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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성경강해)75강. 하나님의 장자 만들기 (창 44:1-34)

by coroa 2021. 9. 27.

 

 

딤후 3장 12-15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75강. 하나님의 장자 만들기 (창 44:1-34)

-.정낙원 목사

 

 

 

옛말에 때린 사람은 기억을 못하여도 맞은 사람은 기억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요셉과 그 형제들이 그러합니다.

요셉은 매를 맞은 사람이고 형제들은 때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약 20년 후에 만나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처음부터 형제들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형제들은 요셉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버린 동생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였는데 그 예수가 만유의 주라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요셉이 자기를 버린 형제들을 기근 속에서 살려내는 것은 예수님께서 자기를 죽인 유대인들을 구원해 내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요셉과 그 형제들의 이야기는 예수님과 자기 백성들 구원하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앞으로 기근이 얼마나 더 오래 지속이 되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에 살고 있는 그의 형제들은 모릅니다.

양식이 떨어질 때마다 매번 애굽으로 양식을 사러 내려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또한 기근 속에서 양식 값은 부르는 게 값이기 때문에 야곱의 가족들이 그만한 값을 지불할 능력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어떻게 하든지 가족들을 애굽으로 이주해 오기를 바랐습니다.

그러자면 애굽으로 내려올 합당한 핑계거리가 있어야 합니다.

알다시피 야곱은 산전수전을 겪으면서 가나안으로 돌아 왔고 정착을 하였습니다.

야곱은 약속의 땅을 떠나면 망하게 된다는 것을 학습으로 배워서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근 속에서도 가나안을 떠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야곱의 마음을 요셉은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 올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갑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야곱을 인도하는 방식이어야 합니다.

 

오늘은 요셉이 어떤 방식으로 야곱을 애굽으로 내려오게 하는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가나안에서 기근을 당하고 살고 있는 그의 가족들을 양식이 있는 애굽으로 내려오게 하는지에 대하여 살펴볼까 합니다.

 

이러한 프로젝트 이름을 '하나님의 장자 만들기' 라고 합니다.

 

요셉은 처음 형제들이 양식을 사러 왔을 때 정탐꾼이라는 죄목을 씌워서 사흘 동안 감옥에 가두는 일을 하였습니다.

사흘 후에 시므온 하나만 볼모로 잡아 놓고 다른 형제들은 풀어 줍니다.

그리고는 너희가 정탐꾼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 하려면 여기에 오지 않은 막내 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베냐민을 데리고 오면 너희가 정탐꾼이 아니라는 것을 믿고 시므온을 풀어주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형제들 자루에 양식을 가득히 채우고 돌려보냅니다.

요셉은 종들에게 형제들의 자루에 양식을 채울 때 그들이 가지고 온 돈도 그대로 넣어주라고 합니다.

 

형제들이 시므온을 두고 가나안으로 올라가는 길에 객점에서 자루를 풀어 보니 돈이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이에 형제들이 두려워 떨면서 올라갔습니다.

가나안에 올라가 아비 야곱에게 애굽에서 있었던 일들을 소상하게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야곱은 졸지에 아들을 잃게 생겼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베냐민도 내려가면 잃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베냐민은 안 내려 보내겠다고 합니다.

 

기근은 계속 되었습니다.

처음 사온 양식은 다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야곱이 자식들에게 뭘 꾸물거리고 있느냐,

빨리 애굽에 내려가서 양식을 사오지 않고 뭐하느냐고 책망을 합니다.

 

이에 그 자식들이 베냐민을 데리고 가지 않으면 양식을 구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애굽의 총리로 있는 사람이 다음번에 올 때는 반드시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야곱은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낳은 두 자식 중에서 요셉은 이미 잃어버렸고 베냐민만 남았는데 이 자식마저 잃게 될까봐서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야곱의 아들들은 애굽의 총리와 약속을 하였기 때문에 그냥 내려 갈 수가 없고 반드시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 한다고 아비를 설득합니다.

서로 된다, 안 된다 하면서 시간을 허비하다가 정말로 양식이 더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야곱은 자식들의 고집이 너무도 완고하니까 마지못해서 베냐민을 데리고 가도록 허락을 합니다.

그리고는 애굽의 총리의 마음을 사게 하려고 가나안의 각종 예물들과 맛난 음식들을 만들어서 자식들 손에 들려서 내려 보냈습니다.

 

요셉은 두 번째 만난 형제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를 합니다.

그러자 형제들은 지레짐작으로 이건 지난번에 양식 값을 도로 가지고 간 것 때문에 부른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가 우리를 옥에 가두려고 부른 것이라고 생각하고 두려워합니다.

 

두려운 나머지 초대 받고 가서는 먼저 번의 곡식 값에 대한 것을 자초지종을 이야기합니다.

지난번에 자신들은 분명히 곡식 값을 다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돈이 어떻게 자기들 자루에 들어갔는지 도무지 이해 할 수가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자신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독실한 신자이기 때문에 훔친 것이 아니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자 요셉이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니까 두려워하지 말라고 안심을 시킵니다.

그리곤 그들을 자신의 식탁에 초대를 합니다.

요셉은 그 일은 다 잊고 차려진 음식을 먹고 마음을 유쾌케 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형제들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도 자기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종들에게 시켜서 형제들의 자루에 곡식을 가득 담아서 보내라고 합니다.

이 때 요셉은 종들을 시켜서 베냐민의 자루에 요셉의 은잔을 넣어두라고 합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애굽을 떠나 가나안으로 올라갑니다.

형제들은 사로 이야기하면서 지난번에는 시므온이 볼모로 잡혀서 올라가는 길이 무거웠는데 이번은 모두가 다 올라가게 되었으니 마음이 가볍다고 하면서 웃으면서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 종들을 시켜서 은잔이 없어졌다고 하면서 그 형제들을 잡아 오라고 합니다.

잠시 후에 요셉의 종들이 쫓아와서 너희들이 우리 주인의 집에서 식사를 하고서는 돌아 갈 때 너희들 중에 누군가가 주인이 아끼는 은잔을 훔쳐갔다고 합니다.

그 잔은 주인이 점을 칠 때 쓰는 아주 중요한 잔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형제들이 우리는 결단코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고 극구 부인을 합니다.

모두가 손사래를 치면서 우린 절대로 그런 일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만약에 우리 형제들 중에서 그런 일을 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요셉의 종이 될 것이라고 힘주어서 말을 합니다.

 

이에 종들이 그럼 좋다 각자의 자루를 검사해 보자고 합니다,

르우벤서부터 차례로 순서대로 검사를 해 가기 시작합니다.

