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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말씀/요한복음

61강. 실제냐! 관념이냐! (요 9:13-23)

by coroa 2021. 8. 10.

 

 

61강. 실제냐! 관념이냐! (요 9:13-23)

-.정낙원 목사

 

 

 

오늘 본문을 보면 유대인의 핍박에 굴복한 사람과 굴복치 않은 사람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에 의하여 눈을 뜨게 된 소경은 유대인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예수님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출교 당할까봐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한 사람은 당당하게 난 예수를 안(믿는)다고 말하고, 한 사람은 난 예수를 모른다고 합니다.

한 사람은 살기 위해서 예수를 모른다고 하고 있고, 한 사람은 죽더라도 예수를 안다고 합니다.

어째서 부자지간 임에도 이리 극단적인 고백으로 나누일까요?

 

이는 예수님을 자기가 직접 만난 사람과 간접적으로 만난 사람의 차이입니다.

한 사람은 예수로부터 직접적인 은혜를 입었고. 다른 한 사람은 받은 은혜가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를 증거하는 것이 다릅니다.

 

하나는 지식으로 아는 관념이지만, 하나는 실제로 부딪쳐서 알게 된 현실입니다.

예수님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은 목숨을 걸고 믿음을 지키는 반면에,

예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지 못한 사람은 예수는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짝퉁시대입니다.

짝퉁이란? 겉보기엔 동일한데 속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가짜란 말입니다.

 

이런 짝퉁이 예수를 믿는 신앙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짝퉁 교회와 짝퉁 교인들이 있어요.

겉으론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 그 속을 쫙 갈라보면 다른 예수를 믿고 있어요.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가 없고 자기가 만든 예수가 들어 있어요.

자기 소원을 들어주는 예수에요.

 

성경은 은유적으로 여자를 교회라고 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아담을 여섯째 날에 깊이 잠들게 하시고 옆구리에서 갈빗대 하나를 빼내서 여자를 만들었어요.

이를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고 했으니 예수님으로 해석해 봅시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금요일(여섯째 날)에 십자가에 죽으시고(깊이 잠드심) 옆구리에 물과 피를 쏟고 교회(성도)를 만드셨지요.

교회를 일컬어 피로 값주고 사신 것이라 하잖아요.

그러니 여자는 교회의 표상입니다.

은유적으로 그렇다는 겁니다.

 

시청각교제로 재미 삼아 이 시대 여자를 교회라고 한번 살펴보세요.

요즘 여자들은 성형으로 다 뜯어 고치지요.

이는 인간들이 만든 교회가 판을 친다는 말입니다.

 

과거엔 부모가 물려준 몸을 훼손하면 불효한 것이라고 해서 얼굴에 점 하나도 빼지 않았어요.

그러나 지금은 아름다움이라는 미명하에 온 몸을 성형으로 조각하고 있어요.

못난 부모가 원망스러워요.

그래서 부모가 준 흔적을 없애고 자기가 좋아하는 인조(人造) 인간으로 개조를 합니다.

낮은 곳은 높이고 높은 곳은 낮추고, 큰 것은 작게 하고 작은 것은 크게 하고 있어요.

 

죄가 뭐냐?

하나님이 하신 것을 변개 시키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인간이 개입하여서 본질을 흐려 놓는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하신 일에 손을 대는 것을 일컬어 불순종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것을 죄가 인간들로 하여금 유전자를 조작하여서 동물이든 식물이든 변개시키고 있어요.

심지어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로 나게 하셨는데 의학이라는 이름으로 남자를 여자로 또는 여자는 남자로 성전환 하고 있잖아요.

 

연예인 중에 하00 라는 사람 알지요.

원래 남자였는데 여자로 성전환을 하여서 지금 결혼하여서 살고 있어요.

하00 아줌마는 성 염색체로 따지면 남자에요.

그런데 성전환으로 여자로 살아요.

그렇다면 지금 하00는 남자와 남자가 결혼하여서 부부로 살고 있는 겁니다.

이건 분명히 하나님이 만드신 것을 변개 한 겁니다.

이름하여 죄입니다.

 

오해할까봐 첨언 합니다.

성전환 하였다고 해서 지옥 간다는 말이 아니에요.

예수 안 믿으면 지옥가요.

그러니 하00도 예수 믿으면 천국 갑니다.

예수 안 믿으면 성전환 수술 안 해도 지옥가요.

 

인간 세상에 죄가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 말하고자 비유를 든 것입니다.

죄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식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지금 인간들 세상이 그래요.

죄가 하나님이 하신 일을 그대로 두고 보지 못하게 만들어요.

그래서 자꾸만 뜯어 고쳐서 인간의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겁니다.

 

지난번 ‘솔 약국 집 아들’ 이라는 드라마에서 아내가 그린 그림을 남편이 보고선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덧칠을 해 놓았어요.

그 광경을 본 아내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경악하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지금 인간들이 하나님을 경악케 하는 짓들을 하고 있어요.

전부 인간 입장에서 하나님도 뜯어 고치고 예수도 뜯어 고치고 성령도 색칠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자식이 만약 여러분이 만든 작품을 뜯어 고쳐 놓았다면 어찌하겠습니까?

아주 난리를 치겠지요.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듯이 살아가는 의미도 다 달라요.

사람들은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관(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러한 세계관(가치관)이 각 사람의 종교관을 형성하게 됩니다.

 

세상에는 종교가 다양합니다.

종교가 다양하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의 종교성도 다르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자기 종교성에 따라서 종교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종교성을 하나의 성질이라고 합시다.

성질이란? 하나의 법칙이란 말과도 같습니다.

모두가 하나의 법칙으로 움직여 질 때 평화가 됩니다.

 

고속도로에 역 주행을 하면 사고가 나겠지요.

남자 목욕탕에 여자 한 사람이 들어와도 아수라장이 되겠지요.

남탕엔 남자가 여탕엔 여자가 가야 평안해 집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모두가 예수 피를 모르면 그 집단은 예수 피가 없어도 평화가 됩니다.

하지만 그 속에 단 한 사람이라도 예수를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균열이 생기고 평화가 깨어집니다.

모두가 율법 신앙으로 성화 한다고 하면 문제가 없어요.

