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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말씀/창세기

02강.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 (창 4:1-8)

by coroa 2020. 7. 6.

-.02강.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 (창 4:1-8).-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정낙원 목사

 

우리는 앞서서 창세기 1,2,3장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미를 개괄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천지 창조 자체가 창세전 언약의 원인에 대한 결과라는 것이었습니다.

 

역사 자체가 창세전 언약을 구현하기 위해 마련된 장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묵시 안에서 이루고자 하시는 일들을 이 역사 속에서는 구조적으로 두 구조로 나누어 보여주십니다.

그것이 하늘과 땅이라는 천지창조입니다

 

하늘과 땅의 이야기는 그냥 하늘과 땅 이야기가 아니고 묵시와 역사 이야기입니다.

하늘은 묵시를 상징하고 땅은 역사를 상징합니다.

그 동안 우리는 묵시는 감추어진 세계이고 땅은 보이는 세계라고 살펴보았습니다.

 

위는 묵시이고, 아래는 역사라고 합니다.

역사는 묵시를 보여주기 위해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면 이 역사 자체 속에서는 두 노선이 있게 됩니다.

묵시에 속한 노선이 있고, 그냥 역사에 속한 노선이 있습니다.

 

묵시는 감추어진 곳이라고 그랬죠?

그래서 이 역사 속에서도 묵시를 상징하는 것은 감추어진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그 감추어진 모습이 창세기 1장 1절에서는 ‘천(天,하늘)’이라고 하고,

보이는 것은 ‘지(地,땅)’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천(하늘)’은 묵시를 상징하고, ‘땅’은 역사를 상징합니다.

이 두 구조가 같이 흘러가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 눈에는 역사만 보여요.

땅의 것만 보이는 겁니다.

 

그런데 실제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고자 하는 것은 역사를 통해서 묵시를 알리려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해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항상 묵시에 속한 계통이 이 땅에서 버려짐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가인과 아벨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내어 쫓으면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있을 거라고 했지요?

그러면서 서로 전쟁을 한다고 했습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나와서 나은 자식이 가인과 아벨입니다.

가인은 뱀의 후손 노선이고, 아벨은 여자의 후손 노선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인류 전체에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하는 하나의 샘플 같은 것입니다.

실제 인간의 조상은 아담이지만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으로 보여주는 실제 조상은 가인과 아벨이 되는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은 어디에 속한 자입니까?

묵시에 속한 자입니다.

그런데 묵시는 역사 속에서 인식이 안 되는 감추어진 세계 입니다.

묵시에 속한 사람들이 이 땅에서 자꾸 버림당하는 운명에 처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우리가 봤을 때 버려지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버려짐은 사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take out 시키는 것입니다.

역사에서 빼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셔 여자의 후손으로 오는 사람들은 역사 속에서 남는 자로 있지 않고 자꾸만 버려지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운명처럼 정해져 있어요.

가인과 아벨이라는 이름 속에 이게 담겨 있어요.

 

가인의 이름은 ‘얻음’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있음’ 입니다.

가인 계통은 이 역사 속에서 ‘있음’의 역사로 나아갑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네피림 사상 혹은 성공주의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벨은 ‘허무, 없음’ 이라는 뜻입니다.

여자의 후손을 상징하는 이 아벨 계통은 이 땅에서 ‘없음’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 아벨이라는 이름을 히브리말로 ‘하벨’ 이라고 하는데 그 뜻은 그냥 ‘없다’입니다.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없음이 없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서 분명히 존재는 하는데 없는 자 같이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복음을 받으면 복음을 받은 자는 여자의 후손 계열이기 때문에 이 땅에서 화려하게 드러나지 않고 볼품없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보고 죽는 것은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럽게 나타납니다.

하지만 실제 생명을 가진 것은 볼품없이 나타납니다.

항상 그렇습니다.

 

여러분, 아스팔트 위에선 생명이 자라지 않습니다.

생명은 거름더미에서 자랍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거름더미를 좋아하진 않습니다.

아스팔트를 좋아합니다.

 

왜 그런고 하니

인간들에겐 죄성이 있고 이 죄는 항상 선악과처럼 화려하게 보이는 것을 좇아가요.

먹으면 죽을 것을 쫓아가게 되어 있단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먹으면 죽을 것들이 인간의 눈을 사로잡도록 되어 있어요.

 

복음도 마찬가지 입니다.

진짜 복음을 가진 자들은 그렇게 화려하지 않아요.

왜 그렇습니까?

복음을 인간적으로 포장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투박한 모습 그대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건 부족해 보이는 저 자신을 변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화려한 언변과 좋은 미사여구로 설명할 수 있음 좋겠지요.

하지만 복음은 그런 방법으로 전해지지 않습니다.

 

저는 설교의 팁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속에서 얻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용한 언어가 고급 언어를 쓰지 않았습니다.

쉽게 말해 시장 통에서 쓰는 장사꾼들의 언어를 쓰셨습니다.

 

시장에서 쓰는 언어는 거칩니다.

거기엔 포장하는 것이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에둘러 말씀하시지 않고 액면 그대로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다고 말씀 하신 것입니다.

 

그 당시에 아주 절제된 언어와 현란한 말솜씨를 가진 자들이 누구였습니까?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런 바리새인들은 모든 사람이 볼 때 선망의 대상입니다.

