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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1~3 강해

04강. 첫째 날, 빛이 있으라 (창 1:3-5)

by coroa 2020. 7. 13.

-.04강. 첫째 날, 빛이 있으라 (창 1:3-5).-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정낙원 목사

 

창조의 시작은 빛으로부터 출발을 합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세상에 “빛이 있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집니다.

하나님의 첫 마디가 “빛이 있으라” 입니다.

그래서 빛이 오심을 첫째 날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무에서 유로 이루어집니다.

이를 어둠 속에서 빛이 나오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오는 것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흑암 속에 빛이 오심으로 창조의 시작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빛이 있으라는 말은 빛을 세상에 존재케 하셨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께서 빛을 세상에 보내셨다는 뜻입니다.

빛이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세상에 존재케 됨으로서 역사의 첫째 날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빛이 있으라 에 대하여 살펴봅니다.

미리 결론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빛으로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심으로 첫째 날이 시작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예수님이 오심으로 새로운 피조물의 인생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시면 첫째 날이 됩니다.

 

이건 마치 애굽에서 나올 때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살아난 날을 해의 첫째 날로 삼으신 것과 같습니다.

애굽은 흑암의 나라입니다.

흑암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죽음 속에 있던 언약의 후손들이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죽음에서 나와서 첫째 날의 시작이 열린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절의 땅의 모습은 죄 아래 있는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이 땅의 모습이 어떠했나요?

혼돈과 공허와 흑암입니다.

어둠이었습니다.

 

어둠의 동네에 빛이 온 것입니다.

어둠에게는 빛은 아주 낯선 것입니다.

한 번도 만난 적도 없고 경험해 보지 못하였습니다.

 

빛의 출현으로 어둠의 세상에 엄청난 혼란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 들여야 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아주 낯선 하나님을 만난 것과도 같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하신 일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성경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려주고자 하심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떤 일을 하셨고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은혜를 입고 살아가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 성경의 수신자는 이스라엘이고 신약에는 교회입니다.

요한계시록 2-3장을 보면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냅니다.

그리고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보낸 편지를 받을 수신자는 귀 있는 자들입니다.

어떤 귀인가요?

영적 귀입니다.

 

편지의 내용은 아무나 듣는 것이 아닙니다.

편지의 내용을 들을 사람은 따로 정해져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인가 하면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입니다.

성령이 영이시기 때문에 영적 귀를 받아야지만 성령의 말씀을 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왜 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하였을까요?

이는 성령으로 난 자들 만이 성경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왜 그런가요?

성령으로 난 자 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 한 백성들은 애굽에서 태어나서 애굽에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말로만 언약의 후손이지 실제로는 애굽 사람입니다.

말만 하나님의 백성이지 하나님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을 알지도 못합니다.

 

애굽은 죄와 사망의 나라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죽은 세상입니다.

애굽은 하나님을 모릅니다.

애굽에서 태어난 이스라엘 백성들도 애굽 사람들처럼 하나님을 모르긴 매 마찬가지입니다.

 

애굽에서는 참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설령 안다고 하여도 애굽의 정보로 알아진 하나님입니다.

애굽의 정보로 알아진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출애굽 한 후에 금송아지를 섬기는 것으로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려면 하나님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일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리는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모세를 시내산 위로 올라오게 하여서 십계명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십계명의 제 일 계명이 나 이외에는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형상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지금 너희가 섬기고 있는 형상화 된 하나님은 다른 신이라는 것입니다.

애굽의 신이라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알아진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 아니고 다른 하나님입니다.

이제부터 참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려 주시겠다고 합니다.

그것이 광야의 삶입니다.

광야는 참 하나님을 알아가는 곳입니다.

 

얼마나 아이러니 합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모릅니다.

왜냐하면 참 하나님을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나 본 적이 없는 자들이 하나님을 섬기면 어떻게 섬길까요?

자기들 방식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알고 있는 방식은 애굽의 방식입니다.

애굽의 방식으로는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애굽의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 아니고 가짜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애굽 방식으로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방식으로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 방식으로 섬기려면 먼저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광야로 빼내시고 나타나셔서 제일 먼저 백성들에게 참 하나님을 알려주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시내 산 강림 사건입니다.

