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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계시록 강해

38강. 시온 산에 서 있는 십사만 사천 (계 14:1-5)

by coroa 2021. 4. 14.

 

♣ -.38강. 시온 산에 서 있는 십사만 사천 (계 14:1-5).-

-.정낙원 목사

 

오늘 본문은 천상의 모습입니다.

이 땅에서 구속을 받은 성도들이 새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이는 창세전 언약이 완성된 모습입니다.

 

앞서 살펴본 13장은 이 땅에 모습이었습니다.

성도들이 땅에서 짐승으로부터 핍박받고 죽임 당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분위기가 음습하고 공포스럽습니다.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 조폭들이 선량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듯한 공포스러운 모습입니다.

 

하지만 14장은 너무나도 평온합니다.

모든 수고를 마치고 쉬는 그러한 모습입니다.

시편 23편의 모습처럼 목자가 양들을 쉴 만한 물가 푸른 초장에 인도하여 편안하게 쉬게 하는 그런 모습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왜 이러한 구조로 기록을 해서 보여 줄까요?

이는 천국은 이 땅에서 믿음을 지키다가 죽임 당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유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지상에서 핍박당하는 교회의 모습과 천상에서의 승리한 교회의 모습을 교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소망을 주고 응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너희들이 비록 이 땅에서 예수 믿음 때문에 많은 아픔을 겪지만 그것은 모두가 눈물 없고 고통없고 사망이나 아픔이나 배고픔이 없는 천국을 유업으로 주고자 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짐승들에게 죽임을 당한다고 하여도 슬퍼하거나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두가 승리로 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일시적인 아픔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시온 산에 어린 양이 서 있습니다.

그리고 어린 양과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이들을 일컬어 이 땅에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쓰여 있습니다.

이것은 앞선 13장과는 대조되는 모습입니다.

13장에서는 짐승이 땅에 거하는 자들의 오른 손과 이마에 666 짐승표를 받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누구든지 666 짐승표를 받지 않으면 다 죽임을 당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13장에서 666 짐승표를 받지 않고 죽임을 당한 자들이 14장에서는 천상에서 어린 양과 함께 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을 일컬어 짐승과 그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라고 합니다.

 

계 15장 2-3절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어린 양에게 속한 자와 마귀 곧 짐승에게 속한 자가 있습니다.

이걸 창세기에서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으로 이야기 했습니다.

 

구원이 뭐냐?

자기 백성 찾기입니다.

예수님은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 된 자들을 찾고, 마귀는 녹명되지 않는 자들을 찾습니다.

이걸 심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 창조를 흑암 속에서 빛을 불러내는 것으로 운을 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약에서는 참 빛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가 죄 아래 즉 어둠 속에서 빛에 속한 자들을 불러내는 것으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나니” 라고 하였습니다.

 

누가 예수님의 양이냐?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인침을 받은 자들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주인이 있습니다.

영적인 말이지만 각 사람들의 이마에는 각각 자기 주인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입니다.

어린 양에게 속한 자는 어린 양의 이름이 적혀 있고,

뱀에게 속한 자는 짐승의 이름인 666 짐승표가 적혀 있습니다.

 

어린 양은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기 백성들 이마에 표를 해 놓았고,

마귀는 땅에 속한 자기 백성들 이마에 표를 해 놓았습니다.

성경은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을 일컬어 하늘 백성이라고 하고, 마귀에게 속한 자들은 일컬어 땅에 거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 666 짐승표는 땅에 거하는 자들만이 받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성도는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666 짐승표는 짐승에게 속한 자들만이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짐승표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성도들은 두려워 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성도들은 이미 하나님의 인을 받았습니다.

이걸 계시록 7장에서 144000명의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치는 것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이것은 성령으로 인침 받은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인침을 성령의 보증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 하신 아버지께서 약속한 것은 성령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가면 다른 보혜사를 제자들에게 보내 준다고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보혜사이고 성령도 보혜사입니다.

두 분 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도와서 구원하는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하여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들을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성령이 오셔서 성도들 안에서 주관적으로 알려 주시고 믿어지게 해 주십니다.

믿음이란? 예수님이 행하신 객관적 사실을 내 사건으로 주관화하여서 믿는 것입니다.

 

이 일을 성령이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오직 창세전에 영생 주시기로 작정이 된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에게만 오시는 것입니다.

 

성령 받은 성도는 예수님과 자신을 연합 된 자로 여기고 삽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성도들에게는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이 적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성령의 인침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어린 양과 이 땅에서 구속을 받은 십사만 사천의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다고 하지요.

 

이름을 적어 놓았다는 것은 소유를 말합니다.

소유라 함은 값으로 샀다는 뜻입니다.

값으로 샀기 때문에 주인의 것이라는 뜻으로 주인의 이름을 이마에 새겨 놓은 것입니다.

 

이름이 새겨지게 되면 그 때부터 그 사람은 주인이 지켜내십니다.

자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마에 이름이 적혀 있는 자는 그 주인이 그를 지켜내는 것입니다.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이 적혀 있으면 어린 양과 연합된 자가 됩니다.

