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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말씀/요한복음

37강. 오병이어 (요 6:1-15)

by coroa 2021. 3. 8.

 

마가 13 5~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37강. 오병이어 (요 6:1-15).-

-.정낙원 목사

 

 

 

며칠 전 김수환 추기경 장례 미사 때 고별사를 하는 어떤 주교가 한 말이 생각납니다.

그 분의 이름을 몰라서 밝힌 순 없지만 온 세계가 주목하는 가운데서 고별사를 한다는 것은 대단한 위치에 있는 분인 것만큼은 분명할 것이라 사료 됩니다.

그 분이 오병이어 기적을 말하는데 어찌나 황당한지,,,

물론 제 입장에서 그렇단 말이지 그분들은 지극히 상식적인 말입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오병이어 기적은 예수님께서 일으킨 것이 아니고 한 어린아이로부터 시작이 되었다는 겁니다.

거기에 참석한 모든 군중들이 도시락을 싸 가지고 왔는데 혼자 먹으려고 숨겨 두었다가 어린아이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 도시락을 내어 놓으니 어른들이 미안하여서 숨겨 두었던 도시락들을 전부 내어 놓고 보니 오천 명이나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가 김수환 추기경이 사랑을 실천해 보인 것을 본받아서 어린아이같이 내가 먼저 사랑을 행한다면 온 이웃과 나라가 사랑이 넘칠 것이라는 의미에 말이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어린아이처럼 솔선수범하였으니 이제부턴 우리가 그 분의 유지를 받들어 이웃 사랑을 실천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교에게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오병이어의 표적은 이웃사랑의 한 표본인 셈입니다.

그 주교의 말은 김수환 추기경은 예수님의 본을 따라 산 위대한 스승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김수환 추기경을 본받자는 겁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김 추기경이 각막을 기증하였다고 하니 너도 나도 각막을 기증하겠다는 사람이 줄을 선다고 합니다.

 

카톨릭에서는 인본주의로 성경을 보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카톨릭은 인간 존엄사상이라는 교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든 성경을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쪽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어떻게 보느냐는 그 사람의 사관으로 결정이 되어요.

 

이러한 예가 성경에 이미 나와 있습니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나아와서 선생님이여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율법이 뭐라고 하며,

너는 그 율법을 어떻게 읽느냐? 라고 되 물으셨습니다.



이에 그 율법사는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럼 그렇게 행하라고 합니다.

 

눅 10: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예수님께서 어떻게 읽느냐? 라고 물으신 것은 넌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라는 말입니다.

네가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것으로 읽었으면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사는 자기가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본 것입니다.



본인이 율법을 지켜야 하겠다고 하는데서야 예수님도 말릴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네가 성경을 이해한 대로 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율법사가 그럼 이웃이 누구인지 알려 달라고 합니다.



이웃을 알려주면 사랑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사가 율법을 읽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과 다른지를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봐라!

내가 비유로 말할 테니 잘 들어라.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거반 죽에 되었단다.

때마침 제사장이 성전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려고 올라 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거반 죽어가는 그 사람을 보았단다.

 

제사장의 마음엔 그 사람을 도와주고 싶은데 율법에 보면 하나님 앞에 예배 하러 가는 사람은 부정한 것을 만지면 안 되기 때문에 혹시 이 사람이 죽게 되면 송장을 만지는 것이 되어 부정을 타게 될 것 같아서 그냥 못 본척하고 지나쳐 같다.

그 다음에 성전에 예배하러 가던 레위인도 그 죽어가는 사람을 보았는데 제사장처럼 율법이 생각나서 그냥 지나갔단다.

 

제사장이나 레위 인이나 율법으로 보면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율법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 인이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그 사람을 발견하고 주변에 있는 주막에 데리고 가서 의원을 불러서 치료해 주고 그 치료비도 자기가 다 담당해 주었단다.

 

그럼 네가 생각하기에 누가 이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겠느냐?

그야 당연히 강도만나서 죽어가는 사람을 치료해준 사마리아 인이지요.

그래?

그럼 너도 그렇게 행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율법사가 강도 만난 사람의 진정한 이웃은 사마리아 인이라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유대인들이 터부시 하는 사마리아 인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보면 상종해서는 안 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으로 비유한 것은 당시 유대인에게 있어서 사마리아 인은 개 같이 더러운 이방인이었습니다.

오죽 했으면 사마리아 지역으로 통행하지도 않았겠습니까?

이런 개 같은 이방인을 성전에서 수종 드는 율법사나 레위인이 상종할 수가 없어요.

 

이스라엘과 사마리아은 원수지간입니다.

사마리아 인은 유대인을 원수처럼 대하지 않는데 유대인은 율법 때문에 이웃처럼 대할 수가 없어요.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 때문에 율법이 요구하는 이웃 사랑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율법 때문에 율법이 담고 있는 정신을 행할 수가 없는 이상한 모습이 되고 만 것입니다.

아는 것하고 행하는 것하고는 다릅니다.

율법의 조문을 지키는 것하고 율법의 내용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은 다릅니다.

조문을 지키는 것은 껍데기이고 내용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은 알맹이입니다.

유대인들은 조문 지킴은 있는데 삶이 없는 것입니다.

이걸 외식이라고 합니다.



율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명령이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죄인은 율법을 지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죄가 뭡니까?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이지요.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기 때문에 죄인인 것입니다.



그럼 인간은 율법대로 살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으니 죄인이지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인간의 한계를 지적하기 위해서 유대인들이 원수처럼 여기는 사마리아인을 들고 이웃 사랑의 비유를 한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은 이웃 사랑을 할 수 없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웃 사랑도 할 수 없는 자들이 이웃 사랑을 하겠다고 하는 것은 악입니다.

 

성경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어요.

그냥 사랑이 아니고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겁니다.

우리가 지나가다가 걸인에게 한푼 적선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에요.

내 목숨을 버리고 남에 목숨을 살려내는 사랑이에요.

이건 불가능한 요구입니다.



육신은 무얼 해도 자기 사랑 밖에 안 돼요.

인간의 본능은 타인을 사랑할 수가 없어요.