그런데 그 중에 한 사람이라도 율법으로는 구원이 없습니다 성화는 이단입니다 라고 하면 시끄러워 지겠지요.

 

지난 번 닭장에 부엉이 한 마리가 들어 와서 닭 삼천 마리가 몰살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다른 놈이 들어오니 평화가 깨어져 자중지란(自中之亂)으로 다 죽은 겁니다.

 

사무엘상 14장에 보면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전쟁을 하고자 대치하고 있습니다.

블레셋 군대는 엄청난 무기로 무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사울 왕과 요나단만이 병기를 들고 있고 나머지 군사들은 무기가 없어요.

이건 싸우나 마나에요.

전쟁은 무기의 힘으로 하는 것인데 이스라엘은 무기가 없어요.

 

그런데 요나단이 몸 종 한 명을 데리고 블레셋으로 쳐 들어가 싸움을 합니다.

이건 무모한 짓이에요.

요나단도 알아요.

하지만 요나단은 이스라엘이 하는 전쟁은 하나님이 한다는 것을 알았어요.

 

삼상 14:6 “요나단이 자기 병기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없는 자들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요나단은 여호와가 하는 전쟁은 사람의 수가 많고 적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근심하는 몸 종에게 요나단이 아주 중요한 말을 합니다.

블레셋을 일컬어 할례 없는 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이 할례 없는 자들에게 건너가자고 하지요.

 

할례 없는 자란 죽은 자란 말입니다.

저 놈들은 송장이란 말이에요.

요나단은 산 자이고 블레셋은 죽은 자란 말입니다.

결국 이 전쟁은 영적 전쟁이라는 말이에요.

그러니 무기나 사람의 수가 필요가 없지요.

 

다시 말합니다.

지금 요나단은 할례 받은 자이고 저 쪽 블레셋은 할례 받지 않은 자들입니다.

이러면 할례와 무 할례가 싸우는 겁니다.

할례 없는 블레셋에 할례 받은 전혀 다른 종자가 들어간 겁니다.

 

이건 마치 닭장에 부엉이 한 마리가 들어간 것과 같아요.

요나단이 블레셋 진에 들어가자 땅이 진동하는 이상한 광경이 벌어집니다.

그러자 블레셋 군인들이 자기들끼리 싸워서 몰사를 당하고 맙니다.

 

삼상 14:20 “사울과 그와 함께한 모든 백성이 모여 전장에 가서 본즉 블레셋 사람이 각각 칼로 그 동무를 치므로 크게 혼란하였더라”

 

요나단이 지금 할례 받은 부엉이가 되어서 닭장 속에 들어간 겁니다.

그러니 무 할례자인 닭들이 서로를 죽이고 있는 겁니다.

할례 받은 한 사람이 무 할례 받은 수만의 군대들 속에 들어가니 일순간에 평화가 깨트려져 버린 겁니다.

 

이런 모습이 2천 년 전 유대 땅에서 일어났어요.

율법으로 하나가 되어 있는 세상에 예수님이 은혜를 몰고 온 겁니다.

이걸 어둠에 빛이 비추었다고 합니다.

예수라는 빛이 어둠이라는 세상에 오니 온 세상이 발칵 뒤집어 진 겁니다.

 

유대 땅에 율법으로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던 사회에 은혜라는 이질적인 것이 들어 온 겁니다.

마치 가루 속에 누룩이 들어온 것과 같아요.

그러니 유대인들은 난리가 난 겁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유대인들의 신앙관과 예수님의 신앙관에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마치 배가 지나가면 물살이 둘로 갈라지듯이 예수님이 지나가면 유대사회가 두 쪽으로 분열이 일어나는 겁니다.

“너희”와 “저희”로 갈라지는 거예요.

 

조용하던 유대사회가 예수라는 한 사람 때문에 큰 혼란에 빠지고 만 겁니다.

마치 구약 시대 요나단 한 사람이 블레셋을 혼란을 빠뜨리게 한 것과 같지요.

요나단이 장차 오실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예표 적으로 보여준 겁니다.

이렇게 되면 유대인은 곧 블레셋과 같은 할례 없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즉 죽은 자란 말입니다.

 

맞습니다.

죽은 세상에 예수님이 생명으로 오신 겁니다.

그러니 혼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인간들은 혼란을 싫어합니다.

늘 해 오던 대로 사는 것을 좋아해요.

옛 언약 아래선 옛 언약으로 살아야 편하지 새 언약으로 살라고 하면 불편해요.

이처럼 인간들은 새로운 것을 접하면 몸이 불편하기 때문에 싫어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낯선 환경을 수용하기 보단 싫어서 밀어내고자 합니다.

 

사람의 본성은 자기와 다른 것을 만나면 본능적으로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하여 자기와 다른 것은 일단 거부부터 하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낯선 것을 대하면 불안하고 불편함을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몸은 이질적인 것을 만나면 자기 보호 본능 때문에 이질적인 것을 죽이는 겁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편안하게 살고자 합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자기의 편안함을 침해한다면 미워져요.

신혼부부가 알콩달콩 잘 살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찾아와서 분위기를 깨면 싫어요.

 

인간은 자기 편안함을 침해하면 그가 비록 부모라 할지라도 귀찮은 존재예요.

예수님께서 유대교에 출현한 것은 마치 잘 살고 있는 신혼부부 집에 부모가 찾아와서 분위기를 깬 것과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자기들의 신앙 안에서 편안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타나면서 유대인들의 율법종교에 균열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인 자를 고침으로서 평화롭던 유대인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하였어요.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출현으로 엄청난 혼란 속으로 빠져 든 겁니다.

 

혼란을 겪게 되는 이유가 예수님이 몰고 온 신앙이 기존의 신앙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율법신앙으로는 도무지 예수님이 몰고 온 은혜 신앙을 감당할 수 없어요.

이건 새 술을 헌 부대에 넣은 것과 같아요.

율법이라는 부대는 은혜라는 새 술을 감당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 예수님이 몰고 온 은혜라는 새 술이 누룩처럼 율법이라는 온 가루를 부풀게 하여서 유대교라는 자루를 터지게 만들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를 제거하여야 하는 겁니다.

온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라도 예수는 제거 되어야 합니다.

