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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성경강해)109강. 아버지께서 주신 쓴 잔 (요 18:1-14)

by coroa 2022. 1. 19.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109강. 아버지께서 주신 쓴 잔 (요 18:1-14)

-.정낙원 목사

 

요 18:1-14=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가시니 거기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다 2 거기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가끔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 3 유다가 군대와 및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을 데리고 등과 홰와 병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4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가라사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5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가라사대 내로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저희와 함께 섰더라 6 예수께서 저희에게 내로라 하실 때에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7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저희가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로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 하시니 9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10 이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11 예수께서 베드로 더러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12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하속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13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14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 권고하던 자러라”

 

오늘 본문을 보면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마시라고 주신 잔이 나옵니다.

잔(殘)이란? 다름 아닌 예수님더러 십자가에 죽으라는 것입니다.

마치 조선 시대 임금이 사약을 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 하고 덥석 받아 잡수시고 있어요.

그 아버지에 그 아들입니다. 

무슨 이런 고약한 이야기가 다 있나요?

어느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 준단 말입니까?

그리고 아버지가 죽으라고 한다고 해서 예!~ 하고 죽는 자식이 또 어디에 있답니까?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살리고자 하지 죽이고자 하지 않아요.

그러니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 불가한 말씀입니다.

 

그럼 우리는 묻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어째서 아버지는 아들을 죽음에 넘기우는가 입니다.

죽음에 넘기 울 때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 아닙니까?

또한 예수님도 아버지의 명(命)을 따라 죽는 길을 나선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오늘은 그 이유를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는 예수님이 마셔야만 했던 잔에 대하여서와,

둘째로는 제자들에게 칼을 집에 꽂으라는 의미에 대하여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일찍이 제자들과 다니면서 자식이 떡을 달라고 하면 돌을 줄 아비가 누가 있으며,

자식이 고기를 달라고 하면 전갈을 줄 자가 어디에 있느냐고 했습니다.

이를 역설적으로 이해하면 자식이 돌을 달라고 하면 떡을 주는 것이 아비의 마음이고,

자식이 전갈을 달라고 하면 고기를 주는 것이 아비의 심정이란 말입니다.

 

이처럼 아비는 자식을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자식에게 하시는 일은 다 사랑인 것입니다.

그럼 오늘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마시라고 하신 죽음이라는 쓴 잔도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알아봅시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이 세상에 일어났다 쇠할 제국들을 사자와 곰과 표범과 열 뿔을 가진 짐승으로 표현을 하여서 보여 주셨습니다.

이는 곧 이 세상의 성격이 나타나는 짐승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럼 이 세상은 짐승의 원리로 다스려져 가게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본능으로 사는 자들을 짐승 같다고 합니다.

이 말은 짐승은 본능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본능 중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본능은 생존의 본능입니다.

모든 생명에게는 살고자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무슨 행동을 해도 살고자 움직입니다.

 

알다시피 짐승의 세계는 약육강식의 세계에요.

먹이 사슬로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짐승의 세계에서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먹힘 당해요.

약육강식의 구조로 되어 있는 짐승의 세계에서는 힘 있음은 사는 것이고, 힘 없음은 죽음과 같습니다.

 

성경은 죄인을 일컬어 짐승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들도 짐승과 같은 본능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무슨 일을 해도 살고자 움직입니다.

죄인의 세계가 바로 짐승처럼 힘에 논리로 내가 살고자 남을 죽이고 있습니다.

 

죄인은 이러한 힘에 논리로 살아가는 세상에서 살고 있어요.

 

그래서 인간들은 본능적으로 힘을 축적하고자 합니다.

여기에 신에 도움을 구합니다.

인간들이 신을 찾는 것은 신이 좋아서가 아니라 자기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힘을 주는 신을 참 신이라고 섬깁니다.

 

성경은 이러한 사고로 신을 찾는 행위를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인간들은 생래적으로 우상숭배적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상숭배는 신과 거래하는 거에요.

내가 신을 섬겨 줄 테니 신은 나에게 힘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그대로 녹아져 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살펴봅시다.

알다시피 구약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이에요.

 

그런데 애굽에서 출생을 하고 애굽에서 삽니다.

애굽은 죄의 나라를 상징해요.

죄인들이 살아가는 인간들의 나라를 짐승의 나라라고 했잖아요.

그러니 애굽은 짐승의 법칙으로 살아가는 곳입니다.

 

이런 짐승의 법칙으로 살아가는 곳에 하나님 백성들이 살고 있어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지만 그들의 본능 속에는 짐승적인 본능이 있습니다.

즉 힘의 논리로 살아가고자 한단 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산다는 것은 힘에 논리로 살지 않고 믿음의 법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생사화복을 맡기고 산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 앞에서 자기 힘을 갖고자 하는 것이 죄로 드러나게 됩니다.

세상 사람이야 자기가 자기 목숨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세상의 힘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 목숨을 자기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기 때문에 힘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태어난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는 여전히 애굽에 사고가 있습니다.

애굽 사람들처럼 본능적으로 힘을 모으고자 합니다.

힘에 논리로 살고자 한단 말입니다.

그리하여서 하나님조차도 세상에 힘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애굽적 사고를 죄라고 규정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이 애굽적 사고를 깨트리는 일을 하십니다.

힘을 빼앗는 일을 하십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이 독자적인 힘을 가지지 못하게 간섭을 하십니다.

그게 종으로 사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세상에서 의지 할 것을 없게 하십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에서 독자적인 힘을 갖거나 그 힘을 의지하고자 하면 그것은 곧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당하게 됩니다.

 

이사야 31장을 봅니다.

 

사 31:1-3=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뢰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앙모치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거니와 2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그 말을 변치 아니하시고 일어나사 악행하는 자의 집을 치시며 행악을 돕는 자를 치시리니 3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 손을 드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

 

도움을 구하러 애굽에 내려가는 자는 화가 있다고 하지요.

에굽은 세상을 말합니다.

이는 세상에 힘을 얻고자 하는 자는 화가 있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세상 것을 힘을 삼고 의지하고자 하는 자는 가만 두지 않겠다고 합니다.

 

애굽의 힘이 뭔가요?

병거와 마병이에요.

문자적으로 말하면 군사력을 말하지만 지금 식으로는 권력을 말해요.

 

세상의 힘이 뭔가요?

돈이고, 권세이고, 명예이고, 능력이에요.

자본주의 시대에는 권력은 돈으로부터 나와요.

그러므로 이 시대 최고의 힘은 돈입니다.

 

세상은 돈으로 가치가 정해져요.

그래서 유전무죄, 무전유죄 라는 말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돈 있으면 임금처럼 대접을 받는 것이 세상이에요.

돈이 곧 왕이에요.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했어요.

이는 재물을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두시고 말씀하셨어요.

재물도 의인화 하여 섬김의 대상으로 격상을 시켜버렸어요.

 

결국 재물이 인간으로 하여금 섬김을 받는 신과 같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인간들이 신을 찾는 것은 돈을 얻고자 함이지 신이 아니에요.

