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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로마서 강해

♣(성경강해)77강. 하나님 나라 가치로 사는 것 (롬 14:13-23)

by coroa 2021. 12. 19.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77강. 하나님 나라 가치로 사는 것 (롬 14:13-23)

-.정낙원 목사

 

롬 14:13-23=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14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 되니라 15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16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18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19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20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 21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22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23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그런즉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서로 상처가 되고 부딪힐만한 것들을 두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씀 속에 바울이 교회에 바라는 심정이 담겨져 있습니다.

한마디로 내가 옳다 네가 옳다 서로 다투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자기 생각이 있습니다.

자기 생각이 고착화 되면 편견이 됩니다.

편견은 결국 분리를 낳게 됩니다.

 

물론 복음과 비 복음은 분리가 되어야 합니다.

당연히 그래야지만 해요.

하지만 로마서 12장 이후에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진리와 비진리의 싸움이 아니고 복음을 감당하는 수준의 차이로 나타나는 갈등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되느냐 안 되느냐!

안식일을 지켜야 하느냐 마느냐! 라는 식의 신앙적 양심의 문제들이에요.

어떤 사람은 먹고 마시는 것이나 날을 지키는 것으로부터 자유하고,

어떤 사람은 자유치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유하는 것이 옳으냐 아니면 자유치 못한 것이 옳으냐 라는 것을 말하고 있지 않고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차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들로 서로 다투지 말고 이해하고 용납하라는 겁니다.

그러한 것으로 형제간에 싸울 문제가 아니란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보면 큰 싸움에는 강한데 의외로 작은 싸움에 약해요.

진리 문제에는 강한데 그 진리를 적용하고 사는 데에는 무기력해요.

쉬운 말로 적을 때려잡는 데는 출중한데 정작 형제들끼리 알콩 달콩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일에는 낙제점이에요.

 

이게 신앙의 역리 현상이에요.

마귀가 자꾸만 우리가 싸워야 할 것은 놓치게 하고 우리가 싸울 필요가 없는 것으로 싸우게 하는 것입니다.

 

마치 에덴동산에서 먹고 배부름을 얻을 생명과로부터는 눈을 가리고 먹으면 죽을 선악과를 놓고 싸우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선악과 문제를 가지고 백날 싸워도 소용이 없어요.

그건 이겨도 진 싸움이에요.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었느냐 안 먹었느냐를 묻기 전에 생명과를 먹었느냐를 묻고 있어요.

생명과를 먹지 않으면 소용이 없어요.

그러므로 생명과를 먹지 않고서는 선악과를 먹었네 안 먹었네 백날 싸워도 공중에 대고 헛발질 하는 것과 같아요.

 

지금 로마교회가 이 싸움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바울은 야~ 그딴 것 가지고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건 신앙생활의 본질이 아니란 겁니다.

신앙의 본질은 성령 안에서 하나 되어서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쉬운 말로 교리적인 것으로 다투지 말라는 겁니다.

너희는 이미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교리를 지나온 사람들 아니냐!

그런데도 아직까지 교리적인 것으로 싸우고 있으면 어떻게 하느냐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걸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예수의 마음으로 서로 섬기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싸움을 하여야지 예수를 믿느냐 안 믿느냐 라는 싸움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미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냐!

그럼 그리스도인으로 서로 화평하고 사랑으로 하나 되어 살아가야지 아직도 너 그리스도인 맞아 안 맞아 라고 싸우면 어찌 하느냐입니다.

 

그렇다고 교리를 간과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다만 교회 안에는 그 교리를 삶 속에서 적용하며 살아가는 것에는 성도 간에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이해하면서 마치 어린 아이가 자라기를 기다리듯이 참고 포용하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세요.

 

이 이야기를 누구에게 합니까?

교리를 잘 안다고 하는 자들에게 하고 있어요.

쉬운 말로 너희는 처음부터 어른이 되었느냐!

아니지 않느냐!

너희도 다 어린아이로 시작하여서 장성한 자가 되지 않았느냐!

그럼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설령 분별없는 행동을 하여도 조금 참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것은 선악과 적인 것을 가지고 싸우지 말라는 겁니다.

 

정작 우리가 싸워야 하는 것들은 생명과 적인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 은혜로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에요.

그런데 우린 옳고 그름이라는 선악과에 매몰되어서 엉뚱한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가 그렇게 미혹하고 있는 겁니다.

 

분명히 말합니다.

마귀는 우리의 구원을 어떻게 하지를 못해요.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의 구원을 빼앗아 갈 수가 없어요.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어요.

 

하지만 마귀는 우리의 구원에 즐거움과 기쁨을 빼앗아 갈 수는 있어요.

놓치게 한단 말입니다.

어떻게 빼앗는가 하면 비 본질적인 것으로 쌈빡질 하게 만들어서 빼앗아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려야 하는데 엉뚱한 것으로 싸우게 하여서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원망을 갖게 하여서 마음을 지옥으로 만들어 버려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식물로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식물이란? 율법적 신앙을 말해요.

즉 먹고 마시는 것과 날과 달을 지키는 것이에요.

이미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들에게는 이러한 것은 해도 의가 되지 않고 안한다고 해서 불의가 되지도 않아요.

 

이건 각자 신앙의 차이에요.

신앙을 담아 내는 그릇의 문제에요.

그럼에도 우리는 이러한 차이성으로 인하여 한 교회 안에서 서로 다투고 싸워서 원수가 되어서 얼굴을 붉히고 시험에 들어서 급기야 교회를 떠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고 초대교회로부터 늘 있어 왔었어요.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이나 날과 달을 지키는 것들인 식물의 문제로 싸우지 말고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합니다.

 

우리는 교리는 해박한데!

그 교리를 담아낼 그릇이 빈약합니다.

그러다 보니 교리를 아는 것이 법이 되어서 사람을 죽이는 칼로 사용되어지고 있어요.

요즘말로 살려야 할 복음을 가지고 죽이는 일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중요한 말을 합니다.

교리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에요.

이 말을 잘 이해하세요.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가 교리를 알아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교리는 구원을 받은 자들에게 너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에 대하여 말해주고 있는 것이지 그 교리를 알아서 구원을 얻어 내라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걸 놓치지 마세요.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한 싸움은 없어요.

그것은 예수님이 홀로 담당 하시는 것이에요.

구원은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노력해서 따 내는 것이 아니에요.

