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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로마서 강해

15강. 보응하심 (롬 2:6-11)

by coroa 2020. 10. 9.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15강. 보응하심 (롬 2:6-11).-

 

-.정낙원 목사

 

 

 

오늘 본문은 문자적으로 보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앞에서는 “행한 대로 보응 하신다”고 하면서,

뒤에서는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신다” 고 합니다.

앞, 뒤가 서로 다른 모순처럼 들립니다.

그러니 6절과 11절은 서로 정면으로 대치되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6절에서 “행한 대로 보응 하신다”는 말은 각자의 모습대로 판단하신다는 말입니다.

이건 행한 대로 갚아 주겠다는 법으로서 “행함”입니다.

11절에서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건 모든 것을 덮어 주겠다는 긍휼로서 “은혜”입니다.

 

이를 신앙으로 이해하여 봅시다.

6절이 말하는 행한 대로 보응하는 것을 신앙으로 보면 “행함 신앙”이 됩니다.

반면에 11절에서 말하는 외모로 판단치 않는 것은 “은혜 신앙”입니다.

문자적으로 본다면 한 본문 속에 “행함 신앙”과 “은혜 신앙”이 동시에 존재하게 됩니다.

 

이러한 것 때문에 “알미니안주의”가 생겨난 것입니다.

알미니안 주의가 뭔가요?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면 인간이 반응을 하여야 한다는 사고입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해 주려고 다가 왔는데 우리가 마음을 열지 않고 영접하지 않으면 구원이 안 된다는 사상입니다.



그러니 구원을 받고자 하면 하나님의 은혜도 있어야 하지만 우리의 의지적인 결단이라는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신인협동 구원론”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알미나안 주의는 인간의 결단을 요구합니다.

마음을 열어서 주님을 영접하라고 소리칩니다.

그럼 교인들은 여기저기서 자리에서 일어나 영접 기도를 합니다.

부흥사들이 집회 끝에 꼭 결단의 시간을 가지는 것은 모두가 이 영향에서 비롯이 된 것입니다.

 

이런 알미니안식 사상이 성화주의를 낳게 되었습니다.

이 시대 부흥을 외치는 많은 교회들이 이런 신앙을 추구하고 있어요.

그래서 인간의 행함을 강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함을 강조하다가 보니 자연히 부흥신앙을 낳게 되고 기복신앙을 낳은 것입니다.

 

이게 왜? 교회 안에서 옳은 신앙처럼 자리를 잡게 되는가 하면 교회라는 조직을 운영하자면 인간의 행함이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이 충성하고 봉사하고 헌금을 하여야 교회라는 조직이 운영되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유지하고 지키기 위해서는 교인들이 움직여 주어야 해요.

 

그러니 교권주의 목사들에게는 알미니안식 설교가 구미에 딱 맞는 것입니다.

봐라! 참고 선을 행하면 영생을 주신다고 하지 않느냐!

당을 짓고 불의하면 저주 받는다고 하질 않느냐!

그러니 목사들이 이런 본문으로 교인들 군기를 잡는데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여기에서 상급론이 나왔어요.

그냥 행하라고 하면 안 하니까!

인간의 이성과 상식을 동원해서 이 땅에서도 행한 대로 보상을 받으니 천국에서도 이 땅에서 자기가 행한 대로 자기 열심에 따라서 상급에 차등이 있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인들이 천국에서 큰 상을 받을 것이라고 충성 경쟁을 벌리는 것입니다.

 

사태가 이렇다 보니 성경의 해석이 일관성을 잃고 앞에서는 은혜를 말했다가, 뒤에 가서는 행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듣는 교인들도 헷갈리는 겁니다.

그럼에도 교인들이 진리처럼 따르는 것은 알미니안식 설교가 인간의 상식에 맞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상식은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사필귀정의 원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당연하게 복 받을 짓을 하면 복을 받고, 벌 받을 짓을 하면 벌을 받는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자기가 행한 대로 돌려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걸 인과응보라고 합니다.

인과응보란? 원인에 의하여 결과가 도출 되는 것을 말해요.

 

우리도 은연중에 이런 사고로 곧잘 말을 합니다.

내 그럴 줄 알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것은 네가 하는 짓거리를 보니 그런 결과가 나올 줄 알았다는 말입니다.

이게 인과응보에요.

인과응보는 예측이 가능해요.

하는 짓을 보면 복을 받을지 저주를 받을지 알아요.

 

그래서 세상 종교는 인과응보를 진리로 가르칩니다.

착하게 살아서 복 받으라고 합니다.

절간에서 그러잖아요.

공덕을 쌓아서 복을 받으라고 하잖아요.

이는 곧 복은 내가 쌓은 공덕이라는 원인에 의해서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원인에 의하여 결과가 도출하는 것을 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과응보식 신앙을 교회가 가르치고 있어요.

충성하면 복을 받는다고 가르쳐요.

그래서 무슨 무슨 비결이라는 이름으로 가르쳐지고 있어요.

 

복 받는 비결!

은혜 받는 비결!

구원 받는 비결!

은사 받는 비결!

 

비결이란? 방법론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복이나, 은혜나, 구원이나, 은사는 모두가 하나님이 거저 주는 선물이에요.

이건 우리가 어떤 짓을 해서 얻어내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 복 받는 비결이나 은혜 받는 비결이란 말은 비 성경적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시대 많은 교회에서는 아주 노골적으로 지성이면 감천한다는 사상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열심히 해서 복 받으라는 말이 곧 지성이면 감천하다는 사상입니다.

당신이 복을 받지 못하는 것은 열심히 하지 않아서 라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나 절간이나 같은 것입니다.

이름만 다를 뿐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착함을 근거로 신에게 복을 받아 입신양명 하고자 하는 생각은 동일한 것입니다.

그러니 서로 종교 간에 교류가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 조00 목사가 동국대 승가 대학원에서 강의를 하였는데 스님들이 엄청 은혜 받았다고 감사했어요.

조00 목사의 설교를 들은 스님들이 야! 저러니 세계 최고의 교회를 운영하는구나 칭송했어요.

목사가 스님들과 같은 사고의 말을 하니까 스님들이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진짜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 스님들이 화가 나야 하는데 도리어 목사님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라고 하였다니까요.

 

종교로 따지자면 기독교는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타력 종교이고,

불교는 자기 행함으로 구원을 따내는 자력 종교에요.

이 둘은 전혀 다른 성향의 구원관으로서 빛과 어둠처럼 서로가 하나 될수가 없어요. 

그럼 목사의 설교를 스님들이 들으면 적개심이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목사의 설교를 스님들이 은혜 받았다고 하고 있어요.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결국 스님들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은혜 받았다고 하지요.

웃기지요.

 

그런데 이렇게 웃기는 목사들의 말이 교회 안에서 진리처럼 통용되고 있어요.

결국 목사나 스님이나 유유상종인 겁니다.

그러니 서로의 말이 은혜가 되는 거지요.

이걸 음녀라고 해요.

 

요한계시록에서는 타락한 교회를 각양 귀신들이 모이는 처소라고 합니다.

이걸 다른 말로 음녀라고 합니다.

음녀가 뭔가요?

이 남자 저 남자하고 놀아나는 여자를 말하잖아요.



교회가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꿈꾼다는 것은 곧 교회가 이 신도 섬기고, 저 신도 섬기는 음녀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절간에서도 뿌린 대로 거둔다고 가르치고 교회에서도 열심히 해서 복 받고 천국에서 큰 상급을 받으라고 하고 있잖아요.



세상의 신관이 그대로 교회 안에서 증거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알고 있는 신은 착한 자에게는 복을 주고 악한 놈에게는 벌을 주는 상선벌악하는 신이에요.

그래서 세상에선 태어나면서부터 착하게 살아야 복을 받는다고 교육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들이 알고 있는 신관입니다.

 

그럼 어째서 교회가 성경을 가지고 세상과 동일한 해석을 할까요?

이는 모두가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문자적 해석법이 등장하는 것은 모두가 창세전 언약을 몰라서 그래요.

언약을 모르니 성경이 오늘 본문처럼 앞뒤가 서로 모순처럼 나오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행함을 섞어서 가르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오늘 본문을 어떻게 해석을 하여야 할까요?

모든 성경은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말씀하고 있으니 오늘 본문도 창세전 언약으로 해석하면 이해가 됩니다.

어렵지 않아요.

물론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보는 성도에 한해서입니다.

 

그럼 본문을 창세전 언약 관점에서 해석하여 봅시다.

그러자면 지난 시간에 살펴본 본문과 연결하여서 보아야 합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판단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잠시 지난 시간에 못다한 미진한 부분을 살펴보고 갑시다.

 

판단이란? 나누고 잘라낸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심판이라고도 합니다.

양과 염소처럼 곡식과 가라지처럼 서로 다른 것을 갈라낸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판단한다는 것은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 초림 당시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는 성도들을 유대교로부터 출회하는 것과 같아요.

범죄한 자를 이스라엘 진 밖으로 쫓아내는 것과 같아요.