그러니 돈이 곧 신이란 말이 맞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을 봅니다.

 

빌 3:18-19=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저들의 신은 배요” 라고 하지요.

여기서 배란? 먹고 사는 거에요.

한마디로 등 따습고 배 부르게 해 주는 것이 곧 신이란 말입니다.

결국 예수님 말대로 재물이 곧 신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들이 바로 십자가의 원수라고 합니다.

 

십자가의 원수가 누구냐?

땅에 일을 생각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즉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자들이란 말입니다.

 

십자가가 자기 배를 채우는 수단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원수라고 하는 겁니다.

이들에겐 하나님은 한낱 자기에게 떡을 주는 신에 불과 해요.

그러니 이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신은 돈이지 하나님이 아니에요.

 

이건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고자 한 것과 같아요.

사람들은 떡을 원하지 임금을 원하지 않아요.

그들에겐 떡이 곧 임금이에요.

 

지금 대통령 선거에 온 나라 백성들에 이목이 집중 되었어요.

대통령에 출마한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잘 살게 해 주겠다고 합니다.

자기를 대통령으로 뽑아 주면 국민들을 등 따습고 배 부르게 해 주겠다고 합니다.

 

그냥 한 사람만 뽑지 말고 다 뽑았으면 좋겠어요.

혼자 보다는 여럿이 더 잘 살게 해 줄 것이잖아요.

옛 말에 인심은 곡간에서 난다고 했잖아요.

곡간을 채워주겠다고 하는데서야 하나이면 어떻고 여럿이면 어떻습니까?

 

우린 대통령에 관심이 없어요.

누가 우리 배를 채워줄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어요.

우린 돈을 원하지 대통령을 원하지 않아요.

우리에겐 영원한 대통령은 돈이에요.

 

하나님도 우리의 신이 될 수가 없어요.

우리에게 신은 오직 돈이에요.

돈 만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신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있는바 족한 줄 알라고 하십니다.

아니에요.

 

우리는 있는바 족한 줄 아는 존재들이 아니에요.

우리는 다고 다고 하는 거머리들이에요.

탐욕에 사로잡혀서 배가 터져도 만족 할 줄 모르는 거머리들이에요.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것은 예수가 좋아서가 아니고 예수를 통하여서 자기 욕망을 채우고자 함이에요.

그들에겐 예수님은 하나의 직장이에요.

자신들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수단에 불과해요.

 

그래서 제자들끼리도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암투를 벌렸어요.

예수가 정권을 잡으면 자신들도 한 자리 해 먹을 것이라는 꿈에 부풀어 있었어요.

그 날을 위하여 참아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게 생겼어요.

지금 로마 군사들이 무장을 한 채 예수님을 잡으러 왔어요.

예수가 잡혀가면 제자들은 끝장이에요.

지금까지 투자한 세월이 물거품처럼 다 날아가게 생겼어요.

 

그래서 어찌 하든지 예수를 지켜야 합니다.

예수가 살아남아서 자기들의 꿈을 이루어 주어야 합니다.

제자들 모두가 이심전심이었어요.

 

그래서 베드로가 대표로 나서서 예수를 잡으러 온 군사들과 일전불사를 외칩니다.

칼을 빼들고 군사들과 맞섭니다.

급기야 군사중 하나인 말고의 귀를 베어버립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행동은 예수를 지키고자 함이 아니고 떡을 지키고자 함이에요.

제자들에겐 예수는 출세의 수단이에요.

곧 힘이고 재물이고 떡이에요.

예수가 살아 있어야 자기들 입에 떡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떡을 달라고 예수를 임금으로 삼고자 하던 군중들이나 예수를 따라다니면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제자들이나 다 똑 같아요.

예수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가지고 있는 것에 관심을 두기는 마찬가지에요.

그 놈이 그 놈이에요.

 

그런데 그 떡을 주어야 할 예수가 죽게 생겼어요.

죽으면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고 말아요.

그럼 지켜야지요.

적과 싸워서라도 예수를 죽게 하지 말아야지요.

 

베드로는 칼로서 자기가 꿈꾸는 세상을 얻고자 했어요.

그래서 예수를 지킨 겁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말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전혀 다른 행동을 하십니다.

순순히 잡혀 주십니다.

그러면서 베드로에게 칼을 거두라고 합니다.

제자들 입장에선 납득이 안가요.

 

칼을 거두라는 말은 힘을 거두는 일이에요.

칼을 무기로 삼는 자들에게는 칼은 곧 힘이에요.

그러니 칼을 거두라는 말은 곧 힘을 거두어 가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힘을 주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힘을 거두어 가는 일을 하시고 계신 겁니다.

세상에서 의지할 힘을 빼앗는 일을 하시고 있는 거에요.

 

칼을 돈이라고 한다면 돈을 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돈을 거두어가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지 할 것을 빼앗는다는 말입니다.

왜? 빼앗나요?

 

이는 성도가 의지할 것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의지할 것은 하나님이에요.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하나님이지 돈이 아니에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가 없다고 했잖아요.

여기서 섬긴다는 말은 의지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인간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든지 재물을 의지하든지 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살다가 보니 세상의 가치관을 버릴 수가 없어요.

세상 것의 유혹을 늘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애굽에 도움을 구하려고 세상과 짝하는 일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린 그렇게 살고 있어요.

 

그럼 하나님께서 징벌을 가해요.

너 왜? 날 믿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왜? 썩어질 것을 구하고 있느냐 에요.

 

애굽은 사람이지 신이 아니라고 합니다.

또한 애굽의 힘은 땅에 속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를 영이 아니고 육체라고 합니다.

 

영은 살리는 것이고 육은 죽이는 것이에요.

애굽의 힘은 영이 아니고 육이라는 말은 애굽에 속한 것은 생명이 아니고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산 자인데 어째서 죽은 것을 구하느냐!

왜? 힘도 아닌 것을 의지하고자 하느냐! 입니다.

 

땅에 속한 것들은 다 멸하고 사라질 것들입니다.

그러니 땅에 것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땅을 의지하면 땅이 망할 때 함께 망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땅에 것은 의지하고자 하면 반드시 징벌을 가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겐 땅에 힘을 주지 않고 하늘에 힘을 주시고자 합니다.

 

그래서 믿음에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람을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나게 하십니다.

이건 아브람이 믿고 의지할 것으로부터 빼내신 거에요.

그리고는 하나님의 약속만 바라보고 살아가도록 약속의 땅에서 살게 하십니다.

 

그런데 가나안에 기근이 듭니다.

아브람이 먹고 살고자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겁탈을 당하는 사건을 일으키십니다.

징벌을 가하신 것입니다.

 

룻기에 보면 이러한 사건이 또 나옵니다.

나오미라는 여인이 베들레헴에 기근이 들자 모압으로 이사를 갑니다.

모압은 이방 땅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남편도 죽이고 두 아들까지 죽여 버립니다.

의지할 것을 없게 하십니다.

결국 나오미는 애굽에 도움을 구하러 갔다가 남편도 잃고 두 아들도 잃고 생과부가 되어서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일들을 당하게 됩니다.