그런 의미로 우리가 교리를 안다고 해서 구원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홀로 이루신 구원을 혜택을 입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란?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한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 받은 자로서 감사하면서 서로 사랑하고 하나님의 그 은혜의 풍성함 안에서 알콩달콩 살아가는 싸움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12장 이후에는 계속하여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은혜로 주신 구원에 감사와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어요.

왜? 그러느냐?

우리가 싸울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싸운다고 그러는 거에요.

그러니 헛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제발 헛 싸움 하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율법 아래 있던 자들을 은혜 아래로 옮겨 놓고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너희가 이렇게 구원을 받았다!

너희가 이러한 은혜를 입고 산다! 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교리에요.

 

교리를 알면 감사가 나와야 해요.

야~! 우리가 대단한 은혜를 입었구나!

내가 엄청난 축복을 받았구나!

그러니 하나님이 주신 그 구원에 감사하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리라는 복음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는 이상한 일들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 울산목양교회 성도들아!

엉뚱한 것으로 싸우지 말고 한 성령 안에서 평화롭게 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오해하기를 성경적 지식을 많이 아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마치 수능시험 준비하는 고 3 수험생들처럼 머리 싸매고 성경적인 지식을 습득하는 일에 올인하고 있습니다.

 

설교 많이 듣는 것이 신앙인 줄 알고 있어요.

그래서 하는 말이 나는 어떤 목사 설교 듣고 있어요 라고 해요.

그러면서 그나마 예전에 조금 하던 교회 일들도 다 놓았어요.

교회도 안가고, 봉사도 안하고, 연보도 안하고, 기도도 안하고,,,,

아무것도 안 해요.

오로지 설교 듣는데요.

마치 안하는 것이 복음적인 것이라 생각하고 있어요.

이건 아니에요.

 

그건 밥만 잔뜩 쳐 먹고 집구석에서 빈둥거리고 노는 것과 같아요.

이런 자들을 식충이라고 하고 암적 존재라고 해요.

제가 아는 어떤 인간은 나이가 40 넘었는데 주둥이로는 복음 복음 하면서 80 노모에게 얹혀서 아무 일도 안하고 놈팽이처럼 늙은 어머니 등골 빼먹고 사는 인간이 있어요.

말로는 청산유수에요.

이게 모두가 복음을 자기 게으름을 합리화 하고 사욕을 좇는데 도구로 이용하고 있는 겁니다.

 

아니 복음 아는게 무슨 벼슬이라도 되나요?

아무리 설교 많이 들으면 뭣합니까?

그 설교가 자기 안에서 생명의 능력이 되어서 삶으로 나타나지를 않는데!

이건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이에요.

 

그러다 보니 머리로 아는 것은 많은데 마음은 냉골인 겁니다.

까칠해서 다가 갈수가 없어요.

입만 열면 자기만 옳다고 하면서 남을 헐뜯고 비판과 정죄로 시체 썩는 냄새를 풍기고 있어요.

교회에 거치는 자가 되고 말아요.

이건 마귀만 좋게 하는 어부지리에요.

 

어부지리(漁父之利)란? 조개하고 물새가 서로 싸우다가 조개가 물새 주둥이를 물고 입을 닫아 버리자 물새는 날아가지 못하고 버둥거리다가 마침 지나가는 어부에게 잡히고 말았다는 고사에요.

우리가 지금 그런 짓을 하고 있어요.

교회 안에서 서로 잘났다고 싸우며 예수가 주신 화목이 깨어지면 마귀만 좋게 하는 거에요.

 

우리가 성경을 상고하는 것은 어떤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에요.

즉 구약의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역사를 공부하고 신약의 교회사를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을 상고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 속에서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해 오셨는지를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으로 우리 삶 속에서 체득해 가야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성경이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의 역사를 바탕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속에서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먼 하늘에 뒷방 영감처럼 에헴~! 하고 자리 보존하고 계신 것이 아니고 실제 인간 세상에 오셔서 자기 백성들과 함께 동고동락을 하면서 함께 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대교회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을 신약 성경으로 주신 것은 예수님이 성령으로 성도들 가운데 오셔서 함께 동거동락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동고동락하심이 신앙생활이에요.

 

신앙생활이란? 용서 받은 자로 사는 것입니다.

우린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종이든 자유자든, 부자이든 가난한 자이든, 많이 배운 자이든 못 배운 자이든,

모두가 부르심을 입었고 동일하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다 같은 분량의 용서를 받은 자들입니다.

 

누군 큰 용서를 받았고, 누군 작은 용서를 받은 것이 아니에요.

누군 큰 은혜를 입었고, 누군 작은 은혜를 입은 것이 아니에요.

다 같은 용서와 은혜를 받았어요.

다만 그것을 깨닫는 차이일 뿐이에요.

많이 깨닫는 사람은 많이 감사하면서 누리고 살 것이며, 적게 깨닫는 자는 적게 감사하고 살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것으로 차별하고 다툴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린 동일하게 부르심을 입고 동일한 용서를 받은 자임에도 각자 신앙생활 하는 차이와 조건으로 서로 옳으니 그르니 판단하고 싸우고 있어요.

교회 안에서 너와 내가 하나가 된 우리로 살지 못하고 너와 나 각자로 살고 있는 겁니다.

 

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우린 그만큼 은혜의 풍성함으로 살지 못하고 있어요.

은혜 안에서도 법으로 살고 있어요.

야고보서가 말하듯이 교회 안에서도 세상의 신분으로 사람 간에 차별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걸 오늘 본문에서 한 마디로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은 관념이란 말입니다.

신앙의 관념은 죽은 것이에요.

 

야고보서 2장을 봅시다.

 

약 2:17-26=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23 이에 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야고보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야고보는 믿음과 행함을 몸과 영혼으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쉬운 말로 몸은 영혼을 담는 그릇과 같다는 말입니다.

영혼이 담겨지지 않는 그릇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행함이 이와 같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그릇이라고 한다면 행함은 내용이에요.

그래서 야고보서는 죽은 자들은 움직이지 않듯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22절을 보세요.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을 한다고 하지요.

이를 사역동사라고 해요.

그리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다는 것을 증거 한다고 하지요.

누구의 행함이라고 합니까?

그의 행함이지요.

 

그가 누구인가요?

믿음이에요.

믿음을 의인화 하면 예수님이에요.

 

그러니까 믿음(예수님)이 살아서 우리 안에서 어떤 행함을 유발시킨다는 말입니다.

누가 어떤 행함을 하면 아! 믿음이 저 사람 속에서 일을 하고 있구나! 를 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을 하여서 그 믿음이 온전하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뭔가요?

눈에 보이는가요?

아니면 손에 잡히는가요?