시내 산에서 비로소 참 하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참 하나님을 만나고 보니까 애굽에서 알던 하나님과는 완전히 다른 하나님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은 참 하나님을 알아가는 기간이었습니다.

신관이 바꿔치기 당하는 기간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세상에서 교회로 부르심을 입고 성경을 통해서 참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도 참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세상에서 알아진 하나님이었습니다.

이름은 하나님이라고 하여도 다른 하나님이었던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비로소 참 하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교회에서 알아진 하나님은 세상에서 알던 하나님과는 너무도 다른 하나님인 것입니다.

여기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다른 하나님을 제거하고 참 하나님을 심는 전쟁인 것입니다.

이게 창세기 1장에서 빛이 어둠에 비취는 창조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절의 땅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영적으로 우리의 모습이 바로 흑암이고 어둠인 것입니다.

흑암이고 어둠인 세상에 하나님이 빛으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비로소 참과 거짓이 구분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는 출애굽과 같은 것입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창조와 구원을 동의어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빛이 어둠에 온 것은 스스로를 계시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위에 계시고 인간은 땅에 있습니다.

하늘에서 땅은 볼 수가 있어도 땅에서는 하늘은 볼 수가 없습니다.

땅이 하늘을 알 수 있는 것은 하늘이 스스로를 땅에게 계시해 주어야 합니다.

 

출애굽 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스스로를 드러내는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시내산 위로 부르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리고자 함입니다.

비로소 참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십니다.

그것이 십계명이라는 율법입니다.

모세는 백성들에게 율법을 낭독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 줍니다.

이건 마치 우리가 교회에 와서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배워가는 것과 같습니다.

 

선(先) 구원,

후(後) 가르침입니다.

이는 가르침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함입니다.

깨달음이 하나님의 일하심에 감사케 하고 그 은혜를 찬송케 되는 것입니다.

앎이 먼저이고 삶은 나중입니다.

 

감사와 찬송은 깨달음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서 하나님을 아는 일들을 열심히 벌리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간섭하심으로 나타납니다.

부대낌입니다.

 

하나님과 부대끼면서 하나님을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부모와 자식이 싸워가면서 자식은 철이 들어가게 되고 철이 들고 나면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효도하게 되는 것과도 같습니다.

 

자식이 철이 들어가는 것과 성도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은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과 성도와의 관계를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정은 교회와 같은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대체 어떤 분이고 무슨 일을 하시는지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때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열면 첫 마디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창 1: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건 하나님이 이런 일을 했다는 통고입니다.

이를 구속사로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했다는 말입니다.

“내가 널 구원 했어” 그 말입니다.

창조와 구원은 동의어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셨습니다.

천지는 하늘과 땅입니다.

이는 두 나라를 말합니다.

 

천(天)은 하늘나라이고,

지(地)는 땅의 나라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나라와 땅의 나라 두 나라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보이지 않는 나라이고,

땅의 나라는 보이는 나라입니다.

이걸 지난 시간에 실상과 그림자라고 했습니다.

이를 원본과 복사본으로 살펴보았습니다.

 

보이는 나라는 보이지 않는 나라로부터 나왔습니다.

하늘나라는 보이지 않는 나라이고 이 땅의 나라는 보이는 나라입니다.

위에는 하늘나라가 있고 아래는 땅 나라가 있습니다.

하늘나라가 원본이고, 땅 나라가 복사본입니다.

 

하늘나라가 실상이고 땅의 나라는 그림자입니다.

그림자로서는 실상을 올바로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계시로 땅의 나라에 하늘나라의 비밀들을 알려주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분명히 천(天)이라는 하늘나라와, 지(地)라는 땅 나라를 창조 하셨습니다.

그런데 2절에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고 합니다.

 

창 1:2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聖靈)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늘나라는 사라지고 땅 나라만 나타납니다.

1절에는 분명히 하늘나라와 땅 나라를 창조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2절에는 하늘나라는 간곳없고 땅 나라만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 땅 나라가 이상합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습니다.

