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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히브리서 강해

4강. 방주를 만들게 한 믿음 (히 11:7)

by coroa 2020. 7. 7.

-.4강. 방주를 만들게 한 믿음 (히 11:7).-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정낙원 목사

 

지난시간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의 신앙을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에녹이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하였는지에 대하여는 구체적으로는 나타나 있지 않아서 상세하게는 살펴보지를 못했습니다.

 

다만 에녹은 므드셀라를 낳고 나서 삶에 지향이 달라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에녹은 므드셀라를 낳기 전엔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는데, 므드셀라를 낳고 난 후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에녹에겐 므드셀라는 자식이기 이전에 하나의 징조이고 하나님의 계시였던 것입니다.

믿음이 에녹으로 하여금 므드셀라의 이름 속에 담긴 하나님의 비밀을 알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믿음이 에녹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동행하게 하였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에녹은 므드셀라를 낳고 난 후 300년을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의 심판을 세상에 알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믿음이 에녹으로 하여금 이 세상은 망한다는 것을 알게 해 준 겁니다.

그래서 에녹은 종말을 알렸고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알리며 산 것을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합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의 동생인 유다는 성령의 감동으로 수 천 년 전에 살았던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내용을 종말을 알린 삶이라고 유다서에서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에녹의 예언대로 므드셀라가 죽자 세상은 홍수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오늘 살펴볼 노아도 종말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에녹과 노아의 다른 점은 에녹이 외쳤던 종말을 노아는 실제로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성경은 에녹의 시대상은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진 않지만 노아의 시대상은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노아는 어떻게 살았는지 구체적으로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노아는 에녹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가 있어집니다.

한 사람은 종말이 온다고 증거했고, 한 사람은 종말을 맞이했기 때문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노아를 통해서 종말 때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에녹 시대엔 막연하던 것이 노아 시대에선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종말의 모습을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 시대가 종말이라고 한다면 영적인 의미에선 노아 때나 지금이나 같다는 말입니다.

에녹에게 있어선 므드셀라가 태어남과 동시에 종말로 접어들었습니다.

언제 므드셀라가 죽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신약에선 예수님의 승천과 동시에 종말 모드로 전환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대는 종말론 시대라고 합니다.

 

어느 시대고 종말은 늘 외쳐져 왔습니다.

복음의 특징이 종말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처럼 종말의 급박한 징후들이 나타난 적은 없습니다.

에녹 시대로부터 변함없이 줄기차게 외쳐왔던 그 종말의 실상이 이제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마태복음 2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종말의 징조들에 대하여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 24:1-12=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3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6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7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8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9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10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예수님께서 예언한 종말의 모든 징후들이 이 시대에 동시다발적으로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종교적인 면에선 교회가 타락할 것과 가짜 목사들이 많이 일어나서 교인들을 미혹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회현상론 적으로는 민족주의가 부활하여 서로 싸우고 각종 천재지변이 일어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불법이 성하여 사랑이 식어진다고 알려 주셨습니다.

한마디로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 된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런 일들은 인류 역사 이래로 늘 있어 왔던 것 들입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갖가지 재앙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난 적은 없습니다.

딱히 성경의 예언이 아니더라도 종말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세상은 악해졌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일컬어 종말론적 현상이라고 합니다.

종말과 종말론적은 다릅니다.

종말이란? 끝장나는 것입니다.

종말론적이란? 끝장나는 징후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종말론적 징후들을 보면서 세상이 끝장난다는 것을 알고 출애굽 할 때와 같은 자세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는 종말론적 삶에 자세를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면서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며 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치 에녹처럼 언제 심판이 임할는지 모르니 항상 깨어서 준비하고 사는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종말론적 삶이라야 합니다.

종말론적 삶을 히브리서 11장에선 세상에서 나그네와 외국인처럼 산 것이라고 증거합니다.

 

전 개인적으로 살아서 주님을 맞이한다는 자세로 살고 있습니다.

그만큼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님께서 종말의 징조를 말씀하신 내용들이 세계 곳곳에서 현실로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종말론적 징후들은 장차 정리 되는대로 특강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시대 성도들은 영적인 의미에선 노아와 같은 시대를 살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종말이고 심판이란? 불신자에겐 저주의 날이지만 신자에겐 축복의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약속대로 재림 하시면 성도는 주님과 함께 천국에서 살게 됩니다.

아니 더 사실적으로 말하면 성도에게 있어 종말이란? 예수님이 재림하시던가 아니면 성도가 죽거나 하면 종말입니다.

 

성도가 죽는 것은 군인이 제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기쁜 날입니다.

성도들에게 수고를 그치고 쉬는 날이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님이 금방이라도 재림 하실 것이란 자세로 살아가야 합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말씀한 달란트 비유에서처럼 달란트를 남긴 종들처럼, 또한 기름을 준비한 지혜로운 다섯 처녀들처럼 항상 지금 현재 주님 앞에 서 있다는 자세로 살아가야 합니다.

성도의 신앙은 항상 현재이지, 지나간 과거도 아니고, 장차 도래할 미래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항상 현재 계시는 분입니다.

현재가 아니면, 미래도 없습니다.

미래는 현재의 바탕위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현재가 없는 신앙은 헛것입니다.

 

신앙을 생명으로 표현하는 이유도 다 현재성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이란? 현재 목숨으로 살아가는 것이지, 어제의 것으로 사는 게 아닙니다.

인간의 목숨은 어제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지금 힘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 또한 현재 진행형이어야 합니다.

항상 현재 살아 움직여야 합니다.

성도는 과거를 붙잡고 있으면 안 됩니다.

난 옛날에 뭘했다! 라는 것은 지금은 안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현재 없으니 맨 날 옛날 것 들먹이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미래만 바라보아도 안 됩니다.

미래를 현재로 살아야 합니다.

장차 올(갈) 천국을 지금 현재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과거에 믿은 것도 아니고,

미래에 믿어야 할 것도 아니고,

현재로 믿어야 할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일컬어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현재로 계시는 분이란 말입니다.

현재 신앙 안에 하나님은 계십니다.

 

성도를 일컬어 묵시적 존재라고 하는 것은 신앙생활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항상 현재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2천 년 전에 일으켰던 십자가 사건이 현재 능력으로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장차 도래할 천국도 현재 기쁨으로 와 있어야 합니다.

 

어느 날 어느 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2천 년 전이 오셨던 예수님이 지금 우리 안에 와 계시지 않으면 역사 속의 인물로만 남습니다.

