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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히브리서 강해

♣(성경강해)3강. 에녹의 믿음과 승천 (히 11:5-6)

by coroa 2022. 3. 7.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3강. 에녹의 믿음과 승천 (히 11:5-6)

-.정낙원 목사

 

히 11:5-6=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지난 시간 아벨과 그 예물에 대하여서 살펴보았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동일한 제사를 드렸지만 하나님은 예물로서 그들의 믿음을 증거해 주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제사를 받은 것이 아니고 그 예물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제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예물의 제사이냐가 중요한 것이 됩니다.

제사 지냄을 지금 식으로 신앙생활이라고 합시다.

 

그럼 예물은 신앙생활의 내용인 예수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되겠지요.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믿음이 예물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의 핵심은 어떤 믿음이냐 로 남게 됩니다.

 

믿음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내가 믿는 믿음이 있고, 하나님이 믿게 해 주시는 믿음이 있습니다.

내가 믿는 믿음은 내 것으로 나아오고, 하나님이 믿게 해 주시는 믿음은 예수님을 앞세우고 나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예물을 더 나은 예물이라고 했습니다.

“더 나은 예물” 이란 “옳은 예물” 이라고 했어요.

옳음이란? 정답이란 말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물이란 뜻입니다.

 

그럼 신약에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아벨의 예물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구약은 신약을 전제로 기록이 되어져 있고,

신약은 구약을 배경으로 기록이 되어져 있습니다.

 

흔히 구약은 그림자이고 신약은 실상이라고 합니다.

아벨이 드린 예물이 그림자라고 한다면 그럼 그 예물의 실상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아벨이 드린 양의 제사는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것만 받으세요.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음에서 살리심으로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죽음에서 살아났다는 것은 죽지 말아야 할 분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음에서 부활케 하심으로서 “이 예수는 죄가 없다!”

“이 예수는 의롭다!” 고 세상에 공표하신 겁니다.

안 죽을 분이 죽은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죽인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틀린 자들이라는 것이 입증이 된 것입니다.

 

역사 이래로 모든 인간은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단 한 사람도 부활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인간은 마땅히 죽어야 할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했어요.

이는 예수님은 죽지 말아야 할 분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은 좌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죽음에 가두지 않고 부활케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의 것을 받지 않는 이유는 죄인에게선 “하나님이 바라는 의(義)” 가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죄인에게선 죄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전 13장에서 내가 내 몸을 불사르는데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했어요.

 

고전 13:1-3=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 사르게 내어 줄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내 몸을 불사른다는 것은 순교한다는 말입니다.

구제한다는 것은 선한 일을 행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그 순교조차도 사랑이 없으면 말짱 헛 것이라고 합니다.

 

사랑이란? “헤 아가페” 라고 하는데 “그 사랑” 이란 뜻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 곧 “예수님께 피 흘려 주신 사랑” 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피” 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에 의미를 모르고서 행하는 것은 모두가 종교 놀음이지 신앙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선“예수님의 피” 를 앞세우고 나아오지 않으면 안 받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무엇을 하였다! 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선 전혀 무기치 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 앞에 옳음이 무엇인지 자명해 졌습니다.

 

하나님 앞에 옳음이란? “예수님의 피”입니다.

 

“예수님의 피” 만이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 만이 죽음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 만이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피” 가 하나님께서 “의로운 피” 라고 증명을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옳음이란? 오직 “예수님의 피” 뿐입니다.

 

아벨은 더 나은 예물로 옳다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아벨은 “예수님의 피” 를 드린 것이 되는 것입니다.

아벨은 자기 대신 예수님이 죽어 주셨다는 것을 믿었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이 사실을 알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벨은 믿음으로 예수님을 양이라는 제물로 표시한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냥 양으로 보지 않고 예수님으로 보고 받으신 겁니다.

가인은 믿음을 못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좋아하는 예물을 몰랐고, 아벨은 믿음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좋아하는 예물을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히브리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벨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고, 아벨의 믿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믿음을 받으면 아벨처럼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이 그걸 드리잖아요.

뭡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피” 를 앞세우고 나아온 믿음입니다.

 

믿음은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감사하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죽어 주셨다는 것을 믿는 것을 자랑하면 안돼요.

감사하여야 해요.

 

신앙생활은 “나 믿음 있다”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이런 믿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해야 합니다.

믿음이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랑하지 못하고 감사하는 겁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신앙생활이란?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하신 것을 믿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겁니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죄 없으신 예수님을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해야 해요.

이걸 잊으면 안돼요.

 

절대로 자랑으로 흐르지 말고 감사로 흘러야 돼요.

그러므로 누가 복음을 모른다고 하여도 그 사람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남을 무시한다는 것은 자기가 믿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난 알았고” “넌 모르지” 라고 하면 안 것이 자기 것이 되고 말아요.

그러면 알게 해 주신 하나님의 공로를 가로채는 도둑이 되는 겁니다.

비록 그 사람이 지금은 복음을 모르지만 언제라도 하나님이 믿음을 주시면 믿게 되어요.

그러니 남을 무시하지 말란 말입니다.

 

포도원 품꾼 비유를 보면 아침 일찍 포도원으로 부름 받은 사람도 있고, 낮에 부름 받은 사람도 있고, 저녁 때 부름 받은 사람도 있어요.

모두가 놀고 있었는데 주인이 불러서 갔습니다.

 

그러니 아침에 갔다고 해서 폼 잡을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다만 주인이 그 때 불러 준 것 뿐입니다.

늦게 갔다고 기죽을 일도 아니에요.

 

어떤 사람은 교회 오자 말자 복음을 알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교회 1년 다니다가 복음을 알게 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교회 30년 다니다가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믿게 될 수도 있어요.

 

저 같은 경우에도 6살 때부터 교회는 다녔어요.

그런데 복음을 안 것은 십여 년 전에 알게 되었어요.

저 같은 경우는 오후에 포도원으로 부름을 받은 셈입니다.

그러니 누가 언제 어떻게 복음을 깨닫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라고 한 겁니다.

 

혹시 모르지요.

지금 이 글을 보고 또 누군가가 눈이 떠지고 마음이 열려서 복음이 믿어질지!

나도 몰랐는데 하나님께서 알게 해 주시니 안 것뿐입니다! 라고 해야지 자신은 척 알아보았는데 당신은 왜? 모르십니까? 라고 하면 안돼요.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자랑하다가 지옥에 간 것입니다.

 

그러니 신자는 자기가 예수를 믿었다는 것을 자랑거리로 두지 말고 감사거리로 두어야 합니다.

내 죄를 예수님이 대신 담당해 주심이 믿어지니 놀라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 담당해 주셨다는 것은 믿음이 와야만 믿어지니 감사할 수밖에 없지요.

 

이런 믿음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잖아요.

하나님께 주셔야만 믿어지는 것들이잖아요.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이라는 선물을 받은 사람은 그 믿음으로 예수님이 자신의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는 그리스도라는 것이 믿어지고 그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하는 거예요.

결국 우리가 하나님께 들고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것을 하나님에게 돌려 드리는 셈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신앙생활을 아무리 잘하였다고 하여도 하나님 앞에선 자랑하면 안 되지요.

왜냐하면! 모두가 하나님께로 받은 것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성도가 교회를 섬기고, 형제를 사랑하고, 남을 가르치고, 봉사하고 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이라고 했어요.