이스라엘 진 밖으로 누구를 쫓아냈습니까?

악을 행한 자나 문둥이를 쫓아냈어요.

함께 살 수가 없으니 쫓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구로부터 판단을 받고 쫓겨난다는 것은 곧 죽음과 같은 것입니다.

조직이나 집단에서 출교를 당한다는 것은 그 조직이나 집단에선 죽은 것이에요.

교회에서 쫓겨나는 것은 곧 그 교회로부터 죽임 당한 것이에요.

인간은 모여서 집단을 이루고 살아가는 사회적인 동물인데 살아가는 근거지인 그 사회로부터 쫓겨난다는 것은 최고의 형벌이에요.

 

그러므로 사람들은 출회나 출교를 당하지 않으려고 자기가 몸 담고 있는 조직이나 교회에서 금하는 일이나 반하는 말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조직이나 교회에서 금기시 하거나 반하는 이야기를 하면 즉시로 조직을 보호한다는 미명으로 출회를 당하게 되어 있어요.

 

이걸 이 시대 복음 안다고 하는 교회나 집단에서도 그대로 행하고 있어요.

자신들과 다른 이야기를 하면 복음을 보호한다는 미명으로 좇아내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쫓아내면서도 하는 말이 꼭 하나님께서 갈라낸다고 해요.

이들은 자기들 집회에 참석하지 않거나 자신들의 사상에 동조하지 않으면 전부 복음 모르는 자로 간주해서 쫓아내요.

결국 자기들이 하나님이 되어서 심판을 행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짓을 하는 것은 스스로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에요.

 

이러한 판단을 누가 한다고 했나요?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는 버려진 자들이 한다고 했습니다.

죄인들이 한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두 세 사람만 모이면 조직을 만들고 그 조직을 위해서 유익이 되느냐! 아니면 조직에 해가 되느냐! 판단하고 심판을 하는 법적인 행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인간들에겐 아주 자연스러워요.

무슨 일을 해도 법을 행사해요.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이 선악의 법 아래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법이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법은 사람을 가두고 죽이는 일을 해요.

그러므로 법 아래 있는 자는 다 죽은 자에요.

죽은 자들이 죽은 짓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판단하고 심판하는 죽이는 짓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죄인은 죽은 자라고 하는 것도 다 법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는 죽이는 짓만 하고 살아요.

죽은 죄인에게서는 생명이 나오지 않아요.

복음을 말하면서 이런 정죄와 심판을 하는 자들은 그 안에 법이 자리 잡고 있어요.

자기 안에 법이 그러한 짓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죄인들이 하는 짓은 항상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죽이는 짓을 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린 모두가 이런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전혀 다른 법이 들어 왔어요.

낯설고 생소한 “살리는 법”이 들어왔어요.

은혜가 들어 왔어요.

이런 죄인에게 살리는 “성령의 생명의 법”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성도라 불리우는 사람들 속에 생명이 들어 온 겁니다.

이름하여 성령입니다.

성령은 “살리는 법”이에요.

성령은 “살리는 영”입니다.

 

이렇게 되면 “갈라내서 죽이는 영”과 “하나 되어 살리는 영”이 충돌을 하게 됩니다.

이걸 “성령의 소욕”과 “육신의 소욕”이 서로 싸운다고 합니다.

이걸 영과 육의 싸움이라고 합니다.

이 싸움 속에서 우리는 늘 죄인으로 드러나요.

 

그리하여서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없는 인간인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하면 당연히 저주 받아야지요.

그럼에도 살고 있어요.

여기에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는 다 용서 받은 자에요.

이걸 잊지 마세요.

용서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남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와 다르다고 잘라내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잘라내고 심판하는 일은 하나님만이 하실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밭에 곡식과 가리지 비유를 하셨습니다.

 

곡식과 가라지는 종자가 달라요.

처음부터 곡식은 곡식이고 가라지는 가라지에요.

가라지가 착한 일을 하면 곡식이 되고, 곡식이 나쁜 짓을 하면 가라지가 되는 것이 아니에요.

곡식이 가라지가 되고 가라지가 곡식이 되는 법은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한 밭에 본질이 다른 두 종자가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밭이란? 광의적으로는 온 세상을 말하지만 영적으로는 교회를 말해요.

교회 안에 육으로 난 이스마엘과 약속으로 난 이삭이 있어요.

옛 언약에 속한 자와 새 언약에 속한 자들이 있어요.



이들은 자기들 본성대로 살아요.

마귀 안에 있는 자는 마귀 짓을 하고, 예수님 안에 있는 자는 예수님 짓을 해요.

하는 짓을 보면 알 수 있어요.

 

그래서 종들이 가라지를 뽑고자 하니까 주인이 뽑지 말라고 합니다.

추수 때까지 그만 두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이 다치게 될까봐서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가 심판을 하다가는 그릇된 심판을 하게 된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심판은 주인인 하나님이 하도록 가만 두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를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 더러 판단하고 심판하는 권세를 행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옳고 그름은 하나님만이 판단하실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심판은 창조주 하나님만이 할 수가 있어요.

 

피조물은 심판하면 안 되어요.

피조물이 심판하면 자기중심으로 해요.

자기중심으로 하는 심판은 공정한 심판이 될 수가 없어요.

 

그래서 피조물인 인간에게 하나님이 심판하는 권세인 선악과를 막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걸 먹으면 너희가 심판을 행사하게 되는데!

그럼 그 심판은 너희들 중심으로 행하는 심판이므로 옳은 것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만 인간이 선악과를 따 먹었어요.

이제 심판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남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일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두가 선악과라는 심판의 법 아래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어려서부터 편을 가르고 자기중심에서 자기 유익을 근거로 니편 내편 호(好) 불호(不好)를 가리는 식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왜? 이런 일을 일어난다고 했나요?

모두가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니들 맘대로 살라고 하니까 인간 세상이 전쟁터가 된 것입니다.

서로가 죽고 죽이는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남을 판단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 중에서 하나님이 간섭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바로 성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간섭 하니까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성도들 안에서 비록 누가 내 맘에 안 든다고 하여도 주님께 맡기고 참아야 한다고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서툴고 익숙지 않아요.

하지만 그러한 성향이 있어요.

판단하는 것이 악이라는 것을 알고 금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길이 참으심으로 용서받고 사는 자들이에요.

그러니 원수를 보고 내가 하나님 앞에 원수라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런 원수가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은 모두가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이를 알아요.

 

하나님께서 죄인을 용서하심의 바탕엔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를 보시고 우리를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바탕엔 예수님의 죽으심이 있습니다.

이걸 잊으면 안 되어요.

 

이걸 잊으면 하나님처럼 남을 판단하고 심판하게 되어요.

마귀 짓을 하게 된단 말입니다.

그 어떤 명분이라 할지라도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심판하는 짓은 복음을 받은 자들이 행하는 자세가 아니에요.

 

원수 갚음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린 탄원하고 기도 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나와 다름으로 있다 하여도 심판하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가 곧 “내 자신” 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내 자화상이에요.

하나님은 이웃 사람을 통해서 나를 보게 하신다고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생활이 용서 받음에 감사가 되어요.

 

우린 말씀을 통해서이든지 사람을 통해서이든지 내가 하나님의 원수인데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범사에 감사함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끝에는 항상 어린 양의 피 흘리심으로 살고 있음에 대한 찬미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의 핵심입니다.

죄인을 예수의 피로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이에요.

모든 말씀도 이 창세전 언약을 바탕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볼 때 항상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우리가 용서받고 있다는 사실로 읽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그 말씀을 내가 지켜서 의로워져야 한다는 식으로 보게 되면 그건 자기 치장으로 치닫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말씀을 지키면 지킬수록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이런 자들이 바로 유대인들이었어요.

 

유대인들이 누구를 판단했습니까?

이방인들을 판단했어요.

세리와 창기들을 판단했어요.

무엇으로 판단했습니까?

율법 지킴으로 판단했습니다.

 

자신들은 율법을 지켰기 때문에 의롭고 세리와 창기나 이방인들은 율법을 어기고 살았기 때문에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들은 심판할 자격이 있고 또한 자기들이 행하는 심판은 옳다고 생각했어요.

이에 바울은 무슨 소리냐?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지킨 자나 안 지킨 자나 동일하다고 합니다.

 

모두가 죄 아래서 난 자들이기 때문에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한 통속으로 본다는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지킨 자나 율법을 안 지킨 자나 다 같은 죄인이에요.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킨 것을 가지고 책망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행위는 본 받으라고 했어요.

다만 율법 지킴을 의로 행사하는 것을 악이라고 책망을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율법 지킴을 가지고 율법을 모르는 자들과 다름으로 나온다는 자체가 자신들이 율법 지킨 것을 힘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을 악이라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선 율법을 지킨 것이나 안 지킨 것이나 의미가 없어요.

왜냐하면! 애당초 율법을 주실 때에 죄인을 고발하기 위함이지 율법을 지켜서 의로워지고 그 의를 힘으로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너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바탕에 깔고 주어진 것이에요.

 

죄인들이 사는 세계에서만 법이 필요해요.

