감에 대한 기대치를 놓았다는 건 잃어버림이니까요.

우연이 없다는 우리의 인생에 이런 삶을 허락하심에 대하여 생각합니다.

이 땅에선 돌아갈 곳을 잃은 자들이지만 분명 우린 돌아갈 곳이 정해진 자들입니다.

하늘 본향입니다.

 

기다림과 견딤의 목적이 달라진 것이지요.

월요일이 되면 다음 주일에 만날 천국잔치를 기다리고,

그렇게 살다보면 참 하늘 잔치에서 모두 만날 것입니다.

그렇게 갈 곳이 있고 만날 사람이 있는 기다림은,,, 참 좋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그래서 제가 이런 댓글을 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 사모하는 마음이 곧 떠나온 고향을 다시 돌아가고자 하는 회귀 본능입니다.

마치 연어처럼 말입니다.

이 회귀 본능이 우리로 하여금 그 나라를 사모하게 하지요.

마치 고향을 그리워하듯이,,,

 

우린 모두가 우리를 배태한 그 자궁 속으로 돌아간답니다.

그 자궁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이고!

이 긍휼이 역사 속에 예수로 오셨지요.

오늘도 흩어져 있는 모든 모퉁이 돌 형제들이 그 긍휼 안에서 안식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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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돌아갈 곳이 정해져 있는 자들이에요.

잠시 집 떠나 와 있어요.

이제 때가 되면 다 돌아갑니다.

이름하여 돌아갈 고향인 천국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엿새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을 안식일이라 명하고 교회로 모이는 것은 장차 천국으로 돌아가는 연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모임은 천국에서의 모임의 예표에요.

그러므로 교회의 모임을 소중히 여겨야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세상의 가치로 너와 나로 판단을 받고 우열(優劣)과 서열(序列)의 삶을 살았지만 교회로 모일 때는 동일하게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은 자로서 너와 나가 아닌 차별이 없는 우리로서 모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안식을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명절날 고향 집에서 누리는 그 안식을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라는 이 땅에서 그 묵시 속에 있는 하나님의 긍휼을 배우고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아이가 자라면서 철이 들어서 부모님의 은혜를 알아가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달아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칠푼이 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긍휼로 구원을 받은 것에 대한 감사가 일어나야 해요.

구원이 거저 주어진 것이지만 그 거저 주어짐 속에는 하나님의 애틋한 마음과 은혜와 사랑과 엄청난 아픔이 담겨져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하나님의 은혜에 두시고자 우리가 독자적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는 법에다 가두어 두신 것입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알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면 어찌 될까요?

도와 달라고 해야지요.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해 주세요! 라고 하여야지요.

 

하나님은 이 소리를 듣고자 하십니다.

우리에게 애들아!

나에게 도와 달라고 하렴!

소경 거지 바디메오처럼 소리치라고 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스스로 본다고 하는 자들은 예수님에게 바디메오처럼 소리치지 않아요.

자신이 소경임을 아는 자만이 예수님에게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사를 지내려 하지 말고 긍휼을 배우라는 말은 뭘 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주여 불쌍히 여겨 달라고 소리치라는 말이에요.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에게 살려 달라고 소리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날 좀 도와주세요! 라고 우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자존심이 있어서 안 울어요.

자기가 뭔가 하고자 해요.

 

이게 종교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만든 모든 종교는 인간이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으로 되어 었는 것입니다.

이걸 “헬레니즘”이라고 해요.

 

세상에는 두 사상이 있습니다.

 

“히브리즘”과 “헬레니즘”입니다.

 

히브리즘은 성경적 사고인데 이는 신(神)이 인간을 찾아오는 사고를 말합니다.

 

이걸 신본주의라고 합니다.

신본주의란? 신이 주체가 되어서 인간을 다스린다는 주의입니다.

신본주의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해요.

 

그러나 헬레니즘은 인간이 신(神)을 찾아 가는 사고를 말합니다.

 

이걸 인본주의라고 합니다.

인본주의란? 인간이 주체가 되어서 신에게 나아가는 주의입니다.

인본주의 신앙은 인간의 행함을 강조해요.

이게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사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태산(泰山)이 높다 하되” 라는 -양사언-의 시조(時調)가 있어요.