화려하고 멋진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셔서 독사의 자식이라는 말도 서슴치 않았습니다.

그건 욕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가장 저주스러운 말이 독사의 자식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유대인들 사이에서 금기시하는 단어인데 예수님은 서슴없이 쓰시는 것입니다.

 

아주 정제된 언어와 다듬어진 설교만 듣던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아주 잡놈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제대로 된 언어가 아닌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속된 말로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싫어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귀에 듣기 좋고 달콤한 얘기를 원하지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천박한 말투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께서는 자기 안에 있는 것을 포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셨기 때문입니다.

 

말이라는 것은 의미를 전달하는 도구이지 말 자체가 생명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말을 통해서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

그 생명을 전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빠진 언어는 아무리 화려해도 껍데기일 뿐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말씀드리는 것이 ‘로고스’와 ‘레마’를 알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문자로는 그냥 ‘로고스’입니다.

문자는 문자 자체로는 생명이 아닙니다.

문자 속에 담겨져 있는 것이 생명입니다.

 

지금 이 성경이 무엇입니까?

문자잖아요.

문자는 생명이 아닙니다.

그 문자 속에 담겨져 있는 것이 생명입니다.

그래서 문자를 ‘로고스’라고 하고 그 속에 들어 있는 생명을 ‘레마’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제가 말하는 이 말을 들으시면 안 됩니다.

제가 말하는 이 말 속의 생명인 예수를 붙잡으셔야 합니다.

예수가 들려져야 합니다.

그럴 때 그 말씀이 여러분 속에서 예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생명의 능력으로 나타나서 어떤 일들을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은 자꾸 화려해 보이는 껍데기만을 붙잡습니다.

 

요즘 추석이라 백화점에 가 보면 많은 선물들이 포장되어 있습니다.

가만 보면 상품보다 포장지가 더 화려합니다.

실제 내용은 얼마 되지 않아요.

이게 세상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시장통의 물건보다 잘 포장되어 진열된 백화점의 물건들을 쫓아갑니다.

제가 만약에 여러분들에게 과일을 선물을 한다고 하면 백화점에서 잘 포장된 것을 주는 게 좋습니까

아니면 시장통에 있는 것을 그냥 봉지에 담아 주는 것이 좋습니까?

백화점 상품이겠지요.

 

그만큼 인간들은 선악과로 인한 의식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운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 속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누누히 말씀드렸듯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진짜 생명과를 먹이려고 하셨다면 생명과를 화려하게 만들어 놓았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선악과를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럽게 만들어놓으셨어요.

생명과는 볼품이 없고 말이에요.

 

성경 어디에 생명과는 볼품이 없다고 나오냐고 물으시고 싶으세요?

 

이사야 53장에 보면 예수님을 일컬어 뭐라고 합니까?

그는 마른 땅에 나온 순 같다고 합니다.

여러분 가뭄에 나온 순이 볼품이 있을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인간으로 보자면 몰골이 경제가 빈약한 나라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한 모습 같은 것입니다.

 

예전에 어느 일간지에서 예수님의 초상을 한 번 보도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기독교 백화점이나 그런 곳에 그려 놓은 성화에 나오는 예수님의 얼굴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입니다.

멋지고 잘생긴 모습에 머리 뒤로는 아우라까지 그려 놓은 그런 그림들은 인간들이 주장하는 메시야의 모습입니다.

근데 신문에 나온 예수님은 영 볼품없고 눈에 잘 띄지도 않게 생긴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일하시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제가 왜 이런 얘기를 하는가 하면 ‘천(天)’ ‘지(地)’ 라는 이 두 구조는 항상 같이 갑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천’ ‘지’를 창조했다고 했죠?

그렇게 창조된 천지는 창세전 언약을 드러내기 위해서 라고 했습니다.

 

그 창세전 언약의 내용을 탁 깨보니까 두 민족이 나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통해 구원을 받는 자기 백성들이 있고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이 있습니다.

언약 안에 벌써 두 민족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백성과 아닌 백성.

이걸 야곱과 에서를 가지고 보여 주셨어요.

야곱과 에서는 두 부류의 인간을 말하면서 두 구조를 말해주고 있어요.

 

세상 속에는 이 두 구조에 의하여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이 있는 겁니다.

자기 백성은 예수님과 함께 같이 살아야 될 묵시에 속한 사람으로 등장을 합니다.

근데 묵시에 속한 사람들은 이 역사 속에서는 감추어진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성경의 역사를 보면 믿음의 사람들은 항상 볼품없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육적인 안목에서 볼 땐 무시당하고 조롱당하는 그런 모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그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부른 것은 너희들 한 번 봐라,

잘난 놈이 누가 있더냐 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못 배우고 못난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고 인간의 가치가 하나님 앞에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제가 이 복음을 깨닫고 감사한 것 중의 하나가 제 못남에 대해 자유해진 것입니다.

과거에 제가 복음을 몰랐을 때는 지방 신학교 나온 것을 숨기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학벌 세탁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 때 제 동기 목사가 학벌 세탁을 할 수 있으니까 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전도사로 있던 그 당시에도 목사님들을 가르치곤 했었습니다.

제가 전도사 입장이면서도 종말론에 관해서는 나름 식견이 있어 목사님들의 강의 부탁을 받곤 했었습니다.

 

2년 가까이 그렇게 가르쳤는데 어떤 목사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목사가 왜 전도사한테 배우냐고 반발을 하면서 자기들끼리 논쟁이 생겼습니다.