하나님께서 그런 일들을 하게 해 주셨기 때문에 한 것이란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공로이지 내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여기서 신앙의 중요한 원리를 하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과 마귀의 일함을 알 수가 있어요.

 

하나님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들고 나아오라고 하는데,

마귀는 인간의 것을 들고 나아가라고 해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나아가면 자기 자랑이 없고 오직 하나님께 감사만 드리게 되는데,

자기 것을 들고 나가면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없고 오직 자기 자랑만 하게 됩니다.

 

이처럼 자기 자랑으로 나아간 자들이 바로 바리새인들 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주여 우리가 금식도 하고, 십일조도 드리고, 전도도 하고, 봉사도 하고,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였나이다 자랑했어요.

 

그러니 나를 칭찬해 주고 내게 상을 달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자기가 하였다고 자랑하는 것을 불법이라고 해요.

하나님의 공로를 가로채니 불법이지요.

 

피조물은 창조주의 도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 피조물이 그 어떤 것을 하였다 할지라도 그것은 다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모르면 자기 자랑을 하게 되요.

 

지혜로움이란? 하나님 앞에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라고 하였지요.

가지가 포도나무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가지를 보존하고 있어요.

그러니 성도가 행하는 모든 것이 나무이신 예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것을 자기가 하였다고 자랑하는 것은 예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도적놈이지요.

 

진실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는 자기 자랑이 없어요.

모두가 주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게 되어 있어요.

사도바울이 이를 알았기에 나의 나 된 것이 모든 것이 주의 은혜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사나 죽으나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삶으로 인하여 불평하지 말아야 해요.

원리가 그렇다는 겁니다.

죄인은 불평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뜻이고 은혜임을 알아야 해요.

그런데 이 죄라는 놈이 죽지 않고 늘 불평을 토하게 만듭니다.

 

왜? 난 남들보다 행복하지 못합니까?

왜? 난 돈이 없습니까?

왜? 난 건강이 좋지 않습니까?

왜? 난 공부를 못합니까?

왜? 우리 신랑은 월급이 적습니까?

 

온통 왜? 왜? 왜? 입니다.

감사라고는 눈뜨고 찾아보려고 해도 희귀해서 찾아지지가 않아요.

그러면서 신자라고 하고 하나님 백성이라고 얼굴색도 안 변하고 뻔뻔스럽게 말해요.

 

하나님 백성이라고 하는 데는 이의를 제기하고 싶지 않아요.

본인이 하나님 백성이라고 하는데 누가 말려요.

그러나 한 가지 신자라고 하면서 감사가 없다는 것은 뭔가 큰 문제라고 지적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신자가 감사치 못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놓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밝히 보인다면 그 어떤 것에도 감사가 되어져요.

십자가가 보이는 순간엔 그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 시간이 사람마다 다르겠지요.

 

어떤 사람은 자주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일주일에 한 번씩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깨달아지면 아무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요.

괜히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고민하고 속상해 했다는 것이 깨달아져요.

 

자식 공부 못하는 것도 예수님의 십자가 피 앞에 서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돈 없고 가난한 것도 예수님의 피 앞에 서면 아무 것도 아니란 걸 깨달아져요.

병들고 아픈 것도 예수님의 십자가에 고난당함을 보게 되면 아무 것도 아님을 알게 되요.

삶을 가지고 불평하는 것은 모두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나와서 날 행복하게 해 주세요 라고 악악대는 겁니다.

 

우리들이 세상 살면서 당하는 그 어떤 것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살 찢기고 피 흘리신 아픔 보다 더 하진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는 예수님 앞에 서면 지금 내가 불평하는 그것도 배부른 투정이고 호사스러운 것이란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전 힘주어 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잊는 순간 여러분의 삶은 지옥으로 떨어지고 입에 불평이 나옵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깨닫는 순간 여러분의 삶은 천국이 되고 감사가 될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환경으로 판단되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아느냐 모르느냐로 판단돼요.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미를 알면 어디에 있어도 비록 감옥이라 할지라도 감사하고,

암으로 병상에 누워 있을지라도 천국 안에 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미를 모르면 그 어떤 좋은 환경도 지옥입니다.

 

재벌이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모르면 지옥에 가는데,,,

가난하면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알면 천국에 가잖아요.

그러니 십자가를 알면 부자다 가난하다 라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겁니다.

 

가난도 우리 마음 속에 믿음을 빼앗지 못해요.

병도 빼앗지 못해요.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 안에 예수님이 구주라는 것이 믿어지는 믿음을 빼앗지 못해요.

그러니 염려 할 이유가 없지요.

 

바울은 믿음이 얼마나 견고한가 하면 죽음조차도 빼앗지 못한다고 했어요.

 

롬 8:35-39=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위에 말씀을 잘 음미해 보세요.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하잖아요.

믿음이 이런 것으로부터도 이기게 할 것입니다.

 

만약에 외부적 조건으로 탈락되는 믿음이라면 그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아니고 자기가 만든 믿음입니다.

그러니 어려우면 믿음을 버리는 것입니다.

성도의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 것은 믿음을 성도가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관리를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가 그냥 말장난 하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나 천국이나 모두가 현재적으로 와 있는 현실이고 사실입니다.

천국은 나중에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와 있어요.

 

지금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알면 천국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고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과의 동행을 오늘 살펴볼까 하는 겁니다.

 

성경은 에녹을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에녹의 어떤 모습이 하나님과 동행한 것인지 살펴보아야겠지요.

우리는 히브리서 11장을 시작하면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것에 대하여 상세하게 살펴보았습니다.

 

바라는 것을 현실의 삶으로 풀어내는 것이 믿음이라고 하였어요.

다시 말해서 믿음이 보지도 못한 것을 실제처럼 살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히 11장의 인물들은 모두가 보지 못한 세계를 믿음으로 실제처럼 살아간 사람들입니다.

 

각 사람의 삶을 분해하여 보면 믿음의 본질인 예수님의 삶을 선취 적으로 살던 흔적들이 절절히 배어 있어요.

구약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지만 본 것처럼 살았습니다.

그들의 삶이 이를 증거 해 주고 있어요.

이들이 예수님의 삶을 미리 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이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삶을 미리 맛보도록 이리 저리 끌고 다녔던 것입니다.

마치 소 고삐를 잡고 끌듯이 믿음이 구약에 성도들을 끌고 다닌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사람들을 본받고 부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역시 동일한 믿음이 오면 그 믿음이 우리를 이끌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여기에 와 있는 것도 믿음이 끌고 왔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봉사하고, 청소하고, 식사를 준비하는 모든 것이 믿음이 역사한 증거입니다.

불신자들은 자기가 하였다고 생각하겠지만,

신자는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하게 해 주신 것이라고 생각이 들어요.

 

신앙생활을 감상주의로 생각하지 말라고 했지요.

신앙생활을 감상주의로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믿음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약에 성도들이 편하고 좋은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항상 기뻐하면서 주님이 바라는 삶을 살았다고도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졌기 때문에 아파하고 힘들어 했습니다.

 

세상에서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이고 아픔인줄 아십니까?

 

나그네는 최소한의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나그네가 바리 바리 짐을 싸들고 다니지 않습니다.

죽지 않을 만큼 겨우 겨우 연명하면서 살아가는 자가 나그넵니다.