 

泰山雖高是亦山(태산수고시역산)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登登不已有何難(등등불이유하난)

오르고 오르면 오르지 못할 까닭이 없건데

 

世人不肯勞身力(세인불긍노신력)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只道山高不可攀(지도산고불가반)

뫼만 높다 하더라.

 

이 시조(時調)가 말하는 것은 산이 아무리 높아도 하늘 아래 있으니 악착같이 오르면 못 오를 산이 없다는 말입니다.

무엇이든지 하고자 하면 다 할 수 있다는 인간의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인간들은 이런 사상을 좋아해요.

왜냐하면! 인간의 가능성을 부추겨 주기 때문입니다.

모든 종교는 이러한 사고를 바탕에 깔고 있어요.

 

그런데 이 시대 이런 사상이 그대로 교회 안에 침투해 신앙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교회마다 인간의 가능성을 부추기고 있어요.

성경은 인간의 불가능성을 말하고 인간의 의를 기각하고 있는데도 이 시대 교회에서는 도리어 인간의 가능성을 부추기고 인간의 행함을 의로운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의 소리가 하나님의 소리로 둔갑하여서 외쳐지고 있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구원도 인간 쪽에서 이루어가야 하는 것으로 가르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뱀 사상” 이라고 합니다.

 

이 시대 교단과 교파를 초월하여서 이러한 사상이 교회 안에 퍼져 있어요.

왜? 그런가 하면 뱀 사상을 전해야 교인들이 열심과 충성을 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인간들의 열심과 충성을 끄집어내고자 하는 수작인 것입니다.

 

속된 말로 염불보다 잿밥에 눈이 어두워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들이 복음보다 교회 성장에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성장하려면 교인들이 움직여주어야 하잖아요.

 

어떻게 하면 교인들이 움직이나요?

열심히 해서 복도 받고 구원도 받을 수 있다고 하여야 봉사도 하고 충성도 합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입술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부처를 섬기고 있어요.

몸은 교회에 나와 있는데 정신은 절간에 가 있어요.

그러니까 신앙이 인간 쪽에서 뭔가 하여야 얻어 낼 수 있다는 절간 신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은혜에다 인간의 행함을 섞는 “혼합주의” 에요.

그러다 보니 교인들의 신앙이 구원해 주심에 대한 감사는 사라지고 뭔가 얻어 내고자 하는 열심들만 난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거래하는 신앙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감사로 나타나는 열심을 귀하고 장려할만한 것이지만 뭔가 얻어내고자 하는 열심은 독이에요.

 

오늘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은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 얻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구한 것이 무엇인가요?

“의(義)”라고 했습니다.

 

“의(義)”란?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의만 있으면 천국에 갈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얻고자 한 그 의란 곧 구원과 같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럼 이스라엘은 구원을 위한 의를 어떻게 얻고자 했나요?

이는 율법 지킴으로 얻고자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율법 지킴으로 의를 얻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율법 지킴을 의로 인정치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의는 인간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의는 하늘에 있는 것이에요.

의는 하늘에서 오신 분으로부터 거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는 자기 백성들에게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주어지느냐?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택하심을 입었다는 말은 이미 주어지기로 작정이 된 자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들이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반면에 택하심을 입지 못한 자들은 완악해졌습니다.

누가 완악해 졌다고 합니까?

이스라엘이에요.

율법 지킴이라는 자기 의를 고집하던 자들이에요.

 

완악해졌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당하였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들이 버림당하였다고 하여서 이스라엘 전체가 다 버림당한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속에도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비록 예수그리스도를 배척하였지만 다 배척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속에서도 예수 믿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 자신이 이스라엘인입니다.

이스라엘 중에서 사도 바울처럼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 있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다 버림당한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본문에서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린 것이 아니라 그 버림을 통하여서 이방인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셨다고 합니다.

 

이방인 중에서도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을 역(逆)으로 말하면 이스라엘 중에서도 택함을 입지 못한 자들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속에서 버림당한 자들은 애초부터 택하심을 입지 못한 자들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걸 사도 바울은 “표면적 유대인”과 “이면적 유대인”으로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속에도 “영적 유대인”이 있고 “육적 유대인”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짤려 나간 자들은 육적 유대인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자리에 이방인 중에서 택함을 입은 영적 이방인들을 앉히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 구원을 얻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택하심을 입지 못한 자들은 어찌 되었다고 하는가요?