이건 죽음을 말합니다.

타락을 말합니다.

죄 아래 있는 세상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을 하십니다.

수면이란? 물 위라는 뜻입니다.

땅이 물속에 잠겨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물을 죽음으로 말합니다.

그러니까 땅은 죄로 인하여 죽은 세상인 것입니다.

 

죽은 세상에 하나님의 신이 운행을 합니다.

하나님의 신은 성령을 말합니다.

성령도 하나님이십니다.

성령 하나님이 죽은 세상에 운행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치 땅에 바람이 불듯이 말입니다.

에스겔 37장을 보면 죽은 해골들이 가득한 골짜기에 생기가 불어 닥치는 것과 같습니다.

생기가 죽은 해골들을 살려냈습니다.

이를 역순으로 보면 수면에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운행이란? 닭이 알을 부화시키기 위하여 품고 있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닭이 알을 품고 있는 것은 새로운 생명을 낳고자 함입니다.

그럼 성령 하나님도 죽은 세상에서 새 생명을 낳는 일을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 일이 3절부터 일어납니다.

3절부터는 죽은 세상인 땅 나라에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창조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첫째 날부터 일곱째 날까지입니다.

첫째 날부터 일곱째 날까지가 땅의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들인 것입니다.

 

첫째 날은 시작이고, 일곱째 날은 안식입니다.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일을 하시고 일곱 째 날에는 안식을 하시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창조가 세 텀으로 일어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는 갈라내는 일을 하시고,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채우는 일을 하시고,

일곱째 날은 안식하십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는 하나님이 피조물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 나라에 방문하셨다는 뜻입니다.

역사 바깥에 계시던 하나님이 왜 역사 세계에 방문 하셨을까요?

이는 뭔가 하실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할까요?

창조의 일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방문하면 세상의 창조가 일어나고,

하나님이 사람을 방문하면 새로운 사람의 창조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천지에 방문하여서 창조의 일을 하시듯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 오셔서 구원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의 일 속에는 천지를 갈라내고 만물을 채우는 것과 같이 갈라내고 채우는 것도 있습니다.

 

구원은 건져 내는 것만 있지 않고 채우는 것도 있습니다.

이미 이루어진 구원도 있지만 현재 이루어가는 구원도 있습니다.

 

이미 이루어진 구원은 죄와 사망에서 건져냄을 당한 것이고,

현재 이루어가는 구원은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으로의 자라감입니다.

 

이미 이루어진 구원은 엄마 뱃속에서 나온 것이고,

현재 이루어가는 구원은 부모의 도움으로 장성한 자로 자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미 이루어진 구원은 단회적이지만,

현재 이루어가는 구원은 점진적이고 심층적입니다.

 

창조 속에는 성도의 구원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육적인 것을 가지고 영적인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적인 천지 창조 속에 영적인 구원 이야기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 속에는 두 창조가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하늘나라와 땅 나라를 창조 하셨습니다.

하늘은 보이지 않는 나라이고, 땅은 보이는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태초에 보이는 나라와, 보이지 않는 나라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나라는 영적 존재들이 살아가고, 보이는 나라는 육적 존재들이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에서의 일을 보이는 땅의 나라에서 이루어가십니다.

그래서 1절에서는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고서는,

2절에는 하늘을 사라지고 땅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2절 이후로는 모두가 땅이라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 나라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하늘나라에서 일어난 일을 이 세상 나라에서 회복하는 일을 하십니다.

이것을 지난 시간에 성도의 구원은 찬양을 맡은 천사들의 타락으로 공석이 된 하나님 나라의 찬양대 자리를 채우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기도를 알려 주셨습니다.

이름 하여 주기도문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속에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마 6:9-13절.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주기도문의 핵심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늘에서의 일이 이 땅에서 회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늘에서 천사들의 타락이 있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 아들을 보내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 하여서 천사들이 타락한 그 자리를 채우는 일을 하십니다.

 

천사의 타락은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불순종이 회복이 되려면 순종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버지의 말에 절대 복종하는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서,

아버지의 뜻에 절대 복종하는 그 아들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창조케 하였습니다.