 

믿음이 어떻게 생겼습니까?

만질 수 있나요?

없어요.

 

믿음은 추상 명사에요.

분명히 있기는 한데 정형화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살아서 일을 해요.

이걸 행함이라고 합니다.

 

믿음은 어떤 일을 일으키는 능력이란 말입니다.

즉 믿음이 원인이 되어서 어떤 사건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이걸 사역 동사 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일을 하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로 나타나고 또한 사람과의 관계로 나타나요.

 

하나님 앞에서는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힘입고 나아가는 것으로 나타나요.

이걸 하나님과 화목 하는 것이라고 하고 다른 말로 하나님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사람에게 나타나면 섬기고 베풀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보듬고 안아주고 감싸는 모습으로 나타나요.

이걸 이웃 사랑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은 우리 몸으로 당신의 뜻을 펼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반드시 성경적 지식의 내용을 삶으로 표현이 되어 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하세요.

이건 완전하게 온전하게 한다는 말이 아니고 이러한 모습들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두 구조 즉 교리와 삶으로 되어 있는 것도 다 이와 같습니다.

야고보서 식으로 말하면 교리가 믿음이라고 한다면 삶은 행함입니다.

이 둘이 함께 일을 해요.

이 둘이 하나가 될 때 온전한 신앙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과 행함을 수레의 두 바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퀴 둘 중에 하나라도 결여되면 그건 온전한 신앙이 아니에요.

그런 신앙은 없어요.

예수가 그 속에 있다고 한다면 반드시 예수가 일으킨 행함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이 행함을 성령의 열매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는 금지 할 수 있는 법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즉 이건 자동적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행함을 강요하거나 가르칠 문제가 아니에요.

강요나 가르쳐서 나오는 행함은 종교에요.

 

그러나 예수 믿음은 종교가 아니고 신앙이에요.

신앙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행함은 금지 할 수가 없는 법이 되는 것입니다.

 

행함이 안 나온다는 것은 그 속에 예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야보고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을 귀신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없고 귀신이 그 속에 있으니까 말로만 믿음 믿음하지 그 믿음이 품고 있는 내용들을 삶으로 풀어내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입으로 믿는 것이 아니에요.

삶으로 사는 것이에요.

삶이 없는 것은 외식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구약교회의 모습이 바로 이러한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교회를 일컬어 한마디로 정의하기를 “이 백성들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서 12장 이후에 계속하여서 성도가 교회 안에서 행하여야 하는 일들을 말하고 있는 것은 너희가 로마서 1장에서 11장까지 말해온 믿음이라는 교리를 올바로 알았다고 한다면 그것이 머릿속에 지식으로 쌓여 있는 것이 아니고 손과 발의 움직임으로 행동화 되어서 삶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이후는 사도 바울의 교회를 향한 애틋한 사랑을 엿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 마음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이는 마치 가정 속에서 어머니가 철없는 동생이 형들 틈에 끼어서 잘못된 행동으로 구박당하는 것을 막아서고 있는 것과 같아요.

형들에게 나무라는 것입니다.

형이란 놈들이 동생의 철없는 행동 하나를 포용하지 못하느냐고!

 

형하고 동생하고 싸우면 부모는 옳고 그름으로 따지지 않아요.

왜? 형이 되어서 동생을 감싸지 못하느냐로 혼내요.

형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부모의 심정은 가족이란? 옳고 그름이라는 법으로 사는 자들이 아니고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고 감싸야 하는 사랑의 관계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로마 교회에게 부모의 심정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강하다고 하는 형들에게 믿음이 연약한 동생들을 잘 감싸 안으라고 말이에요.

그러므로 우리도 오늘 본문의 말씀 앞에서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믿음 강함이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지!

 

바울은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정의해 주고 있습니다.

 

17절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20절 “식물로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 나라는 육적 가치로 사는 곳이 아니고 영적 가치로 사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교회의 일이란? 어떤 일을 했느냐 안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일을 어떤 마음으로 했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일을 안 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고 그 일이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일에 능률을 내는 것이 아니에요.

사랑을 드러내야 해요.

우리 각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긍휼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강물처럼 흘러서 법으로 누구의 잘잘못을 정죄하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모든 허물들을 덮어 주고 서로 용서 받은 자끼리 화목하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정죄와 비판이 덮인바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교회 안에 믿음이 강하다고 하는 자들이 그 믿음으로 연약한 형제들을 감싸 안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그것도 모르냐고 타박하면서 비판과 정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주신 평화를 깨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믿음이 강하다고 하는 자들에게 강하게 질책하는 것입니다.

그래! 너희들의 그 잘난 신앙이 무엇을 낳고 있느냐!

사랑이 아니고 반목과 갈등을 초래한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이 말을 우리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로 의역을 한다면 철없는 동생 하나 돌보지 못하는 놈들이 무슨 형이라고 할 수가 있느냐!

형이라는 놈들이 어린 동생 하나 돌보지 못할 거면 나가서 죽으라는 말과 같습니다.

 

지금 교회 안에 자칭 믿음이 강한 자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과 같이 무얼 했느냐 안했느냐 라는 것으로 다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큰 은혜를 입고 사는지를 아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은혜 안에서 율법 아래서 먹고 마시는 것으로부터 자유한 자들에게 말합니다.

이름하여 믿음이 강한 자들입니다.

그 강함이 약함을 배려하는 것으로 나타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도리어 악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걸 강한 자의 자유가 때로는 연약한 자들을 넘어지게 하는 시험거리가 될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강한 자들에게 너희는 무엇이든지 먹을 수 있지만 그것이 약한 자들 눈에는 감당 할 수 없는 시험거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난 뭐든지 할 수 있어! 가 신앙이 아니고 난 뭐든지 할 수가 있지만 행여 나의 자유가 다른 사람에게 시험거리가 된다고 한다면 나는 과감하게 그 자유를 쓰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강함이라는 것입니다.

 

어른들이 왜? 어린 아이들 앞에서 행동을 조심합니까?

그 아이들이 마음에 상처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부간에도 아이들 앞에서는 싸우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른은 어린아이의 눈높이를 맞추어야 해요.

뭐든지 할 수 있는 자가 어른이 아니고 뭐든지 할 수가 있지만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 어른이에요.

 

신앙도 마찬가지에요.

믿음이 강한 자는 항상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배려하여야 해요.

그게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에요.

 

예수님께서 어린아이 하나를 실족시키면 연자 맷돌을 매고 바다에 빠져 죽으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강한 자가 연약한 자를 감싸 안지 못하고 시험 들고 넘어지게 한다면 차라리 바다에 빠져 죽으라는 말입니다.

