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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성경강해)69강. 목숨을 바꿔치기 하시는 하나님 (요 11:1-16)

by coroa 2021. 9. 26.

 

 

딤후 3장 12-15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69강. 목숨을 바꿔치기 하시는 하나님 (요 11:1-16)

-.정낙원 목사

 

 

 

오늘은 지난 시간 살펴보지 못하였던 부분을 살펴 볼까합니다.

지난 시간에 예수님은 나사로를 죽이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우리는 병든 자를 고쳐주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치지 않고 도리어 죽이는 것이 영광이라고 합니다.

왜? 인간이 죽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요?

이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명이 가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영생하는 생명입니다.

영생한다는 것은 죽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나사로는 죽을 생명을 가지고 있어요.

 

죽음은 죄로 인하여 왔어요.

죄를 받고 보니 그 속에 죽음이 들어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죄인은 죽어요.

 

이 죽음의 세력이 인간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들은 매사에 두려워하고 좇기는 겁니다.

아파도 죽겠다고 아우성이고!

돈 없어도 죽겠다고 아우성이에요.

자식이 속 썩여도 죽겠다!

남편이 속 썩여도 죽겠다!

직장인은 승진 못해서 죽겠다!

온통 죽겠다는 소리 밖에 없어요.

 

죽겠다고 하는 것은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꿈꾸는 것이 있어요.

그 꿈을 위하여 살아가요.

꿈은 항상 육신이 행복해야 한다는 겁니다.

잘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육신의 행복을 위하여 분주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은 평생 육신을 위해서 삽니다.

육신 하나 보듬고 살아요.

 

그래서 육신을 기준으로 행복하다 불행하다고 가늠하는 겁니다.

내 육신을 좋게 해 주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내 육신이 힘들면 하나님께 야속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변함이 없는데 자기 육신의 컨디션에 따라서 하나님이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해요.

그러니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면서 온갖 욕을 들어 먹고 있어요.

괜히 인간들이 자기 몸뚱아리 기분에 따라서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이 달라지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런 육신의 기분 따라서 왔다 갔다 하는 몸을 죽이는 쪽으로 일하시는 겁니다.

이 몸을 살려 뒀다간 하나님이 한시도 편할 날이 없어요.

 

왜? 돈 안 줍니까?

왜? 병 안 고쳐 줍니까?

왜? 난 예쁘지 않습니까?

왜? 난 뚱뚱 합니까?

왜? 신랑이 속을 썩입니까?

왜? 난 가난합니까?

왜? 우리 교회는 부흥이 안 됩니까?

온통 왜? 왜? 왜?입니다.

 

칠 팔월 매미처럼 울어 제끼는 저 놈들을 살려 두고선 하나님이 안식을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서 저 놈들 좀 죽이라고 하신 겁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마다 죽어요.

 

세상에 대하여 죽고!

정과 욕심이 죽고!

자존심이 죽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죽여요.

 

목숨을 죽이는 것은 다음 시간에 알아보고 오늘은 실생활에서 죽겠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죽이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육신의 소욕들을 어떻게 죽이는지 살펴보고자 해요.

 

예수님은 불평하는 삶을 감사하는 삶으로 바꿔치기 해 주세요.

무엇으로 하는가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해요.

십자가는 죄의 몸도 죽이고 살려 내지만 죄로 인하여 불평불만 하는 것들도 죽이고 살려내요.

 

예수 안에는 불평불만이 없어요.

감사만 있어요.

여러분이 불평불만 한다는 것은 예수 밖에서 바라보기 때문이에요.

예수 안에서 바라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예수 밖에서 바라보면 엄청나게 크게 보여요.

 

예수 안에서 보면 빈부귀천이 아무 것도 아닌데!

예수 밖에선 엄청나게 크게 보여요.

그러니 우리가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하는 신앙은 예수 안에서 바라보느냐!

 

예수 밖에서 바라보느냐의 싸움인 겁니다.

이를 두고서 은혜를 받으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 안에선 세상에 대하여 내가 죽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 안에선 세상 것으로 인하여 영향을 받지 않아요.

 

병들어도 걱정하지 않고!

돈 없어도 염려하지 않고!

출세하지 않아도 염려하지 않고!

내 안에서 주의 은혜가 충만하면 이렇게 되어요.

 

우리가 말씀에 은혜를 받을 때 그 순간엔 염려근심이 없어요.

그 순간 죽는다 하여도 감사해요.

그런데 제 정신으로 돌아오면 세상 것이 보이고 그러면 잠복했던 염려근심이 안방을 차지하고 이래라 저래라 괴롭혀요.

 

이걸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했어요.

예수 안에선 궁핍해도 아멘이고!

풍부해도 아멘이에요.

왜냐하면! 예수 안엔 세상 가치 즉 물질적 가치로 사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고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사는 곳입니다.

성령이 의와 평강과 희락을 주세요.

물론 그 때 뿐이지만!

이 맛을 본 사람은 은혜를 사모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예수 밖에선 세상에 대하여 살아 있기 때문에 세상 것에 영향을 받아요.

병들면 죽겠다고 하고!

돈 없으면 죽겠다고 해요.

예수 밖은 오로지 죽겠다는 것 밖에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을 세상 가치로 희비하게 하는 옛 사람을 십자가로 죽이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지금부터 해 보고자 하는 겁니다.

지금부터 잘 새겨서 들으세요.

 

우리는 뭔가 좋은 일이 생기거나 일이 잘 풀리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고맙습니다!

그래서 안 하던 감사 헌금도 하잖아요.

이는 그 일을 하나님이 잘 풀리게 해 주었다고 생각해서 입니다.

 

그런데 우리 뜻대로 안 되었을 때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않아요.

사업에 실패하게 해주셔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사고를 당하게 해주셔서 하나님 고맙습니다!

몹쓸 병이 들게 해주어서 하나님 고맙습니다!

아이가 대학시험에 떨어지게 해 주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교인이 다른 교회로 다 떠나게 해 주어서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 목사는 없어요.

 

저 역시도 그래요.

먼저 화(禍)부터 나고 하나님 왜? 그럽니까? 라고 짜증이 나지 감사가 안 나와요.

이런 상황에 감사가 나온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우리는 상투적으로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머리털까지 세시는 주님이라고 기도해요.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나 다 하나님께서 일으킨 일이므로 감사하여야 합니다.

아니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주관하는 하나님을 믿는다면서요.

그럼 죽이든 살리든 복을 주든 화를 주든 감사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실상에선 그렇지 않아요.

분명히 하나님께서 생(生)과 사(死) 그리고 화(禍)와 복(福)을 주관하세요.

좋고 나쁜 일을 주관하세요.

 

이사야 선지자의 고백을 들어봅시다.

 

사 45:7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하나님은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했어요.

그리고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했어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일을 하신다는 겁니다.

성도를 다스려 가세요.

그러니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일도 하나님이 주셨고, 나쁜 일도 하나님이 주셨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우린 좋으신 하나님만 알고 있어요.

천국(天國)의 하나님만 안다고요.

분명히 성경엔 지옥(地獄)의 하나님도 있는데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인거에요.

우리가 조합해 낸 하나님이에요.

자기 육신 중심으로 생각해낸 하나님인 겁니다.