그러니 얼마나 빈핍하고 힘들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두 벌 옷도 가지고 가지 말고 저금통장도 가지고 가지 말고 하나님이 다 먹여 주시고 잠재워 주시겠지 하는 믿음만 가지고 가라고 했지요.

그게 나그네에요.

 

인간적으로 살라고 하면 살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셔서 그 믿음이 소 고삐 잡듯이 끌고 다닌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신약의 12제자도 그랬고!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랬고!

지금도 복음을 증거하는 종들이 그러합니다.

 

노아를 보십시오.

예수님은 종말의 징조를 노아의 때와 같다고 했습니다.

노아의 때에 사람들이 모습을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일들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평범한 일상사들입니다.

 

그런데 노아는 이런 평범한 것조차 누리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노아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서고 팔고 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고 이게 삶의 목적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노아는 오직 장차 올 심판을 준비하며 살았습니다.

남들 놀러 다니며 맛난 음식 먹으러 다닐 때 방주만 짓고 살았어요.

변변한 여행한번 못하고 밥숟가락만 놓으면 방주를 지었어요.

남들한테 미쳤다고 손가락질 당하면서 살았단 말입니다.

 

심판을 준비하는 사람이 호사스럽게 살 수가 있겠습니까?

없어요.

 

여러분 6.25 동란 때 피난 떠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산해진미(山海珍味) 먹으면서 피난길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궁중요리 먹으면서 피난하지 않았어요.

초근목피(草根木皮)하면서 부평초(浮萍草)처럼 살았어요.

 

출애굽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땠습니까?

허리에 띠를 단단히 동여매고 신발 끈 조여매고 주먹밥 깨물면서 준비하였습니다.

도망치듯이 출애굽을 했어요.

 

이게 종말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삶에 자세입니다.

종말을 준비하는 사람이 놀자 판을 벌리고 살지 않습니다.

하고 싶은 것 다하고 살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나그네라고 하는 겁니다.

나그네가 골프 치러 가겠어요.

나그네가 낚시하러 다니겠어요.

나그네는 해 걸음에 집으로 가기 위해 걸음을 재촉하며 길 떠나는 사람입니다.

 

나그네는 오로지 빨리 집에 가야겠다는 일념으로 걷고 또 걸어요.

지나가면서 볼 것 다 보고 먹을 것 다 먹고 누릴 것 다 누리고 살지 않아요.

그런 것들은 집에 가서 누리고 맛 볼 것들입니다.

성도는 하늘에 본향에 가서 누릴 것 다 누리지 이 땅에선 누릴 것이 없어요.

 

그러나 장차 올 심판을 모르는 사람들은 누릴 것 다 누리고 먹을 것 다 먹고 할 것 다 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예수님은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하였다고 표현하는 겁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여러분의 기를 죽이고자 함이 아닙니다.

또한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라고 가르치기 위함도 아닙니다.

다만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 가치로 살지 않게 하신다는 것을 말해줄 뿐입니다.

 

그러니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에 사람들은 모두가 우리 신앙에 허구성을 고발하는 고발자로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악함을 고발하기 위해 서 있는 겁니다.

 

그래서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증인입니까?

이는 우리와 동일한 성정을 가지고 동일한 믿음을 가지고 동일한 성령을 마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째서 이들과 같은 삶을 풀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러면서도 뻔뻔스럽게 이들이 가 있는 천국에 간다고 합니다.

이 뻔뻔스러움이 어디서 주어지는 것인가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뻔뻔스러움의 출처를 알아야 신자입니다.

 

제가 처음 히브리서 11장을 강해를 시작하면서 당부한 말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을 본받으려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들과 우리의 다름을 깨닫고 그럼에도 우리가 멀쩡하게 살고 있는 그 이유를 알라고 했습니다.

그럼 의미에서 성경에 기록된 모든 사람과 사건들은 우리를 고발하는 차원에서 주어졌다고 했습니다.

 

아벨이 우리를 고발하고,

에녹이 우리를 고발하고,

노아가 우리를 고발하고,

모세가 우리를 고발하고,

아브라함이 우리를 고발하고,

바울이 우리를 고발하고,

스데반이 우리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모두 우리를 향하여 사기꾼, 거짓말쟁이, 엉터리라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고발하는 것은 우리를 기죽이고자 함이 아닙니다.

고발하는 것은 은혜를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너희가 얼마나 큰 은혜를 입고 있는지 아느냐!

너희가 얼마나 큰 용서를 받고 사는지 알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세처럼 살지 못합니다.

우리는 바울처럼도 살지도 못합니다.

우리는 노아처럼 살지도 못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노아가 가 있고, 바울이 가 있고, 모세가 가 있는 천국에 갑니다.

어떻게 가느냐고요.

하나님의 은혜로 갑니다.

 

예수님이 우리대신 책망을 받고 욕을 먹고 매를 맞아 주었기 때문에 가는 겁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 담당해 주셨기 때문에 꼴은 이래도 천국에 당당히 갑니다.

당당해지라고 성령을 주시고 믿음을 주신 겁니다.

마귀 앞에서 기 죽지 말라고 믿음을 주셨어요.

 

누가 뭐라고 하거든 예수님을 앞세우라고 믿음을 주신 겁니다.

이 믿음만 있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있어요.

오직 믿음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자기 꼬락서니보고 낙심하고 한심해하는 인간은 신자가 아닌 겁니다.

우리가 우리 꼬락서니를 제대로 간수 할 수 있으면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어요.

자기가 갈고 닦아서 의를 만들어 천당 가면 되니까요?

우리는 아무리 갈고 닦아도 우리 꼬락서니를 하나님이 만족하게 만들 수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 피만 앞세우고 사는 겁니다.

 

이처럼 마마보이 같이 예수님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 것은 성경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신자가 아닙니다.

신자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죄인이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 덩어리라는 것을 아는 자가 신자입니다.

이런 망나니 같은 자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피 흘려주셨다는 것을 아는 자가 신자입니다.

내 대신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을 아는 자가 신자입니다.

 

최고의 신앙은 내가 죄인이고,

이런 죄인이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못내 고맙고 감사하고 생각만 하고 바라만 보아도 가슴이 찡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아는 것입니다.

이 앎이야 말로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보다 나은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 때 범사가 감사로 알알이 배어나게 됩니다.

 

빵 한 조각 놓고도 감사 할 수가 있어진단 말입니다.

라면 하나로 끼니를 때워도 감사하게 된단 말입니다.

꽃 한 송이, 새 한 마리, 단풍 잎사귀 하나를 보아도 하나님의 은혜로운 숨결을 느끼고 감사하게 된단 말입니다.

 

신앙생활을 뭔가 큰 일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만물이 주님이 만드셨고 주님의 것입니다.

여러분이 스데반 집사처럼 순교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다고요?

어림없는 소리입니다.

설령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설령 순교하였다고 하여도 순교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순교하였다고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물론 영광도 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게 하셨고 하나님 것인데 그게 뭬가 내 영광이 된단 말입니까?

 

그러니 그 어떤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벌리신 일을 깨닫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배우는 것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가를 알기 위함입니다.

 

야! 세상에 내가 이렇게 악당인줄 몰랐네!

그런데 이런 악당을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셨어야!