또한 장차 오실 재림의 주님도 지금 우리 안에 와 계시지 않으면 동화 속의 인물로만 남게 됩니다.

 

2천 년 전의 예수님이나 장차 오실 예수님이나 지금 여기에 주님이 계셔야 하고, 그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을 말할 때 지금 살아 있다는 의미에서 현재 동사로 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지나간 과거를 회상하는 것도 아니고,

나중에 하는 것도 아니고,

항상 현재이어야 합니다.

 

지금 믿어야 하고,

지금 은혜 받아야 하고,

지금 사랑하여야 하고,

지금 헌신하여야 합니다.

 

내일은 우리 날이 아닙니다.

지나간 과거도 우리 날이 아닙니다.

지금 현재만이 우리의 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면서 오늘날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했습니다.

성도가 먹어야 할 양식은 예수님의 피와 살입니다.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는다는 것은 믿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지나간 과거에 주님이 되어서도 안 되고 미래에 주님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지금 내가 예수님의 피 때문에 죄사함 받고 있으며, 예수님의 약속으로 살고 있어야 합니다.

 

항상 오늘 지금 나에 주님이셔야 합니다.

항상 오늘 내가 죄인임을 알고 항상 오늘 예수님의 대속에 은혜를 입고 살아야 합니다.

항상 오늘 예수님과 희노애락을 같이 하여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항상 지금이어야 합니다.

 

노아가 방주를 지은 것은 항상 현재로 지었지 과거도 미래도 아니었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밥을 먹듯이 자고 일어나면 방주를 지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타야할 것이고 구원을 받아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히브리서가 말하는 노아의 믿음을 알고 또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노아가 걸어갔던 그 길을 우리도 걸어가야 합니다.

노아와 같은 정신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노아로 하여금 그런 삶을 살도록 인도하였기 때문입니다.

 

노아가 받았던 은혜와 지금 우리가 받은 은혜는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노아 이야기는 곧 우리 이야기인 것입니다.

노아는 방주로 구원을 받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노아가 구원의 방주를 날마다 지었듯이, 우리는 예수님의 대속을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 시대 방주는 예수님입니다.

구체적으로 내 죄를 위하여 예수님께 내 대신 십자가에 죽어 주셨다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방주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아가 지은 방주는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노아 시대의 모습을 이 시대 모습으로 탐사해 봅시다.

 

창 6:1-8=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4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예수님께서 종말의 모습이 노아의 시대와 같다고 했으니 노아의 시대를 지금 이 시대의 모습으로 적용해 보아야 합니다.

살아가는 모습은 달라도 영적인 의미는 같기 때문입니다.

노아 시대 사람이 땅위에 번성 하였다는 말은 문자적인 의미로 보면 사람이 많다는 말입니다.

 

이 시대를 인구 폭발시대라고 합니다.

그만큼 지구의 환경에 비해서 인구가 많다는 말입니다.

교회사 적으로 말하면 교회가 부흥하였다고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노아 시대와 같이 사람이 번성한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번성한 시대에 사람들에게서 딸들이 났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있고 사람의 딸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과 비교하는 의미에서 사람의 딸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성별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 영적인 의미에선 신자와 불신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았다고 합니다.

그럼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은 누구를 뜻하고, 사람의 딸은 누구를 뜻하는지를 신약적인 의미로서 알아야겠지요.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라고 하는데 전 동의하고 싶지 않습니다.

전 천사 보다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라고 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신자라고 하겠습니다.

아까 제가 지금 식으로 말한다고 했지요.

예수님께서 노아 시대를 지금 식으로 말씀해 주셨으니 노아 시대는 그림자와 같고 이 시대는 실상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노아 시대에 하나님의 아들들은 이 시대 신자를 말하고, 사람의 딸들은 불신자를 말한다고 볼 수가 있어집니다.

광의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을 교회로 본다면, 사람의 딸은 세상을 말하는 것이 되겠지요.

 

이러면 “교회가 세상과 하나가 되었다” 라는 등식이 되지요.

성도에게 적용하면 “성도가 세상을 사랑한다” 그런 뜻이 되겠지요.

 

야고보서 4장 4절을 보면 성도가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간음이라고 했습니다.

 

약 4:4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성도가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럼 노아 시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과 혼인을 하니 하나님께서 화가 나서 세상을 쓸어 버렸다 라는 말과 뜻이 맞아지지요.

 

구약을 구약으로 해석하려고 하면 온전한 해석을 할 수가 없어요.

구약은 신약으로 해석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다 예수님 이야기이고 교회이야기 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는 노아 시대나 지금이나 동일하기 때문에 복음적으로 해석하면 쉽게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영적인 의미는 동일하기 때문에 종말 때 교회나 성도들의 영적인 상태가 노아의 때와 같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럼 노아 시대 하나님의 아들들이 왜? 사람의 딸들과 혼인을 하였을까요?

그 힌트가 본문 속에 나와 있습니다.

 

4절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네피림이라는 말이 있지요.

네피림을 거인 족이라고 합니다.

거인이란? 장수들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네피림을 힘이 좋은 사람들로 이해하면 됩니다.

 

당시는 소 부족국가(部族國家) 형태로 집단생활을 하던 때입니다.

부족을 지키고 가족을 지키려면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네피림이야 말로 부족과 가족을 지키는 좋은 군사들인 것입니다.

네피림을 사람의 딸로 말하고 있으니,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은 힘없고 왜소하였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쉽게 예를 듭니다.

키가 작은 남자가 키 큰 여자와 결혼했다고 보면 됩니다.

상대적으로 키 작은 여자가 키 큰 남자를 좋아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 키 작은 남자들이 키 큰 여자를 선호 할까요?

키 큰 자식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럼 왜? 키 작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키 큰 사람의 딸들을 좋아했는지 해석이 가능해 집니다.

여기서 아들이나 딸을 숫컷이나 암컷으로 이해하지 말고 신자와 불신자로 이해를 하세요.

영적 이야기니까?

물론 그 당시는 문자적 의미로도 이해 할 수가 있어요.

 

여러분이 성경을 볼 때 항상 문자적으로도 보고 영적으로도 보아야 해요.

이걸 이중계시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선 보이는 것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첫 강의 때 뭐라고 했나요?

보이는 세상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했지요.

 

그러니 성경은 사람 사는 이야기를 말 하고자 함이 아니고, 하나님과 인간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됩니다.

육적으로 보지 말고 영적으로 보란 말이 그런 뜻입니다.

