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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성경강해)111강. 가짜가 진짜를 죽이고 진짜의 죽음으로 살아나는 가짜들 (요 18:12-27)

by coroa 2022. 1. 22.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111강. 가짜가 진짜를 죽이고 진짜의 죽음으로 살아나는 가짜들 (요 18:12-27)

-.정낙원 목사

 

요 18:12-27=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하속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13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14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 권고하던 자러라 15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16 베드로는 문 밖에 섰는지라 대제사장과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왔더니 17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18 그 때가 추운고로 종과 하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19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2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21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보라 저희가 나의 하던 말을 아느니라 22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는 하속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가로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2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 24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 25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아니라 하니 26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베어 버리운 사람의 일가라 가로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던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27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성경은 이 세상을 일컬어 어둠이라고 합니다.

어둠이란?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성경에서 어둠에 의미는 하나님에 대하여 무지하다는 뜻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죽은 상태를 말하기도 합니다.

 

성경은 이런 상태를 죄라고 합니다.

죄인이란 하나님에 대하여 죽은 자를 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자연히 하나님에 대하여 무지합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무지하므로 인간들이 하는 일들은 곧 하나님과 대적하는 일이 되고 맙니다.

 

다른 말로 인간들이 하는 모든 일이 죄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자신들이 하는 일이 죄인지를 모릅니다.

인간 입장에서는 옳은 일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짓을 하고서도 회개치 않는 것입니다.

 

오늘은 어둠 속에서 일어난 예수님의 재판 사건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고자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밤에 붙잡혀서 재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 하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통상적으로는 밤에는 재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밤에 재판을 받았습니다.

왜? 밤에 붙잡히고 밤에 재판을 받게 되었는가요?

이는 밤을 통하여서 뭔가 말해주고자 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서 예수님이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하시면서 가룟 유다에게 떡을 주시면서 네가 할 일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마귀가 가룟 유다 속으로 쏙 들어가서 예수를 팔아 버리는 일을 하게 됩니다.

이 일이 밤에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왜? 밤에 붙잡히게 하고 밤에 재판을 받게 하셨을까요?

이는 예수님을 심판하는 자들이 어둠이라는 뜻입니다.

자칭 하나님을 섬기는 최고의 수장인 대 제사장이라는 자가 어둠이기 때문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단이라고 정죄를 당하고 죽음에 넘기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두는 밤이 갖는 영적 상태를 고발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밤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가지고서 이 세상의 본질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 백성들의 영적 상태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이 영적으로 소경이니까 예수님을 죽이고자 밤에 재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이 어떤 곳인가 하면 밤이에요.

어둠이에요.

하나님을 몰라요.

하나님을 모르니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죽이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역리라고 합니다.

역리란? 도리가 아니란 말입니다.

인간들이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순리대로 라고 한다면 제사장들이 예수님으로부터 판단을 받아야 할 자들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판단을 받아야 할 자들이 도리어 예수님을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판단을 받아야 할 자들이 도리어 하나님을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죄 아래 있는 세상이에요.

 

그래서 바울은 죄인의 특징을 순리를 역리로 바꾸어 사는 자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장을 봅시다.

 

롬 1:18-27=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19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둔하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25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 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26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 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자들에게 임한다고 하지요.

이 세상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어요.

이는 불의로 진리를 막고 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불의로 진리를 막고 있나요?

이는 하나님을 섬겨야 할 자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자기 정욕으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상을 숭배하고 마음에 일어나는 정욕으로 동성애와 같은 순리를 역리로 바꾸는 일을 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자들이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이성간에 사랑을 하라고 했는데 동성간에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우상숭배나 동성애나 영적 의미는 동일한 것입니다.

모두가 생명과 상관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성애란?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고,

여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허락한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가 사랑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는 남자와 여자와의 사랑을 가지고서 하나님과 인간의 사랑이야기를 말해주고자 함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사랑이야기는 예수님과 성도의 사랑이야기를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피조물은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창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사람)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사람(자기)이 사람(자기)을 사랑하는 것이 영적으로 동성애에요.

 

우리는 하나님(예수님)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지 않는 동성간의 사랑행위는 쾌락이고 정욕을 위한 것이에요.

생명의 역사는 남자와 여자의 사랑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예수님이 남자이고 우리는 여자에요.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신 예수님만을 사랑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생명에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만을 사랑하도록 창조가 되었어요.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 우리를 사랑하고 있어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인간을 사랑하고 있어요.

창조의 목적대로 살고 있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창조의 목적에 합당한 순리대로 살지 않고 그에 반하는 역리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육적으로 나타나는 동성애를 가지고 영적인 역리 현상을 이야기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죄가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의 순리를 역리로 바꾸어서 나타나게 하는 하나의 병적인 현상들인 것입니다.

죄가 이러한 병적 현상들을 낳고 있는 것입니다.

 

죄가 하나님이 정한 순리를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역리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죄가 몰고 온 역리가 오늘 본문에서와 같이 인간들이 밤에 하나님(예수님)을 재판하고 죽이는 일을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시작부터 어려운 말을 했는데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구약 창세기 41장에 보면 바로 왕이 역리의 꿈을 꿉니다.

 

바로 왕이 두 가지로 꿈을 꾸는데 그 내용은 동일합니다.

어떤 꿈인가 하면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하수에서 올라와 갈밭에서 풀을 뜯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흉악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하수에서 올라와서는 아름답고 살진 소를 잡아먹어 버립니다.

 

바로가 깜작 놀라서 꿈을 깹니다.

이상하다고 고개를 갸우뚱 하고서는 다시 잠을 청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옵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 세약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오더니 앞서 있던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켜 버립니다.

 

바로가 또 놀라서 그만 잠이 깨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로가 그 꿈을 모르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전국에 방을 부칩니다.

