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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성경강해)130강. 조반(朝飯)을 먹으라 (요 21:1-14)

by coroa 2022. 2. 18.

 

하늘빛사랑 https://blog.daum.net/day7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130강. 조반(朝飯)을 먹으라 (요 21:1-14)

-.정낙원 목사

 

요 21:1-14절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줄 알지 못하는지라 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7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主)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8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한 오십 간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9 육지에 올라 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신대 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12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主)신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14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 하시고 에덴동산에 두셨습니다.

그리고 에덴동산을 지키고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에덴동산은 생명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생명과를 먹고 생명의 사람이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뱀의 미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고 죽은 자가 되고 맙니다.

죽은 자는 산 자들이 살아가는 에덴동산에서는 살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을 에덴동산 밖으로 쫓아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담이 살아갈 땅을 저주하십니다.

아담은 일평생 저주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아담이 세상에서 성공하여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하여도 그건 저주일 뿐입니다.

 

아담이 살아가는 땅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입니다.

이 세상은 저주를 머금고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뱀은 사람들에게 이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을 저주가 아니라 성공이라고 미혹을 합니다.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복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

그건 뱀의 말입니다.

하나님은 뱀을 저주 하실 때 종신토록 흙을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뱀에게 세상을 넘겨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뱀을 일컬어 세상 신이라고 합니다.

뱀은 세상 것으로 사람들을 땅에 붙잡아 두는 일을 합니다.

이를 예수님에게까지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뱀은 예수님을 찾아 와서 세상의 부귀영화와 권세를 주겠다고 제안을 하였던 것입니다.

 

뱀은 천하만국의 영광을 얻는 것이 마치 하나님 앞에 성공한 신앙이라고 미혹합니다.

그래서 뱀은 예수님에게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라고 하면서 세상에서의 영웅호걸을 만들어 주겠다는 것으로 시험한 것입니다.

 

이러한 뱀 사상이 교회 안에 깊숙이 침투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목사들이 예수를 믿으면 세상에서 잘 된다고 뱀의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들이 뱀에게 미혹당하여서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고 합니다.

 

기복주의 성공주의를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속에서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를 돌아보면 인간들은 부요하면 어김없이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신명기 32장을 봅시다.

 

신 32:15-20절 “그러한데 여수룬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 16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였도다 17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마귀에게 하였으니 곧 그들의 알지 못하던 신, 근래에 일어난 새 신, 너희 열조의 두려워하지 않던 것들이로다 18 너를 낳은 반석은 네가 상관치 아니하고 너를 내신 하나님은 네가 잊었도다 19 여호와께서 보시고 미워하셨으니 그 자녀가 그를 격노케 한 연고로다 20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하고 그들의 종말의 어떠함을 보리니 그들은 심히 패역한 종류요 무신한 자녀임이로다”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언하기를 너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등 따습고 배가 부르면 하나님을 떠나고 마귀를 섬기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모세의 예언대로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우상 숭배신앙을 하다가 쫓겨나는 멸망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은 멸망의 역사입니다.

멸망의 근원이 부요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한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을 봅시다.

 

요일 2:15-17절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사도 요한은 이 세상에 모든 것은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세상 신이 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상 신이 누구인가요?

마귀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은 이 세상에서 저주 아닌 것이 없습니다.

성공도 저주이고 실패도 저주입니다.

저주 아닌 것은 세상 바깥 하늘에만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이 땅에서 뽑혀서 하늘로 가는 것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애굽에서 나와 약속의 땅으로 가는 것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 스스로 세상을 떠나지 못하니까 하나님이 구원자를 보내서 뽑아내도록 하신 것입니다.

 

구원이 뭐냐?

세상으로부터 뽑혀짐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안 뽑히려고 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인간들 힘으로 저주로부터 벗어나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인간도 스스로 저주를 벗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저주는 오직 저주하신 분만이 풀 수가 있습니다.

저주하신 분이 누굽니까?

하나님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 백성들의 저주를 풀어 주시는지를 이야기 해 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저주를 풉니까?

이는 그 아들을 보내서 푸십니다.

 

저주를 푸는 방법이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입니다.

그 아들을 우리 대신 우리의 저주를 짊어지게 하심으로 푸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대신 죽으심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일컬어 구원의 능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자신의 힘든 삶을 하나님께 항의하는 글을 남겼습니다.

마치 아삽처럼 말입니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그랬겠습니까?

전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인간들은 자기 안에 분(忿)을 누군가에게 풀어야 합니다.

자신의 불행을 타인에게 돌리고 자신과 상관없는 것으로 만들고 싶은 것입니다.

난 잘못 없어!

다 하나님 잘못이야! 라고 하여야 시원합니다.

저는 그 분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을 보면서 참 고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해야 할 원망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짜증을 내고 원망 할 데가 있다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원망할 대상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것도 하나님에게 말이에요.

하나님이 우리의 원망을 다 받아 주시니깐 말입니다.

 

우리는 신앙을 너무도 감상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원망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으면서 말이에요.

궤변 같지만 하나님께 원망하는 것도 신앙입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원망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나를 낳아준 부모이기 때문에 원망하는 것입니다.

본능적으로 남에게는 원망 할 수가 없고 부모에게 억울함을 토설하라고 하나님께서 입력을 해 놓으신 것입니다.

 

인간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원망하지,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원망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안에 내제된 본능이 나를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구분을 합니다.

그래서 부모에게 짜증을 내고 원망을 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그것을 다 받아 주십니다.

왜냐하면,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배 아파서 낳았기 때문입니다.

짜증을 내도 내 새끼이기 때문에 보듬어 안는 것입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우리 인생은 감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짜증나는 일도 있습니다.

감사하는 것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고!짜증나고 원망하는 일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입니다.

 

전도서 7장을 봅시다.

 

전 7:13-14절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형통과 곤고로 우리를 다스린다고 합니다.

형통은 기쁜 일이고,

곤고는 슬픈 일입니다.

극과 극입니다.

 

하나님은 이 극과 극의 환경을 가지고 우리를 다스립니다.

우리 인생은 이 극과 극을 오가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희노애락은 다 하나님의 허락하심으로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하나님의 간섭하심 자체가 은혜입니다.

순경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역경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부르심을 입은 우리 성도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범사에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희노애락을 나누는 것입니다.

좋으면 좋은 대로 나누고, 싫으면 싫은 대로 나누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여서 일어나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2장을 봅시다.

 

삼상 2:6-7절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고,

가난케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고,

아프게도 하시고 싸매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신다고 합니다.

 

시편을 보면 다양한 시(時)가 있습니다.

어떤 시는 찬양 시이고!

어떤 시는 고난 가운데 울부짖으며 원망하는 시입니다.

 

찬양도 시이고!

울부짖는 것도 시입니다.

모두가 하나님께 고하는 시입니다.

 

찬양도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고,

원망도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마치 아이가 엄마에게 기뻐서 조잘거리는 것도 대화이고, 화가 나서 짜증내는 것도 대화이듯이 우리가 이 땅에서 살면서 행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가족 간에 침묵은 안 됩니다.

대화가 없다는 것은 악입니다.

하나님과 성도는 가족입니다.