그러면 이 땅에서 어린 양의 운명에 동참 된 자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죽음도 동참하고 부활도 동참하고 승천하고 천국에서 사는 것도 동참합니다.

 

십사만 사천의 이마에 누가 이름을 적어 놓았나요?

어린 양과 하나님이 적어 놓았습니다.

이는 어린 양과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7장에서 자기 백성들의 이마에 인을 쳤습니다.

인을 쳤다는 것은 이름을 새겨 놓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소유라고 표시를 해 둔 것입니다.

 

이를 마귀도 흉내를 내는 것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을 모방하는 자입니다.

마귀가 짐승으로 하여금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표를 하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이 13장 이야기입니다.

 

666 짐승표 이야기는 짐승이 자기 소유에 표시를 해 두는 것입니다.

이걸 가지고 666을 받아야 하느냐?

아니면 받지 말아야 하느냐? 라는 것으로 접근하지 마세요.

이건 우리의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주인의 문제입니다.

땅에 거하는 자는 땅에 주인이 표시를 해 둘 것이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는 잘대로 666 짐승표를 받지 않습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은 이미 이마에 하나님께서 표시를 해 두었습니다.

마귀는 이마에 하나님의 표시가 없는 자들에게만 표시를 합니다.

 

이마에 두 이름이 적힐 수가 없어요.

어린 양의 이름도 적혀 있고 짐승의 이름도 적혀 있지 않아요.

어린 양의 이름을 지워내고 짐승을 이름을 적어 놓지도 못하고, 짐승의 이름을 지워내고 어린 양의 이름을 적어 놓는 것도 아닙니다.

 

이들은 야곱과 에서처럼 태어 날 때부터 이미 결정이 되어서 나옵니다.

각자 자기의 길을 갑니다.

야곱은 하늘에 속한 자이기 때문에 떡을 버리고 장자권을 택하였고,

에서는 땅에 속한 자이기 때문에 장자권을 버리고 떡을 쫓아간 것입니다.

 

이는 서로의 소속과 본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살아가는 가치관도 다르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린 양에게 속한 자와 짐승에게 속한 자들도 야곱과 에서처럼 소속과 본질이 다릅니다.

종자가 달라요.

 

양과 염소처럼 종자가 다릅니다.

양이 염소가 되고 염소가 양이 되는 법은 없습니다.

양은 애초부터 양이고 염소는 애초부터 염소입니다.

 

근데 이 둘이 섞여 있습니다.

주인이 와서 찾아내는 겁니다.

마치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서 찾아오게 하였듯이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도 예수님이 오셔서 찾아내신 것입니다.

 

이 세상은 마귀의 권세 아래 있습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놓여 있어요.

그런데 이 속에 예수님의 양들이 있는 것입니다.

 

마치 구약 시대 언약의 후손들인 이스라엘이 바로의 압제 하에서 종노릇하였듯이 예수님의 양들이 마귀 아래서 종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기 백성들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건져 내고자 예수그리스도를 속전으로 주시고 찾아 온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일컬어 예수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산 자라고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샀으니까 성령을 보내서 너희는 예수그리스도의 것이라고 낙인을 찍어 놓은 것입니다.

이를 성령의 인침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있다고 하지요.

 

왜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있다고 합니까?

이것은 신랑을 통해서 시아버지 집에 입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게 무엇과 같은고 하니 여자가 시집을 오면 남편의 호적에 올리는 것과 같아요.

 

여자는 시집을 오면서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 증거로 호적이 바뀝니다.

이제부터 남편에게 속한 자가 되어요.

그래서 남편의 호적에 올려놓은 겁니다.

 

이건 마치 여자의 이마에 남자의 이름이 새겨진 것과 같아요.

이렇게 되면 남편의 재산을 상속 받을 수 있는 법적인 상속자가 됩니다.

아들은 자기 재산이 없어요.

모두가 아버지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이 장가를 가면 아버지가 아들에게 재산을 맡깁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대신하여서 집안을 꾸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장가간 아들을 아버지와 동격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신부는 신랑의 호적에 올려짐으로서 시집의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하는 공동 상속자가 되어요.

그래서 어린 양의 신부의 이마에 신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동시에 적혀 있는 것입니다.

남편의 호적에 오른다는 것은 시 아버지의 재산을 공동으로 상속 받는 권리를 부여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엄청난 축복이에요.

 

권리를 부여 받는 대신 남편의 운명에 동참 하는 자가 됩니다.

시집과 남편의 희노애락을 함께 공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어린 양이 어디로 가든지 따라 다닌다고 합니다.

어린 양이 십자가로 가면 함께 가고 어린 양이 천국으로 가면 함께 갑니다.

 

그래서 어린 양이 죽임 당한 후에 하늘에 있는 시온 산으로 가니까 그에서 속한 십사만 사천도 죽임을 당하고 하늘에 있는 시온 산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린 양과 연합이 되면 어린 양이 지켜주세요.