자신의 꿈을 해몽할 박사들을 찾았지만 허사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예전에 감옥에 있다가 복직이 된 술 맡은 관원장이 자기가 감옥에 있을 때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을 요셉이라는 죄수가 해몽을 해 주었는데 그대로 되었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자 바로가 요셉을 왕궁으로 부릅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꾼 꿈을 해몽해 달라고 합니다.

 

이에 요셉이 바로의 꿈을 해몽하기를 일곱 해 풍년이 들다가 일곱 해 흉년이 들 것이니 일곱 해 풍년 기간 동안에 장차 닥칠 흉년을 대비하여야 한다고 알려줍니다.

그러자 바로가 요셉의 총명은 신에 감동이 된 것이라고 하면서 애굽에 총리를 시켜서 장차 닥칠 기근으로부터 지켜내게 하였습니다.

 

이건 단순히 기근에서 해결하는 꿈이 아니에요.

이 세상의 영적 상태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살진 암소가 갈밭에서 풀을 뜯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있다는 뜻입니다.

 

갈밭은 갈대밭을 말하는데 그 당시에 갈대 껍질은 성경을 필사하는데 사용을 하였어요.

이걸 파피루스라고 합니다.

그러니 일곱 암소가 갈밭에서 풀을 뜯는다는 것은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회에서 하나님 말씀을 먹고 있다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 11장을 보면 두 증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지팡이 같은 갈대를 받지요.

이것은 말씀을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갈밭에서 풀을 뜯는 실찐 일곱 암소는 언약 백성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약 백성들이 죽음을 당합니다.

누구에게 죽임을 당합니까?

말씀을 먹지 못한 육적 신자들에게 죽임 당합니다.

육적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못하여서 패역하고 흉악해요.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일을 자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의 꿈을 보면 역리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살찐 소는 힘이 있고 파리한 소는 힘이 없습니다.

힘 있는 소와 힘 없는 소가 싸우면 당연히 힘 있는 소가 이깁니다.

그런데 실상은 힘 없는 소가 힘 있는 소를 잡아먹고 맙니다.

 

구약 내내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언약을 받은 자들이 언약을 받지 못한 자들로부터 핍박을 당하였습니다.

요셉을 보세요.

요셉은 언약으로 난 자입니다.

그런데 형제들에게 버려짐을 당하였습니다.

 

이러한 맥(脈)이 예수님이 오셨을 때도 그대로 이스라엘에게 나타났습니다.

요셉은 예수님을 예표하는 인물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영적 어둠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로의 꿈과 같은 역리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어요.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을 먹은 살진 일곱 암소와 같습니다.

예수님을 재판하고 죽이는 바리새인들은 파리한 일곱 암소인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말씀을 먹지 못하여서 파리하고 패역한 포행자들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죽이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바로의 꿈은 이 세상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꿈이에요.

이 세상이 역리적인 곳입니다.

 

진리에 속한 자들이 비 진리에 속한 자들로부터 죽임을 당하는 곳이에요.

선한 사람이 악한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곳입니다.

의인이 악인으로부터 핍박을 받고 죽임당하는 곳이 이 세상입니다.

이 모두가 이 세상은 죄 아래 가두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죄가 주장하면 순리 대신 역리로 살게 하고!

진리 대신 비진리로 살게 하고!

생명의 원리 대신 죽음의 원리로 살게 해요.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면 파리한 소처럼 복음을 방해하는 자가 되어요.

예수를 죽이는 일을 하게 된단 말입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은 남에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유대인들처럼 밤에 예수님을 재판할 수가 있어져요.

그러니 선 줄로 착각하지 말고 항상 넘어 질까 조심하면서 경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 다 안다고 교만하여서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지 마세요.

 

세상은 죄 아래 놓여 있습니다.

인간은 죄 아래서 태어납니다.

그리고는 죄가 주는 사고로 살아갑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역리 현상으로 다스려져 가는 곳이란 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변을 보세요.

수많은 역리 현상들을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아주 쉬운 말로 법대로 하면 손해를 보는 세상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오죽하면 법대로 살지 말라고 하겠습니까?

 

예전에 저희 교회에 울산에서 제일 큰 백화점을 경영하시던 전무님이 나오신 적이 있었어요.

이 분이 하시는 말씀이 자기는 자기 자식들에게 법을 어기는 방법을 알려 준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에서는 법을 지키면서 회사를 경영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법을 지키면 반드시 손해를 본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식들에게 탈법하는 법을 가르친다고 해요.

제가 하도 의아해서 왜? 그러느냐고 물어 보았어요.

그 분이 하는 말이 자신은 정직하게 회사를 경영하다가 바보 취급을 당하고 손해를 보고 결국에는 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백화점을 경영 할 때 한 때는 전국에서 제일 많은 매출을 올렸다고 합니다.

서울의 강남에 있는 백화점보다도 매출이 많았다고 해요.

그런데 어느 날 자금 회전이 되지 않아서 부도가 나 다른 회사로 인수 합병을 당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이 분이 그 백화점에 전무로 계셨는데 자신은 탈법하지 않고 준법으로 경영을 했다고 해요.

편법을 쓰지 않고 솔직하고 투명하게 하였다고 해요.

그런데 편법을 쓰는 다른 회사에게 합병을 당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어디까지 그 분의 이야기이니까 사실 여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 분의 이야기 중에 오늘 우리가 살펴 볼 내용에 참고가 될 만한 것이 있어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 분의 말이 뭔가요?

세상에서는 정직하게 살면 망하다는 이야기잖아요.

그래서 자식에서 정직하게 살지 말고 법을 어길 줄 알아야 살 수가 있다고 가르친다고 하잖아요.

 

지난번 대선에 안철수 씨가 대통령을 하겠다고 나왔다가 중간에 포기하였잖아요.

왜? 중간에 포기했나요?

자신의 순수성이 인정받지 못하였기 때문이에요.

이 양반이 너무도 순진해요.

자신의 순진함이 정치판에서 먹힐 줄 알았어요.

 

그런데 단일화 과정에서 문재인 씨에게 먹히고 말았지요.