고로해서 성도가 하나님께 침묵하는 것은 죄악인 것입니다.

 

무엇이라도 아뢰십시오.

즐거우면 찬송하고!

슬프면 기도하세요.

 

감사하다고 하든지 왜? 그러시냐고 따져야 합니다.

하나님과 부대끼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야 합니다.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말합니다.

 

사 1:18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여호와께서 변론을 하자고 합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이야기 좀 해 보자고 합니다.

죄를 지었으면 왜? 죄를 지었는지 이야기 좀 하라는 것입니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가만있지 말고 따지라고 합니다.

꿀 먹은 벙어리 마냥 가만히 있지 말고 뭐라도 좀 떠들어 대라는 말입니다.

 

왜? 변론하자고 합니까?

이는 이 세상 자체가 하나님께 따지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저주 받은 세상에 보냈습니다.

저주 받은 세상에서 희희낙락 할 수는 없습니다.

 

저주 받은 세상에 보내어지고 산다는 것 자체가 형벌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쓴맛 단맛을 다 본 전도서 기자는 태어나서 일찍 죽는 것이 복이라고 하고 그보다 더 복된 것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전 4:2-3절 “그러므로 나는 살아 있는 산 자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를 복되다 하였으며 3 이 둘보다도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서 행하는 악을 보지 못한 자가 더욱 낫다 하였노라”

 

우린 모두가 죄 아래서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산다는 것 자체가 형벌인 것입니다.

전도서 기자의 말을 빌리면 이 세상에 오래 살면 살수록 그만큼 형벌을 많이 받는 것입니다.

그만큼 고생이 많다는 것입니다.

 

형벌은 반드시 복역의 때가 있습니다.

때가 차면 형벌에서 풀려납니다.

그 때가 육신의 장막을 벗을 때입니다.

하늘에 장막을 덧입고 영원한 안식으로 나아가는 때입니다.

 

우린 그 소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 소망이 있기 때문에 형벌적 의미가 있는 이 세상에서의 삶도 소중하고 귀한 것입니다.

하루 하루의 삶을 게을리 하지 마시고 성실하게 사세요.

 

오늘은 2013년 마지막 날입니다.

 

한 해가 또 지나갑니다.

한국에서 해가 가장 빨리 뜬다고 하는 울산 ‘간절곳’에서 해맞이 한다고 시끌벅적 합니다.

시내 곳곳에 해맞이 한다고 플랜카드가 여기저기 걸려 있습니다.

 

작년 이맘때도 그렇더니만 지금도 동일합니다.

이러한 일들을 겪은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일 년이 후딱 지나갔습니다.

세월이 참 빠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누가 그랬는가요?

사람의 나이와 비례하여서 세월의 속도가 감지된다고,,,,

 

20대에는 20km로 가고,

40대에는 40km로 가고,

60대에는 60km로 가고,

80대에는 80km로 빨리 간다고 합니다.

 

세월의 흐름이 빨리 감지된다는 것은 그만큼 주님 앞에 서게 되는 날이 가까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이 임하면 늙은이들에게 꿈이 생긴다고 했습니다.

무슨 꿈입니까?

주님 앞에 서는 꿈입니다.

 

저는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주님 다시 오실 때” 라는 찬송을 켜 놓고 듣고 있습니다.

찬송을 들으면서 예전에 가졌던 그 감동을 회상합니다.

지난번 미국 집회 마지막 날에 부른 찬송인데 어찌나 은혜가 되던지 들으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가사 중에 “내 사모하는 주님!~” 이라고 부르는 대목을 부를 땐 목이 메입니다.

모인 성도님들이 말씀에 은혜를 받고 부르는 찬송이라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늘 그 찬송을 들으면서 황홀해하고 은혜를 받는 답니다.

 

오늘은 굉장히 깊은 이야기를 해야 하니까 잘 이해하시고 들으시길 바랍니다.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각자 받은 은혜의 깊이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성령을 받기 전에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던 것과 성령을 받고 난 후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이 다름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 받기 전에 알던 예수님과 성령을 받고 난 후 알게 된 예수님은 다릅니다.

성령 받기 전에는 육으로 알고, 성령 받고 난 후에는 영으로 알게 됩니다.

영과 육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릅니다.

그러므로 감동도 다르게 됩니다.

 

육을 껍데기라고 한다면 영은 알맹이입니다.

그러니까 육과 영은 예수라는 말은 같을 수가 있지만 그 예수가 담고 있는 내용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른 것입니다.

 

고린도전시 13장을 봅시다.

 

고전 13:9-13절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부분적으로 알던 것하고 온전한 것이 있다고 합니다.

부분은 어린아이와 같고, 온전한 것은 장성한 사람과 같다고 합니다.

부분은 거울로 보는 것 같다고 하고, 온전은 실제로 얼굴을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이는 예수님을 알아가는 일은 생명의 자람과 같다는 말입니다.

즉 신앙의 경륜에 따라서 이해하는 것이 달라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동일한 것도 어떤 사람은 받을 만하고, 어떤 사람은 받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신앙이란? 생명의 자람과 같습니다.

자람에 따라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하고 깨닫는 폭이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에스겔 47장에서 말하는 물의 깊이에 따라서 다른 것처럼 다르단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물이 발목까지 차 있고!

어떤 사람은 물이 무릎에 차 있고!

어떤 사람은 물이 허리까지 차 있고!

어떤 사람은 물속에 퐁당 잠겨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각 사람마다 깨닫는 것이 다르고 이해하는 것이 다르고 행동하는 것이 다릅니다.

그러니 나와 다르다고 넌 아니야! 라고 판단하고 심판하진 마세요.

그 사람이 예수그리스도를 저주하고 부인하기 전에는 말이에요.

우리는 모든 정죄와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자기 자신의 신앙만 챙기시면 됩니다.

 

우린 누굴 심판하는 자가 아니라 심판을 받아야 할 자들입니다.

성도는 법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은혜로 사는 자입니다.

그러니 나와 다르더라도 정죄하지 말고 기다리세요.

나처럼 이해하지 않는다고 해서 틀렸다고 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가 다 담아 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아는 유한(有限)에 속하였고,

하나님의 일하심은 온전한 무한(無限)에 속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유한이 무한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창조주입니다.

피조물은 창조주가 하는 일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설령 이해한다고 하여도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알려 주신 것만큼만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지극히 부분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를 알면 다 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가장 무서운 것이 스스로 다 안다고 하는 교만입니다.

교만은 넘어짐의 선봉이고 패망의 앞잡이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 안다고 하는 자는 아직까지 모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네가 뭘 모르니까 다 안다고 교만을 떨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계시(啓示)의 책이라고 합니다.

 

계시란? 열어 준다는 말입니다.

누가 열어 주는가 하면 하나님이 열어 주십니다.

하나님이 각자의 분량에 맡게 알만큼만 열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나와 다르더라도 그냥 다름으로 두시길 바랍니다.

 

어린 아이를 하루아침에 어른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어린 아이 때는 어린 아이 같이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그러다가 장성하면 어린 아이 일을 버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지금 어린 아이가 하는 일이 못마땅하더라도 분별은 하시되 심판은 하지 마세요.