죄가 없는 곳에는 법이 필요가 없어요.

천국에 가면 율법이 필요가 없어요.

거긴 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율법이 떨어졌다는 것은 곧 너희는 죄인이라는 것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율법이 주어졌어요.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오해를 했어요.

율법을 지키면 의로워지는 줄 알았어요.

죄가 없는 줄 알았단 말입니다.

 

죄인은 율법을 지켜도 죄인이고, 율법을 안 지켜도 죄인이에요.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면 의인이 되는 줄 알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건 착각이어요.

 

하나님은 율법을 지켜도 의롭다고 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율법 속에는 하나님의 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의는 예수님 안에만 있어요.

하나님은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세요.

그래서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율법 지킴 속에 구원하는 의가 있다고 한다면 율법 외에 다른 의인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주시지 않았어요.

율법 외에 다른 의를 주실 필요가 없지요.

율법을 지켜서 의로워지면 되니까요.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율법 지킴 속에 있지 않고 다른데 있어요.

예수 안에 있어요.

 

이건 마치 에덴동산에서 영생이 생명과 속에 있는 것과 같아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어서 망한 것이 아니라 생명과를 먹지 않아서 망했어요.

설령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안 따먹어도 영생하지 못해요.

왜냐하면! 영생은 생명과 속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라는 것이에요.

그리하여 영생하는 하나님과 아버지와 아들로서 영원토록 교제하자는 것입니다.

 

이걸 신약 식으로 해석하면 하나님은 율법을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 로 따지지 않고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도 거기엔 하나님의 의가 없으니 율법 지킨 것을 가지고 신앙이 있다고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율법 지킴을 가지고 의롭다 생각하고 이방인들을 판단했어요.

우린 율법을 지켰는데!

너희들은 안 지켰지!

그러니 율법이 없는 자는 저주 받은 죄인이라고 판단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아니 율법 속엔 의가 없는데!

뭘 그걸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느냐!

하나님 앞에선 예수를 안 믿으면 다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킨 놈이나 안 지킨 놈이나 다 똑 같으니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오해를 해요.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라고 하면 그럼 하나님 말씀대로 살 필요가 없네요! 라고 빈정거려요.

제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 아닙니다!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지킨다고 의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란 것을 말하고자 함이에요.

 

하나님 앞에 의는 예수님에게만 있어요.

그러니 하나님 말씀을 지킨 것과 상관치 말고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다만 예수님의 십자가 속에 하나님의 의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 믿으면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좋지요.

말씀을 지킬 수만 있으면 얼마든지 지켜야지요.

성도라고 한다면 당연히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자 애를 써야지요.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 말씀대로 산다고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고 영생은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이걸 놓치면 유대인들처럼 자신들이 율법을 지킨 것을 힘으로 삼아서 율법대로 살지 않는 자들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잘못을 저지르게 되어요.

바울은 지금 그걸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의도 없는 율법 지킴을 가지고 남을 판단하느냐!

예수 안 믿으면 너도 판단 받아야 할 놈인데!

그러니까 그런 짓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 믿으면 남을 판단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무슨 말을 못하겠어요.

 

아니 생각해 보세요.

의는 예수님 안에 있는데!

예수 안 믿으면 율법을 지킨 사람이나 안 지킨 사람이나 똑같잖아요.

그런데 누가 누구를 판단 한단 말입니까!

 

막말로 자기도 수영을 못해서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어찌 옆에 허우적거리는 사람보고 수영 못한다고 나무랄 수가 있느냔 말이에요.

바울은 지금 유대인들에게 야! 임마! 너희도 예수 안 믿고 이방인도 예수 안 믿잖아요.

그럼 도낀 개낀인데 뭘 판단하느냐!

너나 이방인이나 다 똑 같은데 어떻게 같은 놈이 판단하느냐 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그러니 누굴 판단하지 마세요,

그건 우리가 할 몫이 아니에요.

남의 신앙에 신경 쓰려고 하지 말고 내 앞가림이나 잘 하세요.

자기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면서 남의 신앙이 옳으니 그르니 하지 말란 말입니다.

 

설령 복음을 안다고 하여도 남이 복음을 아네! 모르네! 판단하지 마세요.

만약에 복음 안다고 하면서 남을 판단한다고 하면 그 사람은 지금 유대인과 똑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율법 지킴을 힘으로 사용하여서 남을 판단하였듯이!

지금 당신도 복음 안다는 것을 힘으로 사용하여 남을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율법 지킴이나 복음 안다는 것이나 동일해요.

남을 판단하는데 힘으로 사용하고 있으니 동일한 것이지요.

 

복음 안다는 것은 남을 판단하는데 사용하는 힘이 아니에요.

감사해야 하는 것이에요.

감사하라고 복음을 깨닫게 해 주신 것이에요.

그럼 누가 복음을 모르면 너 왜? 복음 몰라 라고 판단 할 것이 아니라 어쩌자고 나에겐 복음이 들려지게 해 주셨는가에 대한 감사가 나와야 합니다.

이게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지금 우리가 복음을 모른다고 판단하는 그 사람도 하나님께서 지금이라도 귀를 여시고 마음을 열어서 복음을 깨닫게 해주시면 복음을 알 수가 있어요.

극단적으로 절간에 스님들에게도 하나님 은혜가 임하면 설법(說法)을 하다가 여러분 예수 믿어야 영생을 받습니다! 라고 말할 수가 있어요.

하나님이 은혜 주시면 무당도 예수 믿을 수 있다니까요?

 

아니 우리도 원래 무당 짓을 했잖아요.

그러다가 어느 날 복음이 깨달아졌잖아요.

그러니 남들도 어느 날 복음이 깨달아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조금 일찍 깨달은 것뿐이에요.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처럼 자기도 놀다가 부르심을 입고 간 주제에 노는 사람보고 손가락질을 하면 안 되지요.

그 사람들도 잠시 후면 주인이 부르실 겁니다.

그러니 조금 일찍 복음 알았다고 시건 방 떨지 마세요.

콱 쥐어박기 전에!!!

까불면 맞아요.

 

그러니 복음이 깨달아지면 주여 어쩌자고 이 무지랭이 같은 인간에게 예수가 주(主)이시고 그리스도이심이 믿어지게 해 주셨나이까 라고 감사하세요.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믿어진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에요.

그러니 감격하고 감사하고 찬송하세요.

 

지금 바울이 로마교회 안에 유대인들과 같은 자들이 있기 때문에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똑 같은 자들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린 모두가 판단 받아야 할 자들이므로 남을 판단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도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책망을 들어야 해요.

우리가 유대인들과 같은 짓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항상 그 어떤 말씀도 전부 내게 하는 말씀으로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나를 비춰주는 내 거울로 삼아야 한단 말입니다.

 

성경은 너희 인간은 죄인이라고 천명하면서 주어졌어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이라는 것을 알게 하려고 율법을 주신 것과 같아요.

목이 곧다는 것은 고집이 세다는 말입니다.

 

고집이 뭔가요?

고집이란? 단단히 매여 있다는 뜻입니다.

무엇이 인간을 매고 있는가요?

죄에요.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는 죄 말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모든 인간을 죄 아래 가두었다고 합니다.

불 순종가운데 가두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이에요.

죄인은 죄를 이길 수가 없어요.

 

갈라디아서 3장과 로마서 11장을 봅시다.

 

갈 3:22절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롬 11:32절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보세요.

하나님이 죄 아래 가두었다고 하지요.

그리고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고 하지요.

누가 그랬습니까?

하나님이 그랬어요.

 

왜? 가두어 놓았습니까?

이는 긍휼을 베풀기 위함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하기 위함입니다.

죄를 못 이겨야 믿음으로 구원을 합니다.

순종이 안 되어야 불쌍히 여김이 되어요.

 

구원이란? 불쌍히 여김을 받는 거예요.

잘난 사람은 불쌍히 여기지 않아요.

못난 사람이라야 불쌍히 여겨요.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주어서 그들의 꼬라지가 죄 가운데 가두어지고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졌다는 것을 깨닫게 하여서 불쌍히 여기려고 하셨어요.

그런데 이 놈들이 말씀대로 살겠다고 설치고 순종하겠다고 설친단 말이지요.

이렇게 설치는 놈은 방법이 없어요.

넘어뜨려야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시온에 거치는 반석으로 오셔서 태클을 걸어 넘어뜨린 것입니다.

율법 지킴을 신앙으로 붙잡고 있음이 죄라고 고발을 해 버린 것입니다.

율법 지킴이 하나님의 원수로 드러나게 하셨어요.

어째서 그렇습니까?

유대인들이 율법을 가지고 예수를 죽였잖아요.

그러니 율법으로 하나님 원수노릇을 한 것이지요.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이 사실을 알고 기절을 했어요.

세상에!

하나님께 충성한다고 한 것이 도리어 하나님을 죽이는 원수 노릇을 했으니 기가 찰 노릇이지요.

결국 유대인들은 그 좋은 율법을 가지고 하나님을 죽인 원수로 넘어지게 만든 것입니다.