자신의 지지도가 훨씬 높은데도 지지도가 낮은 사람에게 먹히고 말았어요.

문재인 씨가 몸을 담고 있는 곳에는 정치판에서 잔뼈가 굵은 온갖 술수에 능한 달고 달은 천년 묵은 이무기들이 있는 곳이에요.

그 곳은 있는 사람들은 순진함으로 살다간 어느 귀신에게 잡혀 먹을 줄 모른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여서 산전수전을 거치고 공중전까지 다 겪은 늙은 여우들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순진한 철수 씨가 멋모르고 행하다가 죽임 당하고 말았어요.

정치가 뭔 줄 아세요.

정치판은 정의가 불의에게 잡아먹히는 곳이에요.

마치 바로의 꿈처럼 살찐 소가 파리한 소에게 잡혀 먹히는 곳이 정치 세계에요.

 

정치판은 세상의 축소판이에요.

이 세상 자체가 불의가 정의를 잡아먹는 곳이에요.

비 진리가 진리로 행세하는 세계에요.

진리는 살 수가 없는 곳이에요.

그래서 진리에 속한 자들은 어김없이 죽임을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어떤 곳인가 하면 어둠이 빛을 잡아먹는 곳이에요.

상식적으로 하면 빛이 어둠을 잡아먹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렇지가 않아요.

역설적이에요.

세상은 빛까지 잡아먹는 블랙홀이에요.

 

오늘 본문이 이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어요.

 

예수님께서 대 제사장에게 재판을 받는 사건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간에게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판단을 받아야 하는데 도리어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판단을 받고 있어요.

그리고 틀렸다고 하면서 죽임을 당합니다.

참으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일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을까요?

이 모두가 죄 때문입니다. 

어둠이라서 그럽니다.

죄가 주객을 전도 시켜 놓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 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죄란? 자기 주제를 모르는 겁니다.

자기 주제를 모르기 때문에 죄인입니다.

자기 주제를 모르니까 피조물이 창조주를 재판하여서 이단이라고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미쳤다고 합니다.

 

호세아 9장을 봅시다.

 

호 9:7-9= “형벌의 날이 이르렀고 보응의 날이 임한 것을 이스라엘이 알지라 선지자가 어리석었고 신에 감동하는 자가 미쳤나니 이는 네 죄악이 많고 네 원한이 큼이니라 8 에브라임은 내 하나님의 파수꾼이어늘 선지자는 그 모든 행위에 새 잡는 자의 그물 같고 또 그 하나님의 전에서 원한을 품었도다 9 저희는 기브아의 시대와 같이 심히 패괴한지라 여호와께서 그 악을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리라”

 

형벌의 날이 이르렀다고 합니다.

왜? 형벌이냐 하면 선지자가 미쳤기 때문입니다.

파수꾼들이 새를 잡는 그물과 같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원한을 품고 사람들을 사냥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을 재판하는 자들이 미쳤어요.

대 제사장이라고 한다면 파수꾼이에요.

그런데 미쳤어요.

그러니 예수님을 사냥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인은 미친 자들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미친 짓을 하는 것입니다.

이 미친 짓을 제일 먼저 누가 했는가 하면 아담과 하와가 했어요.

그 중심에 뱀이 있었어요.

아담과 하와가 왜? 선악과를 따 먹었나요?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입니다.

 

뱀이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고 하니까 홀라당 따 먹은 겁니다.

피조물이 창조주가 되고자 했어요.

이게 미친 짓인 겁니다.

 

뱀에 말을 들으면 미쳐버려요.

지금도 뱀의 말을 들으면 미친 짓을 해요.

여기서 미친 짓이란? 자기를 낳아준 창조주를 죽이는 일을 한단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인간들이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심문하고 재판하여서 이단이라고 정죄하여서 죽이는 일들을 하고 있잖아요.

이게 바로 미친 짓이에요.

 

예수님께서 자신을 몰라보는 자들을 독사새끼라고 하였어요.

독사라는 말은 원래 살모사 라는 말이에요.

살모사가 뭔 줄 아세요.

어미를 잡아먹은 놈이란 뜻이에요.

 

어미란? 자신을 낳아준 분을 말해요.

인간들의 어미는 누구인가요?

우리를 낳아준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우리를 낳아 주었어요.

우리는 예수님에 의해서 창조가 되었어요.

 

로마서와 요한복음을 봅시다.

 

롬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요 1:10-11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만물이 누구로부터 나왔다고 합니까?

주에게서 나왔다고 하지요.

그리고 주로 말미암아 살다가 주께로 돌아간다고 하지요.

여기서 주란? 예수님을 말해요.

 

그럼 만물을 낳아준 분이 누구입니까?

주님이에요.

그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셨어요.

 

그런데 세상이 주님을 알아봅니까?

몰라봅니까?

몰라보지요.

 

이는 자기를 낳아준 어미를 몰라보는 것이에요.

몰라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도리어 자기를 낳아준 어미를 죽여 버렸어요.

그러니 예수님이 너희는 살모사 새끼들이라는 말이 맞지요.

 

이건 자식들을 키워보면 대번에 알 수가 있어요.

자식들이 자기를 낳아주고 키워주고 한 부모를 가장 우습게 여기잖아요.

만만한 게 부모잖아요.

이게 모두가 그 속에 살모사가 들어 있어서 그래요.

 

우리도 우리 부모에게 그랬어요.

우리가 우리 부모에게 한 것을 그대로 자식들에게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식을 야속하다고 할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우리의 부모님에게 하던 짓을 지금 우리 자식들이 그대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에서 죄를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걸 우리 신앙에 적용해 봅시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서 입니다.

하나님이 뜻이 있어서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예수가 믿어지게 해 주셨어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우리의 소원이 아니고 하나님의 소원이에요.

그러니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바탕에는 우리의 소원이 없어요.