 

난 이런 하나님을 알고 있어!

난 이런 하나님을 섬길래! 그런단 말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자기편을 들어주고 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 그런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입니다.

참 하나님은 우리 소원을 들어주지 않고 뽑아 내 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 아래서 알고 있는 하나님 상(像)을 빼내 버리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누구에게!

자기 백성들에게 그래요.

그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십계명을 주신 겁니다.

너희들이 지금 섬기고 있는 하나님은 애굽에서 안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애굽에서 알았던 가짜 하나님을 이제부터 내가 광야에서 뽑아내겠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말이 신(神)과 싸우는 자란 뜻이에요.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씨름하고 허리가 부러지고 얻은 이름입니다.

자기 소원을 들어달라고 하나님과 싸우다가 맞은 흔적이에요.

 

야곱이 얍복강에서 왜? 하나님과 씨름 했습니까?

형 에서가 무서워서잖아요.

과거에 형을 사기 친 것이 있으니 형을 만나기가 두렵고 불안 한 겁니다.

야곱은 형 에서를 너무도 잘 알아요.

에서는 너무도 유명한 사냥꾼이에요.

유명한 사냥꾼이란 말은 당대 최고의 무사란 말과 같아요.

최고의 싸움꾼이란 말입니다.

 

그런 그가 야곱을 기다리고 있어요.

그래서 온갖 꾀를 다 동원하여서 살고자 했어요.

처 자식 제물까지 뇌물로 바쳐서라도 저 한 목숨 건지고자 했어요.

 

그래서 얍복강에서 통성기도를 한 겁니다.

주여! 종을 불쌍히 여겨 주소서!

내가 심히 두려워 죽겠나이다!

나 좀 살려주세요!

하나님의 능력으로 형 에서를 어떻게 좀 해주세요!

 

이런 기도는 지금 우리도 하고 있잖아요.

주여 살기 어렵습니다!

돈 좀 주세요!

사업이 잘 되게 해 주세요!

병을 고쳐주세요!

아이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게 해 주세요!

돈 많고 나만 예뻐해 주는 좋은 신랑감을 주세요!

참 꿈도 야무지지요.

 

목사들은 주여! 교회를 부흥시켜 주세요!

교인들이 구름떼 같이 벌떼 같이 모여들게 해 주세요!

종이 손을 얻은 즉 병마가 떠나가게 하시고!

귀신을 명한즉 떠나가게 하고!

한번 외칠 때마다 5천 명씩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해 주옵소서!

 

제가 과거에 그랬어요.

밤 이슬 맞아 가면서 한 달씩 굶어 가면서 말이에요.

지금도 이런 마음이 싹 가시질 않고 앙금처럼 한 구석에 남아 있어요.

어떻게 하든지 복음을 핑계 삼아 육신을 좀 편하게 하고자 해요.

복음 복음 하면서도 그러고 있어요.

이 등신이!

 

지금은 교묘하게 하나님도 속이려고 해요.

복음 전한다는 것 빙자해서 은근히 바래요.

속엔 온갖 탐욕들이 가득한데도 아닌 척 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야! 솔직해라!

솔직히 돈 달라고 해라!

교회 부흥 좀 시켜 달라고 해라!

뭘 빙빙 돌리냐! 그래요.

 

그래서 솔직하게 하나님 돈 좀 주세요!

교회 부흥 좀 시켜 주세요!

돈 많은 집사 좀 보내 주세요!

 

그러면 지금도 과분하게 살고 있으면서 뭘 달라고 하느냐고 책망을 해요.

이 본성은 없어지지 않아요.

책망 듣는 그 때만 아이고 잘못 했습니다! 라고 하지 돌아서면 또 그래요.

지나고 나면 또 이런 생각들이 고개를 들어요.

마치 문방구 앞에 두더지같이 머리를 치면 숨었다가 다시 기어 나오고 그러면 또 얻어맞고!

참 지독해요.

 

마치 아이들이 말 안 듣는다고 매를 대면 그 땐 다시는 안 그런다고 싹싹 빌지만 돌아서고 나면 언제 그랬느냐 처럼 또 그 짓을 하듯이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그래요.

자식들이 빈다고 그걸 안 그런다고 믿는 부모가 없어요.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주여! 이제부터 정말 잘하겠습니다! 라고 하여도 안 믿어요.

그렇기 때문에 일향 미쁘시게 예수의 피를 보시고 용서해 주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겁니다.

 

내가 나를 생각해도 지독한 죄인이에요.

나 같으면 이런 인간을 그냥 콱 지옥에 보낼 겁니다.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속이 문드러지는 데도 쓸어안고 있어요.

아이고! 이 자식아! 하면서!

 

지금 우리가 얍복강에 있는 겁니다.

진퇴양난(進退兩難)입니다.

앞이 깜깜해요.

그러니 평상시엔 찾지도 않던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겁니다.

 

암튼 야곱은 심각해요.

그래서 하나님을 불렀는데 하나님이 나타난 겁니다.

야! 이게 꿈이냐 생시냐!

하나님이 드디어 내 기도를 들어주시려고 나타났구나!

 

그런데 하나님이 나타나자 말자 야곱을 엎어치기 한판을 해 대는 겁니다.

야곱이 놀라서 아니 하나님 왜? 그러십니까?

저 야곱이에요.

20여 년 전에 하나님이 벧엘 광야에 나타나서 날 지켜준다고 했던 그 야곱이에요.

그러자 이번엔 하나님이 하이킥으로 야곱에 면상을 걷어찹니다.

 

야곱이 이러단 맞아 죽겠다 싶어서 하나님과 샅바싸움을 합니다.

밤새도록 싸웠어요.

그러다가 새벽녘에 하나님이 야곱에 허리를 분질러 버립니다.

 

그리곤 가려고 하니 야곱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그래도 축복하고 가셔야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이름을 바꿔줘 버립니다.

야! 이 놈아!

이제부터 너 야곱이라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고 해!

 

이스라엘이 뭔데요!

하나님과 싸우는 놈이란 뜻이야!

넌 앞으로 하나님에게 철저하게 얻어터지는 놈이란 말이야!

넌 내 샌드백이야!

그러는 겁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말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어요.

첫째는 하나님과 싸우는 자이고!

둘째는 자기 안에 들어 있는 마귀와 싸우는 자에요.

 

쉽게 말해서 첫째는 하나님께 두들겨 맞는 자이고!

둘째는 자기 안에 있는 마귀 사상을 빼내는 자란 뜻입니다.

그래서 야곱에 일생이 완전히 묵사발 나는 인생을 산 겁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야곱이 이 묵사발난 인생으로 살게 한 얍복강에서 얻은 지팡이로 자식들을 축복했어요.

나를 이렇게 묵사발 낸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기를 기도했어요.

인생 살고 보니 하나님에게 빼앗긴 인생 보다 더 큰 축복이 없다는 것을 알았어요.

 

인간이란? 그냥 하나님이 굴리는 데로 굴러가는 인생이란 걸 안 겁니다.

내가 버팅 긴다고 해서 인생이 변하는 것도 아니란 것을 알았어요.

자식들에게 하나님은 우리 소원을 들어주는 분이 아니란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에요.

 

우리 인생은 모두가 야곱과 같은 인생이에요.