목사라도 전도사에게 배울 수 있으면 배워야 한다는 분들과 목사의 체면이 있지 그럴 수 없다고 하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그 때 제가 교제를 만들어 함께 공부를 하곤 했었는데 그 때 어떤 목사님이 이 내용을 가지고 미국에 있는 어떤 신학교엘 가면 박사 학위도 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한 번 해보자는 겁니다.

속으론 그렇게까지 해서 학위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지만 겉으로는 솔직히 유혹은 생겼었습니다.

왜냐면 지방 신학교를 나온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복음을 깨닫고 나서 얼마나 감사한지…

아…내가 증거하는 이것이 내 지식에 속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에 속한 것인 걸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이름 없는 신학교에 보냈구나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 들어 보시면 알겠지만 전 어떤 학문적 접근으로 말씀을 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증거케 하는 것은 세상의 학문으로 만들어 빼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건 은사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은사로 깨닫게 해주시면 모든 성경 말씀이 이해됩니다.

 

그래서 제가 늘 말씀드렸듯이 성경 해석은 성령의 감동이 최고의 방법이지 원어 해석이나 지식적 접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원어 해석을 나쁘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원어 절대주의를 반대하는 것입니다.

전 원어 잘 모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증거하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문자를 통해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하실 때 그 문자는 껍데기이고 그 포장지를 벗겨내면 그 안에 감추어진 내용은 성경을 기록한 성령이 해석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성령을 받으면 이 성경 말씀이 다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세상의 지식과 학벌로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속지 마세요.

많이 배우지 못해서 이런 변명을 한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맞습니다.

전 많이 배우지 못했어요.

하지만 그것 때문에 복음 전하는 것에 지장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왜 이런 얘기를 할까요?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어떤 화려한 것을 자꾸 원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뭔가가 있는 줄 알아요.

그러나 성경은 화려함 속엔 생명이 아니라 죽음이 나온다고 보여줍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화려한 모습,

그러니까 고관대작이나 왕족의 후손으로 태어났다면 모든 사람들이 믿었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천하디 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느 날 내가 하나님 아들이다 라고 하니 누가 믿겠습니까?

모두 무시했습니다.

왜 그래요?

하나님은 예수를 알아보는 것은 인간의 지혜와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속한 것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그렇게 일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인과 아벨을 볼 때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약속의 후손은 아벨입니다.

반대로 가인은 뱀의 후손의 계열입니다.

우리들 생각으론 약속의 후손들을 강한 자로 보낼 것 같지 않습니까?

 

창세기에 보면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깨트리고 여자의 후손은 발꿈치를 문다고 했죠?

그러면 머리를 깨트리는 자가 강한 자입니까

발꿈치를 무는 자가 강한 자입니까?

당연히 머리를 깨트리는 자가 강한 자입니다.

 

그런데 역사 속에 펼쳐 놓은 그림은 정반대의 그림입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에게 먹히는 구조로 나타난단 말입니다.

 

지금 아벨과 가인에서도 보면 여자의 후손에 속한 아벨이 뱀의 후손으로 온 가인에게 힘 한 번 써 보지 못하고 죽는 것으로 나타나잖아요.

왜 하나님께서 이런 일들을 벌이실까요?

 

역사는 묵시를 드러내기 위해서 한시적으로 존재하는 곳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원래 묵시로 가야할 사람들인데 예수님께서 자기 피로써 거룩하고 흠이 없게 만들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그 사람들이란 말이지요.

이게 창세전 언약이구요.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통해서 이 역사 속에서 묵시로 돌아갈 사람들의 모습은 이 땅에서 승승장구하는 모습으로 주어질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면 이 세상은 실상이 아니고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허상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천국에서 살아갈 자기 백성들은 이 땅에서 버림 당하는 구조로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 속에서는 ‘아벨이 죽었더라’ 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은 아벨처럼 죽어요.

성경은 성도를 죽었다고 하지 않고 잔다고 해요.

신자는 역사에서 죽음이라는 것을 통해서 묵시로 옮겨지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아벨이 죽었습니까?

묵시로 옮겨졌습니까?

묵시로 옮겨졌지요.

 

그런데 묵시는 감추어졌다 그랬죠?

이는 드러나지 않는단 말입니다.

잘난 자들이 아니란 말이에요.

 

우리는 본능적으로 화려함을 쫓아갑니다.

아무리 내가 복음을 알고 그것을 증거한다 할지라도 내 속의 유혹은 항상 존재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큰 교회 하고 싶고 많은 사람들이 와서 칭송해주기를 바라는 욕망이 내 안에서도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이건 육을 가지고 있는 인간에게 절대 버려지지 않아요.

그러니 이 싸움이 제 안에서 계속 일어나요.

이 욕망이 죄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하나님과 끊임없이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전쟁이 제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네피림 사상이 죄라는 것을 알려 주시기 때문에 결국에는 그것을 좇아가지 않고 버리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욕망은 계속해서 오지만

그 욕망이 말씀 앞에서 자꾸 죄로 고발당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게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을 클로즈 업으로 보이게 하세요.

제가 복음 전하는 것을 수단으로, 내 안의 탐심으로 작동할 때는 여지없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조롱당하시는 모습을 내 눈 앞에 보이십니다.

그렇게 저를 고발합니다.