넘어지게 만들고 용서하심으로 긍휼을 베푸는 식으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에 비밀을 알겠습니까?

놀랍지 않나요.

 

전 여기서 엄청난 은혜를 받아요.

세상에 내가 왜? 죄를 못 이기는가 했더니 하나님이 나에게 긍휼을 베풀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그렇게 열심히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 했어요.

죄 안 지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럴수록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어요.

그러니 저는 하나님 말씀 앞에만 서면 점점 작아지고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그러니 불쌍히 여겨 주소서” 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인은 순종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순종이 안 되도록 가두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순종이 되면 예수 믿을 필요가 없어요.

예수는 순종이 안 되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예수는 죄인이 믿어요.

이걸 잊지 마세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를 믿게 하기 위해서라도 순종이 안 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지지 않도록 하시는 겁니다.

참 재미있는 것이 우리가 죄 안 짓고 말씀대로 산다고 하면 너는 말씀대로 살지 못한다고 간섭을 하시고, 우리가 개판으로 살아도 된다고 하면 너 왜?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느냐고 간섭을 하세요.

 

이래 저래 우리는 하나님 말씀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지켜도 죄인으로 드러나고!

말씀을 안 지켜도 죄인으로 드러나요.

하나님 말씀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에 빠져 나갈 구멍이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 말씀은 양날 가진 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간사스러워서 복음도 자기 사욕을 위하여 이용하고자 해요.

복음 핑계대고 자기 욕심을 다 챙기고자 한단 말이에요.

그럼 하나님께서 네 이놈 왜? 복음 핑계대고 육신의 쾌락을 쫓아가느냐고 책망을 해요.

 

우린 이 책망에 늘 상한 심령 일어날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 수가 없다니까요.

유구무언일 수밖에 없어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나요.

 

죄인은 선악의 법아래서 태어납니다.

선악의 법은 심판의 법입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본능적으로 남을 판단하고 심판을 합니다.

남을 판단한다는 것 자체가 죄 아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는 남을 판단하지 말라고 하여도 우린 그 말을 듣기는 들어도 그 말을 지키기란 불가능해요.

이렇게 불가능한 것을 고집이라고 합니다.

 

그럼 이 고집이 하나님 말씀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살펴보기로 합시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나아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즉 “너는 율법을 어떻게 해석하는데!” 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율법사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라고 대답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네가 하나님 말씀을 그렇게 읽었으면 그렇게 살으라” 는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이해를 한다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지 별 도리가 있겠느냐 라는 말입니다.

 

율법사와 예수님의 대화를 보면서 무엇을 느낍니까?

예수님이 율법사에게 대답 하신 것을 여러분은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쉬운 말로 여러분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읽습니까?

우린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무엇을 눈여겨보아야 합니까?

사람마다 성경을 읽는 눈이 있다는 말입니다.

율법사는 율법사로서 성경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고!

예수님은 예수님으로서 성경을 읽는 눈을 가지고 계십니다.

 

율법사는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라고 묻는 물음 속에는 영생을 어떤 조건으로 얻어낼 수 있는 것이라고 보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건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율법사는 성경을 읽는 눈은 자기가 지켜야 하는 것으로 읽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법이거든요.

그러니까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 라고 묻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걸 아시고 “너는 성경을 어떻게 읽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네 눈에 하나님 말씀이 법으로 보여지면 법대로 지킬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사가 이렇게 묻는 것 자체가 이미 틀린 답이에요.

예수님은 그걸 알려주고자 선문답 하는 식으로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율법사의 질문 속에는 영생을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내고자 하는 법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럼 한번 얻어내 보라고 하십니다.

“네 방식대로 해 보라”는 것입니다.

“네가 성경을 이해한 방식대로 해 보라” 고 합니다.

 

그러자 율법사가 내가 어려서부터 했는데도 안 되는데요! 라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이 그럼 네가 성경을 잘못 보고 있는 것이지!

되지도 않는 것을 왜? 하고 있느냐!

네가 뭘 해서 영생을 얻고자 하는 그 행사머리가 틀렸다는 것입니다.

 

영생은 인간이 뭘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그냥 하나님이 거저 주세요.

자기 백성이면 가만히 있어도 주세요.

남에 백성은 달라고 해도 안 주어요.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사람에게만 주세요.

 

그러니 인간이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습니까? 라는 사고 자체가 법에 속한 악한 것입니다.

죄인이 영생을 얻긴 뭘 얻어!

그냥 죽어!

자신은 죽어야 하는 자라는 것을 아는 것이야 말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입니다.

 

지금 예수님과 율법사는 하늘에 사람과 땅 사람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율법사와 같은 사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율법사와 같은 성경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할까요” 라고 묻는 것입니다.

 

율법사의 사고는 하나님 말씀을 지켜야 하는 행함의 주체를 자기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 라고 묻는 것입니다.

이 말은 “내가 하나님 말씀을 지키겠습니다!” 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 시대 성화주의 교인들의 사고방식입니다.

“말씀을 내가 지켜야 한다!” 고 합니다.

목사님들도 그렇게 가르칩니다.

 

그러니 교인들은 “어떻게 할까요?” 라고 묻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자신이 말씀을 지켜야 하는 주체로 두고 있으니 신앙을 “무엇을 믿을 것이 무엇인가?”로 접근하지 않고 “무엇을 해야 할까요?” 로 접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목사님들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고 법으로 말합니다.

부창부수입니다.

 

이러면 답이 없어요.

이런 상태를 두고 성경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고 합니다.

그럼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요.

이 시대 교회가 이런 짓을 하고 있어요.

 

그러니 맨 날 성화 해야 한다! 아니다!

개혁을 해야 한다! 아니다!

십일조를 해야 한다! 아니다!

주일성수를 해야 한다! 아니다!

 

해야 한다는 것도 행위고 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도 행위에요.

관심사가 자기에게 있잖아요.

그러니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이건 선악과를 따 먹어도 되느냐! 따 먹지 말아야 하느냐! 의 싸움과 같아요.

 

이게 마귀가 노리는 노림수에요.

마귀는 선악과에 눈을 붙잡아 두어서 생명과를 못 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선악과 먹을까요? 말까요?

그러면 하나님이 거기 신경 쓰지 말고 생명과 먹어!

그런다구요.

 

지금 식으로 말하면 하나님!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까?

살지 않아도 됩니까?

그럼 하나님이 예수 믿어!

그런 다구요.

뭔 말인지 이해가 가나요.

 

지금 신앙의 포카스를 어디에 맞추어져 있나요?

전부 내가 뭘 해야 한다는 것에 두고 있잖아요.

해야 한다는 것도 내가 주체이고!

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도 내가 주체에요.

 

그러니 내가 주체이고 내가 뭔가 해야 하느냐 마느냐 라는 내 행함에 두고 있어요.

포카스가 여기에 맞추어지면 둘 다 똑 같아요.

둘 다 예수님에게 관심 없기는 마찬가지에요.

결국 나에게 관심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나에게 백날 관심을 둬 보세요.

거기서 의가 나오지 않아요.

영생이 나오지 않는단 말입니다.

내가 말씀대로 살아도 영생이 나오지 않고 말씀대로 안 살아도 영생이 나오지 않아요.

그러니 정답이 아닌 것입니다.

 

이러고 있으면 마귀가 배시시 웃지요.

마귀가 멋지게 성공한 겁니다.

마귀는 아담과 하와의 관심사를 예수라는 생명과에서 멀어지게 하는 겁니다.

어떻게 멀어지게 하는가 하면 선악과에 눈을 잡아 두면 되어요.

선악과에 눈길이 잡히면 게임은 끝이에요.

 

이 시대 선악과란? 예수님을 떠난 모든 것이에요.

그럼 맨 날 말씀대로 살까! 말까!

성화가 옳으냐! 그르냐!

개혁 신앙이 좋으냐! 나쁘냐!

이 싸움만 해요.

결국 본질을 벗어난 허공을 치는 싸움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냐를 알아가야지!

내가 뭘 할까? 라고 하면 안 된단 말입니다.

 

이러면 꼭 그럼 막 살아도 되겠네요! 라고 하는 자들이 일어나요.

막 살아도 되겠네요! 라는 말은 곧 자기에게 관심을 두는 또 다른 행위에요.

결국 복음을 빙자해서 자기 소욕대로 살겠다는 심보에요.

자기 소욕대로 사는 것을 복음으로 면피하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건 아니지!

성도가 어떻게 육신이 이끄는 대로 사느냐!

육신의 소욕과 싸워야지!

그럼 그건 행위 아닙니까? 라고 지랄을 해요.



저는 복음으로 자기 행위를 정당화 시키고자 하는 그 사고를 악이라고 고발하기 위해서 그렇게 살지 말라고 하는 것이에요.

그러니 이게 찔림이 되니 발끈하는 것입니다.

좌우지간 복음을 전해 보면 별 희한한 인간들이 다 나타나요.

