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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계시록 강해

5강. 예수의 환란에 동참 하는 자 (계 1:9-19)

by coroa 2020. 7. 30.

-.5강. 예수의 환란에 동참 하는 자 (계 1:9-19).-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정낙원 목사

 

 

오늘은 예수의 환란에 동참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상고해 보도록 합시다.

이 시대적인 의미로 살펴보기로 합니다.

왜냐하면! 이 편지가 써질 때 시대적인 상황과 이 시대 상황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환란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과거에 환란은 사선을 넘나드는 환란이었어요.

쉬운 말로 목에 칼을 들이대고 너 예수 믿을래 안 믿을래 라는 식의 환란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이런 환란을 없어요.

 

이 시대 환란은 너무도 살기 좋아서 당하는 환란이에요.

물질의 가치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영적인 믿음에 가치로 산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버려지는 것과 같은 아픔이 동반 되어요.

 

예를 들어서 예수 믿고 복 받고 잘 살아야 한다는 기복주의가 홍수처럼 엄몰하는 시대에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은 그 자체가 환란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의 행위도 의롭다고 하는 행위주의가 판치는 교회에서 신앙이란 인간의 가치를 부추기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인간의 가치는 부정당하고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피로서만 의롭게 된다고 하면 이단으로 몰려요.

이것이 환란인 겁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예수의 환란에 동참한다는 의미를 과거적인 의미의 해석과 현재적인 의미의 해석을 하여야 해요.

왜냐하면! 과거의 환란과 지금의 환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럼 먼저 과거적인 환란으로 이해해 봅시다.

요한계시록이 쓰여질 당시의 상황에서 환란은 어떤 것이었는지 알아야 합니다.

앞서 말했지만 사도 요한이 이 요한계시록을 쓸 당시는 로마의 극심한 박해가 있을 때였어요.

 

요한계시록을 쓴 연대를 학자들 마다 조금씩 다른데 대강 AD 95년경으로 해석해요.

이 때가 어떤 때인가 하면 AD 64년도 7월 18일에 일어난 로마 대 화재가 일어난 후 기독교인들을 극심하게 박해를 하던 때입니다.

 

네로가 시상이 안 떠오른다고 하면서 미친 짓으로 로마에 불을 지르고 나서는 이것을 그리스도인들이 한 것이라고 뒤집어 씌우고 대대적으로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서 죽이던 때입니다.

이 기점으로 시작해서 AD 313년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포할 때까지 거의 350여 년간 성도들이 지하로 숨기 시작했어요.

 

교회사는 이 시대를 카타콤 시대라고 합니다.

카타콤이란 지하 무덤이에요.

이는 곧 예수를 믿는 신자들은 죽음에 가두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지금이야 신앙의 자유가 있지만 그 당시는 황제가 신으로 숭앙받던 때이므로 황제 숭배사상만이 유일한 신앙으로 인정을 받던 때입니다.

 

이러한 때에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신앙을 가지면 죽음을 면치 못하였어요.

죽고 사는 문제가 신앙의 환란으로 다가온 때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자기백성들을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게 하고자 편지를 시작하면서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님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사도요한에게 편지로 써서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보내라고 하신 것입니다.

 

17-18절을 보세요.

 

17-18=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 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18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요한이 예수님을 보고서 혼절을 했어요.

이는 예수님의 모습이 너무도 엄위하고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이는 과거 지상에서 알던 예수님이 아니에요.

그래서 요한이 엄위하고 영광스러운 주님을 보시고는 놀라서 죽은 자같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오른 손으로 잡아 일으킵니다.

 

이게 의미심장한데 이는 곧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려내신다는 것을 사도 요한에게 실제로 경험케 하신 것입니다.

야! 요한아!

너 죽었지!

이제 내가 너를 살려 낸다! 그러는 겁니다.

 

영적으로 그렇단 말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내가 전에 죽었었는데 이제는 산 자라고 알려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왜? 죽었다가 살아나는 퍼포먼스를 행하셨는가 하면 이는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지상에 있는 교회들에게 이 편지를 주시는 분은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신 주님이라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요한에게 보여주신 예수님의 이 모습 자체가 계시이고 약속입니다.

어떤 계시이고 약속인가 하면 지금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산 교회들이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당하고 있어요.

 

극심한 환란 당하고 있단 말입니다.

죽임 당하고 있어요.

그러나 염려하지 말아라!

너희들도 예수님처럼 부활을 한다는 계시이고 약속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나를 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내가 죽었다가 살아났잖아!

세상이 나를 죽음에 넘겨주었어도 내가 그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살아났어!

그러면서 나 예수가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곧 예수님이 사망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걸 교회들에게 전해 주라고 합니다.

 

이 말이 엄청 중요해요.

예수님이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 무슨 말인고 하니 누가 너를 음부에 가두어도 내가 꺼내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죽어도 부활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건 일종의 약속을 하시는 것이에요.

 

예를 들어서 말하면 아이가 싸우고 있어요.

그 곁에 아버지가 총을 들고 서 계시면서 씨익 웃고 계신 겁니다.

무슨 뜻인가요?

아빠가 지켜 줄 테니 겁먹지 말고 싸우라는 말입니다.

 

지금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당하여 죽어가고 있어요.

그런데 그 요한의 눈을 열어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흔들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걸 너만 알고 있지 말고 세상 속에서 너처럼 환란 당하는 내 백성들에게도 알려주라고 편지를 써서 주신 것입니다.

이 편지를 받은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의 죽음부터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포하기 까지 어간 350여 년 동안의 극심한 환란 속에서 주님의 약속을 믿고 믿음으로 살아 냈던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환란 당하는 성도들에겐 이 요한계시록은 위로와 소망을 주고 있어요.

세상의 가치로 등 따습고 배부른 사람들에겐 의미가 없을런지는 몰라도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에겐 큰 위로와 소망이 되는 말씀이에요.

 

그럼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어떤가 살펴봅시다.

 

13-16절을 봅시다.