나오미가 모압에서 돌아와서 하는 고백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치셨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고가 국가적 이스라엘에게 적용이 되면 이스라엘은 독자적인 힘을 가지고자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당하게 되었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다윗도 인구 조사를 하다가 하나님으로부터 혹독한 징계를 당하였어요.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가 하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 속에 있는 우상성을 깨트리는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상성이란? 하나님을 수단화 하고자 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왜? 하나님을 세상에 것을 얻고자 하는 수단화 합니까?이는 세상에서 붙박고 잘 살고자 함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살 곳은 하늘이지 땅이 아닙니다.

성도는 땅을 떠나야 할 자들이지!

땅에 코를 박고 살 자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수단화 하여서 땅에서 성공하고자 하는 우상 성을 깨트려 주어야 합니다.

 

인간들이 얻고자 하는 것들은 모두가 땅에 속한 것들입니다.

이걸 사도 요한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하나님께로 온 것이 아니고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며 마귀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당연히 이러한 마귀적인 것들을 빼내는 일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세상 것을 빼앗기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의지할 힘을 빼앗김을 당하게 된단 말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날마다 빼앗김을 당하는 것이에요.

우리는 신앙을 세상의 꿈을 이루는데 이용하고자 해요.

헛된 꿈을 꾼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의 헛된 꿈을 깨트리는 일을 하세요.

 

“사랑은 눈을 멀게 하고 결혼은 멀어진 눈을 되돌려준다” 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사랑은 꿈이고 결혼은 실제란 말입니다.

쉬운 말로 연애하는 것과 결혼은 다르다는 말입니다.

 

연애는 환상이에요.

동화 속 이야기와 같아요.

동화 속 이야기는 아픔이 없어요.

연애 할 때는 눈에 콩깍지가 끼어서 허물이 허물로 보이지 않아요.

아픔도 없어요.

 

그러나 결혼은 실제에요.

모든 것이 속속들이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눈에 콩깍지가 벗겨져서 모든 것이 훤히 드러나요.

이 때부터는 허물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 허물로 인하여 고통스러워하고 아픔을 당해요.

 

그래서 결혼은 멀어졌던 눈을 되 돌려 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서로의 실상을 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서로의 실상을 보게 되는 때는 이미 돌이킬 수가 없어요.

이 때부터 싸움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을 환상을 깨트리는 무덤이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의 신앙이 그래요.

듣는 복음은 환상이에요.

복음을 들을 땐 기쁘고 좋아요.

 

그러나 그 복음이 삶으로 나타날 때는 엄청난 아픔을 동반해요.

복음을 듣는 것은 연애하는 것과 같아요.

지식으로 습득하는 것엔 아픔이 없어요.

 

그러나 습득되어진 복음이 실제로 우리 몸으로 표현이 되어질 때는 아파요.

복음이 관념이면 신앙생활이 환상으로 치달아 동화 속 이야기처럼 눈을 멀게 해요.

아픔이 없어요.

 

이 세상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천사들처럼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게 살았더라가 아니에요.

이 땅에서의 신앙생활은 천국에서 사는 것이 아니고 지옥에서 살아요.

예수님처럼 버림당하여지는 것이에요.

 

예수님의 운명에 동참이 되어서 죽임 당하는 삶을 살게 된단 말입니다.

나오느니 한숨이고 감사가 아니라 도리어 원망이고 불평이에요.

날마다 옛 사람과 피 흘리고 싸우는 전쟁을 치루는 싸움이에요.

 

이론적으로는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해야 한다는 것은 알아도 그건 어디까지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것이지 실상에선 그와 반대의 현상들이 나타나요.

우리 안에서는 매사에 불평이고 원망이 쏟아져 나와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미워해요.

 

육신으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행복한 것이 아니고 고통이에요.

신앙생활 속에는 우리가 꿈꾸던 환상들이 깨어지는 아픔들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그 동안 신앙을 빌미로 세상에 대한 꿈을 꾸었는데 이젠 그 꿈을 버리게 된단 말입니다.

예수님의 일생이 우리에게 그대로 덮쳐온단 말입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우리와 함께 살았던 분이십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여 처녀의 몸에서 태어난 것도 실제이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하신 것도 실제입니다.

물론 성령으로 성도 가운데 오심도 사실이고 실제입니다.

 

어떤 분들은 복음을 이야기 하는데 십자가에 달린 예수만 이야기해요.

성령으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동거동락 하시는 예수님을 몰라요.

십자가에 달린 예수만 알면 신앙이 관념으로 흘러요.

십자가에 달린 예수만 알면 십자가 도가 지식으로만 이해가 되어서 복음이 담론으로만 그쳐요.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부활을 하시고 성령으로 우리 안에 오셨어요.

왜? 우리 안에 오셨겠어요.

우리 몸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으로 당신의 것을 그려내시기 위함이에요.

 

우리 몸은 도화지와 같아요.

예수님이 예수님의 것들로 그리세요.

그려질 때마다 우리의 그림은 삭제가 되는 아픔이 동반이 되어요.

지금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와 동거동락 하시면서 자신의 삶을 성도의 몸으로 풀어내고 계세요.

그러니 신앙생활이 늘 피 흘리는 싸움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를 아는 것이 아니고 예수로 사는 것이에요.

성경은 학문이 아니에요.

성경은 생명이에요.

생명이기에 삶인 거에요.

 

성경이 학문이면 지식을 쌓으면 되어요.

성경이 학문이면 학문적인 발전으로 신앙 있음을 증명 할 수가 있어요.

어떤 사람들은 성격적 지식을 많이 아는 것을 신앙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학문적 발전을 마치 모든 신앙을 마스터 한 것으로 착각하고 자랑하고 있어요.

그러나 그게 아니에요.

신앙은 곡식이 햇빛을 받고 비바람에 시달리면서 단단해지고 여물어가듯이 예수님의 운명 안으로 휩쓸려서 살아가면서 깨어지고 넘어지고 하면서 자기 자신이 부인되어지는 삶이에요.

 

생명은 하루아침에 다 자라는 것이 아니에요.

오랜 세월동안 비바람에 시달리면서 숙성이 되어가고 여물어가요.

우리의 신앙도 동일해요.

그러므로 하루아침에 다 득도하여서 아는 것처럼 행세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인 거에요.

신앙생활이 아직도 뭔지를 모르고 있다는 유아적 신앙이란 말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오랜 세월 하나님과 부대끼고 씨름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깊이를 더 많이 더 깊게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 쬐금 아는 것으로 다 아는 것처럼 까불지 말란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을 확 토하여 내치고 싶다고 하셨어요.

 

요한계시록 3장을 봅시다.

 

계 3:14-18=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라오디게아 교회는 지금 이 시대 교회를 말해요.

그런데 모습이 가관입니다.

모두가 교만해져 있어요.

 

스스로 부자라 하고, 부요하다고 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다 안다고 합니다.

신앙 좋다고 한다는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보시기에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다고 합니다.

발가벗고 있으며 거기다가 눈까지 먼 소경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볼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안약을 사서 발라보라고 합니다.