오로지 하나님의 소원만 있을 뿐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소원을 이루고자 예수를 믿고 있어요.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우리 소원을 안 들어 준다고 악악대고 있어요.

이건 주객이 전도가 된 것입니다.

 

우린 피조물이에요.

피조물은 창조주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자들이에요.

우리는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창조가 되었어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필요를 위해서 하나님을 찾고 있어요.

죄가 하나님을 수단으로 이용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수단에 하나님이 부응해 주지 않으면 하나님도 버려요.

 

오늘 본문 식으로 자기들 생각하고 다르다고 예수님을 이단이라고 정죄하고 심판하고서 죽여 버려요.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을 한 밤 중에 잡아서 재판을 합니까?

그것도 피조물이 창조주를 판단하고 죽이는 일을 자행하고 있습니까?

무지해서 그래요.

 

이건 불법이에요.

어둠이니까 재판을 한 밤중에 하는 것입니다.

뭐가 그리 급해서 증인도 없이 일방적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는 예수를 빨리 처단을 하여야 자기들이 바라는 일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살아 있으면 자기들에게 해(害)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빨리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이 모두가 자기가 어떤 자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자기 주제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모르니까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이단이라고 하면서 죽이는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주제를 모르면 겁 대가리가 없어져요.

겁은 상대를 알 때 나타납니다.

어린 아이들은 상대를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보다 큰 아이를 두려워하지 않잖아요.

어린 아이는 사자도 두려워하지 않아요.

자기보다 덩치가 큰 것들도 두려워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자기 주제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이와 같습니다.

자기 주제를 몰라요.

내가 지금 저주를 받아야 할 자인지 아니면 복을 받아야 할 자인지를 몰라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을 자기 삶에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자기 주제를 모르는 것을 영적으로 어둠이라고 합니다.

 

어둠이란? 천지 분간을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 죄인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어둠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자기 생각으로 맞네! 틀리네! 판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창조 기사가 나옵니다.

최초의 세상에 모습이에요.

어떤 모습인가요?

흑암이 깊음 중에 있고 혼돈과 공허하지요.

거기에 하나님 말씀이 떨어집니다.  



그러자 창조 사건이 일어납니다.  

어떤 창조 사건이 일어나는가 하면 흑암이 깊음 중에 있던 세상이 빛과 어둠으로 갈라지는 창조 사건으로 일어납니다.

이렇게 창조가 된 것을 하나님은 저녁에서 아침으로 창조가 되었다고 합니다.

 

알다시피 저녁은 어둠이고 아침은 빛이에요.

그럼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창조는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어둠은 죽음을 상징하고 빛은 생명을 상징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창조란? 어둠 속에서 아무 것도 분간치 못하던 자가 빛을 통하여서 자기가 누구인지 분간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자기 주제를 모르던 자가 자기 주제를 알 수 있는 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무지한 자가 무지에서 벗어나 이제 깨달은 자가 된 것입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에요.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창조는 죽은 자를 살리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린다는 말을 천지 분간을 하게 해 준다는 말로 바꾸어서 말해 봅시다. 

그럼 어떻게 되나요?

천지 분간을 하지 못하던 자가 천지 분간을 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천지 분간을 하게 되었다는 말은 곧 자기 주제를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천지 분간이란 말이 참 재미가 있어요.

천지를 분간한다는 말은 하늘과 땅의 이치를 깨닫는다는 말이에요.

쉬운 말로 하늘이 내려와서 만물을 이루었잖아요.

그럼 만물 속에 사는 우리는 우리를 존재케 하는 하늘을 생각하고 살아야 하잖아요.

 

이건 참고로 이해하세요.

사람의 머리가 왜? 하늘을 이고 사는 줄 아세요.

이는 머리로 하늘을 생각하라는 말이에요.

머리로 하늘을 이고, 발로 땅을 딛고 사는 나는 누구인가?

내 머리 위에 있는 하늘은 도대체 어떤 곳인지를 아는 사람이 천지분간을 하는 사람이에요.

 

사도바울이 그러잖아요.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생각하라고 하잖아요.

땅에 것은 생각지 말라고 하잖아요.

이게 창조함을 입은 자들입니다.

만물이 위로부터 왔으니 위엣 것은 생각하고 사는 자가 성도에요.

 

창조를 다른 말로 거듭남이라고 합니다.

그럼 거듭남을 입은 성도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가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말이 되겠지요.

죄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라고 했으니까!

그럼 죄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이제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되겠지요.

 

구원이 뭐냐?

하나님을 아는 것이에요.

하나님을 알고 나니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된 것입니다.

구원을 입고 보니 내 꼬라지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창세기의 창조는 죄인을 구원하는 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인을 구원하는 것을 창조로 이야기해 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창조냐?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누구인지 알게 되는 창조인 것입니다.

 

이걸 거듭남이라고 합니다.

거듭나면 자신이 죄인인줄 알게 되어요.

이걸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왔다고 합니다.

결국 우리의 구원은 창세기 1장의 창조의 모습인 것입니다.

 

세상을 일컬어 어둠이라고 합니다.

어둠이란? 참과 거짓을 분간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참과 거짓을 분간치 못하면 어찌 될까요?

그럼 참이 거짓으로 취급을 당하고 거짓이 참으로 대접을 받게 되는 역설적인 현상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그러해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 세상은 어둠이에요.

이를 반대로 말하면 이 세상은 하나님에 대하여 어둠이고 소경이에요.

그러니 인간들이 하나님에 대한 일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에 반(反)하는 일들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어둠 아래 있는 세상에서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십니다.

역설을 정설로 바꾸고!

역리를 순리로 바꾸는 일을 하세요.

혼돈된 것을 질서로 되돌리는 일을 하십니다.

이걸 새로운 창조 곧 구원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구원이 일어나는 사건을 역사 속에서 묵시적인 사건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역사 속에서 묵시적인 사건을 일으키는 때를 일컬어 “카이로스” 라고 합니다.