예수그리스도로 새롭게 창조가 된 자들은 천사들의 타락으로 쫓겨난 빈자리를 채우게 됩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일을 이 역사 속에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죄로 죽은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흑암의 땅에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창조의 첫째 날에 하나님이 빛을 땅에 있게 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라는 말은 “하나님이 말씀 하시되” 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성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으로 해석 할 수가 있습니다.

둘째는 성부 하나님이 말씀이신 성자 하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으로 해석 할 수가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 자기 백성을 누가 구원하는가요?

성자 예수님입니다.

그러자면 하늘나라에 말씀으로 계시던 성자 하나님이 이 세상으로 오셔야 합니다.

 

그것을 창조의 첫째 날 빛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빛이 있으라” 는 말은 빛의 존재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의역하면 “빛이라는 분이 이 세상에 오셨다” 라는 뜻입니다.

 

빛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부터 역사는 시작되었습니다.

어둠 속에 빛이 옴으로서 빛과 어둠이 갈라짐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과 같은 날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날이라는 것을 하루 이틀 사흘 이러한 순서상의 개념으로 보지 마시고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보세요.

 

창조의 하루를 어떻게 보느냐에 대한 여러 가지 학설들이 있습니다.

창조의 순서를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이러한 식으로 말하고 있으니까,

이건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시간을 말하는 것인지 궁금해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날의 개념은 시간 개념입니다.

알다시피 시간은 낮과 밤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낮과 밤이 있으려면 해와 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해와 달은 넷째 날에 창조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첫째 날부터 “저녁이 되매 아침이 되니” 라고 합니다.

해와 달이 창조가 되기도 전에 이미 저녁과 아침이 나옵니다.

그럼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의 저녁과 아침은 무엇일까요?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이라는 말은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시간일까요?

아니면 다른 의미일까요?

해와 달이 만들어지기 전인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의 시간을 세상적인 시간으로 보아야 하느냐 아니면 상징적으로 보아야 하느냐 의견이 분분합니다.

 

각자 나름대로 자기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원어를 분석하고 이론을 만들어서 주장을 하는데 이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창조는 우주 만물을 만들었다는 것을 말하는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통해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이야기를 창조 이야기로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의 하루가 24시간을 말하는 것이냐? 아니냐? 라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 자체가 물질적 창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에 의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영적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창조 사건을 물질적인 사건으로 보지 마시고 영적 사건으로 이해하세요.

 

성경의 이야기는 영적으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 이유는 모든 성경은 인간의 언어를 가지고 영적 이야기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하였다고 합니다.

 

성령께서 성경 속에 영적 의미를 담아 놓은 것입니다.

성경을 육적으로 보면 나타난 사건만 보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으로 영적 사건으로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이야기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성령의 감동으로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고 하였습니다.

 

벧후 3장 8절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하루는 역사적 개념이고,

천년은 묵시의 개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시간 속에서 시간 바깥의 일을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영적인 일에는 시간 개념이 없다는 뜻입니다.

 

성도는 영생을 받은 자로서 하루라는 시간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창조의 하루가 24 시간이냐? 아니냐? 라는 것으로 논쟁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하루 속에서 영생으로 살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은 성도는 역사의 하루 라는 시간 속에서 묵시의 생명으로 천년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사랑하는 자들아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구원 받은 성도들아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펼쳐 가시는 일은 모두가 하늘나라 이야기이니까 역사 속에서 묵시로 살아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창조란? 어떤 원인에 의한 결과로 나타난 것입니다.

원인이 먼저이고 창조가 나중입니다.

천지를 창조케 한 원인은 창세전 언약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먼저이고 천지 창조가 나중입니다.

이러면 피조물은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 역시 피조물이므로 언약이 먼저이고 우리의 존재가 나중인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자기 백성 구원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창조 이야기도 자기 백성 구원하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를 가지고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언약을 의인화 하면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먼저이고 우리가 나중입니다.

 

골로새서 1장을 봅시다.

 

골 1:15-17절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그란? 예수님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가 창조물보다 먼저 나셨다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피조물을 창조하신 창조주라는 말입니다.