육적이란? 인간들 이야기이고, 영적이란? 예수님과 관계된 이야기란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에베소서에서 남편과 아내를 가지고 교회와 그리스도로 말했던 것입니다.

 

엡 5:31-32=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32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아담과 하와 이야기를 예수님과 교회 이야기로 해석을 하고 있지요.

그럼 네피림이라는 거인들은 불신자 세계를 말하고, 하나님의 아들은 신자의 세계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가 되지요.

왜냐하면! 어느 시대이고 하나님께 속한 자는 힘이 없었고, 세상에 속한 자는 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노아 시대의 힘은 키가 큰 것입니다.

사람의 덩치가 큰 것은 힘의 상징입니다.

최홍만이를 보세요.

일단 그 앞에 서면 덩치 때문에 주눅이 들잖아요.

 

그럼 지금은 무엇이 힘입니까?

돈이지요.

이 시대 돈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어요.

그래서 교회나 세상이나 돈에 환장을 하는 겁니다.

 

그럼 이 시대 신자가 불신자를 보고 부러워하는 이유가 나타났습니다.

불신자들의 모습이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힘이 있어야 하잖아요.

요즘 식으로 말하면 돈이 있어야 하잖아요.

 

여러분들도 자식을 돈 많은 집으로 시집보내고 장가보내고 싶지요.

신앙은 뒷전으로 생각하잖아요.

자식이 재벌 집에 장가를 가든지 시집을 가게 되면 금새 형편이 나아집니다.

집안에 어느 누구라도 출세를 하면 일가친척들도 다 덕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돈과 연관된 것을 붙잡아야 합니다.

 

노아 당시엔 부족을 지키는 것은 힘이었습니다.

힘센 사람은 자연히 사람들의 지도자가 되고 영웅이 되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니 거인 족 집안과 사돈을 맺기 위해서 아들, 딸들을 주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과 혼인하였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낳은 자식들이 유명한 용사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힘 있는 집안과 사돈을 맺어서 팔자를 고쳤다는 말입니다.

 

노아 시대 거인 족들은 이 시대로 말하면 재벌들입니다.

힘을 지금 식으로 말하면 돈이고 권력이고 명예가 될 수 있겠지요.

그러니 목사나 장로나 집사 할 것 없이 자식들 시집보내고 장가보낼 때 믿음 보다 돈, 권력을 찾아서 보내잖아요.

 

목사들이 자식을 목사 만들기보다, 의사 만들고, 판, 검사 만들고 싶어하는 이유가 뭡니까?

모두가 속엔 믿음이 자리 잡지 않고 세상 가치관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회가 대기업이 되면 자식을 목사 만들어 그 기업을 물려주려고 하지요.

그러니 노아 시대 사람들과 이 시대 교인들과 뭐가 다릅니까?

똑 같아요.

 

인간은 어느 시대이고 믿음 보다 보이는 힘을 얻고자 합니다.

하나님도 내게 힘주는 하나님을 원하잖아요.

교인들이 세상에 힘주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래서 교회마다 세상에서 출세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고 하잖아요.

 

00교회 아시지요.

거기에 가면 도로에다 플랜카드를 붙여 놓았어요.

그 내용이 뭔가 하면 자기 교회 안수집사가 항만 공사 사장에 취임했대요.

얼마나 자랑스러웠으면 우리교회 이런 사람 있다! 라고 세상에다 자랑하겠어요.

우리교회는 이렇게 힘 있는 사람이 있다 이거 아닙니까?

 

그러니 자기 교회에 오라는 겁니다.

와서 그 사람과 잘 트고 지내다가 혹시 아쉬운 일이라도 있으면 도움 좀 받으라는 말 아닙니까?

그 옆에 보면 또 다른 플랜카드가 있어요.

거기엔 학생회장이 서울대 합격했다고 적혀 있어요.

우리교회는 이렇게 용한 교회입니다.

 

그러니 자기들 교회에 와서 신앙생활 하면 저 사람들처럼 복 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 교회는 이렇게 용한 교회입니다 이 말입니다.

이게 바로 노아시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혼인하였다는 것과 같은 겁니다.

 

이런 일은 그 교회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래요.

우리 교회는 사장이 나온다, 회장이 나온다, 의사가 나온다, 대학 교수가 나온다, 변호사가 나온다, 시 위원이 나온다, 국회의원이 나온다, 대통령이 나온다,,,,,

한마디로 세상에서 끗발 있는 사람은 다 자랑하잖아요.

 

교회가 커질수록 십자가에 힘없이 죽어 가신 예수님을 자랑하는 교회가 없어요.

그러니 교회도 아니고 교인도 아니고 몽땅 네피림인 것입니다.

 

요즈음 연말이라서 각 방송국마다 시상식을 한다고 난리들입니다.

그런데 상을 타는 사람들의 소감을 들어 보면 거의가 다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 돌린다! 감사한다! 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연기자들이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아요.

이들이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말은 상을 타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하는 겁니다.

내게 유익을 주니 고맙다는 말입니다.

 

이들이 믿는 하나님은 자기에게 세상 영광을 안겨다 주는 하나님입니다.

세상 것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그러니 그런 상을 타니까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절에 다니는 사람은 교회 다니는 인간들에게 질세라 부처님께 감사해요.

누가 누가 더 센가!

힘자랑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센가?

부처님이 센가?

내 신이 센가?

니 신이 센가?

 

교회 식으로 말하면 니네 교회가 큰가?

우리 교회가 큰가?

니네 목사가 용한가?

우리 목사가 용한가?

이거 자랑하고 있는 겁니다.

 

꼭 어린아이들이 우리 아빠 알통 크다! 라고 자랑하는 것과 같아요.

왜? 그래 아마추어 같이,,,

지금 교회들이 교인들이 이걸 신앙이라고 자랑하고 있어요.

그러니 노아시대처럼 쓸어 버려야지요.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노아 시대 홍수로 쓸어버리고자 한 이유가 뭡니까?

인간들이 악해서입니다.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럼 모두 하나님 잘 믿었으면 하나님이 종말을 단행 했겠습니까?

안했겠지요.

 

그럼 지금 이 시대를 종말시대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심판 때가 가까웠다는 말이지요.

왜? 종말을 단행한 다구요.

예수 안 믿으니까 그렇지요.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것은 교회가 예수를 안 믿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오셔서 불바다를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 잘 믿으면 종말이 안와요.

안 믿기 때문에 종말이 오는 겁니다.

솔직히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판단해 보세요.

이 시대 교회가 교회냐구요.

문화센터이고, 점집이고, 절간이지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를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곳이에요.