“카이로스”는 하나님이 창세전에 언약을 하신 것을 이 세상에서 실제화 하여서 펼치는 시기를 말해요.

 

오늘 본문에 일어나는 사건도 다 하나님이 창세전에 계획하였던 일들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창세전에 아버지와 가졌던 그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 속하였다고 하지요.

여기서 “때”는 역사적인 시간을 말합니다.

그리고 “기한”이란?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묵시적인 사건을 일으키는 것을 말합니다.

 

역사의 시간인 “때”를 일컬어 “크로노스”라고 합니다.

이건 일반적인 시간을 말해요.

우리들이 인식하는 시간이에요.

 

그런데 이러한 시간 속에 하나님께서 간섭을 하는 어떤 사건이 발생하는 시간이 있어요.

이게 때와 기한이에요.

구약 이스라엘을 예로 들면 그들은 애굽에서 태어나고 애굽에서 자랐어요.

하나님도 애굽에서 알아진 하나님이에요.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하신 언약을 기억하사 그들을 출애굽을 시키는 일을 단행하십니다.

유월절 어린양이 죽고 홍해 바다를 건너는 사건들이 닥칩니다.

언약을 위한 새로운 사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게 되는데 이것을 “카이로스” 라고 합니다.

 

이건 우리에게도 일어나요.

바울을 예로 듭니다.

바울은 예수를 만나기 전에 사울로 살았습니다.

율법 아래서 살았어요.

 

율법 아래 있던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사건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것은 사울이 계획하고 일으킨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일으킨 사건이에요.

사울의 인생사에 하나님이 개입을 하신 것입니다.

이걸 “카이로스”라고 합니다.

 

이러한 “카이로스”는 모든 성도들에게 일어나요.

우리도 사울과 같은 사건들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복음에 대하여 눈을 뜨는 시기가 있단 말입니다.

율법 아래 있던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그리하여 복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게 바로 내 인생이라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간섭하신 묵시적인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묵시적인 일을 하는 것을 “때와 기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카이로스” 라고 합니다.

 

이러한 “카이로스”의 사건을 일으키는 주체가 하나님이에요.

우리의 원대로 일어나지 않고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일어나요.

저와 여러분이 예수를 믿는 것도 다 하나님이 “정한 때”에 일어난 “카이로스”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우리 만남도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카이로스”적인 사건이에요.

 

그래서 성경에서 “때”와 “기한”은 하나님께서 정하신다고 하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간섭하는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건을 일으키는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역사 세계에 오신 예수님도 하나님이 정한 때와 기한이 있어요.

그 때와 기한에 의하여서 다스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도 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와 기한”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예수님이 밤에 붙잡히지요.

그리고 안나스와 가야바에게 밤을 새워가면서 재판을 받습니다.

 

이렇게 역사 속에서 밤이라는 시간에 예수님이 붙잡혀서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는 묵시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것도 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와 “기한”에 의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동안 예수님을 죽이고자 수없이 계획을 세우고 실행코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아직 “때”가 아니라고 하시면서 그들의 계획을 막으셨어요.

 

그러다가 유월절 때가 가까워지자 이번에는 예수님이 죽지 않겠다고 겟세마네에서 기도합니다.

이에 하나님은 천사들을 보내서 예수님을 수종 들게 하여서 십자가에 죽도록 인도하십니다.

이젠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된 것입니다.

그 기한이 찬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죽임을 당하여야 할 때입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죽인다는 것은 곧 세상이 어둠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밤에 붙잡히고 밤에 재판을 받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를 죽이는 자들이 밤에 속한 자들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밤이란? 죽음을 상징해요.

죽음은 마귀가 장악하는 세계에요.

예수님이 밤에 자기 백성들 손에 붙잡혀서 재판을 받고 죽임을 당함으로서 이들을 장악하고 있는 세력이 어둠의 세력인 뱀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예수님을 통하여서 자기 백성들을 장악하고 있는 뱀의 세력을 깨트리는 일을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 뱀을 심판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미끼로 활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구약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불 뱀을 죽이기 위해서 불 뱀에 물리는 사건을 일으킨 것과 같아요.

 

창세기 3장을 보면 여자의 후손이 와서 뱀의 머리를 깨트린다고 하였지요.

뱀의 머리를 깨트린다는 말은 뱀의 권세를 깨트린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음으로서 뱀의 머리를 깨트리는 것입니다.

 

뱀의 권세가 뭔가요?

사망이에요.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뱀이 죄와 사망을 주관해요.

 

뱀은 죄와 사망 권세를 가지고 인간들을 죄의 종으로 사용하고 있어요.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유대인들도 뱀의 사주를 받고 일을 진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룟 유다에게 예수를 팔도록 마귀를 집어넣어서 일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귀의 궤계를 다 읽고 있어요.

예수님은 지금 그 마귀의 궤계를 역(逆)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이루는데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역사 속에서 창세전 언약을 이루는 데에는 반드시 마귀가 필요 하거든요.

그래서 마귀의 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귀의 힘이 곧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도리어 틀린 것으로 드러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귀의 지혜가 악의 지혜임을 만천하에 드러나게 하십니다.

그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안에 숨겨져 있어요.

 

뱀은 예수님을 죽이면 이기는 줄 알았어요.

힘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방해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어요.

그래서 세상 힘을 동원하여 예수님을 죽이도록 한 것입니다.

 

이게 뱀의 지혜에요.

그런데 이 지혜가 바로 어둠의 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예수를 죽게 하는 것인 줄 뱀을 꿈에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을 봅시다.

 

고전 2:1-9=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7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 하였으리라 9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사도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바울은 율법에 특심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예수쟁이들을 죽이는 일에 앞장을 선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 율법 신앙으로부터 빠져 나옵니다.

죄인이 구원을 받는 것이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거저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적극적으로 자기 동족들에게 율법 신앙이 하나님 앞에 원수 된 신앙이라고 알리는 일에 앞장을 섭니다.