 

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4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 꽃 같고

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16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요한이 본 예수님은 초림 때 그 예수님의 모습이 아니에요.

초림 때는 힘 없이 십자가에 달려서 무기력하게 죽으셨어요.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까지 따라가서 예수님의 죽음에 모습을 다 보았어요.

요한은 12제자 중 유일하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의 자리까지 따라간 제자에요.

 

그런데 지금 자기 앞에 서 계신 주님은 전혀 다른 모습인 것입니다.

만유를 심판하시는 왕의 모습으로 있는 것입니다.

초림 때는 허름한 옷을 입고 있었지만 지금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 띠를 띠고 있는 왕들이 입는 옷을 입고 계신 것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이 왕이란 말입니다.

 

모습 또한 초림 때의 모습과 완전히 달라요.

 

그 얼굴은 해처럼 빛이 나고!

그 머리털은 흰 양털 같고!

그 눈은 불 꽃 같고!

그 발은 풀무에 단련된 빛난 주석 같고!

그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그 입에서는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온다고 합니다.

 

이건 심판하시는 왕의 모습이에요.

누구를 심판 하십니까?

예수님을 찌른 자들을 심판하세요.

그래서 요한은 예수를 찌른 자들은 애곡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이 사도 요한에게 야! 저기 내 백성들을 찌르는 자들은 내가 반드시 심판을 하시겠다고 알려 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들의 원수를 반드시 갚아 주겠다고 약속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6장을 보면 앞서 가신 믿음에 선진들이 하나님께 탄원합니다.

 

계 6:9-11=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10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11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 먼저 첫째 인부터 넷째 인까지 떼시면서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사도 요한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보니 세상에서는 난리가 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예수님이 재림 하실 때까지의 이 세상의 모습을 말하고 있어요.

 

거짓 선지자들이 미혹을 하고,

전쟁이 일어나고!

기근이 들어서 죽어가고 있고!

전염병이 번져서 죽어가고 있어요.

한마디로 아비규환(阿鼻叫喚) 지옥인겁니다.

 

그리고는 천상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거기에 보니까 세상 속에서 예수의 믿음을 지키다가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하나님과 안식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하나님께 탄원을 합니다.

하나님 언제까지 저 원수들을 그냥 둘 겁니까?

빨리 심판을 단행하여서 우리의 원수를 갚아 주세요!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잠시 기다리라고 합니다.

이는 너희 동무들도 너희들처럼 죽임 당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세상 속에 있는 성도들은 다 죽을 목숨이라는 것입니다.

저들이 다 내 아들 예수와 같이 죽임을 당하여야 그 때 심판을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세상에 남아 있는 성도들은 모두가 예수의 환란에 동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요한은 나 요한은 너희의 형제라고 하면서 예수의 환란에 동참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잘 보세요.

사도 요한이 이 편지를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냅니다.

그럼 사도 요한의 편지를 받는 수신자들은 요한의 형제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도 요한은 지상에 있는 모든 성도들을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이 모든 성도의 대표가 되어서 뭐라고 합니까?

예수의 환란에 동참 한다고 하지요.

이는 곧 세상에 있는 모든 성도들도 요한처럼 예수의 환란에 동참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 일을 바울을 통해서 보여주셨어요.

예수님께서 바울을 선택한 것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당한 그 아픔에 동참시키고자 하심이에요.

 

사도행전 9장을 봅시다.

 

행 9:10-19=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1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12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15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소경이 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아나니아에게 사울을 찾아가서 눈을 뜨게 해 주라고 합니다.

사울도 이 모습을 기도 중에 보았어요.

 

그러자 아나니아가 펄쩍 뛰면서 하는 말이 주님 저 놈이 어떤 놈인지 압니까?

주의 백성들을 잡아서 죽이던 자입니다.

저런 놈을 어떻게 용서한단 말입니까?

난 못합니다! 라고 항의를 합니다.

 

이에 예수님이 그래 너 말대로 내가 저 놈에게 원수를 갚고자 선택을 했다고 합니다.

아나니아가 그 말이 무슨 말입니까? 라고 물으니까

내가 이 놈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앞에서 내 이름을 전하기 위하여 써 먹고자 선택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저 놈이 나를 핍박한 것을 그대로 갚아 줄 테니까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니 너는 가서 그에게 안수해서 눈을 뜨게 하고 음식도 먹여서 강건케 만들어라!

그래야 내가 써 먹을 것이 아니냐!

이에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가서 안수하여서 눈을 뜨게 해 줍니다.

그러자 사울이 성령의 충만을 받습니다.

그리고는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가 무엇인가요?

죽음이에요.

예수님과 연합하여서 죽는 것을 세례로 표시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이제부터 사울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당하셨던 그 길을 접어들게 된 것입니다.

이게 곧 예수의 환란이에요.

 

바울이 당한 대표적인 예수의 환란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살펴봅시다.

 

사도행전 16장을 봅시다.

 

행 16:16-34=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이하게 하는 자라 17 바울과 우리를 좇아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18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와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19 종의 주인들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가지고 저자로 관원들에게 끌어갔다가 20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21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22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23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24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25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26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 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27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28 바울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29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 30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32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33 밤 그 시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권속이 다 세례를 받은 후 34 저희를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바울이 아시아 쪽으로 선교 여행을 하고자 하니까 성령께서 막으시는 겁니다.

그런데 환상 중에 마게도냐 사람이 이리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나라인 마게도냐로 건너갑니다.

처음으로 건너간 곳이 바로 빌립보에요.

 

빌립보는 로마의 신흥도시로서 질서가 엄격했어요.

공권력이 시퍼렇게 살아 있어서 조금이라도 소요를 일으키는 자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가차 없이 옥에 가두고 다스렸어요.

 

요즘 말로 순찰하는 경찰들에게 즉결 심판하는 권세를 주었어요.

재판이고 뭐고 없어요.

그들이 판단해서 이 놈은 죽여야한다고 하면 두들겨 패서 죽이기도 했어요.

마치 미국 경찰들처럼 공권력에 도전하면 사살하는 것과 같아요.