물론 예수에게 속한 자들도 제거 대상이에요.

 

유대인들은 조상 대대로 지켜온 율법이라는 신앙이 있어요.

율법 속엔 안식일엔 아무 것도 안하고 쉰다! 라는 법이 있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만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만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소경의 눈을 뜨는 것이야 좋은 일이지만 왜? 하필 다른 날도 많은데 안식일 날에 하느냐고 따지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일을 금지하고 심지어 밥을 짓기 위해서 불을 피우는 일까지도 금기시 하고 조상대대로 지켜왔어요. (안식일에 대하여는 30강을 참고 하세요.)

그런데 예수가 안식일 날 소경을 고침으로 율법으로 금지한 행동을 하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 입장에선 예수님은 율법을 어기고 규례와 법도를 깨트린 반(反) 율법주의자에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일 때 죄목 중에 안식일을 범한 죄도 들어가 있었던 겁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아야 해요.

하나님은 왜? 율법 아래서 잘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보내서 율법을 깨트리는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아야 합니다.

 

만약 유대인들에게 일어난 것이 내게 일어났다고 생각을 해 보세요.

본인은 율법 지킴이 신앙이라고 믿고 있는데 누가 율법지킴은 불신앙이라고 한다면 본능적으로 자기 신앙을 지키고자 반발을 하겠지요.

수용하면 자기 신앙이 틀린 것이 되잖아요.

만약에 율법신앙이 틀렸다고 믿어지면 받아들이지만 믿어지지 않는다고 한다면 율법 지킴을 불신앙이라고 하는 자와 전쟁을 하겠지요.

 

이처럼 우리는 자기와 반대 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해요.

이건 삶에서도 마찬가지에요.

잘 살고 있는 내 인생에 예수님이 개입하여서 평지풍파를 일으킨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는 유대인들이 무조건 예수님을 배척하였다고 하여서 유대인들을 나쁜 사람들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만약 유대인과 같은 처지에 놓였다면 우리도 유대인들처럼 반발 할 수밖에 없어요.

지금도 유대인들처럼 율법 신앙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증거하면 화를 내요.

 

자 이렇게 생각합시다.

모두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면서 성화를 외치는 교회에 제가 가서 성화주의는 이단입니다 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도리어 저를 보고 이단이라고 난리를 치겠지요.

 

교회가 성전이고,

주일이 안식일이고,

십일조가 복 받는 길이고,

목사가 제사장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성전도 없고 주일성수도 없고 십일조도 없고 제사장도 없습니다! 라고 하면 어떻게 할까요?

아마도 대번에 이단이라고 하겠지요.

 

그러니 지금도 2천 년 전 유대 땅에서 일어난 사건이 교회 안에서 재현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과 유대인의 충돌은 율법 신앙이냐 은혜이냐의 싸움이에요.

믿음이냐! 행함이냐! 와의 한판 전쟁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예수님과 유대인들의 충돌 사건을 남에 이야기로 듣지 말고 내 이야기로 들어서 나의 신앙과 비교하여 보아야 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행하셨던 것과 같이 성도들을 간섭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꾸만 우리 신앙을 간섭해서 흔들어요.

너 그게 틀렸다!

넌 가짜! 라고 한단 말입니다.

우리 속에 허물을 자꾸만 들추어내서 불편하게 만들어요.

 

우린 평생 하나님과 싸우며 사는 자들이에요.

그만큼 우리 신앙이 어그러진 길로 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날마다 성도에게 태클을 거는 겁니다.

 

성도란? 하나님이 간섭해서 늘 삶이 헝클어지는 자에요.

우리 뜻대로 안 살아진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흔히 내 인생에 하나님이 개입하면 안 되는 일도 잘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종교성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기 때문이에요.

모두가 죄가 자아 중심으로 모든 것을 좋게 이해하도록 해서 그래요.

 

인간들은 신은 인간들을 도와주는 분이라고 생각을 해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신관으로 예수를 믿고 있어요.

열심과 충성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고 믿고 있잖아요.

목사들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어요.

그래서 교인들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충성한다고 합니다.

 

이런 신관으로 접근하면 내가 하나님을 섬기므로 하나님은 나를 도와주실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

세상에서 잘 되게 해 주실 것이라고 믿어요.

이런 생각이 우상숭배적 생각이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는 인간의 소원을 깨트리는 방식으로 일을 하시는 겁니다.

성경 속에 믿음에 사람들의 증거를 보면 다 인간적으로 망한 사람들이에요.

하나님 때문에 세상에 복을 받은 것이 아니고 망한 사람들이에요.

 

우리가 믿음에 조상이라고 자랑하는 아브라함을 예로 봅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만나기 전 까지만 해도 멀쩡히 부모 친척들과 잘 살고 있었어요.

부모님에게 효도하면서 일가친척들과 다복하게 살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느닷없이 찾아오고 난 후로는 이 평안함이 깨어지고 말았어요.

하나님이 찾아와서 하시는 말씀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겁니다.

아니 무슨 심술이 있어서 잘 살고 있는 고향집을 떠나라고 합니까?

 

고향이란? 엄마 품과 같이 편안한 곳이에요.

반대로 타향은 낯설고 불편한 곳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집을 떠나는 자식들에게 하는 말이 밥 잘 먹고 몸 건강히 잘 있어야 한다고 당부하는 겁니다.

이는 집 떠나면 밥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고 고생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집 떠나면 고생인데 하나님은 얄궂게도 아브라함에게 그것도 잠시 떠나 있다가 돌아오게 한다는 것도 아니고 영영 이별을 하라고 합니다.

참으로 해괴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말은 아브라함의 행복을 박탈하는 겁니다.

고생하다가 죽으라는 말과도 같아요.

 

그런데 그런 하나님을 지금 우리가 믿고 있어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이런 분인데도 우린 모르고 있는 겁니다.

그저 인간의 본능으로 아는 복주는 그런 하나님으로 알고 믿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혼비백산하여서 하나님께 따지는 겁니다.

 

우리가 얼마나 엉터리로 하나님을 알고 있는지 몰라요.

우리가 알고 믿는다고 하는 하나님은 성경을 열면 가짜 하나님이라고 해요.

이름하여 마귀에요.