 

그럴 때 저의 고백은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라는 탄식과 함께 주여 불쌍히 여겨 주세요 라는 기도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저 뿐만이 아니라 신자 모두에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영웅주의를 추구하고자 하는 우리 안의 이 영웅 심리들이 말씀 앞에서 죄라고 고발당하게 하시고 깨트려 주십니다.

 

지금 가인과 아벨이라는 두 사람의 이름을 통해서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벨은 여자의 후손으로 이 역사 속에서 ‘있음’이 아닌 ‘없음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아벨은 힘없이 맞아 죽습니다.

여러분 신앙이라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힘을 빌려 이 세상을 쳐부수는 게 아닙니다.

이름 없이 힘없이 죽는 것입니다.

 

동물 중에서 공격성이 없는 것이 양입니다.

왜 성경에서 성도를 양으로 묘사할까요?

성도는 싸우는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리면 맞아야 합니다.

염소는 공격성으로 무장했는데 양은 그런 공격성이 없습니다.

얼마나 미련한가 하면 늑대가 와서 공격하고 자기 내장을 먹어도 가만히 있을 지경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힘이 없어 잡히신 것이 아닙니다.

그 예수님께서 아벨의 게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아벨처럼 죽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을 한 번 찾아봅시다.

 

마 23:34-3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지금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이 이 땅에서 당하는 운명과 아픔을 아벨을 비유로 들어서 말씀하십니다.

이 예루살렘 성 중에 아벨의 피로 피로부터 바가랴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흐른다고 합니다.

 

아벨에서부터 사가랴까지입니다.

아벨은 알겠는데 사가랴는 몰라요.

이 사람이 무슨 일을 했는제 구체적으로 나타난 곳이 없어요.

사가랴는 가려진 인물입니다.

한 번도 역사 속에 등장하지 않았어요.

성경의 기록이 없다니까요.

주석가들도 이 사가랴가 누구인지 몰라요.

예수님께서 여기서 한 번 언급하셨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의 뜻이 의미심장해요.

그 뜻이 ‘여호와께서 아시는 자’입니다.

여호와께서 아시는 자인데 없어요.

없음이에요.

 

아벨의 이름이 ‘없음’ 이라고 했죠?

없음의 계통을 따라 내려오면 예수님도 나오시겠죠?

예수님이 버려졌으니 없음이에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없음이에요.

 

구약에서 약속의 후손으로 시작된 아벨의 계보를 쫓아가면 예수님도 나오고 우리 까지 나옵니다.

그렇게 우리까지 내려오는 약속의 후예의 모습이 이 사가랴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사가랴 속에 저와 여러분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사가랴는 화려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여호와께서 아시는 자입니다.

이게 신자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다른 사람들이 몰라줘도 됩니다.

하나님만 아시면 됩니다.

그래서 제가 늘 이런 얘기를 할 때 노름판에 장땡이 비유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노름판의 화투패로 비유해서 죄송합니다.

노름판에서는 장땡이만 가지고 있으면 만고 땡이에요.

 

복음이 그래요.

예수가 그래요.

예수만 가지고 있으면 모두가 이단이라고 하고 욕을 해도 그가 나를 알고 내가 그 분을 알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몰라줘도 괜찮아요.

예수님이 알아 주면 되잖아요.

그럼 끝이에요.

 

예전에는 이단이란 소릴 들으면 너무 화가 나서 찾아가 앙갚음하고 싶은 마음도 생기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말을 들으면 그러려니 해요.

그들이 나를 판단한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아시고 내가 하나님을 알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또 물어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안다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느냐고요.

복음 전하는 것이 그 답입니다.

예수를 증거하고 있다는 자체가 하나님이 나를 알고 내가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거는 아니지 라고 해도 저는 이것만이 증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요? 내가 내어 놓을 수 있는 패는 딱 하나,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예수님의 그 패는 하나님이 주신 거잖아요.

 

과거 수십 년 동안 율법주의에 있을 때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성화주의를 외칠 때에는 예수를 믿고자 믿고자 했는데 결국 예수를 믿지 못했습니다.

난 도무지 예수를 믿지 못하는 자구나,

그렇다면 이렇게 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집도 나오고 별 몸부림을 다 해보며 나중에는 자살을 하고자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곤 했었습니다,

 

믿고는 싶은데 안 믿어지니 환장하겠는 거에요.

이건 안 당해본 사람은 몰라요.

영적 우울증은 사람 미치게 해요.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은혜로 다가 오셔서 이 말씀이 믿어지고 예수가 믿어지게 하시더란 말입니다.

 

옛날엔 믿고 싶어도 안 믿어졌는데,

이제는 안 믿는게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가 믿어지는 것이 내 실력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것을 자기 실력으로 가진 사람은 언젠가는 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환경이 어려워지면 예수를 버립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그래서 전 여러분들이 말로만 예수 믿는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어지게 해주셔서 믿는다고 하면 그건 제가 뭐라 할 수 없지요.

믿어지게 해 주신 하나님이 그 믿음을 끝까지 끌고 가셔서 지켜 주시니까요.

 

지금 아벨을 시작으로 사가랴의 피까지 이어진다 했습니다.

아벨은 역사 속에 실존했던 인물이지만 사가랴는 베일 속에 가려졌다고 했습니다.