세상에 이런 은혜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이런 사랑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난 지금까지 이런 하나님의 아픔과 자비로운 마음을 모른채 살았구나!

난 지금까지 입술로는 하나님! 하나님! 하면서도 하나님을 너무도 모르고 살았구나!

이러고도 내가 신자라고 하였으니!

태산 같은 하나님의 은혜 앞에 그져 유구무언으로 막달라 마리아와 같이 옥합을 깨트리고 머리카락으로 주님의 발을 씻기는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다니고 성경을 알고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집사가 되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모른다면 지금까지 예수 헛 믿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믿는다고 한 것은 관념이고 공염불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가슴으로 하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같이 가슴에 북받쳐 넘치는 고마움을 삶으로 토해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 가슴이 뜨거워야 합니다.

이런 뜨거움이 있을 때 그 어떤 환경도 아픔도 감사함으로 이겨 낼 수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탕자가 집에서 큰 일로 아버지는 감동케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못난 놈을 아들이라고 여기고 사랑해 주는 그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것이 최고의 효도가 되는 것입니다.

아비의 마음을 모르고서는 그 어떤 일을 많이 하고 잘 하였다고 하여도 그건 불효입니다.

효도란?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못난 자식을 품어주시기 위해 가슴 찢어지는 아픔도 감내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부디 말씀을 들으면서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시간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이제 에녹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에녹이 무엇으로 지금 우리의 신앙에 허상을 고발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합시다.

에녹은 최초로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나님께로 올라간 사람입니다.

성경에 보면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나님께로 간 사람이 두 명 있지요.

에녹과 엘리야입니다.

 

에녹이나 엘리야를 세상에다 말하면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헛소리하지 말라고 하면서 비웃겠지요.

맞아요.

그게 정상입니다.

그런 말을 하는 우리가 비정상입니다.

여러분 신자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정상적인 대접을 받고자 하면 안돼요.

비정상적인 대접을 받아야 정상입니다.

 

복음은 세상 사람들이 들으면 비웃음거리로 들려요.

처녀가 아이를 낳았다!

사람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서 하늘로 올라갔다!

또 에녹처럼 죽지 않고 올라갔다!

 

이건 인간의 이성으로는 아무리 쥐어짜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어요.

이런 황당한 이야기를 믿고 살아가야 하는 신자는 당연히 세상으로부터 비 웃음당하는 아픔을 겪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니 세상이 여러분을 미워하고 비웃는다고 해도 섭섭해 하지도 말고 짜증내지도 마세요.

여러분의 일가친척들이 그런다 하여도 반발하지 마세요.

그분들은 여러분을 이해하지 못해요.

 

저는 명절 때 처가에 가면 먼저 복음에 대하여 말하지 않아요.

먼저 물어 오면 기회다 싶어 말을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안 합니다.

본인들이 관심도 없고 답답해하지도 않는데 말하면 괜히 이상해져요.

 

저도 처음엔 복음 전한다고 하였는데 그러면 분위기가 썰렁해져서 있는 기간 내내 불편해요.

하루 아니면 이틀 밤 자고 오는데 거북스러워져요.

그래서 말하지 않는 겁니다.

말해 보아야 들을 사람도 없거니와 듣지도 않아요.

대화가 안돼요.

 

그래서 이젠 일부러 고스톱 치자고 해요.

그러다가 노래방 가자!

그러면 따라가서 노래 부르다가 와요.

 

그럼 놀래요.

아마도 속으론 그럴 겁니다.

무슨 목사가 노래방에 가느냐! 라고 할 겁니다.

아마도 그러니 교회가 부흥되지 않지! 라고 생각을 할 거예요.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목사의 행동에 따라서 교회가 부흥되고 안 되고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교회 부흥은 목사의 행동과 전혀 상관이 없어요.

만약 목사의 행동에 따라서 교회가 부흥된다고 하였으면 저희 교회는 지금쯤 수만 명은 넘어야 해요.

전 교회 처음 개척할 때는 열심이라고 하면 둘 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특심했거든요.

 

일 년 365일 철야하고, 산 기도 다니고, TV도 속 되다고 안 보고 속된 말로 거룩하게 살았어요.

그런데 교인들 모아 놓으면 도망가고,

모아 놓으면 도망가고 해요.

교인들끼리 서로 싸우고 삐지고 가요.

하나님이 복음 붙잡으라고 다 흩은 겁니다.

사람 믿지 말고 예수님 십자가 붙들라고 그런 것입니다.

 

그땐 하나님이 참으로 야속했지만 이제 생각하면 그 때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만약 그 때 교회가 부흥되었다면 지금쯤 전 정치하는 목사가 되어 있을 겁니다.

무당 노릇 열심히 하고 있을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로 하여금 교회 붙들지 말고 예수님 십자가 붙잡으라고 한 것입니다.

노아처럼 종말을 준비하라고 나그네로 만든 것입니다.

참 감사하지요.

이젠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란 것이 깨달아져요.

깨달아지니 감사가 되는 겁니다.

 

다시 에녹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에녹은 어떻게 하였길래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로 갔을까요?

항상 하는 말이지만 나타난 결과는, 감추어진 원인에 따라 결정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에녹이 죽지 않고 하나님께로 올라간 것도 감추어진 원인이 있다는 말입니다.

에녹에게 나타난 결과는 죽지 않고 하나님께로 올라간 것입니다.

에녹이 죽지 않고 올라갈 수 있었던 원인을 본문에선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럼 에녹의 어떤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인지 알아보아야지요.

신앙생활이란?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기쁘면 하나님도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업하는 사람은 사업이 잘되거나,

장사하는 사람은 가게에 손님이 많아서 매출이 많이 올라간다거나,

학생이 시험을 잘 친다거나,

실직자가 좋은 직장에 취직을 하였다거나,

노처녀가 좋은 신랑 만나서 시집을 잘 간다거나 라는 식으로 자기에게 좋은 일들이 벌어지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좋다는 일들이 일어나면 난 하나님께 이런 사랑을 받았고 이런 은혜를 받았다! 라고 자랑하잖아요.

반대로 세상 가치관으로 좋지 않고 창피스러운 일들이 일어나면 하나님께 저주 받았다고 생각해서 입 딱 닫고 교회도 안 나오잖아요.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을 자기 가치관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을 자기 생각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내가 기쁘면 하나님도 기쁘고, 내가 슬프면 하나님도 슬프게 보는 겁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하나님 생각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내 뜻에 가두는 것이 아니고, 내 생각을 하나님 뜻에 가두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되고 하나님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선택한 것은 성도의 몸에 하나님이 그리고자 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함입니다.

성도를 예수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으니 하나님이 그리고자 하는 그림은 예수님 그림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삶 속에서 예수님의 그림들이 하나 하나 그려져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 삶 속에 예수님의 흔적들이 하나 둘 아로새겨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려내는 그림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흔적들이므로 성도에게는 아파요.

이걸 베드로는 불 같은 시련이라고 했어요.

예수님은 좁은 길이라고 했습니다.

 

나라는 존재는 지워져 가고!

내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들이 거울에 서렸던 입김들이 서서히 지워지면서 모습이 드러나듯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려내는 그림은 영웅호걸이 아니라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존재감 없이 사라지는 안개 같은 인생입니다.

부자가 아니라 거지 나사로란 말입니다.