마귀가 하나님으로 위장하여 있는데도 모르고 있어요.

 

유대인도 그랬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너희 아비는 하나님이 아니고 마귀라고 한 겁니다.

마귀가 주는 위장된 평화 안에서 안주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신앙에 틀을 박살내고 있는 겁니다.

 

이는 지금도 동일하게 성도에게 역사하고 있어요.

지금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찾아와서 멀쩡한 직장도 버리고 사랑하는 가족도 버리고 내가 지시할 땅으로 떠나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쉽사리 예수님 뜻을 따를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어요.

한번 살펴봅시다.

 

눅 14:25-33=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쌔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과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28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찐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31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2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찌니라 33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보세요.

예수님이 자신을 믿겠다고 따르는 무리들을 보고 돌아가라고 하잖아요.

너희들 나를 믿는 길이 어떤 길 인줄 알고 따르겠다고 하느냐?

부모와 처자와 자매와 자기 목숨까지 버리는 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돌아가라고 하는 겁니다.

 

괜히 믿겠다고 하다가 나중엔 실망하니 미리 가라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은 자진해서 예수님을 믿겠다고 따라 오는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있어요.

아니 전도를 해야 할 예수님이 오히려 전도를 막고 있어요.

이걸 어떻게 설명할래요.

 

어째 이 시대 목사들이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하고는 사뭇 다르지요.

목사들은 강권하여 집을 채우라고 하잖아요.

이 말을 양적인 개념으로 이해하니 사람들을 불러 와서 교회를 부흥시켜야 한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안 믿겠다고 하는 사람도 억지로 꼬셔서 교회에 오라고 야단들이잖아요.

 

누가복음 14장에서 말하는 내 집을 강권하여 채우라는 말은 천국잔치에 참예할 자가 따로 있다는 말이에요.

먼저 잔치에 초청된 사람은 합당치 않은 자들이니 구원 받기로 작정된 그 사람을 찾으라는 말입니다.

이건 숫자 채우는 것하고 달라요.

천국은 숫자 채우는 곳이 아니에요.

잔치에 합당한 자가 들어가게 되어 있어요.

 

하박국 선지자가 “주여 수년 내 부흥케 하소서” 라고 하였다고 교회 안에 플래카드를 만들어서 걸어 놓았어요.

이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그냥 교인들에게 교회부흥에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고 걸어 놓는 겁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수년 내 부흥케 해 달라는 것은 이스라엘 속에 악인은 다 징벌하고 순종들만 남게 해 달라는 소리에요.

한마디로 이스라엘을 심판해 달라는 말이란 말입니다.

 

그런데도 교회 정면에 붙여 놓았어요.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어쩔 수 없어요.

개 눈엔 똥만 보인다고 하듯이 교권 주의자들 눈에는 심판하겠다는 소리도 복을 준다는 소리로 들려요.

예수님이 저주하려고 왔는데 그 앞에서 복을 달라고 하고 있어요.

 

어떤 교회는 해피데이 한다고 각 구역별로 깃발을 흔들고 사람들을 호객행위 한다고 난리입니다.

무슨 다단계 회사 같아요.

수변 공원에 가면 각 교회마다 나와서 지나가는 산보객들에게 커피 타주고 교회 오라고 서로 경쟁이 이만 저만이 아니에요.

이런 풍경이 이젠 길거리마다 있어요.

누가 이렇게 전도하면 교회가 부흥된다고 한 모양이에요.

전도가 무슨 테크닉으로 하는 줄 알아요.

 

좌우지간 교인들이 얼마나 무식한지 목사가 시키면 다 해요.

마치 조선시대 신하가 임금이 준 사약(死藥)을 받아 쳐 먹고 죽어가면서 “전하 성은(聖恩)이 망극하나이다!” 라고 하는 것 같아요.

아니 이게 어찌 성은이 망극할 일입니까?

그걸 왜? 고이 받아 쳐 먹고 죽습니까?‘

 

지금 목사가 마귀 앞잡이 노릇하고 있는데도 주여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라고 하고 있어요.

예수님이 수많은 무리들이 따라 올 때 어디에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고 했습니까?

없어요.

예수님은 죽는다고 하는데 목사들은 복 받는다고 하잖아요.

다 목사들이 사기 치는 겁니다.

 

흔히 목사들이 그러지요.

신통(神通)하면 인통(人通)하고,

인통(人通)하면 물통(物通)하고,

물통(物通)하면 만사형통(萬事亨通) 한다고 하지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까?

하나님과 통하면 사람과도 통하고,

사람과 통하면 물질 면에서도 형통하게 된다는 말이에요.

한마디로 하나님한데 잘 보이면 자식도 잘 되고 물질에 복도 받고 행복하게 잘 산다는 말이에요.

완전히 고스톱 판에서 싹쓸이해서 피 한 장씩 덤으로 받아 챙기는 것과 같지요.

 

그런데 말이죠.

예수님은 예수님과 통하면 복은 고사하고 세상에서 핍박 받는다고 했어요.

너희가 세상에서 나에 택함을 입은 고로 미움을 받는다고 했어요.

 

요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이 되는 게 아니고 미움 받아요.

그러니 교회마다 얼마나 그릇된 예수를 전하고 있는지 몰라요.

이 시대 대 다수 교인들은 전혀 다른 예수를 믿고 있어요.

 

오죽했으면 예수님께서 예수를 믿는 것은 가족과 원수가 되는 일이고 자기를 죽이는 일이라고 따라 오지 말라고 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의 이런 말씀과 이 시대 교인들의 모습을 비교하면 이 시대 교인들은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입을 벌리지 아니할 수가 없어요?

참으로 믿음들이 대단해요?

 

지금도 죽기 살기로 예수에게 복을 받겠다고 불철주야 따라 다니고 있잖아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참으로 난감하기 이를 데가 없어요.

여러분 진짜 예수를 만난 사람은 인간의 의지나 각오로는 예수를 못 믿겠다고 해요.

나 예수 안 믿을래!

그런단 말입니다.

이런 예수라면 난 못 믿겠다고 해야 그 사람이 바른 예수를 만난 사람이에요.

 

도망가라는 말이 아니고 우리의 원대로 해 주지 않기 때문에 늘 부딪치게 된단 말입니다.