 

그를 위해서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이 창조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를 창세기 1장 1절에서 천지창조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하늘(천, 天)이고, 보이는 것은 땅(지, 地)입니다.

보이지 않는 피조물은 영적 존재들이고, 보이는 피조물은 육적 존재들입니다.

 

영적 존재들도 예수를 위해서 창조가 되었고,

육적 존재들도 예수를 위해서 창조가 되었습니다.

예수가 피조물들을 존재케 하는 근원인 것입니다.

 

예수가 없으면 피조물도 없습니다.

그래서 만물이 그 안에 섰다고 합니다.

섰다는 말은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그 속에 예수가 없는 자는 무가치하다는 뜻입니다.

이를 흙이라고 합니다.

예수가 없는 자는 죽은 자로서 흙입니다.

그 속에 예수를 품고 있어야 살아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식당 앞에 보면 춤추는 인형들이 있습니다.

인형을 춤추게 하는 것은 그 속의 바람입니다.

인형 속에 바람을 불어 넣으니까 인형이 살아서 춤을 추는 것입니다.

바람은 인형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생명입니다.

바람을 빼면 인형은 푹 쓰러져 죽고 맙니다.

 

우리 인생이 인형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공급되면 살아 있는 자이고,

예수님의 생명이 공급되지 않으면 죽은 자입니다.

나로 살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생명입니다.

 

처음 흙으로 창조가 된 사람에게는 그 속에 생명이 없었습니다.

생명과를 먹어야 생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담은 생명과를 먹기 전까지는 그냥 흙입니다.

그 속에 생명과를 담을 때 진정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생명과는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그리스도로 생명의 사람이 되면 하나님 나라에서 그의 은혜의 영광을 세세토록 찬미하는 찬양대원이 되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두 세계의 창조가 있습니다.

 

영적 존재인 천사들이 살아가는 나라와,

육적 존재인 인간들이 살아가는 나라의 창조가 있었습니다.

 

천사들이 살아가는 하늘나라 창조가 먼저이고,

인간들이 살아가는 땅의 나라 창조가 나중입니다.

 

천사들이 살아가는 곳을 하나님의 동산 에덴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동산인 에덴에서 천사들이 창조의 뜻을 위배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찬양을 맡은 천사 중에서 우두머리 천사장인 마귀가 자기를 따르는 천사들을 앞세우고 하나님 자리를 탐하고자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마귀와 그 세력들을 하나님의 동산인 에덴 밖으로 쫓아냈습니다.

천사들이 쫓겨난 하나님의 동산인 에덴 밖을 땅이라고 합니다.

땅을 다른 말로 음부 또는 지옥이라고 하면서 흑암의 어두운 곳이라고 합니다.

 

이를 마태복음 25장에서는 창세로부터 예비 된 영벌의 곳이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20장을 보면 백 보좌 심판이 끝나고 나면 사단과 그를 따르던 천사들과 생명책에 녹명이 되지 않은 악인들이 가는 곳을 말합니다.

이 지옥은 처음 창조가 된 하늘나라에서 타락한 천사들이 들어간 곳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나라를 창조하시고 하늘나라 지옥에 가두어져 있던 타락한 천사들을 이 세상 나라로 쫓아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 2절의 땅의 모습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마귀가 쫓겨난 땅이 지옥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 2절의 땅 앞에 “그런데”라는 접속사 “웨(and)”와 “그”라는 정관사 “하(the)”가 붙어 있는 것입니다.

 

직역하면 “그런데 그 땅(And the earth)” 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천사들이 타락하여서 쫓겨난 그 땅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 1절에서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셨다고 하면서 2절에서는 하늘은 사라지고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중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흑암이라는 말은 죽음의 도시를 상징합니다.

이를 지옥이라고 합니다.

창세기 1장 2절의 땅이 지옥인 것입니다.

 

지옥이란? 하나님께 범죄 한 자들이 살아가는 곳을 말합니다.

마귀의 권세 아래 있는 곳을 말합니다.