그렇다면 교회에선 예수님의 피가 증거되고 자랑되어져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 교회엔 예수님의 피가 증거되지 않아요.

예수님의 피가 증거되지 않는데 무슨 교회입니까?

 

인간들의 놀이터에요.

인간들이 모인 장터이지,,,

그러니 교회를 다녀도 교인들이 예수님의 피를 모르는 것입니다.

교회 안엔 온통 어떻게 하면 복을 받아서 세상에서 잘살까 하는 세상이야기 뿐입니다.

세상을 그대로 옮겨 놓은 곳이 교회예요.

 

그러니 교회가 세상 가치관으로 다스려지는 것입니다.

세상에 힘 있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도 힘을 쓰고 있잖아요.

믿음의 법이 통하지 않고 돈에 법이 통하고 있잖아요.

믿음 있어도 돈 없으면 장로가 못되어도, 믿음 없어도 돈 많으면 장로가 되잖아요.

 

그러니 예수님이 재림 하실 때가 되면 그 징조가 교회와 교인들이 다 타락한다는 것입니다.

세상과 짝해서 세상의 용사가 된다는 것입니다.

네피림이잖아요.

 

예수님은 권력을 갖지 않았는데 목사들이 권력을 가졌어요.

교회가 권력화 되었어요.

정권이 절간에 눈치를 보고 교회에 눈치 보는 시대가 되었어요.

신앙이 세상에 힘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은 곧 네피림이라는 말입니다.

 

교인들이 유명한 용사가 되어서 세상 속에 주류로 편성이 되어 기득권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큰 교회로 사람들이 몰리고 큰 교회는 더 커지려고 부동산 죄다 사 모으는 것입니다.

교인들은 큰 교회에 소속되어 있다는 자긍심으로 교회 다닙니다.

 

난 이렇게 큰 교회 다닌다.

난 이 큰 교회 집사이다, 장로이다, 구역장이다, 여전도회장이다, 성가대원이다,,,,

주일날 안내 위원이다, 헌금 위원이다,,,

그러니 나 좀 알아줘!

나! 이 교회 다니는 사람이야!

자랑하는 겁니다.

 

상대적으로 작은 교회 다니면 수치스럽다고 말도 안 해요.

어느 교회 다니십니까? 라고 물으면, 저쪽에 있어요! 라고 얼버무려요.

어느 교회이냐가 그리 중요합니까?

예수 믿으면 되지요? 라고 또 자존심은 있어서 꼴값을 떨어요.

크다고 자랑하는 사람이나, 작다고 숨기는 사람이나 다 힘을 근거로 하는 육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십자가를 아십니까? 라고 물어 보세요.

예수님의 피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라고 물어 보세요.

난 그딴 거 몰라?

우리 목사님이 그랬어!

열심히 하면 복 받는다고 했어!

예수를 몰라도 신앙생활 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는 시대가 지금입니다.

예수를 몰라도 교회 다니는데 전혀 문제가 안 돼요.

 

예수를 모르면서 예수에 대한 아쉬움도 전혀 없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요.

이 사실을 어찌 받아 들여야 합니까?

이걸 어찌 교회라 하며 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단호히 말해서 교회도 아니고 신자도 아닙니다.

그냥 동호회 모임입니다.

교회는 종교라는 이름으로 유희를 즐기는 고급 룸살롱이고, 교인들은 몸 파는 접대부들입니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에선 교회를 일컬어 음녀라고 한 것입니다.

이 시대 교회가 뭐라고요?

매음굴입니다.

교인들은 술파는 접대부 창기입니다.

세상과 짝 달라붙어서 간음하는 창기들입니다.

세상이 주는 쾌락이라는 술에 취하여 헤롱 헤롱하면서 주절거리고 있습니다.

 

노아 시대가 그랬어요.

살기 위해서 세상 힘에 빌붙어서 목숨을 보존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이 노아 시대예요.

그러니 남은 건 불로 태워버리는 것 밖에 없어요.

 

이 시대 교회나 성도가 세상을 사랑하는 이유는 육신의 행복을 안겨다 주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십자가 복음을 버리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 영광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복음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복음이 세상에 안락함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세상 것을 주겠다고 하는 거짓 복음을 좋아라 하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세상에 복을 주겠다고 하는 무당 짓하는 목사들의 말을 듣는 것은 곧 노아시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과 혼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울은 세상 것을 주겠다고 하는 것을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이라고 했어요.

교인들이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을 쫓아가는 것이 곧 노아 시대의 양상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먹고 살기 위해서 예수를 따르는 자를 십자가의 원수라고 한 것입니다.

 

빌 2:18-19=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배를 위해서 사는 것은 짐승입니다.

짐승은 배만 부르면 땡입니다.

짐승같이 본능으로 사는 육적인 교인들은 세상에서 먹고 살만 하면 희희낙락합니다.

짐승같이 배가 신인 육적 신자는 세상에서 잘되면 입이 째집니다.

 

사도행전 27장을 보면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압송당하면서 배를 타고 가다가 유라굴로 라는 태풍을 만나서 배가 산산 조각 나고 짐을 다 바다에 빠트리고 겨우 목숨만 구한 사건이 나옵니다.

바울은 배가 출항하기 전에 백부장에게 이번 행선에는 힘이 들것 같으니 다음으로 미루자고 합니다.

 

그러자 바울을 압송하는 책임자인 율리오 라는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들의 말을 듣고 행선을 강행하게 됩니다.

선장과 선주는 자기들의 경험을 믿었습니다.

 

알다시피 바울은 바다에서 자라지 않았습니다.

배를 운항하는 데에 관한 지식도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한 쪽은 자신의 화려한 경험을 믿고 출항을 강행하였고,

한 쪽은 인간의 경험은 없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저지를 하고자 하였습니다.

결국 믿음과 경험의 싸움입니다.

 

여하튼 갑론을박 속에서 배는 출항 하였습니다.

처음은 순풍에 돛을 단 것처럼 아주 잘 갔습니다.

그러자 백부장 율리오와 선장과 선주는 바울을 비웃으면서 득의만만했습니다.

 

아마도 그랬을 것입니다.

자식~ 자기가 뭘 안다고!

뭐 하나님 믿는다고!

웃기고 있네!

우리가 배를 탄지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바다에서 자라서 바다라면 손바닥 손금 보듯이 훤히 다보고 있다고 자랑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만심도 금방 날아가고 맙니다.