자기 꼬라지를 좀 보라고 합니다.

 

왜? 부자라 부요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겠어요.

이건 신앙을 지식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지식을 많이 습득한 것을 신앙 있음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신앙은 생명이에요.

생명은 부자다 부요하다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하지 못해요.

생명은 항상 오늘날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습득하여 보관하는 것이 아니에요.

날마다 죽음의 세력과 싸워야 하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생명으로 사는 자들은 나 다 안다! 라고 나대지 못한단 말입니다.

나는 성경을 다 안다고 주접을 떨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다 안다고 하는 자들이 바로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이에요.

예수님으로부터 확 토하여 내침을 입을 자들이에요.

그러니 다 안다고 까불지 마세요.

 

신앙은 삶이에요.

아는 것이 아니고 아는 것을 믿음으로 사는 삶이에요.

그래서 신앙이라고 하지 않고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겁니다.

 

신앙은 믿고 바라보는 것으로서 지식이에요.

그러나 신앙생활은 믿고 바라보는 지식을 삶으로 풀어내는 삶이에요.

여기엔 기쁨도 있고 아픔이 있어요.

기쁨보다 아픔이 훨씬 많아요.

 

생명의 흐름에는 두 가지 성장 개념이 있어요.

 

외적 성장과 내적 성장이 있어요.

나무로 비유하면 외적 성장은 나무의 키가 커 가는 것이고! 내적 성장은 나무가 안으로 단단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나무와 같은 생명의 역사를 일으켜요.

외적인 생명의 역사도 있지만, 내적인 생명의 역사도 있어요.

저는 이것을 진리를 아는 앎과, 진리로 살아가는 삶으로 말하고 싶어요.

 

우린 먼저 진리를 알아가는 앎으로부터 생명의 역사가 시작을 합니다.

예수가 누구이며 새 언약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으로 시작을 해요.

그러나 깨달음에 머물러 있지 않아요.

 

깨달음은 지적 동의에요.

지적 동의가 실제 삶으로 나타나게 되어요.

무엇과 같은가 하면 밥을 먹는 것과 그 밥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과 같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 움직이는 것은 밥의 힘이에요.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하지요.

이는 복음이 믿어지는 것을 “마음으로 믿어!” 라고 하고, 그 믿어지는 것을 실제 삶에서 적용하며 사는 것을 “입으로 시인한다” 고 합니다.

 

이걸 다른 말로 아는 것과 믿는 것이라고 해요.

 

에베소서 4장을 봅시다.

 

엡 4:11-20=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18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사도 바울이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이 되라고 하지요.

“아는 것은” 지식적으로 아는 믿음이고!

“믿는 것은” 지식적으로 아는 것을 실제 삶 속에서 적용하고 사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이 둘이 조화가 맞아야 해요.

모든 생명의 자람이 이러한 매카니즘(원리)으로 되어 있어요.

우리에 신앙은 생명의 활동이기 때문에 이러한 원리로 이루어져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온전한 사람을 이룬다는 말은 세상적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된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더 많이 더 깊이 알아가는 사람이 된다는 말이에요.

이 은혜와 사랑을 알아갈 때 자연히 세상 사람들과 다른 가치관을 가지게 되고 삶도 자연적으로 세상 사람들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세상 사람들과 같이 감각 없는 자가 되지 말고 그리스도가 세상가치와 다른 가치로 살았듯이 너희도 이방인들과 다른 가치관으로 살아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가 그렇게 살지 않는다 하여도 성령이 그렇게 간섭을 해 가세요.

성도는 이방인과 다른 길로 가도록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에요.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자기의 소원을 두셔서 세상 사람들과 다름으로 살게 하세요.

 

그러므로 성경을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앎을 삶으로 풀어내는 것이에요.

앎을 삶으로 풀어내지 못하면 그건 관념이에요.

관념은 죽은 것이에요.

 

신앙이 관념이 되면 말쟁이가 되어요.

이런 자들을 일컬어 입으로는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는 자라고 합니다.

그럼 교회나 사람들에게 거치는 자가 되어요.

 

디도서 1장을 봅니다.

 

딛 1:12-16=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쟁이라 하니 13 이 증거가 참 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저희를 엄히 꾸짖으라 이는 저희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케 하고 14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좇지 않게 하려 함이라 15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16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그레데인들은 거짓말쟁이며 게으름쟁이라고 하지요.

자기 배만 위하는 악한 짐승이라고 하지요.

어째서 그럽니까?

 

이들은 입으로는 복음을 말하지만 실제 삶 속에서는 반 복음적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복음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들은 복음으로 자기 유익을 구하고 있어요.

이걸 자기 배만 위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입으로는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한다고 하는 거에요.

 

사도 바울이 이러한 말은 고린도교회에도 말했어요.

내가 가면 너희 말을 알아 볼 것이 아니라 능력을 달아 보겠다고 했어요.

즉 너희들이 어떻게 사는지 그 삶을 살펴보겠다는 거에요.

 

바울이 왜? 이런 말을 하는가요?

이는 교회 안에 어떤 자들이 말과 삶이 다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하였어요.

다른 말로 예수의 생명은 입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삶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런 상태를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가 되어 온전해 지는 것이라고 해요.

“온전해 진다” 함은 아는 것이 삶으로 드러낸다는 말입니다.

십자가 도를 머릿속 지식으로 가지고 있으면 말쟁이가 되고! 마음으로 믿고 받으면 삶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새 언약을 믿습니까?

그럼 새 언약으로 사세요.

그 누구로부터도 그 어떤 것으로도 정죄당하지 말고 사세요.

사람의 행위로 판단 받지도 말고, 또한 남을 판단하지도 마세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는 인간으로서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유하며 사세요.

그런데 그 자유함이 몸에 사욕을 쫓아가는 데로 사용하지 마세요.

육신의 편안함을 추구하는데 이용하지 말란 말입니다.

 

새 언약을 믿는 자는 새 사람이에요.

새 사람으로서 살아가야 할 가치가 있고 삶에 모습이 있어요.

그 가치가 바로 옛 사람의 구습을 벗어 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을 봅니다.

 

골 3:1-5=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느냐?

그럼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합니다.

이건 위로부터 난 자는 위에 것을 찾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땅에서 난 우리 육신은 땅에 것을 찾게 되어 있듯이!

하늘로부터 난 우리 속 사람은 하늘에 것을 찾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해바라기가 햇빛을 쫓아서 따라 살듯이 하늘로부터 난 새 사람도 하늘에 것을 바라보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 속에는 믿음 소망 사랑이 담겨져 있어요.

 

아버지의 약속을 믿음으로 사는 것이 있고!

하늘나라를 바라보고 소망하는 것이 있고!

아버지의 사랑이 담겨져 있어요.

모두가 하늘에 속한 것들이에요.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늘에 것을 바라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신 것은 우리 몸으로 자신을 표현하고자 함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한 몸이 되어 사는 성도는 자기 삶은 날마다 차압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육신의 소욕들이 죽어지게 되어요.