마귀가 하늘에서 땅으로 쫓겨났기 때문에 이 땅이 지옥인 것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다”는 말은 “저주를 받아서 황폐하다” 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마치 아담이 범죄하자 하나님이 아담이 살아갈 땅을 저주하여서 가시와 엉컹퀴를 나게 한 모습과도 같습니다.

 

다시 설명합니다.

하늘나라가 있습니다.

거기에 천사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곳을 하나님의 동산 에덴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에덴에서 살던 천사들 중에서 일부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범죄 한 자들과는 함께 살 수가 없으므로 그들을 에덴 밖으로 쫓아냈습니다.

그곳을 땅이라고 합니다.

그 땅을 음부라고 하고 흑암이라고 하고 지옥이라고 합니다.

 

사 14:15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

 

벧후 2:4절 “하나님이 범죄 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유다서 1:6절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타락한 천사들이 쫓겨난 곳을 음부 지옥 흑암이라고 합니다.

 

이사야는 음부라고 하고,

베드로후서는 지옥이라고 하고,

유다서에서는 흑암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 모습을 이 세상에 셋팅을 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에덴동산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창세가 2장을 봅시다.

 

창 2:7-10절.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10.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만드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살아갈 땅을 만드십니다.

그 땅을 동방의 에덴에 동산이라고 합니다.

 

에덴과 동산은 다른 동네입니다.

그래서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으로 흐른다고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에덴에서 흐르는 강을 생명수 강이라고 합니다.

이는 에덴이 하나님이 계신 생명의 세계라는 뜻입니다.

 

동산은 에덴에서 흐르는 강물로 살아가는 곳입니다.

이걸 구조적으로 보시면 에덴은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고, 동산은 이 세상 나라를 상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창세기 1장 1절로 말하면 천지(天地)가 되는 것입니다.

천(天)은 하늘나라로서 에덴이고,

지(地)는 땅의 나라로서 동산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이 땅의 나라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땅의 나라를 상징하는 동산에서 사람을 구원하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동산에 두셨습니다.

동산은 이 세상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동산에 선악과와 생명과를 두셨습니다.

사람에게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동산에는 뱀도 있는 것입니다.

이 놈은 하나님 나라에서 쫓겨난 타락한 천사로서 마귀입니다.

뱀과 사람이 동산에 함께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나 베드로후서나 유다서에서는 타락한 천사가 쫓겨난 곳을 땅이라고도 하고 음부라고도 하고 흑암이라고도 하고 지옥이라고도 하였습니다.

 

그럼 뱀이 살고 있는 동산이 땅이 되고 하나님이 사는 에덴은 하늘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동산(땅, 이 세상)에서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어서 에덴(하늘나라)으로 나아오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계획한 창세전 언약이고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방법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의 천지가 창세기 2장에서는 에덴과 동산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구원이 어디에서 이루어지느냐?

땅이라는 동산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구원도 죄 아래 있는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땅이라는 동산에 살고 있는 사람을 구원하고자 동산에 생명과를 두신 것입니다.

이는 생명과를 가지고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심입니다.

이게 이 역사 세계에서 펼쳐지는 하나님의 자기 백성 구원 사역의 시작입니다.

이게 첫째 날인 것입니다.

 

땅의 나라 창조는 빛이 세상에 오심으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죄와 사망 권세 아래 있는 죽은 세상입니다.

이러한 곳에 예수님이 빛으로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오셨습니다.

이는 자기 백성들에게 하늘의 생명을 주기 위함입니다.

그것을 어둠 속에서 빛을 불러내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을 봅시다.

 

요 5:24-29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옵니다.

그 음성을 듣는 자는 살아납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이 모습이 창세기 1장의 창조 사건에서 첫째 날 흑암 속에서 빛을 불러내서 빛과 어둠으로 나누어지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식으로 말하면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 생명의 부활로 나아온 것과 같습니다.

 

구원은 죄와 사망 아래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예수그리스도가 건져 내는 것입니다.

이게 창조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세상에 그 아들을 보내서 죽은 자를 살려내는 창조의 일을 하십니다.

이것이 창조 첫째 날 “빛이 있으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 참 빛으로 오셨습니다.