그 사가랴로 지칭되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위로부터 거듭난 하나님이 아시는 자,

그의 백성을 총칭해서 사가랴로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이 사가랴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가랴가 어떤 모습이지요?

이 땅에서 죽는 모습입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벨을 믿음의 시초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벨의 끝에 사가랴를 두고 있는 겁니다.

아벨부터 사가랴가 인류 역사 속에 등장한 모든 성도들이에요.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아벨이야기가 나옵니다.

 

히 11:1-4=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히브리서 11장은 지금 믿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보이는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세상으로 부터 나온 것이 믿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을 계속해서 얘기하면서 제일 먼저 믿음에 붙잡혀 살아간 인물로 아벨을 등장시킵니다.

 

4절에 보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아담 속에서 가인과 아벨을 빼냈습니다.

이 두 사람은 구원받은 자와 유기된 자를 상징합니다.

아벨은 구원받은 계열이고 가인은 유기된 계열입니다.

이게 누구 속에서 나왔죠?

아담에게서 나왔습니다.

 

아담을 예수로 보세요.

창세전 언약으로 돌아가 보면 예수 안에서 구원받을 자와 구원받지 못하고 유기될 자가 나옵니다.

예수 안에서 두 족속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자기백성들을 하늘에 있는 별과 같이 많게 하고 바다에 있는 모래같이 많게 한다고 그러지요?

하늘과 바다는 다른 계열입니다.

하늘은 묵시에 속한 계열이고, 바다는 땅에 속한 계열인데 이 두 계열이 같이 나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속에서도 이삭과 이스마엘처럼 두 계열 나오는 것입니다.

야곱 속에서도 요셉과 형제들이 나오듯이 모든 것이 그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 아담 속에서 가인과 아벨이 나왔다고 했는데 아담은 지금 예수님을 표상하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은 그 속에서 두 아들이 나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담이 두 아들만 나은 건 아닙니다.

거의 천 년 동안 자식을 낳았어요.

그러니 그 수가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나중에 가인이 놋 땅으로 도망갈 때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죽일까 걱정하는 장면을 두고 가인이 말하는 그 사람들은 누구냐고 묻기도 합니다.

그 감춰진 사람들은 누구냐는 겁니다.

성경을 그렇게 보시면 안 됩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사를 말하기 위함이지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담은 가인과 아벨 말고도 많이 낳았습니다.

그 모든 것을 기록하지 않고 가인과 아벨을 대표성으로 얘기하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가인과 아벨을 통해서 자기 백성과 아닌 자들을 보여주는 일들을 하십니다.

지금 이들이 태어나서 하는 짓을 봐도 드러납니다.

가인은 농사짓는 사람이고

아벨은 양치는 사람입니다.

 

그럼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가인이 지금 농사를 왜 짓습니까?

먹고 살기 위해서입니다.

 

아벨은 양을 쳤는데 그 당시 양은 식용이 아니었습니다.

노아 홍수 이후에나 고기를 먹었기 때문에 아벨이 양을 쳤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봤을 때 미련한 짓입니다.

먹지도 못할 양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 입장에서 볼 때는 가인이 훨씬 똑똑합니다.

가인은 배를 채울 일을 하는데

아벨은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을 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아벨은 그냥 양을 치는 겁니다.

 

지금 우리 식으로 당겨 보면 예수 믿는 사람은 이 세상에 올인하지 않습니다.

우린 다른 세상을 소망하는 자이기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함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있기 때문에 먹는 일을 하지만 그것이 목적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먹고 사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가인은 농사짓는 자 라고 하는 말의 의미는 땅의 노예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결국 자기 배를 위해 산 자라는 것입니다.

 

아벨은 먹고 살기 위해서 산 자가 아니라 양을 칩니다.

왜요?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입니다.

그 당시 양은 제사를 지내는 목적 외엔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제사는 왜 지냅니까?

잘못한 죄인이 그 제물을 통해서 용서를 구하는 것이 제사의 의미입니다.

그러면 아벨이 양을 쳤다는 것은 저는 죄인이요.

이 죄는 제물로 인해 용서받는다 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대로 에덴동산으로 끌고 가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의 그 죄를 감춰주기 위해서 어떤 희생 제물을 쓰십니다.

그 제물이 죽고 가죽옷을 입히십니다.

그러면 아벨이 양치기 하는 행동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인 아담과 하와의 범죄를 덮어주는 행동과 같은 것입니다.

아벨이 지금 양을 친다는 것은 아벨이 지금 예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아담과 하와가 지금 에덴동산을 벗어나서 가죽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러면 자식들이 그 입고 있는 옷이 무엇이냐고 물어볼 것이 아닙니까?

그 때 부모는 뭐라 말할까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명을 거역해서 우리가 무화과 잎으로 옷을 해 입었는데

하나님께서 그 옷 대신 짐승을 잡아 이 가죽옷을 입혀 두셨단다…

이 옷 절대 벗지 말고 하나님 잎에 갈 땐 이 옷 입고 가야돼… 라고 말했을 겁니다.

 

이 옷의 의미를 아시죠?

인류 역사는 옷으로 시작해 옷으로 끝납니다.

나중에 요한계시록에 가면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인 신부들에게 흰 세마포를 입히지요?

그 세마포가 예수님 옷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인류가 시작될 때도 하나님께서 옷을 하나 입혀 주셨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옷 입혀주고 있어요.

그러면 성경 전체가 옷 입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지금 아벨도 마찬가지 입니다.