차례대로 검사해 가자 은잔이 안 나오니까 서로 쳐다보면서 우린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을 합니다.

 

그런데 맨 마지막 베냐민의 자루에서 요셉의 은잔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요셉의 형제들은 기겁을 합니다.

베냐민이 종으로 잡히게 생겼습니다.

베냐민이 올라가지 않으면 야곱이 난리를 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요셉의 종들이 화를 내면서 너희가 어떻게 악을 선으로 갚느냐,

우리 주인은 너희를 선대하여서 보냈는데,

너희는 어찌하여 우리 주인에게 악을 행할 수가 있느냐고 합니다.

 

종들이 그들을 다 붙잡아서 요셉 앞으로 데리고 갑니다.

형제들이 전부 땅에 엎드려서 요셉에게 절을 하면서 우리는 결단코 그런 일이 없다고 합니다.

이건 지난번처럼 무슨 착오가 생긴 것이라고 하면서 유다가 형제들을 대표해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우리의 정직을 나타 낼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인 것 같으니까 우리 모두가 주의 종이 되어서 우리의 정직함을 나타내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요셉은 아니다 다 종이 될 필요는 없고 은잔이 나온 사람만 여기 남고 다 돌아가라고 합니다.

이에 유다가 나서서 베냐민이 안 올라가면 자기 아버지는 죽는다고 하면서 아비 야곱이 베냐민을 어떻게 아끼는지에 대하여 소상하게 말해줍니다.

 

이 아이는 늦둥이로서 아버지가 각별히 아끼는 자식인데,

이는 원래 한 어미에게서 난 자식이 또 하나가 있었는데 그 형은 일찍 죽었고 그 어미도 죽어서 아버지가 이 아이는 생명처럼 아낀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 아이가 만약에 안 올라가면 아버지는 충격을 받고서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에게 그 아비 야곱이 베냐민을 왜 편애를 하는지 그 내막을 말하면서 자신들이 요셉을 팔아 버린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들이 아버지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죽였다고 하면서 아버지는 이 사실을 모른 채 지금까지 살아 왔다고 합니다.

베냐민은 잃어버린 그 아들의 분신과 같아서 이 아이가 만약에 돌아가지 않게 되면 야곱은 필경 죽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원래 이 아이를 안 데리고 오려고 하였는데 지난번에 주(요셉)께서 다음에는 이 아이를 안 데리고 오면 양식을 주지 않겠다고 하여서 아버지를 설득 설득해서 데리고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안 올라가면 자기들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죽게 되었으니 그래서 유다가 이 아이 대신에 자신이 종이 될 터이니 이 아이만은 올라가게 해 달라고 간청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오늘 본문 내용입니다.

 

오늘은 하나님 장자 만들기에 대하여 살펴봅니다.

 

장자란? 집안을 맡아서 지켜가는 자식을 말합니다.

아브라함과 언약을 하신 후 400년이 지나서 야곱의 아들들이 애굽에 내려가서 큰 민족을 이루어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출애굽을 할 때 이들은 하나님의 장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요셉과 그 형제들의 이야기는 훗날에 일어날 일들을 앞서서 맛보기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의 12 아들들이 기근에서 살아나는 이야기 속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이 땅에서 어떻게 살려 내는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 나라 장자를 만들어 가고 계신 것입니다.

내가 장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장자를 만들어 가십니다.  

이걸 놓치지 마세요. 



하나님의 장자는 하나님이 만드시지 우리가 노력해서 장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에 일하는 주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주체가 하나님으로 보이느냐, 아니면 인간으로 보이느냐에 따라서 성경의 해석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나게 됩니다.

 

주체가 우리이면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고 저렇게 해야 된다는 방법을 찾게 됩니다.

이를 인본주의라고 합니다.

인본주의는 인간이 주체입니다.

인간이 주체이면 인간 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되는 것으로 접근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게 인간들에게 편합니다.

왜냐하면 죄 아래서 태어난 인간들은 무엇을 해도 자기 가능성으로 접근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내 쪽에서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쪽으로 이해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세상의 종교 속에 그대로 녹아져 있습니다.

세상 종교는 인간이 주체가 되어서 신에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지성이면 감천한다는 사상입니다.

 

땅에서 지극정성으로 빌면 하늘이 감동을 해서 은혜를 내려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아쉬운 게 있으면 신에게 비는 것입니다.

그것도 대충대충 비는 게 아니고 정성스럽게 빌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옛날에는 새벽에 정화수를 떠놓고 비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절간 신앙인 것입니다.

 

이 시대 교회들이 이 짓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절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교회가 노골적으로 지성이면 감천한다는 플랜카드를 붙여 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슨 무슨 특별 새벽 기도회로 모이는 것입니다.

수능시험을 앞두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 모두가 목사들이 성경을 인본주의 입장에서 가르치니까 나타나는 현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들이 다 부흥을 합니다.

사람들이 그러한 곳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목사들이 열심히 충성해서 복을 받으라고 합니다.

이에 교인들은 충성 경쟁을 벌립니다.

서로 복을 더 많이 따내고자 경쟁을 벌리는 것입니다.

절간 신앙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성경을 보는 눈의 차이 때문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인간들이 해야 하는 것으로 성경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이 하신 것으로 성경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지켜야 한다는 것으로 보이기 시작하면 믿어야 할 것은 사라지고 '어떻게 해야 하지' 라는 쪽으로 치닫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 율법 신앙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비록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는 명령법으로 주어졌지만,

그것은 우리의 한계성을 드러내고 우리가 할 수 없는 그것을 예수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이루셨는지를 말해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드러내고자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셨고 지금 무슨 일을 하고 계시고 앞으로 어떤 일을 하실 것인가를 자기백성들에게 설명을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이런 일을 했다 라고 고지를 해준단 말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을 하시고 이루어 가는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하시는구나로 이해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본문을 보세요.

베냐민은 아무 죄가 없습니다.

억울하게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요셉이 은잔을 베냐민의 곡물 자루 속에 집어넣어 놓았습니다.

베냐민은 아무도 모르고 있는데 요셉이 너 왜 내 은잔을 훔쳐갔어 그러는 것입니다.

베냐민은 그런 일 없는데요.

그러면서 내 자루를 한번 보세요.

 

그런데 그 속에서 은잔이 나오는 것입니다.

베냐민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일인 것입니다.

얼마나 황당한 일입니까.

 

베냐민의 입장에서는 너무도 억울한 것입니다.

요셉의 형제들 입장에서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 잘못 없는데 왜 일이 이렇게 자꾸만 꼬이는 거야! 라고 한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이 뭔 줄 아세요.