자기 안에 거짓 하나님 때문에 평생 얻어터지고 살아가는 인생이에요.

야곱이 알고 있던 하나님은 자기 소원을 들어주는 하나님이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얍복강에서 야곱의 신관을 바꿔주신 겁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란 것을 알려준 거예요.

 

그러니 야곱은 20여 년 전에 벧엘 광야에서 만난 하나님을 오해 했어요.

자기를 지켜주는 하나님으로 알았어요.

우리도 이런 하나님을 알고 있어요.

벧엘 광야에 나타난 하나님은 야곱을 하나님의 도구로 이용하는 하나님이었어요.

 

완전히 야곱이 알고 있던 것과 장 반대이지요.

야곱은 야곱을 위한 하나님인줄 알았는데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해서 야곱을 선택한 겁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야곱을 소모품처럼 사용하려고 선택했어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이름도 바꿔주고 인생도 자꾸만 태클을 거는 겁니다.

야곱에게 네가 알고 있던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이니 버리라고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야곱이 가는 곳마다 일평생 따라다니면서 야곱 속에 심어진 가짜 하나님을 빼내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그 가짜 하나님을 빼내는 일이 고난으로 나타난 겁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이 일을 당하였어요.

그러니 나 돌아갈래!

나를 애굽으로 보내 주세요!

내 소원 들어주는 그런 하나님을 섬길래요!

그러면서 맨날 데모했어요.

꼭 우리 같지 않나요.

 

성도의 일생이 이와 같아요.

우리도 우리 안에 야곱이 알았던 그 가짜 하나님이 심어져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바라던 일들이 생기면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고 방방 뛰다가도!

원치 않는 일들이 생기면 나 교회 안가!

나 하나님 안 믿을래! 라고 하잖아요.

 

우리 안에 가짜 하나님을 심어 놓았기 때문에 감사거리를 따로 만들어 놓은 겁니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세요.

여러분 안에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신앙이 따로 있어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어떻게 정해 놓았는가 하면 내게 유익이 될 때에요.

그 유익이라는 것도 육신적인 것입니다.

땅에서 잘되고 편하고 행복하게 되는 거예요.

감사 거리를 전부 자기가 정해 놓았어요.

거기에 맞아 떨어지면 감사하고 벗어나면 하나님이고 뭐고 없어요.

 

제 성경을 보면 형광펜으로 좋은 성경구절이라고 밑줄을 그어놓았어요.

그렇게 밑줄을 치다가 낡아져서 성경을 버린 것이 몇 권이 되어요.

지금도 서제에 훈장처럼 고이 모셔져 있어요.

난 이렇게 살았다고!

그런데 이게 저의 우상성이라는 것을 은혜를 입고 나서 알았어요.

 

모든 성경은 다 하나님 말씀이잖아요.

그런데 난 내 입맛에 맞는 구절(句節)만 찾았던 겁니다.

성경 말씀은 좋고 나쁨이 없어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다 좋은 것이에요.

축복도 하나님 말씀이고 저주도 하나님 말씀이에요.

그러니 이건 좋고 저건 나쁘고가 없어요.

그건 내가 만든 겁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합니다.

창조 속에는 지렁이도 있고 바퀴벌레도 있고 개미도 있고 뱀도 있고 다 있어요.

그런데 우린 다 좋아하지 않아요.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남기도 싫어하는 것은 없애고자 해요.

 

사람마다 좋아하는 짐승이 달라요.

좋아하는 나무도 달라요.

좋아하는 사람도 달라요.

좋아하는 색깔도 달라요.

사람마다 다 다르니 하나님이 창조한 것 중에서도 선별해서 좋아하는 겁니다.

 

이런 한 것은 모두가 자기중심으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보면 다 좋아요.

하지만 내 중심으로 보면 다 불만이에요.

 

우린 남이 해 놓은 것을 그대로 감상하지 못해요.

꼭 건들어요.

에이~ 이건 이렇게 했으면 좋을걸 그랬어!

이건 이렇게 하여야 좋고!

저건 저렇게 하여야 좋고!

순전히 자기 마음에 맞추려고 해요.

 

하나님은 왜? 일을 이렇게 처리하시는 거야!

나 같으면 이렇게 할 텐데!

그래서 만들어 놓은 것이 지금 이 세상이에요.

 

쉬운 예로 환경 보호한다는 것이 그만 환경을 파괴하고 말잖아요.

그냥 가만히 놔두면 되는데!

꼭 손을 대어서 망가 뜨려 놓아요.

 

죄가 뭔 줄 아세요.

하나님이 하신 일에 자기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거예요.

복음이 뭡니까?

“예수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잖아요.

아주 간단해요.

 

그런데 인간들이 신학이라는 것으로 난도질을 해 놓았어요.

민중 신학이니!

해방 신학이니!

생태 환경 신학이니!

개 풀 뜯어 먹는 신학이 다 있어요.

여성 신학도 있어요.

 

거기다가 성화 하여야 한다.

개혁하여야 한다.

초대 교회로 돌아가야 한다.

청교도 신앙을 회복하자고 해요.

청교도 신앙이 뭔 줄 인줄도 몰라요.

아주 빌어먹을 신앙인데도 그걸 회복하재요.

 

예수가 안 믿어지니 온갖 쇼를 하는 겁니다.

예수가 믿어지면 아주 간단한데!

안 믿어지니 방법론을 강구하는 겁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 속엔 예수님 것만 담겨져 있어요.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으니 내 것이 없잖아요.

그러나 성화하여야 한다!

개혁하여야 한다! 는 것 속에는 내 것이 담겨져 있어요.

내가 성화하고 내가 개혁하여야 하잖아요.

그러니 성화나 개혁의 끝엔 자기 흔적이 남는 겁니다.

이게 예수님 홀로 다 이룬 것에 자기 것을 섞고자 하는 악이에요.

 

마귀는 자꾸만 섞으라고 해요.

예수님 공로에다 우리 열심과 충성을 살짝 올려놓으라고 해요.

예수에게만 영광 돌리지 말고 예수 잘 믿어 준 나도 인정해 달라는 겁니다.

복음 열심히 전한 공로도 좀 인정해 달라는 겁니다

 

마귀는 야! 정목사 너 대단하다!

어쩌면 그렇게 복음 잘 전하니!

그래서 복음이 내 소유물인 것처럼 여기라고 유혹해요.

 

여기에 걸려들면 교인들에게 나 같은 목사 만난 것을 축복으로 알어!

이것들아!

날 잘 섬겨!

그런단 말입니다.

마치 복음을 아는 것이 내 능력이라도 되는 줄 꼴값을 떨어요.

교인들에게 내가 아니면 복음을 들을 수 없는 것처럼 공갈을 쳐요.

 

혹시나 제가 복음 복음하면서 이런 뉘앙스를 풍기면 고개를 살짝 갸우뚱 하세요.

경계하세요.

언제 본색을 드러낼지 몰라요.

본색을 드러내면 교인들을 자기 수중에 넣고자 해요.

 

저도 이런 말을 해 두어야 자기 방어가 되지요.

나도 인간인데 어찌 마귀가 가만 두지 않겠어요.

복음 전하니 더 미혹을 할 겁니다.

마귀가 너 대단하다고 살살 띄워서 교주 만들려고 해요.

