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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성경강해)70강. 부활 신앙 (요 11:17-32)

by coroa 2021. 9. 29.

 

 

딤후 3장 12-15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70강. 부활 신앙 (요 11:17-32)

-.정낙원 목사

 

 

 

지난 시간에 예수님께서 병든 나사로를 고쳐주지 않고 죽게 한 것은 나사로를 둘러싸고 있는 어둠을 걷어 내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어둠이란? 죽음의 세력입니다.

나사로 안에 있는 죽음의 세력을 죽이기 위해서 나사로를 죽인 겁니다.

말이 좀 이상하지요.

 

인간은 선악과를 먹고 죽은 아담 안에서 태어납니다.

아담은 죽은 자의 조상이에요.

그래서 아담으로부터 생산되는 자들은 모두가 죽음을 안고 태어나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세요.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산 자로 만들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어떻게 산 자로 만드느냐 하면 죽은 자를 죽이면서 만들어요.

예수님은 육신을 살려주는 식으로 일하지 않고 도리어 죽이는 쪽으로 일을 한단 말입니다. 

잘 이해하세요.

말이 헷갈릴 수 있으니까.

 

인간은 사는 것 자체가 두려움이에요.

왜냐하면! 죽음에 쫓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계속하여 그림자처럼 붙어서 떨어지지도 않고 죽인다고 좇아와요.

이에 인간들은 안 죽으려고 도망을 칩니다.

그래보아야 결국엔 도망치지도 못하고 잡혀서 죽어요.

손오공이 뛰어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고 하듯이 인간은 죽음으로부터 도망쳐 보아도 죽음 안이에요.

 

사람이 사는게 힘들고 두려운 것은 살아야 한다는 본성 때문입니다.

살아야 한다는 본성은 죽음 안에 있기 때문에 반작용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영생하는 자에겐 살아야 한다는 본성이 없어요.

그냥 살아요.

난 살아야지 하는 것이 없어요.

왜냐하면! 죽음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살아야지 하는 것은 죽을래 라는 죽음에 대한 반발작용으로 나타나는 현상인 겁니다.

 

지난 시간 예수님이 나사로를 죽게 한 것이 사랑이라고 했지요.

그럼 예수님이 나사로를 죽게 한 것이 왜? 사랑인지 살펴봅시다.

나사로는 지금 죽을병에 걸렸어요.

죄로 인하여 주어지는 병입니다.

 

비유로 말할게요.

어떤 집에 사랑하는 아들이 몹쓸 병에 걸렸다고 생각해 봅시다.

이 병은 인간의 의술(醫術)로는 고칠 수가 없는 불치병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에게는 그 아들이 알지 못하는 병들지 않는 몸이 하나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 몸은 다시 병들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그런 몸입니다.

 

그런데 이 죽지 않을 몸은 먼저 가지고 있는 죽을 몸이 죽고 난 다음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하루라도 빨리 아들이 이 병들지 않고 죽지 않을 몸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들이 죽을 병에 걸린 것입니다.

그러면 아버지는 올커니 이제 내 사랑하는 아들이 영원히 죽지 않을 몸을 가질 때가 되었구나! 하고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모르는 아들은 살려달라고 합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아들을 죽도록 버려두는 것이 사랑입니까?

고쳐주는 것이 사랑입니까?

 

죽이는 것이 사랑이겠지요.

맞아요.

죽이고 영원히 죽지 않을 몸을 주는 것이 사랑이에요.

이건 마치 아이들이 예방 접종을 맞게 하는 것과 같아요.

아이는 주사 맞기 싫어서 안 맞겠다고 악을 쓰지만 엄마는 기쁨으로 맞히는 것과 같아요.

 

하나님은 이 사랑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서 보여 주셨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절규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못 들은 척하고 흑암으로 가려 버립니다.

 

아들아! 죽어라!

하늘에 목숨을 얻기 위해서 땅에 목숨은 버려야 한다!

그래서 그 처절하게 울부짖는 예수님의 고통을 못 본체 한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는 우리가 들어가 있어요.

 

지금 예수님이 나사로의 죽음을 통하여서 잠시 후에 일어날 예수님 안에서 죽어야 할 제자들의 죽음을 예표 적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아들의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서 계신 겁니다.

나사로야 죽어라!

죽어야 산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나 둘씩 처참하게 죽어 갈 때도 외면했어요.

초대교회 성도들이 극심한 핍박 속에서 죽어가는 데에도 예수님은 막아주지 않았어요.

왜? 그랬을까요.

 

이 육신은 죽음이라는 불치병을 안고 있는 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불치병을 안고 있는 몸뚱아리를 끌어안고 살고자 해요.

이 몸뚱아리를 안고 사는 한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요.

 

그렇다면 세상에서 육신의 몸으로 잘 먹고 오래 오래 잘 사는 것이 복이 아니라 빨리 죽는 것이 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죄인의 몸으로 오래 살고자 하는 것은 죄가 주는 소욕이에요.

 

마귀는 죄의 몸으로 오래 오래 살도록 해요.

그래야 죽음으로 인간들을 자기 수하에 복종 시킬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죄인의 몸으로 살아야 마귀가 갖고 놀 수가 있거든요.

 

그래서 마귀는 죄인을 살려주는 식으로 일을 하는 겁니다.

어쨌든지 잘 먹고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살라고 해요.

그래서 몸에 좋다는 것은 다 줍니다.

오래 살아야 자기 꼬붕으로 데리고 있지요.

 

죄 아래서 태어난 육신은 마귀를 못 이겨요.

왜냐하면! 죽음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좇기는 인간은 작용 반작용으로 안 죽고자 해요.

무엇을 해도 안 죽는 쪽으로 움직여요.

안 죽고자 하니 죽음이 더 무서운 겁니다.

 

죽음이 너 까불래!

이걸 확 죽여 버릴까!

그러면 육신이 살려주세요!

제발 목숨만은 살려 주세요! 라고 해요.

그러니 죽음에 좇기는 육신으로 오래 살면 살수록 불안하고 곤고한 겁니다.

 

나사로도 얼마나 무섭겠어요.

난 살고 싶어!

난 죽기 싫어!

죽음이 나사로를 짓누르니 나사로는 더욱 더 두려운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사로를 짓누르는 죽음을 없애기 위해서 나사로를 죽게 만든 겁니다.

죽어서 두려움을 주는 죽음도 함께 죽여 버리는 겁니다.

예수님은 지금 나사로를 죽이는 것이 아니고 나사로를 사로잡고 있는 죽음의 세력을 죽이고 계신 겁니다.

마귀의 권세를 깨트리고 계신 겁니다.

이해되시지요.

 

사망은 암 덩이처럼 육신에 달라붙어서 인간을 괴롭혀요.

인간이 살고자 하면 할수록 사망이란 암 덩이도 기승을 부려요.