바리새인들 입장에서는 바울은 변절자이고 유대인의 원수에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이단이라고 죽였어요.

그런데 그 예수님이 하는 말을 바울이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밉겠어요.

 

하지만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그 어떤 핍박이 닥쳐도 죄인이 구원을 받는 것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가 지금 읽은 고린도전서 2장의 이야기에요.

 

고린도전서 2장에서 뭐라고 합니까?

자신은 십자가 도만 전한다고 하지요.

그런데 그 십자가 도가 발생하게 된 것은 사람들의 지혜가 틀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인간들 딴에는 지혜롭다고 한 일인데 그것이 어리석음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인간들이 영적으로 어둠이고 소경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마귀가 예수를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일에 돕는 것이라고 하였다면 안 죽였을 것입니다.

모르니까 죽인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뱀의 지혜가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어둠의 지혜라는 것을 고발하는 의미에서 예수님을 잡아서 재판을 하는 일을 밤에 벌리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밤에 재판하는 것은 마귀의 지혜가 틀렸다는 것을 고발하는 하나의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밤을 영적으로 말하면 어둠입니다.

어둠은 타락이고 죽음이고 진리가 없음을 상징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지금 타락한 죄인들로부터 비진리에 의하여 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 나라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는 일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밤에 잡히시고 밤에 재판을 받습니다.

이것은 창세전 언약을 위한 사건이에요.

즉 예수님은 지금 영적인 일을 하고 계신 겁니다.

 

알다시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은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의 죽음입니다.

이 죽음은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창세전 언약을 위한 사건이에요.

그런데 역사 속에서 밤에 일어났어요.

 

밤의 영적 의미는 진리를 알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는 세상이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죄인들이 천지 분간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피조물이 밤에 창조주인 예수님을 잡아서 재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래 재판은 낮에 받아야 함에도 예수님은 밤에 재판을 받고 있잖아요.

이것은 밤을 통해서 세상의 본질을 고발하고자 함이에요.

 

세상은 진리에 대하여 어둠이에요.

그러니까 참 진리이신 예수님을 밤에 붙잡아서 재판을 하는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모두가 하나님께서 세상은 어둠이라는 것을 고발하려고 예수님을 밤에 붙잡게 하고 재판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대 제사장이 예수님을 재판을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리에 대하여 무지하여서 그래요.

영적으로 소경이라서 그런 겁니다.

 

이사야를 봅시다.

 

사 42장 19절 “소경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 누가 나의 보내는 나의 사자같이 귀머거리 겠느냐 누가 나와 친한 자같이 소경이겠느냐 누가 여호와의 종같이 소경이겠느냐”

 

사 43장 8절 “눈이 있어도 소경이요 귀가 있어도 귀머거리인 백성을 이끌어 내라”

 

사 56장 10절 “그 파수꾼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

 

누가 소경입니까?

하나님의 종이 소경이지요.

누가 하나님의 종입니까?

 

제사장들이에요.

대 제사장은 하나님의 종이에요.

대 제사장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자이에요.

 

그런데 소경이에요.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있어요.

이 모두가 하나님이 그렇게 해 놓으신 것입니다.

정한 때가 되면 눈이 떠질 겁니다.

 

성령이 오시면 그 때 눈이 떠져서 자기들이 어떤 짓을 했는지 알고 기겁을 하고 회개하게 됩니다.

이를 스가랴에서는 독자를 잃은 심정으로 통곡을 한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어찌할꼬! 라는 탄식이 온 예루살렘에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탄식이 일어나려면 지금은 탄식이 일어나게 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 일이 예수님을 죽이는 것입니다.

무지해서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밤에 예수님을 죽이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잘 보세요.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이단으로 정죄를 당하고 매를 맞습니다.

거기다가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에게서도 부인을 당하고 저주를 받고 있어요.

그러니 예수님은 이쪽저쪽으로부터 다 버림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저주 사건을 밤에 대 제사장이 예수님을 재판하여서 이단으로 정죄하는 사건 속에다가 함께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한 것이나 대 제사장이 예수를 이단이라고 정죄한 것이나 영적 상태는 동일하다는 의미입니다.

 

베드로나 대 제사장이나 모두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기에는 매 일반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밤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하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고 대 제사장도 밤에 예수님을 이단이라고 재판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나 대 제사장이나 그 놈이 그 놈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을 보면 예수님을 일컬어 참 빛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빛이 세상에 와서 비치되 세상이 어둠인고로 빛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을 어둠이라고 합니다.

세상을 어둠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모른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역설적으로 이해해 보세요.

세상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틀리게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벌리는 일이 무엇인가요?

예수님을 통해서 자기 백성을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는 일이잖아요.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죄인을 구원하는 일을 인간의 상식을 벗어난 방식으로 하고 있습니다.

어리석고 미련하게 하고 있어요.

인간들은 도무지 이해 할 수가 없는 방식으로 한단 말입니다.

 

어떻게 합니까?

예수가 살아서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죽어서 구원을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힘없이 죽어 가면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좌우편에 강도 둘이 함께 달립니다.

좌우편에 강도가 달렸다는 말은 예수님도 강도 취급을 당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한쪽 강도가 예수님에게 자기를 구원해 달라고 합니다.

 

이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에요.

구원 해 달라고 하려면 십자가에 달리지 않은 자에게 부탁을 해야 합니다.

로마 군사들에게 살려 달라고 해야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한쪽에 강도는 같이 죽어가는 처지에 예수님을 구원자로 보고 구원해 달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나라에 임할 때 나를 기억해 달라고 하는 겁니다.

다른 쪽 강도는 제 정신을 가지고 야! 너 미쳤냐!

이 놈도 우리처럼 강도로 죽어가고 있는데 어떻게 구원을 한단 말이냐! 라고 조롱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한 강도는 실성을 했고 한 강도는 제 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조롱하는 강도는 현실을 냉정하게 보고 있었어요.

예수님에게 구원해 달라고 하는 강도가 미친것이에요.