내가 복은 고사하고 저주 받을 자라는 것을 알아요.

그러니 복 달라는 소리를 못해요.

 

구약에 보면 예수 믿고 복 받겠다고 했다가 망한 사람이 있어요.

야곱은 난 반드시 예수 믿어서 복을 받고 말거야 하다가 망한 사람입니다.

야곱은 장자의 축복을 받으면 복이 넝쿨채 굴러 오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호시탐탐 장자권을 빼앗을 궁리를 하고 살았어요.

 

그러다가 절호의 기회가 온 겁니다.

아버지에게 거짓말시키면서까지 장자의 축복을 받는데 성공했어요.

이제 불행 끝 행복 시작이 된다고 믿었어요.

그런데 찾아 온 것은 행복이 아니라 지금 누리고 있는 것마저도 빼앗기는 신세가 되고 말았어요.

 

야곱은 아버지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받자 집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어요.

구약에 장자의 축복은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 받는 복이에요.

신약적으로 말하면 천국을 유업으로 받는 구원권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야곱이 이삭으로부터 축복을 받은 것은 성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는 것과 동일합니다.

그런데 야곱은 아비의 유업을 이어 받기는 커녕 집에서 쫓겨났어요.

야곱이 생각한 복은 고사하고 저주만 받은 겁니다.

물론 야곱이 받은 축복은 이 땅에 복이 아니고 하늘에 있는 복을 받았어요.

하지만 하늘에 복은 이 땅에 살아가는데 하등 도움이 안 되어요.

야곱을 통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하늘에 복을 받으니 이 땅에 복은 박탈당하더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으면 세상에서 만사형통하게 되리라고 생각을 하지요.

그런데 야곱은 만사형통이 아니라 집에서 쫓겨 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어요.

야곱은 아버지로부터 축복을 받으면 인생길이 훤히 열릴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전혀 다른 결과가 주어지니 당황스러운 겁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엄마 아버지와 형과 재미있게 살았는데 지금은 집에서 쫓겨나서 광야에서 돌을 베고 두려움에 떨면서 잠을 자고 있는 야곱의 신세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게 복이라고 여겨지십니까?

 

여기서 하나님 고맙습니다! 라는 말이 나오겠습니까?

여러분도 이런 복 받으세요! 라고 한다면 다 거절 할 겁니다.

그리고 야곱에 일생이 어디 평탄했나요.

하는 것마다 하나님이 태클을 걸어서 망하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이걸 성도가 받은 복이라고 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복이 아니라 저주에요.

그래요.

하나님의 복은 인간적으로는 저주로 주어져요.

 

노아를 보세요.

노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았으면 그냥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살아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방주를 지으라고 하십니다.

아니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유분수이지 멀쩡한 날에 홍수가 온다고 하고 뱃놀이 할 배도 아니고 창고와 같은 배를 지으라고 하니 누가 이해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노아의 인생이 평탄했다고 단정하지 마십시오.

노아의 인생은 하나님이 개입함으로 완전히 망가지게 되었어요.

예수님이 노아 시대를 일컬어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했다고 하지요.

이건 인간들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모습이에요.

그런데 노아는 이런 평범한 삶도 살지 못하였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노아는 이런 삶을 못 살았다고 하는 의미에서 노아 시대 때 사람들은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했다고 하는 겁니다.

결국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음으로서 인생을 망치게 된 것입니다.

구약 마당에서 수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이 개입하심으로 그들의 인생사가 엉망진창으로 헝클어졌다고 말해주고 있어요.

 

신약의 성도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12제자들도 예수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처자식들과 가정적으로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찾아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심으로부터 인생은 거지 신세가 되고 말았어요.

베드로는 예수를 만나기 전까지는 처자식과 알콩달콩 재미나게 살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예수가 찾아와서 베드로의 가정은 풍비박산 나고 만 것입니다.

베드로가 배와 그물을 버렸다는 것은 지금식으로 말하면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낸 것과 같아요.

예수님은 한 가정을 파탄 낸 가정 파괴범입니다.

 

바울 역시 예수를 만나고 나서 망했어요.

바울은 율법아래선 장래가 촉망 받던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동족들로부터 이단 소리 듣고 공공의 적이 되고 말았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나 나 때문에 고생이 많다고 했어요.

 

요 15:20=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당한다고 했어요.

그러니 예수 믿으면 세상에서 행복해 진다고 하는 것은 다 거짓말인 겁니다.

그런 말 하는 사람들은 다 거짓 목사들이에요.

 

아니 우리는 핍박을 면하려고 예수를 믿는데 예수님은 우리더러 너희가 예수를 믿기 때문에 핍박을 당한다고 하시잖아요.

핍박을 당하는 이유가 예수를 믿기 때문이라고 하잖아요.

이런 사실을 안다면 그 어느 누구도 예수를 믿겠다고 나서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솔직히 예수를 아무나 믿는 것이 아니구나! 라고 해야 합니다.

맞습니다.

예수는 아무나 믿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 믿는 사람 팔자가 따로 정해져 있어요.

누가 예수 믿을 팔자인가 하면 예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 가서 불러냈듯이 불러내요.

 

과거에 버스를 타면 장사하는 사람이 번호표를 나누어 줍니다.

그리고 임의대로 몇 번 몇 번 불러요.

성도도 이런 식으로 불러요.

 

예수님이 야! 정낙원이 너! 이리와! 그런단 말입니다.

그럼 난 얼떨결에 불려 나가서 왜요? 그럽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너 천당에 가! 그런단 말입니다.

나는 졸지에 천당에 가야해요.

 

그런데 천당 가는 길이 세상에서는 지옥이에요.

천당 가는 열차가 지옥 같은 길로 몰고 가는 겁니다.

마치 구약 이스라엘이 구름기둥 불기둥 따라 나왔는데 짐승들이 우굴거리는 광야 길인 것과 같아요.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겠다고 악악대는 겁니다.

 

이게 우리 모습이에요.

우린 예수님 왜? 날 이렇게 고생 시킵니까?

그러면 예수님이 그래요.

천당 가기 때문에 여기서 지옥 생활하게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개 고생 해도 복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선택했다는 말은 너! 나하고 같이 십자가에서 죽자! 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으라고 한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못 박으라고 해요.