그런 강함은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약함을 감싸지 못하는 강함은 폭력이고 악이에요.

 

이러한 자들에게 요즘 식으로 말하면 복음 아는 것을 엄청 대단한 능력을 가진 것처럼 말하지만 실상은 개뿔도 아니란 것입니다.

복음을 알면 뭣 하느냐 에요.

그 잘난 복음으로 남을 섬기고 봉사하고 교회나 사람에게 유익을 주지 못하고 도리어 잘난 척하면서 남을 시험 들게 하고 넘어지게 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모르는 것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누가 강한 자이냐?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아는 자들이에요.

직분이 높다고 해서 믿음이 강한 자들이 아니에요.

그리고 직분이 낮다고 해서 믿음이 약한 자도 아니에요.

믿음은 감사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께서 마리아가 옥합을 깨트린 것을 제자들이 시비를 걸 때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은 많이 사랑하고 적게 탕감 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고 했지요.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것은 극명하게 나타나요.

 

교회의 높은 직분도 교회 안에 약함을 감싸고 감당을 할 때 귀한 것이지 교회 일에 나 몰라라 하고 외면하면서 직분자임네 행세하는 것은 도리어 사람들에게 시험을 안겨 주는 것으로 악한 것이에요.

 

강함이란 약함을 감싸 안을 때 강함의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강함은 약함을 안기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잘난 척 하라고 준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의 직분을 준 것도 권세를 부리라고 준 것이 아니에요.

섬기라고 주었어요.

연약한 자들의 짐을 대신 지라고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도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입술로는 십자가 십자가 하면서 실제로는 그 십자가를 가지고 남을 죽이고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이후의 말씀들은 교리라는 법을 넘어온 자들에게 하는 말이에요.

 

인간의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난 의를 가진 자들에게 하는 말이에요.

더 이상 인간의 행함으로 정죄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자들에게 하는 말이에요.  

제가 이전에 교리만 알고 행함이 없는 것은 영지주의이고!

교리가 없는 행함은 종교라고 했습니다.

 

교리와 행함을 떨어질 수가 없어요.

하나에요.

믿음에 화합한 교리는 은혜와 사랑이라는 따뜻함으로 묻어 나와요.

즉 예수를 바로 만난 사람들은 마음이 따뜻하다는 말입니다.

 

우린 먼저 교리를 받습니다.

이것이 믿음과 하나 되면 생명이 되어서 나타나게 됩니다.

이 때 행함이 나옵니다.

 

믿음으로 하나 된 교리는 은혜로 따뜻함으로 나타나지만!

믿음이 결여된 교리는 법으로서 차가움이 나와요.

즉 지식으로 알아진 교리는 사람을 죽이는 독이 되어요.

 

지식으로 알아진 교리가 교만으로 나타나고 남을 실족 시키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식으로 알아진 교리는 아는 것과 믿는 것이 이원론으로 둘로 나타나요.

쉬운 말로 말은 맞는데 하는 짓은 아닌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복음을 자기 사욕을 좇는데 이용을 해요.

초대교회 안에도 이러한 영지주의자들이 있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바울은 교리적으로 안다고 하면서 잘난 척 하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너의 자유함이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보고 넘어지면 그것은 예수그리스도의 몸에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해를 끼치는 것이므로 악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오늘 본문에서 식물로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믿음이 연악한 자들의 행위를 가지고 법적인 잣대를 들이대서 하나님의 은혜성을 훼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업이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신 것이에요.

하나님은 율법 아래서 신음하고 죽어가는 자들을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은혜 안으로 불러 들여서 살려내는 일을 하셨어요.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음으로서 완성한 율법을 자유라는 이름으로 난 무엇이든지 할 수가 있어! 라고 하면서 그 일을 감당 할 수 없는 연약한 자들을 시험 들게 하고 넘어지게 한다면 그 자체가 예수님의 죽음에 의미를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를 짓는 것이라고 했어요.

 

영화를 보면 “18세 이상 관람가” 또는 “18세 미만 관람불가” 라는 것이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 영화는 18세 이상의 사람들만 보라는 것입니다.

사회에서는 18세를 성인으로 간주합니다.

 

성인이란? 사실과 허구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를 말해요.

그러니까 “18세 이상 관람가” 혹은 “18세 미만 관람불가” 라는 말은 이 영화를 보고서 사실인지 허구인지 분별 할 능력이 되는 사람만 보고 분간하지 못하는 사람은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분별할 수 없는 사람이 보게 되면 악영향을 끼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18세 이상 관람가” 혹은 “18세 미만 관람불가” 드라마나 영화가 어떤 것들입니까?

폭력물이나 음란물과 같은 것들이에요.

이러한 것들은 자라나는 아이들이 보게 되면 정신세계를 황폐하게 만들어요.

그래서 제한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도리가 무엇인지 아직까지 가치관이 정립이 되지 않은 아이들이 보게 되면 영화 속 내용을 현실과 분간치 못하고 흉내를 낼까봐서 그러는 겁니다.

그럼 사회에 해를 끼치는 사람으로 전락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법으로 금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훈장님 꿀단지처럼 어른들 혼자 몰래 먹고자 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나중에 어른이 되면 다 소화 할 수가 있어요.

그러니 어른이 될 때까지는 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드라마나 영화는 허구에요.

인간의 잠재된 욕망을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꾸며낸 허구에요.

그래서 “영화는 영화일 뿐 따라하지 말자” 라고 하는 거에요.

영화나 드라마는 인간들이 하고 싶은 것을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합법화 시켜 놓은 것입니다.

 

요즘 막장 드라마가 유행을 해요.

그런데 그런 드라마가 인기가 있어요.

인기가 있다는 것은 대리 만족을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도 환경만 주어진다고 한다면 그러고 싶다는 것이에요.

이게 우리 안에 잠재된 죄성이에요.

 

이는 결국 성경의 예언대로 종말이 되면 인간이 사람이 아니고 짐승이라는 것을 인간들 스스로가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는 사람이 아니고 짐승들이라는 것을 폭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나 드라마를 실제로 오인하고 따라하면 망해요.

그런데 그것을 미성년자들이 보게 되면 사실로 오인하게 되어요.

그렇기 때문에 아직까지 분별 할 수 없는 사람은 보아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옛말이 아이들 앞에서는 물도 함부로 마셔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따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것은 모두가 선한 것이에요.

하나님 보시기에 그렇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것들 중에는 인간들이 이해 할 수 없는 것들이 있어요.