 

로마서 8장을 봅시다.

 

롬 8:35-39=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누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라고 하지요.

그러면서 성도가 이 땅에서 당하는 모든 아픔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이게 계시록 13장에서 짐승에게 당하는 환란들입니다.

 

그래서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나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 나타나는 겁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합니까?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자는 아버지의 사랑도 동일하게 받기 때문입니다.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이 세상의 그 어떤 세력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 무엇으로도’,

‘그 어떤 것으로도’,

‘그 누구로부터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습니다.

죽음조차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그 누구도 아버지 손에서 너희들을 빼앗을 자가 없어요.

이처럼 성도의 구원은 확정적이에요.

중간에 끊어지는 구원은 없어요.

남편과 아버지가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사세요.

 

이걸 알게 하시려고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어요.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이 사실이 믿어지게 해 주세요.

성령은 부활의 영이에요.

그러므로 성령이 그 안에 계신 성도는 죽음의 세력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구원을 하신 분이 지켜 주십니다.

우리를 구원 하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이마에 예수님이 ‘넌 내꺼’ 라고 인감 도장을 콱 찍어 놓은 겁니다.

이건 지켜 주겠다는 약속이에요.

반면에 땅의 짐승들에게는 이 사람들은 어린 양에게 속한 자로서 하늘에서 살 자들이라고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왜 표시를 하고서 알려 줄까요?

죽이라고 알려 준 겁니다.

이게 엄청 중요한데,,,

역설적이니까 잘 이해하세요.

 

하나님은 마귀에게 하늘에 속한 자들을 이 땅에서 빼내는 일을 하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짐승은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이 새겨진 자들만 골라서 죽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늘에 속한 자들을 이 땅에서 퇴거 시키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게 엄청 복된 일이에요.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범죄하자 에덴 바깥으로 쫓아냈습니다.

이 때 뱀도 같이 쫓겨났어요.

하나님은 아담이 살아갈 땅을 저주해 버립니다.

그리고는 뱀에게 종신토록 흙을 먹으라고 명하십니다.

 

이건 저주 받은 땅을 뱀에게 넘겨 준 것입니다.

이 땅은 마귀의 구역이에요.

하나님이 합법적으로 넘겨주었어요.

 

그래서 마귀가 예수님에게 이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넘겨받은 것이므로 자기에게 절만 하면 세상에 부귀영화와 영웅호걸을 만들어 주겠다고 한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이 땅에서 영웅호걸이 되고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였으면 마구에게 절을 했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늘에 속한 분이에요.

그래서 나는 떡으로 살지 않는다고 하면서 거절한 것입니다.

마귀는 이 세상의 주인이에요.

그래서 세상에 속한 자들의 임금이 되어서 세상 것으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거하는 자들은 따 짐승에게 경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처럼 하늘에 속한 자들은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아요.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으면 어찌 될까요?

당연히 고난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를 일컬어 나그네와 행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에서 객이에요.

외국인이에요.

그런데 객이 주인처럼 살고자 한단 말입니다.

땅에 코를 박고 살려고 한단 말입니다.

 

하늘에 갈 놈이 땅에 코를 박고 있으면 우짭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마귀에게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에서 정착하지 못하도록 쫓아내라고 하신 것입니다.

쉬운 말로 추방을 시키라고 하신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귀인 짐승에게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과 싸워서 이기도록 허락을 하신 것입니다.

짐승이 성도들을 죽여요.

마귀가 성도들을 죽이면 하나님이 그들을 하늘로 데려가십니다.

이걸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라고 합니다.

 

베드로 전서 2장을 봅시다.

 

벧전 2:4-11=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6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8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11절부터 꺼꾸러 보십시다.

사랑하는 자들을 일컬어 이 땅에서 나그네와 행인이라고 하지요.

이것은 이 땅에 분깃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하는 겁니다.

이는 육신이 추구하는 떡에 가치로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예수님의 족보에 오른 하늘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예수님과 똑 같은 운명에 속하였어요.

예수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나요?

버림을 당하였습니다.

이를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마귀로부터 버림 당한 첫 번째 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세상으로부터 버림당한 예수님을 하늘나라 성전의 모퉁이 돌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에게 속한 자들도 예수님처럼 이 땅에서 버림 당하게 하여서 하늘나라 성전에 벽돌로 사용을 하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입니다.

 

엡 2:20-22=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성도들을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었다고 하지요.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자들이에요.

그래서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모두가 마귀의 세력으로부터 죽임을 당하였어요.

이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 하는 죽음인 것입니다.

 

그 터 위에 우리를 세워 놓으셨어요.

그러니 우리도 죽임 당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하늘나라 성전의 모퉁이 돌로 삼으셨다고 하지요.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그 옆에 벽돌로 세워져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에요.

하늘나라 성전의 벽돌이에요.

마귀는 이 땅에 있는 하늘나라 벽돌들인 하늘에 속한 성도들을 하늘나라로 보내 주어야 해요.

그게 성도의 죽음입니다.