 

암튼 성도는 말씀을 대할 때에도 이 말씀을 내가 어떻게 지킬까 생각하지 말고 말씀 앞에서 우리는 먼저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내가 과연 이 하나님 말씀을 지켜 낼 수 있는 자인지를 아는 것이 먼저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아무리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하라! 고 명령을 한다 할지라도 내가 그 명령을 지켜 낼 수 있는 인간인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내가 만약 그 명령을 지켜 낼 수가 없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명령은 그 의도가 다른 곳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말씀을 지킬 수도 없는 자에게 말씀을 지키라고 할 때는 다른 뜻이 있음을 감지해야지요.

그러지 않고 예~! 말씀대로 살게요! 라고 하면 안 되어요.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않고 내게 와서 긍휼을 배우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부모가 공부 안하고 말 안 듣는 자식을 보고 야~ 나가서 돈 벌어와!

그럼 이 말을 왜? 했는지를 알아야지요.

그렇지 않고 예~ 아버지 알았습니다!

그러곤 지하철에서 껌 팔러 다니면 안 되잖아요.

 

지하철에서 껌 팔게 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 아니잖아요.

그럼 부모가 나가서 돈 벌어 오라고 하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물어야지요.

아빠 왜? 그래요.

그럼 아빠가 컴퓨터 게임하지 말고 공부하란 말이야 라고 하잖아요.

 

그러니 부모가 나가서 돈 벌어오라는 말 속에는 내가 나가서 돈 버는 것이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고 공부하라는 것이 들어가 있잖아요.

그럼 공부하면 부모는 돈 벌어 오라는 말을 안 해요.

공부만 열심히 하면 나가서 돈 안 벌어 와도 아무런 말을 안 해요.

도리어 칭찬 한다니까요.

 

지금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이런 저런 명령을 하고 있어요.

그럼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를 알아야지요.

하나님이 말씀한다고 해서 예! 하고 덤비지 말고!

어휴~ 답답해!

 

유대인들이 이 답답한 짓을 했어요.

율법을 주니까

예!~ 지킬게요!

그러고 있었어요.

그러니 말씀대로 살아서 망하지요.

 

이건 마치 부모가 돈 벌어오라고 하니 껌 팔아서 돈 벌고 와서 죽싸게 얻어터지는 것과 같아요.

아빠가 돈 벌어오라고 해도 껌 팔러 가면 안 되어요.

그건 아빠를 위한 것이 아니에요.

도리어 아빠를 걱정하게 하는 일이에요.

 

유대인들은 지금도 몰라요.

아니 우리가 왜? 망했지!

우린 율법대로 산다고 살았는데!

하나님이 왜? 성질을 내지!

뭐가 부족한가?

그 원인을 몰라요.

 

그런데 이런 짓을 성화주의자들이 하고 있어요.

이 시대 유대인들이 알미니안 주의이고 성화주의자들이에요.

성화하고 개혁하는 것이 무슨 엄청난 일이라도 되는 줄 알아요.

하나님의 뜻은 전혀 다른 곳에 있는데 말이에요.

그래서 내 백성이 무지해서 망한다고 하는 겁니다.

말귀를 좀 알아먹으세요.

 

왜? 인간들이 하나님 말씀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하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은 인간 위에 군림하시는 분으로서 인간을 억압하고 다스린다고 생각을 해요.

그 누구도 하나님과 교제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을 노엽게 하지 않으려고 지극정성으로 섬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인간들이 알고 있는 신에 대한 사고입니다.

이러한 사고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에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하나님 말씀이니 당연히 지켜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신앙이 내가 무엇인가 하여야 한다는 식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사귐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처럼 사랑의 관계 안에서 사귐을 갖는 것입니다.

성도를 일컬어 너희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아들에 영”을 받은 자들이라고 하는 것은 일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사귐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종은 주인과 하인으로 있어요.

고용주와 종업원 관계에요.

이건 일로 맺어진 종속적 관계로서 의무를 이행하여야 하는 “법적 관계”에요.

여기엔 자비가 없어요.

능률만 있어요.

종에게는 순종 했느냐! 안 했느냐!

법적 책임만 있어요.

 

하지만 아들은 아버지와 자식이라는 한 몸으로서의 사랑의 관계에요.

아들은 일을 했느냐 안 했느냐 로 따지지 않아요.

그렇다고 아들이 빈둥거리고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에요.

어쩌면 아들은 종보다 더 열심히 해요.

종은 자기 할당량만 하면 되지만 아들은 할당량이 없어요.

모두가 자기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아들에 영을 받은 자들이에요.

그러니 종보다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복음 안다고 하면서 빈둥거리는 사람은 그 신앙은 관념일 확률이 놓아요.

그러한 복음은 학습으로 알아진 지식일 수가 있어요.

 

지식으로 알아진 복음 속엔 생명의 활동이 없어요.

지식으로 알아진 것을 복음으로 붙잡고 있으면 변론과 논쟁을 좋아하고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일을 서슴치 않아요.

바울은 이러한 자들을 일컬어 율법에 선생 노릇을 하는 자들이라고 했어요.

 

딤전 1:7절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율법의 선생 노릇을 한다는 것은 법을 행사한단 말입니다.

법이 뭐라고 했습니까?

자기 행함을 근거로 역사한다고 했지요.

 

그렇기 때문에 복음 안다는 것으로 남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난 이만큼 아는데 당신은 모르지!그러면서 율법에 선생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율법에 선생 노릇을 하니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고 상처를 주고 죽이는 일들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자들은 자기도 알지 못하면서 아는 척 나댄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도 알지 못한다는 말은 복음에 의미를 모른단 말입니다.

복음 속에 담겨진 생명의 비밀을 모른단 말이에요.

복음은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사망의 역사를 일으키지 않아요.

율법이 사망의 역사를 일으켜요.

 

그러니 복음 안다는 것으로 율법의 선생 노릇을 하는 자들은 예수의 향기를 날리는 것이 아니고 마귀의 냄새를 풍기는 것입니다.

무례하고 건방지고 교만하고 패역하고 방탕하고 방종하고 독선적이에요.

이런 사람들은 항상 다투기를 좋아하고 교회를 어지럽히고 분쟁을 일삼아요.

아무 것도 안하고 빈둥거리고 놀아요.

이 시대 이러한 사람들이 자칭 복음을 안다고 하는 자들 속에 많이 있어요.

이런 자들은 차라리 이단들보다도 더 나빠요.

 

진짜 복음을 받은 성도는 율법 아래 있을 때보다 더 열심히 해요.

율법 아래선 강제로 했지만 복음 안에선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해요.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복음 안다고 하면서 아무 것도 안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건 뭔가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복음으로 자기 사욕을 채우고 있는 것이에요.

자신의 믿음 없음과 게으름을 복음으로 합리화 하여서 면죄부를 받고 싶어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복음을 말하면서 반 복음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복음 속에 있는 생명의 나타남이 없는 것입니다.

 

복음 속엔 예수님의 십자가 정신이 함유되어 있어요.

복음은 자기 부인이라는 고난과 함께 주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 정신이란 자기 부인이에요.

그러므로 진짜 복음은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는 식의 자기 육신의 편안함이라는 사욕을 채우는 것이 아니고 나를 비우고 더 종의 자리로 내려가게 만들어요.

섬기고 베풀고 참아주고 낮아지게 해요.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자 법 아래 있던 사람들이 어떻게 변하던가요.

자발적으로 변하지요.

율법 아래선 안식일에만 모이면 되었어요.

그러나 성령이 임하고 나자 매일 모였어요.

율법 아래선 십분의 일만 하면 되었어요.

그런데 성령을 받고 보니 온 재산을 다 바쳤어요.

 

율법 아래선 도적질 안 했으면 되어요.

그러나 성령이 임하고 나자 도적질 안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빈궁한 자에게 나누어주게 되어요.

 

법 보다 은혜가 더 무서워요.

그러니 복음을 제대로 아는 성도는 죽도록 충성을 하고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요.

율법 아래선 자랑을 했는데 복음 안에선 자랑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행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종과 아들은 달라요.

율법 아래서는 종이지만 복음 안에서는 아들이에요.

종에 영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행함이라는 조건으로 나아오지만, 아들에 영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조건과 상관없이 아버지의 사랑으로 나아와요.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도 종과 아들은 다릅니다.

종은 율법사와 같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라고 자기가 뭔가 해야 하는 것으로 받고, 아들은 아버지가 하신 것을 누리고 감사하면서 살아요.

 

오늘 본문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보응을 한다!”고 하니까

이걸 문자적으로 이해를 하여서 인과응보 식으로 해석을 해 버립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인과율로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인과율이란? 원인에 의한 결과를 따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쉬운 말로 벌 받을 짓을 하니까 벌을 받고, 복 받을 짓을 해서 복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언뜻 들으면 맞는 말 같기도 하지요.

 

그러나 이 말은 성경이 인간에 대하여 말하는 것과 달라요.

인과율이 되려면 먼저 인간이 그것을 감당 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감당할 수가 있는데도 안하면 혼이 나야 해요.

인간이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있는데도 안 지키면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인간은 죄인이에요.

죄인이라 함은 애당초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없는 존재란 말입니다.