 

예를 들어서 말합니다.

버섯을 보면 식용 버섯도 있고 독버섯도 있어요.

둘 다 하나님이 만드셨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들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이 필요에 의해서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에겐 독버섯은 나쁜 것이고 치명적인 것이에요.

이건 먹어선 안 되어요.

 

이걸 에덴동산의 생명과와 선악과로 비유합니다.

하나님은 생명과와 선악과를 만드셨습니다.

둘 다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었습니다.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만들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생명과는 먹되 선악과는 절대로 먹어선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했어요.

그럼 아담은 생명과를 먹고 선악과를 먹지 않으면 되어요.

그런데 아담은 먹으라고 한 것은 먹지 않고 먹지 말라는 것을 먹었어요.

선악과를 먹고 죽고 말았어요.

 

이건 극단적인 비유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은 미성년자가 성인 영화를 본 것과 같아요.

미성년자가 성인 영화를 보게 되면 치명적인 독(毒)으로 작용해요.

정신과 영혼은 피폐해지고 파멸에 이르게 되어요.

 

아담이 지금 그 꼴이 되고 만 것입니다.

감당 할 수도 없는 것을 먹은 겁니다.

만약에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생명과를 먹고 모든 것을 소화 할 수 있는 강한 자가 되었으면 선악과를 먹어도 별 문제가 되지 않아요.

 

지금부터 중요한 이야기를 하니까 잘 들으세요.

 

창세전 언약을 탁 깨 보면 그 안에 두 언약이 나와요.

죽이는 언약이 있고, 살리는 언약이 있어요.

이게 옛 언약과 새 언약으로 나타났어요.

 

에베소서 1장을 봅시다.

 

엡 1:4-7=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잘 보세요.

창세전이라는 말이 나오지요.

창세전이란? 만물이 창조되기 전이란 말입니다.

이건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하나님 나라를 말해요.

 

이걸 요한복음 1장에서 태초라고 합니다.

이 태초는 하나님 나라에요.

이를 편의상 공간적 태초라고 합니다.

공간적 태초란 말은 이 세상 바깥에 있는 하나님 나라 라는 뜻입니다.

이름하여 천국이에요.

 

예수님께서 우편 강도에게 오늘밤 나와 함께 낙원에 간다고 하지요.

그 낙원이 바로 태초의 세계인 천국이에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거기에 계셨어요.

태초에 계셨던 예수님이 만물이라는 이 세상에 오셨다가 다시 태초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창세전에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하지요.

이 때는 아직까지 우리가 만들어지기 전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구원하기로 하셨는가 하면 우리를 죄 아래 가두었다가 빼내는 것으로 작정을 하셨어요.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신다고 하지요.

이 말은 죄 아래 가두어진 자를 건져 낸다는 말입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우리는 하나님은 완전하고 완벽하신 분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창세전 언약을 보면 그렇지가 않아요.

우리를 죄 아래 가두었다가 빼내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어떻게 빼 내는가 하면 그 아들의 피로 빼내세요.

 

그의 피로 구속 곧 죄사함을 받는다고 하지요.

여기서 그의 피란 바로 예수님의 죽음을 말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시나리오를 쓰실 때 자기 백성들을 죄 아래 가두었다가 예수님의 피로 건져 내는 것으로 작정을 하신 것입니다.

 

이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만물을 만드셨어요.

아담을 창조합니다.

이제 아담을 이 시나리오대로 다루어 가십니다.

 

먼저 아담에게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 주십니다.

아담아! 나는 네가 저기 있는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어서 영원한 나라에서 영생 하시는 나와 함께 살기를 바란다!

그러니 너는 저기 있는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라고 합니다.

 

그리고 당부하시기를 저기 생명과 옆에 있는 선악과는 절대로 먹지 말아라!

그걸 먹는 날엔 너는 죽는다!

그러니 절대로 먹어선 안 된다!

강조하고 또 강조하고 알려 줍니다.

 

그러니까 아담에게 있어 생명과는 식용 버섯과 같고 선악과는 독버섯과 같은 것입니다.

아담이 먹을 것은 식용 버섯과 같은 생명과에요.

아담은 반드시 식용 버섯과 같은 생명과를 먹어야만 합니다.

그리곤 독버섯과 같은 선악과를 절대로 먹으면 안 되어요.

이게 하나님이 아담에게 내린 명령이에요.

 

그리곤 하나님은 뱀을 풀어 버립니다.

뱀이 아담(인간)에게 접근을 합니다.

그리곤 아담의 눈을 선악과 쪽으로 향하게 만듭니다.

 

보는 순간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웠기 때문입니다.

마치 미성년자가 성인영화를 본 것과 같아요.

보는 순간 이성이 마비가 되고 만 것입니다.

 

결국 아담은 하나님이 신신당부한 말을 잊은 채 선악과를 먹고 죽고 맙니다.

죄 아래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죄가 형성 된 것입니다.

 

죄가 뭐냐?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죄가 되려면 아담이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여야 해요.

 

하나님은 분명히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했어요.

그런데 아담이 뱀에 꾐에 넘어가 먹은 겁니다.

이러면 아담이 하나님을 원망 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은 분명히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했거든요.

 

흔히들 하나님께서 왜? 선악과를 만들었느냐!

선악과를 만든 것은 하나님이 죄를 조성하신 것이 아니냐? 라고들 말을 합니다.

그러나 죄는 하나님이 조성 하신 것이 아니에요.

인간들이 만든 거에요.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한 것을 인간이 먹고서는 그 책임을 하나님에게 돌릴 순 없어요.

 

하나님이 선악과를 만든 것이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에게 먹지 말라고 한 것이에요.

그럼 인간들은 안 먹으면 되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먹으라고 한 것은 안 먹고 먹지 말라는 것을 먹은 거에요.

이걸 하나님에게 책임을 돌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 선악과를 만들어 놓았어요.

선악과는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해요.

또한 뱀도 필요해요.

이들을 가지고 창세전 언약을 이루어 가는데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창세전 언약을 보면 인간들이 죄 아래 가두어져 있어야 하고!

이런 죄인들을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구원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인간들 스스로가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고 죽은 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만약에 아담이 선악과를 먹지 않고 생명과를 먹었으면 어찌 되었을까요?

그럼 영생하는 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창조가 된 아담에 의미가 사라져요.

 

창세전 언약은 아답이 죄 아래 가두어졌다가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구속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아담이 구속이 되려면 먼저 죄 아래 가두어짐이 우선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담이 선악과를 먹기 전에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된다고 하면 죄 아래서 건져지는 구원이 필요가 없게 되어요.