옷 입는다는 것은 수치를 가려준다는 뜻입니다.

결국 성경 전체는 우리들의 수치를 어떤 제물의 희생을 통해서 가려준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최초로 등장하는 것이 아벨입니다.

 

아벨은 어떻게 그 양칠 생각을 했을까요?

히브리서가 말하는 ‘믿음’입니다.

가인이나 아벨이나 그 옷이 무엇인지는 부모로부터 듣고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가인은 농사를 짓고 아벨은 양을 쳤다는 것은 ‘믿음’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믿음이 아벨로 하여금 양을 치게 한 거에요.

 

믿음이 격발한 일에 아벨은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4절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아벨이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얻었습니까?

그 예물이 증거를 합니다.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해 증거 했다고 합니다.

이 예물은 그냥 예물이 아니고 ‘그 예물’입니다.

 

‘그 예물’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그 전에 있었던 어떤 예물을 말합니다.

 

창세기 3장까지는 에덴동산 얘기만 나오고 4장에 ‘그 예물’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아벨 전에 있었던 그 예물이 뭡니까?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의 죄를 덮어주기 위해서 죽였던 ‘그 제물’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제물’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나서 가죽옷을 입혀준 그 사건을 아벨이 지금 재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재현시키는 주체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아벨은 양을 잡아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지낸 것입니다.

아벨이 제사를 지낸 것의 의미는 하나님 앞에 독자적으로 내 수치를 가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죄는 의로운 희생 제물을 통해서 가려줘야 하다는 고백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제사를 지낼 때에 소를 가져 오고 양을 가져 오는 것은 내가 죄를 지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가져오는 것입니다.

제사는 죄를 지은 사람이 지내는 것입니다.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내가 죄인이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내가 제사를 지낼 때 끌고 온 제물은 내가 죽어야 할 자리에 대신 죽는 거잖아요.

그게 제사입니다.

 

그 제사의 의미가 신약에서는 예수를 믿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왜? 예수를 믿으라고 합니까?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내 죄 때문에 죽었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게 믿는 것입니다.

 

그냥 말로 예수 믿습니다 라고 되 뇌이는 건 믿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마땅히 죽어야 할 죄인인데 내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어… 라고 하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 대신 십자가에 죽으신 그 분을 우리는 주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라는 이 개념은 나를 대신하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기 때문에 나의 주님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연합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어 그 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혼자 죽은 것이 아니고 나를 안고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죽은 것이 됩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예수님을 일컬어 나의 주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대신 죽으셨습니다 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살아나시는 것도 나를 위해 살아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부활 승천도 결국엔 나를 위한 부활 승천입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들 속엔 나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을 받으면 이 사실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지금 가인과 아벨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에서 어떤 모습,

어떤 정신 자세로 살다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흘러 갈 것인가를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경 역사를 쭉 훑어보시면 진짜 하나님께 속한 자들은 모두 힘없고 버림당하고 쫓김 당하고 버려진 모습으로 있는 것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

그 모습을 전부 모아서 하나로 만들면 예수님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분해하면 아벨에서부터 사가랴까지가 나오는 것입니다.

아벨에서부터 사가랴까지가 전부 누구입니까?

선지자들 입니다.

 

그 선지자들이 신자입니다,

지금 우리가 선지자 입니다.

요한계시록 11장에 보면 두 증인 나옵니다.

그 두 증인을 이 땅에선 두 선지자라고 합니다.

선지자라는 말 자체가 미리 앞당겨 보고 증거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다윗이 뭐라고 하죠?

다윗이 성령의 감동을 입어 장차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갇히시고 부활할 것을 선지자로서 얘기했다고 하잖아요.

그러듯이 저와 여러분들도 선지자 노릇하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다른 것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우리가 증거할 때 그게 바로 선지자 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증거 했을 때 사람들이 좋아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같이 미움당해 죽임 당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서 승승장구하는 가인의 후예들 앞에서 이 땅은 사라질 것이요 라고 말하면 우리를 가만 두지 않는단 말입니다.

 

이것을 가인과 아벨이 드리는 제사로 살펴봅시다.

 

가인이 드리는 제사의 의미가 아벨과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가인은 땅에서 난 것을 드렸습니다.

물론 양도 땅에서 난 것이지만 성경적 의미로 봤을 때 이 땅에 나는 소산물들은 하나님의 저주가 머금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가인은 자기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농사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농사 지은 것으로 하나님 앞에 드렸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 드린 것이지 하나님께 드린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선 ‘그 예물’을 말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을 다시 보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이 말은 질적으로 더 나은 것을 드렸다는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을 드렸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정답과 오답의 문제입니다.

아벨은 정답을 썼고 가인은 틀린 답을 쓴 것입니다.

이 정답을 ‘더 나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옳은 것’ 즉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뭔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양의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그 양의 제물을 추적해서 올라가보니 ‘그 예물’이고

그 예물은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수치를 가려주기 위해 입혀줬던 그 옷 그 제물의 죽음이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아벨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 해주셨던 그 이야기를 다시 양을 치고 제물을 드리는 것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벨이 드린 예물을 ‘옳은 것’이라고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인과 아벨의 제사 속에 담겨져 있는 내용입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들이 죄를 지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죄가 있다 없다를 누가 판단합니까?

내가 판단합니까?

아니면 죄라고 규정하시는 분이 판단합니까?