 

하나님은 마귀에게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 된 자들을 죽이도록 허락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은 다 짐승에게 죽임을 당하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시온 산에 어린 양과 함께 서 있는 십사만 사천은 모두가 마귀로부터 죽음을 당한 자들이에요.

그래서 15장에서는 짐승으로부터 이기고 벗어난 자들을 구약 시대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유리 바닷가에서 모세의 노래와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 짐승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모세의 노래와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른다고 합니까?

이는 구약 이스라엘이 모세와 함께 죽음의 바다를 건너 온 것처럼 이들도 예수와 함께 죽음을 지나온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도들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과 동일해요.

 

계시록 11장을 보세요.

 

계 11:7-12=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8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9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10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11 삼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12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두 증인들이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온 짐승에게 죽임을 당하지요.

그런데 이 죽음을 예수님의 죽음과 같은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두 증인이 죽은 곳을 영적으로 하면 구약의 출애굽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곳과 같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두 증인이 왜 죽었는가요?

땅에 거하는 자들의 악함을 고발하다가 죽었어요.

이것은 예수님께서 땅에 속한 자들로부터 죽임 당한 것과 같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짐승에게 죽임 당한 두 증인들을 하늘로 올라오라고 하지요.

이것은 예수님이 죽어서 하늘로 승천하신 것과 같아요.

하나님이 버림 당한 예수님을 하늘 예루살렘 성전에 모퉁이 돌을 삼았잖아요.

 

그리고는 두 증인들을 예수님처럼 죽임 당하게 하고서는 예수님 옆에 벽돌로 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 있는 영혼들이 하나님 앞에서 빨리 자기들의 원수를 갚아 달라고 하니까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면서 너희 동무들이 죽기까지 기다리라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계시록 6장입니다.

 

계 6:9-11=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10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11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죽임 당한 영혼들이 하나님에게 원수를 갚아 달라고 하지요.

그러자 하나님이 잠시 기다리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 너희 동무들이 너희들과 똑같이 예수의 증거로 인하여 죽임을 당하여서 그 수가 차야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이는 이 땅에 있는 성도들이 예수님처럼 죽임을 당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있는 성도들은 모두가 죽음에 순번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죽으면 하늘 예루살렘 성전의 벽돌로 사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는 겁니다.

 

계 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 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죽음을 뭐라고 하는가요?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쉰다고 하지요.

죽음이란? 이 땅에서 제대하는 겁니다.

고생 그만 하고 올라오라는 특권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죽음을 안식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죽음이 저주가 아니에요.

복이에요.

복!

 

이사야 57장을 봅시다.

 

사 57:1-2= “의인이 죽을지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자비한 자들이 취하여감을 입을지라도 그 의인은 화액 전에 취하여 감을 입은 것인 줄로 깨닫는 자가 없도다 2 그는 평안에 들어갔나니 무릇 정로로 행하는 자는 자기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느니라”

 

의인의 죽음을 뭐라고 하나요?

침상에서 쉰다고 하지요.

평안에 들어간다고 하지요.

 

죽음이란? 회사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서 편안하게 쉬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천국에서의 안식을 상징하는 안식일을 엿새 동안 일을 한 후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의 안식을 주시려고 이 땅에서의 수고와 슬픔을 주셨어요.

그래서 성도들은 이 땅에서 예수님처럼 미움을 받고 버려지고 죽임 당하는 수고와 슬픔의 과정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이란? 이 세상 일을 마치고 퇴근하는 거에요.

아버지 집으로 가는 겁니다.

하늘에 속한 자들은 빨리 주님이 계신 곳으로 가고자 해요.

화목한 가정이 있는 사람은 빨리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가고자 하잖아요.

그러니 이 세상에서 퇴근하는 죽음이 복이지요.

 

하나님은 죽음으로 하늘에 속한 자와 땅에 속한 자를 구분하세요.

하늘에 속한 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땅에 거하는 자는 죽음을 두려워해요.

그래서 하늘에 속한 자들은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다가 죽임을 당하고 이 세상을 떠나지만, 땅에 속한 자들은 짐승에게 경배를 하고 저주받은 이 땅에서 코 박고 오래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계시록 13장은 이걸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하늘에 속한 성도들은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아요.

짐승에게 경배치 않고 그의 표를 받지 않으니까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죽은 줄 알았는데 이들이 하늘에 있는 시온 산에서 어린 양과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시록 14장은 이를 말해주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하신 겁니다.

땅에 거하는 자는 살고자 하여서 짐승에게 경배하고 666 짐승표를 받고 저주 아래서 살지만,

하늘에 거하는 자들은 짐승에게 경배치 않고 666 짐승표를 받지 않고 죽음으로서 이 세상에서 제대를 하고 하늘에서 영원히 평안하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아주 역설이지요.

 

성도에게 죽음이란? 하늘나라로 이사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성도의 죽음을 복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죽음을 슬퍼할 것이 아니라 기뻐하여야 합니다.