완악하여졌다고 하지요

 

왜? 완악하여졌나요?

이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러한 것을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저희들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였고 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였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셨다는 말이에요.

예수를 보냈는데 예수를 몰라보고 죽이게 하였어요.

예수님이 넘어지게 하는 올무가 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을 봅시다.

 

고전 2:5-10=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7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 하였으리라 9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감추인 비밀이 있습니다.

만세전에 감추인 비밀이란? 창세전 언약이에요.

이제 만세 전에 감추었던 그 비밀인 창세전 언약이 이 세상에 나타났어요.

어떻게 나타났는가 하면 그 아들 예수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구원자로 자기 백성들에게 보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예수를 몰라보고 십자가에 죽였습니다.

왜? 죽였습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예수를 척 알아보고 믿을 수 있게 한 것이 아니고, 반대로 믿을 수 없게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구원주 라는 것은 오직 성령으로만 알아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로 남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구원이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택하심이 되게 하려고 원하는 자로 말미암지 않고 달음질하는 자로도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자로 서게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의를 얻고자 하는 자는 잘라내고 은혜로 이방인을 붙이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유대인들 속에서도 택하심을 입지 못한 자들은 잘라내고 그 자리에 택하심을 입은 이방인을 앉혔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남아 있는 자들은 모두가 은혜로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건 이미 아브라함의 선택 속에 들어 있었어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삼은 것이 아니고 믿음의 조상으로 삼았어요.

 

갈라디아서 3장을 봅시다.

 

갈 3:7-9=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믿음으로 말미암는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조상이 아닙니다.

믿음에 조상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언약 속에는 그 이름으로 이방인이 구원을 얻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과 이방인 속에 믿는 자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들이 바로 은혜로 남겨진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애초부터 구원의 계획에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구분하지 않았어요.

이스라엘 속에서도 택한 자가 있고 이방인 속에서도 택한 자가 있어요.

택한 자들은 다 예수를 믿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이든 이방인이든 주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 구원 받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만 오롯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로 하셨는데 이스라엘이 실패했기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선택하여서 구원을 했다는 말이 아니에요.

속된 말로 꿩 대신 닭이란 말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애초부터 예수를 믿게 해서 구원하는 방식으로 일하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주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라는 말은 이스라엘이나 이방인이나 구별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건 출애굽 때 보여 주셨어요.

 

출애굽시에 온 세상에 죽음의 재앙이 닥칩니다.

이 때 하나님은 그 죽음의 재앙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알려 주십니다.

어린 양의 피를 문에 바르는 자는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 이방인들도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살아난 자들이 있어요.

 

어린 양의 피는 이스라엘이나 이방인이나 차별하지 않았어요.

이는 어린 양의 피로 주어지는 구원에는 이스라엘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다는 말입니다.

비록 혈통적으로 아브라함 후손이라고 할지라도 어린 양의 피를 바르지 않으면 죽임 당하였어요.

반대로 그 속에 아브라함 피가 없다고 할지라도 어린 양의 피를 바르면 살아났어요.

 

그 어린 양의 피가 신약에서 예수 믿음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주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인종과 민족을 초월하여서 주 예수를 믿는 자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들이 누구인가 하면 택하심으로 구원받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속에서 잘려 나간 자들을 통해서 무얼 보아야 하는가 하면 하나님께서는 은혜만 남기고자 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은혜 아닌 것은 전부 멸망 받을 것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에 거하지 않는 이스라엘은 다 잘라내고 그 자리에 은혜로 택하심을 입은 이방인을 세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실패를 통하여 말하고 있는 것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따지지 않고 오직 은혜로 남겨진 자들만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구별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실패가 하나님의 은혜의 부요함을 드러내는 기회가 된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12절을 보세요.

 

12절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라고 하지요.

넘어진 저희가 누구인가요?

유대인이에요.

 

구약에서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이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고 난 후 그 유대인의 하나님이 이방인의 하나님으로 확대가 되어서 나타난 것입니다.

 

유대인은 선민이고 이방인은 아니라고 낙망을 했는데 그게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아브라함 혈통을 믿고 안심하던 유대인들이 잘려나가고 낙망하던 이방인 중에서 구원 받는 일들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동안 유대인의 하나님이라고만 알았던 하나님이 이방인의 하나님도 된다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었으니 유대인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실패가 도리어 하나님을 온 세상에 알리고 확장 시키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쉬운 말로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자기들 속에 감추고 있었어요.