 

복음이 내 것인 냥! 하면 그 때 야! 정낙원이도 마귀 수중에 떨어 졌구나! 하고 도망가세요.

복음 안에선 나 아니면 안 돼! 라는 것이 없어요.

복음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아무에게도 주어요.

은혜 주시면 그 누구라도 복음을 알아요.

 

전 이걸 알기 때문에 마귀의 꾐에 안 넘어가려고 싸우고 있는 겁니다.

주여! 하면서 말이에요.

마치 수절과부가 밤마다 은장도를 품고 송곳으로 끓어오르는 욕정을 죽이려고 허벅지를 찌르듯이 내 안에 꿈틀거리는 ‘자아’ 라는 이놈에 마귀를 죽이려고 말씀으로 씨름하는 겁니다.

무슨 뜻이지 알겠지요.

 

신앙생활이란? 예수님 흔적에 손상이 가지 않게 싸우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그대로 잘 보존하는 거예요.

그 피가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신다는 것을 믿고 사세요!

제발 뭘 하려고 나대지 말고 예수 믿으세요!

 

나대다 보니까 여러분들이 붙잡고 있는 신앙이 엉망진창이 되는 겁니다.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니고 그래요.

어떤 땐 믿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땐 영 아니에요!

 

꼭 미친년 널뛰듯이 지 마음대로 에요.

미친년하고 널뛰면 허리 분질러져요.

널은 상대방하고 호흡을 맞추어서 장단이 맞아야 되잖아요.

내가 밟아주면 상대방이 올라가고 상대방이 밟아 주면 내가 올라가야 하잖아요.

그런데 미친년은 장단을 모르니 언제 밟을지 모르거든요.

내가 밟으려고 하는데 미친년이 밟아보세요.

그러면 뚝 해요.

어디가 부러졌어요.

널이 부러지든지 허리가 부러지든지 해요.

둘 중에 하나는 부러져요.

 

성화주의가 꼭 미친년 같아요.

어떤 땐 믿음으로 구원 받습니다!

그랬다가 어떤 땐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성화 하여야 합니다! 그래요.

그러니 교인들이 헷갈리는 겁니다.

 

어떨 땐 구원 받은 것 같다가도 어떨 땐 아닌 것 같고!

아침엔 천당인데 저녁엔 지옥인 겁니다.

이는 모두가 성화라는 미친년과 널뛰다가 허리가 분질러져서 그래요.

웃지 말고 잘 새겨들으세요.

제가 과거에 이런 성화라는 미친년과 널뛰기 하다가 죽을 뻔 했거든요.

 

어제 밤에 파스타 라는 드라마를 보는데 아주 명언이 하나 나오더라고요.

이선균이라는 일등 요리사인 셰프가 자기 애인에게 한 말이에요.

요리사는 손님의 입맛과 대화를 하여야지 사장의 혓바닥과 대화하여서는 안 된다고 했어요.

무슨 뜻인가 하면 요리사라고 한다면 음식으로 승부해야지 사장 눈치를 보아선 안 된다는 말이에요.

 

전 그 말을 듣고 이 시대 교회와 목사들에게 적용해 보았어요.

손님을 하나님으로 보고 사장을 교인으로 보았어요.

왜냐하면! 요즘 교회 주인이 교인들이잖아요.

교인들이 자기들 입맛에 맞는 설교를 해 달라고 주문하잖아요.

그러니 하나님은 손님으로 와 계신 겁니다.

하나님이 이 교회 저 교회로 목사들이 어떤 설교를 하는지 간 보러 다니세요.

 

목사가 설교하는 것은 음식을 요리하는 것이에요.

설교는 교회 주인 행세하는 교인들 입맛에 맞추어선 안 되고 하나님 입맛에 맞아야 합니다.

쫓겨나더라도 교인들 귀를 즐겁게 해주려고 해서는 안 된단 말입니다.

교인들이 다 싫다고 하여도 하나님이 굳~ 그러면 끝이에요.

 

목사들이 십자가를 증거하지 않고 성화를 외치는 것은 교인들이 좋아하기 때문이에요.

교인들이 성화를 좋아하는 것은 자기 흔적이 남기 때문이에요.

나도 뭔가 해 냈다는 뿌듯함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자기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것은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 행세를 하는 거예요.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것도 하나님 같이 신이 되고자 한 겁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자기 입맛에 맞는 감사거리들을 쭉 만들어 놓은 겁니다.

자기가 신이 되어서 이건 감사! 저건 아니고 그런단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어요.

 

잘 될 때나!

안 될 때나!

슬플 때나!

기쁠 때나 감사하라고!

살아도 감사!

죽어도 감사하라고 했어요.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나의 기도를 들어보세요.

 

삼상 2:6-7=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신대요.

여호와는 가난케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신대요.

여호와는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신대요.

 

한 마디로 하나님 자기 마음대로 라는 겁니다.

인간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라는 겁니다.

어떤 일이 닥치든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란 말입니다.

 

이게 은혜를 받으니 깨달아지더라고요.

과거 율법 아래서 열심히 특심 할 때는 이런 말씀들이 관념이었어요.

그냥 성경엔 이런 말씀도 있구나! 그랬어요.

그런데 은혜가 임하고 복음이 깨달아지니 이게 다 하나님이 나에게 행하고 계시다는 것을 안 겁니다.

 

그래서 전 무슨 일을 만나면 시편 23편을 잘 묵상을 해요.

지금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인도하시고 계시는구나 생각해요.

좋을 땐 아! 하나님이 나를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구나!

어려울 땐 아! 주께서 나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하시고 계시구나 를 알아요.

 

과거 율법 아래 있을 땐 목자가 푸른 초장 맑은 시냇물 가로만 인도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감사 거리를 만들어 놓고 살았어요.

목사들이 그렇게 가르쳤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헌금 봉투에 감사의 제목을 쓰는 모습으로 나타난 겁니다.

그런데 이게 죄라는 것을 은혜를 입고 나서 알았어요.

 

은혜를 입고 나니 아! 목자가 나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인도한다는 것을 알았어요.

아! 내 인생이 목자의 손에 붙잡혀 있구나!

예수라는 목자의 올무에 걸려서 도망치지 못하겠구나!

그래서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나 홀로 두면 도망 갈 텐데 목자가 강아지 목줄 잡듯이 나를 잡고 있으니 안심인 겁니다.

 

성도는 실패 할 수가 없어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예! 만 된다는 것도 이 때 알았어요.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된다는 말은 모든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이란 말이에요.

그러니 어떤 인생이든 예수 안에선 성공인 겁니다.

 

이 사실을 알게 하시려고 내가 나를 지킬 수 없는 환경으로 몰아넣고 내 생명을 하나님이 붙잡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려고 그러는구나!

나는 망해도 망할 수 없는 운명이구나! 를 알았어요.

 

바울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의 의미도 이 때 알았어요.

그 전엔 추상적으로 그냥 립씽크 였어요.

말씀이 내 신앙생활 속에 양념처럼 속속들이 배지 않고 지식으로만 겉 돈 겁니다.

말씀은 많이 아는데 전부 죽은 말씀이었어요.

 

그러나 지금은 말씀이 살아서 움직여요.

내 언행심사 모두를 해부하고 다녀요.