 

마귀는 아무나 죽이지 않아요.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이 적힌 성도들만 죽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이 땅에서 구속을 받은 십사만 사천의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써져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참 재미있지요.

어린 양의 이름이 적힌 자들은 마귀가 죽이고,

이마에 666 짐승표를 받은 자는 하나님이 죽이십니다.

마귀에게 죽임 당한 성도는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죽임 당하는 자들은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누구로부터 죽임을 당하겠습니까?

이 땅에서 예수 믿음을 지키다가 마귀로부터 고난 받고 죽임을 당하고 싶습니까?

아니면 마귀와 짝하고 이 땅에서 잘 살다가 하나님으로부터 죽임을 당하고 싶습니까?

물론 이것은 우리가 각오하고 의지를 불태운다고 되는 일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해 주셔야지만 하는 일입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노력해서 지켜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거나 좌절하지 마십시오.

낙망도 하지 마세요.

 

어떤 분들은 신앙생활을 징징짜면서 해요.

이건 아니에요.

예수 믿는 것을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징징거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감사와 기쁨으로 해야 하는 겁니다.

 

신앙생활은 일이 아니에요.

구원해 주심에 감사하고 찬미하고 사는 거에요.

초대교회를 보세요.

죽어가면서도 기뻐했어요.

 

신앙생활은 머리 박박 밀고 눈 부릅뜨고 가자미 눈으로 상대를 째려보면서 하는게 아니에요.

마치 메이저 리그 홈런 타자들처럼 껌 질겅 질겅 씹으면서 경기를 하듯이 여유롭게 하여야 해요.

제발 좀 넉넉하세요.

느긋하세요.

 

이사야 43장을 보세요.

 

사 43:1-7절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3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4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5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방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방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6 내가 북방에게 이르기를 놓으라 남방에게 이르기를 구류하지 말라 내 아들들을 원방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라 7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니라”

21절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함이니라”

 

야곱아 너는 내 것이라고 하지요.

야곱은 우리들이에요.

나에요.

하나님이 나를 창조 했다고 합니다.

 

왜? 창조 했다고 합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했고 지었고 만들었다고 합니다.

왜 창조 했느냐?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려고 지었다고 합니다.

 

창조했고, 지었고, 만들었다는 말은,

구원을 하셨고, 구원을 이루어가고 있으며, 구원을 이룰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과정에 물에도 들어가고 불에도 들어가는 일들이 있어요.

쉬운 말로 우리의 더러운 죄를 씻기고 우리의 악을 태운다는 말입니다.

 

이걸 베드로는 시련이라고 했어요.

시련이란? 용광로에서 쇠를 제련하는 것을 말해요.

우리의 신앙을 정금같이 만들어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욥이 그랬잖아요.

그 혹독한 시련이 결국에는 정금같이 만들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야곱을 위하여 애굽을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대신 주었다고 합니다.

쉬운 말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려고 이 세상을 마귀에게 내어 주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려고 투자 한 것이 너무도 많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지켜 내시는 것입니다.

물 속에서도 건져 내고 불 속에서도 건져내세요.

 

왜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야곱이 바로 시온 산에 서 있는 십사만 사천인 겁니다.

그래서 그들의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같이 적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으세요.

제발 좀 자긍심을 가지세요.

 

꼬라지가 이래도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그러니 세상살이가 좀 어렵다고 하여도 하늘나라에 서 있는 십사만 사천 중에 우리도 포함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좀 당당하세요.

 

이건 객기를 부리라는 말이 아니에요.

우리 정체성을 좀 알고 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666를 가지고 호들갑을 떨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건 진짜와 가짜를 찾아내고자 하는 겁니다.

성도는 그 어떤 것으로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아요.

 

로마서 8장을 다시 봅시다.

 

롬 8:28-39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미리 정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영화롭게 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환란이든 곤고이든 위험이든 기근이든 적신이든 궁핍이든 죽음이든,,,,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 내지를 못한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비록 우리의 세상살이가 도살당하는 양처럼 처해 있더라도 낙심하거나 두려워할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란 겁니다.

적그리스도가 일어나는 것도 다 하나님이 정한 것이고,

성도들이 적그리스도에게 죽임당하는 것도 다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에요.

 

우리의 생사화복이 하나님의 손에 있어요.

참 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하에 떨어집니다.

들에 백합화도 공중에 까마귀도 하나님이 먹이십니다.

살게 하는 것도 하나님이시고 죽게 하는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기고 낮추기도 하시고,

아프게도 하시고 싸매기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고 궁핍하게도 하세요.

 

그래서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때로는 부하기도 하고, 때로는 궁핍하기도 하지만 예수 안에서 보면 다 지나가는 것이므로 세상의 어떠한 형편으로 인하여 울고 불고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자로 살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고, 가난하게 사는 것도 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가 자기가 맡은 역할을 가지고 불평하면 안 되어요.

드라마에 캐스팅 된 것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바울이 그랬잖아요.

 

어떤 사람은 씨를 뿌리는 일을 하고,

어떤 사람은 물 주는 일을 하고,

어떤 사람은 밭 매는 일을 하는 겁니다.