사망이란 암 덩이는 육신이 죽으면 같이 죽어요.

죽음이 암 덩이와 같아요.

죄인의 몸과 운명을 같이 해요.

 

그래서 예수님은 나사로를 괴롭히는 죄와 사망이라는 암 덩이를 나사로를 죽임으로서 같이 죽여 버리는 겁니다.

그리곤 죄와 상관없는 몸으로 다시 살려주는 겁니다.

이 몸을 일컬어 죄와 상관없는 몸이라고 해요.

이 몸은 영원히 죽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죽이는 쪽으로 일을 하시는 겁니다.

중요한 원리에요.

마귀는 살리는 쪽으로 일을 하고 예수님은 죽이는 쪽으로 일을 하세요.

이 역설을 모르면 실족해요.

 

이 시대 목사들은 전부 살리는 쪽으로 몰고 가고 있어요.

살려주겠대요.

나사로처럼 병든 사람이 있으면 달려가서 머리에 안수하고 주여 믿습니다!

오래 오래 살게 해 달라고 마귀와 부르스를 추고 있어요.

교인들도 살려달라고 해요.

 

주여 잘 죽게 하소서! 그러는 목사가 없어요.

제가 10여 년 전에 이런 짓을 했다가 욕 뒤지게 먹었어요.

제가 아는 다른 교회에 나가는 집사님이 병원에 심방을 좀 해달라고 전화가 왔어요.

자기 어머니가 간암 말기라고 해요.

그래서 아내랑 쫓아갔어요.

가보니 아버님과 집사님 두 분이 병상을 지키고 있더라구요.

그런데 느낌이 오잖아요.

저만 그런가?

 

암튼 묵상기도 하는데 느낌이 야! 이건 오늘을 넘기기 힘들겠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래서 다짜고짜 어머니 죽을 준비 되었습니까? 라고 물었어요.

그러니 둘러선 사람 모두가 움찔합니다.

제 아내는 놀라서 옆구리를 쿨 찌르는 겁니다.

무슨 그런 말을 그렇게 하느냐? 나무라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 전에 자기 교회 목사님이 와서 안수기도 해주고 갔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살려 주실 거라고 했대요.

그런데 제가 그와 상반된 말을 하니 놀라지요.

 

암튼 전 감동 되는대로 말을 했어요.

그러니 어머니가 자기 한(恨)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자기는 처녀 때까지만 해도 교회에 다녔대요.

그런데 시집을 오면서 발을 끊었다는 겁니다.

시집이 장손 집안이고 워낙 불도가 쎄기 때문에 교회 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집이 교회와 담장을 같이 하고 있어요.

그래서 예배 때 설교가 다 들려요.

얼마 전부터 자기 안에 예수님은 늘 그리워하면서 살았다는 겁니다.

근데 아버지가 얼마나 고약한가 하면 예배시간에 불경을 크게 틀어 놓고 방해하곤 했어요.

그러던 사람이 마누라가 죽는다고 하니 목사에게 심방을 받은 겁니다.

 

그런데 제가 죽는다고 하니 화가 나는 겁니다.

그래도 목사이니 함부로 덤비지 못하고 끙끙하는 겁니다.

암튼 전 어머니와 이런 저런 이야기 하면서 복음을 전했어요.

그러니 어머니가 목사님 기도 좀 해달라고 그러는 겁니다.

 

목사님 말씀을 듣고 보니 자기는 구원받은 사람인 것 같다고 해요.

그러면서 아주 밝게 기도 해달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기도했지요.

그리곤 곁에 선 아버지에게 죽어서 어머니하고 만나고 싶으면 아버님도 예수 믿으라고 했어요.

이제 어머니는 예수 믿어서 천국에 가는데 아버지는 지옥으로 갈 테니 어머니를 만나고 싶으면 예수 믿어야 된다고 했어요.



그런데 이 아버지가 어머니를 그렇게 사랑해요.

부부의 사랑이 그렇게 애틋한 겁니다.

그래서인지 그러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리곤 그날 밤에 어머니는 죽었어요.

나중에 아버지도 예수 믿고 그 집 아들도 예수 믿고 며느리도 예수 믿고 있어요.

 

좌우지간 그때 집사님 동생이 예수 믿지 않는 상태라 나중에 그러더라고요.

목사님이 그때 보였으면 죽였을 거라고!

아무리 죽어 가는 사람이라 하여도 측은지심으로 위로해야지 죽는다고 할 수 있느냐고!

 

아버지도 그랬거든요.

당시엔 집사님에게도 원망을 들었어요.

아무리 목사이지만 간암 말기환자에게 죽을 준비 하라고 했다고!

무슨 놈에 목사가 환자에게 죽으라고 하느냐고!

참 저도 미쳤지요.

그냥 내버려둬도 죽을 것을 괜히 죽는다고 했다가 봉변을 당하느냐 말이에요.

 

그래서 제가 속으로 다짐을 했어요.

주여!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앞으론 절대로 오래 오래 산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장담하지 못해요.

마치 장기판에 훈수 안둔다고 하다가 두고선 욕을 먹듯이!

저도 다시는 이런 말을 하지 말아야지 하다가도 막상 그런 일이 닥치면 그만 나도 모르게 하고 말아요.

그런데 전 이런 일이 두 건 더 있어요.

 

그러니 언제 또 바른 말 하다가 욕을 먹을지 몰라요.

하나님은 왜? 내겐 맞아 죽을 일만 벌리는지 모르겠어요.

제 블로그에 보면 “신앙의 글” 카테고리엔가 “만남 그리고 복음과 죽음” 이라는 글도 이런 내용이에요.

제 간증이니까! 한번 참고해서 보세요.

 

참 종과 거짓 종은 구약의 선지자들을 보면 알 수가 있어요.

참 종들은 항상 부정적으로 말합니다.

죄를 지적해요.

그러니 참 종들의 말은 아파요.

기분 나빠요.

듣기 싫어요.

죄를 고발하는데 누가 듣기 좋아 하겠어요.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는 이스라엘은 망한다고 소리쳤어요.

이건 마치 이 시대 교회가 절간과 같아졌다고 외치는 것과 같아요.

이 소리를 누가 듣기 좋겠어요.

 

그러나 거짓 종들을 항상 긍정적으로 말해요.

죄를 이야기 하지 않아요.

사람들 귀에 듣기 좋은 말만 해요.

죄인에게 듣기 좋은 말만 하면 어찌 되겠습니까?

패망이지요.

 

어느 시대고 이런 맥(脈)은 항상 이어져 왔어요.

이는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에 투쟁을 허락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여자의 후손의 근거지는 하늘이에요.

뱀의 후손에 근거지는 땅이에요.

 

여자의 후손은 땅은 망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땅을 근거로 살고 있는 뱀의 후손들이 발악을 하는 겁니다.