내 삶 모두를 간섭하고 있어요.

 

이게 깨달아지니 바울이 우겨쌈을 당하여도 당하지 않고 꺼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넘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이 이해가 되는 겁니다.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는 것이 믿어지더라고요.

결국 믿음에 문제구나!

 

신앙생활은 믿음에 눈으로 보느냐!

육신의 눈으로 보느냐! 의 싸움이에요.

믿음에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감사가 되어요.

그러나 육신의 눈으로 보면 만사가 불평이에요.

 

구약 이스라엘이 광야 40년을 헤맬 때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에 눈으로 보았어요.

그래서 가나안에 들어갔어요.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환경만 보았어요.

그러니 평생 불평과 원망만 하다가 죽은 겁니다.

 

지금 우리는 광야생활을 하고 있는 겁니다.

구약 이스라엘이 걸었던 광야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나 동일해요.

인간이 불평하는 것은 다 육신의 문제 때문입니다.

광야에서도 육신의 문제로 죽네! 사네! 했고 지금도 육신의 문제로 죽네! 사네! 해요.

광야에서도 눈만 뜨면 먹는 것 투정했고, 지금도 먹고 사는 일로 투정해요.

 

육신에게 눈을 떼지 않는 한 그 어떤 환경에 처하여도 불평불만은 나오게 되어 있어요.

옛 말에 말 타면 종(從) 부리고 싶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란 하나를 가지면 둘을 갖고 싶다는 말이에요.

걸어가던 놈을 말에 태우면 그 다음에 말고삐 잡고 수종들어 줄 종을 원해요.

 

인간의 욕심은 무저갱처럼 밑 빠진 독이에요.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아요.

항상 다고! 다고! 해요.

 

이것 주면 저것 달라고 하고 저것 주면 이것 달라고 해요.

백화점에 가서 옷을 보세요.

다 사고 싶지요.

백화점 몽땅 들고 와 보세요.

다른 백화점 것 또 사와야 해요.

 

제가 결혼하고 살림을 할 때 사글세 집에 살았어요.

그 때 가장 부러운 것이 전세 집에 사는 사람이었어요.

월급도 많지 않은데 매달 월세를 내는게 그렇게 아깝더라고요.

그래서 야! 전세로 살면 매달 월세는 안 나가니 얼마나 좋을까 그랬어요.

그러다가 단칸방 전세를 살았어요.

 

그런데 이번엔 두 칸 짜리 가고 싶어요.

그래서 살림을 늘리면 그 다음엔 자기 집 가지고 있는 사람이 부러워요.

아! 하나님 나에겐 언제 집을 주시렵니까?

그러다 집을 사면 이젠 평수 넓은 것 찾아요.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처음 교회를 개척하면 가족들과 예배드려요.

그럴 땐 주여! 한 명이라도 보내 주세요.

한 가정 와 보세요.

주여! 열 명을 주세요.

열 명을 줘 보세요,

백 명~ 천 명~ 만 명,,,,끝이 없어요.

 

대형교회 목사들에게 물어 보세요.

만족하십니까?

그러면 아직도 배가 고프다고 해요.

어디서 들은 것은 있어 가지고!

 

전도 좋아하시네요!

자기 욕망을 채우고 싶은 겁니다.

전도는 허울이고 교인들에게 세계 최고가 되고 싶어하는 자기 욕망을 채우고 싶은 겁니다.

 

사울 왕처럼 나 이렇게 살았다! 라고 자기 전적비(戰績碑)를 남기고 싶어하는 겁니다.

결국 자기 이름을 남기고자 사는게 인간이에요.

주의 이름 앞에서 자기 이름은 삭제 당하여야 하는데 우린 주의 이름은 지우고 자기 이름을 남기고 있어요.

 

사람은 말이죠.

늘 뭔가 채우고자 해요.

사람마다 빈자리가 있어요.

드라마를 보면 미망인이 죽은 남편 사진을 보고 원망하잖아요.

남편이 갑자가 자기에게서 빠져 나가니 허전한 겁니다.

 

남편이 있을 땐 몰랐는데 죽고 나니 그 자리가 뻥~ 뚫린 겁니다.

그래서 사진 부여잡고 울면서!

여보! 나 허전해!

당신이 없는 이 세상은 공허해!

왜? 먼저 갔어!

나 혼자 어떻게 살란 말이야!

 

그래서 그 빈자리를 이젠 자식으로 채웁니다.

아들을 남편삼아 빈자리를 겨우 겨우 채우는가 싶은데 이 새끼가 장가를 갑니다.

그러면 또 허전 한 겁니다.

내가 저를 어떻게 키웠는데!

나쁜 놈!

그래 결혼하고 나니 저 마누라만 보이고 어미는 안중에도 없지!

에이! 나쁜 놈!

 

급기야는 며느리에게 아들을 빼앗겼다고 생각해서 며느리를 구박하잖아요.

저 여우같은 년이 내 아들을 홀렸어!

저 년이 내 아들을 빼앗아 갔어!

그러면서 온갖 트집을 잡아서 구박을 해 대잖아요.

 

그러다가 자식이 며느리 역성이라도 들어주면 방성대곡합니다.

또 다시 신랑 사진 부여잡고 억울하다고 합니다.

여보! 저 새끼도 떠났어!

새끼 키워 봐야 다 소용 없어!

여보! 저 새끼가 지금 날 무시해!

당신 봤지!

지 마누라 편을 들고 있어!

난 서러워서 못살아!

왜? 일찍 가서 날 이렇게 외롭게 만들어!

그래서 울면서 죽은 신랑을 끌어 올려서 화풀이라도 해야 직성이 풀려요.

 

결국 제 정신을 찾으면 이젠 믿을 놈 없다!

오로지 돈 밖에 없다!

돈!

 

돈이 모여 보세요.

또 빈자리가 생겨요.

이젠 돈으로 빈자리를 채우려고 하는 겁니다.

사치로 채우고!

돈 많은 사모님으로 채우고!

친목회로 채우고!

하지만 이 놈에 몽뚱아리는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아요.

이게 인간이고 인생이에요.

 

도종환 시인이 이를 어떻게 알았는지 시를 썼어요.

이 분이 신자인줄은 모르지만 암튼 부인을 떠나보내고 이 사실을 안 것 같아요.

한 번 음미 해 보세요.

 

붙잡아 둘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도종환)

 

분명히 사랑한다고 믿었는데

사랑한다고 말한 그 사람도 없고

사랑도 없다

 

사랑이 어떻게 사라지고 만 것인지

골똘히 생각하는 시간에도

사랑하는 사람은 점점 멀어져 가고

사랑도 빛을 잃어간다

 

시간 속에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은 없으며

낡고 때 묻고 시들지 않는 것은 없다

 

세월의 달력 한 장을 찢으며

벌써 내가 이런 나이가 되다니

하고 혼자 중얼거리는 날이 있다

 

얼핏 스치는 감출 수 없는 주름 하나를 바라보며

거울에서 눈을 돌리는 때가 있다

살면서 가장 잡을 수 없는 것 가운데 하나가

나 자신이었다

 

붙잡아 두지 못해

속절없이 바라보고 있어야 했던 것

흘러가고 변해 가는 것을

그져 망연히 바라보고 있어야 했던 것이

바로 나 자신이었음

늦게 깨닫는 날이 있다

 

시간도 사랑도 나뭇잎 하나도 어제의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늘 흐르고

쉼 없이 변하고 항상 떠나간다

 

이 초겨울 아침도

첫 눈도

그대 사랑도

붙잡아 둘 수 있는 것은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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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떠나간다는 겁니다.