 

바울이 로마를 정복하고 개선장군이 되어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쓸쓸히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독방에서 잡초처럼 죽어가는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니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여 그리스도에게로 돌아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돌을 던지고 이단이라고 하며 손가락질을 하고 급기야는 목숨까지 거둬가는 일이란 말입니다.

 

누가 신앙을 기쁨이라고 했나요?

신앙은 기쁨이 아니라 아픔입니다.

육으로서는 도무지 감당 할 수 없는 아픔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에서 땀이 핏방울 되듯이 기도한 것이 쑈가 아닙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모세혈관들이 터져서 피가 땀으로 배출 되었겠습니까?

 

예수님도 아파한 그 길을 한 걸음 두 걸음 걸어야 하는 것이 신자가 가야 할 길입니다.

우리가 감당 할 수 없기 때문에 성령을 주셔서 돕도록 하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도우셔도 아픔을 없애 주는 도우심이 아니고 아픔 속에서 참아내는 도우심입니다.

 

그러니 아픔은 고스란히 감내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과, 인간이 기뻐하는 것은 정반대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우리는 성경 속에서 이 다르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해요.

 

히 11장에 사람들이 이 다름에 속한 사람들이거든요.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그린 그림이 있거든요.

에녹에게도 그린 그림이 있어요.

그 그림을 찾아봅시다.

 

성경엔 에녹의 기록이 그리 많지 않아요.

그래서 추적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짧은 구절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에녹에게 그린 그림을 찾아야 합니다.

 

먼저 최초로 에녹에 대한 기록을 살펴봅시다.

 

창 5:21-24=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23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이건 뭡니까?

아니 고작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나라로 올라간 사람의 기록치고는 너무도 단순하다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아니 자식 낳고 산 것이야 모든 사람들이 다하는 것인데 그게 무슨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고 칭찬받을 일입니까?

알다시피 에녹은 365세를 세상에서 살았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성경은 에녹의 일생을 둘로 분리하여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믿음에 비밀이 있어요.

 

자세히 보세요.

에녹은‘므드셀라’를 낳고 하나님과 300년을 동행을 했다고 하지요.

에녹이‘므드셀라’를 65세에 낳았다고 합니다.

 

그럼 에녹은‘므드셀라’는 낳기 전까지는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단 말이 되지요.

정황상으로 그렇게 볼 수 있단 말입니다.

만약 처음부터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한다면 굳이 에녹은‘므드셀라’를 낳고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 하였다고 말할 필요가 없을 것 아닙니까?

 

그렇잖아요.

본문을 그대로 해석하면 에녹이‘므드셀라’를 낳기 전까지는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는데,‘므드셀라’는 낳고 난 후에 뭔가 마음에 변화가 생겨서 하나님과 동행 한 것이라는 해석이 되잖아요.

이해가 됩니까?

 

그러니 에녹은‘므드셀라’를 낳은 후부터 변화 된 다른 삶을 살았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변화된 다른 삶이란? 개과천선하였다는 말 보다는 다른 가치관으로 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전에는 자기를 위해 살았는데 이젠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았단 말입니다.

 

그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게 된 배경엔‘므드셀라’가 있는 것입니다.

‘므드셀라’에게 비밀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65년을 살았던 에녹이 갑자기‘므드셀라’를 낳고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의 인명이나, 지명이나, 사건 등은 모두가 영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즉 하나님에 메시지가 담겨져 있다는 말입니다.

그냥 이름이 아니고 그 이름 속에 하나님이 행할 일들이 담겨져 있다는 뜻입니다.

 

모세를 예로 듭시다.

“모세” 라는 이름의 뜻은 “물에서 건졌다” 라는 뜻이지요.

이는 장차 모세를 통하여서 홍해 바다를 건너게 할 것이란 의미가 포함되어 있어요.

 

“예수” 라는 이름이 뭐라고 했나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라고 했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인류 모든 사람을 구원한 것이 아니고 오직 자기백성만 구원한 것이잖아요.

 

그럼 ‘므드셀라’ 라는 이름에도 뜻이 담겨져 있겠지요.

맞아요.

“므드셀라”라는 이름 속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첫째로는, “그가 죽으면 쏟아진다” 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고,

둘째로는, “새로운 세계가 확장된다” 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두 가지를 조합해서 해석하면

“므드셀라가 죽으면 재앙이 쏟아지고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라는 얘기가 됩니다.

이러면 “므드셀라” 라는 이름은 하나의 “징조” 가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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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은 강혜령이라는 분이 댓글로 므드셀라의 죽음과 홍수 심판을 계산하여 주신 것을 참고로 첨언하여서 올려놓았습니다.

 

므두셀라가 187세에 라멕을 낳고,

라멕이 182세에 노아를 낳고,

노아가 600살 때 홍수가 났어요.

(노아가 950세를 살았는데 홍수 후에 350년을 더 살았다고 했거든요).

 

므두셀라는 969살을 살았으니까

므두셀라는 라멕을 낳은 후에 782년을 더 산거구요. (969-187=782)

라멕은 777살에 죽었고(아빠보다 5년 일찍 죽었네요)

182살에 노아를 낳고 595년 더 살았대요,

 

노아가 600살에 홍수가 났는데...

라멕 죽고 5년 후에 = 므두셀라 죽은 해에 (와우!) ...진짜 났어요.

홍수가... 진짜 이게 딱 맞을 거라고 생각 못했거든요;;

 

어떻게 므두셀라 이름 뜻이랑 착착 맞게 이뤄지고 187, 182이런 걸 어쩜 이리도 고대로 보관해놨는지 새삼 말이 안나오게 신기해요..ㅋㅋ아 진짜.. 놀라우신 하나님! (당연한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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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으로 하여금 므드셀라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보게 한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에녹으로 하여금 ‘므드셀라’는 그냥 자식이 아니라 “예표적인 자식” 이라는 것을 알게 한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을 받으면 긴장하지 아니할 수가 없어요.

이건 뭔가 불길한 이야기이지요.

종말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으니까요.

그러니 에녹이‘므드셀라’를 부를 때마다 이 아이가 죽으면 종말이지 라는 긴장감이 들겠지요.

 

이름이란 가장 많이 불려지는 거잖아요.

그러니 에녹은 자식을 부를 때마다 하나님의 계시가 번뜩 번뜩 생각나는 겁니다.

에녹은 ‘므드셀라’는 낳기 전 까지만 해도 종말은 무슨 놈의 종말이야!

이렇게 살기 좋은 세상인데! 라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므드셀라’를 낳고 나선 정신이 번쩍 든 겁니다.

이거 장난이 아닌데!

하나님께서 뭔가 준비하고 있는 모양이네!

이 세상을 쓸어버릴 생각을 하고 계신가 보다! 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에서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을 역으로 추적해서 보면 에녹도 그 당시의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았다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걸 본문에선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녹은 ‘므드셀라’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이 에녹으로 하여금 종말을 보게 하였고 다른 삶을 살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몰랐는데 에녹은 믿음으로 안 것입니다.

 

그러니‘므드셀라’가 죽으면 장차 일어날 일과 새로운 세상을 본 것이 에녹의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이 오고 나자 에녹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막연하던 하나님이 분명하게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던 하나님이 실제 하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밖에서 신선놀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세상 구석 하나 하나를 다 살피고 다스린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은 인간에게 맡긴 적이 없습니다.