 

이걸 사도 바울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고 했어요.

이건 우리더러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말이 아니에요.

주께서 그렇게 간섭을 하신단 말입니다.

 

그러니 주께서 간섭을 당하는 성도는 늘 이 세상 것을 빼앗기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단순하게 물질을 손해 본다는 말이 아니에요.

육적인 소욕을 상실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어요.

 

구원 속에는 버림과 취함이 있어요.

옛 사람의 것은 버리고 새 사람의 것으로의 채움이 있어요.

옛 사람은 땅에서 났어요.

그러므로 땅에 것으로 가득차 있어요.

 

그런데 이런 옛 사람 속에 예수님이 오셔서 거듭나게 해 주신 새 사람이 있어요.

예수님이 오실 때 하늘에 것을 가지고 오셨어요.

옛 것을 빼내고 새 것을 채움을 입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가나안 전쟁이라고 합니다.

 

정과 욕심을 죽이는 싸움을 하게 된단 말입니다.

세상 것을 버리고 하늘에 것으로 채움을 입는 싸움을 하게 된단 말이에요.

이를 육신의 소욕을 죽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검을 휘두르는 베드로에게 뭐라고 하는가요?

검을 집에 꽂으라고 하지요.

검으로 하는 자는 검으로 망한다고 하지요.

 

베드로가 왜? 검을 휘두릅니까?

자기를 지키고자 함입니다.

내가 살고자 남을 헤치고 있어요.

이게 바로 짐승의 법칙이에요.

 

베드로는 지금 칼을 힘으로 믿고 있는 겁니다.

칼은 곧 베드로에겐 하나님처럼 믿고 의지할 대상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 칼을 빼앗는 일을 하십니다.

 

사람의 행동은 자기 안에서 이루고자 하는 바를 겨냥해서 튀어나오게 되어 있어요.

 

이러한 행동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나옵니다.

본능은 이성보다 앞서요.

베드로는 지금 위험에 처하자 본능적으로 칼을 빼서 상대방을 가해했어요.

이건 동물적인 생존 본능이에요.

이 생존 본능이 공격과 방어라는 모습으로 나타나요.

 

본능은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자동적으로 반응을 하게 되어 있어요.

예를 들어서 죽음이라는 두려움이 엄습하면 본능적으로 살고자 하는 행동을 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분위기를 다시 한 번 살펴봅시다.

군사들이 검과 철퇴를 들고 예수님을 잡으러 오지요.

제자들은 군사들이 예수님을 잡으러 왔다는 것은 곧 자신들도 잡혀 가게 생겼다는 것을 알아요.

 

그러자 베드로는 본능적으로 칼을 빼서 휘둘러서 말고 라는 군사의 귀를 잘라버리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말고의 귀를 벤 것은 살고자 하는 인간의 근본적인 생존 본능에 기인한 것이에요.

이걸 세상에서는 정당방위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다른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생명의 위험을 느끼자 본능적으로 살고자 하는 자기 안에 방어기제가 발동하여 칼로 말고의 귀를 잘라내었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말고의 귀를 고쳐 주면서 베드로에게 칼을 집에 꽂으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동일한 위험에 처하였는데도 베드로와 예수님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가요.

 

베드로는 자신을 위협하는 자를 가해하는 방식으로 반응을 보인 반면에,

예수님은 베드로가 가해한 자를 치유해 주는 모습으로 반응을 하셨어요.

베드로는 원수를 죽이고자 하는데, 예수님은 원수를 살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죽음을 토해 내는데 예수님은 생명을 토해내고 있어요.

이건 베드로 속에는 죽음이 가득차 있다는 증거이고,

예수님 안에는 생명으로 가득차 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이 말고의 귀를 고쳐 주시면서 베드로에게 검을 꽂으라고 하신 것을 더 확대 하여 해석을 한다면 너희들은 죽이는 자가 아니라 이제는 살리는 자로서 부르심을 입은 자라고 알려 주시는 것이라고도 볼 수가 있습니다.

 

암튼 예수님은 제자들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은 죽음의 길로 나섭니다.

마치 한 일의 밀알이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듯이 예수님 한 분의 죽으심으로 많은 자기 백성들이 살아나는 일을 행하고자 하십니다.

 

여기서 눈여겨 볼 수 있는 것은 하늘에 생명은 하늘에 생명을 가진 자의 죽음으로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음으로 나아갑니다.

 

예수님의 이런 행동은 인간의 본능에 반대하는 행동이에요.

예수님은 본능에 반(反)하게 도리어 자신을 죽음에 넘기어 줍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마시지 않겠느냐” 라고 하시면서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직역하면 “아버지가 날 더러 죽으라고 하지 않느냐!” 이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을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 합니다.

 

“성경을 응하게 한다” 는 말은 미리 약속이 된 것을 성취한다는 말입니다.

그럼 이러한 일이 있을 것을 성경에는 미리 예언이 되어 있었다는 말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이미 말했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지금 자신의 죽음을 언약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응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성경을 응하게 한다는 말을 다른 말로 언약을 위해서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지금 아버지와 맺은 언약을 위해서 아버지가 주신 잔을 마시고자 합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객기를 부리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앞서서 살펴보았듯이 예수님도 죽음을 두려워하였어요.

그래서 아버지께 죽지 않게 해 달라고 땀이 피가 되듯이 세 번씩이나 간절하게 기도했어요.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기도를 했어요.

이러한 것은 우리와 동일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기도 하실 때 아버지께서는 천사들을 보내서 십자가를 지는 길로 나아가도록 수종을 들게 하셨어요.

즉 천사들을 보내서 예수님을 설득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설득했나요?

언약을 위하여 죽으라고 설득했어요.

 

왜? 죽으라고 설득을 합니까?

그게 예수님이 이 세상으로 올 때 아버지와 맺은 언약이거든요.

아버지는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낸 것은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에요.

예수님이 죽어야 창세전 언약이 성취가 되어요.

자기 백성들이 살아 난다구요.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안 죽겠다고 합니다.

육신의 생각을 하고 있는 거에요.

그러자 아버지가 천사들을 보내서 예수님께서 왜? 이 세상에 오셨는지를 알려 주시는 겁니다.

천사들이 예수님에게 아버지와 창세전에 맺은 언약을 기억하라고 상기시켜 주신 겁니다.

 

예수님은 기도하다가 천사들을 통해서 아버지의 뜻을 분명히 알게 되었어요.

성령이 예수님을 언약 안으로 밀어 넣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군사들이 왔을 때 육신의 본능에 반하는 모습으로 선뜻 제자들을 가로막고 나서면서 날 잡으라고 하신 겁니다.

 

이러한 마음을 제자들은 몰라요.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이 의미를 몰라요.

그래서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해서 칼이라는 힘을 믿고 나선 것입니다.

베드로의 행동은 모든 제자들의 행동을 대표하고 있어요.

 

우리도 베드로의 행동 속에 포함 되어 있어요.

우리도 베드로처럼 행동을 하게 되어 있어요.

베드로는 지금 칼이라는 힘으로서 세상 권세를 이기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건 결국 세상의 방법이에요.