 

그럼 만물을 창조한 목적이 상실 되어요.

하나님의 목적은 인간(아담)이 죄로 인하여 죽은 자가 된 것을 예수님이 오셔서 자기 피로 구속시키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이 일을 위하여 선악과도 만들고 뱀도 만든 겁니다.

 

죄가 되려면 하나님께 불순종이 되어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이 그 명령에 불순종했어요.

하나님이 말렸는데 아담이 스스로 죄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죄를 조성했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죄의 나락으로 떨어진 아담을 창세전에 언약하신 시나리오대로 구원하는 일을 하시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그것이 가죽옷 사건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의 죄를 가리기 위하여 흠 없는 짐승을 죽입니다.

그리고 그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서 수치를 가려줍니다.

이 짐승은 곧 예수님을 상징해요.

 

이렇게 될 때 비로서 창세전 언약이 완성 된 그림이 되는 것입니다.

죄 아래 가두어진 자를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구원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역사 세계에서 펼쳐질 일들을 아담을 통해서 샘플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곤 하나님은 아담을 에덴동산으로부터 좇아냅니다.

에덴동산에 문을 잠가 버립니다.

천사들로 하여금 범죄한 아담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보초를 세운 것입니다.

 

이제 아담은 독자적으로 에덴동산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졌어요.

누군가를 기다려야 합니다.

에덴동산의 문을 열어주신 분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 분이 누구인가 하면 바로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님인 겁니다.

 

이제 아담은 쫓겨난 땅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선악과를 먹고 난 후 아담은 죽은 자가 되었어요.

죄인이 되었어요.

 

그럼 아담으로부터 태어나는 자는 모두가 죄 아래 가두어진 자로 태어나게 됩니다.

독자적으로 죄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게 되었어요.

누군가가 죄로부터 건져 주셔야 해요.

 

이걸 창세전 언약에서는 그 아들의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해 주신다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인간에게는 하등에 유익이 되지 않는 먹으면 죽는 독버섯과 같은 선악과를 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두신 것입니다.

 

에덴동산의 두 과실을 언약으로 이해 해 봅시다.

 

선악과는 먹으면 죽는 과실이고!

생명과는 먹으면 영생하는 과실입니다.

언약도 붙잡으면 죽은 언약이 있고, 붙잡으면 사는 언약이 있어요.

 

붙잡으면 죽는 언약은 율법이라는 옛 언약이고, 붙잡으면 사는 언약은 은혜라는 새 언약입니다.

옛 언약을 율법이라고 하고, 새 언약을 은혜라고 합니다.

율법을 붙잡으면 죽고, 은혜를 붙잡으면 삽니다.

 

하나님은 먼저 율법을 주었습니다.

이건 붙잡으면 죽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죽이는 언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을 봅니다.

 

롬 3:19-20=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이 뭘 말하고 있나요?

온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라고 하지요.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들로 하여금 너희들은 죄인이라는 것을 알려 주어서 하나님 앞에 입을 닫게 하고자 함입니다.

 

이 말은 곧 인간들이 죄인인데 자기가 죄인임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희는 저주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자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율법 앞에 서면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발당하게 되어 있어요.

이게 율법이 하는 역할이에요.

 

다른 말로 율법이 선악과처럼 인간을 죽음의 자리로 내려가게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행위로는 그 앞에 의롭다 할 육체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즉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는 것이 없다는 말이에요.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을 뿐이에요.

 

이 율법을 하나님은 구약 이스라엘에게 주었어요.

자기 백성들에게만 준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 이스라엘이 오해를 했어요.

율법을 지키면 영생이 주어지는 줄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율법을 지키기에 급급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어떤 율법사 청년이 나와서 묻습니다.

 

눅 10:25절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마 19:16-20절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 20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이 율법사 청년은 구약의 율법 신앙을 대변하는 자로 서 있는 것입니다.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선생님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이 물음 속에는 율법사의 신앙이 그대로 담겨져 있어요.

즉 구약 이스라엘의 신앙이 그대로 녹아져 있단 말입니다.

 

율법사의 말을 뜯어보면 영생을 인간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처럼 어떤 노력과 행동을 하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사는 예수님에게 영생 얻을 수 있는 방법론을 강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생은 얻고 싶은데 그 방법을 모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방법만 알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 율법사 청년은 율법 아래 있는 이스라엘을 상징한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가지고 영생을 얻어낼 수단으로 접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으로 너희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자 하였는데 인간들은 도리어 그 율법으로 영생을 따낼 궁리를 하고 있었어요.

 

원래 하나님은 영생은 그 아들의 피 뿌림으로 주신다고 언약을 했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노력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구약의 신앙은 율법 지킴을 근간으로 자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건 반칙이에요.

이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서 이 사실을 알려주신 겁니다.

영생은 율법을 지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12지파 속에서 12 제자를 끄집어내서 이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12 제자들은 구약의 12지파를 대표하는 자들입니다.

이제 12 제자들을 가지고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고 주 예수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알리기 시작을 합니다.

 

누구에게 알리는가 하면 율법 아래 있는 이스라엘에게 알립니다.

12제자들도 그들 속에서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도 예전엔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율법적 행위로 의를 만들고자 한 것이 틀렸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율법의 행위로 의로워지고자 하는 그것이 죄가 된다고 설파하기 시작을 합니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듣고 유대교에서 개종한 자들이 일어나기 시작을 합니다.

이들이 교회의 구성원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교회 안에 아직까지 율법 아래서 행하던 것들이 습관화 되어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자들이 있었어요.

아직까지 믿음이 연약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여서 그런 자들도 있었던 겁니다.

또한 유대교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에 미혹당하여서 그런 자들도 있었어요.

 

이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아직까지 율법적 행위를 붙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율법 아래서 행하여 오던 오래된 습관 일수도 있지만 아직까지 믿음이 확실치 않아서 그런 자들도 있었어요.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서도 율법적 규례인 먹고 마시는 것과 날과 달을 지키는 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도를 완전히 깨닫고 그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예수님의 십자가 도를 이해를 하면서도 아직까지 그것을 삶으로 자유하며 살아내지를 못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이 둘은 실력 경쟁을 하면 충돌을 하게 되어요.

이건 복음을 이해하는 깊이의 문제인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잘 이해하는 자들이 아직까지 복음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행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까 비유적으로 미성년자와 성인을 말한 것처럼 비록 모든 것을 다 수용하고 포용할 수 있는 성인이라고 하더라도 미성년자들 앞에서는 언행을 조심해야 하는 것처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들 앞에 시험거리가 될 만한 일들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성인과 미성년자와 같은 시각으로 이해하여야 해요.