뭘 하고 자시고 할 위인이 못 되어요.

하나님은 죄인을 죽은 자로 본단 말입니다.

죽은 놈이 뭘 한단 말입니까?

안 돼요.

 

그러므로 성경은 인과율을 배제하고 있어요.

인과율로 접근한다는 것 자체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자기 주제를 모르니까 율법사처럼 “무엇을 하면 영생을 얻습니까?” 라고 주접을 떨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뭘 영생을 얻어 얻길!

그냥 죽어!

그러고 있어요.

 

죄인 주제에 뭘 영생을 얻는단 말이냐!

죄인이 영생하면 어찌 되는데요.

그런 저주는 없어요.

 

성경은 죄인을 중풍병자나 문둥병자로 말하고 있습니다.

요즘 말로 치매 걸린 사람이에요.

이런 사람이 죽지도 않고 영생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끔찍합니다.

 

집안에 치매 걸린 사람 하나만 있어도 온 집안이 난리인데!

온 인류가 다 치매 걸린 자라고 하면 그걸 어찌 감당하겠어요.

죄인은 영생을 하면 안 되고 죽어야 해요.

죽어서 죄의 값을 치러야 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죄인을 죽이는 것입니다.

죄인을 죽이는 것이 복이고 사랑이에요.

 

그러므로 복음은 먼저 우리를 죽이는 것부터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언약도 죽이는 언약을 먼저 주신 것입니다.

언약도 두 언약이 있잖아요.

“옛 언약”과 “새 언약”이 있지요.

 

“옛 언약은 죽이는 언약이고!” “새 언약은 살리는 언약이에요.”

 

새 언약은 옛 언약을 바탕으로 일을 해요.

무슨 말인고 하니 옛 언약이 죄인으로 죽여 놓은 자를 새 언약이 주어져서 살려낸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죽이는 언약이에요.

율법 가지고 살려고 궁리하면 안 되어요.

그건 율법을 주신 의도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율법사가 율법을 들고 나와서 어떻게 하면 살까요? 라고 물으니까 살긴 뭘 살어! 그냥 죽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알면 아! 난 죽어야 할 자구나를 알아야지요.

뭘 영생 얻으려고 합니까?

 

결국 율법사는 성경을 잘못 읽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주어서 죽으라고 주셨는데 율법사는 율법으로 살고자 했어요.

그러니 틀렸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네가 성경을 그렇게 읽었으면 그렇게 지키라는 것입니다.

 

율법사가 성경을 어찌 읽었습니까?

자기가 지켜야 하는 것으로 읽었잖아요.

그러니 예수님이 그럼 지켜 봐!

그러는 거에요.

 

예수님이 넌 지금까지 율법을 지켜왔잖아!그런데도 영생을 얻지 못했어!

그러니 지금 나에게 찾아와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습니까?” 라고 묻는 것이 아니냐?

 

그래서 내가 지금 네가 말하는 “어떻게 하면” 을 알려주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긴 어떻게 해!

난 말씀대로 살 수가 없는데요! 라고 하여야지!

율법 앞에서 죽어야지!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습니까?” 라고 질문을 할 수가 없어!

그냥 죽여주세요!

난 죄인입니다! 라고 해야 될 것이 아니냐!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생을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지 인간의 인과율이 의해서 댓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사는 영생을 “어떻게 하면” 이라는 인과율로 얻어내고자 하고 있어요.

그러니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습니까?” 라고 묻는 것입니다.

 

이걸 우리 신앙에 적용해 보세요.

지금 우리들이 이런 질문을 하고 있어요.

우리도 율법사처럼 묻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할까요? 라고 하는 것은 아직까지 자기가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가능성으로 나오는 겁니다.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무얼 할까요?”

“어떻게 할까요?” 라고 묻는 겁니다.

“나” 라는 주체로 나오는 것입니다.

 

죄인에게 답을 가르쳐 주면 지킬 것 같습니까?

아니에요.

못 지켜요.

죄인에게 영생의 길을 가르쳐 주면 할 수 있을 것 같나요?

아니에요.

못 가요.

가르쳐 주어도 못해요.

그럼에도 어떻게 할까요? 라고 묻는다구요.

이 웬수들이!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안다고 하면 말씀 앞에 유구무언이 되어요.

할 말이 없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둥이를 닫게 하려고 율법을 주셨어요.

그런데 율법으로 주둥이를 놀리면 어찌 합니까?

 

아직까지 할 말이 있다는 것은 자기 주제를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가 뭐냐?하나님 앞에 자기 주제를 모르는 거에요.

자기 주제를 모르니 나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면 알수록 주둥이가 닫아져요.

할 말을 잃게 되어요.

말씀 앞에 서면 내 꼬라지가 너무도 한심스러워서 할 말이 없어요.

진짜 하나님을 만나면 욥처럼 자기 주둥이를 친다니까요.

에이~ 이 못된 주둥이 하면서 말이에요.

 

그러므로 신앙이 깊어지면 질수록 주여~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죽이든 살리든 아버지 뜻대로 하세요!” 라고 내 인생은 하나님께 던지게 되어요.

자기를 자꾸만 포기하게 된단 말입니다.

 

저 처럼 목사일 경우에는 목회에 의미를 두지 않게 되어요.

목회에 의미를 둔다는 것은 거기엔 반드시 뭔가 노림수가 있어요.

인간은 무엇을 하든지 반대급부를 얻고자 합니다.

왜? 목회 성공하고자 하는가요?다 먹고 살기 위해서에요.

 

세상 사람들은 출세해서 자기 이름을 내고자 하듯이, 목사는 목사로서 자기 이름을 내고자 하잖아요.

그래서 큰 교회에 올인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따르는 교인들의 숫자가 많으면 하나님 노릇하잖아요.

큰 교회 목사들을 보세요.

다 자기 교리를 가지고 있어요.

교인들이 자기 말을 하나님 말로 듣도록 만들잖아요.

 

우린 목사가 될 때 다 이 노름수를 품고 시작했어요.

예수님처럼 죽어야 하겠다고 목사 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어요.

남을 섬기고 죽겠다고 한다면 목사 되지도 않았어요.

다 대접받고자 목사가 된 겁니다.

큰 교회 목사들을 보니까 목사가 폼이 나고 멋있어 보이잖아요.

목사가 되면 먹고 살만 하겠다 싶으니 직장 때려치우고 신학교 가서 목사가 되었잖아요.

 

우린 이 노림수를 꽁꽁 감추고 있어요.

포장을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꽁꽁 숨긴 노림수를 풀어내라고 합니다.

포장지를 확 뜯어내는 일을 하세요.

남들은 모르겠지만 제 경우에 그렇더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이 노림수가 풀어져요.

주여! 내가 하나님 말씀을 도적질한 도적놈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밥 빌어먹기 위해서 도용한 사기꾼입니다.

이런 고백이 나온다니까요?

 

옛날 반공 이데올로기가 한창일 때 학교에 가면 반공 포스터를 그리고 표어를 지었잖아요.

그때 표어 중에 “숨어서 떨지 말고 자수하여 광명 찾자” 라는 말이 있었어요.

하나님이 이 표어를 우리에게 주세요.

 

야~ 정낙원이 너 속에 있는 것을 숨겨서 끙끙거리지 말고 다 꺼내 놓으라고 합니다.

꼼수 부리지 못하게 확 깨트려요.

우리 마음이 하나님에게 들키고 나면 그렇게 편해요.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이 믿어지면 그렇게 평안해요.

어허~ 사실이라니까요.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것이 발각당할 때마다 자유함을 얻어요.

인간이 어리석어서 예수를 믿어도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요.

마치 옛날 처음 버스를 타는 시골 할머니들처럼 버스에 타고서도 짐을 머리에 이고 있는 것과 같아요.

짐을 내려 놓고 평안하게 앉아서 가면 될 터인데 말이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날마다 뭘 숨겨요.

자기 마음이 발각당하지 않으려고 교묘하게 숨겨요.

목회는 밥벌이용으로 하면서도 꼭 주의 일을 한다고 해요.

주의 일은 개뿔!

다 자기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아니 성도들이 예수를 믿어도 그렇잖아요.

주님 사랑 좋아하네!

다 복 받고 잘 살고 싶어 하잖아요.

누가 복음과 함께 고난 받고자 합니까!

아니에요.

 

우리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고 싶어 합니다.

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성도들이 예수 믿고 고난당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면 교회에 안 나오잖아요.

 

하나님과 우리는 숨바꼭질하는 것과 같아요.

우리는 숨고 하나님은 찾아내세요.

결국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다 찾아냄을 당하고 맙니다.

하나님은 기어코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혀내고야 마세요.

내가 저주 받아야 할 자라는 것을 토설하게 하세요.

 

이 모두가 우리가 살고 있는 바탕에 하나님의 은혜가 깔려 있음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내가 사는 바탕이 온통 하나님의 사랑이고 긍휼이에요.

그러므로 우린 어디서 무얼 하든지 나의 나 된 것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지경에까지 이르도록 날마다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난 자로 간섭하는 것이 아니라 못난 자라는 것을 드러내는 식으로 간섭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도 이러한 사고로 보셔야 합니다.