미치고 팔짝 뛸 일들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뜻대로 안 살아진다는 말입니다.

 

요셉이 왜 이런 일들을 하느냐?

요셉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형제들을 기근에서 구원하는 구원자입니다.

요셉이 지금 자기 형제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의 운명 속으로 끌어당기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들을 버려짐과 되찾음의 수순으로 간섭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들의 구원의 수순이 있습니다.

그것이 먼저 버려지고 나중에 되찾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창세전 언약이 그러합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 언약이 나왔습니다.

 

아브라함 언약을 보면 이방으로 버려졌다가 되찾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가지고 이스라엘의 조상인 야곱의 아들들을 창세전 언약에 나타난 구원의 수순으로 간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장차 예수님께서 오셔서 자기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을 요셉을 가지고 선취적으로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예표적 사건이고 그림자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버림당하고 죽게 되는 일들을 요셉은 미리 그 형제들로부터 버림당하는 일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이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고 애굽으로 팔려 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온 세상의 기근으로부터 자기를 버린 그 형제들을 살려주는 일을 합니다.

 

이건 예수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동족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죽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만유의 주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만유의 주가 되게 하고서는 자기를 버린 자들을 살려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만유의 주란? 백성을 죽이고 살리는 생사여탈권을 가진 분입니다.

그것이 구약의 요셉에게는 기근으로부터 죽이고 살릴 수 있는 양식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요셉이 양식을 주면 살아나고 양식을 주지 않으면 죽습니다.

온 세상이 요셉의 수중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만 양식을 주었습니다.

만약에 다른 백성들이 양식을 가지고 있었을 것 같으면 요셉은 만유의 주가 될 수 없습니다.

다른 곳에서 양식을 구하면 되니까 요셉에게 올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요셉에게만 양식을 준비케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기근을 대비하지 않았습니다.

풍년이 드니까 흥청망창 하면서 장차 닥쳐올 기근을 대비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근이 온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늘 풍년만 되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양식을 창고에 비축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장차 심판이 일어나는 것을 모릅니다.

그러니까 심판을 준비하는 삶을 살지 않는 것입니다.

심판은 오직 성도들만이 준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장차 심판이 임한다는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들어서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만유의 주가 되게 하시려고 요셉에게만 풍년 속에서 기근이 온다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풍년 때에 기근 속에서 살아날 양식을 준비케 하신 것입니다.

이는 장차 온 세상 사람들을 요셉 앞에 무릎을 꿇게 하여서 주라고 시인하도록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근을 부르신 것입니다.

 

시편 105편을 봅시다.

 

7. 그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라 그의 판단이 온 땅에 있도다

8. 그는 그 언약 곧 천대에 명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

9.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이며 이삭에게 하신 맹세며

10. 야곱에게 세우신 율례 곧 이스라엘에게 하신 영영한 언약이라

11. 이르시기를 내가 가나안 땅을 네게 주어 너희 기업의 지경이 되게 하리라 하셨도다

12. 때에 저희 인수가 적어 매우 영성하며 그 땅에 객이 되어

13. 이 족속에게서 저 족속에게로, 이 나라에서 다른 민족에게로 유리하였도다

14. 사람이 그들을 해하기를 용납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연고로 열왕을 꾸짖어

15.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 하셨도다

16. 그가 또 기근을 불러 그 땅에 임하게 하여 그 의뢰하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17.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18.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19.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20. 왕이 사람을 보내어 저를 방석함이여 열방의 통치자가 저로 자유케 하였도다

21. 저로 그 집의 주관자를 삼아 그 모든 소유를 관리케 하고

22. 임의로 백관을 제어하며 지혜로 장로들을 교훈하게 하였도다

 

하나님은 언약으로 일을 하십니다.

그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언약을 그 후손들을 통해서 이루어가십니다.

 

그러자면 먼저 그 후손들이 애굽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그런데 야곱과 그 아들들은 애굽으로 내려가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근을 불러서 가나안에 양식을 끊어버리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애굽의 총리로 있는 요셉에게만 양식을 주었습니다.

 

목적은 오직 하나입니다.

온 세상 모든 백성들을 요셉에게 무릎 꿇게 만드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요셉을 만유의 주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세상이 요셉이 주는 양식을 먹고 살도록 온 세상에 기근을 불러서 양식을 끊어버린 것입니다.

기근에서 살려면 요셉의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양식 없으면 죽습니다.

양식 이외 더 큰 가치는 없습니다.

기근 때는 돈도 소용이 없고 땅도 소용이 없습니다.

오로지 양식뿐입니다.

 

돈이 있어도 양식을 사지 못하면 종잇조각에 불과합니다.

나중에 온 세상에 기근이 닥치니까 온 세상이 요셉에게 땅을 바치고 돈도 바쳤습니다.

양식을 가진 자가 생사여탈권을 가진 주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고 싶은 그림은 요셉을 통하여서 언약의 후손들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세상의 기근 속에서도 성경은 오직 야곱의 가족들이 기근에서 살아나는 이야기를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의 가족이야기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관심사는 언약의 후손에게만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 관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약 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교회에만 관심이 있다는 뜻입니다

온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자기백성들을 선택해서 교회로 부르시고 예수라는 양식을 주어서 먹게 하여서 구원을 베풀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받지 못한 그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깨닫고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귀한지를 깨닫고 하나님께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께 찬양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느냐?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받고 살아간다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 힘으로 산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감사치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압니다.

살고 죽는 것이 다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을 압니다.

어려운 일을 당한 것이나 기쁜 일을 당한 것이나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신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43장을 봅시다.

 

사 43:1-3절.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3.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야곱아 너는 내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고 내가 너를 창조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조성을 해 가신다고 합니다.

 

조성해 간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아들로 만들어 간다는 뜻입니다.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하나님의 장자로 만들어 가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장자 만드는 모습이 기이합니다.

물속에다가 집어넣었다가 불 속에도 집어넣는 방식으로 하시는 것입니다.

물 가운데 넣고 불 가운데로 집어넣으면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물속에도 집어넣고 불 속에 들어가는 것은 고난입니다.

고난이라는 풀무불에 집어넣고는 정금같이 제련을 해 가는 것입니다.

이걸 사랑이라고 합니다.

아주 역설적인 사랑입니다.

 

마치 부모들이 자식을 훈육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매를 대고 잔소리를 하는 것은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나 자식들은 그것을 사랑이라 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미워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자식들이 생각하는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자기가 부모가 되면 알게 됩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자식 입장에서는 역설적인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부모님에게 배운 그대로를 자기 자식에게도 행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동일합니다.