자기 존립기반이 흔들리니 당연히 반발하지요.

 

이걸 교회로 비유해 보세요.

교회가 먹고 사는 터전인 목사들이 교회의 타락을 말하면 가만있겠어요.

난리를 쳐요.

 

분명히 말합니다.

교회 붙잡으면 저주 받습니다.

예수 믿어야 구원 받아요.

예수 믿으면 교회가 있어도 되고 없어도 괜찮아요.

지금 제가 교회 무용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신앙의 본질 문제를 말하는 겁니다.

 

그 속에 예수가 있으면 교회에 의미를 두지 않는단 말입니다.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말은 교회를 사수하여야겠다고 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교회를 붙잡는다는 것은 뭔가 꼼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교인들이 교회 사수를 할까요?

목사들이 사수를 할까요?

목사들이지요.

왜? 그런가요.

목사는 교회가 직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교회를 사수하고자 하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를 증거하지 않고 교회를 증거하게 되는 겁니다.

 

성도가 붙잡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에요.

교회 안에서도 예수를 붙잡아야 하고!

교회 밖에서도 예수를 붙잡아야 해요.

 

예수 이외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구원하지 못해요.

예수님만이 우리를 죽음에서 해방시켜 주세요.

예수님만이 땅에 주소지를 하늘로 옮겨 주세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 이외는 붙잡을 것이 없는 겁니다.

 

그림의 떡이라는 말이 있지요.

이는 보고서도 먹을 수 없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니고 살아도 산 것이 아닐 때에 죽은 송장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신앙생활에 적용을 한다면 아무리 좋은 천국이나, 영생이나, 부활이 있다 하여도 이러한 것들이 신자의 삶 속에서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면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신앙이란? “믿을” 신(信)에, “바라볼” 앙(仰)자인데 이는 믿는 것을 바라본다는 의미입니다.

그럼 신앙생활은 믿고 바라보는 것을 실제 삶으로 살아간다는 말이 됩니다.

 

많은 교인들이 신앙은 있는데 생활이 없어요.

즉 믿고 바라보는 것은 있는데 실제에서는 그렇게 살아가지 않는단 말입니다.

이를 일컬어 관념적인 믿음이라고 합니다.

 

신앙은 믿음이고 생활은 삶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문자 속에 가두어 두고 있어요.

그냥 성경 속에서만 만나요.

 

그건 아니에요.

예수는 생명이에요.

지금도 살아서 우리와 호흡하고 계세요.

지금 저와 여러분과 같이 해요.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고 한다구요.

 

나를 나 되게 하시고 나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고 계세요.

그 확실한 증거가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 내 마음대로 살아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끌고 다니시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원치 않는 길로 가게 되는 겁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걸 믿지 않아요.

교인들이 안 믿어요.

그러면서 예수를 안대요.

 

무엇을 말하면 “나도 다 안다” 라고 해요.

안다고 하면 그 안다는 것으로 살아가야 하잖아요.

그래야 신앙생활 한다고 합니다.

안다고 하면서 살아가지 않을 땐 그 앎은 죽은 겁니다.

 

교인들에게 물으면 다 예수를 믿는다고 합니다.

믿는다고 한다면 믿는 것이 있을 것 아닙니까?

여러분은 믿고 바라보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고!

천국을 소망하며 바라보는 것이잖아요.

 

믿음이 없으면 이러한 사실을 믿을 수가 없어요.

믿어지지 않으면 예수님의 대속하심이나 천국은 그림의 떡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믿어지지도 않는 천국이 있으면 무엇 할 것이며!

믿어지지 않는 부활이 있은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성도가 부활이니 영생이니 하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들을 자기화하지 못하고 그림의 떡과 같이 여기고 사는 신앙의 허상을 잘 보여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에게 죄사함을 주시고!

영생을 주시고!

부활을 주신다고 하여도 그것이 믿어지지 않는 사람들에겐 전혀 남의 이야기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어지지 않는 사람들에겐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야기해도!

영생과 부활을 이야기해도!

천국 이야기를 해도 기쁘지가 않아요.

그져 육신이 편하고 세상에서 잘 되고 돈을 많이 벌면 기뻐하지요.

 

특히 목사 사모들이 그래요.

목사가 복음 전하는 것을 기뻐하여야 하는데 돈 갖다 주면 기뻐해요.

복음 전하지 말고 교회 부흥시키라고 해요.

교회 부흥시켜 놓고 복음 전하면 되지 않느냐고 해요.

이건 복음엔 관심이 없고 교회에 관심이 있다는 말이에요.

목구멍에 밥은 돈이 넘겨주지 복음이 넘겨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거든요.

그러니 눈만 뜨면 돈 돈 돈 하는 겁니다.

 

매일 신세타령이나 해요.

내가 미쳤지!

내가 눈이 삐었지!

내가 왜? 이런 사람과 결혼했는가?

나오느니 한숨이고 뱉어지는 게 불평이에요.

 

이 사람들은 교회가 자기 환상을 이루어 주는 곳인 줄 알아요.

예수님의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곳인 줄 몰라요.

그러니 교인들보다 더 철딱서니가 없이 예수를 안 믿는 겁니다.

 

주께서 사랑하시면 언제 철들게 하겠지요.

그날을 기약합시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잖아요.

제가 바로 그 증인이에요.

그러니 소망을 갖고 삽시다.

 

암튼 사람이란? 무엇이든지 자기 삶에 유익이 되는 것을 쫓아가게 되어 있어요.

만약 예수의 부활이 자기 삶에 유익을 주는 것이라면 쫓지 말라고 하여도 쫓아갈 것입니다.

인간이란? 이처럼 자기 유익을 위해서 살아가는 자에요.

결국 자기 유익이 그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인 셈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자기가 믿고 바라는 것을 실제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어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마르다 에요.

마르다는 부활을 믿었어요.

하지만 오빠의 죽음 앞에선 부활은 관념이고 안다는 것은 지식에 불과한 것임이 드러났어요.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 만에 마르다 집에 심방을 합니다.

나사로가 아플 땐 빨리 심방을 좀 해달라고 했는데!

그렇게 오라고 할 때는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죽고 나니 온 겁니다.

이러면 적개심이 안 들면 인간이 아니지요.

저 같아도 적개심이 들 겁니다.

 

사랑 뒤에는 미움이 있어요.

인간은 사랑을 내 보이든지 미움을 내 보이든지 해요.

내게 유익을 줄 땐 사랑한다고 알랑방귀를 뀌지만,

내게 아픔을 주면 미움으로 돌변하여 적개심이 부글부글해요.

 

인간 속엔 선한 나와 악한 내가 있어요.

아주 극과 극인 종자가 있어요.

누가 나야? 몰라요.

하루에도 수없이 교차하여 내 보여요.

저 사람에겐 어떤 나를 보일까?