그런데 성경은 미쳤다고 하는 그 강도가 지혜로운 자라고 합니다.

 

이걸 어떻게 인간의 상식과 이성으로 이해를 하겠어요.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이지만 세상에서는 어리석고 미련한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을 봅니다.

 

고전 1:18-24=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 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세상 사람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인다고 했어요.

미련하다는 말이 말도 안 된다는 뜻입니다.

말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인간들의 눈에 미련하게 보이는 것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해 내실까요.

이는 인간의 지혜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 수 없게 하기 위함입니다.

인간의 지혜가 틀렸다는 것을 고발하고자 함입니다.

속된 말로 인간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지혜는 죄로 인한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은 인간의 지혜가 어리석다는 것을 고발하는 형식을 띠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대 제사장인 안나스와 가야바가 예수님을 심판합니다.

 

안나스나 가야바는 이스라엘의 대 제사장입니다.

안나스는 가야바의 장인인데 이전에 대 제사장이입니다.

그러니 신구(新舊) 대 제사장이 합동으로 예수님을 신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민입니다.

이스라엘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려 주시려고 선택을 입은 민족입니다.  



바울은 히브리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하는 성전에서 일어나는 율법 신앙은 모두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이라고 했습니다.

알다시피 율법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받아 왔습니다.

이스라엘이 성전에서 행하여지는 율법 신앙들은 모두가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늘에 있는 식양을 본 따서 만든 것들입니다.  

그러니 성전에서 행하여지는 것은 하늘이 있는 하나님 집에서 행하여지는 것들의 모형이 되는 것입니다.

 

대 제사장을 예로 듭니다.

하늘나라에도 대 제사장이 있어요.

누구신가 하면 예수님이에요.

 

하늘에 있는 대 제사장이신 예수님을 보여 주려고 땅에 대 제사장을 두었어요.

예수님은 하늘 성전에 대 제사장이고,

가야바는 땅 성전에 대 제사장이에요.

땅에 있는 대 제사장은 하늘에 있는 대 제사장을 보여주는 모형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땅에 있는 대 제사장은 가짜에요. 

그런데 가야바가 예수님을 재판하고 있어요.

이것은 가짜가 진짜를 가짜라고 심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형국이란 말입니다.

아주 해괴한 모습이지요.

이름하여 악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적 대 제사장이시고,

가야바는 육적 대 제사장이에요.

성경은 육은 어둠이라고 하고 영은 빛이라고 합니다.  



어둠은 죽음이라고 하고 빛은 생명이라고 합니다.

영은 살리는 것이고,

육은 죽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럼 가야바는 죽은 자이고 예수님은 살아 계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살아 있는 대 제사장이고 가야바는 죽은 대 제사장인 것입니다.

그런데 죽은 자가 산 자를 심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진짜이고 가야바는 가짜에요.

그럼 가짜인 가야바는 진짜인 예수님에게 자리를 비켜주어야 해요.

백성들에게 저 분이 진짜 대 제사장입니다! 라고 알려 주어야 한단 말입니다.

그럼에도 도리어 반대로 내가 진짜이고 예수가 가짜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야바가 예수님을 알았으면 내가 예수님을 판단 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저를 판단해 주십시오! 라고 해야 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꺼꾸러 가짜가 진짜를 너 이단이지! 라고 심판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예수님의 탄생시에도 보여 주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하늘에 별을 보고 예수님을 찾아오지요.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어요.

 

그런데 동방박사들이 헤롯에게로 가서 지금 유대인의 진짜 왕이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러자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지요.

왜? 예수를 죽이고자 합니까?

이는 자기가 왕이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자기가 가짜 왕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진짜 왕인 예수님을 영접했어야 했어요.  



그런데 헤롯은 이 사실을 몰랐어요.  

그래서 진짜가 왔는데도 안 비켜주고 자기가 진짜라고 하면서 가짜가 진짜를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이게 세상이에요.

 

세상은 악이 선을 이기는 곳이에요.

비 진리가 진리를 비 진리라고 판단하고!

피조물이 창조주를 심판하고!

죽은 자들이 산 자를 판단하고 있는 곳입니다.

 

이처럼 세상은 진리가 비 진리에게 이단이라고 버림을 당하는 곳입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어둠이라서 그래요.

 

칼로 세상을 정복 할 수는 있어도 칼로서 세상을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힘으로 정권을 잡을 수 있어도 힘으로 백성들을 다스릴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칼로서 다스려 집니다.

베드로도 칼로 자신을 지키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칼을 사용 할 때 칼로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가야바가 예수님을 재판하는 것은 칼(힘)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스스로 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세상의 지혜에요.

세상 지혜는 망하는 지혜에요.

 

이처럼 어두운 세상은 거짓이 진실로 둔갑하여서 다스려지는 곳입니다.

이 세상은 거짓이 진실을 이기는 곳이에요.

항상 거짓이 진실로 위장하여서 득세하는 곳이에요.  

진짜가 가짜로부터 이단으로 내 몰리고 죽임 당하는 곳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을 일컬어 어둠이라고 하고 죄 아래 가두어진 곳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어느 시대이고 항상 가짜가 진짜를 죽이는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그럼 이 세상에서는 항상 예수님처럼 진짜에 속한 자들이 항상 가짜에게 죽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있음이 있었겠지요.

인류 역사가 이렇게 시작이 되었어요.

 

가인과 아벨을 보세요.

가인은 땅에 속한 자이고, 아벨은 하늘에 속한 자입니다.

그런데 가인이 아벨을 죽여요.

땅에 속한 자가 하늘에 속한 자를 죽였어요.

이게 세상의 역사에요.

 

이것을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아브라함 집안에 두 아들이 있었어요.

육으로 난 이스마엘과 영으로 난 이삭이 있었지요.



이 둘은 두 민족을 대표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 둘은 항상 싸웠습니다.

육으로 난 이스마엘이 영으로 난 이삭을 이겨요.