 

그런데 바울이 기도하러 가다가 귀신들린 여종을 하나 만납니다.

바울이 찾아간 것이 아니고 귀신들린 여종이 찾아온 것입니다.

첫 날에 귀찮게 하여서 돌려보냈더니 그 이튿날 또 와서 귀찮게 하는 겁니다.

이러한 일을 여러 날 동안 계속하는 거에요.

 



이 녀석이 바울을 졸졸 따라다니면서 하는 말이 이 사람들은 높으신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이 사람들은 새로운 종교를 퍼뜨린다는 말이에요.

 

그러자 바울이 그 여종을 사로잡고 있던 귀신을 쫓아냅니다.

이게 문제가 된 것입니다.

그 여종이 누구인가 하면 점쟁이에요.

 

그런데 이 여종을 데리고 있는 주인이 어느 날 보니까 그동안 신령하다고 하면서 점을 잘 치던 아이가 점을 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 왜 그래!

이에 그 아이가 바울과 실라가 자기 안에 있는 점치는 귀신을 쫓아냈다고 하는 겁니다.

 

여종의 주인은 이 점쟁이를 통해서 많은 돈을 벌었어요.

그런데 바울 때문에 졸지에 돈을 벌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엄청 손해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종의 주인이 동업자들을 부추겨서 바울을 고소하기에 이른 겁니다.

 

빌립보 지역에는 이러한 사람들이 많았어요.

쉬운 말로 한 집 건너에 점쟁이 집이었어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앞 날이 불안 하니까 점을 쳐서 위안을 삼고자 합니다.

그래서 어느 시대고 점 집마다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어요.

 

그런데 바울이 나타나서 귀신의 힘으로 점을 치는 여종의 귀신을 쫓아내서 더 이상 점쟁이 노릇을 못하게 하였으니 졸지에 사업이 망하게 된 것입니다.

이 놈들은 모두가 로마 정권과 결탁을 하여서 빌 붙어서 살고 있었어요.

그래서 바울과 실라를 공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데리고 간 겁니다.

 

그들이 바울을 향하여 이 놈은 유대인으로서 우리 동네 사람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 놈이 이상한 신을 가지고 와서 성을 요란스럽게 하고 있다고 고소한 것입니다.

평상시 점쟁이 사업을 하던 자들로부터 뇌물을 받아먹던 경찰들이 바울과 실라에게 이들은 소요를 일으키는 자라고 하면서 재판도 없이 죽도록 두들겨 패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깊은 옥에 가두었어요.

여기서 깊은 옥이란? 살인을 하거나 폭동을 선동하거나 하는 국가적으로 해를 입히는 아주 중한 죄를 지은 자들만 가두는 곳이에요.

 

여기는 한 번 들어가면 못 나와요.

죽어서 나오는 곳이에요.

살아서는 나오지 못하는 그런 감옥이에요.

 

이건 죽음이나 다름없어요.

그러니까 바울과 실라가 죽음에 가두어진 겁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에 죽으신 것과 같아요.

 

바울과 실라는 몸은 두들겨 맞아서 형편없어요.

그리곤 발은 착고에 차여서 꼼짝을 하지 못해요.

마치 죽은 사람을 꽁꽁 묶어 놓은 것과 같아요.

 

바울과 실라가 왜? 이런 고초를 당합니까?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낸 것 때문이에요.

이건 예수님이 유대인들로부터 그대로 당하신 것이에요.

 

이게 바로 예수의 환란인 겁니다.

하나님께서 바울과 실라는 예수의 환란에 집어넣고 무슨 일을 하셨나요?

죄인을 구원하는 일을 하셨어요.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혀서 기도를 합니다.

그러자 바울의 마음속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생각나는 겁니다.

아! 예수님이 이런 고난을 당하셨구나!

자신이 예전에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이고 예수쟁이들을 잡아서 옥에 가두고 하던 일들이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내가 지금 이런 고난을 당하는 것은 우연히 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예수님이 나를 예수님이 당하셨던 그 고난 속으로 인도 하신 것이구나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럼 나도 예수님처럼 부활하고 살아나겠구나!

이게 깨달아진 것입니다.

 

그러자 마음 속에서 평강이 몰려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예수님의 운명에 동참을 시켜서 예수님의 죽음과 예수님의 부활을 맛 보게 하시려고 나를 이러한 곳에 인도 하셨다는 것을 알고 나니까 감사와 기쁨과 감격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찾아 오셨네 모시어 들이세!

할렐루야 우리 주님 부활 승천 하셨네!

좌우지긴 생각나는 대로 찬송을 부르기 시작을 합니다.

그러자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더니 옥 터가 움직이고 모든 사람들을 어거하고 있던 착고가 다 풀려지고 옥의 문이 활짝 열린 것입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자 지진이 나고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린 것과 같아요.

예수님이 무덤 속에 들어간 것은 그 무덤 속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구원코자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지금 바울과 실라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방불한 일을 당하였어요.

하나님께서 감옥에 갇힌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바울을 감옥에 집어넣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예수님이 죽으실 때의 모습과 방불한 사건들이 일어나게 만드신 것입니다.

 

이 광경을 그 옥에 갇혀 있던 모든 죄수들이 보았어요.

옥을 든든히 지키고 있던 간수도 보았어요.

간수가 옥 문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다 도망을 간줄 알고 자결을 하려고 하니까 바울이 소리칩니다.

 

여보시오.

죽지 마세요.

우리가 다 여기 있소!

 

이에 간수가 바울과 실라를 보고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이에 바울과 실라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는다”고 복음을 증거한 것입니다.

그러자 온 집이 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는 일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 모습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죽음이라는 깊은 옥에 갇힌 자기 백성들을 다 건져내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철저하게 예수의 환란에 동참을 시킨 것입니다.

 

바울의 이 환란을 지금 이 세상에 속한 예수님의 교회들이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도 요한에게 죽었다가 살아나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예수님을 보여 주시고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에게 알려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 예수가 일곱 교회 사이로 다니시면서 간섭을 하고 계시니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죽어도 살려 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소망된 말씀인가요?