수시로 계산해요.

 

저 역시도 마찬가지에요.

이건 복음 하고 상관없어요.

어떤 분들은 오해하기를 복음을 알면 사람이 변하는 줄 아는데 그렇지 않아요.

안 변하기 때문에 죽이는 겁니다.

죄 아래서 난 몸은 항상 자기 밖에 몰라요.

 

그러니 마르다도 예수님이 오빠가 죽은 뒤에 오는 것이 미운 겁니다.

그냥 눈 흘깃 하면서 오셨어요!

웬 일이래요?

비아냥거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르다의 심기를 아랑곳 하지 않고 염장 지르는 소리를 합니다.

마르다야 네 오빠가 다시 살아 날거야!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말아라!

 

이에 마르다가 됐거든요!

나도 다 알거든요!

나도 나중에 부활한다는거 다 알거든요!

 

그러자 예수님이 마르다야 그게 아니고 지금 부활해!

아니 글쎄! 안다니까요?

좀 비켜 주실래요.

 

내가 곧 부활이고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합니다.

마르다야 네가 이걸 믿느냐! 그럽니다.

 

이에 마르다가 아니 글쎄! 내가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압니다.

안다고요!

알아요!

다 알고 있어요!

 

그리고는 휑하니 주님 곁을 떠나고 마리아에게 갑니다.

마리아에게 야! 니네 선생님 왔다!

가 봐라!

너 좀 보자고 한다!

 

우린 여기서 마르다를 욕해선 안 됩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 신앙이 마르다 신앙과 똑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르다 처럼 부활을 지식으로 알고 있어요.

믿음도 지식으로 알긴 매 일반이에요.

 

우리도 죽어서 가는 천당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지금 내 자신이 천국 안에 와 있다는 것을 몰라요.

지금 내가 부활 안에 있다는 것을 몰라요.

예수님은 지금 마르다를 통하여서 제자들을 고발하고 우리를 고발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부활이든 천국이든 현재화하고 있어요.

우리는 역사라는 영역에 속하여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역사적으로 이해를 해요.

역사란?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 있어요.

 

그러니 천국이라고 하면 어느 공간을 생각하는 겁니다.

저 하늘 멀리 어딘가에 있는 그런 천국을 그려요.

부활도 나중에 먼 훗날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지금 마르다가 이런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역사 밖에서 오셨어요.

다른 말로 영역이 다른 별에서 왔어요.

역사 밖을 묵시라고 해요.

흔히들 영의 세계라고 합니다.

 

묵시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어요.

그 때 그 때 사건으로 나타나요.

하나님은 하늘나라에 일들을 세상이라는 역사 속에서 사건화 시켜요.

 

지금 예수님이 그런 일을 하고 계신 겁니다.

그래서 내가 부활이고 생명이라고 하는 겁니다.

날 믿는 자는 지금 영원히 산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사로를 살려내는 겁니다.

부활이란 먼 훗날의 일이 아니고 지금 현재 여기서 일어나고 있음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부활의 세계란? 예수 안을 말해요.

부활생명은 예수의 생명인 겁니다.

이걸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고 했어요.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보고 천국이 왔다고 하지요.

하늘나라가 임했다고 하잖아요.

이는 곧 예수님이 천국이란 말입니다.

천국이 어디냐?

예수님 안이에요.

 

그런데 역사에 속한 사람은 천국이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묻는 겁니다.

그러니 신천지 같은 미친놈들은 과천에 새 예루살렘성전이 지어진다고 지랄을 떠는 겁니다.

자기들이 십사만 사천명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전부 역사 속에 있다는 증거에요.

 

이러면 꼭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어요.

목사님은 천국이 있다는 것을 믿습니까?

믿어요.

 

자 묻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이나 바울이나 스데반이 어디에 있을까요?

천국이지요.

그럼 이들이 몸으로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정신만 가 있습니까?

몸이지요.

분명히 어떤 영역에 가 있는 것이지요.

맞아요.

천국도 영역이에요.

여긴 우리도 죽으면 가는 곳이에요.

 

그러나 지금 천국은 어떤 장소가 아니에요.

예수님이 몰고 온 천국은 예수님의 권세 아래 있는 겁니다.

천국을 일컬어 아들의 나라라고 하지요.

이는 아들의 다스림이 있는 곳이 천국이란 말입니다.

 

쉽게 설명할게요.

우리나라에 미국대사관이 있어요.

분명이 우리나라라는 영역에 있어요.

그럼 미국대사관은 우리나라입니까?

미국입니까?

미국이지요.

미국의 통치를 받아요.

만약에 대사관이 우리나라에 있다고 해서 우리 마음대로 들어가면 영토침범이 되어요.

미국대사는 돌아다니는 미국이에요.

이해되세요.

 

지금 예수님이 하늘나라에서 오셨어요.

천국에서 왔어요.

그러니 예수님이 천국인 겁니다.

예수 믿으면 천국백성이 되어요.

예수 믿는 사람은 이미 천국사람이에요.

 

이런 사람이 육신의 장막을 벗으면 장소적인 천국으로 가요.

거기 가면 다 만나요.

아브라함이나 다윗이나 바울이나 나사로를 보고 반갑다 친구야! 그런다구요.

여러분이 먼저 가시면 제 안부를 전하세요.

제가 먼저 가면 여러분 안부도 전할게요.

 

성령이 임하면 이런 모든 것들이 술술 믿어져요.

이상하게 믿어진다니까요.

어떻게 믿어집니까?

묻지 마세요.

설명해도 몰라요.

믿어지게 해 주시면 남에게 설명을 구할 필요도 없고 스스로 믿어져요.

 

역사 안에 있는 사람들에겐 묵시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이해가 되지 않지요.

마르다가 지금 역사 안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겁니다.

그러니 역사의 끝자락에 부활이 일어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게 아니란 것을 나사로를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겁니다.

이 땅에서의 부활이나 천국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주 쉽게 말할게요.

예수님이 성도들 속에 법을 하나씩 심어 놓았어요.

성령이라는 생명의 법이에요.

법이란? 반드시 그렇게 되고 만다는 법칙이에요.

 

이 법은 부활이고 천국이에요.

이 법이 심겨진 사람은 현재 천국에서 살고 있고 현재 부활로 살고 있어요.

이 법이 심겨진 사람의 특징이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우리 안에 이 법이 심겨졌어요.

그러므로 현재 천국을 누리고 현재 부활신앙으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신앙은 관념이 아니고 실제에요.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교제하는 것이 실제이듯이 예수님과의 사귐도 실제에요.

제발 신앙생활을 도(道) 닦듯이 하지 마세요.

예수님의 능력으로 사세요.

 

예수님이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고 사세요.

 

이 시대 성도들이 입술로는 죄사함을 받아서 기쁘다고 하면서도 전혀 죄사함으로 인한 기쁨으로 살지 못하고 있어요.

