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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레위기 강해

20장. 문둥병 정결 의식 속에 담긴 복음 (레 14:1-20)

by coroa 2021. 7. 3.

 

 

[20장. 문둥병 정결 의식 속에 담긴 복음 (레 14:1-20)]

-.정낙원 목사

 

모든 성경은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일을 하십니다.

문둥병과 정결함을 입는 것도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의 죄사함을 주는 구속사 이야기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죄는 모든 삶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모든 삶을 통해서 죄에 대하여 말해주고 있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에서부터 살아가는 모습에서까지 ‘죄는 이런 것이다’ 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문둥병을 통해서도 죄가 어떤 것인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레위기에서 말하는 문둥병은 지금 이 시대 문둥병과는 다릅니다.

일종의 곰팡이 균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몸에서도 발생을 하고 의복이나 가죽제품이나 집에서도 발생을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옷이나 가죽제품이나 집에는 청결하지 않고 습하면 곰팡이 균들이 발생을 합니다.

이를 레위기에서는 문둥병이라고 합니다.

 

왜 곰팡이 균을 문둥병이라고 할까요?

이는 곰팡이 균과 문둥병의 특징이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곰팡이 균을 가지고 문둥병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곰팡이 균이 옷이나 가죽제품이나 집안에 발생하면 주변을 썩게 하고 악취를 풍기게 됩니다.

이러한 것이 사람의 몸에는 악성 피부병으로 나타납니다.

문둥병은 악성 피부병의 일종입니다.

 

피부에 발생하는 악성 피부병이나, 의복이나 가죽 제품에 발생하는 곰팡이 균이나, 습기가 찬 집에서 발생하는 곰팡이나, 모두가 주변을 썩게 하고 악취를 풍기는 것에는 동일합니다.

그래서 문둥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죄 역시 부패케 하기 때문에 영적으로는 문둥병과 죄는 동일한 것입니다.

 

문둥병을 경계시키는 것은 그 증상이 죄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둥병에 걸리면 의원에게 진단을 받지 않고 성막에서 각종 제사를 담당하는 제사장을 찾아가서 진단을 받도록 하신 것입니다.

제사장은 죄 문제를 다루는 분입니다.

 

제사장은 백성들의 죄를 없애는 제의식을 행하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제사장은 문둥병 증상이 보이면 격리를 시켜서 2주간 지켜보다가 문둥병이라고 확진이 되면 이스라엘 진 밖으로 내 보내서 살아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문둥병은 치료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낫게 해 줄 때만 나음을 입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저주를 받은 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주를 하셨으면 하나님만이 그 저주를 풀어 주실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문둥병자는 이스라엘의 진 바깥에서 하나님의 은혜만을 바라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문둥병이 치료법이 없는 것은 죄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죄는 치료법이 없습니다.

인간 쪽에서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해결해 주실 수가 있습니다.

죄에서 벗어나려면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문둥병이 고침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 하시려고 문둥병에서 고침을 받은 자에게 하나님이 정한 규례에 따라서 정결 의식을 치르고 또한 하나님 앞에 나와서 제사를 지내라고 하신 것입니다.

정결의식을 통해서 문둥병이 어떻게 치료를 받게 되었는지를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정결 의식 속에 어떻게 문둥병에서 나음을 입었는지 그 힌트가 담겨져 있습니다.

문둥병은 치료법은 없지만 역설적으로 치료 받은 자가 행하는 정결 의식 속에 문둥병 치료법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정결의식을 행함으로 “아! 내가 이렇게 나음을 입게 되었구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이렇게 하면 고침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렇게 고쳐 주셨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정결의식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문둥병자가 진 밖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병이 나음을 입었으면 제사장에게 고합니다.

그럼 제사장은 문둥병이 나음을 입었다는 것이 확진이 되면 제사장은 그 사람에게 정한 산 새 두 마리와 백향목 나무 가지와 홍색실과 우슬초 한 묶음을 가지고 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두 마리의 새 중에서 한 마리는 죽여서 그 피를 생수가 담긴 질그릇에 담게 합니다.