 

오늘 본문의 소경도 예수님의 개입하심으로 뜻하지 않는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어요.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지 않았다면 동네 사람들로부터 쫓겨나게 될 만큼 핍박은 받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예수님이 눈을 뜨게 하면서부터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말았어요.

 

소경이 눈을 뜨게 된 것은 자신의 뜻과는 전혀 무관하게 일어났어요.

갑자가 예수님이 찾아 오셔서 눈을 뜨게 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일으킨 사건이에요.

 

우리의 구원도 동일해요.

우리의 원함이나 의지와 상관없이 이루어졌어요.

성도가 구원을 받는 것도 소경처럼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일으킨 사건입니다.

구원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발생되었기 때문에 인생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끌려가는 겁니다.

소경은 예수님이 찜한 흔적을 가지고 있어요.

 

소경이 눈뜬 것을 구원이라고 봅시다.

 

그럼 유대인들은 열심히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으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소경은 아니야! 예수님이 공짜로 해 줘!

행함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은혜로 된다고 하는 겁니다.

지금 소경이 율법 지키지 말고 예수 믿으세요! 라고 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 유대인들 눈에는 소경은 미운 오리 새끼와도 같은 존재입니다.

저 인간만 없으면 예수를 몰아 낼 수가 있는데!

예수만 몰아내면 율법 신앙이 견고해 지는데!

저 인간을 어떻게 하면 없앨까! 라고 이를 간단 말입니다.

 

소경의 부모 입장에선 자식의 눈이 떠진 것은 기쁜 일임에는 틀림이 없어요.

하지만 유대인들로부터 출교를 당하여야 할 입장이고 보면 그리 기쁜 일만이 아닙니다.

유대인으로서 유대교로부터 출교를 당한다는 것은 죽는 것입니다.

마치 야곱이 집에서 쫓겨나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 자식 편을 들어 줄 수가 없어요.

남은 식솔들이라도 유대사회에서 살자면 예수를 모른다고 하여야 해요.

부모 입장에선 오히려 자식이 소경으로 살아가는 것이 훨씬 편해요.

괜히 자식 놈이 예수에게 눈을 떠 가지고 온 집안이 우환거리가 생긴 겁니다.

소경의 부모입장에선 예수에게 찜 당한 것이 인간적으로는 좋은 일만이 아닌 겁니다.

 

소경이 예수님으로부터 눈을 뜨게 된 것은 아무나 받는 축복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축복이 주위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게 된다는 것이 문제인 겁니다.

이러면 조금 전에 눈을 떳다고 좋아하던 기쁨이 금새 원망으로 바뀌게 되어요.

 

제 누님이 그래요.

넌 왜? 그런 목사 노릇을 하느냐? 라고 그래요.

주변에 교회들은 다 손님들이 많은데 너는 왜? 그렇게 힘들게 하느냐! 라고 해요.

교인들 비위 좀 잘 맞추어서 손님들이 좀 많게 하면 안 되느냐고 물어요.

그래서 제가 글쎄요.

저도 내가 왜? 이런 목사 노릇하는지 모르겠어요.

나도 잘하고 싶은데 안 되는 걸 어쩝니까?

예수를 모르고 복음을 모르는 분에게 무슨 말을 하겠어요.

 

하나님은 우리가 불평을 하면 내가 아무에게나 그런 은혜를 주는 줄 아느냐! 라고 하세요.

네가 하나님께 특별한 복을 받아서 그렇다고 합니다.

 

이사야 43장을 보면 하나님이 그럽니다.

 

사 43:1-3=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3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야곱아 너는 내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네가 물 가운데 지날 때에 함께하고 불 가운데 다닐지라도 불꽃이 너를 사르지 못하게 한다고 합니다.

 

이는 물 속에다 집어넣고 불 속에다 집어넣는단 말입니다.

아주 냉탕과 열탕을 번갈아 가면서 집어넣고 빼낸다는 말입니다.

이건 아주 경기가 나도록 식겁을 시키는 겁니다.

 

어제 목욕탕에 갔는데 아빠가 어린 아기를 안고 탕 속에 들어오는 겁니다.

그러자 아이가 기겁을 하고 우는 거예요.

아빠는 괜찮다고 하지만 아이는 안 괜찮아요.

그래도 아빠가 아이를 안고 달래면서 탕 속에 있어요.

 

그 모습을 보니 갑자기 이사야 43장 야곱의 말이 생각나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금 저렇게 다루시고 계시는구나 를 알았어요.

난 죽겠는데 말이죠.

 

그런데 말이죠.

물 가운데 들어가 보아야 애굽에 사람은 다 죽는데 자기는 산다는 것을 알아요.

불 가운데 들어가 보아야 애굽 사람은 다 타죽는데 자신은 예수 안에서 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요.

그러니 겉으론 물속이 지옥이고 불속이 지옥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 속이 천국인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래요.

십자가는 분명히 겉으로 보기엔 죽음이고 저주에요.

그런데 그 죽음 너머에 죄사함이 있고 영생이 있고 천국이 있어요.

이 속에 들어가 보아야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아요.

야! 이거 엄청난 축복을 받았구나를 알게 되어요.

 

그런데 이 십자가라는 복이 사람들 눈에는 복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스러워요.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듯이 눈을 뜨게 해 주어야 알 수가 있어요.

예수님이 지금 우리 눈을 뜨게 해 준 겁니다.

눈을 뜨고 보니 십자가가 복이라는 것으로 보이는 겁니다.

 

그런데 마귀라는 놈이 자꾸만 우리 눈에 세상 것으로 십자가를 안개처럼 가리고 있어요.

무저갱에서 연기가 나와서 해가 어두워지게 만들어요.

즉 마귀가 세상 영광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눈을 가린단 말입니다.

 

마귀가 눈을 가리면 세상 복을 추구해요.

그래서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의 피라는 안약으로 발라 보면 세상 복은 가짜이고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맺은 새 언약만이 참 복이라는 걸 알게 되어요.

성도라고 할지라도 복에 개념이 바뀌지 않으면 일평생 불평하며 살아가게 되어요.