 

이건 일로 인하여서 논공행상을 할 문제가 아니에요.

일에 참여한 것으로 감사하여야 하는 일입니다.

바울은 예수그리스도의 일에 참예한 것으로 감사했어요.

 

다윗은 성령의 감동으로 이 세상의 왕 보다도 하나님의 나라에서 성전의 문지기가 더 영광되고 복된 자리라고 하였어요.

우리의 이 세상에서의 삶은 드라마와 같아요.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창세전 언약이라는 시나리오를 가지고 예수님을 주인공으로 하는 대하드라마를 찍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주인공인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하여 각자에게 맡겨진 배역을 충실히 연기하다가 하늘나라로 가요.

 

그러니 맡은 배역을 가지고 따지지 마세요.

나사로는 거지 역할 하다가 천국에 갔잖아요.

반면에 부자는 지옥으로 갔어요.

누가 더 복된 자입니까?

 

성경을 모르는 이 세상 사람들의 가치로 보면 부자가 복된 자인 것 같지만 성경을 아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거지 나사로가 훨씬 더 복된 자라는 것을 압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이 세상에서의 삶을 가지고 그렇게 희비할 일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한 배를 타고 간다면 그럼 된 겁니다.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가도 풍랑을 일어나요.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세요.

배에 물이 들어오더라도 당황하지 마세요.

이는 모두가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기 때문에 당하는 아픔들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의 구원을 끊어지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백성 구원하는 이야기를 중심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는 애초부터 자기 백성들은 구원 받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녹명이 되었다는 것은 곧 구원 받을 자는 이미 결정이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이걸 구약에서는 언약의 후손을 출애굽 시키는 것으로 보여 주였습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되었다는 것은 녹명되지 않은 자를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이러면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공존하고 있음이 됩니다.

이를 예수님께서 오셔서 너희와 저희로 구분하는 것으로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를 찾으러 오셨습니다.

너희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알려 주십니다.

너희들은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입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 눈에는 불공정 게임처럼 보여요.

창세전에 천국 갈 자와 지옥으로 갈 자를 작정을 했다는 것은 인간의 노력을 원천적으로 박탈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은 창세전에 예정 된 것을 믿지 않고 화를 내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어둠의 사고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 비유로 어둠의 사고가 옳지 않음을 책망합니다.

토기를 만드는 것은 토기장이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고 피조물은 토기입니다.

 

토기는 반발 할 수가 없습니다.

반발한다는 것은 자기 생각이 있다는 뜻입니다.

피조물이 자기 생각을 갖는 것이 죄에요.

생각은 창조주가 하시는 것이에요.

피조물은 창조주의 생각에 따르면 되어요.

 

요즘 인공지능에 대하여 말이 많습니다.

인간들이 로봇을 만드는 것은 인간을 위해서에요.

로봇은 자기 생각을 가지만 안 되어요.

인간들이 입력한 것으로만 움직이면 되어요.

입력한 것 밖으로 움직이면 고장난 것이에요.

로봇이 자기 생각을 갖는 것은 고장이 난 것입니다.

 

토기가 토기장이에게 따지는 것은 로봇이 입력한 대로 움직이지 않고 자기 맘대로 움직이는 것과 같아요.

피조물이 자기 맘대로 움직이는 것은 스스로 하나님이 된 것입니다.

이걸 죄라고 합니다.

 

뱀이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게 할 때 한 말이 바로 너희가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 같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같이 된 것이 결국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반기를 드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마귀는 철저하게 피조물 입장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판단합니다.

이걸 인본주의라고 합니다.

 

모든 인간은 죄 아래서 태어납니다.

죄 아래서 태어난다 함은 자기주장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자 모두가 하나 인 줄 알았는데 두 부류로 갈라지는 것입니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기로 작정 된 것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하는 자들과 인간의 생각을 가지고 반발하는 자들로 구분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걸 ‘의(義) 싸움’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을 받아들이는 자는 예수님의 의를 가진 자이고,

예수님의 말을 반대하는 자들은 자기 의를 가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이 싸움이 만개가 되어서 나타나는 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나타나는 싸움은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와의 싸움입니다.

이것을 어린 양에 속한 자와 짐승에게 속한 자의 싸움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이 적힌 자들을 일컬어 여자로 더불어 음행하지 않고 정절을 지킨 자들이라고 합니다.

성도가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고 그 우상과 그 이름의 수를 벗어난 것을 왜 정절을 지켰다고 할까요?

 

이것을 알려면 이스라엘의 결혼 풍습을 알아야 합니다.

그 속에 힌트가 들어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연애결혼이란 없습니다.

모두가 부모에 의해서 결정이 됩니다.

아버지가 며느리 감을 결정합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점지해 준 여자와 결혼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창세전 언약에 보면 아버지가 어린 양의 생명책에 어린 양의 신부들을 녹명해 둔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께서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여자들을 어린 양의 신부로 간택을 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아버지가 점지 해 둔 자기 신부들을 데리고 천국으로 갑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아버지가 정해 놓은 자들만 데리고 가십니다.