죄라고 규정하시는 분이 판단하겠지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고 벌거벗은 것이 수치였습니다,

이 벌거벗은 것을 하나님은 수치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들이 스스로 수치라 여긴 것입니다.

 

자기들이 수치로 여겼기 때문에 자기들 방식으로 무화과나무 잎으로 옷을 해 입은 겁니다.

그러면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은 것을 누구 앞에 수치로 여겼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수치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앞에서의 수치를 자기들 방식으로 가립니다.

 

그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묻습니다.

너희들 왜 그렇게 한 것이냐?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앞에 벌거벗고 나온 것이 부끄러워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부끄러움을 너희들이 말해야 하느냐?

내가 부끄럽다고 해야 하느냐? 라고 하나님이 다시 물으시겠지요?

 

너희들이 내 앞에서 부끄럽다고 옷을 해 입고 가렸는데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식으로 해 입어야 될 것이 아니냐?

그런데 너희들은 지금 너희들이 원하는 식으로 부끄러움을 가렸잖아.

그건 아니지.

그래서 하나님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시고 그들이 가린 것을 벗겨 버리고 하나님의 방식으로 다시 가려주는 것입니다.

 

왜 이런 얘기를 하는가 하면 죄는 우리 손에서 가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옷을 해 입으면 그건 내가 가리는 행위가 됩니다.

죄는 죄라고 규정하시는 분이 가려 주셔야 합니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들을 죄인이라고 고발하시는 분은 누구인가요?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죄를 누가 가려줘야 합니까?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수치를 내가 수치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픔 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안고 있는 것이 아픔 입니까?

 

예를 들어 설명할게요.

여러분의 자식들이 발가벗고 있습니다.

아이는 자기가 벗은 것을 모릅니다.

부모는 그 모습을 보고 압니다.

그러면 부모는 그 발가벗은 모습을 가려주겠지요.

 

우리의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죄는 우리가 가리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려주십니다.

이사야서 43장을 봅시다.

 

사 43:25절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잘 보세요.

누가 누구의 허물을 도말한다고 합니까?

 

나(하나님)가 나오고

그 반대편인 네 (우리) 허물이 나옵니다.

죄인인 우리의 허물을 누가 도말해 줍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하십니다.

왜? 우리가 죄를 지었는데 하나님이 가려줍니까?그건 하나님이 우리 죄를 보면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려주는 겁니다.

 

이것을 에덴동산으로 당겨 와보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을 누가 급해서 다시 찾아올까요?

쫓아낸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구원자가 되어서 범죄한 아담을 찾아오시는 겁니다.

 

구원이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구원은 우리의 원함이 아니고 하나님이 원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 안 받아도 세상 사는데 아무 문제없습니다.

내가 예수 안 믿어도 세상 사는데 아무 문제가 없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게 만들어 버리셨습니다.

 

이 예수를 믿는 것은 내 원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원함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하나님께서 찾아 오셔서 너 예수 안 믿으면 큰일 난다 하시면서 믿게 해 버리신 것입니다.

그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받아야 할 아무런 당위성도 없이 사는 우리를 찾아 오셔서 믿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구원받아 천국엘 가보니 하나님이 날 구원해주시지 않았으면 큰 일 날 뻔 했구나 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선 그 은혜를 감사하며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잘 곱씹어 보세요.

하나님 자신을 위해 우리의 죄를 도말했단 이 사실을 잘 생각해 보세요.

 

예를 들어 엄마가 잠시 외출하고 와보니 아이가 온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어 놨습니다.

똥 오줌을 싸서 온 집 안이 난장판이고 냄새가 풀풀 나고 난리가 난 겁니다.

그러면 엄마는 어떻게 합니까?

그 아이가 저질러 놓은 것을 쓸고 닦습니다.

아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더럽혀진 것을 보고 엄마가 살 수가 없으니까

아이는 가만있는데 엄마가 치우는 겁니다.

 

하나님이 지금 그 모습입니다.

이 땅의 죄를 누가 싫어합니까?

하나님이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방식으로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겁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보내달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보낸 준 것은 저 놈들을 두고 내가 잠을 잘 수가 없어서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하나님은 안식을 못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하는 일을 보고 한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 일을 하는데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아버지가 하는 것을 보고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아버지도 지금 죄인 구원하는 일을 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죄인들이 없어야 안식을 하시는데 이 인간들이 죄 아래 가두어져 있으니 쉬운 얘기로 하나님이 편히 주무시질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어 하나님의 백성들을 죄 아래서 꺼내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자기도 한다고 하시면서 아버지가 내게 이끌어 준 자는 마지막 날에 살린다고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낸 것은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예수를 보낸 것입니다.

우리의 필요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셔서 우리의 필요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아버지의 뜻에 종속되어 사시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의 뜻은 죄 아래 있는 백성을 건져내어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냥 건져 내는 것이 아니라

에덴동산에서 봤던 것처럼 내 죄를 누가 대신 감당해 주는 것으로 건지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 대신 감당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죽으신 것은 나를 위한 죽음이라고 말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이 안 믿어집니다.

왜요?

인간의 인식론은 내가 죄를 지었으면 내가 매를 맞아야 인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잔소리를 들어야 하는데 잔소리를 안 해주면 불안합니다.