마치 유대인들이 하나님이라는 등불을 자기들 것이라고 단지 속에 꽁꽁 감추어 두었어요.

그러자 하나님이 그 단지를 확 깨트려서 온 세상에 드러내서 밝히게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넘어짐으로서 자기들만 소유하였던 하나님이 온 세상의 하나님으로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로 온 세상의 하나님으로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이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자랑했어요.

구원을 독점하고 있었어요.

이방인들을 인간 취급하지 않았어요.

자기들만 구원 받는다고 교만을 떨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 잘남을 묵사발을 낸 것입니다.

잘난 척 하던 자들을 잘라내고 개 같이 취급하던 이방인들에게 은혜로 구원을 하십니다.

그러자 그 동안 혈통을 자랑하던 것들이 다 사라지고 이제 은혜만 남게 된 것입니다.

이제 구원 받은 사람들은 인간의 조건을 자랑 할 수가 없게 되었어요.

오직 그 은혜만 자랑하게 되었어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데는 한 가지 변하지 않는 원칙이 있습니다.

 

은혜입니다.

은혜가 되려면 하나님이 홀로 하셔야만 합니다.

인간이 거들거나 보태면 안 되어요.

그럼 하나님의 은혜가 손상을 입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은혜가 손상 되지 않도록 인간의 의가 침투하지 못하도록 일을 하십니다.

즉 성도의 구원에 인간의 행함이 끼어들지 못하도록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성도들 마음에 혼합주의 뱀 사상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예수님의 피로 도배를 하는 것입니다.

 

마치 구약의 모세를 구원 할 때 갈 상자에 역청을 칠해서 나일 강 물이 침수치 못하게 하여서 구원을 하신 것처럼 성도의 심령에 예수의 피로 도배해서 세상의 뱀 사상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은 이 일을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 시대는 노아의 홍수시대와 같아요.

 

두 물이 섞인 시대에요.

하늘에 말과 땅에 말이 혼합이 되어서 홍수를 이루고 있어요.

요한계시록 12장을 보면 뱀이 물을 강같이 토하여서 여자의 후손들을 떠내려가게 하려고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벰의 물이란? 마귀의 사상이란 말입니다.

뱀은 갈라진 두 혀로 두 가지 말을 해요.

하늘에 말과 땅에 말을 해요.

이 두 말을 섞어서 혼합주의를 만들어요.

 

이걸 하나님의 은혜의 포도주에 인간의 행함이라는 물이 섞였다고 합니다.

포도주에 물이 섞이면 부패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포도주를 주시면서 새 언약을 세운다고 하셨습니다.

 

새 언약이란?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이 주어진다는 언약입니다.

이는 구원이 예수님의 죽음을 근거로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곧 유월절 어린 양의 피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 피를 보시고 저주를 넘어가게 하십니다.

예수의 피 이외는 하나님의 저주를 피할 수 없어요.

오직 피에요.

 

하나님의 관심사는 우리에게 있지 않아요.

오직 그 아들에게만 있어요.

우리를 구원한 목적은 오로지 그 아들에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그 아들의 영광은 십자가 안에 있어요.

 

하나님은 이 땅에 오직 그 아들의 공로만 남기는 일을 하십니다.

성령도 그 아들의 영광을 남기는 일을 하시기 위하여 우리 안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 성령이 계시는 성도는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피로서만 구원이 주어진다는 말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누가 택하심을 입는 자인가?

예수그리스도 피만 자랑하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피만 자랑하는 자는 그 어떤 것으로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어요.

끊어지지 않아요.

 

우리는 끊어지지 않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구원은 하나님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끝까지 지켜 주십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주셨고!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하나님이 이루어 내십니다.

 

아무도 아비지 손에 있는 영생을 빼앗을 자가 없습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지지 않습니다.

천사들도 마귀도 끊지 못해요.

이게 택하심의 능력입니다.

 

그러니 택하심의 그 은혜 안에서 넉넉하게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택하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질 수 없는 구원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저 감사하단 말 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삶이 힘들고 아프더라도 택하심으로 얻은 이 구원의 놀라움으로 현실의 아픔들을 이겨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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