타인을 사랑한다고 하여도 그 타인 속에 자기 사랑이 담겨져 있어요.

 

무슨 말인가 하면,

내가 남을 사랑함으로서 난 이웃을 사랑했다는 기쁨 곧 자기 사랑이 담겨져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누가 착한 일을 하고 나면 보람을 느끼고 마음이 뿌듯하다고 하지요.

그 마음이 뿌듯함이 바로 자기 사랑입니다.

남에서 봉사하고 헌신함으로서 얻어지는 그 기쁨이 바로 자기 사랑인 것입니다.

 

남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이 아~ 보람 있다!

그러지 않아요.

남에게 도움을 준 사람이 아~ 보람 있네! 라고 하지요.

그러니 죄인은 조건 없는 사랑을 할 수가 없어요.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치료해 준 것은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한 사랑입니다.

사마리아 인은 율법을 몰라요.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도 없어요.

그런데 사랑했어요.

 

이는 본능적으로 사랑한 것입니다.

그 속에는 법이 없고 사랑만 있어요.

사마리아인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따지지 않아요.

그냥 불쌍한 사람을 보면 지나치지 못하고 자기 돈 써가면서 도와주어야 해요.

성경은 이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 인간에게 있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율법 조문을 이것저것 따지고 사랑하려고 하지만 사마리아인은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랑했어요.

생명을 사랑하는 사랑은 불쌍한 사람을 보면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도와주어요.



법은 법에 합당한 사람만 사랑해요.

법은 사랑하는 사람이 정해져 있어요.

그러므로 법 아래 있는 인간들은 온전한 사랑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명령대로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한 사람은 사마리아인뿐입니다.

 

이렇게 되면 율법대로 이웃사랑을 하여야 하겠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율법 조문 때문에 사랑할 수 없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바로 강도 만나 거반 죽어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도 만나서 죽어가는 사람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살려주신 사마리아 인은 바로 예수님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법적 조건을 따지지 않고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따지지 않습니다.

예수님만이 강도 만나 죽어가는 자를 자기 돈으로 치료해서 살려 내십니다.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은 것은 예수님의 일방적인 사랑이 덮쳐와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마귀라는 강도를 만나서 죽어가는 자들입니다.

아니 이미 죽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기 핏값으로 우리를 살려낸 것입니다.

우리가 살려 달라고 한 적이 없어요.

우리는 강도만난 사람처럼 들에 버려져 까마귀밥이 되어야 할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찾아 와서 살려 주셨어요.

 

제가 사마리아인 비유를 한 것은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김수환 추기경처럼 이웃을 사랑합시다!

말이야 참 좋지요.



그렇게 살려고 노력을 하십시요.

그러나 그걸 신앙의 본질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신앙의 본질은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주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사랑하여야 한다는 것하고 사랑하는 것은 다릅니다.

아는 것과 사는 것은 달라요.

아는 것은 누구나가 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사는 것은 그것을 살아낼 수 있는 사람만이 해 낼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인간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은 하나님 뜻대로 살아내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이란? 거창한 구호를 외치고 캠페인을 벌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이란? 자기 주제를 알고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는 것입니다. 

소경거지 바디메오처럼 '나사렛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라고 소리치는 것입니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할 수 없다고 탄식하는 사도 바울처럼 '주여! 나는 곤고한 사람입니다' 라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지 못한 것을 예수님께서 대신 다 이루어 주셨다는 것을 믿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이 이러할 진데도 카톨릭에서는 인간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성경에 대하여 소경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보면 김수환 추기경을 추앙하고 본받자고 떠들썩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기망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인류애로 보면 존경할 만 하지요.

그러나 성경적 신앙으로는 아니에요.



오병이어를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식으로 강론하는 것은 인간은 이웃을 사랑할만한 인간이 못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모르기 때문에 이웃사랑을 실천하자고 하는 겁니다. 

자신이 이웃을 사랑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소경거지 바디매오처럼 나사렛 예수를 본받을 분으로 여기지 않고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그러니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소서! 라고 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신앙이 나타나게 됩니다.

선악의 법으로 보면 모든 말씀을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생

명의 법으로 보면 모든 말씀을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생명의 눈으로 보면 모든 성경이 예수님으로 보이고, 선악의 눈으로 보면 인간이 보입니다.

예수님이 보이면 생명에 속한 사람이고, 인간이 보이면 선악에 속한 사람입니다.

생명에 속한 사람의 눈에는 예수님이 다 하셨다는 것이 보이고, 선악에 속한 사람의 눈에는 인간이 해야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선악의 눈으로 보면 천주교에서처럼 신앙이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것으로 치닫게 됩니다.

천주교에서는 선악의 눈으로 성경을 보기 때문에 예수님은 본받을 분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본받을 분으로 보이면 오병이어도 이웃사랑의 실천으로 보여지게 됩니다.

 

이러한 해석은 카탈릭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 신학을 하는 사람들 쪽에서도 합니다.

바클레이라는 신학자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주교처럼 주석해 놓았습니다.



이들은 성경의 기적들을 하나의 신화로 봅니다.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었던 것도 실제로는 바닷가에 거닐었는데 석양에 비쳐서 멀리서 보면 마치 바다 위를 걷는 것 같은 착시 현상을 일으킨 것이라고 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 바다를 건넌 것도 실제는 갈대밭을 건넌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모두가 인간의 이성으로 성경을 보기 때문입니다.

이성적으로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기 때문에 합리적인 해석을 내어 놓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은 합리적인 것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어떤 것을 보아도 자기 생각에 맞아 떨어질 때 비로서 믿는다고 합니다.

 

알다시피 성경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기록이 되었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이 되었다는 것은 인간의 이성적 해석을 차단하겠다는 의지입니다.

성경은 성령님만이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인간의 이야기를 하고자 성경을 기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이야기를 하고자 성경을 기록하셨습니다. 

성령님께서 피조물에게 창조주가 하신 일을 말하고자 성경을 인간의 언어를 빌려서 기록한 것일 뿐입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하시는 말을 계시라고 합니다.

계시(啓示)란? 열어서 보여 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열어서 보여 준다는 말은 인간 쪽에선 알 재주가 없다는 말입니다.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열어서 보여 주어야만 볼 수가 있습니다.