언젠가는 이해하고 깨달아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우린 모두가 그 과정을 지나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참아 주어야 합니다.

 

성경을 알아가는 일이 그러합니다.

성경은 영과 육이 있다고 말해 줍니다.

하나님을 영이라 하고 인간을 육이라 합니다.

그런데 영이신 하나님이 육인 인간들 세계에서 영의 일들을 펼치셨습니다.

 

영의 일이란? 하늘에 일이란 말입니다.

육의 세상에서 영의 일을 벌리신 것은 세상 속에서 영에 속한 자들을 찾아내고자 하심입니다.

영에 속한 자들은 성령으로 그 일을 감지해 내게 됩니다.

하나님은 영에 속한 자들에게 영을 감지할 수 있는 촉을 주셨습니다.

 

이름하여 성령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통달하십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성도는 모든 성경을 영으로 즉 하늘에 일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을 받지 못한 육에 속한 자들은 영의 일을 육으로 이해를 합니다.

육은 표피적으로 나타난 것으로만 이해를 합니다.

 

육에 속한 자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서 인간적으로 이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주어서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펼치신 하늘에 속한 일들을 영으로 이해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역사 속에 펼친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가요?

그건 아들을 통해서 창세전 언약을 성취해 내시는 것입니다.

아들이 누구냐?

예수님입니다.

 

하나님 아들이 왜? 역사에 오셨습니까?

이는 아버지와 아들 간에 맺은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뭔가요?

그건 자기 백성들을 아들의 피로 구속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을 봅시다.

 

벧전 1:18-21절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20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21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베드로는 우리가 구속된 것은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어린 양의 피로서 구속이 되는 것을 언제 계획이 되었다고 합니까?

창세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죽으신 것은 창세전에 미리 알리신 것이라고 합니다.

이제 그 때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서 십자가에 죽이시고 살려내는 일을 하셨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말세라고 합니다.

말세(末世)란? 세상 끝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을 말세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오심으로서 심판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니시면서 너희와 저희로 갈라내는 일들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여 승천을 하셨습니다.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다시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완전한 심판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언제 오신다고 알려 주시지 않았습니다.

 

언제 오실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긴장의 날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긴장감으로 사는 것을 종말론적 삶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승천을 하시면서 종말 모드가 형성이 된 것입니다.

언제 예수님이 오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예수님이 오실 것을 대비하고 살아야 합니다.

즉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사람 아닌 것으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 가치관으로 살지 않고 하늘에 가치관으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 살면서도 언제든지 하늘나라로 가야할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예수님에 의하여 일어나는 말세를 언제 계획이 된 일이라고 합니까?

창세전이라고 합니다.

그 창세전에 계시던 분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어디에 계시던 분인가요?

하늘나라에 계시던 분입니다.

하늘나라를 영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는 일은 모두가 영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영적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그냥 육적으로 보시면 안 됩니다.

다 그 속에 영적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일들도 모두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도망간 제자들을 찾아갑니다.

제자들을 찾아 가니까 제자들이 밤새도록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고 있는 것입니다.

헛수고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이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내리라고 합니다.

그러자 그물에 고기가 가득하게 잡혔습니다.

큰 물고기가 153마리나 됩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서 밤새 허탕을 친 제자들을 위하여 조반을 해서 먹이십니다.

숯불에 떡과 고기를 구워서 먹이십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이러한 일들은 모두가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 영적 의미를 찾아봅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영이십니다.

그러니 육적으로는 이해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영이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몸 없는 유령(귀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창조에 속한 몸을 가지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역사 속에 가두어지지 않고 창조 세계에 속한 몸을 부활의 몸 또는 영의 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영을 몸이 없는 유령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그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영 개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영이라는 말은 역사에 속한 몸의 반대인 묵시에 속한 몸을 말합니다.

역사에 속한 몸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습니다.

이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태어난 몸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을 입고 있는 예수님도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몸이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그리고 부활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는 묵시의 몸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이걸 영의 몸이라고 합니다.

 

이게 창조 세계의 몸입니다.

창조 세계에도 몸이 있습니다.

천국은 영의 몸으로 살아가는 곳입니다.

 

삼층천을 다녀온 바울은 땅의 몸인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면 하늘로부터 오는 몸을 덧입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죽음을 슬퍼하지 말라고 합니다.

죽음은 몸 바꿔치기 당하는 것이므로 기쁘고 감사한 일인 것입니다.

 

창조 세계의 몸은 역사에 가두어지지 않고 역사를 초월하면서 넘나들어요.

시간과 공간에 가두어지지 않아요.

이게 부활의 몸이고 영의 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이 부활 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하시는 일들은 모두가 부활의 세계에 속한 영적인 일들이 되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창조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가지고 설명을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지금 고기를 잡지요.

역사에서는 물고기 잡는 것이 맞아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 물고기를 하나의 “은물(시청각교제)”로 사용하여서 제자들이 앞으로 예수님을 대신하여서 이 역사 속에서 하여야 하는 할 일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은물이란? 유치원 선생님이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사용하는 교제를 말합니다.

 

어린 아이들은 은물을 통해서 실제적 사실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물고기 잡는 것을 은물로 해서 물고기의 실제인 사람을 낚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를 구원하는 일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예수님께서 3년 반 전에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 잡는 베드로를 찾아 가서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많이 잡게 하였습니다.

이 때는 베드로를 부르실 때입니다.

 

예수님은 이 때 베드로에게 너는 앞으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것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그 당시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몰랐습니다.

그 일로 베드로는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다니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많은 일들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들이 하늘에 속한 일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멋진 고백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가 무기력하게 힘 한 번 못 써 보고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베드로는 당황했습니다.

예수님이 힘없이 십자가에 죽는 모습을 본 베드로는 실망을 하고 3년 전에 즉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그 모습으로 다시 되돌아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3년 전 그 자리로 되돌아 온 것입니다.

고기 잡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 그 동안 예수를 따라 다니던 3년이라는 세월은 허비된 세월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어서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던 예수님이 찾아 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어서 이제는 예수님과의 인연은 영영 끝이 날 줄을 알고 있었는데 죽었던 예수님이 살아서 찾아 왔으니 다시 예수님과 관계가 엮이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3년 전에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도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허탕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라고 하여서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어요.

근데 3년 후인 지금 똑 같은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3년 전과 3년 후인 그 사이에 달라진 것은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있는 것입니다.

3년 전과 3년 후라는 중간에 십자가 사건이 샌드위치처럼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3년 전에는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3 년 후에는 “나를 대신해서 가라”고 합니다.

쉬운 말로 3년 동안 가르쳤으니 이제 가서 일하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0장을 봅시다.

 

요 20:19-23절 “이 날 곧 안식 후 첫 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납니다.

그러면서 사명을 줍니다.

어떤 사명인가 하면 아버지가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과 같이 이제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세상에 보낸다고 합니다.

이 말은 너희가 세상에 가서 내가 하던 일을 하라는 뜻입니다.

 

3년 전에는 나를 따르라고 하시던 예수님이 3년 후에는 이제 가라고 합니다.