영생이니 천국이니 말하는 것은 그저 종교적인 언어일 뿐이에요.

삶이 되지 못하고 있어요.

그러니 세상을 이기지 못하는 겁니다.

 

스스로 천국백성이라고 하면서도 지금 천국의 사람으로 살지 못하고 있어요.

그러니 현실의 조그마한 어려움만 닥쳐도 난리를 치고 울고불고 하는 겁니다.

영생이니 부활이라고 말하면서도 어려움을 이겨 내지 못하고 무기력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화려한 미사여구(美辭麗句)의 신앙고백을 원하지 않아요.

약속을 믿고 사는 것을 원해요.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다 주께서 허락하신 일이라는 것을 알고 믿음으로 살기를 바래요.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어요.

여기서 말하는 능력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그대로 믿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죽어도 다시 산다는 약속을 믿고 사는 것을 말해요.

 

하나님이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죽음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지요.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 약속이 믿어지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세상 속에서 살면서도 세상 사람이 아닌 자세로 사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처럼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요! 라는 자세 말입니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세상 것으로 인하여 낙망하지 않았어요.

 

오늘 우리는 마르다와 마리아를 믿음이 없다고 타박을 할 것이 아니라 그 모습이 곧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역시도 입술로는 천국이다, 영생이다, 부활이다 라고 말을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마르다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마르다와 마리아를 통해서 현재 우리의 신앙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르다가 고백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고백이 현재의 것이 아니고 먼 미래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마르다의 고백은 베드로가 고백한 것과 동일해요.

 

27절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보세요.

얼마나 멋진 고백입니까?

이 이상 더 좋은 고백도 없어요.

 

그런데 베드로가 한 고백은 칭찬을 받았고 마르다가 한 고백은 책망을 듣고 있어요.

왜? 동일한 고백임에도 극과 극으로 다른 대접을 받을까요?

이는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하게 한 고백이고 마르다는 자기가 한 고백이에요.

베드로의 고백은 신앙이 되는 한 편 마르다의 고백은 관념이 되는 겁니다.

 

마르다는 유전적으로 배워서 지식으로 알고 있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다 부활을 믿어요.

그런데 그 부활은 역사의 끝에 이루어지는 나중에 일어날 부활이에요.

그러니 부활을 현재의 능력으로 나타나지 못하는 겁니다.

 

많은 분들이 착각하기를 입술로 시인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했으니 입으로 시인하면 되는 줄 알아요.

물론 시인하면 구원받아요.

그러나 그 시인이 누구의 시인이냐 에요.

 

내가 하는 시인이냐?

아니면 하나님이 하게 하신 시인이냐 에요.

내가 하는 시인은 그 속에 생명이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마르다는 시인하는 것으로 살지 못하는 겁니다.

 

이 시대 많은 교인들이 입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믿음이 좋아요.

사도들보다 더 믿음이 좋아요.

그런데 그 믿음이 전부 허구에 그쳐요.

전부 앵무새 믿음이에요.

 

그러니 입으로만 믿지 삶으로는 믿지 않아요.

머릿속에 있는 믿음이 가슴으로 내려오지 않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전부 살았다 하나 실상은 죽어 있는 겁니다.

이게 모두가 배워서 안 믿음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지식으로는 빠삭한데 막상 퍼 먹으려면 땡감이에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게 하신 시인은 그 속에 하나님의 능력도 함께 담겨져 있어요.

이 능력이 시인케 한 믿음으로 살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 무슨 신앙고백을 하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신앙고백이 살아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신앙은 오늘 현재 여기서 일어나야 하는 겁니다.

 

내일은 관념이에요.

마르다에게 있어 믿음이란? 현재적인 것이 아니고 미래적인 것이었어요.

부활과 천국을 지금 받은게 아니고 적금 부어서 나중에 타는 것으로 믿고 있어요.

 

그러니 천국이라고 하면 아! 죽어서 가는 곳!

부활이라고 하면 아! 나중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부활하지! 라는 정도입니다.

신앙은 신앙이고 현실은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믿음 따로 사는 것 따로 인겁니다.

믿음은 교회에 와서 필요한 것이고 교회를 나가 세상에 나가면 불신자와 똑 같은 사고로 사는 겁니다.

이게 모두가 신앙을 미래적인 것으로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 지금부터 중요한 말을 합니다.

 

마르다의 신앙이 그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이었어요.

유대인들은 천국을 나중에 죽어서 어떤 장소에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어요.

부활도 나중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천국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말하지 않고 예수님 안에 있다고 하셨어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천국은 장소적인 것이 아니고 상태적인 것입니다.

상태 적이라는 말은 누구의 권세 아래 있느냐 입니다.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권세 아래 있으면 천국에 들어간 것이나 같아요.

예수님이 현재 몰고 온 천국은 어떤 장소가 아니라 믿는 마음입니다.

내가 천국백성이라는 믿음 안에 있으면 천국에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히브리서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어요.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라고 했어요. 

이는 미래를 현재화 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성도가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부활이고 천국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사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바라는 것들을 증거하며 사는 것입니다.

증거란 삶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산 사람들이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사람들이에요.

 

히 11:13-16절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 하였으니 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15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보세요.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다고 하잖아요.

믿음대로 살다가 죽었다는 말입니다.

믿음대로 살다가 보니 이 세상 사람 아닌 것처럼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마르다와 마리아는 믿음으로 바라는 것들을 실상으로 살지 않고 지금 현재 장소적으로 현실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믿음으로 여기고 살고 있었어요.

그러니 예수님이 자기 집에 오지 않아서 오빠가 죽었다고 하는 겁니다.

 

21절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다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32절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마르다와 마리아는 오빠가 죽은 것은 예수님께서 여기에 계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만 오셨으면 오빠는 안 죽었을 것이라는 겁니다.

이들은 예수님은 어떤 장소에 매여 계신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게 육이에요.

이게 어둠의 사고란 말입니다.

육은 하나님을 고정화하고자 해요.

 

그래서 육에 속한 사람은 성전을 필요로 하는 겁니다.

신(神)이 계신 집이 필요한 거예요.

집이 있으면 만나는 날짜도 있어야 해요.

목사도 있어야 하고 안식일도 있어야 해요.

지키는 법이 필요해요.

 

그러나 하나님은 만유 안에 계세요.

이를 무소부재(無所不在) 하신다고 합니다.

안 계신 곳이 없고 존재치 않는 곳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나사로의 집에 있든지 없든지 개의치 않은 겁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고자 했다면 집에 가지 않아도 낳게 할 수 있어요.

그냥 말씀만 하시면 나아요.

실제로 백부장의 하인을 고칠 때 그렇게 하셨잖아요.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런 사고는 지금 우리의 사고에요.