그럼 질그릇 속에는 생수와 죽임당한 새의 피가 섞이게 됩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물과 피를 쏟은 것과 같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질그릇은 죄인을 상징합니다.

그럼 질그릇 속에 담긴 생수와 피는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쏟은 물과 피와 같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땅에다 물과 피를 쏟은 것은 자기 백성들에게 쏟은 것입니다.

영적인 의미로 보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제사장은 생수와 섞인 피를 백향목 나무 가지와 홍색실과 우슬초와 살아 있는 한 마리의 새를 함께 질그릇 속에 있는 생수와 피에 푹 담가서 병에서 나음을 입은 자에게 “당신은 이제 문둥병으로부터 나음을 입고 정하게 되었습니다” 라고 외치면서 일곱 번을 뿌립니다.

 

그리고 산 새는 들에 풀어주어서 날아가게 합니다.

살아서 날아가는 새는 죽은 새의 피를 온 몸에 짊어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죽은 새의 피를 온 몸에 바르고 날아가는 새는 죽음에서 부활한 것을 상징합니다.

 

이렇게 되면 피 뿌림을 입은 광야로 날아간 새와 문둥병에서 나음을 입은 자는 죽은 새의 피 뿌림을 입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정결한 새의 죽음으로 살고 있음이 됩니다.

 

정한 새란? 순수한, 정결한, 깨끗한, 흠 없는 새라는 뜻입니다.

의역하면 죄가 없는 새를 말합니다.

흠 없는 새는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그리스도가 문둥병자와 같은 죄인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피 흘리심으로 문둥병자와 같은 죄인들이 용서를 입게 되었습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두 마리 새는 두 예수를 상징합니다.

죽은 새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상징하고,

살아서 날아간 새는 죽음에서 부활 하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통해서 죄사함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죽음에서 부활 하신 예수님이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심으로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예수그리스도의 피를 온 몸에 바르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있기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 53:4-6절.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요,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이사야는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셨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문둥병자의 정결의식으로 해석하면,

예수님이 죄를 상징하는 우리의 문둥병을 대신 짊어지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사장에게 문둥병에서 나음을 입은 자에게 정결예식을 행하면서 이 사실을 알려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신약적인 의미에서 보면 그렇다는 뜻입니다.

 

제사장은 문둥병에서 나음을 입고 정결함을 입은 사람에게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물로 몸을 깨끗하게 씻고 난 후에 이스라엘 진에 들어오게 합니다.

온 몸에 털을 미는 것은 온 몸을 정결케 하는 것이면서 인간의 모든 의를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진 안으로 들어 왔지만 집에서 살 수는 없습니다.

집에서 살 수 있는 정결 의식을 치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7일 동안 장막 바깥에서 격리하여서 살도록 합니다.

 

7일 동안 그 누구도 만날 수 없고 그 어떤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비록 나음을 입어서 이스라엘 진 안으로 들어오기는 하였지만 거룩한 백성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것은 일곱째 날이 지난 후 여덟째 날이 되어야 합니다.

 

장막 바깥에서 7일이 지나면 다시 몸에 털은 다 밀어야 합니다.

머리카락에서부터 눈썹과 수염을 깎고 목욕을 하고 옷을 빨아서 입어야 합니다.

그리고 8일째 되는 날에 흠 없는 숫양 두 마리와 흠 없는 일 년 된 어린 암양 한 마리와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의 제물인 기름 섞은 고운 밀가루 10/3 에바와 기름 한 록을 가지고 제사장을 찾아갑니다.

 

8일은 7을 지난 새로운 날을 의미합니다.

이 날은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 하신 날입니다.

예수님은 안식 후 첫 날에 부활 하셨습니다.

 

안식은 7에 속한 날입니다.

7일은 창조 7일의 수로서 이는 역사에 속한 날을 상징합니다.

안식 후 첫 날은 창조 바깥의 날입니다.

그러니까 8일은 역사 바깥 새로운 세상의 날이라는 뜻입니다.