자식을 키우면서 부모의 은혜를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부모가 나를 이렇게 키웠구나!

내가 이렇게 컸구나!

그걸 알아가면서 부모로부터 받았던 그 사랑을 자기 자식에게 쏟아내는 것입니다.

이걸 내리 사랑이라고 합니다.

 

자식에게 쏟는 그 사랑은 자기 것이 아니고 부모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사랑법입니다.

자식에게 쏟는 사랑은 부모로부터 받은 것을 토해내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을 받은 사람만이 사랑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식에게 사랑을 주어서 그 사랑을 자기 자식들에게 흘러 보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대대로 흘러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막혀버리면 죽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이 막혀버린 자를 죽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 받은 자는 산 자이고 사랑받지 못한 자는 죽은 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했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에게 주시고 나서 주신 자에게 내놓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을 봅시다.

 

엡 4:32절.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서로 인자하게 불쌍히 여기라고 합니다.

그리고 용서 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용서는 하나님께 받은 것으로 하라고 합니다.

용서 속에 하나님의 것을 담아 놓으라는 것입니다.

내 것으로 용서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하라고 성령을 주신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이를 하늘에 신령한 복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성령의 은사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을 봅시다.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 안에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것들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성도들 안에서 이러한 것들을 토하여 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맺은 열매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품으라는 말은 이미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성령이 오심으로 성도 안에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품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품어진 사람은 이제 그리스도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성령이 그 안에서 맺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라고 하는 것입니다.

 

품으라는 말은 마치 닭이 알을 품어서 병아리를 부화시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닭이 알을 품는 이유는 알 속에서 병아리를 끄집어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끄집어내기 위함입니다.

 

심지 않은데서 거두려는 농부는 없습니다.

먼저 심고 나중에 거둡니다.

하나님이 농부입니다.

예수라는 씨를 성도라는 밭에 심고 농사를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열심히 농사를 짓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일컬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소원을 두고 이루신다고 합니다.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끝 날까지 이룬다고 합니다.

 

농사 속에는 구원의 비밀이 담겨져 있습니다.

 

씨와 밭은 짝입니다.

씨는 밭이 없으면 발아하지 못합니다.

또한 밭은 씨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라는 씨와 그 씨를 받을 밭을 준비한 것입니다.

그 밭이 바로 성도들인 것입니다.

 

예수라는 하나님의 씨가 성도라는 밭에 떨어지면 밭은 그 씨를 틔우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양분을 씨에게로 줍니다.

씨가 밭을 잠식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여자가 임신을 하면 입덧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자가 임신을 하면 아이가 여자를 주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자는 아이가 원하는 것을 먹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게 입덧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라는 씨를 임신하게 되면 그 예수가 우리를 잠식해갑니다.

예수라는 생명이 우리 안에서 옛 것을 제하고 새 것을 채우는 일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품은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살아지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이 예수님의 소원을 우리 안에서 두고 이루어가는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인생은 조금씩 조금씩 예수에게 차압당하는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으로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용서를 이웃에게 흘러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용서 받은 사람은 용서가 나오고 사랑받은 사람에게서 사랑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이 진짜 용서를 아는 자인지 모르는 자인지 알기 위해서 그 사람 앞에 원수를 딱 세워 놓고 시험을 하는 것입니다.

저 놈이 진짜 용서를 받은 자인지 아닌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용서를 받은 사람일 것 같으면 용서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행하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우리 것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를 하나님이 긍급하는 힘이라고 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다 토해내고 가게 되어 있습니다.

받은 자는 토해냄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요셉과 그 형제들을 가지고 이야기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채색옷을 입혀주었습니다.

이것은 야곱이 요셉을 편애하였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까 형제들이 요셉을 시기하고 미워한 것입니다.

요셉이 형제들로부터 버림을 당한 것은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으면 사랑 받지 못한 자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는 자식은 형제들을 미워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랑이 있기 때문에 자기를 미워하는 형제들을 같이 미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요셉은 형제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애굽으로 팔려 갔습니다.

애굽으로 팔려 간 것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형제들 입장에서는 요셉은 죽은 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만들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은혜를 더하여서 요셉이 하는 일을 형통케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요셉을 계속 간섭하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간섭을 하니까 종으로 팔려간 자가 승승장구하여서 애굽의 총리가 된 것입니다.

 

요셉은 자기가 총리가 된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뭔가 뜻이 있어서 종의 신분으로 있던 자를 일인지하만인지상의 자리에 앉게 해준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중에 기근 속에서 형제들을 살리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은혜와 사랑을 주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주신 사랑을 받아 내는 일을 하십니다.

그것이 자기를 버린 형제들을 용서해주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 나라에서 장자들이 살이가는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장자의 삶이 요셉에게 국한 된 것이 아니고 언약의 후손 모두에게 적용이 됩니다.

요셉은 형제들을 대표하는 자입니다.

그럼 형제들도 요셉이 겪은 코스를 지나와야 합니다.

요셉이 지나온 과정이 하나님의 장자들이 지나오는 과정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하나님의 입장에 서서 그 형제들을 자기가 지나온 그 과정 속으로 끌어당기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 형제들을 종으로 만들고 감옥에 집어넣었다 빼내는 방식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건 신약의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도 요셉과 같은 코스를 지나게 되어 있습니다.

요셉의 실상이 신약에서는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형제들에게 버려짐을 당하고 죽임 당하는 일을 겪게 되었던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하나님은 살리셔서 만유의 주가 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나신 예수님은 이제부터 자기를 버린 형제들을 살려주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아들들에게는 요셉의 양식을 주었지만 신약의 성도들에게는 예수님을 양식으로 주신 것입니다.

 

예수라는 양식을 먹은 성도는 예수의 운명 속으로 흡수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예수라는 양식을 먹은 자들을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코스로 집어넣고 그대로 걸어가게 하십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을 보세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 된 것 때문에 형제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가산을 적몰당하고 심지어 죽임까지 당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미움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이 세상이 하나님과 원수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너희를 사랑했을 테인데 너희가 세상에서 나의 것으로 택함을 입은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먼저 알 것은 세상이 나를 미워하기 때문에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걸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띠를 띠고 네가 원치 않는 길을 가게 된다고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라는 떡을 먹고 살아난 자들은 자기의 원함과 상관없이 예수그리스도가 가셨던 그 길로 끌려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제들도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죽는 자리로 끌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자꾸만 죽을 자리로 이끌려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의 형제들은 자기들은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왜 이러한 일들이 자기들에게 일어나는지 모르겠다고 항변하는 것입니다.