죽음에 쫓기는 자들에게는 이것만큼 복된 소식이 없어요.

 

죽음에 쫓기는 자들에게 돈이 복음이 아니에요.

건강이 복음이 아니에요.

세상에서의 일이 승승장구 일사천리로 풀려 나가는 것이 아니에요.

 

죽음에 쫓기는 자들에게 있어 복음이란? 죽었다가 살아나셔서 사망 권세와 음부의 열쇠를 가지시고 계신 그 예수님이 내 편이고 나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에요.

이게 믿어지는 것이야 말로 복음 중에 복음인 것입니다.

대박을 맞은 것이에요.

 

그러니까 요한계시록이 얼마나 우리에게 소망을 주고 위로를 주는 말씀인줄 아세요.

요한계시록이 믿어진다고 하면 세상에서 징징거리지 않아요.

돈 좀 없다고 징징거릴 순 없어요.

건강이 나쁘다고 낙담할 이유가 없어요.

 

우수갯 소리로 멍멍이는 짖어도 경부선은 달린다!

꺼꾸러 매 달아 놓아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

닭에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 어떤 환란이 닥친다 하여도 우리는 승리해요.

죽음조차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 내지를 못해요.

그 어떤 것으로도!

 

로마서 8장을 봅시다.

 

롬 8:32-39=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있느냐!

없다고 합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에서는 끊어지지가 않아요.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겨요.

어떻게 이기느냐 하면 예수와 함께 이겨요.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부활 프로그램이 심겨져 있어요.

우리는 우리 안에 심겨진 그 부활 프로그램에 따라서 죽어도 살아나게 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고래심줄보다 더 질겨요.

절대로 끊어지지 않아요.

그러니 현재 살기가 좀 어렵다고 징징거리지 마세요.

 

예수님께서 반드시 오세요.

 

곧 오십니다.

그 이유는 환란 속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천국으로 데리고 가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예수의 환란에 동참하는 형제들을 구원코자 하심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 늘 불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자기 백성들을 이 땅에서 복을 주어서 천국으로 살게 하시지 않고 지옥 같은 세상에 두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앞에서 떵떵거리면서 “봐라!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고 잘 사는 사람이다!” 라고 자랑하게 하면 안 되는가요?

우린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유대인들도 이런 사고를 가지고 있었어요.

하나님의 백성은 이 땅에서 잘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의 식민지로 사는 것은 하나님 백성다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은 비록 힘이 없어서 로마에 압제 당하고 살지만 메시야가 오면 로마를 물리치고 세계에서 가장 힘 있는 나라가 되어서 다스리게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유대인에게 있어 메시야이즘은 다윗 왕국을 회복시켜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성경을 보면 장차 메시야가 오시면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일으켜 세워 준다고 하였거든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메시야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오신다고 믿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갖가지 기적을 일으키자 백성들의 마음이 술렁이기 시작을 합니다.

야! 저 분이 오리라고 하신 그 메시야인가보다!

이제 로마에서 해방 시킬 일은 시간문제라고 보았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자 “다윗의 자손 예수여” 라고 하면서 이는 다윗 왕권을 회복 시켜 주실 분이라는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 하실 때는 “호산나 다윗의 지손이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 라고 하면서 왕의 입성으로 환호성을 질렀던 것입니다.

 

이제 로마와 정면으로 싸워서 이기는 것만 남았다고 보았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로마와 싸울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겁니다.

이에 민족주의자로서 열심당원인 가룟 유다가 사람은 죽음에 위기를 당하면 살고자 하는 본성이 작동을 하니까 예수도 죽음에 위기를 당하면 살고자하는 본성이 작동하여서 로마와 싸울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팔아버린 것입니다.

근데 예수님이 힘없이 잡혀죽고 만 것입니다.

이에 가룟 유다가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구나!

그래서 애꿎은 사람을 죽였다는 양심의 가책을 받고서 스스로 죗값을 치른다고 목 매 달고 죽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오해를 한 것입니다.

메시야가 오셔서 세상 권세를 깨트려준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 권세를 깨트리기 위하여 오시지 않았어요.

자기 백성들을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빼내주기 위하여 오셨어요.

 

지금도 유대인들처럼 성경을 오해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도 성경이에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주신 편지입니다.

편지는 편지를 보내신 분의 입장에서 읽어야 합니다.

받는 사람이 자기 맘대로 해석하면 안 되어요.

 

편지의 내용이 뭐라고 하던가요?

예수그리스도의 계시라고 했어요.

예수님이 편지의 내용이에요.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보내신 편지에요.

그럼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는지를 하나님의 입장에서 이해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하나님의 입장에서 이해하는 것인가요?

 

이는 “예수” 라는 이름 속에 그 힌트가 들어가 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이 뭔가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 하실 자”입니다.

 

어디에서 구원한다고요.

죄입니다.

로마가 아니고 죄에요.

 

그런데 자기 백성들이 자기가 죄 아래 갇혀 있다는 것을 몰라요.

이는 모든 인간들이 동일해요.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죄 아래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이 말하는 죄가 무엇인지를 몰라요.

기껏 안다고 하여도 자기들이 만든 죄 밖에 몰라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던 유대인들도 이를 몰랐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죄에서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하니까

그건 저기 세리와 창기들 같은 죄인들에게나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자기들은 율법을 지켜서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을 지키고 산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는 자기들의 구원자가 아닌 것입니다.

자기들은 죄에서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로마라는 나라에서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니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러 오신 예수는 자기들의 메시야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무지몽매한 백성들이 그가 메시야인줄 알고 따른단 말입니다.

이러다간 민란이 일어나게 생겼어요.

민란이 일어나면 로마가 군대를 보내서 진압을 할 것이 자명합니다.

로마의 군대가 오면 거룩한 성지가 더렵혀져요.

 

요한복음 11장을 봅시다.

 

요 11:47-50=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48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49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대 제사장이 그러잖아요.