다른 말로 성령님께서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셔야만 깨달아 진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성령님의 감동으로 기록을 할 때부터 이미 성경을 깨닫는 자들이 제한 적으로 정해 져 있다는 뜻입니다.



모든 인간들이 다 알도록 할 것 같으면 굳이 성령에 감동으로 기록할 이유가 없어요.

그냥 인간들이 다 알아먹도록 하면 되지!

뭘 복잡하게 성령을 보내서 눈을 열어서 보여주는 식으로 할 필요가 없습니다.

뭐 대단 한 것이라고 감추고 자시고 할 필요가 있겠느냐 이 말입니다.

 

하지만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하였다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만이 알아먹게 되는 비밀일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알아먹을 사람과 알아먹지 못할 사람으로 구분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령을 받을 사람과 받지 못할 사람으로 나누어진다는 뜻도 포함이 되어 있는 겁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천국에 비밀을 말씀하시면서 “너희”와 “저희”로 구분을 하십니다.

천국에 비밀은 너희에게는 허락이 되었지만 저희에게는 허락되지 않고 감추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너희 눈은 봄으로서 복이 있고 너희 귀는 들음으로서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너희란? 예수님이 12제자처럼 선택된 자들을 말하고, 저희란? 선택받지 못한 자를 말합니다.

 

천국의 비밀이란 곧 예수님 자신을 말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라고 했어요.

이는 예수님은 자기백성을 책임져 주실 메시야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을 너희에 속한 자들은 알아먹지만 저희에 속한 자들을 알아먹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 눈에는 예수님이 천국의 주인인 하나님으로 보이지만,

어떤 사람의 눈에는 그냥 평범한 한 인간이며 조금 인정이 많고 자상하고 지혜로운 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야로 보이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다 구원이야기로 듣지만,

평범한 인간으로 보면 예수님 말씀을 인간들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교훈이나 삶에 지침서로 듣게 됩니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보는 사람은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을 죄인을 구원하는 계시(啓示)사적인 사건으로 보지만, 평범한 인간으로 보면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로 이해해 버립니다.

 

그렇다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어린아이의 작은 사랑의 실천으로 해석을 한다는 것은 성령을 받지 못한 저희에 속한 자들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예수님께 속한 자들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하나의 교훈으로 보고 인간들이 본받아야 할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신화화 하여서 해석하는 자들은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 있는 적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임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들의 말에 동의가 된다는 것도 저희와 한 부류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가르침을 진리라고 따르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김 추기경은 참으로 고결한 삶을 살았어요. 

그러나 그게 진리가 아닙니다.

그 분의 삶을 폄훼하려는 것이 아니고 그 분의 가르침이 하나님 뜻이 아니란 말입니다.

 

진리는 좋은 게 좋은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빛과 어둠은 본질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하나 될 수가 없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밀어내게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한 인간으로서 본받아야 할 스승으로 보는 집단과,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피흘려 죽어주신 주와 그리스도라고 믿는 성도들과 하나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스승(先生)과 주(主)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릅니다.

스승(先生)은 본받아야 할 분이지만, 주(主)는 믿어야 할 분입니다.

스승은 인간들이 노력하면 얼마든지 그 분의 삶을 본받을 수가 있지만,

주는 인간들이 아무리 노력하여도 본받을 수가 없는 존재 자체가 다른 분입니다.

스승은 인간이지만, 주는 하나님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자처하는 교회가 예수님을 믿어야 할 주와 그리스도로 보지 않고 본받아야 할 한 스승으로 보는 집단과 동조 한다는 것은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는 뜻입니다.

같은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말이 통하고 뜻이 통하고 어울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 속하였습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이단이라고 정죄하여서 죽였다면 예수님에게 속한 자들도 세상으로부터 이단이라고 정죄당하여 죽임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에게 속한 교회라고 한다면 예수님처럼 세상을 악하다고 하다가 세상으로부터 이단이라고 정죄당하고 죽임 당할 것을 각오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세상과 하나 되어 희희낙락한다고 하면 그 본질이 땅에 속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안목으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이름으로 세상을 너희와 저희로 갈라 놓으셨는데,

교회라는 이름을 가진 집단이 예수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하나로 만들고자 한다면 이는 예수님을 정면으로 욕보이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과 다름으로 있어야 진정한 교회입니다.

진정한 교회는 예수님과 동일한 운명 속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 많은 인본주의 교회들은 세상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예수를 죽인 세상과 짝하여 도리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성도들을 이단이라고 죽이고 있습니다.



그것도 예수님의 교회라는 이름을 버젓이 걸어 놓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동족으로부터 죽임 당하였듯이 지금도 예수그리스도의 피로서만 의롭게 된다고 외치는 성도들이 자칭 예수님의 교회라고 이름하는 집단으로부터 죽임 당하는 그런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교회 안에서 반복하여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자들이 유대인이었듯이, 지금도 성도를 죽이는 자들이 교회입니다.

12제자들이나 바울이나 스데반이나 초대교회 성도들이 당한 사건이 남의 일이 아니고 곧 우리의 일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의 배후에 악(惡)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마치 예수님과 한 몸인 샴쌍둥이처럼 예수님과 같은 운명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 편에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세상으로부터 미움당하고 죽임 당함으로서 세상이 악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예수님 때문에 미움 받지 않으면 신자가 아닙니다.

 

그럼 오병이어의 기적이 무엇을 계시하고 있는 표적인지를 살펴봅시다.

 

오늘 본문은 오병이어의 기적이라는 제목으로 수 없이 설교되어지는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하지만 수많은 설교가 예수님의 구속사로 보지 않고, 바치면 복을 받는다는 것으로 해석을 해 버립니다.

예수님께선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서 주님께서 하실 일을 보여주시고자 하는데 인간들은 적은 것을 바쳐서 복을 따내는 수단으로 보고 있으니 얼마나 다릅니까?

 

그럼 본문을 가지고 추적해봅시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자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다고 합니다.

 

요 6:2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

 

왜?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따랐을까요?