 

어쩌면 신앙은 일평생 불평하며 살게 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항상 내 생각과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믿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증거 되어야 하기 때문에 항상 갈등의 소지를 안고 있어요.

 

땅 사람은 땅에 방식대로 살 때가 편안하고 행복해요.

만약 땅 사람이 하늘에 사람으로 살려면 힘이 들고 불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땅 사람으로 살지 말고 하늘에 사람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땅에서 하늘에 삶을 살라고 하세요.

 

땅에서 하늘에 삶을 살다간 사람들의 인생 유전이 히브리서 11장 내용이에요.

 

히 11:13-16=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 하였으니 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15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보세요.

모두가 이 세상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다고 하잖아요.

나그네로 살아가는 삶이란 고통스러워요.

나오느니 한숨이고 뱉어지는게 불평이었어요.

 

그럼에도 단 한 사람도 낙오되지 않고 다 천국으로 간 것은 하나님이 이들을 붙잡고 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지식들이 불평한다고 해서 갖다버리지 않고 거두어 먹이듯이 하나님도 우리가 아무리 욕을 하고 불평해도 버리지 않고 거두어 먹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사람들 중에 단 한 사람도 스스로가 원해서 이런 삶을 살게 된 것이 아니에요.

모두가 하나님이 개입하자 인생이 이렇게 뒤틀려 버린 겁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한 인물들을 소개하면서 항상 믿음으로 누구! 누구!는 이렇게 살았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라는 말은 믿음이 이들을 소고삐처럼 이끌었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이 사람들을 나그네로 몰아 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은 곧 예수 그리스도가 소경을 간섭한 것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으로라는 말을 예수님께서 라는 말로 대체하여도 같은 말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에 선진들은 자기들이 원해서 나그네와 행인 같은 삶을 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들로 하여금 나그네로 살도록 몰아 낸 것입니다.

 

어느 시대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이렇게 다스리세요.

이러한 일들이 성도에게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멀쩡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어서 교회에서 몰아내고 있어요.

소경을 눈뜨게 해서 율법으로부터 몰아냈듯이 지금도 율법신앙으로부터 몰아내고 있어요.

 

소경이 눈을 뜬 것은 율법에서 해방된 겁니다.

이젠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어요.

그런데 현실은 율법이 난무하는 세상 속에 살고 있어요.

율법이 없는 다른 세상으로 옮겨 주는 것이 아니고 그 자리에 두셨어요.

 

이제 율법에서 해방된 자로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너희는 소경이라고 알려 주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율법을 다 완성하였다고 말하라는 겁니다.

그러니 주변으로부터 압력이 들어오는 겁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소경이었던 자의 부모와 소경이 함께 압력을 받았어요.

유대인들이 부모에게 예수가 눈을 뜨게 해 주지 않았다고 말하라고 압력을 넣었어요.

그럼에도 소경이었던 자는 그 압력에 타협치 않고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준 분은 예수님이라고 분명하게 말을 합니다.

 

하지만 소경이었던 사람의 부모는 자신은 모르겠다고 빠져 나갑니다.

여기서 중요한 원리가 하나 나옵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과 만나지 못한 사람의 차별성이 나타납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자식을 소경으로 태어나게 한 부모의 심정은 죽고 싶을 정도로 가슴이 아픈 일입니다.

노심초사 자식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 모든 부모의 심정이잖아요.

그렇다면 소경의 부모 역시도 자식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를 만나기 전까진 백약이 무효이듯이 자식의 눈을 뜨게 해 주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에 의해서 자식의 눈이 떠졌어요.

 

그렇다면 보편적인 부모의 심정으로 이해를 한다면 예수님이 자식의 눈을 뜨게 해 주셨으면 고맙다고 예수를 자랑하고 감사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본문을 보면 오히려 아들이 눈을 뜬 사건을 감추기에 급급함을 보게 됩니다.

 

소경의 부모는 왜? 자식의 눈을 뜨게 하신 분이 예수님이라고 말을 못합니까?

이는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자는 유대교로부터 출교하기로 결의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유대교와 예수님은 원수지간이라는 것이 밝혀지지요.

 

그럼 유대인과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원수로 살고 있는가요?

이는 예수님이 율법 신앙을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유대인에게 출교 당한다는 것은 율법신앙으로부터 쫓겨난다는 말이 되지요.

 

그럼 눈을 뜬 소경은 율법신앙으로부터 출교 당하게 되었지요.

소경으로 있을 땐 율법으로부터 공격을 당하지 않고 잘 살았는데 눈을 뜨고 나서 공격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율법 신앙이 곧 소경이라는 말이 됩니다.

 

아까 소경은 어둠이라고 했지요.

그리고 어둠은 곧 죽음이라고 했지요.

결국 율법 신앙은 죽음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눈을 뜨게 해 주셨어요.

소경은 율법이라는 죽음에서 살아났다는 말입니다.

이제 죄와 사망에서 해방이 되었어요.

죽음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지요.

그래서 눈을 뜬 소경은 유대인의 협박에도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그의 부모는 유대인을 두려워하고 있어요.

유대인을 두려워 한다는 것은 부모와 유대인은 같은 신앙 아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두려운 겁니다.

 

여기서 예수를 직접 만난 사람하고 간접적으로 만난 사람은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소경도 예수를 알고 부모도 예수를 알아요.

하지만 예수 때문에 핍박이 오자 소경은 예수를 인정하는데 비해 부모는 예수를 부정합니다.

예수를 모른다고 부정한다는 말은 예수를 직접적으로 체험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결국 아들의 신앙과 부모의 신앙이 다름을 보게 됩니다.

이건 예수를 만난 사람과 예수를 만나지 못한 사람의 차이에요.

실제와 관념의 차이에요.

지식으로 예수를 아는 사람과 실제로 예수와 터치를 한 사람의 차이입니다.

소경은 예수님을 직접 만났고 예수님이 행한 흔적을 몸에 지니고 있어요.

그러나 부모는 아들에게 말만 듣고 자기 몸엔 예수님이 행한 흔적이 없어요.

 

이걸 지금 우리에게 적용해 봅시다.

예수의 피를 직접 마신 사람과 말만 들은 사람을 달라요.

예수의 피를 직접 마신 사람은 그 어떤 회유와 협박에도 두려워하지 않아요.