한 사람이 죽어서 온 민족이 살아난다면 그것이 하나님 앞에 기쁜 일이라고!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를 민족을 위란의 위기로 몰아넣는 반역자로 몰아서 죽인 것입니다.

 

예수를 뭐라고 했나요?

하나님이 보낸 편지라고 했지요.

하나님이 예수를 무슨 편지로 보냈나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 편지로 보냈어요.

 

그런데 자기 백성들이 그 편지 내용을 자기 맘대로 읽은 겁니다.

자기 맘대로 해석했어요.

그래서 예수를 죽인 것입니다.

이게 십자가 사건이에요.

 

고린도전서 2장을 봅시다.

 

고전 2:6-12=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7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 하였으리라 9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유대인들은 스스로 지혜로운 자라고 했어요.

그 지혜로 예수를 판단하고 이단으로 정죄하고 죽였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평가는 인간들의 지혜가 하나님의 지혜를 몰라보고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고 합니다.

 

이러면 인간들이 말하는 지혜는 틀림이 되겠지요.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모든 인간들을 죄인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을 유대인들만 죽인 것이 아니에요.

로마와 합세해서 죽였어요.

이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누가 죄인이냐?

하나님이 보낸 편지를 잘못 읽는 것입니다.

예수를 자기 맘대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건 어느 시대이고 동일해요.

지금도 예수를 잘못 이해하면 십자가 사건은 일어나고 있어요.

이들이 바로 예수를 찌른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진짜 자기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지혜를 주셨어요.

예수를 알아보는 지혜를 준 것입니다.

그 지혜가 바로 성령이에요.

그럼 하나님의 지혜인 성령을 받은 자기 백성들은 예수라는 편지 속에 담긴 내용을 하나님 입장에서 읽고 이해를 하게 되어 있어요.

 

12절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신다고 하지요.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이 뭔가요?

예수에요.

그럼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들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담겨져 있겠지요.

 

맞아요.

예수님이 하신 일들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담겨져 있어요.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보따리에요.

예수님이 하시는 일마다 은혜에요.

 

지금부터 중요한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어요.

그럼 예수님께서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일을 하시겠지요.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것인 줄을 몰라요.

 

은혜가 은혜 되려면 은혜의 반대가 있어야 해요.

무슨 말인가 하면 빛을 드러내려면 빛의 반대인 어둠이 있어야 하는 것과 같아요.

빛은 어둠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은 빛을 설명하고자 어둠을 만드신 것입니다.

 

천국을 일컬어 다시는 밤이 없다고 하지요.

이는 세상과 다른 나라란 말이에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천국을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말하면서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겠고 라는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이는 천국은 세상과 완전히 다른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이 땅에서 겪었던 사망이나 고통이나 아픔이고 눈물이나 애곡하는 것이 없는 곳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자연히 이 세상은 천국의 반대로 있겠지요.

천국의 반대가 뭔가요?

지옥이에요.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하지요.

 

천지가 뭔가요?하늘과 땅이에요.

영적으로 천국과 지옥이에요.

 

하나님께서 천국과 지옥을 만드셨어요.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양과 염소를 심판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양에게는 창세로부터 예비 된 영생의 나라로 들어가라고 하시고, 염소에게는 영벌의 나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천국과 지옥은 서로 상대적인 것이에요.

지옥을 모르고서는 천국을 몰라요.

그럼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궁극적으로 어디서 살게 하십니까?

천국이지요.

천국은 지옥의 상대적인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장차 자기 백성들을 천국으로 인도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이유도 자기 백성들을 천국으로 인도하시고자 하심입니다.

그럼 자기 백성들이 이 땅에서는 어떤 환경 속에 놓여져 있어야 하나요?

지옥 같은 환경에 놓여 있어야 하겠지요.

 

천국을 일컬어 눈물 없고 고통 없고 사망이나 애통하는 것이 없는 곳이라고 하였어요.

그럼 성도는 이 땅에서 어떤 환경 속에 처해 있을까요?

천국의 반대인 눈물 흘리고 애통하고 곡하는 환경 속에 있겠지요.

 

맞아요.

그래서 사도 요한이 나는 예수의 환란에 동참하는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이 우리 형제라고 했지요.

그럼 요한의 형제인 아시아의 일곱 교회 성도들은 어떤 모습으로 있겠어요.

예수의 환란에 동참하는 모습으로 있겠지요.

 

요한계시록은 예수의 환란에 동참하는 자들에게 위로의 편지이고 소망의 편지가 되어요.

 

등 따습고 배부른 자들에게 주어진 편지가 아니란 말입니다.

솔직히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자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릴까요?

천만에요.

 

이들은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리고 있어요.

이런 자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바라지 않아요.

여기가 천국인데!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에 보면 의미심장한 말이 나와요.

 

누가복음 16장을 봅시다.

 

눅 16:19-25=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20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21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이건 단순하게 이 땅에서 부하게 살면 안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부자로 사는 것은 나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부자의 마음이 하나님의 언약을 잊고 물질에 빠져 살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에요.

 

여기에 등장하는 부자는 유대인을 말해요.

유대인은 언약의 민족이에요.

그들의 삶 속에 언약 정신이 흘러나와야 해요.

 

언약 정신이란? 너와 나가 차별이 없어요.

그들이 아브라함 후손이 된 것은 자기 자격으로 된 것이 아니에요.

일방적으로 된 것이에요.

 

아브라함 후손이 되기 위하여 돈을 주고 산 것이 아니에요.

부모에 의하여 저절로 된 것이에요.

이걸 은혜라고 합니다.

 

그럼 유대인들 속에는 은혜가 삶 속에서 흘러나와야 해요.

하나님께서는 율법으로 너희 경내에 가난한 자를 두지 말라고 했어요.

그들도 너희 형제이므로 내 몸처럼 돌보라고 했어요.

 

레 23장 22절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너는 그것을 가난한 자와 객을 위하여 버려 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신 15장 11절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는 고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예수님께서 율법을 정의하기를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고 하셨지요.