그러 할 때 말씀이 치료하는 광선으로 우리 안을 비추게 되어요.

우리는 말씀 앞에 낱낱이 내 죄가 고발당하여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인생이 가벼워져요.

 

이제 이러한 바탕에서 행한 대로 보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 더 살펴봅시다.

 

본문을 봅시다.

 

롬 2:6-11=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10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11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보응을 하신다고 하지요.

보응이란? 행한 대로 갚아준다는 뜻입니다.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고!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으로 하신다고 합니다.

 

문자적으로 읽으면 우리 행위의 결과로 보응 받는 것으로 이해가 되어요.

우리가 실제로 성경을 그렇게 읽고 있구요.

그래서 이런 말씀을 가지고 성도의 행위를 강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이 이렇게 설교를 합니다.

자! 여러분~

하나님께서 참고 선을 행하면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할 영생을 주시고!

당을 짓고 진리를 좇지 않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참고 선을 행하여서 영생을 취하시고 당을 짓지 말고 불의를 좇지 말아서 하나님의 저주로부터 피하십시오! 라고 설교를 하게 됩니다.

이러한 설교를 들은 교인들은 그래 맞아 참고 선을 행하여 복을 받고, 당을 지어서 저주 받지 말아야지 라고 하면서 죄짓지 말아야지 라고 각오를 다지고 의지를 불태우게 됩니다.

과연 그러한가요?

 

그럼 우리는 이 말씀 앞에 나를 투사해서 봅시다.

우리의 본성과 비교해 보세요.

우리가 과연 참고 선을 행하고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들이냐 입니다.

아니잖아요.

우린 이와 반대로 살고 있잖아요.

우린 눈만 뜨면 당을 짓고 진리를 좇지 않고 불의를 좇아가고 있어요.

 

우리는 눈만 뜨면 세상에 썩어질 것을 구하고 있어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에 나라와 그에 의는 구하지 않아요.

아니! 이런 것 구할 마음이 없어요.

 

복음을 전해도 먹고 살 궁리부터 먼저 해요.

내 영광 챙기기부터 먼저 한다고요.

우리의 본능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의 본능을 말하고 있어요.

 

우리의 본능은 진리를 좇지 않고 불의를 좇아가고 있어요.

“하라” 는 것은 하지 않고,

“하지 말라” 는 것은 하고 있어요.

그러니 회개치 않고 고집을 피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죄인에게 성령이 임합니다.

성령이 우리의 본능과 반하는 일들을 하게 하십니다.

과거의 내가 아니에요.



예전처럼 살고자 하면 이상하게 뭔가 턱턱 걸려요.

찜찜하단 말입니다.

안 하던 짓들을 하게 되어요.

이게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보응이에요.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종의 영을 받은 사람과, 아들에 영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언약 백성과, 비 언약 백성이 있어요.

 

요한계시록 14장을 보면 시온 산에 144.000명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이 기록이 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들은 모두가 구원 얻은 성도들이에요.

그럼 현재 이 세상에 이들이 있다는 뜻입니다.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본문에서 두 부류가 있지요.

각 사람들이 행하는 것이 있지요.

어떤 사람은 참고 선을 행하고!

어떤 사람은 악을 행하지요.

서로 다 같은 인간인데 각자 다르게 행하지요.

 

행함이란? 그 사람의 본질을 보여주는 그림이에요.

생명에 속한 사람은 생명의 그림을 그리고!

사망에 속한 사람은 사망의 그림을 그려요.

 

마치 가인과 아벨처럼 각각의 그림을 삶으로 그려내요.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성경에서는 가인은 악한 자에게 속하여서 라고 합니다.

가인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벨을 죽임으로서 난 마귀에게 속한 자라는 그림을 그려냈어요.

반대로 아벨은 말없이 죽임 당함으로서 예수님에게 속한 자로 드러낸 겁니다.

 

이 원리로 오늘 본문을 보세요.

그럼 쉽습니다.

왜? 어떤 사람은 선을 행하고, 어떤 사람은 악을 행할까요?

이는 그들이 누구 아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자는 선에 속하였고!

악을 행하는 자는 악에 속하였기 때문입니다.

선은 예수님이고, 악은 마귀에요.

그러니 각자의 삶으로 자신이 어디에 속하였는지를 그림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자기 백성을 찾으러 오셨어요.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기 백성이 있어요.

이들은 예수를 믿어요.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예수를 영접하고 믿게 해 주셨어요.

 

그럼 이들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가 하면 예수님의 삶을 살게 되어요.

예수님의 운명으로 살아요.

영생을 좇아가요.

이건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이 성령이 이끌고 가세요.

그 모습이 오늘 본문에서 참고 선을 행하고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모습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지향성을 말해요.

무슨 지향성입니까?

생명의 속성으로서의 나타남이에요.

 

누구의 영광과 존귀를 구하는가 하면 예수님의 영광과 존귀를 구해요.

한마디로 주님 영광을 추구한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성도들 안에서 이끄시기 때문에 이러한 모습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성령이 그 안에 내주하는 성도는 이러한 지향성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이러한 사람들은 유대인에게도 있고 헬라인에게도 있어요.

인간의 혈통이나 민족처럼 외모로 구분 되는 것이 아니고 창세전에 선택으로 구분이 되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이 된 성도는 유대인 속에서도 있고 헬라인 속에서도 있어요.

 

반대로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되지 않은 자들도 있겠지요.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이 있다는 것은 곧 상대적으로 녹명되지 않은 자들도 있다는 말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하고, 마귀를 적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어린양이라고 하고, 마귀를 새끼양이라고 합니다.

적그리스도나 새끼양은 예수님을 반대하는 의미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이 있다고 하면 적그리스도의 호적인 사망의 책에 녹명이 된 자들도 있겠지요.

그래서 복음을 말하면서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성도는 복음으로 남을 살리는 일을 하지만!

마귀의 책에 녹명이 된 자들은 복음으로 죽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어쩜 이 시대 복음 복음하면서 마귀 짓을 하는 자들이 일어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에요.

마귀에게 속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복음에 합당치 않는 행동들을 하게 하세요.

그래서 열매로 나무를 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가 복음을 말하여도 그 사람이 그 복음으로 어떤 열매를 맺는지를 보세요.

복음 안다고 하면서 혼자 다 아는 척 하고 남을 깔보고 무시하고 정죄하고 판단하면 마귀에게 속한 자이고!

복음으로 자기를 비우고 남을 섬기고 희생하는 사람은 예수님에게 속한 성도입니다.

잘 분별하세요.

 

성경은 마귀를 일컬어 살인자라고 합니다.

살인자라는 말은 생명을 죽이는 자란 뜻입니다.

그럼 마귀의 족보에 올려진 자들은 어떤 행사머리를 할까요?

마귀의 행사머리를 하겠지요.

마귀의 행사 머리를 오늘 본문에서는 당을 지어서 진리를 좇지 않고 불의를 좇는다고 합니다.

 

당(黨)이란? 무리란 말이에요.

쉬운 말로 끼리끼리 모이는 것이에요.

모여서 한 가지 목표를 위해서 의기가 투합하여서 움직여요.

마귀의 자녀들이 의기투합하여서 하는 짓이 무엇이겠어요.

예수님이 하신 일을 망가뜨리는 일을 합니다.

예수님의 피를 가리는 일을 하겠지요.

 

적그리스도가 하는 일은 그리스도를 가리는 일이에요.

예수님의 죽으심을 헛되게 하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진리를 좇지 않고 불의로 좇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불의로 진리를 막는다는 말입니다.

 

예전에 불의로 진리를 막는 자들에 대하여 살펴보았지요.

불의란? 의에 반대라고 했습니다.

의가 아닌 것을 의라고 하는 것을 불의라고 했어요.



그럼 의는 무엇이고, 불의는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의는 예수를 믿는 믿음이고,

불의는 율법 지킴을 신앙으로 붙잡고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 보세요.

하나님께서 고집과 회개치 않는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제시한 것이 있는데 말을 안 듣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으라고 한 것이 있단 말입니다.

그걸 안 믿어요.

고집을 피운다는 말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제시한 것이 있겠지요.

그건 본문에 나와 있어요.

진리와 의에요.

그런데 고집을 피우는 자들이 비진리를 쫓고 불의를 좇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구원의 근거를 제시해 주셨어요.

 

자기 백성들을 예수님의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자기 백성들은 예수님의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는 것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이에요.

이걸 믿으라고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셔서 믿어지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을 받은 성도는 이 사실을 믿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신앙이란? 순종으로 나타나고 불 신앙은 불순종으로 나타나요.

그럼 신앙이란 하나님이 믿으라고 하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믿으라는 것은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자기백성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입니다.

그럼 마귀에게 속한 자들은 이걸 부정하는 식으로 나타나겠지요.

 

그러므로 오늘본문을 역으로 생각을 하면 답이 나옵니다.

너희들이 하는 짓을 보니 네가 누구인지를 말해준다는 말입니다.