 

이 모습이 결혼 풍습 속에 아버지가 아들의 신부감을 정하는 것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신부감을 정하고 나면 신부에게 아들의 전령을 보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가 될 리브가를 얻기 위하여 집에서 길리운 종인 엘리에셀을 리브가에게 보내서 정혼 서약을 하게 한 것과 같습니다.

종은 주인의 아들에 신부가 될 사람에게 결혼 빙폐물과 함께 신부의 아버지에게는 결혼지참금을 줍니다.

 

이러면 정혼이 성사가 된 것입니다.

결혼 지참금은 신부를 값으로 샀다는 의미로 신부의 아버지에게 주는 겁니다.

내가 당신 딸을 돈 주고 샀습니다!

이제부터 이 여자는 당신의 딸이 아니고 내 여자입니다!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신랑이 신부에게 준 빙폐물은 ‘당신은 내 여자입니다’ 라는 것을 알려주는 보증과 같아요.

 

이건 마치 마귀 아래 있던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마귀에게 속전으로 준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를 일컬어 값으로 산 자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고자 그 아들을 마귀에게 결혼 지참금을 준 것입니다.

마귀는 예수라는 값을 받고 우리를 내어 준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은 우리의 피 남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면 소유권이 이전이 된 것입니다.

소유권이 이전이 되면 이제부터 주인이 바뀌게 됩니다.

이제부터는 새로운 주인의 법에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남편이 되어서 우리를 주장하게 됩니다.

 

이것은 언약적으로 말하면 율법 아래서 은혜 아래로 옮겨진 것과 같습니다.

옛 언약에서 새 언약 안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옛 언약 아래 있을 땐 사사건건 법으로 정죄당하고 살았습니다.

법 아래서는 안식이 없었습니다.

늘 수고와 슬픔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 안에서는 모든 걸 신랑이 책임을 져 줍니다.

신랑이 책임을 져 주니까 정죄 받을 일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새 언약 안에서는 쉼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안식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정혼이 성사가 되면 종은 아들의 신부가 될 여자에게 신랑에 대하여 소상하게 알려 줍니다.

신랑이 어떻게 생겼는지, 무얼 좋아하는지, 식성은 어떤지,,,,

신부는 종을 통해서 신랑에 대한 정보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종이 준 빙폐물로 몸을 단장하게 됩니다.

 

종은 아들의 신부에게 어느 때 쯤 신랑이 데리러 올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돌아옵니다.

그럼 신부는 신랑이 보낸 옷을 입고 각양의 장신구인 빙폐물로 몸은 단장하고 기다리게 됩니다.

이 때부터 사실혼 관계로 돌입이 됩니다.

 

이스라엘은 정혼과 동시에 사실혼으로 취급합니다.

그러므로 신부는 이 때부터 정절을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동네 총각들과 어울려서도 안 됩니다.

철저하게 주인 있는 여자로서 행동해야 합니다.

 

재미있는 것이 정혼 단계에는 아들은 자기 신부의 얼굴을 보지 못합니다.

아버지가 보낸 종이 가서 예물을 주고 정혼을 하기 때문입니다.

신랑은 종이 체결해 놓은 그 정혼 상대의 얼굴을 나중에 결혼 때 보게 됩니다.

 

이것은 성도가 구원 받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도 신랑의 얼굴을 본 적이 없습니다.

성령이 알려준 것으로만 이해 할 뿐입니다.

 

성도의 구원을 두 가지 수순으로 이루어집니다.

먼저 성령의 보증을 받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신랑에 대하여 알려주십니다.

우리는 성령이 알려준 그 정보를 가지고 신랑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걸 믿음으로 산다고 합니다.

 

왜 성경은 그토록 성도들에게 믿음으로 살라고 합니까?

이는 이 땅에 뱀 새끼인 거짓 종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절을 더럽히고자 하는 세력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바로 적그리스도 세력입니다.

땅에 짐승들입니다.

 

이들은 계시록 17장에서 음녀를 말합니다.

이 음녀가 12장에서는 짐승의 나라로 나타났습니다.

12장의 짐승이나 17장의 음녀는 모두가 비진리로 미혹하는 자들입니다.

땅에 말로 미혹합니다.

 

여기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성도들이 따르지 않습니다.

그러자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락한 교회인 음녀가 성도들의 피에 취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피에 취하였다는 것은 성도들을 죽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자로 더불어 정절을 지키다가 죽임을 당한 십사만 사천이 시온 산에 서서 어린 양이 이끄는 대로 따라 다닌다고 하는 것입니다.

십사만 사천은 음녀로부터 믿음을 지키다가 죽임을 당한 성도들입니다.

 

이 땅에서 어린 양에 대한 믿음에 정절을 지키다가 죽임을 당하였는데 살아서 천국에서 어린 양과 더불어 세세토록 살면서 새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속된 말로 이 땅에서 죽었는데 눈 뜨고 보니까 천국에 와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드라마틱 합니까!