본문에선 군중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를 예수님이 병인들에게 행하신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의 기록상으로 보면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있는 베데스다 못가에서 38 년 된 병자를 고친 사건이 있은 후입니다.

이때가 마침 유대인들이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 때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겐 봄, 여름, 가을에 지키는 3대 절기가 있습니다.

봄에 지켜지는 절기가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이 있는데 이름하여 무교절이라고 하는데 유월절이라고도 부릅니다.

여름에는 맥추절 또는 칠칠절이라고 부릅니다.

신약에선 오순절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가을엔 나팔절과 속죄일과 초막절이 있는데 통칭 초막절 또는 수장절이라고도 부릅니다.

 

이 3대 절기 때가 되면 이스라엘의 남자는 의무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오병이어 기적을 일으킬 때가 유월절이라고 하였으니 온 사방에서 흩어져 있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룰 때입니다.



예수님도 이스라엘의 남자이기 때문에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가서 베데스다 못가에 38년 된 병자를 고치는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러자 38년 된 병자를 고친 소문은 삽시간에 온 예루살렘에 퍼졌고 급기야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마침 저녁 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따라오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시면서 빌립에게 이 사람들에게 저녁을 먹여야 할 터인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빌립이 말하기를 각 사람으로 조금씩 먹인다 할지라도 200 데나리온 어치의 떡을 사 가지고 온다 하여도 부족할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이는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 때 안드레가 한 아이가 가지고 있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담긴 도시락을 발견하고 그것을 예수님에게 가져오면서 이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라고 내어 놓았습니다.

안드레의 말은 이까짓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라는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의 보리떡을 축사하시고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니 오천 명이나 먹고도 남아서 그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나 되었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4장 21절을 보면 여자들과 어린아이들도 먹었는데 실제 숫자는 남자들만 오천 명이라고 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무슨 구경거리라고 하면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이 더 많이 몰려드는 것을 참고 한다면 실제로는 족히 만 명은 넘었으리라 추측해 볼 수가 있습니다.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자와 어린아이를 뺀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본문의 요지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 많은 목사님들이 이 본문을 가지고 성도들에게 설교하기를 여러분 하나님은 어린아이의 손에 있던 지극히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손에 바쳐지니 오천 명이나 먹고도 그 남은 떡이 자그만치 열두 광주리나 될 정도로 엄청난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주님께 바치면 주님께서 크게 축복해 주실 것이라는 식으로 설교를 합니다.

 

이러한 접근의 설교가 얼마나 본문을 곡해하는 설교인지는 본문 속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사건은 성도들에게 무엇을 하나님께 바쳐야 할 것으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성도들이 바친 것을 축복해 주신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아까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이 세상에 드러내는데 목적을 두고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모든 성경은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병이어의 기적도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세상에 알리기 위한 기적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을 강해해 오면서 요한복음에서 일어난 갖가지 기적들은 모두가 “표적”이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표적이란? 그 사건을 통하여 무엇인가 말해 주고자 하는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계시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으로 무엇인가를 가르치고자 한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하나님이 계시해 주시고자 하는 뜻이 있는데 그 말씀이 14-15절에서 예수님이 바로 모세가 예언하였던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는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일찍이 모세는 장차 하나님께서 자기와 같은 선지자를 일으킨다고 예언했습니다.

 

신 18:15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에 말을 들을지니라”

 

모세와 같은 선지자란? 자기 백성들을 출애굽 시켜서 하나님의 약속에 땅으로 인도하실 분이란 말입니다.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오시면 모세와 같은 일들을 할 것이니 그 때 너희들은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구약을 보면 가나안으로 인도한 사람은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가 지명한 지도자입니다.

모세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모세가 말하는 자기와 같은 선지자는 여호수아가 아니고 다른 분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알다시피 유대인들은 태어나자마자 율법을 달달 외웁니다.

그러니 구약에 예언된 말씀들을 다 압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자 대뜸 모세가 말한 그 선지자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4절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란? 모세가 신명기에서 말하던 모세와 같은 선지자 곧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행하는 이 기적이야말로 과거 모세가 광야에서 행했던 만나의 이적과 같은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주저함 없이 모세가 예언한 바로 그 선지자라고 지목해 버립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도 하나의 계시적인 사건으로 보았는데,

이 시대 목사들은 복 받는 것으로 보고 있으니 얼마나 잘못된 해석입니까?

 

이스라엘에게 있어 모세란? 왕과 같은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 모세가 예언한 그 선지자가 바로 지금 자기들 눈앞에 있습니다.

모세가 행한 그 기적을 행하고 있습니다.

 

이에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이 분이 바로 유대인의 왕이 되어야 할 분이라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자기들의 왕이 되어 달라고 하기에 이릅니다.

우리 조상들이 학수고대하던 왕이십니다 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들의 청을 거절하고 도리어 숨어 버립니다.

 

요 6:15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알다시피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이 탄생 하셨을 때 유대 왕 헤롯에게 가서 지금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고 했습니다.

그리곤 예수님 앞에 왕에게 대하는 예를 갖추고 경배 하였습니다.

 

맞습니다.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메시야입니다.



메시야란? 왕이란 말입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자신이 자기백성들의 왕으로 오셨다는 것을 잘 아십니다.

그렇다면 지금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옹립하려고 하면 그래 내가 바로 모세가 예언한 그 선지자이고 너희의 왕이다! 라고 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도리어 백성들이 왕으로 삼을까봐서 피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왜? 유대인들의 왕이 되기를 거부하고 피하게 된 것일까요?

이는 유대인들이 기대한 메시아는 성경이 약속하고 있는 메시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메시야는 죄인을 구원하는 메시야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모세가 바로 왕으로부터 구출해 주었듯이 예수님도 로마로부터 구출해 줄 것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또한 모세가 광야에서 떡을 주어 먹게 하였듯이 떡을 주는 메시야를 기다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자 유대인들은 바로 이 예수야 말로 자기들의 배를 채워주는 메시아라고 믿은 겁니다.

자연히 자기들의 왕이 되어달라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왕되심을 거절하고 숨어버리십니다.