이스라엘은 율법 정신으로 살아야 해요.

율법정신이 뭐라고 했나요?

이웃 사랑이라고 하였어요.

 

여기서 말하는 이웃이란? 형제를 말해요.

이스라엘은 모두가 형제에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나그네들을 형제처럼 대접하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어요.

이러한 상태를 하나님의 공의가 강물처럼 흐른다고 해요.

 

그런데 이 공의가 언제 사라지는가 하면 부(富)를 축척하면서부터 에요.

물질에 눈이 멀기 시작하면서 부터에요.

지금 부자가 여기에 빠진 겁니다.

 

자기 집 앞에 거지 나사로가 있어요.

그런데 모른 척 합니다.

자기는 날마다 호의호식하면서 말이에요.

이게 언약으로 살지 않고 재물에 빠져 산 증거에요.

 

이는 하나님을 멸시한 것이 되고 만 것이에요.

 

잠 17장 5절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이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를 부자 앞에 두고서 너의 부(富)가 지금 여호와께로부터 온 것이니까 형제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는 물질에 눈이 멀어서 하나님을 모르고 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지옥에서 목 말라 하면서 고통당하는 부자가 하나님에게 나사로에게 물 한 방울 찍어서 자기에게 달라고 할 때 이 땅에서의 삶을 가지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25절을 보세요.

 

25절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부자의 부탁에 하나님이 다정하게 말합니다.

얘야! 너는 살았을 때 물질에 푹 빠져서 살지 않았니!

쉬운 말로 너는 세상에서 천국을 누리고 살았잖아!

 

하나님 나라를 안중에 두지 않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며 하면서 세상에 푹 빠져서 살았잖아!

세상 가치로 살았잖아!

너의 주인은 재물이었지 내가 아니었잖아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자와 나사로 비유를 조금 더 확대 해석하면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해석 할 수가 있어요.

 

유대인들은 부자처럼 살았어요.

그러나 이방인들은 개 취급당하고 살았어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 은혜잖아요.

 

자기들이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을 안다고 하면 이방인을 개 취급해서는 안 되어요.

도리어 그들을 보면서 우리가 한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사는구나 를 알아야 했어요.

그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사랑을 나누어주는 자세로 살아야 했어요.

 

하지만 유대인들을 그렇게 살지 않았어요.

자기들은 부자처럼 살았어요.

이방인들은 자기 집 문 앞에 거지 나사로처럼 헌데를 개가 핥을 정도로 인간 취급받지 못하고 살았어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개 취급한 것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이세요.

그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은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나누어지고 보여주어야 해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 할 때 하나님의 복이 이방에게도 전해주고자 선택을 했어요.

그런데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하는 자들이 아브라함 정신과는 정 반대로 살고 있어요.

이는 하나님 이름을 욕 되게 하는 것이에요.

유대인들이 하나님 망신을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신약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가 갖가지 문제로 싸우고 하니까 너희 때문에 하나님 이름이 이방인에게 모독을 당한다고 했어요.

 

이 시대 교회들이 하나님을 망신시키고 있어요.

교회가 대형화 하면서 부자가 되었어요.

부자처럼 날마다 호의호식하고 살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까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잘 살까만 궁리하였지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지 않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에는 관심이 없어요.

여기가 좋사온데 데 무슨 천국을 그리워하겠어요.

 

교회사를 보면 교회가 대형화 하면 반드시 타락했어요.

교회의 기능을 상실했어요.

그런데 지금 이 길을 한국교회가 걷고 있어요.

교회가 언약 정신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복음을 전하러 이곳 저곳을 다닙니다.

그러면서 받는 질문이 교회의 크기에요.

성도가 얼마나 모이느냐?

 

이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받는 질문이에요.

상담을 한다고 하면서 전화를 해도 이 질문은 빠트리지 않아요.

이건 그들 속에 세상 가치가 자리 잡고 있다는 반증이에요.

그러니까 교인 수가 적다고 하면 실망을 하는 겁니다.

 

복음조차도 세상 가치로 판단하는 겁니다.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도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복음이 그 사람 속에서 소금처럼 녹아져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복음이 그저 지식으로 알고 있으니 질문이 세상 가치로서의 질문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자와 나사로 비유가 먼 나라 이웃나라 이야기가 아니고 이 시대 우리를 향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를 그 당시 종교적인 상황으로 이해해 봅시다.

 

부자와 나사로 비유는 바리새인과 세리와 창기들로 이야기 할 수가 있어요.

바리새인들은 율법 지킴이라는 의(義)로 부자로 살았어요.

그러나 세리와 창기들은 율법의 정죄를 받고서 나사로처럼 개 취급을 당했어요.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의롭다 하였어요.

율법에 의(義)로 가득했어요.

그러니 마음이 부자였던 것입니다.

 

마음이 율법의 의(義)로 부자이다가 보니까

자기들 눈 앞에 보이는 세리와 창기들과는 상종도 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부자 집 문 앞에 더러운 헌데로 앓으면서 개 같이 앉아 있는 거지 나사로의 모습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세리와 창기들과 어울릴 때 바리새인들이 뭐라고 했나요?

왜? 더러운 죄인들과 어울리느냐고!

예수님을 탄핵을 했어요.

이는 바리새인들이 율법 정신을 모르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율법정신이 뭐라고 했나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에요.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율법 조문을 지킨 것은 있으나 그 조문 속에 담긴 정신은 없었던 것입니다.

이건 율법을 지킨 것이 아니에요.

 

율법은 누가 지켰느냐?

예수님이 지키셨어요.

예수님이 세리와 창기 그리고 죄인들과 어울린 것이 바로 율법 지킴이 되어요.

예수님은 율법 조문에 담겨 있는 정신을 삶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율법을 올바로 알게 되면 지킨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음을 깨닫고 긍휼의 자리로 나아가게 되어 있어요.

그 긍휼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주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긍휼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성경을 구약 이스라엘의 실패담으로 기록하여 주신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너희가 이런 자들이고!

이런 너희를 하나님께선 그 언약하신 것 때문에 구원했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하심입니다.