지금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3년 전에 하신 약속을 이행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3년 전에는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 후 3년이 지난 지금은 진짜 사람을 낚으러 가야 할 때가 되었다고 합니다.

 

고기 잡는 것은 사람을 구원하는 예표적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사람을 잡는 그물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것은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구원하는 일을 하시고자 함입니다.

 

죄인을 무엇으로 구원을 합니까?

십자가 복음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고기를 잡고자 던진 그물은 자연히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바다는 세상이 되고, 고기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떠나서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는데 헛수고만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떠난 상태에서는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찾아 오셔서는 그물이 가득할 정도로 잡았습니다.

 

왜 베드로는 한 마리도 못 잡고 예수님은 가득 잡습니까?

이는 성도의 구원은 베드로가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하신다는 말입니다.

구원하는 일은 예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도구로 사용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 안에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언제 베드로 안으로 들어오십니까?

성령으로 오셔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내가 갔다가 다시 오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을 봅시다.

 

요 14:16-20절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제 내가 떠나 갈 때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근심을 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내가 가면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 준다고 합니다.

다른 보혜사란 성령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도 함께 오신다고 합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세상에 가두어진 육신의 몸을 입고 있던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을 하신 것은 묵시에 속한 몸으로서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몸이 되어서 성령과 함께 오신다는 뜻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이 사실들이 믿어지게 된다고 합니다.

 

이게 언제 일어납니까?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일어납니다.

성령이 임하자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고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자기 안에 오신 것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앉은뱅이는 우리가 고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고쳤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곧 예수님이 베드로 안에서 함께 하여서 고친 것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베드로 속에 예수님이 영으로 오신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제자들은 전도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를 고기 잡는 것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아직까지 성령이 오시기 전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밤이 맞도록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것은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하나도 구원 할 수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표(豫表)적인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실력이 없어서 고기를 못 잡은 것이 아니라 고기는 예수님이 잡으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 안에서 일을 하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떠나 도망을 간 제자들은 밤새도록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고 헛수고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떠난 제자들은 수없이 그물을 내렸지만 번번이 허탕만 치고 만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새벽 미명에 찾아오십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합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물이 가득할 정도로 큰 고기들이 잡혔습니다.

 

참 재미있는 것은 3년 전에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깊은 대로 내려서 고기를 잡았을 때는 그물이 찢어졌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누가복음 5장을 봅시다.

 

눅 5:5-6절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오늘 본문과 동일한 상황입니다.

그 때도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지만 허탕을 쳤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말을 듣고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렸는데 고기가 많아서 그물이 찢어졌습니다.

 

두 그물이 있습니다.

찢어진 그물과 찢어지지 않는 그물입니다.

3년 전에 그물은 찢어졌는데,

3년 후에 그물은 찢어지지 않았습니다.

 

3년 전과 3년 후의 차이가 뭔가요?

3년 전에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이고!

3년 후인 지금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을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는 역사에 가두어 있는 몸이지만,

십자가를 지시고 난 후 부활하신 몸은 역사 바깥에 있는 몸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하늘에 몸입니다.

 

3년 전에는 예수님이 베드로 바깥에 있었습니다.

3년 후에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베드로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잠시 후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난 후에 일어날 일들을 미리 예표(豫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물을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십자가 이전에 그물은 무엇을 말하고, 십자가 이후에 그물은 무엇을 말합니까?

십자가 이전에 그물은 옛 언약인 율법을 말하고,

십자가 이후에 그물은 새 언약인 은혜를 말합니다.

 

옛 언약은 사람을 살릴 수가 없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고기들은 아무리 많아도 죽은 고기들입니다.

그러니 율법은 찢어지는 그물인 것입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찢어지지 않습니다.

 

옛 언약인 율법 신앙은 엄청 고기를 많이 잡아도 그물이 찢어져서 다 빠져 나가지만,

새 언약인 은혜 안에 들어온 고기는 한 마리도 빠져 나가지 못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율법 아래서는 신앙을 내가 지켜야 했지만,

은혜 아래서는 신앙을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피로 제자들과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그 언약을 지켜 내신다는 말입니다.

새 언약이 뭔가요?

자기 백성들의 죄를 예수님이 대신 담당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한다는 말입니다.

새 언약 안에 있는 성도들은 그 구원을 예수님이 지켜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도망친 제자들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새 언약을 제자들에게 적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오신 것은 이제부터 너희들은 내가 지켜낸다는 뜻입니다.

내가 너희들과 하나가 되어서 지켜내겠다는 뜻입니다.

 

너희는 내 손에서 빠져 나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부활 하신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하여서 잡는 고기들은 그물에서 빠져 나가지 못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지켜 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 오셔서 내린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일들이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 실제로 나타납니다.

성령 강림이란? 부활하신 예수님이 성도들 속에 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도들 속에 오시는 것은 하나 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연합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연합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연합을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성도를 지켜 내시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 구원 받은 성도는 예수님이 친 그물 속에 걸려든 고기들입니다.

이 그물은 찢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부활하신 후 예수님이 제자들과 고기를 잡은 것은 잠시 후에 성령이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럼 그물 속에 잡힌 153 마리의 물고기에 대하여 상고해 봅시다.

 

제자들은 밤새도록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내리라고 하여서 잡았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잡았다는 뜻입니다.

 

오른 편이란? 승리를 상징합니다.

즉 “이긴 자”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긴 자입니다.

 

이기신 예수님에게 붙잡혀 있는 자들도 이긴 자가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이긴 자들인가 하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와 사망을 이긴 자들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죄와 사망을 이긴 자들을 배 오른편 물고기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지옥에 갈 염소는 왼편에 세우고 천국에 갈 양들은 오른편에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을 봅시다.

 

마 25:31-41절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 하는 것 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 ~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장차 예수님이 온 세상을 심판 합니다.

그 때 목자가 양을 분별하듯이 양은 오른편에 세우고 염소는 왼편으로 세웁니다.

오른 편에 있는 양들에게는 너희는 창세로부터 아버지로부터 복을 받은 자들이라고 하면서 천국에 가라고 합니다.

반면에 왼편의 염소들에게는 너희는 창세로부터 아버지로부터 저주를 받은 자들이라고 하면서 지옥으로 가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배 오른 편에 던진 그물 속에 들어온 153마리 고기들은 양들처럼 창세로부터 복을 받은 자들인 것입니다.

이들은 아버지가 예비 한 나라인 천국을 유업으로 받게 됩니다.

그러니까 배 오른 편 그물에 잡힌 고기들은 구원 받은 천국 백성들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잡힌 “물고기”를 헬라어로 “익투스”라고 합니다.

 

헬라어 “익투스(IXθUΣ)”라는 말을 영어로 하면 “이크스우스(ichstus)”라고 합니다.

그런데 “익투스”라는 말은 구원 받은 성도들의 신앙고백인 “하나님의 아들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의 머리 글자를 조합하면 “익투스(IXθUΣ)”가 됩니다.

 

I : Iesus (예수스 : 예수)

X : Christus (크리스투스 : 그리스도)

θ : Theos (데오스 : 하나님)

U : Huios (휘오스 : 아들)

Σ : Sojomete (소조메테 : 구원자)

 

참 의미심장하고 재미있지요.