 

인간들은 자기 자신이 뭔가를 해야지 무언가를 했다고 인정합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은 나를 대신해서 예수를 보냈단 말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로 하여금 내가 할 일을 대신 하게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는 그 사실을 믿으라는 겁니다.

이게 안 믿어지는 겁니다.

내가 해야 하는 데…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나 대신 했다는 것을 믿어지게 하기 위해서 성령을 보내십니다.

성령이 와서 믿어지게 해주는 것입니다.

나 대신 내 죄를 감당한 것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옛날 같으면 그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난 선악과를 따 먹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성령이 와서 믿어지게 해주니까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이 내가 먹은 것이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나를 위해서 대신 죽은 것이 라는 사실이 믿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 받은 사람은 그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아벨이 그 길을 걸어갑니다.

왜 아벨이 돈도 안 되고 아무 쓸모도 없는 양을 쳤겠습니까?

그 양을 통해서 자기 죄사함을 받기위해서입니다.

이 일을 믿음이 알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약속의 후손인 아벨은 하나님이 알게 해주신 믿음으로 양을 제물로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아벨의 제물만 받으시는 겁니다.

 

쉬운 말로 하나님께서 가인의 밥상과 아벨의 밥상을 모두 받았는데 하나님은 푸성귀가 아닌 고기를 좋아하신다는 겁니다.

오해 말고 들으세요.

그러자 가인이 아벨에게 너 하나님이 고기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았냐고 묻습니다.

아벨은 믿음이 알게 해줬다고 합니다.

가인은 왜 자신에게는 가르쳐 주지 않았냐고 항의하겠죠?

그리고 하나님이 편애한 아벨을 죽여 버리는 겁니다.

아벨을 죽이면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에게로 올 줄 알았던 겁니다.

이게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아벨이 죽은 그 자리에 셋을 대신 줍니다.

가인은 철저히 유기시켜 버립니다.

그리고 셋의 후손들도 결국 또 아벨의 운명을 걷게 하십니다.

그렇게 걸어 걸어 온 사람이 예수님까지 왔고

그 예수님 속에서 나온 사람이 저와 여러분입니다.

 

우린 지금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이 땅에서 버려지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겉사람은 후패하고 속 사람은 새로워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이렇게 버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더 많이 챙기고 내가 높아지기를 꿈꿉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가만두시지 않습니다.

그러니 내 안에서 날마다 전쟁이 벌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공격하시는 겁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자체가 ‘하나님의 공격 대상’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신과 싸우는 자’인데

거기서 말하는 신은 하나님과 싸우는 자 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와 싸웁니까?

죄인하고 싸우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공격 대상인 것입니다.

왜요?

우리 안에는 거인 숭배 사상이 있는데 이 죄는 가인을 좇아가기 때문입니다.

눈만 뜨면 높아지고 가지려 하고 잘난 것으로 서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영웅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벨처럼 버림 당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우리를 간섭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버려짐을 감사히 받지 못합니다.

 

저도 솔직한 애기로 복음 전하고 나면 대접받고 인정받고 싶어요.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철저히 감춰지게 하십니다.

돌아오는 것은 고작해서 욕이나 먹는 겁니다.

화가 나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따지죠.

 

그런데 그런 게 우리 인생입니다.

그럴 때 마다 한 번도 하나님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늘 설득당하죠.

 

날마다 버림당하는 이 아픔이 다른 말로 순교입니다.

멀리 나가서 순교 당하려 하지 말고 그냥 이 자리에서 버림당하고 내 꿈이 깨어지고 내 욕심이 깨어지는 것이 죽음,

순교입니다.

내 잘난 자존심,

내 자아가 확장되고 싶은 것이 다 깨트려 지는 겁니다.

 

진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는 이 땅에 분깃이 없게 하십니다.

만약에 그런 것을 주면 반드시 엉뚱한 짓을 하니까 자꾸 빼앗으시고 위를 바라 보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장 낮아졌을 떄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어요.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찾습니까?

내가 가장 낮아지고 버려지고 아무도 나를 돌아보지 않을 떄 누구를 바라보게 됩니까?

주님 찾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사랑입니다.

 

아벨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들이 가야할 운명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내가 이 땅에서 결국에는 버려질 것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솔로몬이 헛되고 헛되고 헛되도다 라고 했습니다.

이 ‘헛되도다’가 ‘아벨’입니다.

결국 우리는 이 땅에서 헛 꿈 꾸고, 헛된 인생 사는 겁니다.

 

우리의 꿈을 깨트리는 하나님 앞에 당연이 원망과 불평을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 죄는 점점 더 고발당하게 되지요.

그 고발당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는 더 크게 다가옵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 안에서 가인처럼 살고자 하는 이 욕망이 죄인 줄 아시고 이 가인으로 인해 나는 항상 아벨을 죽이는 자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내가 가인으로 살고자 하는데 방해하는 이 아벨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우린 날마다 예수님을 죽이는 겁니다.

내 편을 들어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를 사랑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 아픔을 날마다 겪으실 것입니다.

하지만 매도 맞다 보면 맷집이 생기듯이 겪어 보세요.

어떤 문제가 생기면 어느 날 씨익 웃을 수 있는 내공도 생깁니다.

 

이 일이 시작됐으니 멈추지 말고 하나님이 끌고 가실 것입니다.

비록 아프겠지만 그 아픔 뒤에 주님의 은혜와 평강과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아시고

늘 하나님 앞에 감사하시고 사시는 인생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