은잔도 훔치지 않았을 뿐더러 지난번에도 분명히 곡식 값을 다 지불하였는데 왜 은잔이나 돈이 자기들 자루 속에서 나오는지를 모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억울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의 형제들에게 억울한 일을 당하게 함으로서 요셉이 형제들로부터 억울하게 버림당한 사실을 기억케 하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애매히 고난을 당하게 하여서 예수님께서 애매히 죽으셨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누가 더 억울한지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그 형제들을 통해서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간섭하여서 살려내는지를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종에서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을 봅시다.

 

갈 4:1-7절.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하나님께서 일하심을 보면 먼저 종의 신분에 두었다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원래 아들이었는데 잠시 종 아래 두었습니다.

종 아래 있던 자들을 다시 예수그리스도께서 아들의 자리로 옮겨주십니다.

잘 보시면 너희가 원래부터 아들이었는데 잠시 종 아래 두었다가 아들의 영을 보내주어서 하나님을 아바 아바지라 부르게 된다고 하십니다.

 

구원이 뭐냐?

종에서 하나님 아들의 자리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회장님이 회사를 아들에게 물려주어야 하는데 그냥 물려주면 경영을 할 수가 없으니까 잠시 말단 직원으로 입사를 시켜서 회사의 업무를 완전하게 파악케 한 후에 회사를 물려주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장자는 반드시 종의 자리를 거치게 되어 있습니다.

종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얼마나 귀한 자리인지를 알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먼저 종의 자리로 밀어 넣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애굽에서 400년 동안 종살이를 하다가 어린 양의 피로 출애굽 하는 것과 같습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장자들이므로 내어 놓으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장자는 하나님의 가문을 이어갈 자입니다.

하나님의 가문이 바로 천국입니다.

천국을 유업으로 주시려고 애굽이라는 지옥에 먼저 밀어 넣은 것입니다.

 

곧 바로 천국을 주면 아담과 하와처럼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천국의 소중함을 몰랐습니다.

또한 죽음이 얼마나 큰 고통이고 저주인지도 몰랐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같이 되고자 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이고 얼마나 큰 재앙인지를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뱀이 주는 선악과를 홀라당 받아먹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먼저 지옥의 코스를 지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지옥의 코스를 지나오면서 죄를 벗어버리고 정금같이 나오는 것입니다.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절감케 되는 것입니다.

법 아래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고서는 살아 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자들만이 천국에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자를 장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자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을 주십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탕자 비유입니다.

 

탕자 비유를 보세요.

인간의 상식으로는 맏아들에게 가문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집을 떠났다가 개고생을 하고 돌아온 둘째 아들에게 유업을 줍니다.

왜 그런가요?

집 떠나 살면서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는 집으로 돌아 올 때는 품꾼의 하나로 돌아 왔습니다.

자기는 아들 자격이 없다고 하면서 종이 되겠다고 합니다.

아버지 품을 떠나서 살다가 보니까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신분이 얼마나 영광되고 복된 자리인지를 안 것입니다.

 

아버지의 아들이 복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니까 차마 아들이라고 하지를 못하겠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아들이 아니고 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바로 이런 자가 아들이라고 하면서 가문을 물려주는 것입니다.

 

맏아들에게는 아버지의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너무도 잘났기 때문에 못난 놈을 용서해 주는 아버지가 못 마땅한 것입니다.

아비의 마음이 없으니까 가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을 동생으로 취급하지 않는 것입니다.

저런 놈은 자기 동생이 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법으로 살아가는 마귀의 마음인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는 천국을 꾸려가지 못합니다.

천국을 법으로 다스리게 됩니다.

그럼 천국이 지옥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맏아들은 아버지 집을 떠나서 실패하면서 지옥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의 고마움을 모르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고마움을 모르는 자는 항상 자기 잘남으로 아버지를 판단하게 되어 있습니다.

잘난 자식들은 자기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선악과를 먹고서 하나님 같이 된 죄인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맏아들은 진짜 착한 자식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자식들은 맏아들이지 탕자가 아닙니다.

탕자 같은 자식을 키우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우린 모두가 맏아들처럼 자식을 키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맏아들은 너무 착하고 속을 섞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맨날 사고치고 속을 섞인단 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맏아들에게는 인간미가 없습니다.

너무 잘났기 때문에 못난 사람들을 이해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공부 못하는 아이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난 자식들은 그 속에 항상 자신의 모습이 기분이 되어서 법으로 작동을 하여서 자신의 생각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넌 어떻게 그러냐고 법을 집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법이 부모에게도 작동을 합니다.

 

그래서 맏아들이 아버지가 탕자를 감싸 안으니까 어떻게 저런 놈을 받아들인단 말입니까 라고 하면서 아버지가 하는 일조차 부당하다고 판단하고 아버지를 틀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죄입니다.

맏아들은 이러한 것이 죄인 줄 몰라요.

 

죄가 뭐냐?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죄인을 용서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을 아버지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아버지가 요셉을 편애하는 것이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을 미워하고 애굽으로 팔아버린 것입니다.

이건 마치 하나님이 아벨을 제사를 받자 가인이 화가 나서 아벨을 돌로 쳐 죽인 것과 같은 것입니다.

 

가인이나 요셉의 형제들 속에는 자기들의 법이 있었습니다.

이를 죄의 소원이라고 합니다.

자기들 생각에 반하는 일들이 일어나자 발끈하여서 아버지가 사랑하고 하나님이 받으신 자를 죽이는 것으로 분풀이를 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가인처럼 아버지가 사랑하는 요셉을 애굽으로 팔아 버림으로서 아버지에게 복수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미워서 팔아버린 그 요셉에게 무릎을 꿇고 절을 하게 하고서 입술을 벌려서 주라고 시인하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의 형제들을 요셉의 양식으로 살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요셉의 형제들의 생명은 요셉에게 귀속되는 것입니다.

이걸 신약적으로 말하면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고 합니다.

 

요셉이 형제들을 자신의 운명 속으로 끌어당긴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들이 처음 양식을 구하러 왔을 때 곧 바로 주지 않고 감옥에 가두었다가 빼내는 방식으로 준 것입니다.

 

그런데 베냐민은 앞서 양식을 구하러 올 때는 형제들과 함께 오지 않았기 때문에 형제들처럼 감옥에 가두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베냐민을 불러 내리는 일을 한 것입니다.

그것이 두 번째 양식을 사러 올 때는 반드시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만약에 베냐민을 데리고 오지 않으면 양식을 주지 않겠다고 합니다.