 

교회 안에 무엇이든지 먹을 수 있는 성인도 있고, 아직까지 모든 것을 소화 할 수 없는 미성년자도 있어요.

무슨 말인가 하면 율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사람도 있고, 아직까지 율법적 관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적 관습이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율법을 완전히 벗어난 사람들의 행동이 시험거리가 될 수 있어요.

 

자기 맘대로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이 믿음이 연약한 자들의 눈에는 방탕과 방종으로 보일 수 있단 말입니다.

그럼 시험이 들어요.

 

바울이 그럽니다.

나는 먹고 마시는 것이나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는 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

그러한 것으로 정죄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바울은 모든 것을 소화 할 수 있는 18세 이상 관람가 에 속한 사람이에요.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되고 안 먹어도 되어요.

그것 때문에 죄다 아니다 하는 경지를 넘어서 있었어요.

 

하지만 자기는 마음대로 행동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자기처럼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미성년자들이 있다는 거에요.

그러므로 그들 앞에 거치는 것을 두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본분 14절을 보세요.

 

14절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 되니라”

 

예수 안에서는 속된 것은 없어요.

그러나 속 되다고 하는 그 사람에겐 여전히 속 된 것이 되어요.

무슨 말인고 하니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이 죄라고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이 스스로에게 죄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우상의 제물을 안 먹는 것이 좋아요.

먹으면 양심이 그것이 죄라고 고발하여서 죄책에 사로잡히게 되어요.

그럼 복음이 주는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지 못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어요.

그래서 이러한 사람들 앞에서는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15-18절을 보세요.

 

15-18=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16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만일 나의 자유함으로 인하여 먹고 마시는 것이 믿음이 연약한 형제가 보아서 근심거리가 된다면 그건 그리스도가 주신 자유를 남을 넘어지게 하는 것이므로 악한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네가 만약에 그 어린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런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네 어린 자식들 앞에서 그 아이들이 상처 받을 짓을 할 수가 있겠느냐 입니다.

이건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어! 라는 자유를 떠나서 연약한 형제를 시험 들게 하는 것이므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록 나는 그것을 하나 안 하나 상관이 없지만 믿음이 연약한 형제를 위해서라면 단언코 하지 않는 것이 믿음이 강한 자들이 취할 도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는 직분이 높을수록 책임이 커요.

믿음이 강할수록 책임감이 더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복음을 알수록 율법주의가 되어 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율법으로 의를 삼는 율법주의가 아니고 그리스도가 주신 자유를 내 몸에 사욕을 좇아가는 것으로 이용하지 않고 도리어 자기 몸에 사욕을 죽이는 것으로 사용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알고 믿음이 강할수록 교회 안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는 모습으로 행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내 자유는 내 것이 아니고 교회 안에 모인 성도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까?

교회 안에서 덕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차원의 것이 아니라 성령이 주는 자유 안에서 남을 배려하고 이해하여서 함께 그리스도의 평강과 희락과 화평을 누리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9절에서 화평 하는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의 자유함이 남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라면 과감히 하지 않는 것이 자유자의 모습이에요.

그리스도의 자유는 난 뭐든지 할 수 있어! 가 아니라 난 무엇이든지 할 수가 있지만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포기 할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해요.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중히 여기는 사람이 있어요.

즉 안식일을 지켜야 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 있어요.

예수 안에서는 날을 지키는 것도 의가 아니고 날을 안 지키는 것도 죄가 아니에요.

하지만 어떤 믿음이 연약한 형제가 생각하기를 주일을 지키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한다면 나는 믿음이 연약한 형제를 위한 것이라면 주일을 지키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자유란? 남을 배려하는 것이지 자기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준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준 것이지 우리 몸에 사욕을 좇으라고 준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관심사는 그리스도의 몸이지 우리가 아니에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들이에요.

지체는 몸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몸에 유익을 구하지 않는 지체는 더 이상 지체로서의 자격이 없어요.

 

어린 아이와 어른의 차이가 뭔가요?

어린 아이는 남을 배려하는 것을 모르고 어른은 알아요.

어린 아이는 자기 맘대로 살아도 어른은 자기 맘대로 안 살아요.

 

어른이란? 남을 의식하고 사는 자에요.

우리가 흔히 어른답지 못하다고 하잖아요.

어떨 때 그럽니까?

 

이번에 치러진 선거 과정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유력한 사람이 본처와 이혼을 하고서 딸 아이와 헤어져 살았어요.

그런데 그 분이 교육감 후보로 나온 겁니다.

 

이 사실을 미국에 있는 딸 아이가 알았어요.

그래서 우리 아빠는 교육감 자격이 없다고 하면서 글을 썼어요.

참 고약한 딸이지요.

딸은 법으로 아버지를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그 분이 상대방의 음해이고 모략이다 라고 하면서 여러가지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어요.

이게 어른스럽지 못한 겁니다.

부모스럽지 못한 거에요.

 

딸 아이가 법으로 나오면 부모는 은혜로 감싸야지요.

그런데 이 분은 법으로 맞대응하였어요.

이러면 옳고 그름을 떠나서 부모를 욕을 해요.

이게 어른스럽지 못한 행동인 것입니다.

 

딸 아이가 그러면 토를 달지 말고 부모로서 할 말이 없다고 하면서 딸에게 미안함을 구해야지요.

이건 부모 입장에서 이해하면 안 되어요.

딸 아이 입장에서 접근을 하여야 해요.

자기변명 할 건 다하고 나중에 딸아 미안하다! 라고 해보아야 이미 버스는 지나간 뒤에요.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에요.

우린 변명할 것이 없어요.

무조건 미안 할 것 뿐이에요.

 

이걸 사도 바울은 나는 모든 자에게 빚진 자라고 했어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고 보니 자기는 그 누구보다도 더 나쁜 악당인 것을 안 겁니다.

예수를 핍박한 자가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 하나 만으로도 할 말이 없는 겁니다.

누가 자기를 공격해도 맞받아쳐서 싸울 것이 없어요.

 

자긴 죄인 중에 죄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항상 지는 자로 산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하기를 내가 너희를 복음으로 낳았다고 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부모이지 선생이 아니라고 합니다.

 

선생과 부모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이가 있어요.

선생은 법으로 맺은 타자에요.

자기가 가르칠 것만 가르치고 삯을 받으면 되어요.

그 아이가 어떻게 되건 상관이 없어요.