숨은 이유는 이들이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에 나를 왕으로 삼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요 6:2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들이 날 원하는 것이 아니고 떡을 원한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좋은 것이 아니라 예수가 주는 떡이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배부르게 해주고 행복하게 해 주는 신을 원한 겁니다.

그 누구라도 자신들의 배를 채워준다면 그를 메시아로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신이란? 떡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은 떡을 주는 자가 하나님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만약에 예수를 메시아라고 인정하여 그들의 뜻대로 예수님을 왕을 삼았다고 하여도 그들은 끊임없이 떡을 요구할 것입니다.



만약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면 언제든지 등을 돌릴 수 있는 자들 이였습니다.

그것은 훗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던 모습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들이 비단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평안하게 살아남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의 사상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모든 인간들이 기대하는 신에 대한 모습은 유대인들이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에 예수를 왕으로 삼고자 하는 모습 속에 다 나타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신이라면 신을 섬기는 백성들의 먹고사는 문제만큼은 해결해 줄 수 있는 능력의 신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메시아입니다.

 

지난번 대통령 선거 때 이명박 대통령을 뽑았습니다.

그를 뽑은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경제를 살려 달라는 겁니다.

떡을 주어 배부르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전보다 살기가 더 어려워졌습니다.

이젠 배신감이 들어서 대통령 잘못 뽑았다고 아우성입니다.

 

사람들의 심리는 자신의 삶이 어렵고 힘든 것을 남에게 돌리고자 합니다.

오죽 하면 잘되면 자기 탓이고 못 되면 조상 탓이라는 말이 다 있겠습니까?

그만큼 인간들은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자들입니다.

만약 지금이라도 이명박 대통령이 경제를 살려 주면 연임을 하라고 외칠 것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들은 떡을 주는 자를 주인으로 모셨습니다.



인간은 자기 배 밖에 모르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죄인을 일컬어 짐승이라고 하는 겁니다.

짐승은 밥 먹고 사는 것이 삶에 의미입니다.

등 따습고 배부르면 여기가 천국입니다 라고 하는게 짐승입니다.

 

 바울은 저들의 신은 배(腹, 떡)라고 했습니다.

 

빌 3:18-19=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저희의 신은 배요” 라는 말은 떡이란 뜻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신을 찾는다는 말입니다.

신이 좋아서 섬기는 것이 아니라 떡을 위해서 찾는 것입니다.

이런 자를 십자가의 원수라고 합니다.

즉 예수를 죽인 자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너희는 너희를 위하여 신을 만들지 말라” 고 한 것은 하나님은 떡을 주는 신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떡을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하나님의 원수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눈만 뜨면 먹을 것을 찾는 자이니 자연히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이 밝혀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약 이스라엘을 떡이 있는 애굽에서 떡이 없는 광야로 몰아내신 것입니다.

광야에 몰아내서 그들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끄집어내고자 하신 것입니다.

자신들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을 알려 주시고자 하신 겁니다.

 

하나님은 광야 사십년 동안 만나를 먹인 것은 그들의 마음이 어떠한지 시험키 위함이었습니다.

 

신 8:2-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로 몰아 낸 것은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이건 인간의 본능과, 이성에도 맞지 않는 말입니다.

육신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어찌 밥 없이 산단 말입니까?



인간의 육신은 먹고 배가 불러야 하나님을 섬겨도 섬길 수가 있습니다.

배고파 보세요.

교회 오고 싶어도 못 와요.

교회도 예수도 다 배가 부르고 난 후에 일이지 배고프면 안중에도 없어요.

 

육신에겐 밥은 생명이고 의미이고 전부입니다.

황우장사도 밥 없으면 죽은 목숨입니다.

그래서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들은 떡을 요구했습니다.

모세를 따라 나온 것도 다 먹고 살기 위해서입니다.

지극히 당연한 요구입니다.

 

이를 나무라지 마세요.

아무리 믿음이 좋다고 하여도 떡을 거부할 인간은 없습니다.

육신은 떡을 거부할 능력이 없어요.

아무리 믿음이 좋다고 하여도 주일날 회사 오지 않으면 해고시킨다고 하면 안 나갈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우리 둘째 놈 이야기입니다.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과거엔 주일을 지킨다고 몇 군데서 잘렸습니다.

자기 딴엔 신앙을 지킨다고 주일날 학원에 출근하라고 하여도 난 교회 가야 한다고 출근 못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큰 학원엔 들어가기도 힘든데 몇 번 잘리다 보니 이젠 학원엔 가도 교회는 안 옵니다.



과거엔 교회를 위해 학원을 포기 했는데 이젠 주일날 출근하라고 하면 군소리 없이 학원에 갑니다.

몇 번 잘리다 보니 이젠 생존 방법을 터득한 겁니다.

세상은 신앙생활을 호락호락하게 하지 않게 하더라는 것을 안 겁니다.

서서히 예수 믿으면 세상에서 손해 본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여러분 예수 잘 믿으면 하나님이 천군천사를 보내서 호위해 주지 않아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데 가나안이 비어 있는 땅이 아닙니다.

거대한 아낙 자손들이 진치고 있는 곳입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어서 오세요!

여기서 사세요! 라고 하지 않아요.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영접하라고 하셨어요!

잘 오셨습니다 라고 하지 않아요.

도리어 뭐 이런 놈들이 있어! 라고 칼과 창으로 죽이겠다고 합니다.

오죽했으면 모세가 정탐꾼들을 보내서 그 땅을 보고 오라고 했더니 와서 하는 말이 우린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헸겠어요.

 

야! 말 마라!

거기 가니 저 놈들은 장대 같은 거인들인데 우리는 거기에 비해 메뚜기만 하더라!

아예 게임이 안 되니 일찌감치 포기하고 애굽으로 돌아가서 바로에게 주여 제가 왔습니다! 라고 하자고 했어요.

이게 현실입니다.

 

지금도 이런 영적 상태는 동일해요.

마귀가 여러분 마음먹은 대로 예수 잘 믿도록 내 버려두지 않아요.

그러니 우리는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맨 날 원망하는 겁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모세에게 돌을 던졌지만 지금은 예수에게 돌을 던져요.