우리도 은연중에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해야 잘 응답 된다고 믿어요.

그것도 새벽 시간에 말이에요.

이게 육에 속한 사람의 생각인 겁니다.

 

퀴즈하나 낼까요?

 

눈을 감고 기도하는 것이 옳은가요?

눈을 뜨고 하는 것이 옳은 건가요?

큰 소리로 해야 하나요?

묵상기도를 해야 하나요?

 

답은 니 마음대로 하세요! 에요.

 

우린 눈을 감고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그동안 교회에서 배워온 유전 때문이에요.

우린 다 그렇게 배웠어요.

하나님께 정성이 중요하다고 배웠어요.

 

그래서 전 과거에 헌금을 해도 새 돈으로 했어요.

토요일이 되면 일부러 은행에 가서 빳빳한 돈으로 교환해서 했어요.

그렇지 않으면 다라미로 반듯하게 펴서 했어요.

이게 모두가 육으로서 하나님을 이해하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과거 마르다와 마리아와 유대인이나 우리나 똑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목사님에게 심방을 해 달라고 하잖아요.

교제 차원의 심방은 환영이지요.

그러나 한국교회에선 목사의 심방을 하나님이 왕림하신 것으로 만들어 놓았어요.

 

그러니 신앙이 율법적으로 제의(祭衣)적으로 의식화 된 겁니다.

어떤 분들은 목사가 심방을 한다고 도배까지 하고 목욕재계 하고 기다려요.

나는 이렇게 정성을 쏟았다는 것이거든요.

이게 육의 사고에요.

 

그러니 백날 예수 예수 하여도 점쟁이 신앙을 벗어나지 못하는 겁니다.

내 행위에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가 왔다 갔다 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장소적인 개념에 매여 있는 유대교적인 사고의 틀을 깨기 위하여 일부러 나사로를 죽이고 살리는 사건을 일으킨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상상 속에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에요.

실제 우리 속에 있어요.

하나님은 먼 나라에 계시는 분이 아니에요.

지금 우리와 계세요.

 

성령이 오시면 이 사실이 믿어져요.

성령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우리 안으로 몰고 오세요.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을 멀리서 찾지 않아요.

항상 자기와 함께 계심을 인지해요.

 

전 그렇게 살아요.

물론 24시간 늘 의식하진 않아요.

찰나적으로 의식해요.

 

하나님은 항상 계신데 내가 의식하지 못할 뿐이에요.

그러다가 불현 듯 성령께서 뒤통수 한 대 때리면!

아! 주여! 그런다구요.

아! 하나님 쏘리 쏘리 해요.

그러면 하나님이 빙그래 웃어요.

짜식~ 그러면서!

뭔가 이상한가요.

 

전 그렇게 사는데!

왜? 다들 이상하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요.

제게 소망이 있다면 하나님은 자주 자주 인지하고 사는 겁니다.

지금은 가뭄에 콩 나듯이 의식하지만 이 인터발이 짧아지면 좋겠어요.

 

이건 제 바램이에요.

말은 이렇게 하지만 실제 제 마음 속에 또 다른 놈은 그러지 말라고 해요.

왜? 그런지 아세요.

하나님을 늘 의식하게 되면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함께 있는 것처럼 불편해요.

 

우린 죄짓고 싶은데 하나님이 생각나면 죄를 못 짓잖아요.

아니 인간이 주특기가 죄짓고 사는 것인데 이걸 못해 보세요.

마치 아이들이 TV에 재미있는 만화를 하는데 아빠가 떡하니 버티고 있으면 싫잖아요.

속으로 아빠! 빨리 나가세요!

왜? 빨리 안 나가는 거야!

그러다가 나가면 앗싸! 그러지요.

 

아빠는 모른 척 하고 비켜 주어요.

에험~ 수변 공원이나 한 바퀴 돌고 올까 하면서 옷 챙겨 입고 나가잖아요.

이해가 되세요.

 

그래서 제가 깨달은 것은 야! 하나님을 가뭄에 콩 나듯이 깨닫게 해 주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제가 불편해 할까봐서 그런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내 생각 속에 하나님이 띠엄띠엄 생각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 고맙습니다.

절 덜 불편하게 하시려고 그러시는군요.

감사합니다.

전 그렇게 느끼고 살아요.

 

하나님이 저에게 그러는 것 같아요.

야! 정낙원이!

너! 복음만 전해라!

그러면 네 허물은 눈감아 준다고 그래요.

제가 그렇게 느낀다고요.

 

솔직히 말해서 우린 아무리 잘해도 하나님 앞에선 다 죄에요.

이 말을 사람들의 동의를 안 해요.

왜? 모든 것을 죄라고 하느냐! 라고 따져요.

 

그럼 제가 묻지요.

죄 아닌 것을 한번 말해보세요.

사람들이 죄를 행함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어요.

그러니 교회생활 잘하고 기도하고 성경보고 충성하면 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역으로 이런 일을 안 하면 의로운 줄 알아요.

결국 자기 행위로 죄다 아니다 판단하는 거잖아요.

 

그러나 성경은 죄를 하나님과 단절을 말해요.

관계 밖에 있는 것을 말해요.

이걸 영역이라고 해요.

아담 안이냐!

예수 안이냐!

 

아담 안은 무조건 죄이고 저주에요.

예수 안은 무조건 의이고 영생이에요.

죄와 의가 우리 행실로 결정이 되지 않고 누구 아래 있느냐로 결정해요.

 

난 예수 안에 있어!

예수님 공로 때문에 살고 있어! 라고 살면 그 사람은 신앙생활 잘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난 착하게 살아야지 하면서 예수님 피 때문에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잊으면 그 사람은 신앙생활 안하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세요.

 

그러니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 행함으로 의다 불의다 판단하는 것은 죄가 되는 겁니다.

우린 다 불의한 자에요.

그러니 잘난 것이 하나도 없지요.

내게 무슨 의로운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죄에요.

우리에겐 의로운 것이 없어요.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의롭게 여겨 주셔서 의롭다 함을 받고 사는 것뿐이에요.

 

그래서 전 나를 보지 않아요.

하나님이 지금 나를 어떤 그릇으로 사용하고 계신가를 보는 겁니다.

전 목사에요.

하나님이 목사로 세웠어요.

목사라면 복음을 전해야지요.

 

복음만 전하라고 모든 것을 다 차단해 주셨어요.

교회가 부흥 되면 복음 전하는데 지장이 될까봐서 교회도 부흥시키지 못하게 했어요.

은혜를 받고 보니 다 그렇게 보이더라고요.

하나님이 내 주변을 철저하게 관리 해 주시는 것을 느껴요.

전엔 몰랐는데 이젠 알게 되어요.

 

물론 이것은 언제까지 지속될지 몰라요.

하지만 지금은 하나님이 불 성곽이 되셔서 절 지켜 준다는 것이 믿어져요.