 

천주교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하나님은 세상을 인간들에게 맡긴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천주교에선 하나님께서 세상을 인간에게 맡겼다고 하거든요.

그래서 그들은 신자는 세상을 아름답게 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정의구현사제단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세상을 깨끗하고 아름답게 만들자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라고 하지 않았어요.

도리어 세상은 불타니 빨리 도망하라고 했어요.

천주교는 인본주의로 성경을 해석하기 때문에 예수 중심이 아니라 인간 중심의 신학이 나오는 겁니다.

 

인간을 위하여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인간의 시다바리가 되는 거지요.

그러니 맨 날 밥 먹고 인권 운동한다고 하는 겁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하나님 입장에선 인권은 없어요.

아니 저주 받은 죄인에게 무슨 인권이 있어요.

그냥 바퀴벌레 밟듯이 죽여도 아무런 항의를 할 수가 없어요.

그게 죄인의 운명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자는 하나님 살려 주세요 라고 말하는 것도 교만임을 알아요.

 

에녹도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에녹 역시도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세상, 범죄 없는 세상을 만들자고 했을 겁니다.

정의구현사제단처럼 정의를 외치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을 받고 나선 확 달라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세상을 쓸어버리려고 한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말하고 행동하는 것하고는 상반된 일들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안목으로 세상을 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바로 본 세상은 저주 받아야 할 세상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니 종말을 외치고 다닌 것입니다.

아주 부정적인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걸 신약의 유다가 성령의 감동으로 알았어요.

 

유 1:14-15=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15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유다가 누구인가 하면 혈육으로 따지면 예수님의 동생이에요.

그런 그가 성령의 감동으로 에녹을 보았던 것입니다.

에녹이 무엇을 하였는가 보니 하나님의 심판을 외치고 다녔다는 것입니다.

에녹이 종말을 외치고 다녔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신약 성경에 기록을 남긴 것입니다.

 

사람들은 에녹을 보고 그랬을 겁니다.

미친 사람 같으니라구!

아니 그래 세상을 창조한지가 얼마나 됐다고 종말을 고한단 말인가?

무슨 멀쩡한 하늘에 날 벼락 같은 말을 하고 다닌다고 욕을 하였을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로 난 자들의 특징이 뭔 줄 아세요.

항상 세상을 부정적으로 본다는 겁니다.

세상이 망한다는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즉 인간을 좋게 보지 않아요.

그러니 믿음이 없는 사람 입장에선 재수 없는 인간들이예요.

 

제가 욕을 가장 많이 듣는 이유 중에 하나가 세상을 부정적으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교회를 부정적으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말하면 목사님은 큰 교회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습니까? 라고 해요.

교회가 부흥이 안 되니 그럽니까? 그래요.

그들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 모양입니다.

 

이 사람들은 교회가 부흥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함께하는 증거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히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이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한다는 증거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 사람들은 잘 되고, 잘 되고, 항상 잘 되는 것뿐입니다.

아가미를 크게 벌려라!

그러면 하나님이 채우시리라고 해요.

거기다가 하나님은 보이는 교회가 망하는 것을 원합니다! 라고 하면 난리를 치죠.

 

십자가 복음을 말하면 시큰둥하는 이유는 땅에 말을 하지 않고 하늘에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잘되는 것을 복이라고 해야 좋아라 하는데 맨 날 세상에서 잘되는 것인 복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에 피 흘리심에 의미를 알고 내가 죽어야 할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라고 하면 속으로 재수 없는 말을 한다고 해요.

신경질 나고 불편해하는 마음이 얼굴에 역력히 드러나요.

 

목사들에게도 지금 한창 교회가 부흥되려고 하는데 보이는 교회가 교회가 아니고 보이지 않는 교회가 교회다 라고 하면 너만 잘났냐! 나도 안다! 라고 하면서 싫어해요.

안다고 하면서 싫어한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는 뜻이에요.

안다고 하면 안다는 것으로서의 행동이 나타나야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안다고 하면서 행동은 모르는 것으로 나타내요.

그건 아는 것이 아니지요.

 

여러분이 종말을 안다는 것은 그만큼 욕먹을 일들이 많아졌다는 겁니다.

신자는 세상에서 예수님처럼 욕먹다가 하나님 앞에 가게 되어 있는 운명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팔자가 아주 더러워요.

그게 신자의 팔자예요.

 

암튼 에녹은 ‘므드셀라’를 통하여서 종말이 올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언제 종말이 온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제 심판 할 줄 모른다는 말입니다.

‘므드셀라’가 죽으면 종말이 온다고 했으니까요?

 

그럼 ‘므드셀라’가 태어나자 말자 세상은 종말 속으로 던져진 것이지요.

왜냐하면! ‘므드셀라’가 언제 죽을지 모르잖아요.

1년 살다가 죽을지,

10년 살다가 죽을지,

50년 살다가 죽을지 모르잖아요.

 

그러니 긴장의 하루 하루가 되겠지요.

이 놈이 혹시나 내일 죽을지,

모래 죽을지 모르니까 긴장하지 아니할 수가 없을 것 아닙니까?

아니 몇 년 살다가 죽을 것이니 그 동안 준비해라!

그러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언제 죽을지 몇 년을 살지도 가르쳐 주지 않고 이 아이가 죽으면 종말이 온다 라고 하니 얼마나 불안 불안 하겠습니까?

 

여러분에게 한번 물어 봅시다.

종말이 언제 어느 때 일어날 것이다! 라고 알려 주는 것이 복일까요?

안 알려 주는 것이 복일까요?

 

아니 직설적으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죽을 날짜를 가르쳐 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안 알려 주는게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알려주는 것이 좋다고 한다면!

그러면 아! 내 인생이 앞으로 5년 밖에 안 남았구나!

이제 정신 바짝 차리고 예수님을 잘 믿어야 되겠구나! 라고 하겠어요?

아니면 죽기 이틀 전에 예수를 믿겠어요.

예수를 믿고 안 믿고를 내가 결정 한다고 한다면 말입니다.

 

저 같으면 죽기 이틀 전도 아까워요.

죽는 날 아침에 주여 잘못 했습니다.

내 영혼을 받아 주옵소서! 라고 했을 것입니다.

죄인의 속성상 그럴 수 밖에 없어요.

죄인이 미리 알아서 예 하나님 이제부터 잘 살겠습니다! 라고 하는 인간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주신 축복 중에 내가 죽을 때가 언제인지 안 알려 준 것과 예수님이 언제 재림하실지 날짜를 알려주지 않는 것이 복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죽을 때까지 자기사랑을 버리지 못하는 종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목사님 전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라고 항의할 수도 있을 겁니다.

물론 저도 그렇게 믿고 싶어요.

 

그런데 죄가 여러분 보다 더 쎈 걸! 어찌합니까?

죄가 하나님 뜻대로 살게 하지 않고 내 육신의 본능대로 살게 하는 걸 어찌합니까?

그러니 마음은 미리 미리 준비하고 살 것 같아도 막상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반대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게 죄인입니다.

 

그러니 에녹에게 ‘므드셀라’가 언제 죽을 것인가를 알려 주지 않은 것이 축복인 것입니다.

사태가 이러하니 에녹은 하루 하루 사는게 살 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아요.

하루 하루 하나님을 안 찾을 수가 없어요.