 

요셉의 말대로 처음 가지고 간 양식이 다 떨어졌습니다.

다시 요셉에게 양식을 사러 가야 합니다.

그런데 야곱이 베냐민은 안 내어 놓는 것입니다.

그러자 유다가 자기 목숨을 담보로 해서 야곱으로부터 베냐민을 받아 냅니다.

 

다른 형제들은 가만있는데 유다가 뛰어듭니다.

유다가 아버지 앞에 자기 목숨을 담보로 해서 베냐민 지키겠다고 합니다.

만약에 베냐민이 안 돌아올 것 같으면 그 죄를 자신이 담당 하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베냐민을 데리고 내려온 것입니다.

 

그러자 요셉이 베냐민도 형제들과 똑 같은 구조 속으로 밀어 넣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내려갔던 10명의 형제들은 오자마자 감옥에 가두어졌습니다.

베냐민도 역시 똑 같은 일을 겪어야 합니다.

그래야 죽음에서 살아나는 한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베냐민을 옥에 가두는 일을 벌린 것입니다.

요셉이 베냐민의 곡식 자루 속에 은잔을 집어넣어서 죄인의 자리로 내려가게 한 것입니다.

이제 꼼짝없이 베냐민이 옥에 가두어지게 생겼습니다.

그러자 유다가 나서서 베냐민의 죄를 자신이 대신 받겠다고 합니다.

 

유다가 베냐민의 생명은 아버지의 생명과 결탁이 되어 있기 때문에 이 아이에게 죄를 묻지 말고 자기에게 물으라고 합니다.

베냐민이 죽으면 야곱도 죽게 된다고 합니다.

 

유다는 요셉에게 당신이 만약 이 아이를 죽이면 우리 아버지를 죽이는 것과 똑 같은 것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아이 대신에 나를 죽이라고 합니다.

유다가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서 베냐민의 죄를 대신 담당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장자의 모습입니다.

유다가 왜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는가요?

이는 유다가 야곱의 집안의 장자이기 때문입니다.

 

역대상 5장을 봅시다.

 

대상 5:1-2절.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서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지 못하였느니라 2.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실제 야곱의 장자는 르우벤입니다.

르우벤의 어미는 레아입니다.

레아는 야곱의 정실부인이 아니에요.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어요.

그런데 라반이 그 동네 풍습 때문에 언니인 레아를 야곱에게 덤으로 준 것입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이삭과 리브가가 야곱을 하란으로 보내지요.

왜냐하면 이삭의 가문을 이어가려면 이방인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삭에게는 에서와 야곱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에서가 형이고 야곱이 동생입니다.

장자는 아버지의 가문을 이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에서가 자기 마음대로 헷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것입니다.

이것이 이삭과 리브가에게 큰 고민이었습니다.

그래서 리브가가 이삭과 의논을 해서 야곱은 어미 리브가의 집안에 있는 사람과 결혼을 시키기 위하여 하란으로 보낸 것입니다.

 

야곱이 엄마 리브가의 오라비인 라반의 집에 가서 그 딸을 아내로 맞이한 것입니다.

라반에게 두 딸이 있는데 레아와 라헬입니다.

레아가 언니이고 라헬은 동생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였습니다.

라헬을 얻기 위하여 7년을 종살이를 하였습니다.

7년 종살이를 하고 결혼식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라반이 신방에 라헬을 넣어주지 않고 언니인 레아를 넣어 준 것입니다.

야곱이 아침에 눈을 떠보니 라헬이 아니고 레아인 것입니다.

 

그래서 외삼촌 라반에게 나는 라헬과 결혼을 했는데 왜 레아를 주느냐고 따집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고 합니다.

그러자 라반이 이 동네 풍습이 언니보다 동생이 먼저 시집가는 것은 없다고 하면서 언니를 먼저 취하고 동생도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다시 7년 종살이를 하게 합니다.

 

여기에 구원의 비밀이 담겨져 있습니다.

야곱의 두 아내는 두 언약을 상징합니다.

왜냐하면 야곱의 12 아들들이 언약의 후손인 이스라엘이 되기 때문입니다.

 

두 언약이 있습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이 있습니다.


옛 언약은 종의 언약이고,

새 언약은 아들의 언약입니다.

 

옛 언약이 먼저 주어지고,

새 언약이 나중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옛 언약 백성은 육적 이스라엘이고,

새 언약 백성은 영적 이스라엘입니다.



유업은 누가 얻는가 하면 영적 이스라엘이 얻습니다.

 

옛 언약은 레아가 되고,

새 언약은 라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옛 언약인 육적 이스라엘은 레아의 후손으로서 종으로서 유업이 없습니다.

유업은 새 언약인 영적 이스라엘 즉 라헬의 후손들이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 라헬의 후손이 바로 요셉인 것입니다.

요셉의 실체가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로 낳아진 자들이 영적 이스라엘이고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을 하나님의 장자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역대상에서는 호적상으로는 유다를 장자로 올리고, 실제적으로 유업을 얻는 영적인 장자의 명분은 요셉으로 하라고 하였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유다는 겉으로 드러난 장자이고, 요셉은 숨겨진 장자라는 뜻입니다.

 

육은 드러나 있고, 영은 숨겨져 있습니다.

육은 죽이는 것이고, 영을 살리는 것입니다.

요셉이 진짜이고, 유다는 가짜라는 말입니다.

 

이게 언제까지이냐 하면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요셉도 유다도 가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낳아진 자들이 바로 영적인 장자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낳아진 자들이 유다와 요셉으로 보았을 때 요셉과 같은 것입니다.

그럼 예수를 팔아버린 혈통적 이스라엘은 요셉을 팔아버린 형제들이 되는 것입니다.

요셉이 레아의 후손들에게 버려짐을 당하였잖아요.

그래서 육적 이스라엘이 요셉의 실상인 예수님을 버리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면서 육적 이스라엘이 레아의 후손들로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니까 전부 가짜로 드러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진짜 장자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럼 그림자로 하나님의 장자 노릇을 한 이스라엘은 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구약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구약 이스라엘의 죄를 모두 짊어지고 죽으시고 살아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들어가서 구약의 이스라엘을 다 살려내서 부활하신 후에 하늘나라로 데리고 가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27장을 봅시다.

 

마 27:45-53절.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 46.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47.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가로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48. 그 중에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융을 가지고 신 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거늘 49. 그 남은 사람들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자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집니다.

그리고 무덤이 열리고 자던 성도들이 일어납니다.

모든 사람이  살아난 것이 아니고 성도들만 살아났습니다.