 

이에 예수님이 그러지 말라고 합니다.

검을 집에 꽂으라고 하십니다.

검을 집에 꽂으란 말은 순순히 죽으란 말입니다.

 

우리가 죽어야 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구약에 예언된 사실을 알려 주십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것을 이미 구약의 선지자를 통해서 미리 알려 주셨다고 합니다.

 

그럼 구약에 미리 예언된 것을 살펴봅시다.

 

이사야 50장을 봅시다.

 

사 50:5-11=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열으셨으므로 내가 거역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6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 7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은즉 내가 수치를 당치 아니할 줄 아노라 8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뇨 나와 함께 설찌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뇨 내게 가까이 나아올찌어다 9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뇨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에게 먹히리라 10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뇨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찌어다 11 불을 피우고 횃불을 둘러 띤 자여 너희가 다 너희의 불꽃 가운데로 들어가며 너희의 피운 횃불 가운데로 들어갈찌어다 너희가 내 손에서 얻을 것이 이것이라 너희가 슬픔 중에 누우리라”

 

5절에 “여호와께서 내 귀를 열으셨으므로 내가 거역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 아니하였다” 고 하지요.

무슨 말인고 하니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뜻을 알려 주셨다는 말이에요.

즉 언약을 알려 주었다는 말입니다.

 

이건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기도할 때의 모습이에요.

예수님은 십자가라는 쓴 잔을 안 마시고자 아버지께 기도했어요.

그러자 아버지는 천사들을 보내서 쓴 잔을 마시라고 수종을 들게 합니다.

 

이걸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귀를 열어주셨다” 고 합니다.

“언약을 기억케 하셨다” 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어찌 마시지 않겠느냐 라면서 거절하지 않고 쓴 잔을 마시겠다고 한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자들에게 등을 내어 맡겼다고 합니다.

 

지금 예수님이 그러는 거에요.

아버지께서 자기 귀를 열어서 미리 예언된 것을 기억케 하셨다는 말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안 죽으려고 하니까 아버지가 내 귀를 열어서 아들아! 네가 죽어야 창세전에 나와 맺었던 그 언약이 이루어진다고 알려 주더란 것입니다.

 

그러니 너를 죽이고자 온 자들에게 순순히 네 몸을 맡기라고 하는 겁니다.

그 놈들이 너를 때리고 침을 뱉고 수욕을 가하더라도 피하지 말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7절과 9절에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셨다” 고 하는 대목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이라는 쓴 잔을 마실 수 있도록 아버지가 곁에서 도와주신다고 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도와주심으로서 십자가의 고난과 수욕을 이겨 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도움으로 자기를 비워서 복종 할 수가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누가 너를 죄인이라 정죄하더라도 아버지는 네가 의롭다는 것을 다 아시니 염려 말라는 겁니다.

지금 횃불을 들고 너를 죽이려고 온 자들은 내가 심판 하겠다고 하십니다.

네 원수를 내가 갚아 줄 테니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내가 그 놈들이 들고 온 그 횃불에 타서 죽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

결국 아버지는 예수님은 원수를 심판하는 근거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어요.

 

첫째로는, 자기 백성들을 대신하여 죽는 대속 제물로서의 죽음이에요.

둘째로는, 원수들을 심판하는 근거로서의 죽음이에요.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을 대신하여서 죽음으로 나아가고 있어요.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신 자들을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자 제자들의 죽음을 자신이 대신 담당하고자 날 잡아 가라고 하고 있어요. 

그리고 자신들을 죽이는 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인 어둠에 세력들이라는 것을 폭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일석이조인 셈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아야 해요.

하나님은 언약을 위해서 아들을 죽음으로 내 밀고 있어요.

살고자 돕는 것이 아니고 죽으라고 돕고 있단 말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해요.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 속에는 우리의 모습도 담겨져 있어요.

우리는 예수님과 한 몸으로 연합이 된 자들이에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운명이 그대로 우리에게도 덮쳐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칼을 집에 꽂으라는 말 속에 두 가지 의미를 찾을 수가 있어요.

첫째로는, 칼에 힘으로 살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세상 힘을 의지하여 살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라는 뜻입니다.

 

둘째로는, 우리도 예수님처럼 언약을 위해서 죽음에 넘기워진다는 말입니다.

언약을 위하여 제물로서 희생이 될 것을 말해주고 있어요.

즉 예수님처럼 언약을 위하여 고난당할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서의 쓴 잔을 마시는 등 떠미심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칼을 집에 꽂으라고 하는 겁니다.

살고자 하지 말고 죽으라고 하는 거에요.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자신의 죽음 속으로 밀어 넣는 일을 하십니다.

우리를 죽음으로 떠미는 일을 시키십니다.

이게 예수님이 부활 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이에요.

 

요한복음 20장을 봅시다.

 

요 19:19-23=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부활하셨어요.

그리곤 제자들을 찾아 갑니다.

찾아 가셔서 평강을 전합니다.

 

여기서 평강이란? 하늘나라 평강이에요.

죽음을 이기고 얻어진 평강이에요.

그리고는 파송을 하십니다.

 

어떻게 파송하는가 하면 아버지가 예수님을 파송 하신 그 원리에 따라서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낸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하지요.

아버지가 예수님을 이 세상에 어떻게 보냈는가요?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죽어서 그들의 죄사함을 주시기 위함으로 보내셨잖아요.

그와 똑같이 예수님도 제자들을 죄사함을 위하여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죽음을 가지고 자기 백성들을 찾아내는 일에 사용을 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왜? 죽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도를 전하다가 죽임을 당합니다.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이 주어진다는 새 언약이라는 복음을 증거 하다가 죽임 당해요.

 

이게 두 증인들이 죽음이에요.

그러니 제자들이 죽음 속에는 예수님의 죽음이 함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파송 하실 때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고 나를 영접하는 자는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예수를 이 세상에 파송을 하였는데 그 예수를 영접하는 자는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도 제자들을 보내면서 너희들을 영접하는 자들은 내 백성으로 간주해 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령을 주십니다.

이제 성령이 주도적으로 이 일을 하실 것입니다.

제자들은 성령의 이끌림으로 예수의 증인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여기에 필연적으로 예수님이 당하셨던 그 고난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출교를 당하고 죽임 당하게 되어 있어요.

 

죽음의 두려움은 인간의 힘으로는 이길 수가 없기 때문에 성령을 주어서 보내시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하여금 제자들을 돕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기도 할 때 아버지가 천사들을 보내서 수종을 들게 하신 것과 같아요.

 

성령이 제자들을 예수의 길로 가도록 돕고 있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이러한 일들이 실제로 일어납니다.

제자들은 하나 같이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하다가 죽음에 넘기어지게 되었어요.

극심한 핍박 속으로 뛰어 들게 되었어요.

 

단 한 사람도 예수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대접을 받고 잘 산 사람이 없어요.

모두가 비참 할 정도로 고난을 받고 죽임 당했어요.

모두가 예수님의 운명으로 밀쳐짐을 당하고 예수님처럼 쓴 잔을 마시고 죽었어요.