 

문둥병에서 나음을 입은 사람은 8일이 지나면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8일째에 죄사함을 입은 자로서 제사장에게 나아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문둥병자가 나음을 입은 것은 흠 없는 새의 죽음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8일째가 되면 흠 없는 희생 제물로서 제사를 지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정결한 새의 죽음으로 문둥병이 나았음을 기념케 하는 제사입니다.

 

8일째 제사장은 숫양 한 마리를 기름 한 록과 함께 속건 제물로 요제로 드리게 됩니다.

속건 제물로 드리는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에게 범죄를 저질렀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문둥병에 걸려서 거룩한 공동체에게 해를 입혔기 때문입니다.

이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의미에서 드리는 제사인 것입니다.

 

모든 제사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속건 제사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동시적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속죄제는 하나님께 드리는 속죄의 제사이지만,

속건제는 하나님께도 드리고 이웃에게도 용서를 구하는 제사입니다.

 

요제란? 흔들어서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살아났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부활을 상징합니다.

이제는 죄와 사망에서 벗어난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당신은 이제 죽음에서 살아났습니다!”

“죄에서 용서 받았습니다!”

“이제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라는 뜻입니다.

 

제사장은 나머지 숫양 한 마리를 잡아서 피를 받습니다.

고기는 제사장 몫으로 주고 피는 문둥병에서 나음을 입은 사람의 오른쪽 귓불과 오른 손 엄지가락과 오른 발 엄지가락에 바릅니다.

 

오른 쪽은 옳음을 뜻합니다.

이는 의를 상징합니다.

피를 오른 쪽에 바른 것은 흠 없는 제물의 희생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흠 없는 제물로 주어진 의를 몸에 새기고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귀는 말씀을 듣는 곳이고,

발은 움직이고 손은 일하는 곳입니다.

이는 자신의 모든 삶은 희생 제물을 대신 하는 삶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제사장은 기름을 가지고 문둥병에서 나음을 입은 사람의 오른쪽 귓불과 오른 손 엄지가락과 오른 발 엄지가락에 바릅니다.

또한 머리에도 바르게 됩니다.

 

피 위에 기름을 바른 것입니다.

피가 먼저이고 기름이 나중입니다.

피는 죄사함을 주는 것이고 기름은 죄사함 받은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름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온 몸에 성령의 기름 부음을 입은 것을 상징합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입은 것입니다.

이제는 성령으로 거듭나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입은 것은 거룩함을 입었다는 뜻입니다.

당신은 이제 거룩한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문둥병에서 나음을 입었지만 거룩케 하지 않으면 또 다시 발생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죄를 멀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피와 기름으로 바름을 입고 난 후에 어린 양으로 속죄제로 번제를 드리게 됩니다.

피 뿌림과 기름 부음으로 거룩함을 입은 자는 어린 양을 잡아서 제사장에게 드립니다.

그럼 제사장은 번제물과 곡식 제물을 함께 속죄 제사를 번제단에서 지내게 됩니다.

 

이 모든 일을 마치고 제사장은 최종적으로 당신은 이제 정결한 사람이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이렇게 하여서 모든 정결 의식을 마칩니다.

정결 의식을 마친 사람은 거룩한 자가 되어서 이스라엘의 공동체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문둥병에서 나음을 입은 자의 정결의식이 제사장 위임식과 같다는 것입니다.

 

문둥병에서 나음을 입은 자에게 행하는 오른쪽 귓불과 오른 손 엄지가락과 오른 발 엄지가락에 피를 바르는 정결 의식은 제사장 위임식에서 행하는 의식입니다.

 

왜 문둥병에서 나음을 입은 자에게 제사장 위임식과 같은 의식을 행할까요?

이는 이스라엘의 진정한 제사장은 죄사함을 받은 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그 몸에 어린 양의 죽음의 흔적은 지닌 자라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린 양의 피로 죄사함을 입은 자라야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문둥병으로 이스라엘의 진 밖으로 쫓겨낫다가 흠 없는 제물의 희생으로 거룩함을 입고 돌아온 자가 진정한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문둥병자의 정결 의식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거룩한 자이냐?