유리처럼 잔잔하던 바다가 갑가지 파도가 일고 물결이 거세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먹구름이 몰려오고 급기야 배가 깨어지고 배에 탄 사람들은 다 죽게 되었습니다.

 

이 때 바울이 그들을 살려 냅니다.

비록 배는 깨어지고 짐을 다 버림 당하였지만 여러분들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내게 맡겼으니 자기 말을 들으라고 하고 급기야 바울의 말대로 다 살아났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율리오 라는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들이 말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바다에 관해서는 그들의 말이 맞아요.

바울은 뱃사람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선장과 선주는 자기들의 경험을 믿었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배를 교회라고 보고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을 교인이라고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이러한 일들은 지금도 교회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교회가 장사가 잘되고 사람들이 모이니 기고만장 합니다.

금방 닥쳐올 하나님의 진노를 모른채 잘난 척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모르고 잠시 잘된다고 선장과 선주들처럼 득의양양 하면 안 됩니다.

 

교회라는 배가 곧 깨어집니다.

요한계시록 18장을 보면 교회라는 배가 맷돌같이 바다에 빠져 산산이 깨어진다고 했어요.

그러니 선장들이 애통해 한다고 합니다.

배가 교회이면 선장은 당연히 목사가 되겠지요.

 

계 18:2-24=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3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4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5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 6 그가 준 그대로 그에게 주고 그의 행위대로 갑절을 갚아주고 그의 섞은 잔에도 갑절이나 섞어 그에게 주라 7 그가 어떻게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난과 애통으로 갚아 주라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황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8 그러므로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곧 사망과 애통과 흉년이라 그가 또한 불에 살라지리니 그를 심판하신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니라 9 그와 함께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들이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위하여 울고 가슴을 치며 10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일 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 11 땅의 상고들이 그를 위하여 울고 애통하는 것은 다시 그 상품을 사는 자가 없음이라 12 그 상품은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와 세마포와 자주 옷감과 비단과 붉은 옷감이요 각종 향목과 각종 상아 기명이요 값진 나무와 진유와 철과 옥석으로 만든 각종 기명이요 13 계피와 향료와 향과 향유와 유향과 포도주와 감람유와 고운 밀가루와 밀과 소와 양과 말과 수레와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이라 14 바벨론아 네 영혼의 탐하던 과실이 네게서 떠났으며 맛있는 것들과 빛난 것들이 다 없어졌으니 사람들이 결코 이것들을 다시 보지 못하리로다 15 바벨론을 인하여 치부한 이 상품의 상고들이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울고 애통하여 16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이여 세마포와 자주와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민 것인데 17 그러한 부가 일시간에 망하였도다 각 선장과 각처를 다니는 선객들과 선인들과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이 멀리 서서 18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외쳐 가로되 이 큰 성과 같은 성이 어디 있느뇨 하며 19 티끌을 자기 머리에 뿌리고 울고 애통하여 외쳐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이 큰 성이여 바다에서 배 부리는 모든 자들이 너의 보배로운 상품을 인하여 치부하였더니 일 시간에 망하였도다 20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를 인하여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신원하시는 심판을 그에게 하셨음이라 하더라 21 이에 한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가로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몹시 떨어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22 또 거문고 타는 자와 풍류하는 자와 퉁소 부는 자와 나팔 부는 자들의 소리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고 물론 어떠한 세공업자든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보이지 아니하고 또 맷돌 소리가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고 23 등불 빛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비취지 아니하고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너의 상고들은 땅의 왕족들이라 네 복술을 인하여 만국이 미혹되었도다 24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이 성중에서 보였느니라 하더라”

 

요한 계시록에선 타락한 교회를 바벨론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각종 더러운 귀신들이 모인 처소라고 합니다.

목사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여야 함에도 오히려 세상에 푹 빠져서 음행하고 있습니다.

 

목사들이 배에 선장과 선주처럼 사람의 영혼들을 사고 판다고 합니다.

교인들 피를 빨아 먹어야 하니 복음 전하는 자들은 다 죽인 겁니다.

교회 안에 선지자들과 성도들의 피가 모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맷돌처럼 교회를 바다에 던져서 완전히 박살을 내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영혼을 사냥하던 목사들이 자기들 재산이 날아갔다고 애통해 한다고 합니다.

마치 바울이 타고 가던 배가 깨어져 짐을 모두 바다에 수장시킨 것과 같습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도 그랬어요.

잠시 후에 홍수로 쓸어버린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모르고 당장 눈앞에 거인 족들이 자신들을 지켜주고 행복하게 해 준다고 믿었어요.

배가 부르니 노아가 외치는 종말이니 심판이니 하는 말은 귀에 들어오지가 않았습니다.

그저 치매 걸린 영감의 미친 소리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잠시 후에 닥칠 심판을 보았기에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선 노아가 하나님의 경고를 경외함으로 받았다고 합니다.

경외함으로 받았다는 것은 농담으로 여기지 않고 믿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사람의 특징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겁게 받는다는 것입니다.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함으로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노아의 능력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은혜가 노아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판 소식을 경외함으로 받게 한 것입니다.

그 은혜를 히브리서에선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이 노아로 하여금 하나님 말씀을 무겁게 여기고 방주를 짓는 삶을 살도록 하였습니다.

 

방주를 짓는 것은 노아의 자랑거리는 아닙니다.

하지만 노아가 그 당시 사람들과 전혀 다른 삶을 살면서 당한 아픔들은 간과할 수가 없습니다.

에녹과 같이 노아 역시도 종말을 외치고 살았습니다.

종말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종말을 외치고 다닌 다는 것은 고난입니다.

노아는 믿음으로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꿈꾼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

 

이런 노아의 모습을 예수님은 다른 삶이라고 하셨습니다.

노아의 때를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하였다고 했지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하는 것은 인간의 육신적인 평범한 삶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이런 평범한 삶조차도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종말을 생각하면 호사스러운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항상 손해를 보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에게 세상과 역설적으로 살기를 요구하십니다.

이는 인간들이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상반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인간들은 눈만 뜨면 움켜잡고자 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영웅이 되고자 합니다.

자녀들에게도 영웅이 되라고 가르칩니다.

좋은 대학 들어가는 것이 급선무이지 교회 오는게 중요하지 않아요.

 

그러니 자식들을 학원에 보내고 교회로 보내지 않는 것입니다.

공부 열심히 해서 세상에서 네피림처럼 거인이 되라고 가르칩니다.

부자가 부럽고, 권세 있는 사람이 부럽고, 성공한 사람이 부럽습니다.