 

우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하신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해요.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신다고 하셨지요.

이건 싸우러 보낸 것이 아니에요.

죽으라고 보낸 겁니다.

 

지금 이 원리가 바로 아버지가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낸 원리에요.

아버지가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낼 때 죽으라고 보냈어요.

그래서 예수라는 이름으로 오신 겁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죽는다는 이름이에요.

 

그런데 그 일을 지금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대로 하고 있어요.

예수의 이름으로 이리 가운데로 가서 죽으라고 보내고 있어요.

제자들은 예수가 되어서 이리들에게 잡아먹히려고 보내어진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예수님이 제자들 속에 숨어서 이리에게 먹힘 당하기 위하여 가신 것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을 이리의 먹잇감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하나님이 예수님을 자기 백성들의 먹잇감으로 보내신 것과 같아요.

자기 백성들이 예수님을 죽였지요.

 

그러자 하나님은 예수님의 그 죽음으로 자기 백성들을 살려내는 일을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자기 백성들 손에 죽게 한 것은 자기 백성들을 죄인으로 만들어서 긍휼로 구원코자 하심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내가 예수를 죽인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린 예수를 죽인 자들이에요.

그리고 그 예수의 죽음을 근거로 용서를 받았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안으로 귀속을 시켜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살게 만드셨단 말입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이 역사라는 세계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매카니즘이에요.

하나님은 성도들도 이 원리로 다루어가세요.

 

이걸 요한계시록 11장의 두 증인으로 말씀해 주셨어요.

 

계 11:1-13=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2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3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4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5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지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6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7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8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9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10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11 삼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12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13 그 시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하나님이 두 증인들에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지요.

이는 말씀을 말해요.

하나님이 두 증인들에게 말씀을 주신 겁니다.

무슨 말씀인고 하니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이에요.

 

이게 요한계시록 10장에서 작은 책으로 나타납니다.

먼저 작은 책을 먹인 뒤에 율법 교회로 보냅니다.

작은 책이란? 곧 새 언약의 말씀을 상징해요.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이 주어진다는 복음이에요.

 

두 증인들이 들어가서 척량하는 교회가 바로 율법 교회를 상징해요

이건 마치 예수님이 유대교 율법주의자들에게 파송을 받아 오신 것과 같아요.

예수님이 율법 성전에 들어가서 율법 신앙을 틀렸다고 책망하지요.

그러자 율법주의자들이 예수를 죽입니다.

 

이것은 마치 양이 이리 가운데로 들어 간 것과 같아요.

죽임 당하기 위해서 가신 거에요.

이 일을 역사 속에서 제자들을 가지고 반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역사 속에는 항상 율법 신앙이 예수의 대적자로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증인들도 새 언약이라는 복음으로 옛 언약에 속한 자들을 고발하기 위하여 갑니다.

그러자 옛 언약에 속한 자들이 두 증인들을 죽입니다.

마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처럼 말이에요.

두 증인들은 예수님이 하신 그대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증인들이 바로 우리들이에요.

모든 성도가 두 증인이에요.

두 증인들을 예수님의 피 바름을 입은 자들이에요.

그래서 가는 곳마다 예수님의 피를 증거합니다.

 

이 일을 하라고 예수의 이름으로 성령을 보내 주신 겁니다.

예수님은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을 보내 주셨어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신 성령은 성도를 예수님을 대신하여 살게 만듭니다.

 

성령이 성도들을 예수님처럼 살게 인도하세요.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성도들은 자기의 원함과 상관없이 예수님처럼 죽임 당하는 길로 이끌림을 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 이걸 우리 삶에 적용해 봅시다.

 

하나님은 성도의 육신을 버리는 카드로 사용하세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버릴 것을 먼저 주셨어요.

땅에 속한 몸을 먼저 주셨어요.

 

고린도전서 15장을 봅시다.

 

고전 15:35-49=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36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37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뿐이로되 38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39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40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41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42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48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바울은 우리 몸을 씨로 비유하고 있어요.

땅에 속한 몸은 씨처럼 죽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땅에 속한 몸 속에 언약으로 하늘에 속한 몸을 담아 놓았어요.

하늘에 속한 몸은 땅에 속한 몸이 죽음으로서 태어납니다.

 

먼저 무슨 몸을 주었다고 합니까?

흙에 속한 몸을 주었다고 하지요.

육에 몸으로 심고 영에 몸으로 산다고 하지요.

그러니 육신의 죽음을 씨앗을 뿌리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겁니다.

땅에 몸이 죽으면 하늘에 있는 몸을 입으니 걱정 하지 말라는 거에요.

 

이 일을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 주셨어요.

예수님도 땅에 속한 몸을 씨앗처럼 죽었어요.

그리고 하늘에 속한 몸을 입으셨어요.

 

요한복음 10장을 봅시다.

 

요 10:17-18=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잘 보세요.

예수님이 지금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하지요.

무슨 말인가요?

지금 있는 목숨을 버리는 것은 다른 목숨을 얻고자 함이라는 말입니다.

 

지금 목숨이 어떤 목숨인가요?

육신으로 오신 목숨이에요.

육신으로 오신 목숨을 버리는 것은 하늘에 있는 목숨을 얻기 위함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니 지금 예수님은 땅에 목숨과 하늘에 목숨을 바꿔치기 하시는 거에요.

 

쉬운 말로 헌집을 주고 새집을 받고자 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지금 스스로의 목숨을 내어주고 있는 거에요.

우리가 흔히 말을 할 때 마귀가 예수를 죽였다고 하지만 실상은 예수님이 스스로 마귀에게 목숨을 내어준 것이에요.

 

그래서 나는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취할 권세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버지로부터 받은 계명이라고 합니다.

계명이란 다른 말로 언약이에요.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약속을 받았어요.

땅에 속한 목숨이 죽으면 하늘에 있는 목숨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이 땅에 오신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와 약속하신 것을 이루기 위하여 하늘에 목숨을 얻고자 땅에 목숨을 반납하는 길로 가신 거에요.

 

이건 예수님만 그런게 아니에요.

우리도 예수님처럼 두 목숨이 있어요.

그 언약(계명)을 받았어요.

 

사도 바울이 이 사실을 삼층천에 올라가서 알고 보았어요.

삼층천에 가 보니 거기엔 이미 구원이 완성이 된 바울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 땅에 있는 바울은 씨와 같은 바울인 겁니다.

하늘에 있는 바울이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은 바울인 거에요.

 

그래서 바울은 이 세상에 살면서 예수님처럼 죽음의 길로 나선 겁니다.

바울의 소망은 빨리 죽는 것이었어요.

육신의 죽음이 하늘에 있는 몸을 덧입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먼저 버릴 목숨을 주시는 것은 이는 다시 얻을 목숨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하심입니다.

우리 몸은 씨에요.

언약을 담고 있는 씨앗이에요.

 

우리 육신은 씨와 같아요.

씨는 반드시 죽어야 해요.

그 속에 죽지 아니할 몸을 담아 놓았어요.