 

요 1:9절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마 4:16절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예수님이 흑암의 나라에 참 빛으로 오셨습니다.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추었습니다.

참 빛이 각 사람에게 비췹니다.

사망에 앉은 자에게 빛이 비춘 것은 생명을 주신 것과도 같습니다.

참 빛이 비추어진 자들은 그 빛으로 살아나게 됩니다.

 

이를 요한복음 5장에서는 무덤 속에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 아들의 음성을 듣고 살아난다고 하였습니다.

음성을 들은 자들이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오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흑암에서 불러내서 빛의 나라로 옮겨주셨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골 1:13-14절.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예수님이 참 빛으로 오신 것은 죽음에 가두어진 하나님의 백성들을 불러내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마치 죽은 지 나흘이나 되는 나사로를 무덤 속에서 불러내는 것과 같습니다.

사망의 세력이 나사로를 꽁꽁 묶고 있었습니다.

이를 예수님이 풀어서 무덤으로부터 나오게 하여서 걸어 다니게 하신 것입니다.

이게 죄인의 구원 모습입니다.

 

세상 속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와 녹명 되지 않은 자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너희”와 “저희”라고 하셨습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신자를 너희”라고 하였고,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 되지 않은 “불신자는 저희”라고 하였습니다.

 

이건 창세전이 이미 결정이 되었습니다.

야곱과 에서처럼 태어나기 전에 정해졌습니다.

야곱은 빛의 아들로 에서는 어둠의 아들로 정해졌습니다.

 

야곱과 에서는 이 결정에 의해서 이 세상으로 보내어짐을 당하였습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갈라지게 됩니다.

이를 심판이라고 합니다.

 

너희에게는 천국의 비밀이 허락되었고,

저희에게는 천국의 비밀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너희에게는 천국의 문이 열려져 있고,

저희에게는 천국의 문이 닫혀져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을 봅시다.

 

마 13:10-17절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11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13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14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천국을 여러 가지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왜 이렇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라고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이 천국의 비밀은 모두에게 허락이 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오로지 자기 백성들에게만 허락된 것이라고 합니다.

 

천국은 너희처럼 택함을 입은 자들에게만 허락이 된다고 합니다.

너희는 복을 받았기 때문에 천국 복음이 들려진다고 합니다.

너희는 복을 받았기 때문에 천국 복음을 전하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믿어지게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찾으러 오셨습니다.

그래서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만 찾아가서 부르십니다.

이들을 자기 양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0장을 봅시다.

 

요 10:1-5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예수님께서 양의 목자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양의 이름들을 각각 불러서 인도해 내십니다.

자기 양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알고 따르게 됩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뭔가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 하실 자”입니다.

자기 백성들만이 예수님이 자기를 죄에서 구원해 주실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예수님이 구원자 라는 것은 예수님의 양들만 알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빛으로 오신 것은 어둠을 악으로 드러내고자 함입니다.

빛에 속한 자는 참 빛으로 자신의 어둠이 고발당하여서 긍휼의 자리로 나아옵니다.

그러나 어둠에 속한 자들은 도망을 합니다.

빛에 속한 자는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어둠에 속한 자는 참 빛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배척합니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빛은 빛을 알아봅니다.

이것을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빛으로 오신 것은 빛에 속한 자를 찾고자 하심입니다.

그래서 참 빛이신 예수님이 어둠 속에 있는 빛의 아들들을 찾아가서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행 22:6절 “다메섹에 가까 왔을 때에 오정 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취매”

 

사울이 많은 사람과 함께 예수 믿는 자들을 잡고자 다메섹으로 갑니다.

도중에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이 사울을 찾아 간 것입니다.

 

하늘에서 음성이 들립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합니다.

이 소리를 사울만 듣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우뢰소리로 들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예수님의 음성으로 들었습니다.

이는 사울이 빛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울의 이름을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을 이름을 부르십니다.