내가 이러려고 예수 믿는 줄 아느냐고 난리를 칩니다.

 

그러니 난 절대로 예수를 떠나지 않을 거야 장담하지 마세요.

그건 여러분의 원함인 줄을 알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못해요.

정반대로 나타나요.

 

어떤 목사님이 그럽디다.

그에 나라와 그에 의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다 알아서 해 주신다고,,,

그러니 믿음으로 살라고,,,

이게 얼마나 성경을 모르는 상상 속의 설교인줄 아세요.

 

여러분! 12제자나 바울이 그에 나라와 그에 의를 구하지 않아서 굶고 매 맞고 쫓겨 다닌 줄 아세요.

예수님이 아버지 뜻대로 안 살아서 동족들로부터 버려지고 죽임을 당한 줄 아세요.

그에 나라와 그에 의를 구했기 때문에 굶고 매 맞고 욕먹고 죽임 당한 겁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라는 말씀이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에게 얼마나 허황된 말씀인줄 아세요.

이건 살아 있는 육신에게 할 소리가 아닙니다.

죽은 송장에게나 할 법한 말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너무 쉽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보다 똑똑하지 않아서 모세를 원망하고 가나안에 안 들어가겠다면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한 것이 아닙니다.

몸뚱아리가 죽게 생겼는데 가나안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요즈음 식으로 말하면 실직당해서 죽을 지경인데 천국은 무슨 놈에 천국이예요.

내 코가 석자인데 무슨 헌금을 하고 봉사를 하고 충성을 해요.

신앙생활도 다 먹고 배부르고 난 후에 일이지, 결코 밥 보다 앞설 순 없습니다.



물론 예수 잘 믿고 싶어 하는 여러분들의 마음은 알아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소망일뿐입니다. 

떡으로 사는 인간들에게 떡을 구하지 말라는 것은 죽으라는 말입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스라엘을 광야에 끄집어 내 놓고 죽으라고 합니다.

너희들은 살 가치가 없는 인간이라고 하는 겁니다.

여기서 인간은 반발을 하게 됩니다.



내가 왜? 죽어야 합니까? 라고 반발을 하여야 합니다.

예! 죽겠습니다!

그러면 안돼요.

 

하나님 앞에 바락 바락 덤비면서 따져야 합니다.

내가 왜? 죽어야 하느냐? 라고 따져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왜? 살 가치가 없는 인간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내가 살 가치가 없는 자라는 것을 알 때 비로서 하나님께서 광야로 불러내신 이유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선 이스라엘에게 순종을 바라지 않습니다.

도리어 자신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깨닫기를 바랐습니다.

자신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라는 것을 알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야 자신들이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크신 은혜임을 알고 감사하게 됩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 할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압니다.

 

롬 11: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하나님께서 순종 할 수 없도록 가두어 놓았어요.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도록 가두어 놓은 이유는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즉 인간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은혜란? 불쌍히 여기고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순종이 안 되도록 해 놓고 너희들 내 덕으로 사는 줄 알라고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지키지도 못할 말씀을 던져 주고선 봐라! 너희들이 내 덕에 산다 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면 마땅히 죽어야 함에도 죽지 않고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알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긍휼임을 알고 범사에 감사하며 사는 겁니다.

산다는 것 자체가 감사가 되려면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죽어야 할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서는 감사가 나오지 않습니다.

 

성도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입니다.

성도란? 하나님 말씀에 순종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성도란?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성도란? 하나님께 용서받고 산다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성도란?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게 하시려고 떡이 풍부한 애굽에 두지 않고 떡이 없는 광야로 빼내신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고 광야로 빼 낸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 앞에 자기 실존을 토해 내야 합니다.

예! 알았습니다.

이제부터 굶어 죽더라도 하나님 말씀만 뜯어 먹고 살겠습니다! 라는 것은 교만이고 망발입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우라는 말은 포기하라는 말이고, 밥 먹지 말라는 소리는 죽으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말씀대로 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도리어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지킬 수 없는 불가능한 말씀을 하신다는 것은 지키라고 한 것이 아니고 너희가 이렇게 다른 종자라는 것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너희들은 지금 내가 만든 원래 인간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 앞에 자신은 하나님이 바라는 인간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아! 나는 원래 인간이 아니구나!

하나님이 바라는 인간도 아닌 것이 하나님 앞에 이것 달라 저것 달라고 한 것이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인간이 아니란 것도 모르고 주제 넘게 하나님 앞에서 악악대고 있어요.

 

죄란? 자기가 누구인줄 모르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기가 저주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게 죄입니다.

하나님 앞에 요구할 것이 아무 것도 없이 사라져야할 무가치한 존재라는 것을 알 때 비로서 신앙의 첫 걸음이 시작이 되어집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실패 하였습니다.

떡을 안 준다고 모세에게 돌을 던졌습니다.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데모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모든 인간들을 광야에서 죽여 버렸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광야란? 조상들의 무덤이 있는 곳입니다.

광야란? 떡을 안준다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다가 저주 받은 곳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떡 사건을 일으키신 겁니다.

 

그럼 오늘 본문은 구약시대의 광야 사건과 같습니다.

영적인 의미에선 동일하다는 뜻입니다.

구약에서는 모세가 떡을 주었지만, 지금은 예수님이 떡을 주고 계십니다.

왜? 예수님께선 모세의 사건을 재현하시고 계실까요?

 

모세와 세운 언약을 일컬어 옛 언약이라고 하고, 예수님과 세운 언약을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이라는 말은 언약이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옛날에는 모세와 했는데, 이제는 예수님과 했다는 말입니다.

과거엔 모세와 한 약속이 효력이 있었는데, 이젠 예수님과 한 약속이 효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산상보훈을 통해서 이러 저러한 말씀을 하시면서 옛 사람에게 말한 바는 이러하였지만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 라는 식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모세가 한 말을 재해석을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행하시는 오병이어의 기적은 모세가 광야에서 한 만나 사건을 재해석하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모세가 주는 떡을 먹고서는 다 죽었는데 예수님이 주는 떡을 먹으면 산다는 것입니다.