그러니 영생이라는 몸은 육신의 죽음으로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에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하늘에 몸을 입었어요.

그래서 자기 백성들도 이러한 길로 인도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처럼 죽임 당하는 길로 인도하시는 거에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하늘에 속한 자들을 이 세상에서는 씨앗처럼 죽임당하는 모습으로 살게 하신 것입니다.

씨는 반드시 자신이 썩어질 흙(땅)을 필요로 해요.

 

하나님은 씨의 죽음을 통해서 영생을 끄집어내는 일을 하세요.

예수님의 육신 속에도 영생이 있어요.

그 영생을 끄집어내시려고 죽음에 내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속한 자들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종말은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창조를 담고 있는 겁니다.

십자가는 육신의 종말이지만 영생의 시작이에요.

 

십자가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겁니다.

역사에서 보면 십자가는 종말이에요.

죽음이고 끝이에요.

 

그러나 묵시에서 보면 시작이에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역사로서의 종말이고 묵시로서의 시작이에요.

언약적으로 본다면 옛 언약의 종말이고 새 언약의 출발이에요.

시대적으로 보면 구약의 끝이고 신약의 시작이에요.

 

우리는 옛 언약 아래서 태어나요.

구약으로 태어난단 말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통해서 새 언약으로 빼내심을 입게 되어요.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 온단 말입니다.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 오는 과정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어요.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구약에 사람이 신약의 사람으로 바뀌었어요.

이걸 다른 말로 땅 사람이 하늘에 사람으로 바뀐단 말입니다.

역사에서 묵시로 바뀐다고 해요.

 

성령이 오셔서 이 사실을 깨닫게 하시고 믿어지게 하세요.

그리고 삶에 적용을 시키세요.

그래서 제자들이 오순절 성령을 받자 말자 죽음 속으로 뛰어드는 삶으로 이끌림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어요.

감사하고 기뻐해야 할 일이에요.

하늘에 속한 자로서의 삶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어떻게 보느냐의 관점에 차이에요.

육에 속한 자는 끝으로 보기 때문에 피하고자 하고 슬퍼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에 속한 자들은 죽음을 하늘나라로 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반갑게 맞이하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제자들은 죽음을 끝으로 보고 있어요.

아직 성령이 오시기 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살고자 행동을 하고 있는 겁니다.

칼의 힘을 의지하여서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알려 줍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살 자가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죽임 당하여야 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칼을 의지하지 말고 도리어 칼을 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것은 의지할 것이 아니라 도리어 버려야 할 것이라고 알려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죽음에 넘기우는 일로서 본을 보여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자 제자들도 이렇게 하였어요.

예수 때문에 핍박 받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기뻐하였어요.

 

아버지의 뜻은 죄인이 죽는 것이에요.

그런데 제자들은 살고자 하고 있어요.

예수님도 우리와 동일한 몸을 가지셨어요.

그럼에도 육신의 본능에 반하는 행동을 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이 살아가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죽기 위함입니다.

자신의 죽음으로 자기 백성들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건져 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본능에 반하는 모습으로 자기 몸을 제자들 대신 내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힘이 모자라서 군사들에게 순순히 체포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살아야겠다고 하셨으면 천사들을 동원해서라고 싸울 수 있었어요.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아버지와의 언약을 위해서입니다.

아버지와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하신 언약을 위해서 순순히 잡혀 주신 거에요.

 

그래서 성경을 응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시는 거에요.

예수님은 철저히 성경을 응하기 위한 삶을 사셨어요.

언약을 위한 삶을 사셨단 말입니다.

이는 언약을 위하여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칼을 집에 꽂으라 하시면서 아버지께서 주신 진을 어찌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 라고 하신 겁니다.

 

11절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예수님이 마셔야 할 잔은 십자가에 죽는 것입니다.

자신 죽어야 하는 것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잔이에요.

계명이에요.

 

결국 예수님의 인생은 버림을 전제로 한 삶이었습니다.

살고자 하지 않고 죽고자 하는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이게 하늘나라 백성들의 이 세상에서의 삶에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살고자 하여 검을 휘두르니까 검을 도로 꽂으라고 하신 거에요.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과 대적하여 이기는 자가 아니에요.

도리어 세상으로부터 버려짐을 당하고 죽음을 당하여야 하는 자들입니다.

죽음으로서 이 세상의 악함을 고발하여야 하는 자들이에요.

이걸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라고 합니다.

 

성도는 세상의 악을 고발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자들이에요.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들처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살 것이라고 하셨어요.

 

성도가 마셔야 할 잔은 살기 위해 검을 휘두르지 않고 칼을 집에 도로 꽂는 것입니다.

칼을 집에 꽂으라는 것은 살고자 하지 말고 죽고자 하는 자세로 살라는 말입니다.

성도는 세상을 역설적으로 살아야 하는 자들이에요.

검을 꽂으란 말은 힘을 버리란 말이에요.

 

신앙의 힘이란? 세상에 힘을 모으는 것이 아니고 세상 힘을 버리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살아남고자 하면 세상과 친해야 해요.

세상과 친하게 지내자면 세상가치관으로 살아가야 해요.

하지만 세상을 떠나고자 한다면 세상 권세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성도를 저주받은 세상에서 빼내기 위함이지 안주하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구원 속에는 땅에 속한 복이 없어요.

모두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 담겨져 있어요.

 

성도에게 세상 것을 버리라고 하는 것은 세상이 하나님께 저주받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도가 세상에서 안주하고자 세상 것을 얻고자 하는 것을 십자가의 원수들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죽이는 것이지 채우는 것이 아니에요.

베드로처럼 칼의 힘으로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칼을 집에 꽂으며 살아야 합니다.

칼을 집에 꽂으라는 말은 믿음으로 당하는 고난을 피하려 하지 말고 그대로 당하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처럼 살고자 칼을 휘두른다면(힘을 쓴다면) 하나님이 주신 잔을 피하는 것이 됩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시다.

 

베드로는 칼로 세상을 정복하는 것으로 살고자 하였지만,

예수님은 칼에 삼키운바 되는 삶을 사셨습니다.

베드로가 꿈꾸는 세상은 힘으로 다스려지는 나라이지만,

예수님이 꿈꾸는 나라는 독자적인 힘이 필요가 없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나라입니다.

 

성도는 칼을 집에 꽂음으로서 예수님이 마신 쓴 잔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마신 쓴 잔을 기억하라는 것은 예수님은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사셨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응하게 하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기꺼이 버림으로 나아가신 예수님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우린 모두가 그 예수님의 길을 가도록 부르심을 입고 택하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이러한 부르심과 택하심을 기억하고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칼에 힘으로 살고자 합니다. 칼이 없으면 죽는 줄 압니다. 그리하여 눈만 뜨면 칼을 달라고 울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이 악이고 죄인 줄 알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게 악이고 죄인 줄을 알면서도 우린 그렇게 살아갈 자신이 없습니다. 이는 힘으로도 안 되고 능으로도 안 되고 오직 여호와의 신으로만 가능하오니 주에 성령으로 우리를 간섭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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