 

구원 받은 자는 하나님 앞에 “하나님 나 이렇게 변했어요!” 로 나오면 안 되고!

그 반대로 “주여 주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라고 나와야 해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다는 제사 지냄의 당당함이 아니라 “불쌍히 여겨 달라”는 “긍휼의 자리”로 나와야 합니다.

말씀 앞에 서면 상한 심령이 되어야 합니다.

 

이 시대 마귀는 좋은 신앙을 좋은 사람 되는 것으로 변개시켜 놓았어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온전해져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마귀에게 속고 있는 거에요.

마귀적 사고인 인본주의로 성경을 보면 모든 말씀이 인간의 행동강령으로 보여지게 되어요.

인본주의로 성경을 보게 되면 예수를 믿으면 착한 사람으로 변화가 된다는 것을 신앙의 본질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에게 너희는 내 아들의 죽음에 의미를 아느냐고 물으세요.

신앙생활이란? 더 나은 인간으로 개과천선하는 것이 아니에요.

도리어 말씀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긍휼의 자리로 나아가야 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해요.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가치를 더 깊이 알아가는 것이어야 해요.

그리하여 오직 은혜만 자랑되어져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3장의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말하지요.

너희는 스스로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가련하고 눈멀고 발가벗고 있다고 합니다.

 

무엇으로 부자라 부요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고하고 있나요?

이는 자기 행위에요.

자신들이 한 것을 의지하고 있는 겁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 초림 당시의 율법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율법 지킴을 자랑하고 있는 것과 같아요.

 

이에 예수님이 그러는 겁니다.

 

야! 이 놈들아!

너희는 지금 발가벗고 있어!

너희가 지금 뭘 모르고 있는데!

율법으로 고발 된 수치는 너희 행위로 가려지는 것이 아니고 내 피로 가려지는 것이라고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왜? 예수의 환란에 동참한다고 합니까?

이는 예수님이 율법에 의를 가지고 수치를 가리고자 하는 자들을 그게 바로 율법을 안 지킨 죄라고 고발하였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진짜 율법을 알았다면 예수를 영접하였어야 한다고 하니까

율법주의자들이 분개하여서 예수를 죽였어요.

이게 요한이 예수의 환란에 동참 된 것이에요.

 

사도들이 순교를 당한 것도 모두가 율법주의자들에게 예수의 피를 증거하였기 때문이에요.

사도 요한도 율법에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복음을 전하다가 환란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환란은 지금도 우리가 당하고 있어요.

예수님이 율법주의자들 손에 죽임을 당하였듯이 지금도 복음을 전하면 자기 행위를 신앙이라고 내어 놓는 성화주의자들로부터 이단 소리를 듣고 죽임을 당해요.

 

교회는 뭘 하는 곳이냐?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의로만 구원이 주어진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는 곳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의 행위는 무가치하고 오로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도를 믿는 것만이 옳음이라고 증거하는 곳이에요.

 

여기에 누가 반대 할까요?

인간의 가치를 긍정하는 자들이에요.

예수를 자기의 가치를 자랑하던 율법주의자들이 핍박을 하였듯이 지금도 인간의 가치를 긍정하는 인본주의자들이 복음 전하는 자들을 핍박해요.

 

지금은 예수를 믿는다고 죽이지 않아요.

예수 믿다가 죽임 당하는 그런 환란은 없어요.

이 시대 환란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의만 전하다가 인간의 행위에 가치를 두는 자들로부터 이단 소리 듣는 것이에요.

 

이 시대 영적 상황은 복음 전하면 사도요한처럼 유배당해요.

고립 당한단 말입니다.

교단으로부터 제명당하고 교인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우겨쌈을 당해요.

이단이라고 꺼꾸러뜨림을 당해요.

그들로부터 저 놈들은 이단이라고 하는 후욕을 들어요.

 

누구에게 듣는가 하면 정통이라고 자부하는 자들로부터 들어요.

유대교 정통이 예수를 죽였듯이 지금도 교단이라는 정통을 주장하는 자들이 복음 전하는 자들을 이단이라고 몰아서 죽여요.

 

천지가 개벽을 하여도 예수그리스도의 의로서만 의롭게 된다는 사실은 만고불변의 원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진리인 겁니다.

예수도 믿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영광 돌리자고 하는 자들이 논리에 속지 마세요.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에게서만 나와요.

이건 창세전에 이미 정한 언약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더러 그걸 지켜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고 주신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율법을 주어서 너희들이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고 주시지 않았어요.

그 반대에요.

너희가 율법 앞에서 얼마나 악한 죄인인지 알라고 주셨어요.

 

그리하여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알라고 주셨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오해한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는 줄 안 것입니다.

이게 오해에요.

 

지금도 이 오해를 하고 있어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줄 알고 있어요.

아니에요.

 

지금도 하나님 말씀은 율법과 같이 우리의 악함을 고발하여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입을 닫게 만들어요.

상한 심령이 일어나게 한단 말입니다.

 

우린 말씀 앞에 서면 작아져야 해요.

초라해야 한단 말입니다.

상한 심령이 되어야 한단 말입니다.

그리하여 주여 도와주세요! 라고 하여야 해요.

주님 불쌍히 여겨 주세요! 라고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나 잘했지요! 라고 하면 안 되어요.

나 잘했지요! 라고 하는 그것이 바로 귀신들려서 옷을 발가벗고 있는 것이에요.

귀신은 나를 긍정케 하고 성령은 나를 부정해요.

 

성령은 오직 예수만 긍정이고 너는 틀렸어 라고 해요.

그 어떤 말씀 앞에서도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에 은혜가 나와야지 우리의 가능성이 나오면 안 되어요.

 

하나님은 우리 가능성을 챙기라고 말씀을 주시지 않았어요.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 말씀은 항상 우리의 죄를 고발하고 우리의 실존을 폭로시키고자 주어진 것이에요.

 

환란에도 두 가지 환란이 있어요.

 

외적 환란과 내적 환란이 있어요.