 

요 6:49-51=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이를 언약 적으로 해석을 하면 모세와 세운 옛 언약은 죽이는 언약이지만, 예수님과 세우는 언약은 살리는 언약이라는 말입니다.

모세가 주는 떡을 먹은 사람은 다 죽지만, 예수님이 주는 떡을 먹는 사람은 다 산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행하신 오병이어의 기적은 모세의 언약을 완성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세 언약으로 죽은 자들을 예수님께서 살려 내신다는 의미입니다.

모세가 실패 한 것은 예수님께서 완성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아까 모세는 옛 언약에 속하였고 예수님은 새 언약에 속하였다고 했습니다.

옛 언약이다 새 언약이다 라는 것은 언약이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옛 언약은 인간과 맺은 언약이고, 새 언약은 예수님과 맺은 언약입니다.

 

옛 언약은 내가 책임지는 것이지만,

새 언약은 예수님께서 대신 책임져 주시는 언약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내 살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생명을 주는 살이란? 생명을 주는 떡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오병이어는 그냥 떡을 먹는 것이 아니고 생명의 떡을 먹인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실 때 그냥 행하신 것이 아니고 자신의 피와 살을 주는 최후의 만찬 때 모습으로 행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4장19절을 보면 이 오병이어의 이적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 14:19=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여기서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주시매" 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12제자들과 최후의 유월절 만찬 때에 행하셨던 것과 같은 표현으로 쓰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 때에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축사하시고는 12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주시면서 이 떡은 내 몸이라고 하였고, 포도주를 일컬어 내 피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자신의 살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심으로 죄인들을 위하여 당하는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상징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자신이 피와 살을 12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최후의 만찬에 모습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유월절 만찬과 같은 방법으로 하신다는 것은 오병이어의 기적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고난과 죽음을 미리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이라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병이어는 예수님께서 장차 이루어야 하실 것에 대한 표적인 것입니다.

 

정리하면 광야에서 보리떡이 찢어지는 것은 예수님의 몸이 찢어지는 것이고, 군중들이 보리떡을 먹는 것은 예수님의 몸을 먹는 것입니다.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는 것은 예수님의 피와 살로 새로운 이스라엘의 12지파가 생겨날 것을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열두 광주리의 떡은 새로운 12지파 곧 12제자를 상징하는 떡입니다.

12제자는 모두가 한 떡에서 나왔습니다.

모두가 예수님의 몸이 찢김으로서 생명을 얻은 자들입니다.

12제자는 예수님께서 대신 죽어 주심으로 생겨난 자들입니다.

새 언약에서의 이스라엘은 모두가 예수님의 몸이 십자가에서 찢김으로서 생겨났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에 흔적들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잘 것 없는 오병이어로 사람들을 배부르게 먹인 것은 사람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보잘 것 없는 보리떡과 같은 존재라고 여기지만 그 예수님 속에는 온 인류를 배부르게 하고도 남을 만한 풍성한 생명이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보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가 있겠느냐며 무시하고 비아냥거렸습니다.

 

그런데 무시하여 보잘 것 없다고 여긴 그 예수님이 자신의 살과 피를 십자가에서 대속 제물로 주심으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사람들이 하찮게 여기는 예수님의 십자가 속에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게 하시고 거기에 영생의 비밀을 숨겨두었던 것입니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실 구원의 역사는 세상 속에서 이렇게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3장에서 천국에 대한 비유를 일곱 개를 말하면서 “천국은 마치 겨자씨와 같고 또한 가루 서 말 속에 감추어진 누룩과 같다” 고 하시면서 이 세상에서 일어날 천국운동은 보잘것없이 미미하게 이루어지실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속에서 천국 운동을 이렇게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할 정도로 일하시는 것은 타락한 인간들의 지혜로는 하나님의 비밀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간의 구원이 인간적인 방법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신다는 것을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물질적인 가치기준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크고 많으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적고 낮은 것은 나쁜 것이라고 여깁니다.

세상에는 항상 적은 것은 외면당하게 되어있고 크고 많은 것은 환영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일은 언제이고 초라하고 힘없는 모습으로 해 오셨습니다.

누구도 보리떡 같이 볼품없는 예수가 세상을 구원하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를 못하였습니다.

 

전도서 기자는 볼품없는 보리떡 같은 예수님에 의해서 세상이 구원을 받음에도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을 가난한 지혜자로 표현했습니다.

 

전 9:15-16 “그 성읍 가운데 가난한 지혜자가 있어서 그 지혜로 그 성읍을 건진 것이라 그러나 이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르기를 지혜가 힘보다 낫다마는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그 말이 신청되지 아니한다 하였노라”

 

어느 시대이고 인간들은 항상 가난한 지혜 자를 배척하고 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죄인을 구원하려고 오신 주님은 사람들에게 화려하게 나타내시지 않습니다.

또한 구원하는 일을 화려함으로도 하시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이 비밀을 안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도는 미련하다고 한 것입니다.

 

고전 1: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라”

23절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

 

사람들은 세상의 가치기준으로 화려하게 성공하여 자신의 믿음 있음을 증거 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들이 하찮게 여기는 십자가로 구원을 이루어 가십니다.

지금도 여전히 열두 광주리에 남은 보리떡 같이 보잘것없는 종들을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사도를 만물의 찌기 같고 구경거리로 두셨습니다.

영웅으로 두지 않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두셨습니다.

하지만 그 보리떡 같이 보잘 것 없는 종들에게 생명의 복음이 있습니다.

 

마치 에덴동산에 인간에게 영생을 주는 과실은 아담이 보기에 초라하였던 것 같이 말입니다.

선악과는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습니다.

상대적으로 생명과는 볼품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볼품없는 생명과는 거들떠보지 않고 화려한 선악과를 먹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아담의 혈통으로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어느 시대이고 무슨 일이든지 화려하고 멋있는 것을 선호하고 화려하고 멋있음으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만약에 아담과 같은 사고를 가진 목사와 성도들이 모인 교회라면 자기들 교회를 남들보다 더 화려하고 멋있게 만들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상이 교회 안에 성도들의 신앙생활 속에도 그대로 녹아 들어와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더 큰 문제는 그것을 마귀의 궤계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바로가 꾼 꿈과 같이 살찐 소가 파리한 소에게 잡혀 먹히는 사태가 된 것입니다.