그러니까 그물 속에 잡힌 고기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신앙고백하는 성도들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IXθUΣ(익투스) 즉 ichstus(이크스우스)를 직역하면 “그는 나의 주님이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나의 그리스도입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예수님에 대한 신앙 고백입니다.

도마가 이 고백을 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로마의 박해를 피하여 지하 무덤인 카타콤에서 300년 동안 살아 갈 때 밖에 나가서 성도들을 만나면 서로의 신분을 나타날 때 물고기 표시로 했습니다.

물고기를 그린 것은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라는 고백을 암호로 사용한 것입니다.

이게 “익투스” 라는 물고기 표시입니다.

 

새 언약이라는 그물 속에 들어 온 성도들은 이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들이 누구인가 하면 예수님에 의해서 제자들이 배 오른 편에 던지는 그물에 잡힐 고기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제자들이 예수님에 의하여 잡은 153마리의 고기는 구원 받은 성도들을 총칭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153에 대한 각양의 해석이 있습니다.

주석을 보면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는데 참고적으로 한번 살펴보고 갑시다.

 

어거스틴(Augustine)은 율법을 상징하는 십계명의 10을 구약으로 보았고, 성령을 상징하는 7을 신약으로 보고, 이 둘을 합한 수인 17에 이르기까지 1부터 더해 나가면(1+2+3+4+5...+17) 153이라는 숫자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53이라는 숫자는 신, 구약 모든 시대를 통틀어 하나님의 선택적 은혜를 입어 구원을 얻게 될 신자들의 숫자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알렉산드리아의 시릴(Cyril)이라는 사람은 100을 이방인의 수고, 50을 유대인의 수로 그리고 3을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리키는 수로 본다는 해석을 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100+50+3=153이라는 수가 도출되며 이것은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얻게 됨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또한 히에론(Hieron)이라는 사람은 고대의 동물학자들은 생선을 153종으로 분류했는데 본문의 이 숫자는 인류 전체의 인종(人種)을 상징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갈리리 바다에서 사도들이 던진 그물에 잡힌 153마리 고기들은 온 세계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모두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보입니다.

그 중에서도 저는 그 당시 디베랴 바다에 있는 물고기의 어종(魚種)이 153 종류라고 하는 해석을 따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통해서 장차 온 세상에 흩어져 있는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을 물고기 잡는 것을 가지고 예표적으로 보여 주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디베랴 바다는 온 세상을 축약하고 있는 것이고, 그 바다에서 잡힌 고기는 장차 성령으로 온 세상에서 구원 받을 성도들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 이러한 사건들이 실제로 온 세계에서 일어났습니다.

 

“디베랴”란? “관찰하다” “지킨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디베랴 바다에서 잡힌 고기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아보고 그 믿음을 지키고 산다는 뜻입니다.

 

누가 예수를 관찰하여서 알아보게 합니까?

성령입니다.

그리고 그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를 누가 지키나요?

예수님이 지키십니다.

그러니까 디베랴 바다에서 잡힌 고기들은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 제자들의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을 온 세상의 성도들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예수님을 보고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는 고백은 인간의 육으로는 할 수가 없는 고백입니다.

이건 오직 성령으로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153 마리의 고기는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를 숯불에 구운 생선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숯불에 구운 떡과 생선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숯불이란? 한번 피운 것을 껐다가 다시 피운 불을 말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부활을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의 도가 바로 숯불에 구운 떡인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의 십자가 도인 새 언약을 증거 합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먹인 숯불에 구운 떡은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시는 십자가의 도를 상징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자 제자들이 십자가 도를 증거 합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부활의 도인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먹여주신 숯불에 구운 떡을 먹고서는 부활의 도를 담대히 증거 하였습니다.

 

십자가 도는 죽음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이러한 것을 구약에는 예표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 이스라엘에게 일어난 일들은 신약의 성도들에게 일어날 일의 예표적인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 언제 어느 때 숯불에 떡과 고기를 구워서 먹었는지를 보면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구약에 숯불에 고기 구워 먹은 사건이 언제입니까?

출애굽을 하는 유월절 때였습니다.

 

알다시피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 양의 실체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자기 백성들이 죄와 사망으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죄값을 위하여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구약의 유월절 사건을 실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의 성도들이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받는 것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죽음으로부터 살아난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에 행한 일들이 하나의 예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월절 어린 양의 피는 문에 바르고 그 고기는 숯불에 구워 먹도록 하였습니다.

 

출애굽기 12장을 봅시다.

 

출 12:1-11절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2 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3 너희는 이스라엘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매인이 어린 양을 취할지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되 4 그 어린 양에 대하여 식구가 너무 적으면 그 집의 이웃과 함께 수를 따라서 하나를 취하며 각 사람의 식량을 따라서 너희 어린 양을 계산할 것이며 5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6 이 달 십사일까지 간직하였다가 해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7 양을 먹을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8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9 날로나 물에 삶아서나 먹지 말고 그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10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소화하라 11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킵니다.

출애굽이란? 단순하게 애굽을 떠난다는 의미가 아니라 죽음에서 살아남을 의미합니다.

이게 신약으로 오면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 받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된 것은 출애굽 한 것과 같습니다.

 

출애굽을 언약적인 의미로 보면 율법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을 말합니다.

율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길은 어린 양의 죽음으로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출애굽 때에 어린 양의 피로 살아 난 것은 새 언약 안에서 구원을 받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출애굽을 어떻게 시킵니까?

먼저 어린 양의 피는 문에다 바르게 합니다.

그리고 양 고기는 불에 구워 먹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밤새 양 고기를 숯불에 구워서 먹었습니다.

그리곤 출애굽을 합니다.

 

출애굽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양 고기를 구워 먹인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양 고기를 숯불에 구워서 먹인 것입니다.

무엇하려고 그랬나요?

출애굽 시키기 위하여서입니다.

 

숯불에 구운 양 고기를 먹은 자들은 애굽의 떡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이제 양 고기로 사는 자가 된 것입니다.

어린 양의 희생으로 사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나안에 들어가면 유월절을 절기로 삼아서 대대로 기념토록 하신 것입니다.

 

기념이란?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현재로 실제화 시키는 것입니다.

그럼 유월절을 기념케 한 것은 너희가 사는 것은 어린 양의 희생 때문이라는 것을 항상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숯불에 양고기를 구워서 먹인 자들을 출애굽 시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유월절을 기점으로 새로운 날을 만듭니다.

새로운 날의 시작을 만들었습니다.

그 동안 애굽에서 사용하던 민간력을 버리고 성력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건 출애굽 한 세상은 더 이상 애굽이 아니고 애굽과 단절이 된 새로운 세상이란 말입니다.

이걸 신약식으로 말하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숯불에 구운 떡과 생선을 먹인 것은 새로운 세상으로의 출애굽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조반을 먹인 것입니다.

 

고기를 숯불에 구워서 먹는 것은 날 것으로 먹지 않고 익혀서 먹는다는 것입니다.

날 것은 육이라 할 수 있고,

불에 익혀서 먹는 것은 성령의 감동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불에 익혀서 먹는 곡식도 있습니다.

볶은 곡식입니다.