 

도리어 노아와 같이 돈도 안 되고 힘도 안 되는 방주 짓는 일은 어리석게 여깁니다.

우리는 노아를 말하면서도 노아 같은 삶을 살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면서도 노아처럼 종말에서 살아남고자 합니다.

우리는 노아처럼 살기는 싫어하면서도 노아처럼 구원 받기를 바라는 이율배반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악당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요구합니다.

너희는 하늘에 것을 이미 얻었으니 족한 줄 알고 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것과 땅에 것을 함께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함께 다 달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천국 같은 삶을 살다가 죽어서도 천국에 가고자 합니다.

고난은 예수님 홀로 받고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 덕으로 행복하게 살고자 합니다.

 

천국은 지옥을 아는 자가 가는 곳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상대적입니다.

지옥을 모르면 천국도 모르고, 천국을 모르면 지옥도 모릅니다.

 

달리 천국이 아니고 노아처럼 세상 즐거움을 다 버리고 지옥같이 살았기 때문에 천국입니다.

노아는 이 세상에서 지옥같이 살았습니다.

반대로 네피림으로 용사가 된 사람들은 천국으로 살았습니다.

노아는 방주 짓는다고 바쁘게 살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여흥을 즐기면서 쾌락으로 살았습니다.

어쩌면 노아는 하나님 말씀 순종하며 살다가 손해 본 사람의 본보기 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노아가 홍수 속에서 살아남았다는 결과만 가지고 좋아라 합니다.

 

항상 말하지만 나타난 결과는 감추어진 원인이 있습니다.

 

구원의 결과 뒤에는 반드시 눈물과 고통스러운 버림의 아픔들이 있습니다.

구원은 버려진 아픔이 없는 자에겐 의미가 없습니다.

천국은 세상에서 누릴 것 다 누리고 맛 볼 것 다 맛보고서 가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을 일컬어 눈물 없고 고통 없는 곳이라고 합니다.

 

계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이는 곧 천국엔 누가 가느냐 하면 이 땅에서 복음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아픔을 당하고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 가는 곳이란 말입니다.

천국은 이 세상에서 호의호식한 자들이 가는 곳이 아닙니다.

 

부자와 거지나사로의 비유를 보면 의미심장한 말이 나옵니다.

 

눅 16:23-25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부자가 하나님에게 손가락에 물 한 방울이라도 찍어서 입에 넣어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다정스럽게 말씀하십니다.

애야! 너는 살았을 때 산해진미 먹어가면서 호의호식하지 않았느냐!

반면에 나사로는 거지로서 먹을 것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입을 것 제대로 입지 못하고 살았느니 공평한 것이 아니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부자는 다 지옥에 간다는 말이 아니고 거지는 다 천국에 간다는 말도 아닙니다.

부자나 거지나 지옥과 천국에 가는 조건이 아닙니다.

다만 부자는 가진 부로 인해서 하나님을 잊고 살았고, 거지는 가진게 없어서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았던 것입니다.

 

거지 나사로가 천국에 갔다는 것은 하나님 약속을 믿고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면 믿음으로 산 사람들은 한결같이 세상 적으로 보면 실패한 인생을 산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살펴보는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인물들은 세상 적으로 부러워하고 본받을 인물이 하나도 없습니다.

영웅열전이 아니라 실패한 인생들의 기록들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의 증거를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믿음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게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늘 하는 말이지만 믿음으로 사는 삶이란? 세상에서는 조롱당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사실을 알고 하나님께선 성도를 만물의 찌끼와 구경거리로 두셨다고 합니다.

 

고전 4:9-13=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0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13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

 

세상에서 구경거리가 무엇이겠습니까?

세상 가치관으로 실패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밥만 먹으면 방주 짓는 일을 했으니 먹고 사는 일이 겨우 겨우 목구멍에 풀칠하는 수준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주면에 사람들이 보기에 조롱거리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수학 공식 외우듯이 머리에 쌓아두는 지식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에 휘둘리지 않고 먹을 것 입을 것 족한 줄로 알고 천국에 소망을 두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육신에 영욕을 두지 않으니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으니 믿음이 바라게 하는 것이 있을 것이 아닙니까?

노아에게 있어 바라는 것은 방주였습니다.

그래서 방주를 짓는 삶을 산 것입니다.

 

믿음으로 천국을 본 사람은 천국을 위해 살아 갈 것입니다.

만약에 믿음 믿음 하면서 땅에 것을 바라보고 산다면 그 믿음은 가짜입니다.

왜냐하면! 믿음 속엔 이 땅에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믿음은 보이는 세계 것을 움켜잡으라고 주신 것도 아닙니다.

 

믿음이 오면 세상에 없는 하늘에 약속을 붙잡게 인도하십니다.

노아에게 있어 방주란 땅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꼭대기에다가 방주를 지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내 산 산꼭대기에 강림한 것은 하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산꼭대기에 지은 것은 하늘을 바라보고 살았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방주를 바닷가에 짓지 말고 산꼭대기에 짓도록 한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이 노아로 하여금 방주를 짓는 삶으로 이끌었듯이 지금도 믿음이 방주의 실체이신 예수그리스도 안으로 성도를 밀어 넣습니다.

 

믿음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잡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이 노아를 방주 안으로 밀어 넣었듯이 지금은 성도들을 예수 안으로 밀어 넣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잡는 사람이라야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노아는 살다가 시간 나면 방주를 짓지 않았습니다.

또한 적당히 방주를 짓지도 않았습니다.

노아는 방주가 장차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해줄 구원의 집이기 때문에 빈틈없이 지었습니다.

노아는 방주를 자기 마음대로 짓지 않고 하나님이 지시하신대로 지었습니다.

 

이 시대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지시하신 것은 주 예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아들에 피를 부정한 것으로 돌리는 자는 용서치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아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올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붙잡으라고 내민 패가 바로 주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방주가 예수님이십니다.

방주는 노아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방주는 하나님이 지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지시한대로 지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도 우리 뜻대로 믿어선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믿게 하라는 대로 믿어야 합니다.

성령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지시한대로 믿도록 이끄실 것입니다.

 

바울은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이 있다고 함으로서 인간들 생각대로 예수를 믿는 자들이 일어날 것을 경고하였습니다.

인간들 생각대로 믿는 예수는 다름 아닌 세상에서 영웅 만들어 주겠다는 예수입니다.