육으로 난 자가 강하고 영으로 난 자는 약해요.

 

이처럼 항상 육이 먼저이고 영이 나중이에요.

이 맥(脈)이 이스라엘의 역사 전체에 흐르고 있었어요.

먼저 나온 자는 항상 강한 자로 나타나고 나중에 나온 자는 약한 자로 나타나요.

그리하여 먼저 나온 강한 자가 나중에 나온 약한 자를 핍박해요.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형제들과 요셉!

사울과 다윗!

육적 이스라엘과 영적 이스라엘!

가짜 왕인 헤롯과 진짜 왕인 예수그리스도가 있어요.

 

가짜들이 항상 먼저 나오고 진짜들이 나중에 나와요.

가짜들이 항상 힘이 세고 진짜들은 비실비실합니다.

그래서 가짜들이 항상 힘으로 진짜들을 핍박을 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나중에 나온 약한 자에게 하늘나라 유업을 주세요.

이게 비밀이에요.

 

이 세상은 생명이 사망에게 삼키운바 되는 원리로 되어 있습니다.

생명이 사망 속으로 들어가서 사망을 생명으로 창조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듯이 말이에요.

예수님도 죽어서 많은 자기 백성들을 살려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죽임당하는 것으로 만들어 놓았어요.

이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죽으러 오셨어요.

죽어서 자기 생명을 자기 백성들에게 주십니다.

그래서 자기 백성들 손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백성들을 소경으로 만들어서 예수를 죽이도록 하였어요.

그리곤 그 예수님의 죽음을 근거로 자기 백성들을 살려 내십니다.

그리하여 자기 백성들 속에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살아난 자에게는 오직 하나님의 용서하심이라는 긍휼만 담겨지게 됩니다.

이들이 천국에서 세세토록 어린 양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를 죽이지요.

그러자 예수님이 사도 바울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자기 생명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예수님의 운명 안으로 흡수 되어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주시는 방법이에요.

 

이걸 우리의 신앙에 적용해 보세요.

 

우리 안에는 두 법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자 하는 법과 거역하고자 하는 법이 있습니다.

어떤 법이 이길까요?

우리 몸이 어떤 법에 순종을 합니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자 하는 법에게 순종을 하지요.

 

그럼 우리의 삶이 어떤 식으로 나타날까요?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드러날까요?

아니면 그 반대로 죄인으로 드러날까요?

자연히 죄인으로 드러나겠지요.

그래요.

 

우리는 결국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은혜가 덮쳐오면 내 실존을 알게 됩니다.

그럼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고백을 하게 되어 있어요.

나는 예수를 사랑하는 자가 아니고 예수를 죽일 수밖에 없는 자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어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주여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도와주세요!

날 구원 해 주세요! 라고 밖에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기백성들의 신앙이란? 믿음 있음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고 믿음 없음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이건 제 고백입니다. 

예전엔 저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가면 갈수록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음으로 드러나요.

아니 하나님을 사랑 할 수 없는 자라는 것으로 발각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깨달은 것은 우린 살아가면 갈수록 하나님께 사랑의 빚만 쌓여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채를 탕감해 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부채를 쌓아가고 있어요.

더 많은 용서와 더 많은 은혜를 입게 되어요.

그리하여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사나 죽으나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더 깊이 절감하고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추상적이었는데 이젠 실상으로 보여요.

과거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희미하던 것들이 이제는 손으로 잡히고 눈으로 보이고 몸을 느낀바가 되어요.

 

예전에 비하여 열심이나 충성은 현저하게 작고 보잘 것이 없고 내 꼬라지가 더 형편이 없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크기는 더 크고 깊고 많아짐을 느껴요.

예전에는 신앙이 열심과 각오가 앞섰는데 이제는 주의 은혜와 긍휼을 입고 산다는 것에 감사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도 내 모습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나도 내가 살고자 수시로 하나님을 배반하고 있음이 발각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나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대신 살고 있음을 고백하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셔서 나로 하여금 죄인의 자리에 않게 하시고 주의 피 뿌리심에 은혜를 입게 하심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가 설교하는 것은 현란한 말잔치 하는 것이 아니에요.

성경적인 지식을 말하고,

성경적인 언어를 구사하고,

성경의 문자를 풀이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과의 사귐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에요.

어떤 사귐이고 어떤 은혜와 사랑인가요?

가짜가 진짜를 죽였는데 그 진짜의 죽음으로 가짜들이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이게 예수의 증인으로서의 삶이에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증거하는 것이 증인이에요.

그러니 주의 은혜가 증거 되어질 때마다 예수님의 십자가 도는 관념이 아니라 실제로 증거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요즈음 세상에서 가장 많이 회자 되는 말이 “힐링”입니다.

“힐링(healing)”이란? 치유에요.

몸과 마음에 치유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힐링 하시려고 오셨어요.

몸과 마음을 힐링 하십니다.

몸은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시켜서 힐링을 하셨고!

마음은 율법의 요구로부터 자유케 하심으로 힐링을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네게로 오라고 하시면서 쉼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쉼을 주시나요.

예수님의 멍에를 매고 배우라고 하잖아요.

 

예수님의 멍에란 십자가에 죽으심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요?

먼저는 우리를 대신하여서 율법의 요구를 위한 죽으심입니다.

우리가 담당하여야 할 율법의 요구를 예수님이 대신 담당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젠 그 어떤 율법의 참소로부터도 자유케 되었습니다.

마음에 힐링이 일어난 것입니다.

마음이 치유 받고 보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정죄당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 어떤 것으로도 정죄 당하지 않으니 쉼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부디 날마다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치료하는 광선이 되어서 밤으로 살지 않고 낮으로 살아가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마땅히 저주 받아야 할 저희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죄와 사망의 굴레로부터 해방을 시켜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다시는 종에 멍에를 매지 말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평안케 하옵소서. 그리하여 더 이상 밤으로 살지 말고 낮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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