볶은 곡식이나 숯불에 구운 떡이나 동일합니다.

그럼 누구에게 볶은 곡식을 먹였는지 살펴봅시다.

 

여호수아 5장을 봅시다.

 

수 5:10-12절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 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고 11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 소산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니 12 그 땅 소산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열매를 먹었더라”

 

여호수아가 가나안 전쟁을 하기 전에 길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할례를 행합니다.

그리고 유월절을 지킵니다.

할례란? 옛 사람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할례를 통하여 옛 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유월절은 어린 양의 피로서 죽음에서 살아난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유월절을 기념한다는 것은 “나는 어린 양의 피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신약 식으로 말하면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걸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광야에서 태어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할례를 행합니다.

그리곤 할례 받은 자들에게 유월절을 지키게 합니다.

할례를 받고 유월절에 동참한 백성들에게 볶은 곡식을 먹입니다.

 

그러자 광야 사십 년 동안 먹었던 만나가 그칩니다.

이스라엘은 광야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할례를 받고 유월절을 지키자 만나가 그치고 볶은 곡식을 먹게 됩니다.

 

이제 새로운 양식을 주신 것입니다.

새로운 양식을 준다는 것은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새로운 시대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 가는 동안 두 지도자가 있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입니다.

모세는 출애굽을 시킨 인도자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가나안에 전쟁을 하여 정착을 시킨 인도자입니다.

둘 다 이스라엘을 도운 보혜사입니다.

 

신약에 오면 두 보혜사가 나옵니다.

예수님과 성령입니다.

예수님도 보혜사이고, 성령님도 보혜사입니다.

 

언약의 후손인 이스라엘이 출애굽에서부터 가나안까지는 성도가 세상으로부터 빼내심을 입고 천국에 가는 것의 모형입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구원을 받고 천국을 가는데 두 인도자가 있다는 말이 됩니다.

 

성도를 구원하고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럼 모세처럼 출애굽 시킨 분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구원을 받은 것은 할례를 받은 것과 같습니다.

 

신약에선 할례를 세례라고 하는데 세례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장사 된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죄와 사망으로부터 빼내심을 입었습니다.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빼내심을 입은 자들에게 성령이 오십니다.

성령의 오심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오심과 같습니다.

성령이 오심으로서 우리 안에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천국은 곧 가나안과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여호수아는 곧 신약에서는 성령으로 우리 안에 오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구약 식으로 말하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은 모세와 같고!

성령으로 오신 예수님은 여호수아와 같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전쟁을 할 백성들에게 볶은 곡식을 먹였듯이 부활하신 예수님이 성도들에게 숯불에 구운 떡을 먹이고 있는 것입니다.

볶은 곡식이나 숯불에 구운 떡이나 같은 의미입니다.

영적 의미는 동일합니다.

 

여호수아가 할례 받은 자들에게 볶은 곡식을 먹입니다.

이는 성령으로 거듭난 자라는 뜻입니다.

할례를 받고 유월절을 지키자 양식이 바뀌었다는 것은 이제 다른 인간이란 말입니다.

옛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다.

 

할례 받기 전에는 죄인이었다고 한다면 할례를 받고 난 후는 의인입니다.

할례 받기 전의 사람을 육이라고 한다면 할례를 받고 난 후의 사람은 영에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영에 사람이 먹을 양식이 있다는 말입니다.

영에 사람이 먹을 양식이 바로 볶은 곡식입니다.

 

성도가 먹을 것이 무엇입니까?

말씀입니다.

그럼 볶은 곡식도 말씀이란 말입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성령의 감동으로 주신 말씀입니다.

익히지 않은 날 곡식은 육으로 해석하는 말씀이라고 한다면,

불에 볶은 곡식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깨달아지는 말씀인 것입니다.

 

거듭난 성도는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깨달아지는 말씀을 먹습니다.

이 말씀을 먹어야 가나안 전쟁을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옛 사람이라는 가나안 원주민과 싸울 수 있단 말입니다.

 

볶은 곡식은 누가 먹는다고 했나요?

가나안 전쟁하는 군인이 먹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원주민들을 쫓아내는 전쟁을 하여야 합니다.

 

가나안 전쟁은 신약으로 오면 옛 사람과 싸우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옛 사람과 전쟁을 하십니다.

이를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의 싸움이라고 합니다.

새 언약 안에서의 신앙생활은 영적으로 가나안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가나안 전쟁은 신약으로 오면 성도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 전쟁으로 바뀝니다.

 

두 전쟁이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 안에 있는 율법과 싸우는 전쟁입니다.

둘째는, 우리 안에서 육신의 소욕과 싸우는 전쟁입니다.

 

옛 사람은 법아래서 났기 때문에 율법적 요구를 이루라고 합니다.

이에 성령이 우리 안에서 율법적 요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고 합니다.

마귀는 항상 우리의 행실을 가지고 참소를 합니다.

 

이 때 성령이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마귀의 참소를 막아 줍니다.

이게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 전쟁입니다.

성령이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을 근거로 율법의 참소를 막아줍니다.

 

이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은 새 언약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는 사단의 참소로부터 자유롭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조반(朝飯)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요 21:9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예수님께서 부활을 하시고 난 후 제자들을 찾아 갑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제자들을 찾아가서 숯불에 구운 떡과 고기를 먹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조반이라고 합니다.

 

조반이란? 아침에 먹는 밥이란 말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새로운 세상의 아침을 해서 먹였다는 말입니다.

아침 양식이 뭔고 하니 숯불에 구운 떡입니다.

 

아침이란? 새로운 날의 시작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새로운 날의 시작입니다.

그 시작을 제자들에게 알리고 계신 겁니다.

 

예수님이 몰고 온 나라는 은혜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죄와 사망이라는 법을 깨트린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의 세계를 여신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입니다.

그래서 조반을 먹이시는 겁니다.

새로운 세상의 양식을 먹이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조반을 먹고 난 후 고기 잡던 일을 버리고 예수님의 제자로서 성도를 구원하는 일 속으로 뛰어 들게 됩니다.

본격적으로 예수님의 운명 속으로 들어갑니다.

유대교와 같은 옛 언약에 속한 신앙과 싸움을 하게 됩니다.

영적 가나안 전쟁이 시작이 된 것입니다.

 

영적 가나안 전쟁은 말씀의 전쟁입니다.

율법이냐 은혜냐의 싸움입니다.

옛 언약의 말씀과 새 언약의 말씀이 있습니다.

옛 언약의 말씀을 날 것이라고 한다면, 새 언약의 말씀은 숯불에 구운 떡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서 6장 17절에서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고 했습니다.

 

성령의 검이란? 성령에 감동으로 주신 말씀이란 말입니다.

이는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해석하라는 말씀입니다.

성령께서 해석케 해 주는 말씀이 있다는 말입니다.

 

성령께서 해석케 해 주는 말씀이 있다고 한다면,

반대로 성령의 감동 없이 성경을 해석하는 말씀이 있다는 것이 됩니다.

성령의 감동 없이 하는 해석은 인간 입장에서 해석하는 말씀입니다.

이걸 인본주의 해석이라고 합니다.