 

그러나 부모는 그렇지 않아요.

아이가 올바르게 설 때까지 함께 울고 웃어요.

어디까지가 없어요.

아이가 스스로 설 때까지 에요.

부모는 아이의 못남을 자기 탓으로 돌려요.

형여 자식이 잘못하면 그것은 다 내 부덕의 소치라고 하면서 자기 가슴을 칩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를 보세요.

부모의 아픈 마음이 절절히 배여 있음을 알게 되어요.

오늘 본문에서도 이 마음들이 절절히 배여 있어요.

바울의 이 마음이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인 것입니다.

 

고린도교회가 어떤 교회입니까?

가장 말썽 많은 교회였어요.

 

바울파다 게바파다 아볼로파다 하면서 파당이 생기고 근친상간이 일어나고 서로 소송을 하고 반목과 갈등으로 싸웠어요.

이러한 것은 서로가 잘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이에요.

법으로 판단하니까 내가 옳고 너는 틀렸다고 하는 겁니다.

 

이러한 교회에 바울은 자기의 약함을 자랑하고 있어요.

자신의 영웅담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연약함을 토로하고 있어요.

늘 자기는 죽임 당하는 양 같은 신세로 살았다고 합니다.

 

때리면 맞고!

욕하면 욕을 들어 먹고!

정처가 없이 쫓겨 다니고!

만물의 찌끼같이 살았다고 합니다.

 

무엇을 말하고자 합니까?

이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잘남을 증명하기 위하여 남을 넘어뜨리고 죽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를 살리기 위하여 내가 넘어지고 부인당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는 강한 자이지만 그 강함을 약함을 위하여 희생하는 것으로 사용이 되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을 얻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21절에서 형제가 넘어지고 시험 드는 일이라고 한다면 자기는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고 한 것입니다.

 

자신은 고기도 먹고 포도주도 마실 수 있지만 연약한 자를 위하여 난 할 수 있어가 아니라, 안 할래!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를 또 다른 모습으로 말하면 내게 있는 것으로 남을 섬기고 봉사하고 내어주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교회를 위하여 더 애쓰고 봉사하고 헌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은혜를 많이 받은 성도들 일수록 많은 일을 하게 되어 있어요.

은혜 받은 일과 수고하고 힘 쓰는 일을 비례하여 나타나요.

많이 받은 자는 많이 내어 놓고 적게 받은 자는 적게 내어 놓아요.

 

제가 복음을 전하면서 많이 경험하는 이야기입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서 달음질을 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성도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고 증거를 합니다.

은혜가 품고 있는 내용물들을 삶으로 표현하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걸 야고보서에서 믿음과 행함이라고 합니다.

 

그럼 꼭 하지 않는 자들이 그건 행위주의가 아닌가요! 라고 태클을 걸어요.

어떤 이들은 이러한 말씀 앞에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일어나는데 반하여 어떤 이들을 이를 부득부득 갈아요.

자기 죄가 폭로당하니까 싫은 겁니다.

복음 안다고 하면서 게으름을 자기 합리화 하면서 거드름을 피웠는데 그것이 바로 복음을 자기 사욕에 이용하는 악이라는 것으로 고발당하니까 화가 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 부분 교회에나 사람에게 거치는 자들이에요.

아무 것도 안 해요.

주둥이만 살아서 따박 따박하지!

어느 교회이고 교회 안에는 이런 자들이 꼭 있어요.

 

저희 교회도 동일해요.

복음을 증거하면 복음에 합당한 자들과 합당치 못한 자들이 쫙 갈라져요.

어떤 사람들은 복음이 삶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어떤 자들은 반 복음적으로 나타나요.

신기해요.

 

그래서 어떤 이는 복음으로 인하여 생명이 살아나고!

어떤 이는 복음으로 인하여 더 패역해져가요.

마치 살아 있는 나무에게 물을 주면 더욱 더 푸르러지고!

죽은 나무에 물을 주면 더 섞어 가는 것과 같아요.

 

열심히 하는 사람은 더 열심히 하고!

빤질거리는 놈들은 더 빤질거려요.

결국 자기의 행함이 그 신앙의 속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던져 주어서 복음에 합당한 사람은 복음에 합당한 믿음으로 살게 하시고, 복음에 합당치 않는 자들은 반 복음적으로 살게 하세요.

동일한 말씀을 듣고도 어떤 사람은 생명의 향기를 토하여 내고, 어떤 사람은 사망의 향기를 토해내요.

 

22절을 보세요.

 

22절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네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어떠한 것인지 보이라는 것입니다.

네가 안다고 하는 그 믿음이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즉 네가 말하는 것과 너의 행동이 동일한가 보라는 것입니다.

너의 자유함이 형제들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말로 심판을 받게 되어 있어요.

복음 복음 하면서 삶이 그 복음과 같은 것이 아니면 내가 말하는 그 복음이 나를 정죄하고 심판하게 되어요.

 

넌 가짜라고!

네 믿음은 죽은 것이고!

너의 믿음은 귀신의 믿음이라고!

그래서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육의 가치가 있고 영의 가치가 있습니다.

육의 가치는 먹고 마시는 것이고, 영의 가치는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육의 가치는 육신의 배부름을 좇아가지만, 영의 가치는 영혼의 배부름을 좇아가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추구해요.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성령을 주신 것은 영의 가치를 추구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수준의 법에 속한 나라가 아니고 은혜로 형제를 사랑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먹고 마시는 수준의 것으로 넘어지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 때문에 그리스도가 주는 의와 평강과 희락을 빼앗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판단하는 것은 고작해서 세상 것이고 육신의 일입니다.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먹고 마시는 일입니다.

날과 달을 지키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서 죄는 먹고 마시는 것과 날과 달을 지키는 것으로 규정을 했습니다.

이게 육입니다.

세상 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 아래서 죄는 다릅니다.

은혜이고 사랑입니다.

믿음의 법입니다.

 

신약의 죄가 뭐냐?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모든 것이 죄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 나라의 속성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 있으니 이 누림 안에서 감사하며 사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주여! 종의 마음을 열어서 아버지의 마음을 갖게 하시고! 주여! 종의 눈을 열어서 주의 일하심을 보게 하시고! 주여! 종의 귀를 열어서 만물을 통하여서 말씀하시는 주의 음성을 듣게 하옵소서! 내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크고 귀한 것인 줄 알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정죄하던 입술이 감사와 찬양으로 바뀌게 하시고 남을 배척하고 편을 가르고 나누던 것에서 감싸고 안아주고 이해하고 포용하는 자세로 나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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