이들이 구약의 언약의 후손들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 후 첫 날에 부활 하시고 이들을 무덤에서 꺼내서 거룩한 성으로 데리고 갑니다.

 

이게 초실절에 드려지는 첫 열매로서의 한 단인 것입니다.

초실절이 되면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 가지고 갑니다.

그럼 제사장은 그 단을 안식 후 첫 날에 하나님 앞에 흔들게 됩니다.

흔든다는 것은 살아났다는 뜻입니다.

이를 요제라고 합니다.

 

잘 보시면 무덤 속에 있던 자들이 어떻게 살아나는가요?

예수님이 버려지심으로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하지요.

이는 하나님께서 예수를 버리시고 언약의 후손들을 살려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버려진 예수님을 사흘 후에 살려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으로 살아난 언약의 후손들을 부활 하신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옵니다.

그들을 예수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는 주라고 시인하게 합니다.

형제들에게 죽임 당하였다가 부활 하신 예수님을 만유의 주로 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장자가 되어서 희생함으로서 형제들을 살려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장자가 하는 일인 것입니다.

 

장자는 아버지를 대신하는 자입니다.

그럼 아버지의 죽음으로 자식들이 살아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장자 속에 담아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 가문의 장자들은 모두가 희생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요셉이 그 모습이었고, 유다가 그 모습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가 베냐민을 대신해서 감옥에 들어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유다는 레아의 넷째 아들입니다.

실제 야곱의 장자는 레아가 낳은 르우벤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의 순서를 보면 르우벤, 레위, 시므온, 유다, 단, 납달리, 갓, 아셀, 잇사갈, 스불론, 요셉, 베냐민 이러한 순서로 나타납니다.

요셉과 베냐민은 맨 마지막 11번째와 12번째 아들로 나타납니다.

첫째부터 열째 까지는 전부 첩이 낳은 종들이고, 요셉과 베냐민만이 정실부인인 라헬의 소생으로서 아들인 것입니다.

 

정상적으로 하면 르우벤이 장자 구실을 해야 합니다.

르우벤이 베냐민을 대신해서 감옥에 가겠다고 나서야 합니다.

르우벤이 안 나서면 순서상으로 보면 레위나 시므온이 나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나서지 않고 유다가 나서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르우벤과 레위와 시므온은 장자의 자격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르우벤은 서모 빌하와 간통 사건에 연류가 되었고 레위와 시므온은 디나의 강간 사건 때 살인 사건에 가담을 하여서 장자의 자격을 상실해 버린 것입니다.

 

창세기 37장을 보면 야곱의 약전은 이러 하니라 라고 하면서 그 속에 요셉을 끼워 넣습니다.

이는 요셉이 야곱의 가문을 이어갈 장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37장에서 야곱의 약전에 요셉을 말하고서는 38장에서는 느닷없이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를 삽입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셉의 이야기 속에 유다의 이야기를 담아 놓은 것입니다.

 

유다는 다말의 희생으로 가문을 이어가게 된 자입니다.

유다에게는 다말의 희생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말의 희생으로 가문을 이어가는 유다를 야곱의 육적 장자의 계보를 이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의 육적 장자는 유다이고, 야곱의 영적 장자는 요셉이 되는 것입니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죽고 이스라엘로 태어났습니다.

야곱은 옛 사람이고, 이스라엘은 새 사람입니다.

야곱은 육이고, 이스라엘은 영입니다.

 

유다는 육인 야곱의 장자이고,

요셉은 영인 이스라엘의 장자인 것입니다.

유다는 드러난 장자이고, 요셉은 감추어진 장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육적으로는 유다가 실제적으로 장자 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유다가 장자 노릇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냐민이 옥에 가두어지게 되자 다른 형제들은 가만히 있는데 유다가 대신하여서 죄를 담당하겠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장자 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잘 보시면 요셉은 베냐민을 자신의 운명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은잔을 훔친 죄인으로 몰아서 감옥에 가두고자 하였습니다.

이걸 애매히 고낭당한다고 합니다.

 

그러자 유다가 베냐민 대신 감옥에 들어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유다도 애매히 고난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요셉도 애매히 형제들로부터 버림당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이나 유다나 베냐민은 모두가 애매히 고난당하는 구조 속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장자의 운명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국가로 나타날 때 베냐민 지파가 왕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왕은백성을 대표하는 자로서 장자와 같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이나 유다나 베냐민은 모두가 장자인 것입니다.

이들 속에 하나님의 장자의 모습들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나중에 보면 이들의 계통을 따라서 진짜 하나님의 장자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가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장자로 오셔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장자이신 예수님의 죽음으로 낳아진 자들은 모두가 하나님 장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을 하늘나라를 유업을 이를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을 일컬어 하늘에 있는 장자들의 총회라고 합니다.

 

교회는 하늘에 장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 속에 하나님의 장자이신 예수의 씨를 심어 놓았습니다.

예수를 씨를 받게 되면 애매히 고난당하는 구조 속으로 이끌려 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마리아입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합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예수를 잉태한 것은 성령으로 거듭난 것과 같습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고 나니까 그 후로부터 마리아의 인생을 예수님이 장악하기 시작을 합니다.

 

마리아의 인생은 예수에게 차압당하였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이 마리아를 잉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리아의 인생을 끌고 다니는 것입니다.

 

잘 보세요.

여자는 자기의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한 달에 한 번씩 생산이 되는 난자(卵子)입니다.

난자도 독자적인 생명입니다.

 

그런데 난자는 남자의 정자(精子)를 만나지 못하면 죽어버립니다.

죽은 생명인 것입니다.

이것은 죄인의 생명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죄인은 예수를 만나지 못하면 죽습니다.



난자도 남자의 생명인 정자를 받지 못하면 죽습니다.

그것이 피를 쏟는 월경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자가 피를 쏟는 것은 난자가 정자를 만나지 못해서 죽은 것입니다.

 

난자가 정자를 만나게 되면 난자로서의 생명은 마감하고 정자의 생명 속으로 연합이 되어서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성도가 예수그리스도를 만나서 하늘의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은 여자입니다.

난자의 생명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예수라는 하늘로서 온 남자를 만나서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서 살아가게 되고,

어떤 사람들은 예수라는 남자를 만나지 못하고 그냥 자기 삶을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예수를 만난 사람은 구원을 받아 천국으로 가고,

예수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멸망을 받고 지옥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자기 인생으로 살아가는데 반하여,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자기 인생을 차압을 당하고 예수의 인생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육적으로 보면 예수를 만난 사람은 저주 받은 모습이고,

예수를 만나지 않은 사람들은 복을 받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 반대입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들이 하늘나라의 장자가 되어서 천국을 유업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자들을 이 땅에서는 버림당하는 모습으로 두신 것입니다.