 

인본주의 해석은 옛 사람의 해석이고 성령의 감동으로 하는 해석은 새 사람의 해석입니다.

 

두 해석은 극과 극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이단적입니다.

이러면 전쟁이 일어납니다.

 

전쟁을 하려면 말씀이라는 무기가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양식이라고 했으니 볶은 곡식과 같은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옛 사람과의 전쟁을 할 수가 있습니다.

 

무기란? 성령의 감동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새롭게 말씀을 보는 눈을 주십니다.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으로 보는 눈을 줍니다.

성령이 모든 말씀을 새 언약으로 해석케 해 주십니다.

 

새 언약으로 해석한다 함은 예수님의 십자가로부터 말씀을 해석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준으로 새로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기존에 알고 있던 옛 언약식으로 해석하면 죄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고 나면 옛 언약식 해석과 새 언약식 해석 간에 충돌하는 가나안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7장을 보면 이 세상에는 아론의 반차로 온 제사장과, 멜기세덱의 반차로 온 제사장이 있다고 합니다.

아론의 반차로 온 제사장은 율법 아래서 난 땅에 속하였고, 멜기세덱의 반차로 온 제사장은 은혜로 오신 하늘에 속하였습니다.

 

아론의 반차는 땅에 제사장이고, 멜기세덱의 반차는 하늘에 제사장입니다.

아론의 반차에 속한 자들은 땅 차원인 옛 언약식으로 성경을 해석할 것이고,

멜기세덱의 반차에 속한 자들은 하늘 차원인 새 언약식으로 해석을 합니다.

 

땅 차원이란? 문자적 해석이고,

하늘 차원이란? 영적이라고 합니다.

 

땅 차원이란? 율법으로 해석하는 것이고,

하늘 차원이란? 은혜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럼 옛 언약식 해석과 새 언약식 해석을 알아야겠지요.

 

옛 언약식 해석이 뭔가요?

인간 중심입니다.

옛 언약은 말씀을 지킬 주체를 인간에게 둡니다.

 

말씀을 지킬 주체가 인간이 되면 자연히 인간이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해석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문자적인 해석입니다.

숯불에 구운 떡이 아니고 날 것입니다.

볶은 곡식이 아니고 생 곡식입니다.

 

이러한 성경 해석법이 결국에는 유대교 바리새인들의 신앙을 낳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성령의 감동 없이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했습니다.

문자적 해석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발생 시킨 것입니다.

지금도 문자적 해석을 하게 되면 예수님을 죽이게 됩니다.

 

문자적으로 해석을 하면 말씀을 지킬 주체를 인간에게 둡니다.

문자적인 해석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을 신앙이라고 가르치게 됩니다.

이걸 율법주의라고 합니다.

 

율법주의는 인간이 말씀을 지키면 의로워진다고 합니다.

이건 옛 언약식 해석입니다.

옛 언약 신앙은 인간의 행함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게 이 시대 알미니안 성화주의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알미니안 성화주의는 인간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사상입니다.

알미니안 주의는 신앙의 주체를 인간에 두고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은혜를 주어도 인간이 반응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자유의지를 발동해서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해서 수용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를 신인협동론이라고 합니다.

결국 구원은 인간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결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인본주의라고 합니다.

 

알미니안 주의자들은 하나님 말씀을 지킬 주체를 인간에게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거룩하고 의로워져야 한다고 합니다.

이건 구약식 신앙이고 바리새인들이 추구하는 율법적 신앙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인간이 율법을 지키면 의로워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킨 자신들은 의롭다 하고 율법을 어기고 사는 세리와 창기들은 불의한 자라고 죄인 취급을 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거룩과 비거룩을 율법 지킴에 두었습니다.

율법을 지킨 자는 거룩하고 율법을 지키지 않은 자는 비거룩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바리새인들은 세리와 창기들을 개 같은 자라고 하면서 상종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율법을 안 지키는 자는 저주 받은 자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까지도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켰다는 자기 행함을 의로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율법을 지킨 놈이나 안 지킨 놈이나 몽땅 죄인이라고 합니다.

의는 율법 지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그리스도의 피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이걸 믿음으로 난 의라고 합니다.

 

그러자 율법주의자들이 발끈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나님이 율법을 폼으로 준 줄 아느냐!

지키지도 못할 것을 왜 주었느냐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너희들에게 율법을 준 것은 너희가 율법대로 살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하여 주신 것이라고 합니다.

너희를 죄 아래 가두기 위하여 율법을 준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지킨 자가 의로운 자가 아니라,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의로운 자라고 합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을 주신 의도를 잘못 짚은 겁니다.

얼굴에 더러운 것이 묻었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거울을 주었는데,

바리새인들은 거울로 화장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율법을 준 것은 너는 저주 받을 죄인이라는 것을 알려주려고 주신 것인데,

율법주의자들은 도리어 그걸 지켜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감추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속에는 송장이 썩어 냄새가 풀풀 진동하는데 겉만 뻔지르르 치장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걸 회칠한 무덤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을 외식이라고 합니다.

외식은 속이는 것입니다.

자신도 속고 남도 속이는 것입니다.

외식은 사기 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들의 실상을 확~ 까발리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숯불에 구운 떡과 같은 성령에 감동으로 성경을 보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유대교 율법주의자들의 신앙이 허구라는 것으로 까발린 것입니다.

여기에 걸려든 사람이 바울입니다.

 

바울은 스스로가 율법에 특심하고 흠이 없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 자기가 자랑하던 율법적 조건들은 모두가 배설물과 같다는 것을 알고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에 눈에 비늘이 떨어 졌습니다.

눈에 비늘이 떨어지고 난 후로는 모든 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숯불에 구운 떡을 먹게 된 것입니다.

 

숯불에 구운 떡과 같은 성령의 감동으로 깨닫는 말씀은 새 언약으로 해석합니다.

새 언약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율법을 완성하셨다는 것으로 해석한다는 말입니다.

쉬운 말로 예수님이 율법을 다 지키셨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은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라고 했습니다.

 

갈 3:23-25절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夢學)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 아래 있었습니다.

믿음이 오고 나서는 우리가 율법에서 해방이 되었습니다.

믿음을 의인화 하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에 매여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오시고 난 후에는 율법에서 해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을 예수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길잡이라고 정의한 것입니다.

 

율법을 졸졸 따라 가면 예수님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율법을 바르게 지킨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율법에 요구를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요구가 뭡니까?

누구든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다 죽인다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대신하여서 십자가에서 죽은 것입니다.

 

알다시피 하나님 말씀은 죄인은 지켜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이 자기가 어떤 주제인지를 모릅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지키겠다고 나대는 것입니다.

 

만약에 인간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가 있다면 예수님이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가 있다면 그건 의인이지 죄인이 아닙니다.

의인은 구원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의 의가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바리새인들이 여기에 걸려 든 겁니다.

자신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죄인은 율법도 모르는 세리와 창기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와서 의를 준다고 해도 거절한 것입니다.

 

그런 의는 저 세리나 창기들에게나 주라고 비아냥거린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이 그게 아니다!

그건 너희들이 착각한거다!

너희들이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소경이라서 그런다고 합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아니 우리가 이렇게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왜? 소경이라고 하느냐?