하나님이 지켜주니 제가 완벽하게 산다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지켜 주니 제가 복음을 이 나마라도 증거 할 수 있다는 말이에요.

 

전 그렇게 믿고 있어요.

제가 깨달은 것은 복음만 전하면 하나님께서 나머진 다 용서해 주신다고 믿어요.

내 행실로 인하여 정죄하지 않는다고 믿어요.

그래서 전 나에게 의미를 두지 않고 살아요.

 

난 하나님께 긍휼을 입고 산다!

그러니 사나 죽으나 감사뿐이다!

내 행실로 인하여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내가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 앞에선 개차반이다.

 

전 제 아내에게 그럽니다.

여보! 우리가 지금까지 이렇게 분에 넘치는 삶을 사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다!

이것 잊으면 안 된다!

물론 당신 입장에선 돈 번다고 고생스럽지만 그 또한 은혜다!

당신 병들어서 골골하면 어쩌겠느냐!

그래도 이렇게 건강하게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절 보고 지랄한다고 합니다.

지는 맨 날 설교준비 한다고 책상머리에 앉아 있으면서!

마누라 벌어주는 것으로 먹고 사니 힘든 걸 모르지 라고 타박을 해요.

그러면 제가 여지없이 하는 말이 있어요.

 

까불지 마라!

이렇게 사는 것도 다 내가 복음 하나 증거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라고 큰소리칩니다.

하나님이 나 보고 복음만 증거하라고 당신도 건강하게 해주었고 돈도 벌게 한다는 것을 알라고 해요.

이러면 죽겠다고 합니다.

 

제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것 밖에 없어요.

어쭙잖지만 십자가 복음 하나 증거한다고 사방을 조용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그러니 저의 모든 허물도 눈감아 주는 것 같구요.

전 하나님께서 복음만 전하면 다 용서해 준다고 믿어요.

 

말이야 바른 말이지!

하나님이 뭐가 아쉬워서 바퀴벌레 같은 우리 행위를 가지고 죄다 아니다 하겠어요.

안 해요.

 

욥기를 봅시다.

 

욥 35:5-8= “너는 하늘을 우러러 보라 네 위의 높은 궁창을 바라보라 6 네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7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8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

 

지금 욥과 그 세 친구들이 욥이 당한 고난을 가지고 논쟁하는 겁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에게 재앙의 원인을 욥에게 추궁하는 겁니다.

욥아! 너도 알다시피 하나님은 가만히 있는 사람 벌을 주진 않을 것이 아니냐?

네가 이렇게 고난 받는 것도 다 니가 알지 못하는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욥이 그럽니다.

난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죄 지은 것이 없어!

하나님을 두고 맹세하라고 하면 할 수가 있어!

난 억울해!

 

욥이나 그 친구들 모두가 인간 쪽에서 뭔가 잘못해서 재앙을 당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자 느닷없이 엘리후가 나타나서 욥과 그 친구들을 몽땅 싸잡아 책망을 합니다.

야! 이놈들아!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희는 땅에 있어!

이는 사는 동네가 다르단 말입니다.

사는 동네가 다르니 판단하는 기준도 달라요.

 

그래서 너희들이 아무리 죄를 짓던 착하게 살든지 그건 어디까지나 너희 인간들에게 악이다 선이다 판단을 하지 하나님은 아무런 상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착하다고 칭찬하지도 않고 악하다고 책망하지도 않는단 말입니다.

 

이게 뭐와 같은가 하면

여러분들이 바퀴벌레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과 같아요.

어느 날 바퀴벌레 나라에서 심각한 토론이 벌어졌어요.

바퀴벌레 한 마리가 마실을 나갔다가 사고를 당했어요.

 

그래서 친구들이 찾아와서 논쟁을 합니다.

그러게 넌 인간님에게 잘하라고 했잖아!

인간님에게 잘못했으니 이런 재앙을 당하는 것 아니냐!

그러자 사고 당한 바퀴가 아니야! 난 잘못한 것 없어! 그러는 겁니다.

이걸 지켜보던 사람님이 뭐라고 하겠어요.

미친놈들!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는게 그래요.

우리의 옳고 그름을 가지고 탓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우리의 옳고 그름 속에 하나님이 의미를 둘만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일향 미쁘시게 보아주는 것 같아요.

복음만 전하면 마치 부모들이 아이들이 공부만 잘하면 게임해도 눈감아 주는 것과 같아요.

여러분도 아이들이 공부만 잘하면 그 아이가 다른 걸 하여도 이해해 주잖아요.

만화책을 보든지, MP3 노래를 듣든지, 친구들과 놀든지, 춤을 추든지 봐 주잖아요.

만약에 공부도 못하는 놈이 그런다면 죽여야지요.

 

우리 신앙도 그런 것 같아요.

목사가 복음만 전하면 잠시 당구를 치든지, 낚시를 가든지, 바둑을 두든지, 영화를 보든지,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부르든지, 술을 한잔하더라도,,,다 용서해 주세요.

이런 것 가지고 너 이놈 그러지 않아요.

 

이래도 된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은 이런 것으로 네 이놈 그러지 않는단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좀 새겨들으세요.

실제로 우리는 하나님이 못 본 척 눈감아 주기 때문에 이렇게 살고 있어요.

욥기서에서 살펴보았잖아요.

 

춤추고 싶으면 자갈바닥에서도 추고 춤추기 싫으면 멍석을 깔아 주어도 안 추어요.

인간이란? 자기가 하고 싶으면 막아도 해요.

그러니 누가 말리고 자시고 할 것이 없어요.

제가 하지 말라고 해서 안 할 여러분도 아니고, 하라고 해서 또 할 여러분도 아니잖아요.

 

그러니 제발 하나님을 우리 입장에서 판단하지 마세요.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 행실을 미주알고주알 따지면 살고 있을 사람 단 한 사람도 없어요.

제가 제일 먼저 죽어야 해요.

전 진짜 나쁘거든요.

 

그래서 제가 그럽니다.

하나님 제게 복음을 전하는 지혜를 주세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 증거 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이게 하나님이 바라는 것임을 알아요.

이것만 하면 공부 잘하는 아이가 게임을 해도 탓하지 않듯이 하나님도 저의 일거수일투족으로 탓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요.

 

전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요.

저를 다루어 오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알아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항상 제 곁에 있다는 것을 알고 감사하는 겁니다.

 

제가 곁길로 가도 하나님이 너무 멀리 가지 말라고 해요.

너 그러다 맞는다! 그래요.

그러면 알았어요!

마치 하나님이 곁에서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느껴요.

 

꼭 철없는 아이를 아빠가 곁에서 너무 멀리 가지마 라면서 지켜주는 것과 같아요.

제겐 하나님이 그런 분이세요.

그래서 없음 속에서도 감사하고 행복한 겁니다.