 

세상에 공포감을 잔뜩 줘놓고 하나님을 찾게 한 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리곤 그렇게 해서 하나님 말을 따른 것은 성경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합니다.

 

아니 공포를 주고 하나님을 믿게 한다면 안 믿을 인간이 어디 있겠어요?

다 믿지!

맞아요.

하나님이 지금 공중에 나타나서 너희들 내일 모래 다 죽는다! 라고 하면 지금부터 회개한다고, 난리가 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아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자기 백성들만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세상이 종말이 있다는 것은 믿음을 받은 성도만 알아요.

 

믿음 없는 사람은 종말을 말해도 농담으로 여기고 안 믿어요.

그러나 믿음을 받은 신자는 그 말이 믿어지기 때문에 정신 차리게 되는 것입니다.

정신 차리게 하는 것이 뭔 줄 아세요.

공포심을 주는 겁니다.

 

지금 하나님이 성도들에게만 지옥이 있고 천국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줬어요.

너희들 내 말 안 들으면 지옥에 간다! 라고 해요.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 지금 농담 하십니까?

웃기지 마세요! 라고 해요.

지옥이 있는지 천당이 있는지 죽어 봐야 알지! 라고 해요.

 

그러나 성도는 죽지 않고도 믿음으로 알기 때문에 예! 하나님 조심 하겠습니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교회 나오고 예수 믿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이걸 모르면 교회에 안 옵니다.

예수 안 믿어요.

오늘 같이 좋은 날 어디 놀러 다니지요.

 

그럼에도 여러분이 이 시간 여기 이렇게 고리타분한 곳에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은 믿음이 여러분에게 공포심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공포심을 심어주지 않으면 말을 안 들어요.

 

이런 측면에서 예수 잘 안 믿으면 매를 맞는다는 말이 맞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12장에선 징계라고 하지요.

좌우지간 신자나 자식이나 매가 아니면 말을 듣지 않는게 인간입니다.

곱게 말해서 말 듣는 인간은 세상엔 단 한명도 없어요.

 

그래서 성경도 자식을 초달하라고 하는 겁니다.

지금 학교나 군대나 개판이 되는 것은 매를 안대서 그래요.

그러니 군기도 없고 학교 규율도 없고 개판입니다.

이젠 학생이 선생을 두들겨 패는 시대가 되고 말았어요.

 

군대는 인권으로 세워지는 곳이 아니에요.

기합과 매로 세워지는 곳입니다.

왜인 줄 아세요.

군인은 전쟁을 준비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전쟁터엔 인권이 통하지 않아요.

명령만 있어요.

깡다구만 통해요.

깡다구는 기합과 매를 통해서만 길러지는 것입니다.

 

인권을 말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줄 몰라서 그래요.

인간은 좋게 말해서 말을 들어 쳐 먹는 자가 아니에요.

이상과 현실을 달라요.

 

이상이야 한번 말하면 척척 알아먹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자식들에게 한 번 말하면 열을 알아먹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군인에게 알아서 훈련 잘해라 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면 매를 댈 필요도 없고,,

 

자식 키우면 알잖아요.

이 새끼들이 한 번 말해서 알아 쳐 먹는가?

아니에요.

수없이 싸우고 싸워야 한 번 들을까 말까해요.

그 아이가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자기 안에 또 다른 센 놈이 그렇게 살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반발하고 튕기는 겁니다.

모두가 죄 때문이에요.

이런 인간을 모르기 때문에 인권 운운하는 사람들이 감상주의로 흐르는 것입니다.

감상주의와 현실은 완전히 다름을 알아야 합니다.

 

이건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 말해서 알아먹은 인간이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공포심을 주고 매를 대고 하는 것입니다.

그걸 징계라고 합니다.

 

히 12:6-13=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 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이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9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12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보세요.

하나님이 아들로 대우해 주시는 증거가 징계라고 하잖아요.

징계는 왜? 받습니까?

말 안 들으니 받지요.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들 신앙생활 잘못하면 혼납니다.

교회도 안 오고, 말씀도 모르고, 놀러 다니고, 여러분 마음대로 살아 보세요.

진정으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한다면 어느 날 종용히 병원에서 면회하자고 할 겁니다.

 

멀쩡한 자식이 문제를 일으키거나,

멀쩡한 남편이 죽어버리던가?

건강하다고 믿었던 몸이 이상이 생기던가?

좌우지간 돌발적으로 뭔가 일어날 겁니다.

 

그래서 전 우리 교인들이 지 마음대로 살면 하나님 저 인간 말로 해서 안 되겠네요! 라고 해요.

그러면 하나님이 알아서 해요.

아니 하나님이 자기 자녀에겐 징계를 한다고 했잖아요.

징계를 해야 약속이 맞는 거지요.

예수님이 여러분 마음대로 살라고 십자가에 죽은 줄 아세요.

그래 십자가를 안다고 하면서 그렇게 삽니까?

 

성령은 육신의 소욕을 쳐서 복종케 하지 육신의 소욕대로 살도록 역사하지 않습니다.

물론 여기에 우리 육신이 가만 있지 않고 성령의 소욕대로 살지 못하게 반발을 해요.

성도는 이 두 사이에 끼어서 살기 때문에 곤고한 것입니다.

죄는 항상 육신을 볼모로 활동을 합니다.

그러니 성령 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늘 육으로서 죄를 발견하고 상한 심령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고난인 이유는 성령이라는 시어머니가 성도들 속에서 잔소리를 하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소욕대로 살면 아프게 찔러대요.

그래서 십자가의 의미를 새기게 합니다.

 

여러분이 한번 육신이 편한 대로 이끄는 대로 살아보세요.

성령이 태클을 걸지요.

그래도 안 되면 손 좀 봐 주려고 종용히 면회를 신청합니다.

그러면 육신은 골치 아픈 일들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징계를 통해서 이런 쓰잘데기 없는 일들로 허송세월 보냈다는 것을 책망 받게 되고 돌이키게 되는 겁니다.

돌이킨다는 것은 개과천선 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말 안 들으면 혼 납니다.

이게 하나님 뜻이에요.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를 기존 교회에센 공갈로 이용하니 문제가 되는 겁니다.

바쳐서 복 받고,

열심히 해서 화를 면하라고 하니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주님의 은혜가 고맙고 감사하여서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니고 복을 따내고 화를 모면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신앙이 복을 때내고 화를 면하는 수단으로 전락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우상숭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육과 영은 똑 같은 징계를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게 하는 것과, 복을 따내고 화를 면하고자 하는 것으로 전혀 다른 양상의 신앙생활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암튼 교회에선 죽는다는 말과 지옥 이야기를 많이 해야 해요.

그러면 영에 속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은 달리 반응을 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육에 대처 방법을 찾고자 하고,

영에 속한 사람은 영에 대처 방법을 찾게 됩니다.

 

그런데 육에 속한 인간들은 지옥 소리 그만하고 죽는다는 소리 그만 좀 하라고 해요.

왜? 좋고 좋은 말이 그렇게 많은데 하필이면 기분 나쁘고 재수 없는 말을 하느냐고 짜증내요.

집안에 마누라나 새끼들도 죽는다는 말하면 화를 내요.