 

정상적으로 말한다면 파리한 소가 살찐 소에게 져야 하는데 오히려 힘없는 파리한 소가 힘있는 살찐 소를 이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일컬어 역리현상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는 진리를 전하는 자들이 비 진리를 전하는 자들에게 잡아먹히고 있습니다.

진리를 전하면 오히려 이단으로 몰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어느 시대나 여자의 후손들은 별 볼일 없는 모습으로 있었고 뱀의 후손들은 화려했습니다.

여러분! 유실수와 관상수를 보세요.

하나님께선 먹고 배부름을 주는 나무는 하나같이 초라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포도나무를 보세요.

포도를 생산하지 않으면 만고에 가치가 없어요.

화목으로만 쓰일 뿐입니다.

그러나 과실이 없는 관상수들을 보세요.

하나같이 쭉쭉빵빵 아닙니까?

 

생명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은 냄새나는 거름더미에서 나오지 보기 좋은 아스팔트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의 길은 좁고 협착하여서 찾는 사람이 적다고 했어요.

반대로 멸망으로 가는 길은 크고 넓어서 찾는 이가 많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멋있고 화려함으로 뭇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던 바리새인들에게는 생명의 역사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로부터 싫어 버린바가 되어 외면당하시던 보리떡 같이 초라한 예수님에게는 사람들에게 배부름을 주는 생명이 있었습니다.

 

사 53:1-3절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람들 눈에는 하나님이 보낸 메시아는 전혀 메시아답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에게게! 저게! 무슨 메시야! 라는 식으로 조롱당할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는 그를 귀히 여겨서 그분이 우리에게 보답으로 구원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원한 적도 없고 관심을 가진 적은 더더욱 없었습니다.

우리는 한 번도 주님을 주님답게 대접해 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무식한 열심으로 스데반을 죽였듯이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무지한 충성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봉사하고, 기도하고, 헌금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러한 것이 무가치하고 틀리고 나쁘다는 말이 아니고 신앙의 본질로 하나님 앞에 내 세우고 자랑할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 전도, 예배, 헌금, 봉사가 없어도 하나님은 자신이 행하셔야 될 일이라면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열심히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봉사가 있어야 되고 내가 능력 받아서 하나님의 일을 크게 하여야 하나님이 하나님답게 대접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기적을 믿는 것과 그 기적을 행하신 분을 믿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에 대한 관심보다도 우리에게 베풀어질 이적에 관심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그것 때문에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를 피해서 산으로 가실 수밖에 없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항상 예수님을 임금 삼아서 내 유익을 챙기려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이 존재하는 동안은 결코 예수님을 예수님답게 대접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하나님이란 애초부터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만 찾게 되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나의 필요에 의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필요에 의하여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때문에 내가 살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는 것이 신앙생활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군중들을 배부르게 하고 남은 떡을 열두 광주리에 담아 남겨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이 지상에 남기고자 하는 모습입니다.

 

이 시대 예수님께서 세상에 남겨둔 새로운 이스라엘은 보리떡 같이 초라한 모습으로 남겨져 있습니다.

세상적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그들이 천국백성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세상에 남겨둔 새 이스라엘은 보리떡 같이 세상 적으로 자랑할 만 것이 하나도 없는 모습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적으로 별 볼일 없다고 여김을 받는 자들인 새로운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보리떡 같은 왕을 원하지 않고 자기에게 먹을 것을 공급해 주는 능력 있는 메시아를 왕으로 모시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는 능력 있는 왕으로 계신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 죽어서 성도들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는 메시아로 계십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가져야 할 최종적인 증거는 무엇이어야 합니까?

보리떡이 찢기듯이 자기 몸을 찢으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예수님의 몸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찢으시고 흘려주신 피 입니다.

예수님의 피만이 생명이요 양식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겐 오직 십자가만이 자랑거리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만이 성도로 하여금 영원한 이스라엘로 만들어 주는 능력임을 알기 때문에 십자가만 자랑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갈보리 산 위에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두 강도 중에 한 강도는 기적의 떡도 먹어보지 않았고 물 위를 걷는 기적을 체험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비록 십자가에서 죽어 가는 몸이었지만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풀어 자신을 십자가에서 내려놓아 주기를 구하지 않고 다만 예수님과 함께 그에 나라에 있기를 소원했습니다.

구원받은 모든 성도가 이런 강도 같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어 가는 구원받지 못한 강도는 “당신이 나를 이 십자가 형틀에서 내려오게 하면 당신을 메시아로 인정하겠소! 라고 하여 기적을 보여 보라”고 하였습니다.

이 강도는 예수가 자신에게 믿을 수 있는 어떤 기적적인 일을 유발시켜 주면 믿어 주겠다고 합니다.

그는 광야에서 떡을 먹고 예수를 임금으로 삼고자 한 군중들과 같이 기적을 믿고자 한 것이지 예수를 믿고자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처럼 멸망 받을 자들은 항상 기적으로 신앙을 점검하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증거 할 뿐이지 그 기적이 성도에게 믿음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기적을 보고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셔야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선물로 받은 성도들은 기적을 좇아가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요구하는 유대인들에게 내가 너희들에게 보여줄 기적은 요나의 표적 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은 곧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보리떡처럼 찢겨 주셔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으킨 모든 표적은 십자가를 겨냥하고 일어난 사건들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도 자랑스럽다” 라고 말해서는 안 되고,

“오직 십자가 만이 자랑스러워야” 합니다.

십자가 '도' 자랑스럽다는 말은 십자가 말고도 자랑스러운 것이 있다는 말이고,

십자가 '만' 자랑스럽다고 하는 것은 오직 십자가 이외에는 자랑거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성도에겐 십자가 이외에 다른 지랑 거리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십자가 만이어야 합니다.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그대가 바로 열두 광주리에 남겨진 새로운 이스라엘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을 보리떡처럼 자신의 살을 찢으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공급해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내가 사는 것이 보리떡 되신 예수님 안에서 산다는 것을 깨닫고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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