 

이러면 또 제가 직통계시 받는다고 오해하는데 그게 아니에요.

음성을 듣는다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생각하고 느낀단 말입니다.

지극히 주관적일 수 있으니 믿진 말고 참고만 하세요.

전 이렇게 산답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하나님을 멀리서 찾지 말란 말입니다.

천국이니 부활이니 먼 나라 이웃나라 이야기로 듣지 말란 말입니다.

좋은 신앙이란?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예요.

동행이란? 의식하고 사는 겁니다.

 

성령은 성도 안에서 믿음을 현재화시키는 일을 행하시고 계세요.

지금 현재 영생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라고 믿어지게 하세요.

그렇다면 죽음 또한 마친 가지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죽음이란? 육체가 죽는 것을 말하지 않고 예수님을 모르는 것을 말합니다.

생명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죽음이에요.

그러므로 지금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는 죽음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육체의 죽음이란? 마치 밭의 가라지와 곡식을 갈라내기 위하여 추수하는 것과 같아요.

가라지는 이미 불 속에 태워질 운명으로 밭에 있는 것일 뿐입니다.

반대로 곡식은 이미 곳간에 들어가도록 되어 있는 신분으로 밭에 있는 것입니다.

 

상태 적으로는 이미 갈라져 있지만 장소적으로는 아직 아닙니다.

이는 미완료란 말이 아닙니다.

이미 각자가 갈 곳이 이미 정해져 있어요.

 

이 사실을 안다면 지금 어디에 있느냐는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해요.

성도는 성령 안에서 이미 천국에 들어가 있는 자들이에요.

그러므로 이 세상에 있다고 하여도 이미 천국에 들어간 것이나 다름이 없어요.


신앙생활이란? 이미 천국백성으로 사는 겁니다.

반대로 지옥에 들어갈 자들은 지금 여기가 지옥인 것입니다.

육에 속한 자들은 자기들이 지금 지옥에서 살고 있는지를 몰라요.

왜냐하면! 이들은 항상 지옥을 장소적인 개념으로만 판단을 하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성도들에게도 이러한 장소적인 개념의 천국과 부활을 생각하도록 미혹해요.

즉 신앙을 미래화 시킨단 말입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아니다 신앙은 현재라고 교정해 주세요.

 

성령께서는 성도 안에서 묵시적 사건을 역사 속에서 행하시고 계세요.

그래서 성령이 임한 성도들은 장소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미래의 사건을 현재화시키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믿음으로 바라는 것들을 실상 속에서 현재화시키며 살아가게 만드는 겁니다.

 

성령의 증거로 부활을 현재화 하고 사는 자들에겐 죽음은 더 이상 두려운 것이 아니에요.

이미 부활 안에 들어와 있는 자에겐 죽음이 더 이상 왕 노릇하지 못해요.

그러므로 육신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게 되는 겁니다.

이는 성령께서 부활을 항상 현재화시키기 때문입니다.

 

12제자들은 성령이 임하기 전과 성령이 임한 후의 삶이 완전히 달라졌지요.

이는 성령이 제자들 속에서 부활을 현재화 시켰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겁 없이 복음을 담대히 증거 할 수가 있었던 겁니다.

 

저도 복음 전함에 일체의 타협이나 핍박에 굴하지 않는 것도 다 이 부활신앙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두려워 한다는 것은 신앙이 관념이라고 밖에 할 말이 없어요.

죽은 믿음이니 죽음이 두렵지요.

성령이 그 안에 없으니 세상이 두렵고 죽음이 두려운 겁니다.

 

그래서 제가 성령을 받으면 배짱이 생긴다고 한 겁니다.

죽일 테면 죽이고!

살릴 테면 살려라!

어차피 목숨은 하나님께서 하락하여야 떨어지는 것이니!

하나님께서 허락하면 내가 살고 싶다도 해도 더 살지도 못하고!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면 아무리 죽이겠다고 덤벼도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12제자들을 보세요.

12제자들은 예수님과 약 3년 반 동안이나 같이 생활하였어요.

갖가지 기적을 보았어요.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자 전부 도망갔어요.

그리고 부활 후에도 두려워서 떨며 살았어요.

이는 아직 성령이 그들에게 오시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부활의 세계에 들어와 있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이 두려웠던 겁니다.

 

그런데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고 나자 완전히 돌변 합니다.

오죽 했으면 낮술 먹었다고 했겠어요.

낮술에 취하면 부모도 몰라본다고 하잖아요.

사도행전을 기록한 사람은 누가라는 의사에요.

누가가 보니 제자들이 도무지 술에 취하지 않고선 할 수 없는 행동들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제자들이 술에 취해서 그런다고 말하고 있다고 증거하고 있는 겁니다.

 

암튼 성령이 임하고 나니 죽음에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났어요.

이제 도리어 죽여라! 죽여라 합니다.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부활이나 영생은 모두가 먼 훗날의 이야기로만 믿어졌었는데!

성령이 임하고 나자 현실화 된 것입니다.

죽어도 산다는 것이 비로서 믿어졌어요.

어! 이거 사실이네!

그러니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겁니다.

 

성령은 이처럼 믿음을 현실 속에서 풀어내요.

삶 속에서 역사하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걸 알려주려고 나사로 사건을 일으킨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통하여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이런 세계라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지금 우리는 모두가 이런 부활의 세계에 들어와 있어요.

농담이 아니고 사실이에요.

 

믿음은 현재에요.

지금 예수님과 교제하세요.

예수님을 멀리서 찾지 마세요.

여러분 곁에 계세요.

불러 보세요.

분명하게 응답을 하실 겁니다.

제가 만난 주님이라면 그래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세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눈을 열어달라고 하십시오.

그래서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바가 되셔서 신앙을 관념으로 하지 마시고 현재화 하면서 사세요.

 

속담에 업은 아이 사흘을 찾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곁에 두고 찾아 나서지 마세요.

곁에 계십니다.

그리고 교제하세요.

사랑하세요.

무슨 일이든지 의논하세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변론하세요.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고 아뢰세요.

철야기도 안 해도 되어요.

그냥 조곤조곤 말하세요.

곁에 있는 것처럼 믿고 말하세요.

 

그러면 엘리야처럼 세미한 음성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2천 년 전에 유대 땅에서 일어난 나사로의 사건도 지금으로 줌 렌즈로 쭈~욱~ 당기세요.

그러면 나의 사건으로 깨달아 질 것입니다.

 

부디 하나님의 일하심을 성경 속에 가두어 두지 마시고 현재 내 삶의 현장 속에서 느끼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부활과 영생이 먼 나라 이야기도 먼 미래의 일도 아니고 지금 현재 여기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믿어지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하나님도 멀리 어느 장소에 계시지 않고 지금 우리와 함께 동행하신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이제 그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면서 살아가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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