이건 신앙을 실제로 여기지 않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육신에 미련이 있고 세상에 미련이 있기 때문에 종말이고 죽음을 말하면 짜증내는 겁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이란? 종말을 행해서 가면서도 종말에 대하여 준비하지 않고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러더군요.

10대에는 시간이 10Km 가고,

20대엔 20Km 가고,

40대엔 40Km 가고,

60대엔 60Km 간다고,,,,

 

이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젊었을 땐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서 안달을 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세월이 어찌 그리 빨리 가는지 모르겠어요.

금새 금새 주일이 돌아오고 금새 일 년이 지나요.

 

벌써 2008년도 몇 일 안 남았어요.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삶에 집착이 강해져요.

젊었을 땐 까짓것 죽으면 죽지! 라고 했는데 늙어갈 수록 죽는다는 말을 기피하게 됩니다.

 

종말이 가까워지면 속된 말로 죽을 준비를 해야 함에도 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어리석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죄 때문이에요.

오직 인간만이 이 어리석은 삶을 살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에게 성령을 주셔서 늙은이에게 꿈을 준다고 합니다.

 

행 2:17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늙은이란? 나이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종말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모든 성도를 지칭하는 말이라고도 보아야 합니다.

성령이 임하면 세상에 대하여서는 미련이 사라지고 하늘에 대한 소망이 생기게 됩니다.

 

성도는 성령이 꿈을 주기 때문에 육신에 미련을 버리게 합니다.

그래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성도에게 있어 죽음이란? 세상에서 퇴거하고 천국에 전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으면 꿈을 꾼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지만 꿈을 꾸며 살게 합니다.

예수님이 가셨으니 이제 언제 올 줄 모르잖아요.

 

그러니 긴장하면서 살아야합니다.

긴장하라는 것은 주님이 지금 보고 계신다! 라는 자세로 살란 말입니다.

이렇게 산 사람의 비유가 바로 달란트 비유입니다.

 

달란트 비유를 보면 주인이 멀리 떠나면서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기지요.

그러자 어떤 종들은 열심히 일하고 남기는 삶을 살고, 어떤 놈은 주인이 없다고 놀고 농땡이 치고 살았어요.

달란트를 남긴 사람은 주인이 있건 없건 주인을 의식하고 산 것입니다.

그러나 남기지 못한 사람은 주인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에 농땡이를 친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주님이 보고 계시다는 자세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에녹이 그렇게 살았어요.

그러니 종말은 지금 준비하는 것이지 나중에 준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말을 준비하며 사는 것을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 언제 끝날지 모릅니다.

요즘같이 사고 많은 세상에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요.

아직 젊은데 예수는 나중에 믿어도 되겠지 라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내일 아침 출근길에 교통사고로 죽을지 어떻게 압니까?

아니면 밤중에 자는데 하나님이 가자 할지 어떻게 아느냐 말입니다.

 

목숨은 우리가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관리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이라는 날에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 날 그 날 주님 앞에 선다는 자세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방학숙제 한꺼번에 몰아서 하듯 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루 하루 일기를 쓰듯이 그 날 그 날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꺼번에 감사하려고 하지 말고 그 날 그 날 감사하세요.

믿음은 항상 현재이어야 합니다.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지금 현재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어제나 내일은 죽은 시간입니다.

현재 만이 살아있는 시간입니다.

 

산 자라 함은 기름을 준비한 처녀와 같이 또는 주인을 늘 의식하고 달란트를 남긴 사람들과 같이 신앙을 현재화 하여 살아가는 성도를 말합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인 히브리서에 에녹이 기록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에녹이 구약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현재의 이야기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승천 하실 때 제자들에게 말씀했어요.

내가 다시 오리라고,,,

 

이제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릅니다.

아무도 주님이 오실 날을 알지 못합니다.

알려고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날과 그 때는 하나님만 알고 계십니다.

왜? 그 날과 그 때를 알려 주지 않았을까요?

이는 항상 주님이 금방이라도 오실 것이라는 생각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동화 속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실제이듯이 믿음 또한 실제이어야 합니다.

반드시 오십니다.

약속했잖아요.

 

성도는 약속을 믿는 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을 그대로 믿고 살아야지요.

약속을 믿고 안다고 하면서 세상에서 천년만년 살 것이라고 집착하면 안 되지요.

믿음이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은, 믿는 척하는 것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가장 귀하다고 여기는 것을 위해 삶을 투자하고 살아갑니다.

 

에녹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세계를 보았기 때문에 삶이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므드셀라를 통하여서 계시하신 하나님의 뜻을 농담으로 여기지 않고 실제로 믿고 살았습니다.

실제로 살다보니 세상 것과는 자연히 멀어진 삶을 산 것입니다.

 

므드셀라를 얻기 전 까지만 해도 즉 믿음이 없었을 때는 자기를 위한 육신을 좇아가는 삶을 살았지만 믿음을 갖고 나서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이란? 종말을 알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복음을 아는 성도라면 자연히 복음을 알기 전의 삶과 복음을 알고 난 후의 삶의 자세가 달라져야 합니다.

이것은 강요되어질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증거되어져야 할 것들입니다.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은 행함이지만 믿음이 만들어 내는 것은 순종입니다.

 

인간의 몸은 마음 속에 있는 것을 찾아가게 되어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할 때는 피곤함도 힘듦도 모릅니다.

그 일이 기쁨이고 의미이기 때문에 피곤이라 하지 않고 즐긴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이 힘들다고 안하고,

피곤하다고 안하고,

바쁘다고 안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이 연약하다느니, 바쁘다느니 하며 게으름을 피우는 것은 다 핑계이지 실상은 그 속에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으니 머리로는 천국을 그리면서도, 몸은 세상을 좇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을 농담으로 여기니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지옥이 안 믿어지니 그렇게 사는 겁니다.

 

올바른 믿음은 반드시 믿는다는 삶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에녹은 믿는다는 것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으로 믿음의 결과로 나타내 보여 주었습니다.

에녹처럼 살으라는 것이 아니고 믿음이 있으면 에녹과 같은 삶을 살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결국 그 삶이 그 믿음을 증거하는 셈입니다.

이걸 야고보서에선 믿음에 따른 행함이라고 합니다.

 

강요된 삶은 남의 삶이지 자기 삶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목사가 이래라 저래라 간섭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믿는 것을 몸으로 그려내야 신앙생활입니다.

그럼 무엇을 믿느냐가 남겠지요.

 

믿습니다! 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믿습니까? 가 중요합니다.

그럼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라고 했으니 그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내어 놓아 보십시오.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과 동일한 것인지 확인해 보세요.

하나님과 다른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믿음이라고 우기면 안 돼요.

 

믿음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에녹 시대엔 므드셀라가 죽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약속입니다.

 

누가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립니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맺은 새 언약을 믿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새 언약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 안이 있는 성도는 주님을 사모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얻어진 구원이기에 예수님의 재림이 더욱 더 사모가 되는 것입니다.

눈물 없고 고통 없는 그 세상을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믿음에 선진들이 믿음으로 하늘에 있는 본향을 그리며 이 세상을 나그네와 행인처럼 살았듯이 우리도 그런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삶이 조금은 불편하고 힘들더라도 주님의 약속을 믿고 보이지 않는 그 나라를 믿음으로 사모하며 사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신 믿음으로 종말을 알고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심을 소망 삼고 세상을 이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하늘빛사랑 blog https://blog.daum.net/day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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