결국 인간은 붙잡을 것이 없다는 겁니다.

붙잡은 줄 알았는데 붙잡혀지지 않아요.

결국 빈자리만 덩그러니 남아서 가슴이 휑~하니 찬바람이 부는 겁니다.

 

몇 일 전에 이남이란 가수가 폐암으로 죽었지요.

그가 부른 노래가 울고 싶어라 에요.

 

울고 싶어라!

울고 싶어라 이 마음!

사랑도 가고

친구도 가고 모두 다 가고

왜 가야만 하니!

 

모두가 가고 없어요.

왜? 빈자리가 자꾸만 많아지는 거야!

다 떠나면 나는 어떻하라구!

채워도 시원치 않을 판에 자꾸만 비어가요.

그래서 울고 싶은 겁니다.

 

아! 울고 싶어라!

날 좀 사랑해줘!

나 허전해!

하나님 저 좀 어떻게 좀 해 주세요!

 

그러니 우울하고 외로운 거예요.

술에 취해 보아도 달랠 수가 없고,

춤을 춰도 달래지지 않아요.

마음은 왜? 이러 허전한 건가요.

이 모두가 변하고 쇠하여질 세상 것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은 수가성 여인을 통하여 이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물은 자꾸만 갈증을 유발시킨다고 했어요.

그래서 세상 남편을 갈아치우라고 합니다.

 

수가성 여인도 목마름을 채우고자 물 길러 왔어요.

뭔가 텅 빈 빈자리를 채우려고!

갈증을 해소하고자 물 길러 왔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찾아오신 겁니다.

 

찾아와서 하시는 말씀이 네가 갖고 있는 다섯 남편은 너의 빈자리를 채울 수 없다고 알려줍니다.

빈자리는 겉에서 채우는 것이 아니고 안에서 채워져야 한다고 합니다.

세상 것으로 채우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것으로 채워야 한다고 합니다.

그 빈자리를 예수님이 채워주신다고 오신 겁니다.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같이 일하시지 않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사로의 죽음은 하나님의 계획된 것임을 살펴보았습니다.  

나사로와 그의 동생들은 죽지 않기를 소망하였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소원과 상관없이 죽도록 버려두신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마르다와 마리아 두 자매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인정머리 없이 죽어 가는 나사로를 살려 주시지 않고 일부러 죽게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나사로를 죽게 함으로서 나사로 속에 있는 어두움을 몰아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어둠이란? 아담의 생명이고 세상 가치관이에요.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육신이라는 생명이에요.

아담의 생명은 흙에서 났기 때문에 흙에 것으로 채워야 해요.

 

그런데 인간은 탐욕이 무저갱이라 채울 수가 없어요.

탐욕은 상대적으로 찾아와요.

누가 좋은 옷 입은 것을 보면 나도 입고 싶어요.

나도 저 옷 입고 싶은데!

형편이 안 되면 나는 왜? 가난 할까?

남이 좋은 차타면 나도 타고 싶어요.

 

남이 좋은 집에 살면 나도 살고 싶어요.

난 아니야!

그런 말 마세요.

지금 형편이 그렇지 않으니 그런 말을 하는 겁니다.

형편이 되어 보세요.

나도 그래요.

너도 나도 다 욕심이 있어요.

 

인간이란 상대방과 비교해서 결핍을 느껴요.

부자와 결혼한 친구를 만나면 갑자기 자기가 불쌍해져요.

난 어쩌다 이런 신랑을 만났을까?

신랑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어요.

평상시엔 신랑이 좋았는데 돈 많은 부자에게 시집가서 잘 사는 친구를 보고 난 후 돈이 없는 신랑이 갑자기 미워요.

 

이게 모두가 어둠이 주는 공허함이에요.

이걸 빼내지 않으면 백약이 무효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을 어두움의 세력으로부터 빼내시는 일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구약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하나님은 참으로 이상한 분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면서 좋은 길로 인도하시지 않아요.

꼭 이상한 곳으로만 인도하세요.

넓은 길을 놔두고 좁은 길로 인도했다니까요.

무슨 매조키스트도 아니고!

 

사람이 가장 싫어하는 곳을 택해서만 인도하셨어요.

일부러 인간들이 불평하고 원망할 수밖에 없는 곳으로만 인도 했어요.

그리고는 인간들에게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원초적인 먹고 마시는 문제를 가지고 시험하셨어요.

취미가 고약해요.

 

하나님은 왜? 인간들이 가장 싫어하고 피하고 싶은 환경으로만 인도하시는 것일까요?

여기에 신자들이 시험에 들게 됩니다.

이 고약한 하나님의 심보를 이해하지 못하면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한 방법으로 인도해 가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지옥 같은 환경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지옥 같은 환경에 집어넣고 뭘 할 것이 있어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 빼내서 삶에 가치관을 바꿔 버립니다.

애굽에서는 떡으로 산다고 생각하였지만 광야에 나와 보니 사람이 사는 것은 떡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나를 주신 겁니다.

만나는 하늘로서 내렸어요.

이는 은혜에요.

하나님이 살게 해 주시는 겁니다.

이걸 믿어야 해요.

그래서 가장 열악한 환경 속에 집어 놓고 환경 보지 말고 하나님 약속 믿고 살라고 가르치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 나와서도 자기 힘으로 살고자 하다가 망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겐 의지할 만한 자기 힘을 빼 내시는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눈에 보이는 힘을 없애 버리지 않는 한 항상 그것을 의지하게 되어 있어요.

 

세상의 힘이란?

재물이고,

명예이고,

권세에요.

육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이것을 절대로 거부하지를 못해요.

아무리 이런 것을 버리라고 하여도 버릴 수가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해요.

 

요일 2장 15-16절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의 것은 전부가 아버지께로 온 것이 아니므로 사랑치 말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 성도에게 있어 하나님의 원수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밝혀졌어요.

이 세상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고 세상을 지향하고자 하는 마음이에요.

 

그럼에도 성도들이 롯의 처와 같이 교회에 와서도 세상 것을 뒤돌아보고 있어요.

왜? 이 세상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자유롭지가 못합니까?

이 모두가 그 마음이 이 세상의 어두움의 사고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어두움의 사고를 버리지 않는 한 항상 하나님의 공격 목표가 됩니다.

하나님이 얍복강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그러나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몰라요.

세상에서 잘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라는 것을 몰라요.

 

약 4장 4절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에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세상 것을 얻자면 세상과 사랑해야 얻어요.

세상과 사랑하면 하나님과 멀어져요.

하지만 우리 본성은 세상 것이 좋아요.

자연히 세상 것을 좇아가게 되어 있어요.

 

애굽적인 사고란? 신약 적으로는 마귀의 생각이라는 말입니다.

마귀의 사고란?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하던 사고입니다.

떡을 가지라는 것이고,

세상에서 성공하라는 것이고,

세상의 권력을 잡으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세상에서 영웅이 되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성도가 이러한 사고를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뜻과 소원대로 움직이시지 않아요.