외적 환란은 제명을 당하고 이단 소리 듣는 것이지만,

내적 환란은 하나님 뜻을 알고서도 그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갈등과 아픔이에요.

 

이건 사도 바울도 토설하였어요.

 

로마서 7장을 봅시다.

 

롬 7:14-25=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1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16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바울은 우리 안에 두 법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법과 그 법에 반하여 내 맘대로 살고자 하는 법이 있어요.

그런데 신앙적으로 보면  당연히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쪽으로 우리 마음과 몸이 움직여야 하는데 실상은 그 반대로 나타나요.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해요.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라고 탄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내적 환란이에요.

 

우리 몸은 전쟁터에요.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날마다 전쟁을 해요.

마음은 천사처럼 살고 싶은데 실제로는 천사로 사는 것이 아니라 악마로 살아요.

마음은 내 모든 것 다 주고 사랑하고 싶은데 몸은 자기만 챙긴단 말입니다.

 

성경대로 라고 한다면 우리는 무슨 일을 해도 남을 나 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데 실상에서는 남을 내 유익으로 끌어당기고 살고 있어요.

이타주의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이기주의로 산단 말입니다.

 

정답을 알면서도 그 정답대로 살지 못하는데서 오는 갈등이 내적 환란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 앞에서 작아질수 밖에 없어요.

그 뜻대로 살 수가 없음을 절감하고 탄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겐 이 싸움이 훨씬 힘들고 커요.

우리의 실존이 그러함에도 성경은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맨날 말씀 앞에서 신음 할 ㅅ후 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 주세요!

주여 도와 주세요! 라고 할 수밖에 없어요.

 

제는 늘 내가 하나님 뜻대로 살 수 없음을 알고 절망을 해요.

내가 미워요.

하나님께서 내 안에 있는 죄를 반드시 끄집어내세요.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얼굴을 못 들게 만들어요.

 

내가 나를 보아도 참 한심스럽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찌도 하나님의 뜻과 이리도 반대로 살고 있는지 몰라요.

모처럼 각오를 하고 속된 말로 이제는 하나님 뜻대로 한번 살아 보아야지 라고 작심을 하여서 시행을 하면 작심삼일이에요.

 

몇 날이 가지 않아서 번번이 넘어져요.

그리하여 내 스스로가 야! 내가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인간인가?

스스로 밉고 아파요.

쥐구멍이라도 들어가서 숨고 싶은데!

하나님은 기어이 말씀 앞에 세워서 나를 발가벗겨서 수욕을 당하게 만들어요.

 

말씀을 생각하면 내 꼬라지가 한심스러워서 눈물이 나와요.

내 안에서 울어요.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일어나요.

 

하나님 나 많이 아파요!

저 진짜 아파요!

나 좀 어루만져 주세요! 라고 해요.

 

과거 율법 아래 있을 때는 내가 진짜 괜찮은 인간인줄 알았어요.

그 때는 내가 이렇게까지 쓰레기인줄 몰랐어요.

지금은 쓰레기 정도가 아니라 내 속은 썩은 냄새가 펄펄 나는 시궁창이고 수챗구멍이에요.

내 목구멍이 열린 무덤이라는 말이 실감이 나요.

복음의 깊이를 알아 갈수록 내 죄는 더 드러나게 되고 그리하여 죄인의 깊이는 더 깊어지고 마음은 통절하게 더 아파와요.

 

신앙이 뭐냐?

나 대신 예수가 죽었다는 것을 알고 감사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을 은혜로 산다고 해요.

 

천국을 일컬어 “은혜의 나라” 라고 합니다.

은혜의 나라에서는 은혜를 아는 자들만이 살아 갈수가 있어요.

은혜는 어디서 알 수 있는가 하면 법 아래서만 알 수가 있습니다.

 

법과 은혜는 서로를 드러내는 짝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게 하시려고 말씀이라는 법 아래 두셨어요.

말씀이 살아서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우리 안에 죄는 낱낱이 폭로가 되어요.

내 안에 선(善)이 없음을 절실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똥 귀저기를 펄썩이면 냄새를 풍기듯이 우리의 언행심사가 풀럭이면 죄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와요.

 

그래서 예수가 없으면 안 되는구나! 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이 내 대신 죽어 주시지 않았으면 안 되는구나! 를 알게 되어요.

그러므로 내가 어떤 행위를 하고 안 하고를 떠나서 내가 사는 것은 우리 주 예수님의 피 흘리심 때문임을 알고 감사케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인간의 가치를 긍정해 주는 거대한 인본주의가 쓰나미처럼 몰려오고 있는 환란 가운데 있어요.

이 쓰나미에 밀려가지 않기를 사도 요한처럼 주의 날에 밧모섬에서 기도해야 해요.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루 하루가 주의 날이에요.

또한 우리가 처한 곳이 밧모섬이에요.

 

그러므로 인본주의가 몰아치는 환란 속에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뱀의 말이 홍수가 되어서 강단에서 쏟아지고 있는 이 때에 마음은 은혜로서 굳게 하여서 이겨 내야 합니다.

지나친 의인도 되지 마시고!

지나친 악인도 되지 마세요.

은혜 아래 있으니 더 이상 정죄 당하지 않으니까 막 살아도 된다고도 하지 마시고!

구원 받았으니 이제부터 하나님 말씀대로 열심히 살아서 영광 돌리겠다고도 하지 마세요.

 

우린 이러나 저러나 죄인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음을 아세요.

그리하여 내가 사는 이유는 그 아들 안에서 용서 받고 살고 있음에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목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덮어 주심의 그 은혜만이 우리의 신앙으로 남게 되기를 기도하셔야 합니다.

 

오직 은혜!

이 은혜로 살고 있음이 깨달아져서 감사하는 생활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 많이 아파요! 좀 어루만져 주세요. 내가 나를 감당하기 힘이 들어요. 예수그리스도 밖에서 나를 보지 말고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 안에서 나를 보게 하여서 죄로 인하여 상하고 찢긴 마음을 치료하여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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