피를 마셨다고 하니 좀 그런데!

예수가 믿어지는 것이라고 표현합시다.

 

예수의 피가 나의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해 준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그 어떤 율법의 요구에도 두려워하지 않겠지요.

마귀가 하나님 말씀을 들고 와서 너 왜? 말씀대로 살지 않느냐 라고 닦달을 하여도 꿈쩍하지 않겠지요.

 

자 예수님께서 분명히 십자가에서 율법이라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했어요.

자기 몸으로 확 찢어 버렸단 말입니다.

이건 사실이에요.

실제란 말입니다.

 

그럼 묻습니다.

여러분은 율법에서 해방 되었나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당신에게 요구하는 의문에 쓴 증서가 도말 되었나요?

당신을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이 믿어지세요.

 

이게 사실로 믿어진다면 어떤 자세로 살겠습니까?

소경처럼 분명하게 증거 할 것이지요.

예수의 피가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하였다고 증거할 것 아닙니까?

 

예수의 피를 믿는 것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겠지요.

누가 주일성수하여야 한다고 하고, 교회를 성전이라고 하면서 충성하여야 한다고 하거나, 십일조를 하고, 목사가 제사장이니 그에게 축복을 받아야 한다고 하거나 하면 아니라고 해 주어야 하겠지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성화하여야 한다고 하면 아니라고 해야 하겠지요.

 

이런 말을 하면 한국교회의 신앙정서로 보아서 이단이라고 하겠지요.

이단이라고 하여도 두려워하지 않겠지요.

그래야 예수를 실제로 믿는 성도에요.

신앙이 관념이 아니고 실제가 되는 겁니다.

 

율법에서 해방되지 않은 사람은 주변의 압력에 굴복하고 말아요.

주께서 스치고 간 흔적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주를 인정하지 못하는 겁니다.

부모가 유대인의 압력에 굴복한 것은 본인이 율법 아래 있기 때문이에요.

법은 법에 제제를 받아요.

하지만 은혜는 법에 제재를 받지 않아요.

 

눈을 뜬 소경은 율법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율법에 구속당하지 않는 겁니다.

다른 영역에 속하였음으로 율법에 말을 들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한 것은 관념이 아니고 실제입니다.

소경이 눈을 뜬 것이 실제이듯이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한 것도 실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실제이면 우리의 신앙도 실제여야해요.

실제이기 때문에 십자가 피를 증거하면 핍박을 당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증거하는데 핍박이 없다면 이상한 거예요.

예수님이나 소경이 유대인으로부터 핍박을 당한 것이 실제 이였듯이 지금도 예수님에게 눈을 뜬 사람은 유대인들과 같은 신앙 아래 있는 자들로부터 핍박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은 자기가 흔적을 남긴 사람은 반드시 지켜 주세요.

흔적을 남겼다는 증거로 성령을 보내 주셨어요.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성도는 그 어떤 핍박에도 예수를 부인할 수가 없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우리 능력이 아니고 주님의 능력이에요.

우리가 수많은 아픔 속에서도 예수를 버리지 못하고 이렇게 믿고 있는 것은 예수님이 붙잡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자기 흔적을 새겨 놓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예수를 저주하고 부인하고 도망을 가도 끝까지 찾아가서 결국엔 예수님과 같은 길로 가게 한 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새겨놓은 흔적들이 있기 때문이에요.

 

오늘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을 만났느냐! 못 만났느냐! 에요.

예수님이 나에게 있어 실제냐! 관념이냐! 에요.

소경에겐 예수님은 실제이지만 부모에겐 관념입니다.

 

눈을 뜬 소경은 예수님과 직접적인 관계에 있고 그 부모는 간접적인 관계에 있어요.

눈을 뜬 소경은 예수님에 대한 자기 증거를 가지고 있지만 부모는 아들에게 들은 남의 증거를 가지고 있어요.

 

쉽게 말해서 내가 만난 예수는 없으면서 남이 만난 예수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남이 예수를 백번 만난들 그것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하셨는데 지금은 성도가 산 자이므로 이제는 나의 하나님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남의 하나님이 아니라 내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남의 예수를 믿지 말고 내 예수를 믿으라는 말입니다.

내가 만난 예수는 나에게 능력이 되지만 남이 만난 예수는 전혀 능력이 되지를 않습니다.

 

부모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는 것은 자기가 만난 예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만약 소경이었다가 예수를 통해서 눈을 떴다면 내 눈을 뜨게 해 주신 분은 예수님이라고 담대히 말 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소경의 부모에 무기력한 모습은 오늘날 성도들의 모습과 같습니다.

이 시대 성도들은 남들에게 들은 예수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만난 예수는 없어요.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능력이 되지 않는 겁니다.

그 피가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신다는 것이 힘을 쓰지 못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함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자기 행함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겁니다.

 

바울은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에 모이는 것들도 예수 안에서는 다 완성되었다고 했어요.

그렇다면 예수를 만나 빛의 아들들이 된 자들은 어두움의 법인 의문에 쓴 증서의 요구에 따를 필요가 없습니다.

마치 눈을 뜬 소경이 유대인들의 율법에 지적을 묵살한 것 같이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눈을 뜬 소경이 안식일을 안 지켰다고 신자가 아니라고 하여도 개의치 않았어요.

너희들이 나를 신자가 아니라고 하여도 신경 쓰지 않았어요.

그들의 평가를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시고 눈을 뜨게 해 주셨는데 무슨 상관이냐 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알고 내가 예수님을 알면 되지 너희들이 무슨 소용이냐 라는 말입니다.

내가 분명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데 왜? 사람들의 증거에 신경을 쓰느냐!

내가 무엇 때문에 너희들을 무서워해야 하느냐! 라고 하고 있어요.

 

이 시대에 적용하면 아무리 목사가 율법대로 살아야 한다고 강요 할지라도 그것이 예수와 상관이 없는 일이라면 듣고 따라야 할 이유가 없어요.

안다는 것은 아는 것이 실제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것이 관념이 안고 실제로 믿으시며 살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신앙이 관념이 아니고 실제이기를 소망합니다. 믿음이 삶으로 풀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고 살아난 나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니므이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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