네가 행하는 그 짓이 바로 보응이라는 것입니다.

 

네가 마귀에게 속하였기 때문에 진리를 쫓지 않고!

당을 지어서 진리에 속한 자들을 핍박하고!

그러니 네 영혼은 늘 환란과 곤고가 넘친다는 것입니다.

평안이 없고 두려움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네가 진리를 쫓고 참고 선을 행하는 것을 보니 네가 영생에 속한 자이구나!

영생에 속하였기 때문에 영생을 받은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 보응이 영광과 존귀와 평강으로 주어지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게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는 말입니다.

 

원인에 의해서 결과가 주어지는 인과율적인 보응이 아니고!

역으로 본질이 삶으로 보응하는 식으로 나타내 준 것이란 뜻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포도나무이기 때문에 포도 열매를 낸다는 뜻입니다.

영생 안에 있기 때문에 영생의 그림들을 삶으로 그려낸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포도나무이기 때문에 포도 열매가 맺어지는 것을 보응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렇게 생각하세요.

너희는 이런 인간이라서 이러한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을 반어법으로 말했다고 생각하세요.

너희가 포도나무이기 때문에 포도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꺼꾸러 너희가 포도열매를 맺는 것을 보니 포도나무이구나 라고 말이에요.

이걸 참고 선을 행하면 영생으로 갚아주고, 당을 짓고 불의를 좇아가면 저주를 퍼 붓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이렇게 될 때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는 앞에서의 말씀과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는다는 뒤에 말씀이 충돌이 일어나지 않게 되어요.

모순이 되지 않는단 말입니다.

선에 속하였기 때문에 선한 보응의 삶을 살고!

악에 속하였기 때문에 악한 보응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과나무이기 때문에 사과를 맺고 가시나무이기 때문에 가시를 내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나요.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태어났어요.

그러니 한 통속이에요.

한 통속이라고 한다면 모두가 동일한 짓을 하고 살아야 합니다.

악을 행하고 불의를 쫓아가고 당을 지어서 진리를 훼손하여야 해요.

 

그런데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은 다른 짓을 하고 있어요.

참고 선을 행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고 영생을 쫓아간단 말입니다.

이름하여 성도들이에요.

이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간섭을 하셔야지만 가능한 일입니다.

 

모두가 한 통속인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간섭하는 사람들이 있더란 말입니다.

하나님께 간섭을 당하는 사람들은 이상하게 세상 사람들과 다른 가치관으로 살아가게 되어요.

죄인으로서는 도무지 불가능한 것을 가능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결국 성도는 다른 가치관으로서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간섭을 당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인간의 혈통을 떠나 있어요.

유대인 속에서도 있고 헬라인 속에서도 있어요.

그러니 하나님은 인간의 혈통이나 민족이라는 외적 조건으로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으로 일을 하시고 계심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 속에서도 지옥 백성이 있고, 상대적으로 헬라인 속에서도 천국 백성이 있어요.

한마디로 유대인 속에도 천국 백성과 지옥백성이 있고, 헬라인 속에서도 천국백성과 지옥 백성이 있어요.

민족이나 혈통이라는 인간의 조건을 가지고서는 누가 천국백성이고 누가 지옥백성인지 판단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사람의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지요.

 

중요한 것은 천국 백성은 천국 백성 짓을 하고 살고, 지옥 백성을 지옥 백성 짓을 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유대인 속에서도 천국 백성 짓을 하는 사람이 있고, 지옥 백성 짓을 하는 사람이 있고!

헬라인 속에서도 천국 백성 짓을 하는 사람이 있고, 지옥 백성 짓을 하는 사람이 있어요.

하나님이 간섭하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니 각자가 보응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고넬료 라는 사람을 알지요.

고넬료는 이방인이에요.

이방인이라고 하면 하나님을 떠나 있는 자들이에요.

하나님을 모르는 자란 말입니다

그런데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살았어요.

이상하지 않나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택한 백성만이 할 수가 있어요.

그럼 이방인인 고넬료가 택한 백성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헬라인 속에서도 천국 백성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너의 구제를 기억하신바 되었다고 말해 주시는 것입니다.

고넬료가 경건하게 살아서 하나님이 백성이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 백성이기 때문에 이방인이면서도 하나님 백성 짓을 하고 산 것입니다.

 

이걸 교회 안에서 역으로 말해보세요.

원론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교회 안에는 천국 백성만 있어야 하잖아요.

전부 천국 백성 짓을 하여야 하잖아요.

그런데 교회 안에 마귀 짓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복음 복음하면서 마귀 짓을 하는 자들이 있다구요.

 

그럼 이들은 왜? 복음 복음하면서 마귀 짓을 할까요.

그건 유대인들 속에서도 지옥 백성이 있는 것과 같아요.

지옥 백성이니까 그 좋은 복음으로 사람을 살리지 못하고 죽이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무가 마귀이기 때문에 열매를 죽이는 것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세요.

 

갈라디아서 6장을 살펴보고 마칩시다.

 

갈 6:7-8절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고 하지요.

이걸 또 문자적으로 오해하여서 교인들에게 심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에요.

우리더러 심으라는 말이 아니에요.

 

이 이야기는 우리가 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심어 주세요.

우리는 하나님이 심어놓은 것을 삶으로 드러내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 안에 성령이 있는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좇아가게 되어 있고!

그 안에 성령이 없으면 자연히 육체의 썩어진 것을 쫓아가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그 안에 성령이 있는 성도는 참고 선을 행하면서 진리를 쫓아가게 되고, 그 안에 성령이 없는 사람은 악을 행하고 당을 짓고 불의를 쫓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이걸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콩을 심어 놓았으면 우리의 삶이 콩으로 나타나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팥을 심어 놓았으면 우리의 삶이 팥으로 나타나요.

 

하나님이 그 안에 성령을 주신 자는 성령으로 살아요.

이걸 심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주시지 않은 자는 당연히 자기 육체를 위하여 살아가니까 썩을 것을 쫓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사자 새끼는 사자 짓을 하고, 고양이 새끼는 고양이 짓을 해요.

 

썩지 아니함을 구하기 때문에 영생을 주시는 것이 아니고, 영생하는 자이기 때문에 썩지 아니할 것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당을 짓고 불의를 쫓아가기 때문에 노와 분이라는 저주를 퍼 붓는 것이 아니고, 저주 받은 자이기 때문에 당을 지어서 불의를 쫓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행한 대로 보응하는 것이 아니고 본질대로 행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오늘 본문에서는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뭔 말인지 이해가 가나요.

참 어렵네요.

 

내 안에 영생을 쫓아가고자 하는 성향이 있나요?

그럼 그 사람은 영생 안에 있는 성도입니다.

반대로 자기 안에 영생을 쫓아가는 성향이 없나요?

그럼 그 사람은 멸망 안에 있는 불신자에요.

 

바울이 그러지요.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에 것을 찾으라고 하지요.

이 말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사람은 위에 것을 찾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땅에 사람이 위를 쳐다보고 산다는 것은 하나님이 간섭하고 있다는 증거에요.

 

하나님이 그러는 거에요.

야! 저 놈이 위에 것을 찾는 것을 보니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입은 자이구나!

어! 저 놈이 복음 복음하면서 땅에 것을 찾는 것을 보니 무늬만 그리스도인이지 땅 사람이구나!

자기 삶이 자기의 정체성을 드러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자기가 속한대로 보응하신 것입니다.

 

그 속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는 사람은 세속적 가치로 살지 않아요.

세상 것에 가두어지지 않습니다.

육신의 조건으로 희비하지 않아요.

 

이런 사람들은 바울과 실라처럼 감옥에서도 찬송을 하고 기도를 할 수가 있어요.

이는 그 안에 계신 성령이 그렇게 하세요.

성령이 계신 성도는 의를 인하여 핍박을 받은 것을 감사하게 생각해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이건 인간의 각오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성령의 능력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성도는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영생은 세상 것으로 가둘 수가 없어요.

 

그러므로 그 안에 영생이 있는 자는 세상 것으로 가두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것으로 가두어지지 않게 하심으로서 너는 영생을 받은 자라고 증거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영생이 나를 세상 것에 가두어지지 않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게 영생 받은 자에게 주시는 보응이에요.

 

우린 이미 보응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고 선을 행하고 진리를 쫓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서 손해를 보아도 영생을 좇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 받으면서도 예수를 버리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생에 대한 보증이면서 영생을 가진 자에게 주시는 보응이에요.

 

그러니 세상 가치에 가두어지지 마시고 훌훌 털고 일어나십시오.

새처럼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보세요.

그럼 세상이 작아 보입니다.

 

성도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 사람이 아니에요.

예수님처럼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들이에요.

그래서 성령이 자꾸만 세상사람 아닌 자로 살도록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간섭하심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미 영생을 받은 자로서 이긴 자로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세상 것으로도 가둘 수 없는 영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받은 영생으로 세상을 담대히 살게 하옵소서. 우겨쌈을 당해도 낙심치 말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넘어지지 말고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는 것을 깨닫고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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