흠 없는 제물의 희생으로 살고 있음을 아는 자라고 합니다.

 

누가 이스라엘이냐?

자기 몸에 흠 없는 제물의 흔적을 지닌 자가 진정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누가 제사장이냐?

흠 없는 제물의 피를 온 몸에 뿌림을 입은 자와 거룩한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하나님 앞에 예배 할 수 있는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일컬어 제사장 나라 라고 합니다.

이는 모든 백성이 제사장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백성이 흠 없는 제물의 피 뿌림을 입고 죄사함을 받아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문둥병자와 같은 죄인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 진 밖으로 쫓겨나서 살던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흠 없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죄사함을 입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거룩한 공동체인 교회로 부르심을 입게 된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입은 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교회는 모두가 용서 받은 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는 문둥병에서 나음을 입은 자가 온 몸의 모든 털을 밀어버린 것처럼 인간의 자랑거리와 의는 다 버리고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의만 자랑되어져야 합니다.

 

인간의 의는 문둥병과 같습니다.

거룩한 공동체를 부패케 합니다.

인간의 의는 문둥병처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타락케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인간의 의가 자리 잡지 못하도록 경계하고 싸워야 합니다.

 

이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 인간의 의가 자리 잡지 못하게 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문둥병에서 치료를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다시는 문둥병이 우리 몸에 발병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청결해야 합니다.

 

문둥병은 더러운 곳에서 발생을 합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에 더러운 것들이 기생하지 못하게 하여야 합니다.

인간의 의가 자리 잡지 못하게 하여야 하고,

세상의 가치관이 자리 잡지 못하게 하여야 합니다.

 

출애굽 한 백성들에게 더러움이란?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애굽은 죄와 사망의 나라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애굽적인 삶은 모두가 죄가 되는 것입니다.

 

죄는 애굽의 가치로 살아가려는 것입니다.

애굽적 삶은 문둥병처럼 더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애굽적인 삶을 땅의 일이라고 하면서 땅의 지체를 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는 십자가의 원수라고 하였습니다.

 

빌 3:18-21절.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땅의 일이란? 육신의 소욕입니다.

육신의 소욕을 방치 하면 문둥병처럼 우리 온 몸을 병들게 합니다.

육신의 소욕이 주장하면 성도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맙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욕되게 합니다.

 

성도는 하늘에 시민권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가치로 살아야 합니다.

땅은 떡의 가치로 살아가지만 하늘은 하나님 말씀의 가치로 살아가는 곳입니다.

 

이는 우리 몸을 위하여 살지 말고 하나님의 언약을 위하여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구하지 말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는 이방인이 구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라고 합니다.

 

우린 모두가 문둥병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의하여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일을 버리고 하늘의 것을 쫓아가야 합니다.

 

구원을 받은 성도는 살아가는 목적이 다릅니다.

존재하는 목적이 다릅니다.

땅에 사람은 자기를 위하여 살아가지만 하늘에 사람은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문둥병자들을 고쳐 주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유대인 중에서도 고쳐주셨고 이방인 중에서도 고쳐주셨습니다.

이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유대인 문둥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마 8:1-4절.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2.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유대인 문둥병자를 고쳐주십니다.

 

마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은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4장에서는 광야에서 40일을 주리신 후에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그런 후에 산에 올라 가셔서 제자들에게 5,6,7장의 산상보훈을 말씀 하십니다.

8장에 산상보훈을 마치시고 산에서 내려 오셔서 처음 하신 일이 유대인 문둥병자를 고치는 일을 하셨습니다.

 

산 위는 거룩의 세계이고, 산 아래는 비거룩의 세계입니다.

산 위는 정결한 자들이 살아가는 곳이고, 산 아래는 부정한 자들이 살아가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산 아래 내려오심은 거룩이 부정을 침노해 오신 것입니다.