 

수많은 교인들이 인간들이 만든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와서 하늘로 가지 않고 땅으로 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말해도 죄에서 건짐 받는 구원을 말하지 않고, 가난에서 벗어나고, 질병에서 고침 받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구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산꼭대기는 하늘이고 영을 말하고, 산 아래는 땅이고 육을 말합니다.

 

육신을 위하여 믿는 예수는 인간이 만든 예수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예수는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계십니다.

땅으로 이끄는 예수는 가짜입니다.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믿음도 가짜입니다.

 

예수님 속에는 땅에 것이 없고, 하늘에 것만 담겨져 있습니다.

믿음 속에는 육신에 것이 없고, 영에 것만 담겨져 있습니다.

수차 말하지만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붙잡게 하지 보이는 것을 붙잡게 하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을 붙잡으라고 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그 어떤 논리로 달콤한 말을 하여도 육을 즐겁게 하고 세상 것을 붙잡게 하는 것은 사기입니다.

신앙생활은 취미생활이 아닙니다.

취미생활은 자기 기쁨을 위하여서 하는 것이지만,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취미생활은 건성 건성 하여도 됩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은 심판 속에서 살아남는 일이기 때문에 건성으로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시대 교인들이 예수를 죽기 살기로 믿지 않는 것은 여가 생활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시간 있으면 나오고 볼 일 있으면 안 나오는 것입니다.

 

종교생활은 취미이지만 신앙생활은 삶입니다.

 

노아에게 있어서는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홍수로부터 살아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방주 짓는 일을 먹고 사는 것보다 더 중하게 여기고 산 것입니다.

지금 노아는 우리에게 너희들의 삶에 우선 목적이 어디에 있는냐! 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노아의 삶이 우리를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보물이면 온통 마음이 십자가에 가 있을 것입니다.

마음이 십자가에 가 있지 않다는 것은 보물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 시대 목사들에게 보물은 교회이지 십자가가 아닙니다.

교인들도 교회 큰 것을 자랑하지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자랑하지 않아요.

교회가 밥 먹여주지 십자가가 밥 먹여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방주가 밥 보다 더 중했습니다.

방주를 지으면 세상일을 못하고, 세상일을 하면 방주를 못 짓습니다.

땅을 지향하든지 하늘을 지향하든지 어느 한 곳을 지향하여야 합니다.

 

어느 한 쪽을 따라가면 한 쪽과는 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과 가까워지면 하늘과 멀어지고, 하늘과 가까워지면 세상과는 멀어집니다.

마치 구약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으로 가면 갈수록 애굽과는 멀어지고, 가나안과는 가까워지고 애굽과 가까이 있으면 가나안과는 멀어집니다.

 

성도들도 신앙생활을 할수록 겉 사람은 후패해지고 속사람이 강건해져가야 합니다.

세상 것에 대한 미련은 사라지고 하늘에 것에 대하여 집착이 강하게 일어나야 합니다.

속사람은 새 언약이 믿어지면 강건해 집니다.

새 언약이 믿어지면 자기 것을 버리고 예수님의 것을 붙잡아지게 됩니다.

새 언약이 믿어지면 예수님의 자랑거리가 가득해집니다.

 

신앙생활은 땅에 것을 버리고 하늘에 것으로 채우는 일입니다.

신앙생활은 내 것을 버리고 예수님의 것을 채우는 일입니다.

신앙생활을 할수록 자기 속에 예수님의 것으로 옹골차게 가득차 있어야 합니다.

내 속에 내가 있으면 안 되고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있으면 내가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이 남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으면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를 바라보게 됩니다.

 

노아 이야기도 그러합니다.

모두가 몰살당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노아를 살려 냈다는 것입니다.

노아에게만 살 길을 알려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노아가 그 당시 사람들에게 어떤 대접을 받고 어떤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모두가 홍수로 멸망을 받는데 살아났으니, 얼마나 감사할 일이 아니냐 이 말입니다.

그러니 노아가 어렵게 살았다 라든가, 고난을 당하였다든가, 자기 인생을 박탈당하였다든가 라는 것은 모두가 저주 받은 사람들과 비교하면 배부른 투정이고 철없는 소리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감사하는 마음이 없이 설교를 듣게 되면, 자칫 구원을 우리가 따 내는 것으로 오해 할 수가 있어집니다.

비록 우리의 행함을 요구하는 것처럼 말하여도 그 이면엔 우리의 악함과 게으름과 죄성을 고발하기 위함이지 여러분들의 행위를 끄집어내고자 함이 아닙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행위를 강조한다고 하여도 그 말을 따를 인간도 아님을 잘 압니다.

그러고 신앙생활이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되어지지도 않습니다.

여러분이 게으름을 피우고 말씀과 상관없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도 여러분의 마음을 여러분도 조절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다짐을 하고 또 다짐을 하여도 여러분은 육신을 이길 수가 없어요.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원하는 대로 또 이끌려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육신의 연약함을 예수님에게 넘겨주고, 예수님의 생명 즉 죄사함의 은총을 받아서 살아가야 합니다.

 

내가 잘나서 내 스스로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넘어질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예수님의 대속에 은혜를 깊이깊이 아로새기면서 감사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신의 한계를 분명하게 알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예수님에게 대신 담당케 해 주셨다는 그 은혜에 감사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신앙이 감사로 나타나야지 다짐과 각오로 나타나면 안 됩니다.

각오를 다지고 다짐을 하는 그 뜻은 가상하지만, 그렇다고 그 각오대로 살아내지 못하는 것은 엄연한 현실로 남아 있습니다.

 

죄인이란 답을 알고도 그 답대로 살아 내지를 못하는 38년 된 병자들과 같습니다.

저도 인간적으로 예수 잘 믿으라고 각오도 하고 다짐도 하라고 닦달하고 싶어요.

그러나 닦달한다고 바라는 신앙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잔소리해야하는 것은 여러분이 얼마나 불 신앙적으로 사는지 죄를 고발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자녀에게 공부 잘하라고 하지요.

공부하는 아이는 공부 잘해야 한다는 것을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니에요.

공부 잘하라는 부모보다 아이가 더 간절해요.

 

공부는 노력으로만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도 받쳐 주어야 합니다.

괜히 멀쩡한 아이를 머리 나쁘다고 닦달하지 마세요.

아이 머리 나쁜 것은 모두가 부모 탓입니다.

자기가 머리 나쁘니 아이도 머리가 나쁜 것입니다.

 

도리어 아이가 부모에게 좋은 머리 안 주었다고 화를 내야 해요.

이런 이치로 따지면 왜? 이런 골동품을 만들어 놓았느냐고 화를 내야 정상입니다.