이건 마치 여러분이 학교에 가서 여러분의 자녀의 이름을 부르면 여러분의 자녀만 부모의 음성을 듣고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 창조의 첫 날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흑암 속에서 빛을 불러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흑암 속에서 부르심을 입은 빛의 아들들이 사는 곳을 낮이라 칭하고,

흑암 속에 그대로 있는 자들이 살아가는 어둠을 밤이라 칭하였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낮에 속하였고,

예수 밖에 있는 자는 밤에 속하였습니다.

낮에 속한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않습니다.

 

요 12:46절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모두가 어둠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너희와 저희의 구분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자 너희와 저희로 갈라지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역사에 오셔서 하신 첫 번째 일입니다.

 

골 1:13-14절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구원의 시작이 옮겨짐입니다.

출애굽과 같습니다.

이를 첫째 날이라고 합니다.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은 구원이 이러한 식으로 진행이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일어나는 창조 사건은 성도의 구원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을 첫째 날로 시작하여서 여섯째 날까지 이루어지면 일곱째 날에 안식하게 됩니다.

 

구원은 생명의 자람과 같습니다.

 

첫째로 엄마의 뱃속에서 잉태하는 단계입니다.

둘째로 엄마 뱃속에서 나와서 살아가는 단계입니다.

셋째로 죽음 후에 영생과 영벌로 갈라져서 살아가는 단계입니다.

 

씨 - 생명 - 안식

 

생명은 세 과정을 겪게 됩니다.

씨에서 열매로 열매에서 추수되어 곡간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의 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은 먼저 엄마 뱃속에서 있는 과정이 있습니다.

이것은 창세전 언약 속에서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이 예수그리스가 부르실 때까지 세상 속에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아이가 엄마 뱃속에서 정한 기간 동안 있다가 때가 차면 세상으로 나오게 됩니다.

이 때 엄마는 해산의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이는 엄마의 죽음과 같습니다.

아이는 어미의 죽음으로 새로운 생명으로 세상에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언약을 품고서 일정 기간 동안 엄마의 뱃속과도 같은 율법이라는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서 살다가 부르심을 입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4장을 봅시다.

 

갈 4:1-7절.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하나님께서 유업을 이을 아들을 잠시 동안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종으로 두셨다고 합니다.

후견인과 청지기는 율법을 말합니다.

아들이 하나님이 정한 때까지 율법 아래서 종노릇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서 율법 아래서 종노릇하고 있는 자들을 불러 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율법이라는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서 빼내심을 입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어미가 물과 피를 쏟고 아이를 낳듯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고 자기 백성들을 율법이라는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빼내신 것입니다.

이건 출애굽과 같습니다.

 

구원의 첫 단계인 첫째 날이 시작이 된 것입니다.

엄마 뱃속에서 나온 아이가 부모의 도움으로 자라갑니다.

이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죄와 사망에서 의와 거룩으로 옮겨진 자들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으로 자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광야 40년 생활과 같습니다.

 

부모의 도움으로 자라간 아이는 때가 되면 죽게 됩니다.

죽고 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영생의 나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을 추수라고 합니다.

이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잉태에서 출생 그리고 자라감과 죽음 그 후까지 모두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하나님이 창세전에 계획하시고 역사 속에서 진행하시고 죽음 후에 완성을 하십니다.

일을 시작 하신 이가 끝날까지 다 이루십니다.

그래서 구원이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창세전 언약의 결과로 주어진 것입니다.

구원은 언약에 의한 것이므로 우리의 행위로 취소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형편과 상관없이 지켜지는 것입니다.

 

언약이 변하지 않는 한 우리의 구원도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언약은 변하지 않습니다.

불변의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식언치 않는 분이고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도 불변하는 것입니다.

이게 믿어져야 쉼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첫째 날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고후 5장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온 것입니다.

그 동안 어둠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빛으로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첫째 날이 온 것입니다.

 

이제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낮에 속한 자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인생으로서의 삶이 둘째 날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첫째 날이 있기에 둘째 날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첫째 날을 주신 그 은혜를 감사하며 살아가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본질상 진노의 자식으로 죽었던 우리를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살려 주심을 감사합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죽었던 자들을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로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생명으로 죄와 사망 권세를 이기고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주신 구원 잘 간직하고 감사와 찬송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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