이 사실을 모르면 시험에 들게 됩니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수많은 것들이 우리의 생각과는 반대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원치 않는 일들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잘하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육이 그렇게 생각하게 하는 겁니다.

이게 어둠의 사고에요.

제자들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어둠의 사고를 뽑아내고자 하신 겁니다.

 

막 4장 36-40절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어느 날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갑니다.

그런데 갑자가 광풍이 불어서 배에 물이 들어와서 침몰하기 직전입니다.

제자들은 혼비백산하면서 물을 퍼낸다고 난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풍랑 속에서 잠을 자고 있어요.

세상에! 그 경황에 잠이 옵니까?

아니! 염치 있는 분이라면 그 요란으로 일어나서 애들아! 난 몰랐구나!

어제 밤새워 기도 했더니 피곤해서 깜빡 잠이 든 것 같구나!

미안하다!

그러면서 손 걷어 부치고 같이 물을 퍼내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고 쿨~쿨~ 잡니다.

제자들이 참다가 참다가 더는 참지 못하고 예수님을 깨웁니다.

선생님! 좀 일어나 보세요.

아니 이런 판국에 잠이 옵니까!

참 해도 해도 너무 합니다! 라고 타박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일어나셔서 하는 말씀이 가관입니다.

에라이~ 이 믿음이 없는 새끼들아!

왜? 잠자는 사람을 깨우고 지랄이냐! 라고 합니다.

아니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이게 말이나 됩니까?

아무리 선생이라고 하여도 이건 아니지요.

 

이에 제자들이 질세라 아니 이게 눈에 안 보입니까?

지금 파도가 쳐서 배에 물이 들어오는 게 안 보입니까?

배가 침몰할 위기인데!

잠을 잤으면 미안하다고 해야지!

왜? 우리더러 욕을 합니까? 욕을 하긴!

에이~ 씨! 아무리 예수님이지만 이건 너무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자 예수님이 바다를 향하여 야! 잠잠해라! 그럽니다.

그리고 바람을 꾸짖습니다!

이제 그만 불고 뚝~ 그럽니다.

 

갑자기 바다가 조용해집니다.

제자들의 눈알이 튀어 나왔다가 들어가면서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습니다.

아니! 세상에 이럴 수가!

이 양반이 도대체 누군데 바람이 말을 듣느냐!

선생님! 선생님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 그럽니다.

에이~ 이 등신들아!

내가 바람을 창조한 하나님이다!

이놈들아!

 

너희들이 내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풍랑이 일어도 나랑 같이 잠을 자야지!

그래야 날 믿는다고 할 수가 있지 않겠느냐!

그런데 너희 놈들은 날 따라다니면서도 날 믿지 않고 있잖아!

그러니 배에 물이 들어온다고 난리를 치지!

 

지금 우리도 사는게 힘들다고 소리치는 것이 제자들과 똑 같아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르칩니다.

내가 너희를 지키니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면서 종용히 가르칩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면서도 가르칩니다.

죽는다고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다시 살려 낼 테니!

성령이 오면 내가 한 말들이 생각나고 믿어질거나!

이 말이 믿어지면 내가 너희들 속에 있다는 것을 알아라!

앞으로 내가 떠나면 너희들 인생에 이런 일들이 닥칠 거다!

죽음에 위협과 온갖 핍박들이 닥칠 것이다!

그러면 겁내지 말고 내가 너희랑 함께 있다는 것을 잊지마라!

내가 이걸 가르쳐 주려고 풍랑을 좀 일게 했단다!

이제 알겠느냐!

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알게 하고 있어요.

제자들이 예수님과 다니면서도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모르고 있으니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일부러 풍랑이 일게 하셨고 그 풍랑을 잔잔케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예수를 따르다가 죽을 고비가 닥치더라도 그 일로 인하여 죽겠다고 호들갑을 떨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 나사로를 가지고 또 보여주는 겁니다.

나사로의 죽음이 죽음이 아니고 사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겁니다.

너희들도 나사로처럼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니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서 영광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는다는 말은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말입니다.

알다시피 나사로는 예수님께 사랑을 입은 자에요.

요즘말로 은혜를 받은 성도라고요.

그런데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고 기뻐한단 말입니까?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항변할 수가 있어요.

어떻게 사랑하는 자가 죽었는데 기뻐 할 수가 있느냐? 라고!

그러나 성경의 증거는 나사로가 죽음으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았다고 하십니다.

 

자 이걸 이 시대 언어로 말해 봅시다.

이 시대에 맞게 표현을 한다면 성도들이 나사로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자들이에요.

그렇다면 나사로가 죽는다는 것은 성도가 세상으로부터 실패한다는 말입니다.

 

이를 직역하면 하나님은 성도들이 망하고 죽을 때 기뻐하신다는 말입니다.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과는 너무나도 달라요.

우리는 병을 고쳐주는 하나님을 알고 있지 죽이는 하나님은 몰라요.

 

지금 예수님이 나사로에게 행하는 것이 사랑이에요.

여전히 예수님은 나사로를 사랑하고 있어요.

그래서 나사로를 죽인 겁니다.

 

자 이것을 우리 삶에 적용해 봅시다.

이 시대 사람들이 무엇에 쫓깁니까?

모두가 살기 어려워서 죽겠다고 하지요.

한마디로 돈이 없어서 죽겠다고 아우성입니까?

 

어느 시대고 돈이 행복의 척도가 되었어요.

돈 많으면 행복하고 돈 없으면 불행하다는 생각했어요.

그래서 부자가 되고 싶은 겁니다.

부자에게 시집가고 싶고 부자에게 장가가고 싶은 겁니다.

 

돈 때문에 자살을 합니다.

돈이 생명이에요.

돈이 죽음처럼 사람을 괴롭혀요.

 

돈을 누가 두려워합니까?

돈의 위력에 대하여 잘 아는 사람이겠지요.

돈을 누가 목말라 합니까?

돈을 잘 아는 사람이지요.

 

어른과 어린아이 둘이서 누가 돈에 목숨을 겁니까?

어른이지요.

어른이란? 세상에 대하여 많이 안다는 겁니다.

세상을 많이 살았으니 세상의 힘을 잘 알아요.

세상은 돈으로 사는 곳이란 것을 너무도 처절하게 경험하기 때문에 돈에 위력을 잘 알아요.

 

그래서 어른들은 눈만 뜨면 돈! 돈! 돈! 하면서 돈에 미쳐서 돌아버린 인생을 살아요.

돈과 함께 울고!

돈과 함께 웃고!

돈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해요.

 

어른들은 돈에 목말라 있어요.

돈이 생명이에요.

돈이 시키면 뭐든지 다해요.

지나가는 여자도 돈을 준다고 하면 다 벗어요.

돈 앞에선 체면도 인품도 없어요.

 

하지만 어린아이들은 돈을 몰라요.

그러니 돈이 두렵지가 않은 겁니다.

어린 아이는 엄마 없으면 두려워해도 돈 없다고 해서 두려워하지 않아요.

어린아이는 엄마의 사랑을 먹고 살고 어른은 돈의 사랑을 먹고 살아요.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백성들을 돈과 상관없는 어린아이로 만드는 작업을 하시는 겁니다.