아이 머리가 어디서 나왔겠어요.

모두 자기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입니다.

난 너만 할 때 척척 알아듣고 잘했다고 하지 마세요.

곁에서 그 말을 듣던 여러분의 부모님이 웃습니다.

 

여러분의 부모님에게 물어 보세요.

여러분은 더 했어요.

그래서 여러분의 부모님들이 그렇게 늙고 병든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도 속을 섞인 것이 늙고 병들게 한 한 원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모님 살아계실 때 잘 해 드리세요.

전화도 자주 드리고 용돈도 좀 넉넉하게 주시고 하세요.

꼴통 같은 우리를 버리지 않고 이렇게 키워주신 것을 알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선 우리 역시도 아담의 죄성을 그대로 물려받은 꼴통들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하나님 뜻대로 살고 싶어도 육신이 그렇게 따라 주지를 못하는 겁니다.

우리는 늘 마음뿐이고 그 마음에 품은 것을 삶으로 풀어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하나님이 먼저 아세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더러 말씀 지키라고 하지 않고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셔서 우리를 다 책임지시고 계신다는 것을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상고하는 이유는 우리가 무엇을 하고자 함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무슨 일을 하셨는가를 알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그 마음을 많이 알아가고자 함입니다.

 

아! 나같이 이런 못난 죄인을 위해서 그 죄 없는 독생자 예수님을 내어 주셨구나!

우리의 육신이 연약하여서 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을 우리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서 우리 죄를 담당케 하셨구나 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갈래 갈래 찢어 졌을까?

알아야 해요.

그러면 우리가 지금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엉터리이고 사기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깨달아지면 나 같은 악당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내가 바로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 내가 이렇게 살았고 저렇게 살았다는 것이 자랑거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심판 속에서 살아난 노아가 어떤 생각을 하였겠어요.

모두가 다 수장되어 죽은 마당에 자기만 덩그러니 살아있다는 이 사실 앞에서 나 방주 짓는다고 고생 고생 했습니다! 라는 말이 나오겠느냔 말입니다.

방주를 지은 내 공로도 좀 인정해 주세요! 라는 말이 나오겠느냔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얼마나 철없는 짓을 하고 있는 줄 아십니까?

일주일에 그 꼴랑 예배 한번 드리는 것도 오만 생색을 다 내고 있잖아요.

툭하면 볼 일 본다고 안 나오고, 결혼식 간다고 안 나오고, 손님 왔다고 안 나오고, 몸 아프다고 안 나오고, 아예 토요일 저녁에 몸이 조금 으슬으슬해도 나 내일 교회 안가! 라고 하잖아요.

 

교회 가기 싫은데 잘 되었다 싶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고 하잖아요.

예배 시간이 지났다 싶으면 언제 아팠느냐 하고 놀러 가서 희희덕 거리지 않느냔 말입니다.

이래서 안 나오고 저래서 안 나오고 하니 피골이 상접해 가지고 조그마한 일에도 시험에 들고 넘어지고 그러는 겁니다.

 

안수집사 안 시켜 준다고 교회 안 나오고,

권사 떨어졌다고 교회 안 나오고,

장로 떨어졌다고 다른 교회로 가고 무슨 믿음이 그래요.

아니 안수집사나 권사나 장로 정도 되고자 하는 믿음이라면 장로 안 시켜 주어도 감사합니다! 라고 해야지요.

 

나 그딴거 안 시켜줘도 내 남은 인생 복음을 위해서라면 눈알이라도 팔아서 내어 놓겠다고 해야지요.

옛 말에 늙으면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고 했어요.

교회에서 속된말로 간부가 되려면 섬김 받고자 하면 안 되고 섬겨야 합니다.

 

자기가 부인되어져야 할 그 경륜에 자기 고집과 아집으로 가득 차 있어서 예수님의 긍휼과 자비는 모두 엿 바꿔 먹고 속에 있는 것이라곤 시기와 질투와 미움과 탐욕뿐이라면 그건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예수 믿은 것이 아니고 교회 안에서 자기 영역을 넓히고 입지 쌓아온 것입니다.

 

뭘 말씀을 쳐 먹어야지 기운도 나고 할 텐데 맨 날 쳐 먹는다는 것은 쓰잘데기 없는 TV연속극이나 보고 세상 것만 잔뜩 쳐 먹고 있으니 무슨 하나님에 은혜를 알겠으며 무슨 감사가 나오겠어요.

나오는게 세상 것 없다고 불평이고 한숨이고 근심이고 걱정뿐이지요.

 

제발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 같은 꼴통을 위해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좀 아세요.

히브리서 11장을 믿음 장이라고 하는 이유도 믿음이 이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는 것을 증거키 위함이지 너희도 이렇게 살아라! 라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야! 우리 하나님은 그 홍수 속에서도 자기 백성은 반드시 건져 내시는구나 를 알고 감격하고 또 감격하여야지요.

 

아무리 지옥이 있고 불 심판이 일어난다고 하여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단 한 사람도 탈락되어지지 않고 다 구원해 주신다는 그 약속의 신실함을 믿고 안심하고 감사하며 살아야지요.

성도는 죽어가면서도 감사하는 자입니다.

스데반을 보세요.

죽어 가면서도 죽이는 자들을 향하여 애들아 날 죽여 줘서 고맙다! 라고 감사했잖아요.

 

우리는 다만 믿음에 사람들을 보면서 동일한 믿음을 받았음에도 우린 그들과 다른 모습으로 서 있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애통해 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악당들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그 은혜에 감사하여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시다.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약속이 믿어지도록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노아로 하여금 온갖 비웃음 속에서도 방주를 짓게 하였듯이,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주변의 시선을 이겨내고 조롱당한다고 할지라도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를 믿도록 해 주실 것입니다.

 

믿음이 노아로 하여금 방주를 만들게 하였다면, 우리도 동일하게 믿음이 예수라는 방주를 믿게 해 주실 것입니다.

 

노아에겐 방주가 약속이었고, 지금 우리에겐 예수님의 십자가가 약속입니다.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맺은 새 언약 안에 머물도록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환경도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의 새 언약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노아가 방주 지으라는 말씀을 경외하였듯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외하심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깨닫게 해 주실 것입니다.

부디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알아가는 믿음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예수님의 피로서만 구원이 된다는 것이 믿어지게 하시는 믿음 주심을 감사합니다. 이제 그 믿음이 예수 안에 항상 머물러 있게 하여 주실 것을 믿습니다.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만 존귀케 하는 하루하루가 되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