소경은 눈 감은 놈이 소경이지!

우리는 소경이 아니라고 바락 바락 우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차라리 너희가 소경이었다면 죄가 없으려니와 눈을 떴다고 하니 죄가 그대로 있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짓을 이 시대 알미니안 성화주의자들이 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을 자기들이 결정을 하겠다고 합니다.

은혜 받는 것을 자기들의 의지적 결단으로 주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치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같이 조금 착하게 산 것을 가지고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말씀 몇 자락 지킨 것을 가지고 의롭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라고 합니다.

네 꼬라지가 어떤지 좀 보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가 성경을 육적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건 불에 익히지 않은 날 음식을 먹은 것입니다.

볶은 곡식을 먹지 못하고 날 음식을 먹으니 소경인 것입니다.

 

곤고한 것도 모르고!

가련한 것도 모르고!

가난한 것도 모르고!

벌거벗은 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성령이 임하자 모든 구약의 말씀을 예수님 이야기로 해석을 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율법이 아니라 믿음이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가 바로 바울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율법에 특심하고 흠이 없는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삼았을까요?

이는 율법의 특심이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을 고발하고자 함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이후에는 율법의 의로는 절대로 구원에 이를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대상이 바로 전에 함께 동문수학하던 율법 아래 있는 자기 동족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차라리 자기의 구원이 잘리더라도 자기 동족들이 다 예수를 믿기 바랐습니다.

 

이러한 외침은 지금도 외쳐지고 있습니다.

누가 외치는가요?

숯불에 구운 떡을 먹은 자들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숯불에 구운 떡으로 조반을 먹은 자들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이라고 외칩니다.

 

볶은 곡식을 누가 먹었느냐 하면 먼 길을 떠나는 나그네가 먹습니다.

 

열왕기상 19장을 봅시다.

 

왕상 19:5-8절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6 본즉 머리 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7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8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천사가 지쳐 있는 엘리야에게 숯불에 구운 떡을 먹입니다.

엘리야는 숯불에 구운 떡을 먹고 사십 주 사십 야를 달려 하나님의 산인 호렙 산으로 갑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승천 합니다.

 

엘리야가 누구입니까?

살아서 승천 한 자입니다.

이는 장차 예수님이 재림 하실 때 살아서 구원 받을 성도들을 예표 하는 것이지만,

광의적으로는 구원 받은 성도가 천국에 가는 것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천사를 통해서 숯불에 구운 떡을 먹이고 천국으로 데려가십니다.

 

천사는 하늘에 속한 자입니다.

하늘에 속한 천사가 엘리야에게 숯불에 구운 떡을 먹인 것은 하늘에 양식을 먹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하늘로 승천을 한 것입니다.

 

우리도 천사가 주는 숯불에 구운 떡을 먹고 그 힘으로 천국에 가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천사와 같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숯불에 구운 떡을 제자들에게 먹인 것은 하늘에 양식을 먹인 것과 같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주신 숯불에 구운 떡을 먹고 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세상사람 아닌 자로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이러한 일들이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제자들은 오순절 성령의 강림하심으로서 세상에서 버림당하는 자리로 떠밀려 들어가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나그네가 됩니다.

 

결국에는 세상에 속한 자들로부터 버림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버림당한 자들을 천국으로 데리고 가십니다.

숯불에 구운 떡을 먹으면 예수님처럼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되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하늘 백성들에게 숯불에 구운 떡을 먹여서 세상을 떠나도록 하십니다.

이처럼 볶은 곡식은 집을 떠나 먼 길을 가야하는 자들이 먹는 음식입니다.

세상을 떠나 하나님 나라로 가는 나그네들이 먹을 음식인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빼내 올 때는 양고기를 숯불에 구워서 먹였습니다.

“여호수아는”,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빼낼 때는 볶은 곡식을 먹였습니다.

“천사가”, 엘리야가 승천하기 전에 숯불에 구운 떡을 먹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에 파송하면서 숯불에 구운 떡을 먹였습니다.

 

이 모두는 영적으로 같은 의미입니다.

 

모세를 통해서 숯불에 구운 고기를 먹은 자들은 출애굽을 하였고,

여호수아를 통해서 숯불에 구운 떡을 먹은 자들은 가나안 전쟁을 하였고,

천사를 통해서 숯불에 구운 떡을 먹은 엘리야는 승천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숯불에 구운 떡을 먹은 제자들도 모두가 복음을 증거하다가 목 베임을 당하고 천국으로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계시록 2장 3장에서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편지합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귀 있는 자들은 들으라고 합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숯불에 구운 떡입니다.

 

이 떡을 먹는 자는 그 안에 영생이 있고,

그 안에 영생이 있는 자는 죽어도 다시 살아납니다.

우린 모두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은 자들입니다.

숯불에 구운 떡을 먹은 자들입니다.

 

이렇게 숯불에 구운 떡을 먹은 자들은 예수님은 자기 양식으로 삼습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심으로 제자들이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잡은 고기를 가지고 오라고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이 잡수실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예수님은 수가 성에서 제자들에게 사마리아 여인을 가지고 말씀 하셨습니다.

내가 먹을 양식은 따로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양식은 자기백성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가성 여인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곤 이는 내 양식이라고 합니다.

지금 제자들이 잡은 고기가 수가성 여인과 같습니다.

 

고기를 영적 의미로 성도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잡은 고기는 바로 수가성 여인과 같이 구원을 받은 성도들인 것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의 양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잡힌 고기를 가지고 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자기 백성들을 추수하기 위함입니다.

추수하여 곡간에 들이고자 하십니다.

누가 추수가 될 곡식인가 하면 제자들이 던진 그물 속에 들어온 고기들입니다.

 

제자들은 숯불에 구운 떡을 먹고 세상에 그물을 던집니다.

그럼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이 잡히게 됩니다.

그물 속에 잡힌 자기 백성들은 제자들이 증거 하는 말씀이 성령의 감동으로 증거가 되는 새 언약의 말씀이라는 것을 압니다.

숯불에 구운 떡으로 먹게 되는 것입니다.

 

우린 제자들이 전하여 준 그 복음을 들었습니다.

제자들이 던진 그물에 잡혔습니다.

그 증거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증거 되는 말씀이 들려진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이 보여진다면 우리는 그물 속에 잡힌 153 마리의 고기들입니다.

예수님이 잡수실 양식입니다.

예수님은 그 고기를 숯불에 구워서 잡수십니다.

 

먹힘 당한 자들은 이제 예수와 한 몸이 되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와 연합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연합케 하신 한 몸은 사람이 나눌 수가 없습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부디 이 비밀이 믿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넉넉히 세상을 이기시기 바랍니다.

 

하루 하루 숯불에 구운 떡을 먹고 이긴 자로 살아가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생래적으로 예수님을 피해 도망을 칠 수 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찾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또한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하신 말씀들을 동일한 성령의 감동으로 들려지고 깨달아지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해에도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시는 숯불에 구운 떡을 먹고 날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세상 것으로부터 출애굽하게 하시고 율법의 참소로부터 해방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어지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 이긴 자가 되어서 안식의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스도 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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