세상의 힘이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만들고자 해요.

이름하여 목숨을 바꿔치기 하는 겁니다.

 

세상 것에 휘둘리는 목숨을 버리고 세상 것을 초연하는 목숨으로 바꿔주시고자 해요.

그래서 나사로를 죽였다 살려내는 방식으로 일을 하는 겁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담으로부터 받은 목숨으로는 안 되어요.

 

아담의 목숨은 흙에서 났어요.

그러므로 흙을 거부하지 못해요.

 

어떤 분에 저에게 목사님 666 표를 어떻게 하면 안 받습니까? 라고 물어요.

아니 그걸 어떻게 안 받습니까?

그것 안 받으면 먹고 살지를 못하는데!

집사님은 밥 안 먹고 살 수 있어요.

없지요.

그럼 받아야지요.

그것도 선착순으로!

 

그럼 어떻게 하는데요.

인간의 방법으로는 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알아서 해 주실 겁니다.

믿으세요.

 

예수님이 그러셨지요.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그러니 어떤 목사들은 가루가 되면 들어갈 수 있다고 합니다.

교인들을 신, 구약 말씀이라는 맷돌에 집어넣고 박박 갈아서 가루를 만들어야 한다고 해요.

 

이건 교인들을 가루 만들라는 말이 아니에요.

성경을 문자로 보니 이따위 말 같지 않는 소리를 하는 겁니다.

말씀에 무식하니 얼굴 빛 하나 변하지 않고 이런 말을 뻔뻔스럽게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이 근심이 가득해서 그럼 누가 천국에 갑니까? 물으니!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 할 수 있느니라 고 하잖아요.

인간 쪽에선 방법이 없어요.

 

맷돌에 갈아서 가루를 내 보세요.

훅 불어 버립니다.

그런데도 교인들은 이런 설교를 들으면 은혜 받았다고 해요.

참으로 신기해요.

구원엔 방법이 없어요.

그냥 은혜로 주어져요.

 

가루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은 한 알갱이라 잃어버린바 되지 않고 다 알아서 구원해 주신다는 약속을 믿으세요.

약속만 있으면 하나님이 다 살려줘요.

다른 말로 하나님의 자식은 하나님이 어떻게 하든지 다 천국으로 인도해요.

 

학교에 자식이 갔는데 그만 태풍이 붑니다.

우산도 없어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부모가 있는 아이라면 그냥 학교에서 놀면 되어요.

놀다 보면 부모가 찾아 와요.

아이를 보호하는 것은 부모이지 그 아이가 아니에요.

아이가 비록 독립적인 자아로 살지만 부모의 도움으로 살고 있어요.

 

그러므로 아이의 생명은 부모 손에 달려 있는 겁니다.

아이는 이런 것을 부모로부터 배워서 알아요.

부모가 자신을 지켜준다는 것을 안다고요.

그러니 부모만 있으면 아이는 어떤 환경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요.

부모가 찾아온다는 믿음이 있는 아이는 두려워하지 않아요.

 

하지만 자기를 지켜주는 부모가 없는 아이는 두렵겠지요.

스스로 지켜야 하니 항상 불안해요.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는 이방인을 고아로 비유해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다시 온다고 했잖아요.

내가 다른 보혜사가 되어서 너희들 안에 들어와서 지켜주겠다고 약속 했어요.

약속대로 성령이 오셨잖아요.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에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모두가 하나님이세요.

이 세 분은 하나에요.

성부가 계신 곳에 성자도 계시고 성령도 계세요.

성자가 계신 곳에 성부도 계시고 성령도 계세요.

성령이 계신 곳에도 성부와 성자도 계세요.

 

이건 마치 성도 안에 성령이 계신 것과 성령 안에 성도가 있는 것과 같아요.

성령이 와 계시면 예수님도 계신 거예요.

그러니 성령을 받은 성도는 예수님이 와 계신 것이나 동일해요.

성령을 받으면 이게 믿어져요.

 

그렇다면 666이 나타나든지 777이 나타나든지 걱정하지 마세요.

성령이 있는 성도는 설령 천사들이 실수를 해서 지옥에 갔다 넣어도 찾아내요.

너 왜? 거기 있는데 하고 찾아낸다고요.

 

누가복음 15장에 잃은 양을 찾는 비유가 있지요.

주인의 양을 점검해 보니 한 마리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찾으러 나섰어요.

산과 들로 손과 발에 가시에 찔려 가면서 양을 찾고 또 찾습니다.

 

그런데 양은 자기가 잃어버려진 줄도 모르고 놀고 있어요.

목자에게 돌아갈 생각도 없어요.

그냥 난 자유인이다 하고 놀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목자가 찾았어요.

그리고 울러 매고 집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이건 구원이야기에요.

 

우린 다 잃어버려진 양들이었어요.

우린 예수가 누군지 몰랐어요.

예수 믿을 마음도 생각도 없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예수를 믿어지게 만든 겁니다.

 

우리가 원해서 구원이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구원이 되었어요.

구원을 내가 지키려고도 하지 마세요.

구원하신 분이 지켜주세요.

그러니 구원에 다하여 우리가 신경 쓸 것이 없어요.

 

여러분은 여러분 자식이 학교에서 안 돌아 왔는데 가만히 있나요.

육신의 부모도 찾고 또 찾고 기어이 찾아내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어찌 그냥 두시겠어요.

제발 믿으세요.

그냥 아버지가 찾아 주신다고 믿고 사세요.

하기사 이 믿음도 받아야 믿어지지요.

 

여러분 우린 세상 것을 이길 능력이 없어요.

이 몸으로는 못 이겨요.

그래서 하나님은 몸을 바꿔주는 겁니다.

 

떡으로 사는 몸에서 말씀으로 사는 몸으로 바꾸어 주는 일을 단행하시는 겁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게 해 주신단 말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가치관을 바꿔주세요.

복음을 받으면 가치관이 바뀌어요.

 

성령이 임하면 세상에서의 실패가 실패가 아님을 깨달아요.

육신의 죽음이 죽음이 아니란 것도 알아요.

세상은 잠시 스쳐가는 정거장과 같다는 것도 알아요.

이 세상은 나그네 길이란 것도 알아요.

그러니 세상에 아등바등할 필요가 없지요.

 

우린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에요.

흙에 속한 땅강아지가 아니란 말입니다.

뱀에 후손이야 흙에 기운으로 살지만 우린 하늘에 기운으로 사는 자에요.

하늘에서 내려주는 만나를 먹고 산단 말입니다.

성도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 밖에 사람입니다.

 

이를 알게 하시려고 오늘도 예수라는 만나를 내려 주셨어요.

만나 라는 말씀을 주셨어요.

만나를 먹은 사람은 예수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되어요.

예수 안에서 바로 보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풍파도 주님 손에 있다는 것을 알아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처럼 풍랑 이는 세상 속에서도 아우성치지 않고 살수가 있는 겁니다.

믿음으로 바라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됩니다.

사나 죽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란 것이 깨달아져요.

 

부디 믿음에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은혜가 임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너머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영안을 열어 주옵소서. 우린 이미 세상을 이긴 자라는 것도 알게 하옵소서. 세상에 살 되 세상 것에 휘둘리지 않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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