부정을 거룩케 하고자 함입니다.

그것이 산 아래 문둥병자를 고치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산 아래 있는 문둥병은 구약의 유대인들을 상징합니다.

이는 구약의 유대인들이 문둥병자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리라고 합니다.

이것은 구약적인 정결 방법입니다.

 

이 후에 예수님은 이방인 문둥병을 고치는 일을 하십니다.

 

눅 17:11-19절.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에 있는 한 촌에 들어가십니다.

그곳에 문둥병자 열 명이 있는 것입니다.

문둥병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긍휼히 여겨 달라고 소리칩니다.

 

이에 예수님이 가서 제사장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합니다.

문둥병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가다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 명이 예수님에게 찾아옵니다.

 

예수님께서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입었지 않느냐,

그런데 왜 너 혼자 왔느냐,

아홉은 어디에 갔느냐고 묻습니다.

 

아홉은 옛 언약의 육적 제사장을 찾아 간 것입니다.

그러나 한 문둥이는 예수님이 새 언약의 참 제사장임을 알고 육적 제사장을 찾아가지 않고 예수님을 찾아 온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합니다.

 

문둥병이 고침 받은 것을 구원 받았음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구원이란? 죄사함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참 제사장이 되어서 문둥병에서 나음을 입은 것이라고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문둥이를 이방인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방인들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사함을 받게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예수님이 참 제사장임을 알고 나아옵니다.

 

이방인은 새 언약의 백성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은 예수그리스도에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참 제사장임을 아는 자가 참 이스라엘입니다.

 

이것은 이미 구약에서 계시 되어온 것입니다.

엘리사 시대에 이방인인 나아만이 요단강에서 문둥병을 고침 받았습니다.

이것은 신약에 이방인들이 죄사함 받을 것을 예표하고 있는 사건입니다.

 

왕하 5:14-17절.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 15. 나아만이 모든 종자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 앞에 서서 가로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청컨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16. 가로되 나의 섬기는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받지 아니하리라 나아만이 받으라 강권하되 저가 고사한지라 17. 나아만이 가로되 그러면 청컨대 노새 두 바리에 실을 흙을 당신의 종에게 주소서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든지 다른 제든지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

 

두 선지자가 있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있습니다.

엘리야는 승천 하신 예수님을 예표 합니다.

 

엘리사는 엘리야로부터 갑절의 영감을 받습니다.

이는 성령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예표 합니다.

성령 강림 후에 이방인에게 구원이 주어졌습니다.

이것은 엘리야로부터 갑절의 영감을 받은 엘리사가 이방인인 나아만에게 요단강에서 문둥병을 고치는 것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 가려면 두 강을 건너야 합니다.

강을 건넌다는 것은 단절을 의미합니다.

기존의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왔음을 뜻합니다.

 

두 강은 두 세례를 상징합니다.

 

애굽에서 나올 때는 홍해를 건넙니다.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갈 때는 요단강을 건넙니다.

 

홍해는 물세례를 상징하고,

요단강은 성령 세례를 상징합니다.

 

물세례는 옛 사람을 죽이는 세례이고,

성령 세례는 새 사람으로 살리는 세례입니다.

 

물 세례는 죄사함을 주는 세례이고,

성령 세례는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는 세례입니다.

 

문둥병자가 행하는 두 가지 정결 예식은 두 가지 세례와도 같습니다.

 

일곱째 날에 정결한 새의 죽음으로 병에서 나음을 입는 것이고,

여덟째 날에 제물의 피와 기름부음으로 거룩함을 입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문둥병이 정결한 새의 죽음으로 나음을 입었습니다.

정결한 새의 죽음으로 병에서 나음을 입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죄사함을 얻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속건제물의 피와 거룩한 기름으로 온 몸에 바름으로서 새로운 사람이 되어서 살아가는 것은 성령의 거듭나서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는 것과도 같습니다.

 

새로운 사람은 새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삶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도다운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성도다운 삶을 살아가게 하십니다.

 

고후 5: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4:10-11절.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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