아벨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에게 이르기까지 모두가 이 땅에서는 버려지는 인생을 살아갔습니다.

이들을 히브리서 11장에서는 하늘의 증인들이라고 합니다.

하늘의 장자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가 이 땅에서 버려지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이들의 인생을 차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차압해서 버려짐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일컬어 세상에 빛이고 소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빛과 소금은 모두가 자기를 버림으로서 맛을 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빛으로 소금으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를 소멸시키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가 행하는 모든 것들은 예수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몸을 가지고 예수님의 것을 토해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도의 몸을 화면으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입니다.

우리 안에는 죽음의 것들로 가득했습니다.

분냄과 악함들로 가득했었습니다.

미움과 시기와 질투라는 마귀적 속성들이 가나안 7족속처럼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예수님이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러자 난자가 정자를 만나서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남이 일어나듯이 우리의 생명도 하늘에 생명으로 거듭남이 일어난 것입니다.

어둠의 자식이 빛의 아들들이 된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원주민들을 하나 둘씩 정복해 나가듯이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우리의 옛 사람을 하나씩 죽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옛 사람이 죽어질 때마다 우리의 인생은 후패해져갑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주리고 목마르고 유리하고 정처가 없고 핍박한즉 축복하고 빼앗기는 마이너스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빛이고 소금으로서의 하늘나라 장자들의 삶인 것입니다.

 

하늘나라 장자의 삶은 이 땅에서는 손해 보는 삶입니다.

이건 우리의 본성과 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늘 곤고하고 환란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달리 곤고와 환란이 아니라 우리 뜻대로 살아 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린 이러한 삶을 싫어합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성공신화를 쓰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원함과는 반대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이 일어나니까 모두가 이상한 삶을 살게 됩니다.

움켜잡은 손을 펴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들 속에서 움켜잡은 것을 토해내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서 이익을 본 것이 아니라 도리어 손해를 본 것입니다.

이를 두고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다고 합니다.

이게 하나님 나라의 장자들의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늘의 생명으로 거듭 나니까 땅의 생명의 습성을 버리게 된 것입니다.

땅의 습성은 손을 움켜잡는 습성이고,

하늘의 습성은 손을 펴는 습성입니다.

예수님이 움켜잡던 습성으로 살던 사람을 손을 펴서 나누어주는 하늘의 습성의 사람으로 바꿔치기 하신 것입니다.

 

하늘나라 장자의 삶은 비우는 삶입니다.

 

자신을 버린 형제들을 살리는 요셉의 삶 속에 장자의 삶이 있고,

베냐민을 대신해서 감옥에 들어가겠다고 하는 유다의 삶 속에 장자의 삶이 있고,

아무 연고 없이 애매히 고난 받는 베냐민의 삶 속에 장자의 삶이 있는 것입니다.

 

요셉을 요셉 되게 하신 이가 하나님이시고,

유다를 유다 되게 하신 이가 하나님이시고,

베냐민을 베냐민 되게 하신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이들을 닮자고 하면 안 됩니다.

성경은 누구를 닮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이렇게 간섭해 가시더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린 모두가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이 장자의 길을 가게 되어 있습니다.

차압당하는 인생길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두가 이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십보 백보입니다.

 

어떤 이는 많이 차압당하고 있고,

어떤 이는 적게 차압당하고 있을 뿐입니다.

차압 하신 하나님의 원대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종국에는 예수님처럼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되어서 이 세상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하늘나라 장자는 예수님처럼 이 땅에서 탈탈 털리고 가게 되어 있습니다.

천국은 세상 것을 가지고 갈 수가 없습니다.

세상 것을 움켜잡고는 가지 못합니다.

다 비우고 손 벌리고 가야 합니다.

 

나그네는 짐이 가벼워야 합니다.

여행하는 사람이 바리바리 싸들고 가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자들이 바리바리 싸들고 여행을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리석은 자들처럼 바리바리 싸들고 살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짐을 하나 둘씩 줄여주시는 것입니다.

이것도 빼내고 저것도 빼내고 간단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짐 무거우면 고생스러우니까 가볍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린 그것도 모르고 왜 자꾸만 빼앗아 가느냐고 아우성입니다.

아우성친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만 두실 분이 아닙니다.

그만 두시면 고생할 것을 뻔히 아시기 때문에 싸움을 하면서 짐을 덜어주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뉘라서 알까요?

자식이 커서 부모가 되면 부모님의 심정을 알듯이 우리의 신앙도 자라갈수록 우리의 원함과는 역설적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의 끝에 “모든 것이 족하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는 고백을 토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린 모두가 이 세상에 출장을 온 자들입니다.

빨리 일을 마치고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소리칩니다.

 

“애들아 짐 좀 줄여라”

“짐이 많으면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힘들고 지친단다”

“너무 오래 머물지 말고 빨리 돌아오라”고 합니다.

 

여기에 좋은 시가 있어 소개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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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천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 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 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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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모두가 이 세상에 소풍을 왔습니다.

이제 끝내고 돌아갈 시간이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주변 정리 잘 하시고 돌아갈 준비를 하십니다.

 

국제시장이라는 영화의 맨 마지막 부분에 황정민이가 아버지에게 울면서 말합니다.

 

아버지,

나 아버지를 대신해서 가족들 잘 챙겼습니다.

이만 하면 되었지요.

그런데 나 엄청 힘들었습니다.

 

세상의 장자의 길도 아프고 힘든 길인데,

하물며 하늘나라의 장자의 길은 얼마나 더 힘들고 아프지 않겠습니까?

현재의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족히 비교 할 것이 못 됩니다.

그러니 낙망하지 마시고 힘을 내시길 바랍니다.

 

어제 저녁에 “사도 바울”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극심한 핍박 속에서도 성도가 토해낼 것은 사랑 밖에 없다고 합니다.

세상은 우리를 미워한다고 하여도 우리는 세상을 미워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사형장으로 끌려가면서 하는 고백입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딤후 4:6-8)

 

우리 모두의 기도이기를 소망해 봅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마땅히 저주 받아야 할 자를 하나님의 장자로 삼아주심을 감사합니다. 가는 길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주께 받은 그 사랑으로 이겨내게 하옵소서. 아픈 일이 일어나면 하늘의 장자이기 때문에 당한 것이라 여기게 하옵소서. 바울의 고백처럼 선한 싸움을 싸우게 하시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키게 하여주시옵소서. 잠시라도 홀로 두지 마시고 함께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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