어메이징 그레이스입니다.

놀랍지 않으세요.

 

이게 요한계시록이 우리에게 주는 소망이고 위로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지상에서 핍박당하는 교회의 모습과 천상에서의 승리한 교회의 모습을 교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소망을 주고 응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너희들이 비록 이 땅에서 예수 믿음 때문에 많은 아픔을 겪지만 그것은 모두가 눈물 없고 고통없고 사망이나 아픔이나 배고픔이 없는 천국을 유업으로 주고자 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짐승들에게 죽임을 당한다고 하여도 슬퍼하거나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두가 승리로 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일시적인 아픔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어린 양도 이 땅에서 버림을 당하였고, 그와 함께 하는 십사만 사천도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인하여 목 베임을 당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시온산에 서 있는 겁니다.

 

시온 산이란? 하나님의 도성이에요.

문자적으로 보면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곳입니다.

이곳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친 그 산이고, 다윗이 범죄하여 제사를 지낸 아라우나 타작마당이에요.

 

뭔가 느낌이 오지 않나요?

희생 제사를 지낸 장소잖아요.

이는 곧 성도들이 제물로 드려진 곳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어린 양과 그 이름 때문에 이 땅에서 짐승으로부터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이 시온 산에 서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이 왜 이러한 것을 기술하고 있나요?

이는 하늘에 속한 자들은 필연적으로 이 세상으로부터 버려짐을 당하는 삶을 살도록 운명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1장에서부터 13장까지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 된 자들이 용의 수하들인 땅에 짐승으로부터 핍박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인 14장에서는 짐승으로부터 죽임 당하는 그것이 하늘에 복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불 같은 시험을 당하더라도 그것은 너희를 하늘에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니 기뻐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시온산에 서 있는 십사만 사천을 보면 어떤가요?

모든 수고를 그치고 쉬고 있는 모습이 보이지 않나요?

빨리 가고 싶은 생각이 안 드는가요?

 

비록 이 땅에서 믿음을 지키고 살다가 어렵고 힘든 일을 당한다고 하여도 그건 슬퍼할 일이 아니라 우리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당하는 아픔이라는 것을 알고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건 아주 역설적인 말인데,,,,

성도가 되어서 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당하지 않고 핍박을 당하지 않음이 저주입니다.

믿음으로 살면서 고난이나 핍박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이 새겨져 있지 않다는 반증이 될 수가 있습니다.

 

성경을 보세요.

믿음으로 살던 성도들은 모두가 고난을 당하였어요.

그럼 지금도 동일해요.

믿음으로 살면 반드시 고난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고난이 없다?

이건 뭔가 이상한 겁니다.

믿음이 가짜일 확률이 높아요.

 

짐승은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이 새겨진 자를 귀신 같이 알아보고 핍박해요.

귀신들이 예수님을 대번이 알아보지요.

마찬가지에요.

귀신은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은 알아보아요.

 

그래서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이 새겨진 성도들은 자기의 원함과 상관없이 복음으로 인하여 미움을 받고 믿음 때문에 핍박을 받는 구조 속으로 떠 밀려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린 고난 없이 살고 싶어해요.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원대로 두지 않아요.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두고 내 잔을 옮겨 달라고 한 것처럼 우리도 역시 예수 믿는 것으로 인하여 고난당하는 걸 싫어해요.

우린 도리어 예수를 이용해서 이 땅에서 호의호식하고 싶어해요.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의 체질을 잘 아시기 때문에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이 마귀를 가지고 십자가를 지는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살면 반드시 버림당하는 일을 당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버림당함으로서 이 세상에 속하지 않한 자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마귀로부터 고난을 당함으로서 어린 양에게 속한 자임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13장에서 짐승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14장에서는 하늘나라에 있는 겁니다.

 

이건 뭘 말하고 있는 겁니까?

환란 속에 있는 성도들에게 소망을 주기 위함입니다.

너희가 비록 세상에서 예수 때문에 죽임 당하더라도 그것은 하늘나라에서 살기 위한 수순이니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요한계시록을 읽고 들으면서 눈물을 흘렸어요.

일고 들으면서 감사하고 기뻐하였어요.

아~! 우리가 가야 할 곳이 저기이구나!

잠시 잠간 후면 우리도 하늘에 있는 시온산으로 가겠구나! 하면서 감동하고 감사했던 겁니다.

우리도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동일한 위로와 소망을 받아야 합니다.

 

모든 성경은 다 소망의 말씀이고 위로의 말씀이에요.

그러니 이 믿음으로 사세요.

이 땅에서의 삶은 모두가 지나가는 것이니까요.

그 어떤 처지와 형편 속에서도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시온 산에 어린 양과 서 있는 십사만 사천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세상을 넉넉히 이겨 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 하나님! 이 세상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되어짐을 믿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약속의 끝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성령께서 날마다 우리 안에 산 소망을 주시고 하늘에 있는 시온 산을 바라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어떤 것으로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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